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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시대는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고 고쿠카와 가문이 주도하는 막부체제가 일본열도를 장악하는등, 전반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매우 안정적이었다.
왕권강화와 세력균형을 목표로하는 정치변혁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정치적 격변의 시대 중심에 섰던 인물중에는, 장희빈이나 인현왕후같은 중전이나, 송시열, 남구만 같은 정치적 인물외에 숙빈 최씨가 있었다. 7세의 나이에 궁인으로 입궁한 숙빈 최씨. 숙빈최씨에 대한 조선왕조의 기록은 매우 빈약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이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이기에, 조선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다.
또한 영조는 경기도 파주시 소령원에 신도비를 세웠을 뿐 아니라, 재위 중 직접 소령원까지 행차하여 제를 올린 일도 수차례 있었을 정도로 생모였던 숙빈최씨를 각별하게 기렸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인현왕후의 복위와 장희빈의 몰락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장희빈을 중심으로 남인체제로 굳어져 갔을지도 모를 조선역사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 생활을 거쳐 감찰궁녀로 승급하는 스토리로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드라마 상의 설정일 뿐이고, 실제로는 선도비에 숙종(1661~1720) 16년인 1676년 7세의 나이로 궁궐에 들어 왔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인현왕후의 시종을 들었다고 나와 있어, 궁중에 들어와서는 주로 그일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생모를 위해 직접 글씨를 쓴 것으로 알려진 숙빈 최씨의 신도비 朝鮮國 和敬淑嬪 昭寧園(조선국 화경숙빈 소령원) **영조가 그녀에게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려 화경숙빈(和敬淑嬪)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묘(墓) 또한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했다.
조선시대 능묘제도에서 원(園)은 왕이나 왕비 무덤에나 붙일 수 있는 능(陵) 다음 칭호이다.
하루밤의 역사 숙빈 최씨가 내명부에 품계를 받은 것은 숙종 19년인 1693년이다. 당시 24세로 이미 나이가 찬 상태였지만, 1689년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서인으로 삼는 한편
장희빈을 빈으로 승격시키고 그녀의 아들을 세자로 삼는등, 온통 관심은 장희빈에 쏠려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현황후 지지파인 서인정권계열의 인사들이 유배되거나 사사되는 등
거친 정치적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장희빈의 지지파인 남인정권이 정권을 장악하자, 어느 누구도 인현황후의 복위문제를 쉽사리 거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숙종은 서인에 의해 정권이 독점되는 것을 견제하려 하였듯, 장희빈을 중심으로 한 남인정권의 권력독점도 바라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당시 평범한 나인에 불과하였던 숙빈최씨와의 만남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숙빈 최씨는 당시 인현왕후의 생일을 맞아, 밤늦게까지 침방에 불을 켜 놓고 인현왕후를 위한 음식을 장만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중 나인들의 모든 처소에 불이 꺼진 상태에서, 유독 한 곳에만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숙종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날밤을 같이 지내게 되었다.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 서인정권의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그녀 스스로 숙종의 눈에 들기 위해 일을 꾸몄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주장이든, 당시 장희빈이 궁궐안을 장악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 계획이 아닐 수 없다.
즉 진심으로 인현왕후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결코 벌일 수 없었던 일이다.
또한 폐서인이 된 이후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며 거친음식만을 먹고 있었던 인현왕후의 안타까운 사정을 고하여 숙종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그녀는 1693년 숙원(淑媛내명부의 종4품 품계)으로 임명되었는데 1694년 9월 그녀는 연잉군(조선 21대 임금 영조)을 출산한 것을 계기로 하여
숙원에서 숙의(淑儀내명부의 종2품 품계)로,
다시 귀인(貴人종1품 )을 거쳐 1699년 숙빈(정1품) 으로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숙종의 애정이 장희빈에게서 최숙빈에게로 옮겨가자, 자연스럽게 인현왕후의 복위문제도 탄력을 받기 시작하였다.
결국 1694년 서인계열의 소론파가 주도하는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이 성공하였고,
최씨는 숙원에서 숙빈으로 품계가 올라가게 되었다.
장희빈과 최숙빈의 대결 인현왕후의 복위로 모든문제가 일단락 되는 듯 싶었지만, 아직 궁중안은 장희빈이 장악하고 있었다.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는 제주도로 유배갔지만,
여전히 장희빈과 내통하며 재기를 꿈꾸었고 남인정권도 완전하게 몰락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인현왕후가 복위한지 2년이 지났지만, 인현왕후은 폐비시절 얻었을 것으로 예측되는 지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 인현왕후의 사망은 또다른 폭풍을 몰고 오게 되었다.
바로 무고(巫蠱)의 옥으로 불리는 조선시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인현왕후가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장희빈은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지만, 한동안 더 내명부를 더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인현왕후가 병환을 앓고 있던 2년동안 단 한번도 문병을 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중전의 처소를 중궁전(中宮殿)으로 부르는 일도 없었고,
심지어 중전으로 복위된 인현왕후를 여전히 폐비로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철저하게 장희빈이 궁중안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시녀들사이에서는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현왕후가 폐비였던 시절부터 남다른 담력을 보여 주었던 최숙빈은 장희빈의 세도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조선왕조 실록에 의하면 장희빈은 취선당 서쪽에 몰래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무당을 불러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는데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장희빈의 동태를 면밀하게 살피던 최숙빈은,
마침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巫蠱)하고 있는 현장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숙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1701년 장희빈을 비롯한 그 일파는 모두 최후를 맞게 되었다.
장희빈 일파가 몰락한 이후 숙종은 숙빈최씨가 거처하는 처소도 크고 넓게 지었으며, 연잉군을 위해서도 따로 저택을 마련하는등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더구나 1717년엔 30세 나이로 장성한 장희빈의 아들을 뒤로하고
연잉군으로 하여금 편전에 참석하여 정사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때 이미 숙종의 마음은 연잉군쪽으로 기울었지만,
장자우선승계라는 명분론에 밀려 장희빈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20대 임금인 경종이 되었다.
그러나 경종은 폐서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아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왕위정통성이 매우 약하였다.
또 어머니의 사형장면을 목격한 정신적 충격과, 왕위시절 방탕한 생활로 인해
재위 4년만인 1724년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경종의 뒤를 이어 1724년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이 21대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된 것이다.
역사속의 숙빈 최씨 숙빈 최씨는 숙종이 사망하기 2년전인 1718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출신성분이 무엇이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현왕후의 복위와 장희빈의 폐위과정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보는,
조선시대 여성으로선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대담하다.
여기에는 다소 정치적으로 해석하거나, 장희빈을 결국 죽음으로 몰고갔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과장된 관점으로 보인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은 분명한 사실로 당시로서는 대역죄에 해당한다.
이것을 밝히고 죄지은 자를 벌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였던 그녀의 의지가 무엇보다 돋보인다.
특히 그녀의 아들인 연잉군이 훗날 영조임금이 되었던 면을 생각해 볼 때, 그녀의 삶은 장희빈이나 인현왕후보다도 조선후기 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동안 낮게 평가되었던 그녀의 삶을,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밝히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야후블로그역사의 천존고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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