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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구원의 서정’
lamad ( 2011.12.20. 22:02 )
텍스트: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기독교 문서선교회)
후크마 글을 [제7장 중생]과 [제8장 돌이킴]까지 요약한 뒤에 연속적인 중생론에 대한 제 입장을 말하려고 합니다. 분량이 많으면 집중이 안 되기에 [7장]과 [8장]은 잘라서 올릴 예정입니다. 후크마 글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는 곳은 제가 배경색을 칠하거나 굵은 글씨로 씁니다. 벌콥과 관련된 영어 부분을 볼까 하다가 후크마 글을 먼저 올리고 최종으로 나중에 그 부분은 다루겠습니다.
제1장 방향설정
좁은 의미의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나 중생과 구분되는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여러 국면들 가운데 하나님과 믿는 자가 함께 연루되어 있기에,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을 하나님의 역사요 동시에 우리의 과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저는 여기서 넓은 의미의 중생은 연속론적이 중생론을 말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으로서 후크마는 중생의 범위를 설정하는 부분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2장 구원의 순서에 관한 문제
후크마가 벌콥을 인용하며
그리스도로 이뤄진 구원 사역이 죄인의 삶과 마음 속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며 그것은 구원과정의 논리적 순서로, 또한 그 과정의 상호연관 속에 비추어 성령께서 구원 사역의 적용 가운데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사역을 기술함에 그 목적이 있다.
저는 여기서 성령께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사역이라는 데 주목하고 싶습니다. 저는 ‘연속적 중생론은 성령께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사역을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벌콥 교수는 구원의 순서를 시간상의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순서로 기술하고 있으며, 구원 과정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 사이의 상호 연관 관계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르만 바빙크 구원의 서정 소개 생략)...
중생, 믿음, 돌이킴, 새로워짐 등등의 표현들은 성경속에서 구원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연속적 단계들을 가리키기보다는 사람속에서 일어 나는 변화 전체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하는 것이다.
3. 우리가 꼭 구원순서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가?
중생이라 함은 성령께서 그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며, 한때는 영적으로 죽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사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 중생의 의미는 회심까지 포함된다고 후크마가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속단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후크마가 연속적인 중생론을 이야기한다.”고 서둘러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크마 글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후크마 글을 계속 이어나갑니다.
이렇게 중생이 정의된다면 중생은 돌이킴(믿음과 회개를 포함), 칭의, 성화 그리고 성도의 견인 모두를 앞서고 있음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경험들은 영적 삶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의 과정 속에서 중생이 제일 먼저라는 일종의 순서를 애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후크마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아래와 같습니다. 후크마가 연속적 중생론을 말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러나 심지어 “중생이 우선된다.”라는 말도 시간상 혹은 연대순의 순서를 가리킨다고 이해 될 수는 없다. 중생과 믿음의 관계는, 말하자면 전등의 스위치를 켜는 것과 방에 불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동시적인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새로운 영적 삶을 얻게 됐을 때 비로소 그는 믿게 되는 것이다. 14)
다음은 위 각주 14) 내용입니다.
14) 예를 들면, 누가가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 루디아의 개종을 설명하면서 하는 말인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를 주목하라. 여기서 믿음(복음의 메시지를 청종하는)은 중생(주께서 마음을 여심)을 즉각적으로 뒤따른다. 우리가 여기서 일련의 연속적인 단계들을 포함하는 구원의 어떠한 순서에 대해서 얘기해야 되는가?
예를 들어서, “칭의가 돌이킴 뒤에 오고, 성화는 칭의 뒤에 오며, 견인은 성화 뒤에 온다.”는 것이 사실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돌이킴은 믿음과 회개를 포함하는 것이며, 이후 얼마 것이며, 그러기에 사람은 믿음을 갖게 된 그 시간에 동시에 그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지, 믿음의 소유한 이후 얼마 지나서 의롭다여김을 얻는 것이 아니다. 칭의와 성화가 동시적인 것들임은 위에서 애기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얼마간의 시간동안 믿음을 소유한 이후에야 비로소 믿음안에서 인내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일이 단일 과정이라는 루이스 벌콥의 주장을 알고있 다. 헤르만 바빙크는 {교의학} 초판에서 “구원이 수반하는 모든 축복들은 택함받은 자들에게 동시에 부여된다고 말했다. 이 축복들은 구별될 수 있으되 분리될 수 는 없다.
믿음, 소망, 사랑처럼 그것들은 깨어질 수 없는 세 가지 줄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속적인 단계로 나눠질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 사역에 대하여, 어떠한 연대적인 순서를 정하려는 시도인 구원의 순서란 개념을 내어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갖는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함에서 성령께서는 비록 분리될 수는 없으되, 각각으로 부터는 구별돼야 하는 다양한 경험들을 있게 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연속적인 중생관을 지나치게 부여잡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넓은 의미의 중생에도 해당됨이 분명할 것이라고 봅니다.
...(중략)...
우리는 연속적인 단계를 갖는다는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상각하기보다는 하나님 은혜의 놀라운 사역, 즉 다양한 국면을 구별해 볼 수 있는 구원의 길, 혹은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구원의 과정은 ‘중생 → 돌이킴 → 칭의 → 성화 → 성도의 견인’과 같이 일련의 연속적인 경험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구원의 과정은 동시에 시작되는 다양한 국면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저는 ‘후쿠마 이 말을 넓은 의미의 중생에도 해당됨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b) 구원 과정의 이러한 국면들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발생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록 중생이 다른 국면들에 대해서 원인적인 우선 순위를 갖고 있으나 그것은 시간적인 우선 순위
가 결코 아니다.
...(많이 중략)...
구원 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이 연속되는 단계들이 아니라 동시적인 사건들을 인식함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더 풍성한 이해와 구원의 희열을 갖게 될 때까지 계속 자라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댓글 41
바보새 11.12.20. 23:13
2장에 첫번째 비판 연속적 중생은 성령께서 다양하게 역사하는 사역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열어두고 있는 것이지요. 왜냐면 연속적 중생론은 그 안에 순간적 중생에 대해서도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이 좀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습니다.
3에 나타난 비판 구원의 서정은 본질적으로 논리적 순서입니다. 앞서도 이야기된 다양한 경험을 학문적으로 설명하려면 논리적으로 해야겠기 때문입니다.
라마드 님의 말씀대로 <연대순의 순서를 가리킨다고 이해될 수 없다>를 받는다면, 다음에 나오는 <동시적 사건이다>는 진술도 논리적 필연이나 인과 관계로 읽혀야 하지 않을까요? 저랑 독법이 많이 다르십니다.
┗ 바보새 11.12.20. 23:16
좁은 의미를 이야기하고 넓은 의미를 이야기하는데, 굳이 좁은 의미에 국한해서 후크마가 순간적 중생론이라고 그의 글을 이런 맥락으로 일어내시는 게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바빙크의 인용 부분도 그렇습니다. <연속적 단계들>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으면 그리 읽힐지도 모르겠지만(?) 뒤에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 전체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시키는 것>이라는 표현에서 '과정'에 방점을 찍으면 연속적 중생론으로 읽히지 않습니까? ^^
lamad 11.12.21. 00:23
연속적 중생론의 문제점은 순간 중생은 인정하나 순간 중생론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무 자르듯이 나눌 수 있나요?
그리스도인의 자녀로서 어려서 죽은 아이 → 회심의 근거를 확인할 수 없는데 중생하지 않은 것인가요?
예수님 믿고 있는 자녀로 자란 경우 → 연속적 중생론이 이 경우에는 적용될 듯/ 패륜아였다가 회심하는 경우 제외.
불신자였다가 예수님을 믿은 경우 → 즉각적인 중생과 회심을 동시에 경험하는 게 대다수.
┗ lamad 11.12.21. 00:19
사실, 벌콥과 후크마는 글은 이런 것을 염두해 두고 글을 전개해 나가는군요.
‘벌콥과 후크마는 연속적 중생론자도 순간론적 중생자도 아니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연속적 중생을 인정하고 순간적 중생을 인정하나 오히려 연속적 중생론, 순간적 중생론 이렇게 한가지로 중생을 못박는 것을 오히려 반대하고 있군요.
누가 더 열려 있는 자세입니까? 마스터스입니까? 아니면 벌콥과 후크마입니까?
┗ lamad 11.12.21. 00:36
제 글과 후크마 글을 구별하는 것도 제3자가 판단해 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과거 글들을 보면 너무 피터 마스터스 주장에게 따라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도 마스터스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홀리조이 님과 당시에 토론을 주고 받았습니다. 분명히 저는 홀리조이 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연속적 중생관의 경우는 따르지 않으렵니다.
제 입장이지만, 바보새 님께서는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 중생관의 관념 자체를 버리고 벌콥과 후크마의 글을 보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연속적 중생관도 순간 중생관을 반대합니다. 단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인정할 뿐입니다.
┗ lamad 11.12.21. 00:48
지금은 제 견해 피력하나, 나중에 최종적인 부분은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고있는 조직신학 교수님들께
이 문제를 의뢰할 하려고 합니다.^^
바보새 님의 입장은 반대지만 제가 바보새 님을 존경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holyjoy 11.12.21. 07:41
라마드 님께서는 연속적 중생론에 대해서 아예 마음을 닫고 계시는 것 같군요. 순간적 중생은 연속적 중생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연속적 중생론의 핵심은, 이렇게 순간적 중생으로 시작해서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과정을 경과함으로 인해서 그 중생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속적 중생론은 순간적 중생과 연속적 중생 모두를 포함합니다. 전통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협의의 중생과 광의의 중생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 연속적 중생론입니다.
그런데 라마드 님은 협의의 중생과 광의의 중생은 인정하는데,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연속적 중생론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시니, 연속적 중생론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비판하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무자르듯이 자를 수 없다는 것을 연속적 중생론만큼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는 입장이 없습니다. 순간적 중생론이야말로 무 자르듯이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마드 님께서 세 가지로 분류하신 경우들 중 어디에 라마드 님은 속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자녀로서 어려서 죽은 아이인 경우입니까?(연속적 중생론에서는 이런 아이들 중 유아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중생했다고 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있는 자녀로 자란 경우입니까?(라마드님께 말씀하신 대로 연속적 중생론을 지지하는 경우들이 흔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아니라면 라마드님은 불신자였다가 예수님을 믿는 경우입니까?
그런 경우에는 '즉각적인 중생과 회심을 동시에 경험하는 게 대다수'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라마드 님이 이런 경우입니까? 그렇다면 님께서 "중생"에 이르게 된 그 "즉각적인 중생과 회심을 동시적으로 경험하게" 된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신다면, 그 순간의 앞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하십니까? 그 회심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복음을 들었습니까? 복음을 들은 바로 그 순간에 "즉각적인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임하였습니까?
님의 경우를 진솔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한번 생각해 보시면서 답변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위의 후크마의 글을 정리해 놓은 것의 문제점은 지금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라마드님의 그 "즉각적인 중생과 회심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 그 경험을 들어보고 싶군요. ^^
기대해도 될까요? 제 눈을 열고 제 귀를 열고 님의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라마드 님의 오해: "연속적"이란 말이 후크마의 경우에는 processive 혹은 continueing 이란 말의 번역이고, 반면 마스터스의 경우에는 elongated라는 말의 번역어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들 간의 차이점을 이해하시는지요? 후크마가 '연속적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 그것을 '연속적 중생론'의 '연속'이란 개념을 비판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라마드 님의 치명적인 실수처럼 여겨지는군요.
벌콥을 요약하면서도 번역글에 기초하셔서 오해하셨었는데, 후크마의 경우에도 비슷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이 점에 유의해서 후크마를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라마드 님 같으면 충분히 해내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정야베스 11.12.21. 10:56
신학적 지식이 짧은 제가 선호하는 방향은,.<연속적중생론>이 전통적 개혁주의가 지향하고,.또한 그것을 일관성 있게 주장 하였다면,..개혁주의 노선을 걷는 이들은,,.이에 대하여 동참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이에 대하여 반론이나 이의가 있을수 있다고도 봅니다...누구나 자신이 이해한 만큼 ,.깨닫게 되는것이지요!!~적어도 신자들를 양육하는 사역자들의 입장이라면,.이에 대한 정립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요!!~물론 성경의 내용을 말함에 있어서,.우리 <지식의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이번 기회에 <회심>에 대하여 공부할수 있어서 넘 좋았고요!!~좋은 마무리가 될수있기를 소원 합니다..
lamad 11.12.21. 11:51
분명히 연속적 중생과 연속적 중생론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순간적 중생과 순간적 중생론은 다릅니다.
예전에 홀리조이님과 영어의 부분을 토론했기에 얼추 그내용을 압니다. 번역상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예전에 나눈 토론도 있고 해서 연속적이라는 의미가 영어는 내용이 다르리라는 짐작했습니다. 그것을 제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이십니다.
저는 ‘연속적 중생론은 법칙이다.’고 생각합니다
. ‘순간적 중생은 거의 없고, 연속적 중생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법칙으로 만들려고 한 게 연속적 중생론이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연속적 중생 법칙’ 이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간적 중생론도 법칙으로 적용해서 마치 순간적 중생론 법칙 이런 의미로 순간 중생론을 마스터스가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사용하는 분들에게는 그런 의미가 배제되어 사용됐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순간적 중생과 연속적 중생의 의미를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오히려 순간적 중생론, 연속적 중생론, 이것을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의미로 말하자면, ‘그분들은 순간적 중생 법칙(론), 연속적 중생 법칙(론), 이런 것을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후쿠마 {개혁주의 구원론} ‘구원의 서정’부분의 글을 올린 까닭은 ‘연속적 중생론이냐, 순간적 중생론이냐?’를 말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후쿠마의 이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 구원의 과정의 이런한 국면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발생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록 중생이 다른 국면에서 원인적인 우선 순위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시간적인 우선 순위가 결코 아니다. 》
여기서 연속적이라는 영어 단어와 연속적 중생론에 사용하는 영어 단어가 다를 겁니다. 적어도 연속적이라는 의미에는 시간적인 의미를 다루고 있기에 쓴 겁니다. 연속적 중생론도 시간적 의미는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아노덴”의 의미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다시”와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니고데모는 “다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주님께 질문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위로부터”를 말씀하시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후크마도 이 단어를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부분은 또 글을 올리겠습니다.
중생에 관련해 후크마의 다음의 언급은 주목해야합니다.
《 중생이 회개와 믿음으로 연결되기 전에 여러해 동안 중생이 한 사람 속에 활동하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일이 있다. 그러나 가능성은 우리가 방금 살펴본 요한의 구절들에 의해 받아들일 수 없다.
...(중략)...
루디아의 경우에서 처럼, 중생과 돌이킴(=회심)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원인적인 측면에서 볼때 중생이 돌이킴보다 앞선다.
┗ 정야베스 11.12.21. 15:41
라마드 님!!~신학적 이론을 주장함에서,.그 어떤 <법칙적 개념>의 이론이 있던가요?? 저는 없는 걸로 압니다..
칼빈이 주장한 선택론(예정론)은 법칙인가요?..성경적이라고 생각하고, 진술한 바를 <법칙>이라고 하는것은 ,.다른 문제의 토론으로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해하기로는, 연속적 중생론도 순간적 중생론을 이해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순간적` 이해보다는 `연속적` 이해가 더욱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것 아닌가요?
lamad 11.12.21. 12:34
야베스 님, 한 가지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제가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위해 설명하는 글입니다.
분명히 개혁주의자들이 말한 좁은 의미의 중생, 넓은 의미의 중생과 순간적 중생론과 연속적 중생론의 의미가 다르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같게 생각한다고 저는 여깁니다..
그리고 정야베스 님이 존경하는 “이승구 교수님은 연속적 중생론에 대하여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이승구 교수님과 통화했다는 분에게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틀리면 사과하겠습니다. 받아들이는 입장을 설명해야 하지는 않겠습니까? 그리고 일단은 전개해 나가야하지 않겠습니까?
┗ lamad 11.12.21. 12:41
바보새 님이 합신 출신이시니 이승구 교수님에게 전화해서 여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 정야베스 11.12.21. 13:53
아이구,.그렇게까지 말씀 하시니,.오히려 제가 송구합니다..
제 말씀은 ,.옳다 그르다가 아닌,.이런 주장과 견해가 있다는것을 서로간에 이해 하자는 뜻이지요!!~
저는 라마드님 같은 분이 있기에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모릅니다. 그러나..어떤 <단정적 입장>을 취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나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lamad 11.12.21. 14:01
제 입장은 현재적 의미로입니다.^^ 단정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현재적 입장입니다.
제 자신은 실수와 허물 많은 인간일 뿐입니다.^^
바보새 11.12.21. 12:49
예전에 송인규 교수께 여쭌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얻은 답변을 올려뒀었습니다. 참고해 보시길, 라비블이란 이름으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 lamad 11.12.21. 13:11
바보새 님이 이승구 교수님에게도 전화해 보는 게 어떠하실지?
검색해 보겠습니다.
┗ 바보새 11.12.21. 13:09
네... 제가 한 번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 lamad 11.12.21. 13:37
감사합니다. 양무리마을에 라비블로 검색하니 찾지 못하겠습니다. 어디서 검색하지요? 라비블은 바보새님이십니까?
┗ 바보새 11.12.21. 13:19
제가 답글로 올려두었습니다. 라비블은 제가 이전에 쓰던 별명입니다.
이승구 교수님께 메일을 드렸습니다. 답신이 오는대로 이 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 lamad 11.12.21. 13:38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olyjoy 11.12.21. 15:22
라마드님께/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것입니까?
부탁: 라마드 님의 회심과 중생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일어났습니까? 복음을 듣는 순간(전도를 받는 순간)에 한 순간에 모두 중생과 회심 모두가 다 한꺼번에 되었습니까? 이전에는 전혀 교회에 대해서 전도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다가 누군가를 통해서 전해듣는 순간, 그 한 순간에 자신의 죄됨을 아시게 되고 예수가 믿어지고 그래서 중생이 일어나고 동시에 회심이 되었습니까? 라마드님의 회심과 중생에 대해서 이것 하나만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님의 중생과 회심은 순간적입니까?
연속적입니까? 만일 제가 여쭤보는 의미로서 순간적이라면 그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경험하는 중생과 회심 체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중생과 회심체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이런 식으로 중생을 이해하신다면 라마드님의 체험은 아주 특별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솔직히 간증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회심간증을 많이 모으고는 나름대로 형태 유형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의 회심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부탁 드려 봅니다.
┗ lamad 11.12.22. 17:37
홀리조이 님께 죄송하지만, 실망하셔도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저는 과거부터 신실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항상 주의를 귀우렸습니다. 그러므로 제 자신이 직접 그 해석으로 직접 들어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특히 중생의 문제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교회론적인 고백이기도 합니다.
holyjoy 11.12.21. 15:28
그리고 이승구 교수님이 연속적 중생론에 대해서 불편하게 여기셨다니, 좀 근거 있는, 왜 그렇게 불편하게 여기셨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승구 교수의 어떤 견해에 대해서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는 식으로 근거 없이 이 양무리마을 카페를 통해서 퍼뜨린다면 그것은 정당치 못한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 lamad 11.12.21. 16:13
명확한 답변은 바보새 님이 이승구 교수님에게 오는 답변을 통해서 듣기로 하지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말입니다. 구두보다는 문서로 받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승구 교수님의 답변이 연속적 중생론을 지지하면 오히려 우리 양무리 카페로는 더 좋은 것 아닌가요? 정당치 못한 사실이라면 이승구 교수님의 답변을 듣고 공개적으로 사과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제 체험을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진실되게 말하고 손해본 적이 있어서!!
┗ holyjoy 11.12.21. 16:19
라마드 님에게 실망이 되는데요? 좀 더 치열하게 씨름해 보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이곳 카페의 최종 준거가 이승구 교수입니까?
이승구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 비판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비판할 거리가 나옵니다. 이곳 카페는 칼빈조차도 비판하는 데 열려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이승구 교수에게 의존하려니, 이 카페가 좀 초라해지는 것 같습니다. 보스의 {성경신학}을 이승구교수가 오역해 놓은 부분을 제가 올려볼까요? ㅎㅎ
어떤 분이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면서 연속적 중생론을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비주의더군요. ^^ 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해서 부탁을 드렸는데...
┗ lamad 11.12.21. 16:57
홀리조이 님, 그런 부분은 좋지 않게 비춰지는군요. 분명히 홀리조이 님도 번역하다 실수를 할 겁니다.
양무리마을 회원님들조차 원어는 틀렸는데 그 내용의 글은 맞는 경우 많이 봤습니다. 어떤 때는 저도 틀립니다. 부족한 인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죽을때까지 제가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러 부분이 계속 되리라 생각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낮추면 그 폭은 줄어들겠지만요
전체 내용이 흐트러질 때는 쪽지로 보낸 적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개혁주의 신학자 분들 의견은 수렴해보는 것이 좋으리라 여깁니다. 이곳 회원님들 대다수는 그냥 따라가는 겁니다. 방향키를 잡고 있는 분이 홀리조이 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black scholes 11.12.21. 17:23
lamad 님, 저는 홀리조이님을 따라가는 '생각없는 대다수'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저는 마스터스의 견해가 대다수 개혁주의 중생관의 논리와 별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 lamad 11.12.21. 17:46
네. 님의 입장은 저도 그렇다고 봐요. 그렇다면 개혁주의 조직신학 교수님들 견해를 듣는 것도 좋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 holyjoy 11.12.21. 17:51
학자의 견해, 그것 참 중요합니다. 그들 실수를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의 입장이 무슨 결정적인 근거나 되는 것처럼 물어보자는 식의 태도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것이 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이 라마드 님의 기본적인 자세인 줄 알고 있는데, 그런 입장에서 한켠 물러서는 것 같아서 조금 실망이 됩니다.
{영혼의 의사}라는 책 자체는 읽어보셨습니까?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제가 한 권 보내드리겠습니다만...
lamad 11.12.21. 23:36
홀리조이 님께 죄송하지만, 실망하셔도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저는 과거부터 신실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항상 주의를 귀우렸습니다. 특히 중생의 문제는 더욱이 그리해야한다고 봅니다. 제 신앙고백은 개인적 고백이기도 하지만 교회론적인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더더욱이 그렇습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역사적인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믿고 따랐던 것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 holyjoy 11.12.22. 07:16
저도 학자의 견해를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라마드 님의 그런 자세 존중합니다. 역사적인 기독교의 정통성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 연속적 중생론이야말로 역사적 기독교를 제대로 따르고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교도들, 그리고 개혁주의자들, 정통 개혁주의 신앙노선에 서있는 어떤 글을 보더라도, 이 연속적 중생론에 어긋나는 것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정립하였지만, 그 이론이 설명하는 현상 자체를 창조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던 현상일 뿐입니다. 그것을 "상대성이론"으로 표현하였을 뿐입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언제나 발전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뿌리를 두고 개혁되어 갑니다. 만일 어떤 용어자체에 묶여서 한발 전진하지 못하고 마음을 닫고 있다면 그것은 개혁주의가 아니라, 전통주의요, 수구주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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