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면 늘 마음이 편하다. 가까운 인척 누나나 兄嫂(형수)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우리 또래 詩人들이 비슷하게 갖고 있다고 한다. 그는 비슷한 나이의 남자 詩人들과는 위태위태한 농담까지 늘어놔 참관하는 우리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하기도 한다.
金汝貞(김여정·71) 시인. 대부분의 시인들이 20代에 데뷔하여 文名(문명)을 날리는 것이 통례인데 金汝貞 시인은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된 35세에 늦깎이로 데뷔, 그 이듬해 첫 시집을 낸 이후 지금까지 열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전집, 그리고 세 권의 에세이집을 내는 등 대기만성型의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 그동안 1978년 월탄문학상, 1984년 한국시인협회상, 1991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37년 동안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전전하다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직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최근 문학잡지에 발표한 그의 詩 두 편 「蝦沼白蓮池(하소백련지)에서」와 「하얀 밤」을 읽고 경건해진 기분에 젖은 나는 그에게 『하소백련지라는 詩가 감동적이더라』고 전화를 했다. 그는 『그냥 여행 갔다가 느낀 걸 적은 건데, 좋다니까 고마워요』 하고, 나의 안부부터 물었다.
지금은 세간에 이름이 잊혀진 辛夕汀(신석정) 시인과 2000년 12월 작고한 未堂 徐廷柱(미당 서정주) 시인을 떠올릴 수 있는 詩 「하소백련지에서」를 함께 읽고 金汝貞 시인의 지나온 삶과 시적 편력을 뒤져보자. 이 詩에서 우리는 칠순에 든 한 여인의 대담 솔직하면서도 맑고 따뜻한 詩정신을 읽을 수 있다. 나이답지 않게 사물을 대하는 대담한 시선이 잡혀지는 것이다. 다음은 詩의 全文.
<우연이었다 정말로 우연한 손길이었다/그 전날 전주 덕진공원에서 신석정 선생의 「촛불」 같은/만개한 연꽃 위를 휘도는 복사꽃밭 바람이었던 것도/그 황홀한 조우만으로도 넘친 행운이던 것을/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푸른 물결 넘실대는 김제벌판에서/지금은 극락의 연못가에서 연꽃을 만나고 계실 미당 선생께서/성긴 모시의 흰 너울을 입으시고/하늘 새 되어 훨훨 들길 가시는 뒤따라/나도 흰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으로/아늑한 청하산 자락의 하소백련지에 이르게 된 것은/희한한 우연이었다/뜻밖의 은혜이었다//그곳은 天上(천상)의 흰 하늘새들의 서식지였다/맑고 깨끗하다못해 처연하도록 기품 있고 아름다운/수백만 송이 흰 연꽃들이 푸른 연잎에 사뿐히 피어오른 자태는/이제 마악 나래를 펴기 시작하는 하늘새떼의 눈부신/飛翔(비상) 직전의 순간이었다/세상에서 얻어온 눈병이 말끔히 가셔져/지순 무구한 하늘새들의/俗界(속계)를 벗어난/지상 밖으로의 날갯짓까지도 환하게 볼 수 있었다//그 날 나는 전라북도 청하산 하소백련지에서/연꽃 만나러 온 바람으로/미당 선생과 동행의 至福(지복)을 누렸다>
소박한 살림살이 『이젠 버리며 살아』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520 동부은행APT 113동 903호. 金汝貞 시인이 두 외손자를 대리고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는 곳이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1007번 고급좌석버스를 타고 종점 못미처 정류장에 내려 전화하면 나가겠다는 그의 설명만 듣고 차를 탔는데 잘못 탄 것이었다. 같은 1007번 버스라도 신장시장을 경유하는 것과 하남시청을 경유하는 것이 있는데, 그가 사는 아파트촌으로 가려면 「하남시청 경유」를 타야 했던 것이다. 잘못 탔다는 판단이 서서 내렸다. 아파트촌으로 가는 입석버스를 물어서 타고 그가 일러준 대로 「신안아파트 앞 정류장」에 내렸더니, 벌써 정류장 건너편에서 마중을 나와 손을 흔들어 보였다.
3월 말. 춘분을 지난 지 한 주일이 넘어서 그런가, 연두색 봄빛이 가로수 가지나 나무 울타리에 광범위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의 스커트 자락이 긴 까만 원피스가 훈기 스민 오후의 봄바람에 펄럭였다. 그는 예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면서 크게 말했다.
『먼 시골까지 온다고, 버스도 잘못 타고 고생이 많았겠네』
배를 조금 내밀고 어깨를 활짝 젖힌 그의 씩씩한 걸음걸이는 20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스타일 그대로여서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매일 아파트 주변 산책로를 걸어다니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까운 검단산을 오르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한다고, 근황을 묻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가벼운 화장 뒤의 얼굴은 환하고 주름살도 많이 없어진 것 같았다. 한결 젊게 보인다고 아첨하듯 말했더니 그는 굵게 쌍꺼풀진 큰 눈을 감추며 깔깔 웃었다.
『어떤 사람은 나를 오십대 여자로 보던데 뭘!』
아파트 안은 혼자 사는 여자의 집답게 깨끗했다. 서재의 책들도 간결하게 정돈이 돼 있었다. 개인 詩 전집이나 선집, 문학 비평서가 전부였다. 시집들도 그와 가까운 詩人의 오래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잡지는 자기의 작품이 실린 것들만 골라 간직해 놓고 있었다.
가구나 살림집기는 소박했다. 「귀하게 보이는 것」은 벽 정면에 걸린 月灘 朴鍾和(월탄 박종화) 글씨에 藍丁 朴魯壽(남정 박노수)의 그림으로 된 그의 시 「和音(화음)」의 詩畵(시화)였다. 詩의 내용은 <그건 꽃망울 버는 소리/그건 연잎 자락에 물방울 구르는 소리/그건 봄 뜨락에 비둘기 우는 소리/그건 초여름 여울물 흐르는 소리/그건 명절날 아침 골목 안 아이들 웃음소리>로, 이 詩의 앞부분 5행만 쓴 것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요. 월탄 선생에게 부탁해 그의 대표 시 「靑磁賦(청자부)」를 쓰시게 해서 그걸 열 폭 병풍으로 만든 거였어요. 나의 장남 최세용에게 간직하라 해두었고, 차남 인용에겐 金丘庸(김구용)시인이 나에게 준 휘호들을 모아 만든 열 폭 병풍을 줄 작정을 하고 있어요』
외아들만 둔 월탄 선생은 소설가 李貞浩(이정호)씨와 그를 마치 당신의 딸처럼 여기고 총애를 해주었다고 했다. 월탄 선생의 고희 잔치 때는 그들 두 사람이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차려입고 딸 노릇을 했을 정도였다.
―서재 책들이 거의 정리가 되어 있네요. 시집들이 많이 없는 걸 보니 정리를 한 번 한 겁니까?
『가지고 있던 책들은 洪申善(홍신선) 시인이 있던 수원大에 대부분을 기증했지요. 여기 남은 책들은 내가 낸 책들하고 나의 작품이 발표되었던 정기간행물이 대부분이고, 내가 좋아하는 詩人의 저서들인데 이것들도 나중엔 모교인 성균관大 도서관으로 보내기로 약속이 돼 있어요. 나 세상에서 없어지면 거기로 가겠지요.
이렇게 정리하며 나 요즈음 비교적 조용하게 살고 있답니다. 입던 옷들도 간추려 「옷 수집함」에 넣고, 가급적 새 옷은 안 사 입고 말이지요. 학교 있을 때 찍은 그 많은 사진들도 정년 퇴직하면서 죄다 없앴어요. 그런 것들 지니고 있다간 나중에 애들에게 부담만 될 것 아닙니까? 내 주변을 하나씩 정리하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단 사람들과도 잘 만나지 않겠군요.
『그런 셈이에요. 이 나이 되니 특별히 따로 만날 일도 없어졌어요. 문단 행사에 잘 나가지 않으니까, 사람들과 접촉이 점점 드물어지더군요. 아는 사람 자제들 결혼식이 있거나 하면 들렀다 오는 것이 고작이지요. 여기 아파트촌에 詩 쓰는 젊은 여류가 한 사람 있는데 그애가 가끔 자기 차로 드라이브를 시켜 주고 밥도 함께 먹습니다. 하남시 주변에는 갈 만한 곳이 많아요』
―컴퓨터로 詩 쓰고 계시는군요. 인터넷도 합니까?
『詩를 써서 저장을 해놓고 있어요. 가끔씩 꺼내 고치기도 하는데, 원고지에 적던 때는 破紙(파지)가 수도 없이 나와 마음도 방도 어지러웠는데 컴퓨터로 하니 깨끗해서 좋더군요. 인터넷으로 독일에 가 있는 첫딸 소은이 부부와 안부 메일도 주고 받고 했는데, 그것도 할 말이 없어지고 그래서 일시 중단을 했다가 최근에 복구를 했지요. 새로 전용선을 깔았어요. 올해 안으로 그동안 써 모았던 詩를 정리해 시집 한 권을 낼까 하고 있지만, 모르겠어요. 내게 될는지』
―詩는 언제부터 쓰기 시작한 겁니까?
『습작하기 시작한 것은 中2 때부터였어요. 내 詩가 처음으로 활자화가 된 것은 高 2 때 쓴 「그리움」이란 詩였어요. 6·25 직전에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것인데, <아침에 까치가 빨랫줄에 앉아 울었다. 행여 할머니라도 돌아오시려나> 하는 내용이었어요. 한데 그때 국어를 맡고 계시던 김명령 선생님에게 이 詩를 보여 주었더니, 詩의 내용 중에 할머니라는 말이 안 좋으니 임으로 바꾸라는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 대신 임이 오시려나 어쩌고 라고 고쳐서 발표했는데, 교지가 나오고 나서 무진 놀림을 받았지 뭡니까? 벌써부터 임이 어쩌고 한다며 도대체 애인이 누구냐는 거예요』
고교 때 문학 활동, 야학도 열어
―기성시인들의 시집을 본격적으로 읽고 영향을 받은 건 그 이후였겠군요.
『그럼요. 해방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니 우리 시집들은 제대로 구경도 못했지요.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 진주 시내를 뒤져 金素月의 「진달래꽃」, 朴木月 朴斗鎭 趙芝薰의 3인 시집 「靑鹿集(청록집)」, 韓龍雲의 「님의 침묵」을 구해 애지중지하며 읽었지요. 당시엔 이런 시집 갖고 있는 게 무슨 보물단지라도 지닌 것 같았다니까요』
―고등학교 다닐 땐 문학서클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했지요. 진주시내 남녀 고등학교 문예반장들이 모여 「未來者(미래자)」란 이름의 서클을 만든 겁니다. 미래 세계를 향한 문학창작을 목표로 하는 자들의 모임이란 뜻이지요. 우리는 등사판으로 만든 동인지를 발간하고 정규적으로 문학토론회를 갖기도 했어요.
그때 우리 서클이 한 일 중에 기억에 생생한 것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며 구두닦이, 식모 등 불우한 청소년들을 모아 그들에게 무료로 교육한 겁니다. 「한빛학원」이라는 야간학교를 세우고 우리가 교사로 봉사하면서 그들의 문맹을 퇴치해 준 겁니다. 나중에 여기를 졸업한 학생들은 진주시내의 정규학교로 진학해서 향토발전을 이끌어 가기도 했어요. 내가 대학을 나와 교육자가 된 것도 이때의 정열과 보람이 바탕이 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하네요』
―남학생들에게서 꽤 인기가 있었던 걸로 이야기 들었는데 로맨스 같은 것을 들려 주십시오.
『그 아이 이름이 玉이었는데 「미래자」 모임의 멤버였어요. 곧잘 英詩를 원어로 낭송해 들려 주곤 한 예쁘장한 소년이었지요. 평소 같은 멤버로만 여겼는데 어느 날 이 아이가 내 집 밖에 나타나 휘파람을 불어 대더니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어요. 내가 놀라서 밖으로 나가 「제발 그러지 마라」 하고 보냈는데, 그 후로도 늘 내 주변을 맴돌던 것이 확연합디다. 자기 혼자 짝사랑을 한 셈이지요. 그아인 고학을 하다시피 해서 약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 다니던 여학생과 결혼을 해서 딸애를 얻었다고 해요. 그러나 남편이 옛날 짝사랑하던 여자만 마음속에 두고 있으니까, 그 여자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이 나이에 와 보니 그런 과거가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있지만…』
金汝貞은 아버지가 아내 둘을 사별하고 세 번째 장가들어 40代에 낳은 첫딸이다. 엄한 집안에 열일곱에 시집온 어머니가 10년 만에 겨우 본 소중한 딸이었다. 게다가 둘째 딸은 6년 뒤에, 외동아들은 그가 열한 살 때 태어나, 어린 시절의 金汝貞은 온 집안의 귀염둥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는 金汝貞이 중학교로 진학하려 하자 극구 반대했다. 광복된 이듬해의 난리판에 애지중지한 딸이 바깥에 나도는 것을 말리려 한 것이다. 「女息兒(여식아)」들은 글자만 파악하고 시집이나 잘 갔으면 하는 것이 당시 시골 아버지들의 보편적인 기대였다.
그러나 剛斷(강단)이 있는 金汝貞은 아버지 몰래 진주女中에 시험을 치러 당당하게 합격하고, 어머니를 부추기고 아버지와는 싸우다시피 해서 기어이 입학을 한다.
국문과에 여학생은 단 한 명
『그때는 6·25 전쟁 중이라 부산에 서울대학이나 성균관대학이 피란 와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 몰래 부산으로 갔었지요. 1차로 서울大 문리대에 시험을 쳤다가 수학 점수가 빵점에 가까워 낙방을 하고, 도리 없이 당시 2차인 성균관대학을 지망해 합격했지요.
입학은 엄청 어렵게 했어요.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돈 마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결국 아버지에게 간곡한 편지를 쓴 거예요. 입학금이 너무 많으니 안 된다고 할까 봐, 액수를 조금 줄여서 알렸지요.
그랬더니 마감에 임박해서 아버지가 돈 보따리를 싸들고 부산으로 오셨어요.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 놔야 등록이 되는데 돈 가진 건 없고…. 궁리 끝에 나는 대학 학무과장 집을 알아내서 그의 댁으로 그냥 쳐들어갔어요.
나의 이야기를 들은 과장이 얼른 그의 아내로부터 돈을 빌려 「여학생이 아주 대단하다」 하면서 등록을 하라고 주더군요. 학교에선 마감이 끝났고 할 수 없이 은행으로 가서 등록금을 내는데, 몰래 아버지 보따리에 넣어 놨던 돈이 갑자기 바닥에 쏟아졌지 뭡니까. 그 돈을 주워서 보니 아버지가 갖고 온 돈보다 액수가 훨씬 많은 거라. 내가 설명을 했지. 사실은 액수가 모자랄 것 같아 대학 학무과장에게 빌려서 보충한 것이라고.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다가 훨씬 뒤에 빌린 돈을 다 갚아 주시고 학우들에게 밥도 샀습니다. 대학생이 된 내가 대견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에요』
한데 1학기가 끝나갈 무렵 金汝貞은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 새로 하는 대학 공부에 너무 열심이었던 탓이었다. 부산으로 달려온 그의 아버지는 늦게 얻은 소중한 딸을 공부한다고 잃어버리는가 싶어 金汝貞을 진주로 끌고 갔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부터 학교가 환도해 서울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하자, 아버지는 사생결단으로 가지 말라고 나섰다. 부산은 그래도 가까워서 괜찮지만 서울은 死地로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나는 한사코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그래서 어머니와 작전을 꾸몄지요. 어머니야 나의 편이니까, 떠나는 날 아침 어머니는 이부자리 등 짐 보따리를 싸서 머리에 이고 몰래 집을 나서더군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사랑채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문이 벌컥 열리고 아버지가 나오시더니 어머니의 머리 위에 있는 보퉁이를 빼앗아 마당에 팽개쳐 버리는 거예요.
나는 울며불며 빈손으로 집을 나서 진주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어요. 엄마가 짐을 챙겨 뒤따라 달려오셨지만, 난리도 아니었어. 당시만 해도 경전선으로 해서 삼랑진역에서 부산서 올라오는 서울행 기차를 바꿔 타야 했으니, 아닌 게 아니라 나의 서울행은 처음부터 고행 길이었어요』
대학에서 문단의 거두들 만나
서울에 와 보니 거리는 황폐했으나 캠퍼스는 열기로 가득했다. 具常(구상) 金南祚(김남조) 宋稶(송욱) 등 詩人 교수들과 평론가 趙演鉉(조연현), 불문학의 孫宇聲(손우성) 金鵬九(김붕구) 교수 등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문학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사귈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 다니면서 청년문학회인가 하는 걸 만들어 주도적인 활동을 한 걸로 아는데 당시의 멤버들은 누구였습니까.
『성균관대학에선 尹炳魯(윤병로)씨와 내가 참여했고 동국대에선 金先現(김선현), 국민대에선 李姓敎(이성교), 경희대에선 李聖煥(이성환), 숙명여대의 許美子(허미자), 이화여대의 임인진 등이었어요. 우리는 문학토론회와 詩 낭송회를 개최했고 뚝섬에서 야유회도 가졌어요. 지금 신세계 백화점인 동화백화점 3층 음악실에서 열린 청년문학회 詩 낭송회는 대대적인 행사여서 박종화 徐廷柱(서정주) 시인 등 기성문인들이 대거 초대되었어요. 그때 젊은 비평가로 데뷔했던 李御寧(이어령)씨가 신랄한 어조로 기성문단을 질타하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나와 윤병로씨는 교지 「成均(성균)」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이 지면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본명인 金貞順(김정순)이란 이름으로 단편소설 「巫堂」을 발표하기도 했지요. 이 소설 제목 때문에 나는 졸지에 「미스 무당」이란 별명을 얻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소설을 쓰지 않았어요. 성균관大 문학동호인들이 모여 「石塔(석탑)」이란 동인지를 만들고 詩 낭송회도 열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서울의 몇몇 대학 문학서클이 모여 「청년문학회」가 결성된 것이지요』
졸업반이던 1957년 가을 金汝貞은 「成大文學」 4집에 金純(김순)이란 필명으로 「아가야 가자」란 詩를 발표했는데, 대학 시절에 쓴 작품으로 그가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닌가 했다. 全文은 다음과 같다.
<아가야 가자/두 손을 꼬옥 이어 잡고/남들이사/거울에 돌팔매질하건 말건//내일에 살자고/목에서 피를 吐하며/내일에 살기 위하여//내일이 내일로 머물지 않는 내일/축복된 노래와 함께/기름져 흐르는 영원의 내일에/살기 위하여//그렇게도 서럽게/그렇게도 쉽사리//그렇게도 편안히/목숨 거두어 가시던/너의 아버지의/높으신 정신 밭으로 가자/…>
네 명의 아이 둔 주부의 詩人 데뷔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했을 때가 중년에 들 무렵 같던데, 왜 그렇게 늦었어요? 詩에 뒤늦게 입문한 것도 아닌데.
『성균관大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에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습니다. 申石艸(신석초) 시인이 문화부장으로 계셨는데 그분은 걸핏하면 퇴근길에 나를 데리고 유명한 음식점에 가곤 했습니다. 申선생님은 唯美主義者(유미주의자)였어요. 물론 詩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고. 나중에 나는 신석초 선생 때문에 문단에도 데뷔하게 됩니다마는.
한국일보에 다니던 중인 1958년 나는 결혼을 했지요. 대학 시절부터 연애한 남자였는데, 이것이 나의 불행의 시작이었던 모양예요. 남자의 풍모나 학력, 집안 어디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지만 생활력이 없고, 게다가 결핵이 중증이었어요. 결혼 때의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는데,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말이죠, 신혼 재미는커녕 결혼하고 이내 딸애 둘을 연년생으로 두고 하루에 피를 한 동이씩 받아내야 하는 지경으로 살았으니 산다고 할 수도 없었지요. 아이들과 격리생활은 해야겠고, 나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괜찮은 출판사에 들어갔다가 그 출판사가 망하는 바람에 실업자가 되어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 詩 쓸 생각이야 했겠어요?
궁리 끝에 남편을 인천 시댁에 남겨두고,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이 있는 진주로 내려갔지요. 마침 교직 과목 강의를 들어 준교사자격증을 따놓은 게 있어, 은사들의 주선으로 모교인 진주女高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 둘은 나의 어머니가 맡아서 키워 주었으니 다행이었고…』
진주를 축으로 하고 남해도 등지에서 보낸 8년의 생활은 고생은 됐지만 그에게 그나마 작은 안정감을 주었다고 했다. 사물을 들여다보고 상상력을 키웠고 다시 詩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창작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진주의 문인들과도 교류가 잦았다. 그들 중 특히 진주농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조시인 李福淑(이복숙)씨가 각별했다. 전화가 드물던 때라 李시인은 자기 학교 학생을 시켜 진주女高로 쪽지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가 주요 내용. 李여사집에서 그는 진주의 문인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돌리고 담소하며 고독을 달랬다.
방학이 되면 인천의 남편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는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서울서 난 딸애 둘의 생일은 제각각이지만 진주에서 난 아래의 두 아들 생일이 모두 7월로 되어 있는 점이다. 겨울방학에 인천의 남편에게 갔다가 아이들이 생긴 때문이었다.
「靑眉」동인으로 7년 동안 활동
―진주에 계시던 8년 동안 집중적으로 詩를 써서 추천도 받고 첫 시집도 내게 된 것이군요.
『80여 편을 썼지요. 1967년일 거예요. 시집을 내기 위해 나 혼자 편집까지 해서 갖고 왔지요. 지방에선 인쇄시설이 없으니까 서울에서 출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서문을 부탁하기 위해 신석초 선생을 찾았지요. 다방에서 만난 申선생은 시집을 내기 전에 추천부터 받는 게 좋을 것이라는 말씀을 비추고는 원고를 두고 가라고 하더군요. 한데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다음인 1968년 3월호 「現代文學」에 나의 詩 「南海島」가 金汝貞이란 필명으로 첫 회 추천이 되어 있더군요. 그 한 해 동안에 「편지」, 「和音」 등이 잇달아 발표돼 추천이 완료된 것도 이례적이었어요. 申선생님이 시집 원고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추천을 완료시켰고, 그 이듬해 첫 시집 「和音」을 내게 한 것이지요. 늦게 나왔지만 단숨에 詩人이 된 것입니다. 신석초 선생께서 「너는 곧다」는 뜻으로 나의 필명을 汝貞이라 하셨다 하더군요. 1968년은 그러니까 나에게는 참 중요한 해였습니다. 딸 둘, 아들 둘 둔 엄마로서 뒤늦게 문단에 등단한데다, 시골 교사가 서울의 여자중학교로 직장을 옮기게 됐으니 말입니다. 월탄 선생님이 나의 상경을 주선해 주셨어요』
시집이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金后蘭(김후란) 시인이 전화를 해 왔다. 『시집을 보니 오래 작품활동을 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늦게 등단했느냐』며 많은 격려를 해주었다. 후에 그의 권유로 許英子(허영자) 林聖淑(임성숙) 金善英(김선영)씨 등과 함께 당시의 젊은 여류시인들 모임인 「靑眉(청미)」의 동인으로 7년 동안 활동하게 된다.
현대문학지의 첫 추천작품인 「南海島」를 全文 소개한다. 이 詩는 그의 첫 시집 제목으로 뽑았으나, 스승인 박종화 선생에게 시집 題字(제자)를 부탁하자 선생은 「和音」이 좋겠다 해서 선택된 것이다. 월탄은 「남해도」란 말은 의미영역이 좁아 좋지 않다면서, 「화음」이란 말이 바로 詩가 아니냐고, 무릎을 치며 그 자리에서 題字까지 써 준 것이었다. 그의 詩 가운데 가장 짧은 詩가 아닌가 한다.
<어쩌다 외톨박이/귀 떨어진/몸//무슨 죄/무거워/내던져 졌기로//조상도 모르는 채/동백꽃만 피우는고.>
신석초 詩人은 金시인의 첫 시집 서문에서 <…나는 이 시작들을 읽고 깜짝 놀랐다. 어느 사이에 시법이 의엿이 一家成(일가성)을 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詩정신은 현대에 드문 고유한 詩情을 담아있고, 그의 詩語는 요즈음 젊은 詩세대들이 그리 돌보지 않는 간결성과 소박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수법에 대하여는 우리가 오히려 갈증을 느껴오던 것이다.…>고 썼다.
중학 교장으로 정년을 맞다
그는 어떤 모임이건 혼자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대학 시절엔 글 쓰는 남학생들을 좌우로 끼고 당당하게 걸어다녔고, 중년 이후엔 남녀를 불문하고 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강단이 있는 여자인 것처럼 목청을 높여 말하고, 잘도 웃는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는 비교적 자주 만난 셈인데, 그때는 그냥 시인이라고만 인식하고 있었다. 최근 그와 인터뷰를 하는 등 구체적으로 접근하면서 그의 친화력이랄까 매력이 교육자로서의 관록에서 비롯되었던 게 아닌가 여겨졌다. 그것은 발랄한 여자 중학생들 사이에서 다소 근엄하고 다소는 순진해진 마음으로 처신해 온 삶의 무게일 것이었다.
1998년 그는 정년퇴직을 한다.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세륜중학 제2대 교장으로 부임, 2년6개월을 근무하다 정년 퇴임한 김정순 선생을 위해 동료였던 최재원 교감은 학교 측을 대표해서 교장을 칭송하는 송별사를 읽었다. 다소 상투적인 문구 속에서도 교사 金汝貞 시인의 면모 일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한다.
『1996년 3월1일 본교 교장으로 부임하셔서는 교사들과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한 교직원의 화합과 경직된 교무실의 분위기 쇄신, 학교운영위원회의 활성화를 통한 열린학교 열린교육에 앞장 서 학생들의 소질과 적성을 계발하고 인성교육에 중점을 두었고, 특히 본교의 특색활동인 시낭송회 행사에는 학생들의 개별지도를 해주는 열성을 보이셨습니다. … 「꿈이 없는 사람은 돌과 같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시체와 같다」고, 「오늘은 미완성으로 있다 해도 언제나 완성을 향한 꿈을 가져라」고 훈화하시던 단아한 모습으로, 37개 성상을 한결같이 즐겁게 열정적으로 몸바친 뜨겁고 숭고한 삶이 지금 이 순간 더욱 빛나 보입니다』
그와 가장 친한 姜桂淳(강계순) 시인은 이날 「아름다운 이별」이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축시를 낭독, 참석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오늘 당신은 아름다운 이별 앞에 섰습니다/당신이 그려놓은 일곱 빛 무지개의 하늘 밑에서/깨끗한 풀잎들 깃발처럼 일어서고/청청한 희망들 황금의 과일로 여물 것입니다./작은 바람에도 추위를 타는 감성의 현을 켜면서/쓸쓸한 것 어여쁜 것들마다 손을 내밀고/돌아서서 혼자 눈물 훔치던/忍苦(인고)의 세월/훌륭한 스승의 이름으로/한 생애 쉼 없이 달려온/좁고 가파른 길을 完走(완주)하고/드디어 따뜻한 이별의 시간 앞에 섰습니다./…>
몇 개의 상을 받은 중견 詩人으로서 중학 교장선생으로서 겉으로는 꽤 화려하게 보이는 金汝貞 시인. 그러나 그는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학생 시절 외의 40년 동안엔 노상 가난하고, 비싼 이자 갚기 생활에 시달려 왔다.
남편은 병에서 벗어나 사는 형편이 조금 풀리는 듯하자 사업을 한다며 돈을 빌려 오게 하더니 그 돈을 엉뚱한 데 써 버렸다고 한다.
서울로 직장을 옮긴 金시인의 중학교 교사생활은 셋집을 구해 네 아이를 키우고, 직장을 다녀야 봉급을 탈 수 있었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아이들을 키웠다.
『세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대학에 다닐 때는 한 학기 등록금이 합쳐서 70만원이 넘었어요. 내 봉급이라 해봤자 15만원이었을 때였는데, 그러니 어쩝니까. 비싼 달러 빚이라도 써야 했지요. 나의 단골 아줌마가 한 사람 있어서 그 사람에게 돈 빌리고 갚고, 또 빌리고, 그렇게 아이들을 공부시키는데…, 그 빚을 갚으며, 생활은 해야 하겠으니 하는 수 없이 저녁에는 몇 팀씩 과외를 해야 했습니다. 하루 하루가 전쟁이었지요.
삼선교에 있는 한성대학교 뒤의 산비탈에서 20년 가까이 살았어요. 늘어나는 빚 때문에 삼선교 집을 팔고 개포동 공무원 임대주택에서 근 8년을 비비적거리다가 겨우 非인기 지역인 이곳에 아파트 청약이 돼 옮긴 거예요』
그는 지금까지 백화점에 가서 핸드백이다 옷이다 하는 것을 사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편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 친구들이 백화점 쇼핑이나 호화여행을 유혹해도, 그는 꾹 참고 바쁜 일을 핑계하며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남대문시장 같은 데 가서 심지어 화장품까지 사는 것이었다. 살면서 터득한 습관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을 폄훼하거나 잘난 티를 내지 않았다.
『詩는 적당히 짧아야 감동 줘』
그는 지금까지 600편이 넘는 詩를 써 왔다. 1993년 7월 그의 회갑을 맞아 낸 「金汝貞 시전집」에는 480편의 詩가 실려 있고, 그 이후 9년여 동안 두 권의 신작 시집을 냈으며 지금도 꾸준히 詩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어떤 기간을 정해 어떤 세계를 추구했느냐 하는 문제를 규명하는 것이 좀 부질없다. 사물을 보고 그것을 전하는 오묘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詩에, 언어에 내던지는 전력 투구가 모든 詩에서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러므로 제1시집 「和音」이 간결함과 여성적 감성이 많이 드러나 있는 것 이외에는 7권의 다른 시집들의 많은 詩는 도대체 性(성)이나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도록 대담하고 치열한 감성이 드러나 있다. 깊은 자기성찰과 사물에 대해 애정 어린 접근이 읽혀지는 것이다.
―요 근년에 부쳐 오는 시집들 가운데엔 여류시인들의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던데, 金선생께선 부쳐 오는 시집들 꼬박꼬박 다 읽고 계시지요? 그들 詩에 대한 느낌이 어떻습니까?
『화려하게 잘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하드 커버에 질 좋은 종이를 썼기 때문에 외양이 좋고 값도 비싸 시집의 가치도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용은 그렇고 그런 것이 더 많더군요. 자신의 경험을 짧고 진솔하게 쓴 것이어야 읽혀지는 법인데, 무슨 이야기를 쓴 것인지 모르는 긴 詩를 잔뜩 실어 놨는데 누가 그걸 다 읽어 줍니까? 의도적으로 말을 비꼬아서 말도 안 되게, 그것도 산문시처럼 길게 쓴 것들 말이지요. 나의 경우엔 그런 詩 한 편도 끝까지 읽을 수가 없더라고요. 특히 일부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렇게 어렵고 긴 산문시가 무슨 유행 같습디다.
하지만 나는 詩란 것은 적당하게 짧아야 훨씬 더 감동을 주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나는 원고를 이 정도까지 써놓고 급한 일이 있어 부산에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가고 오면서 그의 詩全集을 통독하려고 했으나 거기 실려 있는 480편의 詩를 다 읽지는 못했다. 읽을 수도 없었다. 한 편을 읽고 생각에 잠겨 있어야 했고, 또 한 편을 읽고 감동에 젖어 다시 언어 하나 하나를 되짚어 갔기 때문에 읽는 속도가 느렸다.
많은 詩를 읽으면서 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詩를 단편적으로 읽던 감동과는 다른 깊이와 끈질김, 그리고 불행하게 살아온, 그러나 의지로 그것을 이기며 살아온 삶의 기록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특히 103편인 연작시 「海燕詞(해연사)」는 그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여인다워지고 싶은 내면의 울림을 노래로 피력한 것이어서, 나는 이 연작시의 대부분을 탐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숨을 고르며 시를 읽는 기쁨을 나 혼자 즐긴 것이다. 「해연사」란 제목의 시집을 내면서 金시인은 박상천 詩人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을 가장 건강하게 하고 긴장을 주는 생명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의 목적이 되기도 하지만 그 목적이 삶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나는 그래서 「海燕詞」 연작시에서 이 사랑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보고 싶었습니다』
103편의 대단원인 마지막 詩 「풀꽃 목걸이」를 소개한다. 여기에서의 「여인」을 훗날 지상에 없는 詩人 자신으로 바꿔 보면, 한 여인의 슬프고도 간절했던 기도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평생/가슴에 사랑의 햇풀만을 키우다 죽은/여인에겐/천년을 시들지 않을/풀꽃 목걸이를 걸어 주어도 좋으리//한 평생/뼈마디 마디에/순정의 햇풀/한 잎을 피워 내며/그 한 잎 한 잎에/춤추는 날개를 달아 주다 죽은/여인에겐/만년을 시들지 않을/풀꽃 목걸이를 줄줄이 걸어 주어도 좋으리//그러면/천만년 후에/그 무덤은 날개가 되리/춤추는 숲이 되리/숲 속을 흐르는 냇물이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