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봄, 까미노로 떠날 때 6개월(178일)에 마치고 돌아오면 바로 이어갈 수 있을 것
으로 생각했는데 6개월의 5배 세월이 흐르도록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누구에게 한 약속이 아니고 스스로, 자신에게 한 약속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시시각각으로 가속화 되어 가는 노화를 극복하는데 우선순위에서 밀렸으며 변명이 될
만한 돌발 사정들이 있기는 했지만.
여정이 150일로 단축되었음에도 4.000km걷기를 완수함으로서 50일의 1.200km헨로가
이전보다 시답잖게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것이 밀린 이유는 아닙니다. <늙은山나그네>
(22)
하기모리의 무례를 커버(cover)하는 길과 5S운동 마을
시코쿠 88레이조(靈場) 중 38번 콩고후쿠지(金剛福寺)의 13km쯤 전방인 이부리(以布里).
한 밤을 편하게 보내게 해준 진베에 광장을 나와 어항에 들렀다.
아침 7시가 넘은 때, 한국 어항이라면 바글거릴 시각인데도 잠자는 듯 고요한 이부리항을
뒤로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
아시즈리헨로도(足褶遍路道) 안내기둥이 미더웠던가.
하기모리의 권유를 따랐으면 이른 아침부터 힘빼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지명 '아시즈리'의 일본어는 "발버둥친다, 발을 동동구른다"는 뜻이라는데 그 뜻에 알맞게
아침부터 발버둥치는 짓을 했다.
끝나는 이부리 어항과 함께 길도 끝났으니.
당시에는 적잖이 무례하다고 못마땅한 내심을 억제하느라 애먹었는 데 매너(manner)가
거칠기는 했으나 알려준 내용들만은 바르고 도움을 주는 것들임을 매번 느낀다.
어렵사리 길을 찾은 후로는 무리 없이 진행되었으나 이 지역이 일본 본토의 일부가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낙후된 상태다.
토목기술의 수준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나라의 길이라 더욱 이해되지 않는 지역이다.
"서당의 입춘방도 틀릴 때가 있고 대장간에 식칼이 논다"는 속담에 해당되는 경우라 할까.
지방도로(県道)라지만 굴곡이 심하고 좁은 19c도로에서 19c방식으로 보수중이기 때문에
도보 헨로상에게는 교통사고의 위험률이 아주 높은 구간이다.
우리나라 보다 보행자 배려가 극진하나 배려를 운운할 처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위해서 일본까지 온 것이 아니잖은가.
공차증이 재발되면 남은 길의 소화가 어렵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좁고 위험한 길임을 인정하기 때문인지 안내판들이 옛길(昔道) 걷기를 권한다.
"걸음을 천천히 하여 숲과 강, 들새들의 지저귐 등 자연 속에서 지방 문화, 역사와 친해질
수 있는 자연보도(步道).
코치현(高知)내 총연장600km 중에서 "토사신미즈 시(土佐淸水市) 오기(大岐)에서 구보츠
(窪津)에 이르는 루트가 고래를 볼 수 있는 길이라며.
그러나 이런 매혹적인 옛길, 자연보도라는 유혹에 끌려 힘겹게 갔으나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막아 되돌아 나올 수 밖에 없는데도 당국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무료하면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게 된다?
'5S운동실시중'이라는 플래카드에 관심이 갔다.
알파벳(영어) 'S'로 시작되는 단어가 아니고 일본어 '사'줄 단어 5개의 실천이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시츠케'
'身+美'로(몸身 변에 아름다울美 자를 더한) 일본 한자다.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가정교육"을 의미하는.
누가 선도하는지 일본의 낙후된 시골마을에서도 현실을 걱정하기 때문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운동이라면 다다익선이며 돕고 싶다.
흥선 이하응이 한국의 만지로가 되었더라면?
구보츠어항, 구보츠소학교를 지나 작은 어항마을 츠로(津呂)에는 헨로코야(小屋)도 있다.
어제 여기까지 올까 망설이다 포기했던 곳.
유료인 것은 이해하나 코야 중에서 최고가(最高價)라 그랬는데 잘 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한바(飯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스도마리(素泊)와 식사가 각기
500y인 것은 도보 헨로상에게는 바가지다.
차량의 진입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아시즈리길과 덤프트럭 1대가 들어서기 버거운 27번
현도가 대부분인 13km(以布利에서)는 만만디로 걸을 수 밖에 없는 길이다.
37번 이와모토지(岩本寺)에서 38번 콩고후쿠지(金剛福寺)까지,1.200km 88레이조 중에서
가장 긴 80.7km(거리 표기가 각각이다)가 끝난 시각은 정오.
시코쿠 최남단 아시즈리미사키(足摺岬)에 높이 서있는 동상이 주목을 받고 있다.
존 만지로(John Manjiro)로 되어 있는 나카하마 만지로(中浜万次郞/1827~1898).
1841년에 출어중 조난을 당하였으나 미국 포경선에 구조되었다.
선장의 고향(Fairhaven,New Bedford,Massachusetts,)으로 함께 가서 학교교육을 받고
견문을 넓힌 후 1851년에 귀국한 그는 어부에서 일약 외교관(?)이 되었다.
일본의 개화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미일교류에 초석이 되었다니까.
그는 우리나라의 흥선 대원군과 동연대의 인물이다.
같은 출생연대인 1827년에 태어나서 흥선의 사망과 같은 해인 1898년에 사망했으니까.
흥선 이하응이 만지로처럼 어부였으며 조난을 당했다가 서양의 어떤 선박에 구조되고 그
쪽에 가서 서양의 신 학문 교육을 받고 견문을 넓힌 후 귀국했다면?
조난당한 어부가 아니고 다른 어떤 이유로 서양에 가서 신문명교육을 이수한 후 개화되어
귀국하게 되었다면?
그래도 병닌, 신미양요를 겪고 쇄국정책을 폈을까?
극과 극은 상통하지 않은가.
아마도, 추진력이 강한 그는 서양의 신문물을 과감하게 받아들였고 일본의 메이지(明治)
보다 앞선 개화와 개혁으로 극동의 선두 주자가 되었을 것이다.
온 나라 방방곡곡에 척화비를 세우느라 국력을 낭비하지 않았음은 물론 한 많은 역사책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게 되었을 텐데.
오죽하면 허용하지 않는, 부질없는 역사의 가정을 일본 땅에서 하고 있을까.
시각과 달리 감각이 무딘 나
시코쿠의 최남단 국립공원의 아시즈리미사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콩고후쿠지.
삼면천수관세음보살(三面千手觀世音菩薩)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영장(靈場)이며 12만
평방m의 넓은 도량(道場)이란다.
고닌(弘仁)13년, 코보대사가 이 곳에서 천수관음을 감득하고 천황에게 주상, 사가(嵯蛾/
재위809~823)의 칙원을 받아 가람을 건립했다는 것.
불교에 심오한 신앙 또는 지식이 없는 나에게는 지나온 38개 레이조가 모신다는 본존이
하나같고 종파도 구분할 수 없으므로 시각적 호기심에 의존할 뿐이다.
헬렌켈러(Helen Adams Keller/1880~1968)가 후지산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영산(靈山)'
이라고 했다는데 시청각장애인인 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감각의 혜안이 있었지만 나는
시각은 멀정해도 감각이 무딘 것인가.
그러므로 직. 간접으로 특별하게 알려져 있거나 시각에 특별한 자극을 주거나 문화재라면
한번 더 보는 정도다.
88개 영장 중 대부분은 영장으로 업그레이드 되기 전에 당시의 천황의 칙령, 칙원에 의해
설립되었으므로 비중 또한 대동소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콩고후쿠지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지 이렇다할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만, 당대의 일본 삼필(三筆) 중 하나라는 사가천황이 쓴 편액 '補陀洛東門'이 있다 해서
관심 깊게 살폈으나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당대의 삼필이란 코보대사와 타치바나노하야나리(橘逸勢)와 사가천황이었다는데.
이와모토지에서 여기로 오는 도중, 52.8km지점에 있는 신넨안(眞念庵)도 이 영장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볼거리라는데 가볍게 거쳐 왔으니 아쉽고.
그 건물은 에도(江戶/1603~1868))시대에 건축한 것으로 여전히 헨로상들의 젠콘야도(善
根宿)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겹치기 아쉬움을 안고 떠나는 것을 용납할 리 없는 끈기가 발동했다.
신넨안은 오늘 중으로 다시 들려서 어쩌면 1박할 수도 있겠지만 보타락동문은 다르다.
'콩고후쿠지'의 '콩고'는 코보대사가 당(唐)에서 귀국할 때 일본을 향해 오고저(五鈷杵/밀
교에서 사용하는 중요한 法具의 하나)를 던저 지었고 '후쿠'는 관음경의 복취해무량(福聚
海無量)에서 차용해 합성했다는 이름이다.
보타락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며 보타락산은 그가 사는 산을 말한다.(인도 남해안에
있으며 팔각형의 산으로 이 산의 華樹는 빛과 향기를 낸단다)
피안의 세계, 보타락정토(淨土)를 믿고 보타락을 향해 일엽편주 도해(渡海)가 번성했는데
그 편액을 썼다는 사가천황도 그같은 신심이었을까.
하기는, 헤이안(平安)시대(794~1185) 후기에는 역대 천황들의 칙원소가 되었으니까.
한데, 업은 아이 삼년 찾는다던가.
본당 입구 이마에 걸려있는 편액일 줄이야.
무심코 지나친 후 사방을 헤매고 다녔으니.
코보대사와 관련된 7대불가사의가 있다 해서 찾아다니다가 시간만 낭비한 기분이었다.
내가 무심한 탓인지 모두 찾아가지 않았거니와 사진으로 담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가사의를 찾아다니다 만난 기이하고 거대한 돌들이 왜 아시즈리 곶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는지 그것이 내게는 불가사의였다.
완벽한 헛걸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남부의 곳곳에 펼쳐있는 동백군락에는 어림없지만 츠바키 로드(椿道/동백길)를
걸었으니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이 걷는 것
일번 료젠지에서 받은 '四國靈場八八個所巡拜 徒步遍路 野宿一覽' 자료가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으나 그것 때문에 고생하는 일도 이따금 있다.
변동 사항이 반영되지 않은 자료는 악이다.
없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잘못 된 것은 나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보다 나쁜 일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와 그 반대인"나쁜 일을 하는
것 보다는 잠 자는 것이 낫다"는 득(得) 없는 논쟁도 하지만....)
그래서 가이드 자료는 매년 확인을 해야 하며 그래도 그 새의 돌연한 변동으로이용자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는데 이 자료는 아마도 수년간 그대로인 듯.
특히 37번~39번 간에서는 츠야도와 젠콘야도의 위치가 혼란스럽다.
더 볼일은 없는 듯 하여 이부리(以布利)행 버스에 올랐다.
새벽같이 기동하여 정오가 넘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 것이 무리였나.
버스가 떠나기 전에 졸음에 사로잡혔으니까.
걸어온 해변을 살펴보려고 우측 좌석에 앉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졸음이 물러간 후에 보이는 것은 우측 바다가 아니고 좌측 바다였으니.
버스 루트가 해변길임을 확인했으나 반도지역인 것을 간과한 것이다.
양쪽 해변과 산간 등 3갈래 길 중에서 내가 택한 버스는 좌측해변을 달리는 버스였으니.
엉겁결에 내린 곳은 토사시미즈 시 다운타운 시미즈경찰청사(舍) 앞.
그 버스 안에 그냥 있었다면 많이 돌기는 해도 이부리에 당도하게 되는데도 하차했으니
차 안에서 계속해서 잠든 상태였느니만 못한 결과다.
버스는 떠났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귀중한 시간의 막대한 낭비다.
이제는,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이대로 해안길을 걷느니만 못한 선택이다.
걷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내게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야 할 이유가 없다.
지체 없이 걷기 시작했다.
본의와 달리 먼 거리쪽이 택해졌지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이 걷는 것이니까.
니시마치(西町)공원 앞에서 3시방향 우회하는 321번 도로가 헨로미치다.
아시즈리 서니 로드(足摺sunny road)라는 이름도 달고 있는 길이다.
비가 올 듯 우울한 날씨라 걸음에 날개가 달린 듯 속도감이 났다.
그런데, 하기모리는 내 지도책의 이 길을 왜 사정 없이 더럽혔을까.
차량의 왕래도 많지 않고 불편하거나 방황할 염려가 전혀 없는 길인데도.
구간 거리가 보행자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이유라면 그가 나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태평양 하구의 카구미 강(加久見川) 건너편 시미즈 고등학교 앞을 지났고 강도 건넜다.
다운타운을 벗어난 후로는 인가가 뜸해진 길이라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아직 해가 남아있을 시간인데도 어두컴컴한데 곧 해가 지면 어찌한다?
인가는 물론 코야도 헨로상휴게소도 없는 길인데.
어떤 집이든 자리를 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마냥 걸을 수 밖에 없다.
제비는 등대에다 집을 짓고요. / 즐겁게 즐겁게 살아가건만.
오늘도 물새는 왜 이렇게 외로이 / 물결 따라 끝 없이 날아갑니다.
너무 처량하기 때문인지 이즈음에는 들어본 적이 없으나 내 세대는 많이 불렀던 동요다.
오늘 바닷가를 걷고 있는 내가 물새처럼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믿는 데가 있다.
나는 이 새들보다 훨씬 귀한 존재다.
그러므로, 새들도 돌보아 주시는 분이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외면하실 리 없다.
그게 아니면, 불의 연단에 견디지 못하고 소멸되고 마는 금보다 더 강인하고 귀한 존재가
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거나.
해변 마을 요로(養老)를 지나며 중얼거렸다.
늙은이를 공대하는 마을인가.
우리나라에서도 늙은이 살기 좋은 마을은 효자동이라는 우스갯소리로가 있잖은가.
작은 어항이 낙시에 알맞는지 낙시도구 가개만 돋보이는 어촌이다.
야욕의 화신인 나라와 달리 순수 무구한 노인 공대
지금까지 보다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낮은 고개를 넘어서 돌아갈 때 학교 교사로 보이는
건물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평소라면 여광이 있을 때지만 워낙 흐린 날이라 가까이 부닥쳤을 때 비로소 보인 것이다.
교실이 아니면 어떠냐 이 긴 건물에 비 드리치지 않는 곳이 없겠는가.
운영중이라도, 폐교 상태라도 상관 없다.
새벽같이 떠날 것이니까.
후자라면 더 좋겠지만.(시비할 아무도 없을 테니까)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다가갔는데 정문 일대에 서있는 간판에 다소 당황되었다.
한 지도에는 요로소학교로 등재되어 있으나 폐교된 교사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청화회(社会福祉法人 清和会)의 '안키나 이에(あんきな家)'
토사시미즈 시(高知県) 거주 해당 노인들을 위한 소규모 복지기관인데 외국인(한국)헨로
상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려 할까.
아무튼, 맞닥뜨려 보려고 사무실을 찾아갔다.
저녁식사가 막 끝난 후라 거동이 불편하거나 정신장애인으로 보이며 동작이 조금 뜬 노인
외에는 설겆이하느라 식당이 조금 바쁠 뿐인데 몇 여인끼리 말이 오가는 듯 했다.
아무데나 비만 들이치지 않는 곳을 이용하도록 도와달라는 나에 대해 오지이상을 그렇게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no 하는 것이 낫다는 그들의 뜻을 책임자에게 올린 듯.
'차라리 no가 낫다'는 뜻은 다분히 긍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자는 노인 공대가 아니고 후자는 인정의 문제니까.
책임자에게 긍정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라라.
곧, 여인의 안내를 받았다.
너른 실내체육관이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
알맞은 위치에 매트리스(mattress)를 깔고 자리를 펴기 전에 마루 위에서 스트레칭(stre
tching)을 하고 있는데 다른 앳된 여직원이 달리듯이 왔다.
휑한 체육관이 맘에 걸렸던가.
다시 안내받은 곳은 식당과 주방이 하나의 홀로 되어 있는데 거기 딸린 너른 방이다.
큰 문틀만 있고 문이 없는 것이 흠일 뿐 깨끗이 정돈된 방.
아침 6시 이전에 방 정리를 마친다는 것이 조건이지만 그것은 내게 조건이 되지 못한다.
어차피 그 전에 나설 것이니까.
문이 없기는 해도 널다란 체육관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늑한데 하물며 통비닐과 비교할 수
있는가.(맑고 별이 총총한 밤이면 비닐이 나을 수도 있지만)
배낭을 풀고 있는 사이에 다시 변동이 왔다.
풀어제치던 배낭을 대충 싸서 조용한 방으로 옮긴 것.
안키(安氣)나 이에(家)의 가족들 방에 이웃한 빈 방으로 옮긴 후에 한국 말을 하는 젊은 여
직원이 오니끼리와 우메보시(?)가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저녁식사까지 챙겨준 것.(시미즈에서 산 먹거리가 있는데)
우리 말을 학교에서 배웠다는, 소녀 같은 마키(麻記)양.
또 옮기는 일이 없겠느냐는 내 물음에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듯이 미안한 표정이었다.
통비닐 보다 체육관이, 체육관보다는 문이 없으나 방이, 불안전한 방 보다 온전한 방에서
유하게 함으로서 그들의 마음도 편해졌나.
섬 나라는 온갖 수단으로 끊임 없이 대륙에의 진출과 확장을 시도하지만 그 안에 사는 개
개인의 노인 공대는 이처럼 순수 무구하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개구리처럼 늘 어떻게 마감될 지 모르는 것이 내 하루다.
아침의 생각과 같을 수 있지만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개구리야 제 의지로 튀지만 나는 내 뜻 아닌 다른 힘에 의해서다.
계획은 내 의지로 하지만 결과는 내 바람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진인사 후 대천명 하는데 꿈 속에서라도 본 적이 없는 안키나家가 오늘의
종착역이다. <계 속>
첫댓글 오늘도 좋은 글과 그림에 오래오래 머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어느 새, 봄이 또 오네요. 불사춘이 아니기 바랍니다만. 양주 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