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치(여태후). 산동단현 출신이다)(기원전241~180)
. 어렸을때 부친은 원수를 피하여 패현으로 피난와서 살았다. 첫 번째 만난 연회때 유방의 비범한 기도에 반하여 기쁘게 반려로 맺어졌다. 일테면 평범한 인간이었던 유방의 부인인셈이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항우를 이기기위하여 여치와 유방의 부모는 이년간이나 인질로 있었다. 203년 여치는 한나라로 귀환하여 관중에 머물렀다. 유방이 천하는 통일한후 칭제후에 여치는 황후로 봉하여졌다. 둘 사이에는 그녀가 낳은 영(盈)이라는 아들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여치는 위인됨이 모략을 일삼았다. 한초, 여후는 유방을 도와 한신(韓信)을 죽이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상 최고 잔혹녀로 꼽히는 여태후는 모성이 매우 강한 사람 이었다.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는 태자가 보위에 올랐을 때 팽월등 이성왕(異姓王)들이 도전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한신, 팽월 등을 미리 제거했다. 유방이 죽은후, 혜제(惠帝)를 세워 자신은 황태후가 되었다. 혜제는 유약하였기에 실제 정치는 그녀의 장악하에 놓였다.188년 혜제 붕어후에 소제(少帝)를 세웠는데 소제는 생모를 위하여 여후가 죽기를 바라였기에 원한어린 말을 남기었는데 이에 발끈하여 소제제위 8년에 여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상산와 유의를 옹립 황제를 시켰다. 호령일출태후란 말은 , 여후가 국정을 마음대로 장악한 16년간을 가르키는 말이다.
여태후의 평가는 후세에 분분하지만 유방을 도와 휴양생식의 황노정치를 병행시키며 나름으론 애를 썼다. 유방임종전의 여후는 유방이 죽기전에 미리 안배를 하였다. 소하상국후에 누가 그 자리를 이을 것인지 그러자 조참, 왕릉, 진평순으로 잇게하였다. 단 독임을 막게하였다. 문화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유가천하는 위기가 찾아 왔다. 유씨천하를 위하여 주발이 필요하였기에 태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여후가 장악하였다. 단지 그녀는 유방이 임종전에 중요인상의 안배적 차원에서 신하들을 다루어 나갔다. 상국의 자리는 그렇게 소하, 조참, 왕릉, 진평, 주발의 개국공신 순으로 이어져 내려갔다. 각기 대신들을 쥐락펴락하는 바람에 나라는 안정되었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모든 공신들은 내치에 힘썼으며 백성을 마음을 따르기 위해 애썼고 법제, 경제와 사상문화의 각개 영역에 군등하게 힘을 써서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루는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현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여태후를 본받은 점이 많다 하겠다. 위인됨이 비록 모략가이긴 하여도 대신들을 다루는 솜씨는 일급이며 백성을 아끼는 마음도 일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적을 죽이는 아주 참혹한 솜씨도 일급이니 그녀가 악녀인지 성녀인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는게 꽃어름눈물의 생각이다. 사인방중 하나인 강청의 어리석음, 우리나라 고관댁 마나님들의 옷욕심에 비하자면 여태후야말로 여장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할 때 독하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세울 수가 있었을까? 항우가 개국한 이면에는 여태후의 내조가 없었다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혼란스런 현정치현실을 바라보니 여태후 페이지뷰를 작성하는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라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여태후 만년, 자손이 모두 죽자 부끄럽게도 고조의 자손이라 속여 릉여씨(凌呂氏), 등 모든 여씨 외척들이 후가 되었다. 기원전 180년 여후가 세수 62세로 붕어하자 한고조와 합장하였다. 이후 여씨는 권력욕으로 난을 일으키고는 끝내 진평등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이천년간 유가사상이 유가사상으로 점철된 것에 대한 사학자들의 평가는 구구하다. 남성 위주 사회에서 살아 남고자 했던 그들의 처 절한 몸부림은 후세 사가들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 많이 있다. 남편의 가족이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수많은 남자 혈족을 살해했으며 시어머니의 귀를 불태우고 눈을 뽑고 팔과 다리를 자르는 등 질투심을 붙태우며 20년간 권력을 유지하며 살았다. 남편인 유방이 죽자, 유방이 생전에 총애했던 척부인의 옷을 벗기고 힘이 센 내시들로 하여금 두 다리를 잡아당기게 한 다음, 남편과 관계를 가졌던 음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리고는 죄수들에게 척부인을 욕보이게 던져놓았으며, 강제로 독약을 먹이고 귀에는 유황을 붓고 두 눈까지 뽑아버렸다. 결국에는 양팔과 다리까지 잘랐으며, 시체는 똥오줌이 넘치는 변소에 던져버렸다. 태자의 이복형제 및 숙모도 처치한 뒤 아들을 여씨 집안 후손과 결혼시킴으로써 황실 혈통을 유씨에서 여씨로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여태후가 죽은 뒤 여씨 일족의 권력은 유씨 집안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