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글
한민족은 그 연루된 전쟁의 수효와 규모, 그리고 받은 바 피해의 지대함 어느 것에 있어서도 세계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 현대사에만 국한하여도 여러 중요한 전쟁들이 한국을 빗겨간 경우가 거의 없다.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은 한 민족이 그 직접적인 당사자가 되어 치러야 했던 골육상쟁이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한민족은 그 추악한 적대적 대치를 종식시키지 못한 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남북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과 관련하여 우리 민족이 특별하게 보이는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우리 민족이 그렇게 크고 비참한 전쟁들과 폭력들을 여러 번 치렀으면서 그 전쟁과 폭력을 도덕과 종교의 차원에서 치열하게 반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쟁과 폭력을 신앙과 양심의 차원에서 반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의 역사에는 어엿한 반전사상가(反戰思想家) 한 사람이 없으며 반전(反戰)종파 하나가 없었다. 이 나라는 불살생(不殺生)의 불교까지도 정전론(正戰論)적인 호국 불교론으로 그 존재의 가치를 강조해야 했던 나라이다.
이 사실은 전란(戰亂)의 한국 근대사와 그 역사적 궤를 같이 해 온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뼈아픈 반성을 촉구한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회가 영성의 부흥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할지라도 지난날의 살육의 역사와 현대의 적대적인 삶을 회개하지 않고서야 무슨 영적 원천에 기초하여 우리가 그 영성의 부흥을 소망할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 영성의 원천을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 십자가의 사랑과 화평의 복음 말고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예수의 비폭력의 영성말고 우리가 추구할 영성이 어디에 달리 있는가.
전쟁과 관련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윤리 의식은 2001년 초 여호와 증인들을 중심으로 한 양심적 병역 기피자들의 역사와 현황이 보도 매체를 통해 일반에게 알려진 후 본격적으로 촉구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금번에 기독교 공동학회가 그 심포지엄의 주제를 “평화와 전쟁의 신학”으로 선정하는 배경에도 이 같은 사회적 반성이 작용했다고 이해한다. 우리가 한반도의 고유한 정치 군사적 상황에서 살아가면서 전쟁과 평화에 관련된 한국 기독교의 현실과 기독교의 정신적 전통을 함께 살펴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의미있고 필요한 일일 것이다.
기독교의 전쟁과 평화의 사상에 대한 연구로 명성이 높았던 R. H. Bainton은 그의 「Christian Attitude Toward War and Peace - A Historical Survey and Critical Re-evaluation」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윤리관은 역사적으로 평화주의(Pacifism), 정전론주의(Just War Theory)주의, 그리고 십자군주의(The Crusade)의 순서로 나타났으며 중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이 세 가지의 윤리적 입장은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의 외형으로 재현되었다고 하였다. 십자군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중세기 후기에도 기독교의 평화주의가 기독교 소종파들에 의해 다시 나타났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는 정전론주의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재흥하였는가 하면 기독교 인문주의자들 사이에는 기독교의 평화주의적 주장이 다시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런가 하면 종교개혁에 의해 촉발된 종교전쟁 기간에는 위의 세 가지 역사적 입장들이 동시에 재현되었다. 루터파와 영국 국교회(Anglicans)는 정전론을,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는 십자군주의를, 그리고 재세례파와 퀘이커파는 평화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20세기의 미국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재현되었다. 미국의 교회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십자군주의를,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중간시기에는 평화주의를,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정전론주의 쪽에 가까웠다. Roland H. Bainton. Christian Attitudes Toward War and Peace : A Historical Survey and Critical Re-evalotion, (Abingdon Press, 1983), 14, 15.
필자는 한국전쟁과 그 이후로 이어지는 한국의 역사에서도 기독교의 세 가지 역사적 입장들이 재현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우리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도들의 태도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전쟁과 평화의 모든 신학적 전통들을 살필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전쟁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태도를 전체 기독교 역사의 신학적 전통에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과 그 기독교적 비판자들의 신학 전통”은 이 같은 시도의 한 고찰이 될 것이다.
1. 한국의 양심적 참전 거부자들과 그들을 처벌한 한국군대의 법률적 규정
일반적으로 개인의 내면적인 확신에 근거하여 국가사회가 요구하는 전투 행위에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양심적 참전 거부자들(Conscientious Objectors)은 기독교에 있어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양심적 참전 거부자들은 3세기 말의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와 같이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기독교 순교자들이었다. Herbert Musurillo, The Act of the Christian Martyrs〈Oxford, 1972〉, 247, 오만규, 초기 기독교와 로마군대, (한국 신학연구소, 1999), 131
한국에서 양심적 참전반대자(Conscientious Objectors)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네 개의 신앙적 집단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 여호와증인들, 퀘이커교도들, 그리고 그 밖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이중에 퀘이커교도와 일반 개신교신자로서 참전 반대자들이 된 사람은 확인이 어려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의 대표적인 신앙양심적 전쟁반대자들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과 여호와증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와 여호와증인들이 한국에서 양심적 전쟁 반대자들이 되는 방식은 많이 달랐다. 여호와증인들은 “현역 입영 통지서를 받고도 입영하지 않은” 신앙 양심적 병역 기피자들이었던 반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은 현역 입영통지서에 의해 군대에 입대한 후 훈련소에서부터 비무장 훈련을 요구하여 집총 훈련을 거부한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이었다. 따라서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개념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이 포함되지 않으며 원칙적인 관점에서 여호와증인들은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이 아니다. 미국의 선별적 징병제도(Selective Service System)에서 여호와증인들은 “전면적인 군복무 반대자”(Complete Objectors, I-O)로 분류되는 반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은 “비무장 군복무자”(Noncombatants, I-A-O)로 분류된다. Mervin Gingerich, what of Noncombatant Service, A study of Alternatives Facing the Conscientious objector 2nd Edition, (The Mennonite General Committee Akron Pennsylvania, 1949), 7-9.
한국에서 여호와증인들은 오래 전부터 신앙 양심에 기초하여 군대 입영 자체를 기피함으로써 병역을 전면적으로 거부해왔으나 과거 한국의 역사에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병역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이들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1974년 이전까지는 한국의 언론들이 여호와증인 출신의 병역기피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반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은 지원병으로서 병사가 되지는 않으나 국가의 징병 명령에는 순종한다. 안식교인 집총 거부자는 국가의 소집 영장을 받고 입대했으나 신앙 양심에 근거하여 집총 훈련과 집총 복무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군대에서 집총을 거부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안식일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국 역사상 군대에서 군인으로서 신앙양심에 기초하여 무장을 거부한 최초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1974년까지 안식교도들은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신앙적 집총 거부자들로 인식되었다. 훈련소 당국은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훈련소에 입소하는 입대장병들 중에서 “안식교인 나오라”고 공개적으로 호출하여 이들을 다른 훈병들과 분리시켜 별도로 관리하였다.
그런데 1974년 이후부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 대신에 여호와증인들이 한국의 대표적인 신앙적 집총 거부자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훈련소에서는 “안식교인 나오라”는 호출 대신 “여호와증인 나오라”는 특별 호출이 관례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이 한국의 정치 군사적 현실의 가혹함을 견디어내지 못하여 집총 문제가 교단적 관심사로부터 교인의 개인적 신앙 관심사로 후퇴되어 70년대 이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 집총 거부자가 현저히 줄어든 반면 여호와증인들은 오히려 병무청에 의해 강제로 군대에 입영하게 됨으로써 군대에서 집총 훈련 거부로 자신들의 양심적 병역거부 신념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즉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교회의 전통적인 비무장 군복무(Noncombatancy) 원칙에 의해 한국 군대에서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이 되었던 것이지만 여호와증인들은 신앙원칙상 본래부터 양심적 징병기피자 또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었지만 한국의 병무청에 의해 그들이 강제로 군대에 입영하게 됨으로써 군대에서 집총 거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01년 이후 한국 병무청이 더 이상 여호와증인들을 강제로 입영시킬 수 없게 된 이후부터는 그들은 다시 이전의 양심적 징집거부자 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전통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면 한국의 신앙 양심적 징집 거부자들과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은 한국 정부의 어떠한 법률적 규정에 의해 처벌을 받았는가? 대한민국은 헌법 39조 1항의 “모든 국민은 법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는 규정과 병역법 3조 1항의 “대한민국 국민인 남자는 헌법과 이 법의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는 규정에 기초하여 국민징병제를 실시해오고 있다. 또 대한민국 병역법 88조는 “현역 입영 또는 소집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 또는 소집기일부터 다음 각 호의 기간(현역 입영 5일, 공익근무 요원소집 3일, 교육소집 3일, 병력 동원소집, 전시 근로소집 2일)이 경과하여도 입영하지 아니하거나 소집에 불응할 때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하였으며 군형법 44조는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아니한 자는 1) 적전인 경우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2) 전시, 사변 또는 계엄지역인 경우에는 1년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3) 기타의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된다는 것과 양심적 집총 거부자가 되는 것은 그들에게 적용되는 병역법 법규와 그들을 논죄하는 법정과 재판 후에 복역하는 교도소의 다름으로써도 구별되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병역법 88조의 사유에 의해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 민간 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나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은 군형법 44조의 항명죄 사유로 군사법정에서 군형법 44조(1961년 전에는 군형법 제16조)의 “항명죄”로 처벌받아 군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군사재판에서 항명죄로 선고되는 형량이 민간 재판에서 병역 기피죄로 선고되는 형량보다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기 전에도 부대 안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가혹한 기합들을 많이 받았다.
한국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청년들 중에서 병역법 88조의 병역 기피죄로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모두 군대의 소집영장에 응하여 비전투원 훈련(noncombatancy training)을 거쳐 비무장병과에서 군복무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재림청년 집총 거부자들의 상당수는 훈련소와 부대에서 각종 고문과 부대영창의 구금 같은 수많은 가혹 행위들을 겪으면서 비무장으로 군복무를 마쳐야 했는가 하면 또 적지 않은 재림청년 집총 거부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반면 한국의 양심적 전쟁 반대자들 중에서 병역법 88조의 병역 기피자로서 처벌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호와증인들이다. 여호와증인 병역 기피자들은 민간인 신분으로 기소되어 민간재판소에서 재판받고 민간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1974년부터 2001년까지는 병무청이 여호와 증인 병역 기피자들을 민간재판소에 기소하는 대신에 강제로 군대에 입영시켜 군사법정에 세웠기 때문에 재림교인 집총 거부자들이 받는 고초와 동일한 고초를 겪게되었다.
훈련소에서 집총을 거부하여 군형법 44조의 항명죄로 처벌을 받은 재림교인(안식교인)들 중에는 동일한 항명죄로 두 번씩, 세 번씩, 네 번씩 재판을 받고 7년 6월, 또는 7년, 6년, 5년씩 군 형무소에서 복역해야 했던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일부는 신앙 양심에 의한 집총 거부를 항명죄로 처벌받는 처지에 대하여 1965년에 대법원에 항소하였으나 대한민국 대법원은 “피고인은 이 나라의 사회 질서와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군법에 관한 규율을 불이행하거나 문란케 하는 것은 범법자로 유죄가 되는 것인 만큼 본 건을 기각한다”고 하였다. 65년 대법형상 894호에 대한 피의 사건, 1965년 12월 22일, 동아일보, 한국일보.
또 동일한 항명죄로 세 번씩, 네 번씩, 처벌하는 처사에 대한 항소에서도 “집총 군사훈련을 받으라는 명령을 수회 받고도 그때마다 이를 거부한 경우에는 그 명령 횟수만큼 항명죄가 즉시 성립하는 것이지 집총 거부의 의사가 단일한 것이고 계속된 것이며 피해 법익이 동일하다고 하여 수회의 명령거부 행위에 대하여 하나의 항명죄만 성립될 수 없다”고 기각하였다.
원칙적으로 신앙 양심적 징병기피자들이며 현실적으로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이 되어야 했던 여호와 증인들도 1969년과 1985년 그리고 1992년에 대법원에 항소하였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권에 근거한 자신들의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행위는 병역의무를 위반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그들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신앙 양심에 근거하여 개인적으로 거부한 결정은 헌법이 보장하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위의 기각 결정에 있어서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와 입영 거부가 왜 헌법의 보장한 신앙 양심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지를 밝히지도 않았고 신앙 양심의 자유가 어떻게 병역법에 저촉이 되는가 하는 사항과 병역법이 신앙 양심의 자유에 우선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다.
아래에서는 한국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의 역사와 여호와증인 신앙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역사, 그리고 그들의 군복무관 및 국가관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2. 한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
제2차 세계대전 중 학도병이나 징용에 소집될 적령기의 한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이하 재림교도로 표기함)들은 산악 지역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형식을 빌어 병역을 기피하였다. 그 이유의 하나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안식일 신앙 때문 이였으며 다른 하나는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의 신념 때문이었다.
한국 재림교회 청년들이 본격적으로 신앙 양심 때문에 군대에서 고통을 겪기 시작한 것은 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이다. 이 때 한국 재림청년들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미국의 재림청년들이 실천했던 비전투원 군복무(noncombatant service)를 모델로 삼았다. 미국의 재림교인들은 남북전쟁의 시기인 1850년부터 양심적 전쟁 반대자들(conscientious objectors)로 분류되었으며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비전투원의 신분을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국에서만 200여 명의 재림교인 병사들이 집총 거부 때문에 항명죄로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제2차 대전 때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는 재림 청년 병사들이 비전투원의 복무를 주장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미국에서는 미국 정부가 비전투원 군복무와 비전투원 훈련 규정을 마련하여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의 군복무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많은 재림청년 병사들이 위생병을 위시한 비무장 병과에서 복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재림교인 비전투원 군복무자의 모델로 나타났던 사람은 1945년 5월 5일 오끼나와 전투에서 부상당한 다리를 끌면서 75명의 부상병들을 절벽 아래로 후송시킨 공훈 때문에 미국 최고의 군인 훈장인 미국의회 훈장(Congress Medal of Honor)를 수여받은 위생병 데스몬드 티. 도스(Desmond T. Doss)였다. R. G. Davis, Conscientious Cooperator : the Seventh-day Adventists and Military Service, 1860-1945" (Ph.D. dissertation, the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1970), 190-218.
한국의 재림청년 병사들은 모두 한국 군대에서 데스몬드 도스처럼 자기 희생적인 위생병으로 복무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 최초의 한국 재림교인 양심적 집총 거부자는 남한에서가 아니라 북한에서 나오고 있다. 1950년 3월에 평안남도 강서군의 안식교인 청년이 인민군에 징집되었으나 신앙 양심을 내세워 집총을 거부함으로써 귀가 조치되었고 그중 한 명은 6. 25전쟁의 발발과 함께 인민군에 재소집 되어서도 계속적으로 집총을 거부함으로 인민군대는 비무장 병과인 피복창 근무에 배치시켰다. 북한 군부까지도 전쟁초기에는 재림교회의 비무장 비폭력의 신앙양심을 완전히 말살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남한의 첫 번째 양심적 집총 거부자는 1950년 8월에 대구 피난길에서 군대에 징집된 재림교인(안식교인)이었다. 그는 징집된 부대 안에서 집총 훈련을 거부함으로써 9일간 영창에 갇혔다가 다시 교육대로 송출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지휘관의 배려로 연대본부 중대에 배치되어 집총 훈련을 면제받았다. 한국전쟁 초기에 이러한 사례들이 많이 일어났겠지만 1950년대부터 1952년까지 재림청년들이 집총 거부 때문에 박해받은 사례가 교회의 보도 매체에 보고되지 않았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갑작스럽게 발발하면서 교회 본부가 피난함으로써 재림 청년 병사들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앙 양심에 의해 집총을 거부하는 재림교인들의 사례는 1952년부터 증폭하고 있다. 교회본부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교회를 지도하는 업무가 정상화되면서 교인들의 동향뿐만 아니라 교회 청년들의 군복무 상황들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 대한 탄압은 훈련소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며 박해의 양상은 여러 시간에 걸친 무자비한 구타, 한 겨울에 물통에 집어넣기, 총살의 위협, 영창 구금 등이었다. 이로써 재림교인들이 부대에서 심하게 구타를 당하여 의병제대를 하게 되는 사례들이 속출하였다.
신앙 양심으로 집총을 거부하는 재림청년들에게 한국 군대가 실형을 선고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이후이다. 1956년 7월에 예비역 훈련에 소집된 3명의 재림교인이 집총 훈련을 거부하여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70여 일을 복역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집총 훈련을 거부한 재림교인 현역병에게 한국 군대가 실형을 선고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6월 이후이다. 신학교 재학 중에 입대한 두 명의 재림청년이 훈련소에서 집총 훈련을 거부하여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들말고 그 해에 군법회의에 징역형을 선고받은 재림청년이 10명이었다. 그리고 59년부터는 군사법정에서 선고되는 형기가 10개월 또는 1년씩 늘어났다. 그런데 군사혁명 정권이 수립된 후인 1961년부터는 재림교회 집총 거부자들에 대한 군사재판의 형량이 2년, 3년, 5년, 6년 등으로 다양하게 늘어났다. 이들은 대개 감형의 형식으로 2년 정도 복역하고 퇴소와 함께 병역에서 전역되었다. 그러나 1962년부터는 2년, 3년씩 선고된 형량대로 복역하게 한 후 전역시켰다. 그런데 1963년부터는 1차로 10개월, 1년, 2년씩의 형량을 선고하고 징역형에 선고된 양심적 집총 거부자가 그 형량을 복역하면 군부가 그들을 전역시키거나 군부대로 배치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시 훈련소로 돌려 내보냈다. 그리고 그가 또 훈련소에서 집총 훈련을 거부하면 다시 군사재판을 거쳐 형무소로 보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 번씩, 네 번씩 형무소로 보내어져 형무소 생활을 5년씩, 6년 1개월, 7년 6개월씩 감수해야 했던 사람도 6명이 된다. 또 1년 6개월, 3년 6개월로 징역을 선고받아 통합 3년 6개월 이상을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석방된 후에도 군대에서 전역되지 못하고 부대에서 3년을 복무하여 군부대에서 다시 3년을 복무하여 군대에 입대한지 7년이 넘어서야 전역할 수 있었던 재림교인 청년들도 있다.
이렇게 1958년부터 2002년까지 집총 거부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99명이고 이중에 군대에서 집총 거부로 두 번 이상 옥고를 치른 사람이 7명이고 양심적 집총 거부로 두 번씩 세 번씩 군 형무소에서 5년 넘게 복역하여 전역된 후에도 다시 예비군 소집에서 집총을 거부하여 옥고를 치른 사람이 9명이다. 그러나 98명의 숫자가 곧 한국 재림교회 양심적 집총 거부자의 총 수효는 아니다. 58년 이전에는 대부분의 재림교인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이 구타와 영창과 총살의 위협을 견디면서 비무장 군인으로 병역을 마쳤고 그 이후에도 소속 부대장의 도움으로 군 형무소에 보내지지 않고 비무장 병과에서 병역을 마친 재림신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양심적 집총 거부로 옥고를 치른 재림신자들의 대부분은 1958년부터 1975년까지 집중적으로 나타났으며 75년 이후에는 1976년에 1명이며, 1996년에 1명이며, 2002년 3월 29일에 신학교 재학 중 입대한 재림청년 한 명이 집총을 거부하여 군사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현재 복역중이다. 도합 99명이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로 인하여 옥살이를 하였고 그 중에서는 현역과 예비역을 거쳐 다섯 번씩 옥살이를 한 사람도 있다. 이 밖에 군대에서 안식일 준수 때문에 2년 또는 3년씩 옥살이를 한 청년들이 6명이나 된다.
3.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군복무관과 한국 정부와의 관계
한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교회지도부가 피난하였다가 서울로 수복한 직후인 1953년 6월 3일 자로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에게 재림교회의 군복무관을 밝히고 재림청년들이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며 비무장으로 군복무에 종사할 수 있기를 청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1) “비무장 전투원으로 정부에 충성하고자 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입장” (2)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고유한 비무장 비전투원의 신념” (3) “한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군대에 입대하는 재림청년들이 군대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의무대(medical cadet corps) 훈련을 시킬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기를 바람” (4) “안식일 준수를 요청하는 신앙적 입장”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이 '진정서'를 통하여 주장하기를 “생명과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인 재림교도들은 오직 동료 인간을 살해하지 않고 구조하는 방식으로 정부에 충성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재림교회의 비무장 전투원의 입장은 재림교회에게 고유한 신앙 신념으로서 양심적 병역 기피자들이나 비군사주의자들의 입장과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즉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은 군대 복무를 반대하지 않으며 전쟁 반대를 선동하지 않으며 군사적 계획을 방해하거나 군사 조직체에서의 이탈을 권유하지도 않고 군복 착용이나 국기 경례, 군사 명령, 또는 대통령에 대한 서약 같은 일을 거절하도록 권유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재림교회의 비무장 전투원 신념의 요지는 “오직 조물주와 구세주에 대한 충절과 의무뿐이며 이 땅 위에 어떠한 사정도 이 같은 충성과 의무를 변경시키는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재림교회의 비무장 전투원들은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봉사하기 위해서는 정부에 대해서도 최선의 봉사를 해야 되는 줄로 확신하고 있으며 생명의 구원에 이바지하려는 신앙 신조의 범위 안에서 정부에게 최대한의 봉사를 바치고자 한다”고 했다.
즉 “재림교회의 비무장 전투원은 위험한 장소와 때를 기피하는 비겁자가 아니며 평화시에는 정부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국가의 비상 시국에는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 신념에 저촉되지 않는 한 정부와 인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려는 사람들이므로 재림교회 청년들이 군대에 입대할 때 그들이 비무장으로서 인류와 정부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비무장 병과를 적극 배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다음으로 “한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자체의 비용으로 재림교회 청년들에게 재림교회의 고유한 비무장 전투원의 정신과 위생병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기술적 훈련을 시킬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정부에게 요청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의무대 교육의 질적인 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국 정부가 의무관을 파견하여 한국 재림교회의 의무대 교육을 검열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에게는 제칠일 안식일이 종교적 신앙과 의식의 매우 중요한 사항이므로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사람의 생명을 구하거나 고통을 덜어주는 위급한 인도적 업무를 제외한 일상의 군무에서 면제하여 예배와 기도와 성경연구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만규, '한국 재림교도들의 군복무 역사-집총거부와 안식일 준수의 신앙양심'(삼육대학, 선교와 사회문제 연구소, 2002), 266-269.
이 '진정서'의 입장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세계 대총회가 1954년에 채택한 “정부와 전쟁에 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입장(The Relationships of Seventhday Adventists to Civil Government and War)과 같은 취지의 것이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대총회(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기독교는 민간 정부에 대한 충성과 훌륭한 시민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발생한다해도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충성과 책임은 달라지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야 되고 하나님을 첫 번째로 섬겨야 하는 그 의무는 달라지지 않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사람들을 멸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협력하는 정신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대신에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봉사를 제공하신 그들의 신성한 주님의 모본을 따라 비무장 전투원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들과 함께 시민으로서의 의무들을 수용하여 정부에 대하여 충성하고자 하기 때문에 민간 복무이든지 군복무이든지, 전시에나, 평화시나 제복차림으로나 평복차림으로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기여하는 비무장 전투원의 기능으로 국가에 봉사하고자 한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양심적 신념에 어긋나지 않는 기능들로서 봉사할 수 있기만을 요구한다. 오만규. 위의 책, 215.
한국 재림교회는 1956년 12월 10일에 대한민국 국방부에 다시 '진정서'를 제출하여 재림교회의 비전투원(noncombatancy)의 입장이 국민의 병역 의무 자체를 거부하는 이른바 “양심적 참전 반대론자들”(conscientious objectors)의 입장이 아니라 다만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군복무의 의무를 이행하고자 하는 “양심적인 협조자”(conscientious cooperators)의 입장이란 사실을 거듭 강조하면서 “재림교도 군복무자들에게 집총 훈련을 면제하고 비전투 병과에 배치해 줄 것과 군대에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진정하였다. 오만규. 위의 책, 70.
대한민국 정부는 1956년 12월 10일의 한국 재림교회 진정서에 표명된 재림교회의 위와 같은 입장을 이해하고 1957년 4월 3일자로 김용우 국방장관의 특명 “국방 총 제2288호”를 각 군 참모총장에게 하달하여 (1) 재림교인 병무 소집 피교육자에게 매 토요일 예배 행사를 허용하고 필요한 편의를 도모할 것, (2) 재림교인 병사들을 위생병 또는 기타 직접 무기를 휴대치 않는 병과에 가급적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오만규. 위의 책, 70, 278.
앞서 예비역 훈련에 소집되었던 3명의 재림교인이 집총 훈련을 거부하여 3년의 실형에 언도된 사실과 한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대한민국 정부에 재림교인 병사들의 안식일 준수와 비무장 복무를 위해 「진정서」를 제출한 사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이 재림교회의 “진정”을 '국방 총 제2288호' 특명으로 적극 수용한 사실은 한국 언론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앙일간지 대부분이 재림교인들의 신앙 양심적 집총 훈련 거부 사건을 다루었고 한국일보, 서울신문 등은 사설에서까지 이 문제를 취급하였다. 한국일보는 “교리가 헌법보다 중요한가”라는 사설과 “안식교와 병사 특권”이란 논설로 재림교인들의 비전투원 군복무를 특전적 배려로 비판하였고(1957년 3월 8일), 서울신문은 1957년 3월 8일 제3면에서 “괴(怪):집총 거부 진정”이란 표제를 사용하여 “국가보다 교회를 앞세운 안식일교도”라고 재림신도들을 비난하고 다음날에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용감히 총을 들라-해괴스런 안식교도들의 반론”이란 제목의 사설로 재림교회의 비전투원 신념을 극한적으로 비난하였다. 오만규. 위의 책, 71.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한국 기독교의 지성적 여론을 대표했던 신앙학술 잡지 '基督敎 思想'도 1959년 3월 호에서 재림교도들의 신앙 양심적 집총 훈련 거부를 중요한 관심사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감리교 신학교장 홍현설이 “안식교도의 집총 거부 사건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하여 그 당시로서는 놀랍도록 재림교회의 군복무관에 대하여 대단히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안식교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양심적인 반전론자들(conscientious objectors)이 아니고 양심적인 협력자들(conscientious cooperators)이며 애국적인 비전투원인 것뿐”이라 하였다. “그 증거로는 미국에 있는 안식교 경영의 대학들에서도 강력한 의무사관(Medical Cadets) 양성을 실시하고 있으며 지나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무려 12,000명의 안식교도 의무 사관이 전선에서 활약하였다”는 것이다. 홍현설, “안식교도의 집총거부 사건에 대하여”, 기독교 사상, 1959년 3월호, 33.
그는 재림교회의 신앙관과 의무대 훈련(Medical Cadet Corps)에 대해서도 개략적이나마 비교적 정확하고 조리 있게 소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집총 거부와 관련하여 한국 기독교계에 이단 시비에 휘말려 있는 재림교회의 신앙적 진실에 대해서도 비교적 진실하게 소개하였다. “원래 안식교파는 신교 중에서도 보수적인 복음주의 계통에 속하는 교파로서 보수 진영 중에서도 믿음 교리와 생활의 엄격함에 있어서 극단의 보수성을 띠고 있는 교회”라 하였다. “안식일을 고수하며 신구약성서를 자신들의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 기준으로 믿으며 문자적인 해석에 굳게 서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있어서도 모든 근대의 진화론적인 학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명령일하에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죽음의 상태를 지나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인간의 육체가 부활할 것을 믿으며 이 최후의 심판 날에 하나님이 의로운 자에게는 불멸의 영생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불로 인한 멸망을 주시는 것으로 믿는다”고 하였다. 안식교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출현할 것을 믿는 전천년주의자들로서 현재는 하나님의 이 완성의 날을 목전에 두고 있는 긴박한 시대라고 믿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디까지나 긴박하고 공개적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며 자기네들은 이러한 특별한 사실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불러 세운 교회라는 굳은 신념에 서 있다”고 하였다. 홍현설, 위의 책, 33, 34.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안식교도가 사람의 육체의 생명을 살상하는 전쟁을 반대하는 까닭이 성경의 교훈을 따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받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이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취하여 모든 종류의 주류 음료와 끽연을 금하고 그 밖에도 인체에 해로운 모든 종류의 음식을 금하거나 자제하는 정신에 기인하는 것 같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재림교회의 비전투원의 신념을 재림교회의 특별한 십계명 신앙뿐만 아니라 재림교회의 성소교리와 채식신앙, 그리고 음식물을 성별하는 신앙에까지 연결시켰다.
한국 정부는 재림교인들의 특별한 안식일 신앙과 비전투원의 신념을 배려하려는 국방부의 결정이 국민적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였음인지 국방부장관의 특명이 나온 1958년 이후에도 재림교인들이 육군 훈련소에서 집총 훈련 거부로 말미암아 당해야 하는 고통은 크게 경감되지 않았다. 신학교 재학 중 입대한 청년들을 포함한 상당수 청년들이 무자비한 구타로 군 병원에 후송되고 끝내 의병 제대로 조치되는 경우들도 나타났으며 드디어는 군법회의에 처음으로 회부되어 6개월씩 실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국방부장관의 특명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 처하여 육군 훈련소의 재림청년들은 다음의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1) 훈련소와 부대 안에서 상관과 부대원들의 양해를 얻어 비무장과 안식일 준수의 두 신앙원칙을 고수하는 청년들, (2) 비무장의 신념 때문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항명죄 혐의로 징역형에 선고되는 청년들, (3) 비무장을 주장하는 병사들에게 가해지는 박해가 두려워 안식일만 지키고 비무장의 신념을 철회하는 청년들, (4) 안식일을 지키는 일조차 처벌이 두려워 안식일 교인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는 청년들로 나뉘어졌다.
이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한국 재림교회 지도부는 1959년 10월 22일 자로 국방부에 재차 “군복무에 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진정서를 제출하여 (1) 한국 재림교단이 실시하고 있는 의무대 훈련을 국방부가 인정하여 재림청년 군입대자들에게 군 자체의 교육훈련을 면제해 줄 것과 (2) 재림교인 병사들은 모두 한국 군대의 의무병과에 배치해 줄 것과 (3) 1957년 4월 3일 자에 각국 참모총장에게 하달한 국방 제2288호, 즉 재림교인 병무 소집 피교육자에게 매 토요일 예배 행사를 허용하고 필요한 편의를 도모할 것과 재림교인 병사들을 위생병과 또는 기타 직접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 병과에 가급적 배치하라고 한 명령에 의거하는 부칙을 설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진정서에 대하여 김정렬 국방장관은 “1959년 11월 10일 자 국방 병 제6221호”로 한국 재림교회연합회장에게 회신하였는데 (1) 한국 재림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의무대 훈련으로 군 자체 교육을 대신하기는 아직 시기상조이다. (2) 재림교인 군인을 의무병과에 배치하는 문제는 현재 196명의 재림교인 군인 중 63명이 의무 계통에 배치되어 있는 실정이므로 점차적으로 그 비율이 증가될 것이다. (3) 국방 총 제2288호에 의거한 부칙 설정은 앞으로 계속 연구할 과제로 삼겠다고 하였다. 오만규. 위의 책, 79, 81.
대한민국 국방부가 재림청년들을 가급적 의무병과 등 인도적 성격의 근무처에 배치하려는 의도는 1959년 육군본부를 통해 전국 각 부대에 소속되어있는 재림청년들 중 약 80명을 차출하여 부산 제3육군 병원으로 전속시켜 이들 대부분을 “대한 척추 특수 용사 희망회”로 배치하여 척추 상의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국방부는 부산의 제3육군 병원 이외에도 마산 육군병원, 대구 116육군병원, 온양 109육군병원 등과 일선 부대의 의무중대 등에 재림청년 군인들을 배치하였다. “대한 척추 특수 용사 희망회” 등 특수 병원을 위시한 각급 육군병원에 배치된 재림 청년들은 주로 집총 거부 때문에 육군 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군복무에 종사하고 있던 청년들이었다. 1960년대에 한국 재림교회 청년 입대자들은 1957년 4월 3일에 김용우 국방장관이 재림교인 병사들의 비무장 군복무와 안식일 준수 신앙을 배려하라고 명령한 “국방 총 제2288호 명령”과 한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의무대 훈련을 이수한 “의무대원증”과 대한 적십자가 발행한 “응급구호 자격증”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인등록증”과 함께 휴대하고 훈련소로 들어갔다. 훈련소 당국은 이러한 증명서들에 근거하여 재림청년 병사들을 가급적 비무장 관련인 의무병과 등에 배치했다.
한국 재림교회와 한국 군부의 이와 같은 상호 협조 관계가 파기된 것은 군사 정권 수립이후이다. 특히 1970년대 후 남북 관계의 악화에 따라 한국 군부가 군종병들과 위생병들에게까지 집총 복무를 강요하여 사실상 한국군대에 비무장 병과가 사라지게 됨으로써 재림교회의 이른바 “양심적 협력자”(Conscientious Objectors)로서의 입지 곧 신앙 양심을 지키면서 병역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입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 재림교회 청년들 중 양심적 집총 거부자는 1976년 이후 거의 끊어지고 오직 1996년에 동해안에 출몰한 무장공비 소탕전에 차출된 재림청년 병사 한 명이 집총과 실탄 사격을 거부하여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02년 3월에 신학교 재학 중 군대에 입대한 재림교회 청년이 집총 훈련을 거부하여 군사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4. 여호와증인회의 신앙 양심적 징병 거부자들.
여호와증인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정신에 기초하여 병역을 거부하였다. 이들의 신앙 양심적 병역거부 역사가 시작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이고 본격화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20여 명의 여호와증인들이 병역 거부로 군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독일에서만 6,262명이 체포되고 2,074명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영국에서도 양심적 전쟁 거부자들을 배려하는 병역법이 존재했으나 상당수 여호와증인들이 그 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처벌을 받았으며 미국에서는 상당수 여호와증인들이 대체복무제의 도움을 받았으나 4,000여 명이 병역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며 최고 5년 형에 선고된 자도 있었다. 여호와증인 - 하나님의 왕국 선포자, (서울, 사단법인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1995년), 194.
한국의 여호와증인들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여호와 증인의 신앙 양심에 의해 병역을 기피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간 법정에서 6개월, 8개월, 10개월, 1년 등 다양한 형기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들 중에는 양심적 병역 기피로 인한 실형을 복역하여 형무소를 출소한 후에도 2차에 걸쳐 병역에 재소집되어 4년 동안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도 있었다. 재림교인 병사가 동일한 집총 거부 행위로 3번, 4번씩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경우와 같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1974년부터는 여호와 증인들의 신앙적 병역 거부 형태가 달라지게 되었다. 1974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군대 입영을 100%로 달성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병무청에 의한 강제 징집 행위가 강화되었다. 여호와증인의 집회 장소인 왕국 회관을 병무청 직원들이 포위하여 35세 이하의 남자들 중 군대를 다녀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예비군으로 강제 연행하고 나이가 더 어리게 보이는 청년들은 군부대로 강제로 연행하여 그곳에서 영장을 발부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군대에 강제 입영된 여호와증인들은 군대 안에서 더 이상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집총 훈련을 거부하여 항명죄로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여호와증인들 중에는 징병 거부로 인한 실형을 복역하고 형무소를 출소할 때 교도소에 대기하고 있던 병무청 직원들에 의해 징집 또는 예비군 소집영장을 제시하여 다시 재판과 투옥의 과정을 반복해야 했던 사례들도 발생하였다. 어느 여호와증인의 경우에는 병역법 위반으로 두 차례에 걸쳐 10개월씩 민간 형무소에서 복역을 했는데 두 번째 형기를 마치고 퇴소하는 날 형무소 현장에서 군대로 강제 입영되어 다시 집총 거부 때문에 항명죄로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리하여 최고 4년 1개월 여를 형무소에서 보낸 여호와증인이 있다.
80년대에는 군대에 강제로 입영된 여호와증인들의 집총 거부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2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90년대 초반에 발생했던 특기사항으로는 여호와증인을 경합범으로 만든 일이다. 즉 훈련소 당국이 군대에 강제 입영시킨 여호와증인 신자들에게 1차로 군복과 함께 총을 지급하였을 때 여호와증인 병사가 군복과 무기의 접수를 거절하고 다음 날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면 군대 사법 당국은 이것을 두 번의 집총 거부로 간주하여 경합범 또는 병합범으로 가중 처벌하였다. 1994년부터 군형법 44조 항명죄의 최고 형량을 3년으로 늘렸는데 그 입법 취지가 특정 종교의 병역 거부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었다. 지기룡, “우리나라에서 여호와증인 신자의 양심적 거부에 대하여”, 양심, 종교의 자유와 군대체복무 를 위한 토론회, 13.
유죄 판결을 받은 여호와 증인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1992년에 220명이었고 이러한 숫자는 해마다 늘어나 2000년 한해 동안 64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2002년 5월 현재 약 1,600명의 여호와증인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교도소에 구속되어 있으며 한국 전쟁 이래 양심적 병역 거부로 처벌받은 여호와증인들의 수효는 1만여 명에 달한다. 사단법인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본부 제공, 2002년 6월 25일. Suk tae Lee, "Present situation of conscientious objection in Korea"International Religious Liberty Association 5th world congress, Manila, June, 10-13 2002, p. 3.
5. 여호와증인들의 군복무관과 정부관
여호와증인들은 세상 나라들이 수행하는 모든 형태의 전쟁들을 양심에서 반대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그러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다. 즉 그들은 군사적인 기구에서든지 민간시설에서든지 군복무에 해당하는 일체의 복무를 거부한다. 마태복음 26:52에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칼의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마태복음 5:43, 44에서 사랑의 율법을 세웠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사랑의 법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증인들은 모두 첫째로 기독교 목사들이며 둘째로 양심적인 참전 반대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원칙으로 훈련된 양심은 인간의 최대 재산으로서 사람이 마땅히 순종해야 하는데 이 양심이 또한 여호와증인들에게 양심적 참전 반대를 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Statement from General Council for Jehovah's Witnesses, 1953, 「Words of Conscience - Religious Statement on Conscientious Objection」 ed., by Shawn perry, (National Interreligious Service Board for Conscientious Objectors, 1981), 61 : 더 자세한 것은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Life Everlasting in Freedom of the Sons of God.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1966. Chapters 10, 11에서 참고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전쟁에 대해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중립적”이라고 말한다. 세상 나라들의 전쟁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여호와증인들의 “중립적”인 태도는 세상 나라들에 대한 그들의 “중립적” 태도에 기인한다. 그들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 마치 배가 바다에 떠 있으나 바다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위의 책, 61.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 파벌들의 투쟁에서 어느 한 편을 편들 수 있겠는가?” 하고 주장한다. 「여호와증인」, 하나님의 왕국 선포자, 193.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저항하거나 또는 국가의 무장을 반대하고 방해하여 국가들의 전쟁 의도를 저지시키려는 평화주의자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세상 나라들의 전쟁은 전적으로 이 세상 나라들의 관심사이고 그 백성들의 몫일 뿐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증인들은 이 세상 나라들의 전쟁에 참여하기를 양심에서 거부하지만 모든 성격의 전쟁을 반대하는 의미의 평화주의를 전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아마겟돈 전쟁을 통하여 악한 세상과 악한 세력을 멸망시키실 것을 전파하고 있다. 1950년 8월 4일에 세계 67개국을 대표하는 81,766명의 여호와증인들은 양키 스타디움에 회집하여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극단적인 평화주의는 우리들의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는 평화주의자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전사들이다. 다만 육신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령관이며 여호와의 가장 위대한 전사이다”. 'Words of Conscience - Religious Statement on Conscientious Objection' , 62, 63.
여호와증인들은 1925년이래 '파수대(Watch Tower)' 잡지를 통해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조직 곧 여호와의 조직과 사단의 조직이 있을 뿐이라고 가르쳐 왔다. 위의 책, 676. 그리고 그들은 “모든 인간 정부가 하나님의 왕국에 의해 제거될 것이라”고 가르쳐 왔다. 위의 책, 195.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들이 세우는 나라, 곧 세상 열강의 어느 하나를 지칭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나라”(다니엘서 2:44)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이러한 주장과 국기에 대한 경례의 거부로 말미암아 많은 나라들에서 숱한 박해를 당했다. 비애국적이라거나 또는 체제전복의 위험이 있다고 위험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장하기를 “지상 어느 곳에서도 여호와 증인이 정치적인 전복활동에 연루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들이 국가의 상징물에 경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국가에 대해 특별히 불충성스럽기 때문이 아니고 자신들이 살고있는 모든 나라들에게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애국적인 의식을 방해하지 않으며 국기를 모욕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반정부주의자들이 아니라 마태복음 4:10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고자” 할 뿐이라는 것이다. 위의 책, 672
그러나 동시에 주장하기를 참 그리스도인은 로마서 13:7의 가르침을 따라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성심껏 인정하고 하늘의 요구와 명령에 상충되지 않는 한 법과 그 요구 조건에 최대로 순종하여 현시대에 법을 가장 잘 준수하는 사람들 가운데 속해야 한다고 한다. 국기경례를 거부하는 이유는 십계명의 우상숭배 금지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위의 책, 197.
6. 한국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에게 나타난 기독교적 쟁점들과 그 신학적 전통
한국의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과 관련된 기독교적 쟁점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의 신앙양심이며, 둘째는 그들의 분리주의적 정부관이며, 셋째는 그들의 비폭력주의다.
이 중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첫 번째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신앙적인 과제는 이들의 신앙 양심이다. 왜냐하면 기독교회 자체가 신앙 양심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 신앙 양심만큼 더 중요한 사안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 양심의 유린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가장 잘 이해해야 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집총 거부나 병역 기피와 관련된 신앙 양심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1948년에 제정된 미국의 “일반적 군사 훈련 및 병역법”(Universal Military Training and Service Acts)은 “종교상의 신념”을 정의하여 “어떤 인간 관계에서 비롯되는 의무보다 우월한 의무를 수반하지만, 사회적 또는 철학적 견해 또는 단순한 개인의 도덕규범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와 관련된 개인의 신념” 62 Star 613〈1948〉 이라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상의 신념”을 “신앙 양심”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 양심은 유일신교적(唯一神敎的) 언약 양심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양심, 한 분뿐이신 절대적인 하나님에게 구속된 양심,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언약적 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군대의 언약, 군대의 명령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람이 군인이 되는 서약(誓約)을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하나님과의 서약”에 대립시켰다. 오만규, 초기 기독교와 로마군대, 46. 테르툴리아누스는 또 군대를 “빛의 병영”인 교회와 대립 관계에 있는 “어둠의 병영”으로까지 표현하면서 한 영혼이 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앙 양심 또는 다른 종파의 신앙 양심을 존중한다고 할 때 그것은 마땅히 우리가 그 같은 신앙 양심에 의해 발로된 그들의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특이하게 표현되는 특정인의 신앙 양심의 발로에 대해 개인적으로 전혀 동의할 수 없을 때에도 그 신앙 양심을 존중하여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윤리이다. 우리는 이 같은 신앙 양심의 성서적 사례로서 나실인의 서약을 생각할 수 있다. 나실인의 신앙 양심은 보편적인 도덕성이나 규범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적인 신앙 양심으로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손의 경우, 그 같은 신앙 양심이 훼손되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한 인간 영혼의 전체적인 황폐가 초래되었다. 이 황폐된 인간을 바로 세우는 길은 그 파괴되고 유린된 신앙 양심의 회복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는 이처럼 한 인간의 신앙 양심을 유린함으로써 그 인간 전체를 파괴시키는 사회를 두려워한다. 현대의 선진국가들이 국가가 헌법적 권리로 시민들을 위해 보호해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신앙 양심의 자유를 내세우게 된 것도 역사적 반성을 통하여 바로 이 같은 인식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파 개신 교단이 양심적 참전 반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을 반대하는 성명에는 개인의 신앙 양심을 존중하는 이 같은 신앙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청교도의 후예들인 한국의 개신 교회는 “성령이 제네바의 회의에 의해 조종된다고 하는 주장은 참란된 것이라”고 했던 C. P. Gooch, English Democratics Ideas in the Seventeenth Century, (Cambridge Univ. Press. 1967), 102, 오만규, 청교도 혁명과 종교자유 (한국 신학연구소, 1999년), 141.
청교도 혁명기의 주장을 주목해야 한다. 청교도의 신앙 양심을 대변했다고 할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는 “신앙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교리는 평화의 왕인 그리스도 교회에 명백히 위배한다”고 주장하였다. Bloudy Teneat of Persecution(1644), 247, 오만규, 청교도 혁명과 종교자유, 148.
한국의 보수파 개신 교회가 소수파 혹은 개인의 신앙 양심에 대하여 배려가 부족한 것은 그들이 아직도 역사적으로 신앙 양심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한국의 이교적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한글사전이나 철학사전에서도 신앙 양심이란 항목의 단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 사람들은 신앙 양심이란 용어 자체를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의 사회적 가치와 여론을 주도했던 한국의 유학자들에게도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넘어서는 신앙 양심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한국의 역사에 일신교적 신앙전통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 양심의 결핍이나 신앙 양심의 천박성은 곧 영혼성의 결핍이나 영혼성의 천박성을 뜻한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유교 문화권에 어거스틴의 참회록이나 톨스토이의 참회록 같은 심오한 고백 문학이 부재하고 있는 현상은 유교문화권의 얕은 영혼성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유교 문화권에 인권의 정신적 기초가 빈약한 이유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의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과 관련된 중요한 기독교적 쟁점의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의 분리주의적 국가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초기 기독교인들은 애국적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교의 일치주의자들이 아니라 정.교의 불일치주의 곧 정․교의 분리주의자들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160-220)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평화의 목적상) 이 세상의 가이사를 필요로 할 터이나 어떤 황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또 어떤 황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Apol., 21, 24. 오만규, 초기 기독교와 로마군대, 52.
그리스도교 신앙과 세상의 분리를 이보다도 더 극명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애국적 메시야가 아니었으며, 정교일치주의자가 아니었다. 하나님과 가이사의 분리주의자였다.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시민 윤리를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초기 교부의 한 사람은 오리게네스(Origenes)였을 것이다. 그 점은 그가 포르피리오스(Porphyrios)와 더불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기독교 비판자의 한 사람인 켈수스(Celsus)를 비판한 그의 '켈수스 반박론'(Contra Celsus)에 잘 나타나 있다. 오리게네스는 켈수스의 대표적인 반 기독교적 저술인 '진리 담론'(The True Discourse: αληθησ λογοσ)이 이미 75년 전에 출판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의 책이 계속적으로 끼치고 있는 반 기독교적 영향력 때문에 기원 246-248년에 '켈수스 반박론'(Contra Celsus)을 집필하였다. 물론 오리게네스가 켈수스의 '진리담론'에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켈수스가 기독교인들의 시민의식의 결핍을 비판한 부분이었다. 켈수스는 양쪽으로 기독교의 반체제적 성격을 비판하였다. 책의 앞 부분에서는 기독교가 호전적이고 반역적인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인 후예이기 때문에 기독교도들은 항상 로마 제국에 대해 모반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공격하였는데 그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반대로 기독교인들의 정교분리적 태도와 비폭력적인 태도를 구실 삼아 기독교를 반체제적이고 반문명적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분리주의적 세계관을 문명사회의 기생충적 사고방식으로 비판하였다. Cels., Ⅷ, 68.
그런데 초기 기독교의 국가관과 관련하여 오리게네스의 호교적 변증이 주목되어야 하는 까닭의 하나는 오리게네스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켈수스의 분리주의적, 비일치주의적 혐의를 전혀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비일치주의자가 되어야하는 사유를 열렬히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수호해야 할 국토와 국가와 조상의 유업과 신전과 재산과 국민의 안녕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도 치러야 했고 관리가 되어 죄인들을 처형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대 이스라엘 국가 같은 국가의 존속이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정치적인 국가로 종속하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군사적인 보호의 책임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스라엘의 국가적 존재는 그 성전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Ibid., Ⅴ, 33.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력으로서 자신들의 국가적 존립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제거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력으로 복음을 전파하지도 않았으며 고대적인 의미의 국가를 세우지도 않았다. Ibid., Ⅱ, 30.
그런데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로 이 같은 현상은 역전되고 말았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지켜야 할 국가와 국토와 재산과 신전이 생긴 것이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분리주의적 신앙전통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나 종교개혁의 우파에 속하는 다수파 개혁 신앙들이 지상 국가들의 국교로 채택되면서 개신 교회들도 정교일치주의의 카톨릭 전통으로 회귀하였고 오직 좌파계열의 소종파적 개혁신앙들만이 초대교회의 분리주의적 신앙전통을 계승하였다. 이들이 곧 재세례파의 후예들이다. 한국의 다수파 개신 교회는 신약 성경이 정교일치주의적 신앙을 가르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며 한국이 장로교회 국가도 아니고 감리교회 국가도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물론 근대의 시민 국가 개념을 고대의 왕정국가와 무조건 동일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나 신약성경 종교의 초국가적 관점은 어느 시대에도 무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다수파 개신교회의 대 국민 성명서나 대 정부 성명서에 특정 신앙 집단을 지칭하여 이단 운운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을 특정 개신교 국교 국가로 착각하고 있다는 의혹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국가관을 생각할 때 기독교의 십계명에 국가에 대한 충성 사항이 없다는 사실을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다. 십계명에 국가에 대한 충성 사항이 없다는 사실은 공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교훈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중요한 차별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십계명으로 표명되는 기독교는 그 신도들에게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을 가르치고 있을 뿐 차별적인 종족 사랑이나 차별적인 국가 사랑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애국적인 국민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편적 선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이 자신들의 분리주의적 신념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반국가 또는 반정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심지어 그들을 반애국주의자라 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세계주의적, 개방적 애국주의자 또는 제한적 애국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정부나 국가의 권위나 명령보다도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이 더 위에 있다는 것일 뿐 그리고 어떤 국가 사회이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존중할 때 번영할 것이라고 주장할 뿐 그들이 정부와 국가의 권위를 가볍게 보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경우에는 신앙 양심이 허락하는 한 병역의 의무 등 시민의 모든 의무에 협력하겠다는 “양심적 병역 협력자”(Conscientious Cooperators)로 자처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애국적 집총 거부주의자란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과 관련된 세 번째의 기독교적 쟁점은 그들의 비폭력적 평화주의이다. 한국의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은 자신들의 신앙 양심에 기초하여 집총과 전투를 거부했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전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마음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것으로까지 확대 해석했으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의 비폭력 무저항의 정신을 구현하였다. 그는 부당하게 체포되는 순간에도 폭력에 의한 보호를 거부하였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생애의 모본에 있어서 폭력에 대한 거부만큼 기본적인 것이 또 없다고 할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복음의 “새 율법은 옛 율법에 나타난 칼과 창의 잔인성을 온유로 바꾸어 놓았으며 원수와 경쟁자를 응징하는 전쟁의 행위를 땅을 경작하는 평화의 행위로 바꾸어 놓았다”고 하였다. Tud., 3., 원문과 번역, 오만규, 초기 기독교와 로마군대, 위의 책, 46. 그가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은 “전쟁하는 일을 배우지 않는 사람들이며” Mars., ⅲ, 21, , “살해하기보다는 살해당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들이었다. Apol., 37, 5.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주장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군사적․전투적 정욕을 부채질하지만 우리는 단 한 가지의 도구 곧 평화의 언어를 사용하며 이로써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였다. Paedag., Ⅰ, ⅻ, 98, 63. 그는 전쟁 준비와 전쟁 음악을 정죄하였으며 기독교회를 “무기 없는 군대”, “피 흘리지 않는 군대”, “분노하지 않는 군대”로 비유하였다. Paedag., Ⅰ, ⅻ, 99 ; Quis dives salvetur, 34, 64.
그러나 초기 기독교 교부 중에 그리스도인의 비폭력 문제를 그리스도의 시민적 책임과 관련하여 가장 깊이 있게 검토했던 사람은 역시 오리게네스였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기독교의 적대자 켈수스가 그리스도인들의 비폭력적․반군사적 태도를 그리스도인들의 공직(公職)기피 사상과 함께 맹렬히 규탄하였기 때문이다. 켈수스는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처럼 처신한다면 이 땅의 정부를 무법자와 난폭한 야만인들의 손으로부터 보호하여” “문화와 철학의 종식을 막아내야 할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된다”고 비판했다. 켈수스의 이 같은 규탄에서 우리는 2002년 3월 5일에 발표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군 선교부의 성명을 들을 수 있다. 총회 군 선교부는 그 성명서에서 주장하기를 “여호와증인회가 집총 거부를 내세워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에게 배신하는 행위이고”, “남북이 대치된 현 상황에서 병역 거부자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국민으로서 마땅히 준수해야 하는 국방의 의무를 기피하게 하고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고 했던 것이다. 2002년 3월 9일, 기독공보, 2357호.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가 대체복무제 입법을 반대하는 성명서에서도 “의원 입법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는 대체복무제가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고 경계했다. 한기총 홍보국, cckpr@cck.or.kr.
오리게네스의 '켈수스 반박론'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전 반대자들이라는 켈수스의 주장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라고 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비록 황제가 요구한다 해도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켈수스의 비판이 근거 없는 무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언해주고 있다. Cels., Ⅷ, 73, 72.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에 불참한다는 켈수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처럼 비폭력과 무저항의 사람으로 처신한다면 로마제국과 함께 문명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는 켈수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켈수스에게 대답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처럼 된다면 야만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가장 순종적이고 가장 온유한 백성들로 변화될 터이므로 황제가 홀로 외롭게 되어 권리가 무법자의 손에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켈수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Cels., Ⅷ, 68, 72.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국가를 위해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라는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의 사제들이 신(神)들에게 깨끗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자신들의 손을 인간의 피로부터 깨끗이 보호해야 했으므로 전쟁이 발발해도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는 만인사제(萬人司祭)의 원칙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제와 종들로서 다른 사람들이 전투에 종사하는 동안에 의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과 의로운 황제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 일이냐”고 주장했다. “우리는 평화를 교란하는 악마를 우리의 기도로 무찌르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쾌락을 멸시하도록 가르쳐 쾌락으로 인한 탈선을 예방하고 명상과 자기 부정을 실천함으로써 공공 봉사의 몫을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누구보다 더 훌륭하게 황제를 위해 전투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비록 황제가 요구한다해도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오직 신앙의 군대를 조직해 싸울 뿐이라” 하였다. 그는 여기서 이른바 그리스도인의 “대체복무”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Cels., Ⅷ, 73, 74.
오리게네스의 주장에서 “의로운 전쟁”(혹은 정당한 전쟁: Just War)이란 용어가 등장하고 있지만 오리게네스의 “의로운 전쟁”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비스리스도인 황제와 비기독교인 병사들에게 해당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전쟁 불참 윤리와 이교도의 의로운 전쟁 수행이라는 오리게네스의 이중윤리(二重倫理)는 뒤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윤리와 통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 윤리를 구별하는 이중 윤리로 변화한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황제가 요구한다해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초기의 텍스트가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 전쟁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비록 황제가 요구한다 해도 전쟁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로 고쳐 읽어지게 되는 것이다. 오만규, 위의 책, 79.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말미암아 교회와 국가의 일치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이 같은 이중적 신앙 윤리에 기초하여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특별히 비폭력 비무장의 신앙 윤리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비추어 한국 정부와 한국 기독교회가 함께 상기해야 할 하나의 특별한 사실이 있다. 1958년 이후 군대에서 신앙 양심적 집총 거부로 말미암아 군사재판에서 항명죄로 처벌받은 상당수의 재림청년들은 앞으로 성직자가 될 신학교 재학생이었거나 신학교 졸업생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세의 서양 제국과 근세의 서구 국가들이 신학생들과 성직자들에게 예외적으로 배려했던 비폭력 비무장의 처우를 한국 정부는 재림교회 신학생들과 신학교 졸업생들에게 허용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비폭력 비군사주의 신념은 백부장 마리누스, 징집병 막시밀리아누스, 퇴역병 티파시수스와 율리우스 같은 그리스도인 병사 순교자들의 목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오만규, 위의 책, 119-164. 295년 3월 1일에 순교한 누미디아의 그리스도인 징집병 막시밀리아누스는 징집에 따른 신체검사 때문에 법정에 압송되었으나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므로 싸울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무기를 버린 죄목으로 순교하였다. 퇴역병으로 군대에 재소집 되었던 티파시우스는 상관이 던져주는 무기들을 그리스도교의 신앙 때문에 받지 않음으로써 순교했다. 폭력과 군사주의를 정죄하는 입장은 초기 기독교의 공식적 입장이었다. 3세기 초 교회법인 「사도들의 전통」은 그리스도인 병사가 사람을 살해하지 말라는 교회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출교 해야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군대에 들어가는 자는 출교해야 한다고 하였다. Hippolytus, Apostolic Tradition, ⅩⅥ ; 오만규, 83참조.
그러나 교회의 이 같은 공식적 입장은 그 이후 크게 완화되어갔다. 병역기간 중에 개종한 사병은 군대를 떠나지 않아도 되었으며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군대에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은 군인이 된 일로 교회로부터 정죄되지 않았다. 또 군인이 된다는 뜻의 “militare"와 전투에 참가한다는 뜻의 “bellare”가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즉 평화시에는 기독교인이 군인이 될 수 있지만 전쟁시에 실지로 전투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를 교회법 제3조 ; 오만규, 208. 교회는 엘비라 공의회(306년), 아를 공의회(314년),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통해 초기 기독교의 엄격한 반군사적 입장을 차례로 완화시켰던 것이다. 즉 초기 그리스도교의 비폭력, 반군사주의적 전통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과 더불어 포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들은 동시에 교회와 로마제국의 일치화를 반영하는 조치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시작된 기독교와 제국의 병합, 십자가와 군대의 병합, 폭력과 거룩함의 병합 과정은 5세기 초의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하여 이교의 제의(祭儀)에 오염된 이교도들이 로마제국의 군복무에서 배제되고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로마군대의 병사가 될 수 있게 됨으로써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십자가와 로마군대의, 폭력과 거룩함의 이 같은 통합을 신학적으로 합리화한 신학자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 밀란의 암브로시우스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였으며 십자가와 군사주의의 통합을 합리화한 이들의 전쟁론은 정전론(Just War Theory)이란 이름으로 중세와 근대에 걸쳐 국교적 기독교의 전쟁관을 대표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공식적인 전쟁관이 정전론으로 표현되고 있었던 중세 시대에도 초기 기독교의 비폭력적 반군사주의적 신념이 완전히 종식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평화”(Pax Dei)와 “하나님의 휴전”(Treuga Dei)같은 11세기 기독교 평화운동도 그 한 예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봉건 제후들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교회와 수도원과 순례객과 성직자와 여자와 상인과 농민들과 그들의 가축이나 재산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경우에는 파문에 처하게 된다고 했던 교회의 포고문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휴전”은 “하나님의 평화”의 연장선에서 제도화한 것으로서 1085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인데 특별한 성일들과 특별한 평일들에 교회가 전투를 중지시킨 조치를 뜻한다. Guy of Anjou Bishop of Puy, "The Peace of God", 그리고 the Diocese of celogne, "the Truce of God", April 20, 1083, Albert Marin. ed., War and Christian Conscience : From Augustine to Martine Luther King, Jr, 75-78, 오만규 역, 전쟁과 그리스도인 양심(성광문화사, 1982), 92-95.
또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중세시대에도 비폭력적 생활이 의무화되었다. 중세의 대표적인 민중적 성자인 투르의 마르틴(St. Martin of Tours)은 위대한 양심적 참전 거부자였으며 중세기 갈리아 지방에서 민중들이 가장 성대하게 기념했던 절기 행사도 성 마르틴이 전쟁이 임박하자 “나는 그리스도의 군인이기 때문에 싸울 수 없다” Sulpicius Severus, Vita Martini, Ⅰ, ⅰ-ⅴ. Migne, PL, LX, 227-30. 고 하면서 군복무를 거부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앗시스의 프란시스에 의해 시작된 프란시스 수도회 운동이나 프랑스의 발도파(Waldenses) 신앙운동, 풀로아의 요아킴을 추종하는 요아킴 주의자들과 청빈 생활의 형제단(Brothers of the Poor Life)에 의해서도 초기 기독교의 비폭력주의는 꾸준히 계승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시대의 재세례파들에 의해 이 전통이 더욱 본격적으로 계승되었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 에라스무스(Erasmus), 존 콜렛(John Colet) 등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윤리에 신약성경의 원칙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전쟁과 살상 행위를 정죄하였다. 그 중에서도 에라스무스는「평화의 탄식」(Querela Pacis, 1517),'기독교인 왕공의 교육'(Institutio Principis, 1516), '둘체 벨룸 이넥스페르티스'(Dulce bellum inexpertis : 전쟁은 전쟁을 모르는 이에게 달콤하다, 1514) 같은 방대한 전쟁 비판서들을 저술하였다. 그는 그의 유명한 '우신예찬'(In Praise of Folly)에서도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예수님의 충고(눅 22:36)를 빙자하여 그리스도인의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했던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였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 하신 예수님의 충고의 뜻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 충고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검을 들고 전쟁에 나가 싸우라고 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은 신약 성경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을 사라”고 충고한 직후에 어떻게 예수님이 스승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빼어든 제자 베드로에게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Stanley Windass, Christianity versus violence : A Social and Historical study of War and Christianity, (London : Sheed and Ward, 1964), 12에서 인용.
중세기 동안에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던 초기 기독교 비폭력주의는 종교개혁 시대에 복음적 재세례파에 의해 가장 확실하게 계승되었다. 복음적 재세례파(Evangelical Anabaptists)라 함은 이들을 토마스 뮌쩌(Thomas Münzer)같은 혁명적 재세례파(Revolutionary Anabaptists)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복음주의적 재세례파는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는 정신에서 신자들에게 국가의 공직에서 철저하게 이탈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철저한 평화사상에 기초하여 전쟁은 물론 사형제도까지 배척하였다. 이와 같이 비정치적이었으며 비폭력적인 평화주의자들이었던 재세례파가 여러 국가 정부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카톨릭, 루터파, 칼빈파 같은 국가 교회로부터 까지 박해를 받아야했던 것은 그들이 박해자들에 의해 혁명적인 재세례파와 혼동된 면도 있었지만 지상국가와 국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적대적 또는 초월주의적 태도가 기성 사회조직의 해체론을 부추길 위험성에 대해 국가정부들과 기성 교회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복음적 재세례파들은 그들의 신조에 반대되는 일체의 권위와 질서를 부정하였으며 그 같은 자신들의 신앙행위에 따른 모든 형벌을 무저항으로 감수하였다. Willam R. Estep. The Anabaptist story, (Broadman Press, Nashvill, Tennessee), 1963, 174-196.
이 복음적 재세례파의 가르침은 화란에까지 전파되어 멘노 시몬즈(Menno Simons, 1496-1561)가 복음적 재세례파에 합류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멘노파(Mennonites)가 발생하게 되었다. 멘노 시몬즈는 「거짓 비난에 대한 답변」(1552)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인 멘노파 교도들(Mennonites)의 철저한 비폭력주의를 밝혔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그 정부를 사탄의 왕국으로 생각하고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성경에는 평화와 투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서로 대립하는 두 임금과 두 왕국이 나타나고 있다. 한 임금은 평화의 왕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다른 임금은 투쟁과 살육의 왕 사탄이다. 평화의 왕 그리스도의 사자들은 모두 평화의 사자들이며 그의 말씀은 평화의 말씀이며 그의 몸은 평화의 몸이며 그의 자녀들은 평화의 씨이며 그의 유산과 상급은 평화의 유산과 평화의 상급이다. 그리스도의 왕국과 그의 통치에는 오직 평화가 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오직 한가지는 하나님의 명예와 찬양과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이다. 그들은 오직 평화만을 구하고 바라며 오직 이 평화를 위하여 나라도, 재물도, 생명도,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려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임금 곧 어둠의 왕이요 적그리스도인 사탄은 모든 투쟁과 소요와 유혈의 주체이다. 맹렬한 분노와 살인이 사탄의 본성이며 정책이다. 그의 왕국과 그의 조직과 그의 교회가 명령하는 계명과 가르침은 모두가 분노와 살인의 본성에 기초한 것들이다. Reply to False Accusation, in the Complete Works of Menno Simons, Trans. Leonard Verdum (Scottdale, penn : The Herald Press, 1956)중에서
멘노파 신도들은 각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박해를 당했다. 대부분이 처형을 당했고 소수의 무리들이 폴란드, 헝가리,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지로 추방되거나 도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도피한 나라들에서 평화주의, 무저항주의, 대체복무주의, 양심적 집총 거부주의의 기초를 쌓는 하나의 정신적 전통으로 발전했다. 멘노파 등 복음적 재세례파는 신약성경의 원칙에 기초하여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추구했다. 교회의 부당한 권위와 신앙의 형식주의를 배격하였다.
재세례파의 정교분리적 비군사주의는 후터파 교도들(Hutterites)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멘노파와 마찬가지로 재세례파의 한 갈래인 후터파는 1536년 인스부르크에서 순교한 재세례파 지도자 제이콥 후터(Jacob Hutter)의 이름을 취한 무리들로서 모라비아와 헝가리에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급기야는 영국과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의 신학은 멘노파 신학과 근본적으로 같았으나 경제적인 관점과 공동체의 조직에 있어서 서로 차이가 있었다. 멘노파 신자들은 주로 소읍들에 근거를 둔 기능공들과 상인집단이었던 반면에 후터파 신도들은 재산의 공동 소유에 기초한 농업공동 사회를 형성하여 살았는데 이러한 생활방식은 18세기에 이르러 대부분 포기된 반면 미국에서는 오히려 멘노파 신도들에 의해 후터파의 생활 방식이 계승되고 있다. W. R. Estep, The Anabaptist story, 87-89 ; Albert Marrin, War and Christian Conscience, 186.
평화의 원칙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후터파 신도들이 멘노파 신도들보다 좀 더 철저했다. 17세기에 이으러 일부 멘노파 신도들 중에는 상인들을 대포로 무장시키고 있는 화란의 동인도 회사의 주식을 살 만큼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나타났던 반면에 후터파 신도들은 세상 일로 다투게 될 소지를 철저히 회피했다. 미국의 퀘이커 교도들이 전쟁 세금의 지불을 거부하기 2세기 전인 1545년에 후터파 신앙집단은 피터 리드만(Peter Ridemann)의 신앙고백서 속에서 전쟁에 사용되는 세금 납세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장인(匠人)들에게 전쟁에 사용될 수 있는 일체의 도구를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The Account of our Religion, Doctrine and Faith, given by Peter Ridemann of Brothers whom men call Hutterians, (N. Y. ; The Plow Publishing House, 1970)에서
17세기 영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비국교적, 비폭력적 평화주의 신앙인 들이 나타났다.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의 지도 하에 일어난 퀘이커들(Quakers)이 그들이다. 이들의 신앙은 “내적인 빛”(A light within 또는 Inner light)의 교리에 집약되어 있다. 하워드 H. 브린트 지음, 함석헌 옮김, 퀘이커 삼백년, 제2장 “속의 빛의 체험”. 원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서 항상 그들과 함께 있다고 하는 철저한 확신과 체험적 인식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퀘이커들도 내적인 빛의 자각에 의해 초기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부활시키려 했다. 함석헌, 43.
그런데 퀘이커들의 “내적인 빛”을 인간의 양심과 같은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퀘이커들에게 양심은 빛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고 다만 사람들에게 주어진 빛의 분량일 뿐이다. 빛은 양심을 비쳐주고 불순한 양심을 변화시켜 빛과 같은 순수한 모습을 만들려고 애쓴다. 따라서 양심은 한편으로 그것을 비쳐주는 빛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사회 환경의 힘에 의해 형성되고 자각되기도 하고 사회환경에 의해 타협하거나 더러워지기 쉬운 그런 것이다. 절대적인 빛에 비해 양심은 상대적인 것이다. 양심은 점진적으로 빛으로 가까이 접근하면서 자라는 것이다. 함석헌, 61.
반면에 내적인 빛은 인간의 생태적인 양심에 그리스도의 빛을 주고 그것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것으로 만든다. |
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퍼놓고 인쇄해서 봐야겠네요
정말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안식일 교인들의 집총거부와 실태 그리고 변천사를 새롭게 이해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날 안식일교가 많이 세속화되었고 하느님의 인정보다는 세상의 인정을 받을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안식일 교인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만 이 글을 읽는 과정에서 좀 더 그러한 요소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긴 글 올리시느라~~^^** 두고두고 보고, 공부 하겠샴~~ 근데 저의 경험 은~~ 흠~~ 차후에 피력~
음.. 올려주신 글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묻고싶은것이 한가지 있군요. 6항에서 진하게 표현된 부분중에 "특이하게 표현되는 특정인의 신앙양심의 발로에 대해 개인적으로 전혀 동의할수 없을때에도 그 신앙양심을 존중하여야 하는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윤리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요.. 과연 증인들은 자신들이 전혀 동의할수 없을때에도 그 신앙양심을 존중하시는지 묻고싶습니다.
일단 저는 현재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해 있지 않습니다/ 증인의 경우 그리스도인 중립의 원칙을 들어 불간섭하는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세상으로 부터 분리되어야 하며 오직 여호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뿐이므로/ 다른 종교와의 교류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일은 없습니다/ 증인들 자신은 유일한 진리가 자신들의 조직안에만 있다고 믿으며 다른 종교에 무관심합니다/ 다만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문제에 있어 법원에 세차례나 항소한 경우가 있는 걸로 봐서 타 종교나 사상으로 인한 양심의 자유는 동일하게 존중한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