부산남고 럭비부 줄빠따 구타사건~
이 사건의 범인은 바로 나였다.
영도구 주최 구민 마라톤 대회가 열렸었다.
관내 고교.대학.일반인들이 모두 참가할수 있는 대회로서,
태종대 입구에서 영도소방서 밑의 구 영도구청 까지의 단축 마라톤이었는데,
우리 학교도 당연히 참가신청을 하였으며, 부산남고 럭비부 20 여명과 함께 출전한 내가,
럭비부 주장과 함께 입상하는 기염을 토했으니,
나머지 럭비부 애들이 졸지에 작살나는 일이 벌어졌다.
운동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많이 달려야 하는 럭비선수들이
일반학생인 나보다 못했으니, 어찌보면 줄빠따는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입상했던 이유는, 태종대에서 출발하여 한참 힘든 구간인 조선공사 앞을 지날무렵,
조선공사 설계팀에서 근무하던 울 사랑스런 누나가 마침 나를보고 열렬히 응원해준 덕분이었다.
난 고3때인 1981년 초여름,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에 휴학계를 냈다.
부산남고 앞바다인 동삼중리 갯바위에서,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열심히 6개월만 노력하여 복학한후
아버지의 소원을 이뤄드리겠다고 다짐하며 서울법대를 약속드렸다.
이후, 서울과 부산의 한복판에 있는 추풍령의 직지사를 찿았다.
대도시와 떨어진 한적한 절간인줄 알고 찿았었던 사찰은 주말이나 연휴면 인산인해가 따로 없었다.
공부는 뒷전이 되고, 큰스님과 주지스님, 3직스님(총무,교무,재무스님)들께 찬조를 받아,
공양간 마당에 탁구대 설치와 배트민턴 라켓을 비치하여 스님들 운동시켰으며,
저녁이면 골방에서 마음 맞는 젊은 스님들과 짤짤이를 하고,
화투장 두장 쪼으기로 많은돈을 스님들께 상납하였다.
당시 내가 머물던 방은 재무국장스님의 옆방이었는데,
스님께서 나를 아들같이 여기시며, 산해진미 음식재료창고 열쇠와, 돈창고 열쇠를 맡기셨는데,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긴냥이었다.
동전이 발에 밟히는 돈창고에서, 윗옷앞섶에 한가득 가지고 나와 스님들께 도법실습비(?)로 상납하였고,
해인사나 통도사 등에서 오신 객승들의 여비 지출시엔, 평상시의 두 세배 되는돈을 드리곤 하였다.
덕분에 나는, 나중에 전국사찰 유람할때 항상 아는 스님들의 보살핌을 받았었다.
또한, 내가 완전한 성인이 되었을때는 나와함께 유흥업소를 제일 가고싶어들 하였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의 이러한 일탈행위가, 2015년 부처님오신날 전야제에,
불교신자인 나의 술취한 초등 여친으로 부터 "개잡놈" 이란 욕을 듣게 될줄이야 ...
(그친구는 기억도 못한답니다^^*)
각설하고, 공부도 안되는 절생활 틈틈이 나는 서울로 상경하여 동대문 야구장을 찿았으며,
인천의 동산고 야구부도 찿았던적이 있다.
부산남고 명찰을 부산상고로 오인한 동산고 녀석들에게, 스파이로 오인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난 프로야구 태동기엔 프로구장을 찿지 않았다.
대신 고교야구와 대학야구,그리고 실업야구를 보러 다녔으며,
동아대 우완 언더핸드 김재열형이 좋아, 괴정의 동아농대 야구장을 열심히 찿아다녔으며,
동아대 거포 박용성형이 너무 멋져서, 예쁜 우리누나를 소개시켜 줄려고 무진장 쫒아 다닌결과,
동아대 강병철감독님과 함께한 목욕탕에서, 두분의 우람한 나체를 직접 보았으며,
(아마 내가 여자였다면 스토커 소리 들었을거얌^^*)
결국, 이종사촌동생이 부산고 투수라는 말에 더욱 호감이 간, 예쁜 아내와 결혼하였다.
나중에 처남은, 한대화 감독님의 동국대를 졸업하고,
요미우리 시절의 이승엽선수의 트레이너로 몇년간 활약하며,
가끔씩 이승엽선수의 싸인볼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5 부 끝..... 6 부 는 내일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