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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 개방의 진정성이 있기는 한가
우리는 반c 가까이 부부다.
아내에게 오기(傲氣)가 조금 있기 바라지만 보이지 않고 암(癌) 투병 중에도 대청봉
(설악산)을 넘은 저력 또는 지구력은 인정하지만 강산이 2번 바뀐 세월 전의 일이다.
게다가, 잊혀지지 않는 하산 때의 악몽도 있다.
둘레길을 시작한 초기에는 우이령이 아득해 보였고 우이령은 커녕 몇구간이나 걷다
말지가 관심거리라 여겼는데 늙은 아내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루를 쉬고 북한산길과 도봉산길이 공유하는 우이령(쇠귀고개) 길에 들어섰으니.
우이령!
예전에는 우이동(서울)과 장흥면 교현리(경기도양주시)를 왕래하는 지름길 잿마루
였고 이 길은 곡식과 생필품을 운반하는 우마길이었다.
그 때는 우이동도 양주땅(해등촌면)이었으니까 한 고을 안의 내왕이었지만.
양쪽 거민들의 애환이 뿌려져 있을 이 길이 6. 25 동란때에는 피난길이기도 했다.
(한북정맥의 우이령은 동남으로 약간 비켜 있다)
그러나 소위 1. 21사태가 발생한 1968년부터 2009년 7월까지 41년이라는 긴긴 세월
시민의 접근을 원천 봉쇄한 동토(凍土)에 다름 아니었다.
한 쪽(우이동)은 전투경찰대가, 또 한 쪽(장흥면)은 군부대가 길을 막고 있었으니까.
미군공병부대에 의해서 차량 통행이 가능하도록(군 작전도로) 업그레이드 되었으나
그림의 떡(畵中之餠)이 되고 말았던 길이다.
그 고갯길이 2009년에 각종 꼬리표를 달고 재개방되었다.
신분증을 지참한 예약자에 한해서 입장 허용.
예약 정원은 양방 각 500명(일반400명, 경로100명).
일반은 오직 인터넷 예약, 경로와 장애인 및 외국인은 인터넷과 전화 예약 가능.
입산(14시)과 하산(16시) 시간 엄수 등.
전경대건물과 초소들,고갯마루의 대전차 장애물, 군부대와 사격장의 요란한 총성이
여전하지만 부대이동 없이도 가능한 개방을 왜 그 오랜 세월 막아왔을까.
대표적인 개방의 장애물로 '우이령보존회'라는 시민단체를 꼽는다.
그들의 주장에 일리(一理)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의 주장이 많은 경우 양눈의 균형 잡힌 시각에서 나오지 않은 것,
외눈박이적 사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자연 생태계 보전이 우수한 지역"에 대한 보통시민의 사랑이
말이 없다 해서 자기네의 직업적 사랑만 못하다고 판단하는가.
개방은 했지만 규제가 많아 불편과 불평도 많은 길이었다.
시간 규제 외에는 전적으로 부당하고 불필요한 조건들이다.
오랜 세월 금단의 길이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몰려들었을 뿐 이미 한가로워졌다.
입산자가 평일에는 양방 합해서 100명도 못되는데 예약이 왜 필요한가.
입산자수를 제한하기 위한 예약이라면 예약확인증 또는 예약번호로 족한 것 아닌가.
입산을 막는 상장능선과 오봉능선의 중간 허리를 타고 한북정맥 종주자를 비롯하여
많은 등산객이 무시로 드나드는 지역인데 신분확인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대체, 시민을 위한 개방인가 민원을 잠재우기 위한 개방 제스처(gesture)인가.
우이령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인가 입산을 막기 위한 까탈인가.
후자가 아니라면 입산 예약자가 턱없이 미달하는데도 예약하지 않았다 해서, 또는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되돌려 보낼 수 없지 않은가.
서울시민이라면 쉬이 다음 기회가 있겠으나 먼 지방에서 모처럼 왔다가 문전박대로
돌아서기 일쑤였다.
우이령을 개방하겠다는 진정성이 있기는 한가.
차존인비(車尊人卑)의 도로를 많이 걸으면 차량에 의한 치명적 사고의 확률도 높다.
2010년 봄, 나는 신안(전남) 제도 ~ 목포 ~ 무안 ~ 함평에서 영광 ~ 고창을 향하여
걷다가 또 위험천만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다시 공차증(恐車症)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차 없는 길(산티아고 순례길)로 가기 직전 한동안 우이령에서 살 듯 했으며
공원의 기간직원(공익요원, 임시직원 제외)과 시비하는 것이 일과였다.
신분증은 물론 예약이 필요없는 때가 오겠지만 당장 괄목할만한 효과를 얻어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돌아왔을 때 예약 미달 인원에 한하여 당일 현장에서 신분 확인
후 입산을 허용하고 있었으니까.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IT강국이다.
양쪽 들머리에 실시간 입산가능 인원 알림판을 세우면 훌륭한 대민서비스가 되련만
결코 어렵지도, 비용이 많이 들지도 않는 일을 왜 하지 않을까.
대민 봉사라는 기본정신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우이령길에 무수히 나붙어 있는 '사전예약구간' 안내표지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비문법적이며 불필요한 겹말에 대해서.
역전 앞, 초가 집 등이 뒷 겹말이라면 사전 예약은 앞 겹말이다.
예약이란 미리, 사전에 하는 약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전의 반대말 사후를 대입해 보면 잘못된 표현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사후 예약도 있는가.
'사전 예약' 은 마지막 종점, 모든 만물, 다시 재발, 무수히 많은 등 무수한 겹말들 중
하나로 '사전'을 지워야 하건만 아직껏 그대로다.
우이령과 오봉
버스길 우이동 종점 ~ 탐방지원센터의 포장 비탈길이 되레 부담스러울 뿐 우이령은
고개도 아닌 듯 가볍게 보는 아내.
전에, 우이령 탐방을 권하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으며 엄두도 내지 못하던 아내가
요 며칠 사이에 이렇게 많이 변했다.
전경대 건물을 지나 굽이굽이 돌며 완만하게 오르는 흙길.
2002년 한북정맥을 마칠 때 상장봉 능선을 타기 위해 내려왔다가 여기 전경대 초소
에서 늙은이에게 베푸는 특혜(?)로 입구까지 그들의 안내를 받아야 했었다.
늙은이가 아니었더라면 봉변당할 뻔 했다.
전투경찰대의 삼엄한 경비가 과연 필요했던 것인가.
경계를 풀고 개방했다 해서 나쁘게 달라진 것 없지 않은가.
그늘 있는 노변에는 간간이 붙박이 간이의자들이 있고 작은 꽃밭도 조성되어 있고
앉아 쉬기 편한 넓적바위도 놓여 았다.
나는 내가 종종 앉아 쉬던 바위 위에 돌무더기를 쌓는 이들과 목하 전쟁중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길가 곳곳에 널려있는 이 돌더미들을 해체하며 걷고 있으니까.
투석전의 시대도,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부상 당할 위험이 있는 길도, 돌무더기신
(서낭신)에 매달리는 시절도 아니건만 왜 돌 쌓기에 집착하는 이들이 많은지.
고요하고 한가로운 이 숲길에는 맨발로 걷기를 권하는 구간도 있다.
자연의 품이 얼마나 여유롭고 살가운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최고로 질
좋은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각기 다른 체험을 선사하는 4계절이잖은가.
왕복 6km에 달하는 행복 카펫(carpet)이 깔려 있다.
쇠귀고개(牛耳嶺) 정상에 대전차 장애물이 있다.
"냉전시대의 아픔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라고?
화해 무드(mood)가 무르익어 그런 유물로 간주하게 된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전쟁
모드(mode)로 변환되고 있는가.
미군 공병대의 초라한(시멘트) 작전도로 개설 기념비와 대조를 이룬다.
길을 닦지 않았다면 이런 장애물도 필요 없었을 것이니까.
고갯마루 양주시 쪽에 전경초소가 있고 그 옆에 작은 벙커가 있었다.
젊은이 2명이 매일 올라와 어떤 공사를 꽤 오래 하더니 어느날 '안보체험관' 이라는
안내판이 입구에 붙었다.
안보의식의 체험은 커녕 실내에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지하, 지상 각1층 건물의 문이
얼마동안은 열리더니 굳게 잠긴채 여러 해가 지나고 있다.
공사와 관리의 주체가 어디길래 국민의 혈세를 이렇게 낭비하고 있는지.
우이령(牛耳嶺)은 '소의 귀'고개다.
소의 귀는 '쇠귀'로 줄여 쓰고 읽는다.
소귀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비문법적이라는 말이다.
오래 되어 희미해진 글씨가 선명하게 바뀌었는데 여전히 소귀고개다.
우리 글(말)에 대한 북한산국립공원 관계자들의 인식과 수준이 궁금하다.
워낙 특이하여 멀리서도 눈에 잘 잡히다가 우이령을 오르는 동안에 가려졌던 오봉이
고갯마루 부터는 한동안 지호지간이다.
북한산 야외무대를 지나 오봉전망대는 오봉 관찰의 명소다.
한 마을의 다섯 총각이 고을 원(員)의 예쁜 외동딸과 결혼하기 위해 한 시합을 했다.
상장능선(오봉과 마주하고 있는 육모정~솔고개의 능선)에서 맞은 편 오봉쪽에 바위
던지기였는데 그들이 던진 바위들이 현재의 기묘한 다섯 봉의 형국을 이루었다나.
이 5봉이 오늘에는 암벽 마니아들의 기막힌 놀이터가 될 줄이야.
우이령길에서 생각나는 사람, 육군 대령
우이천이 우이령 남쪽에서 발원한다면 북 우이령에서 시작하는 맑디맑은 물줄기는
교현교(장흥면 교현리) 밑까지 우이령길과 거의 동행한다.
이후에는 공릉천을 타고 파주시 자유로 송촌대교 밑 한강으로 긴 여행을 한다.
이 우이령에서 1km 밑, 오봉 직하 계곡에 육군유격훈련장이 있고 계곡 건너 된비알
(시멘트 차로)을 오르면 관음봉 허리에 석굴암(石窟庵)이 있다.
관음봉은 오봉의 끝봉 바로 아래(서남)에 있으며 석굴암 측에서는 도봉산 오봉이라
하지 않고 오봉산 관음봉 밑 석굴암이라 한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말기 공민왕(31대)의 왕사(王師)였던
나옹선사(懶翁/1320~1376)가 3년간 수행정진했다는 사찰이다.
민족동란 때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휴전 직후부터 복원불사가 진행되어 석굴을
비롯해 대웅전, 범종각, 삼성각, 봉향각 요사채 등 대사찰의 규모를 갖추었다.
매년 10월에는 단풍음악제가 열리는데 차량 홍수를 이룬다.(메뉴 '우리의 이야기들'
411번글 참조)
유격훈련장 ~ 교현 우이령 탐방지원센터 2km는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대로다.
훈련과 관련된 군의 지프와 대형 트럭과 버스, 석굴암 신도들의 각종 차량 등.
이 길을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때 내게는 한 룰이 절로 만들어졌다.
이 2km구간에서 차량(차종 불문)과의 조우를 3대로 제한하며 4번째 차량을 만나는
순간 나는 교현쪽을 향한 진행방향을 180도 돌려버리는.
매연을 흡입하기 위해 우이령길을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간에서는 4번째 차량을 만나기 전에 반환점인 교현 지원센터에 당도하기 위해
특히 빨리 걸었지만 중도 포기의 경우도 종종 있었다.
비내리는 어느날 한낮에 한 육군 대령과 2km를 걸었다.
차로 부대와 훈련장을 왕래하면서 나를 자주 보았다는 인근 부대의 장인 듯한 그는
나와 이야기 하기 위해 하차하고 차(지프)를 먼저 보냈다.
교현리까지 가기도 하지만 돌아서는 곳이 일정치 않은 늙은이를 괴이쩍게 보았는가.
심오한 까닭이라도 있을 것으로 짚고 있었던가.
지극히 단순하고 유치스런 내 행동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것인가.
군인 생활도 단조롭기는 나와 다를 것 없을 것이다.
병영은 생각도 생활도 단순해야 편한 곳이다.
나이든 아이로 머물러 있어야 원만하지만 별을 따지 못하면 아무리 원만해도 제복을
벗어야 하는 마지막 계급인 대령.
이 사람도 지금 각각으로 그 시점에 다가가고 있는가.
군복을 벗으면 나를 자기의 롤모델로 삼겠다니.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나한테서 무슨 도움될만한 말이 나올거라고 차를 보내고 비를
맞으며 함께 걸었을까.
그 일 후로 이 길을 걸을 때마다 그 육군대령이 생각난다.
곧 예편한다고 했는데 그는 과연 나를 롤모델로 하는 2번째 인생을 시작했을까.
예외 없는 룰은 없다(There is no rule but has exceptions)
이 법언이 나의 차량 3대 제한 룰에도 적용되었다.
'교회 전례 음악' 의 저자, 가톨릭 전례음악합창단 지휘자인 '좋은소리' 님의 배려로
걷게 된 복막염 수술 후의 첫 우이령길에서 최초의 예외가 있었고 이번이 두번째다.
그 때는 퇴원하여 1달 반 밖에 되지 않은 때라 룰을 고집할 여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분의 동행이 없었다면 시도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분을 따라야 했다.
이번에는 아내의 북한산둘레길 종주를 내 룰 때문에 미완으로 끝낼 수 없지 않은가.
아내에게 우이령길은 식은 죽 먹기?
마지막 길을 전혀 어렵지 않게 마무리 했으니까.
반은 완만하기는 해도 오르기만 하나 다음 반은 순한 내리막으로 일관하는 편한 길
이지만 6.8km로 북한산둘레길 13개구간 중에서 가장 긴 구간이다.
입산 마감시간인 14시 정각에 시작하여 하산 완료시간(16시) 안에 끝냈으므로 시속
3.4km로 진행하면서도 아내는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45.7km의 북한산둘레길에서 유일하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미리 겁먹고 움츠렸던 아내가 마침내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가.
4월16일, 우이령길 교현탐방지원센터 앞에서 북한산둘레길 걷기를 마칠 때 이 달이
가기 전에 도봉산구간을 걸어서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는가.
"할머니랑 오순도순 걸으시잖고 왜 늘 혼자세요?"
이런 불편한 인사(질문)를 받지 않는 날이 내게도 오리라 기대해도 될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