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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世-10世] 광산인(光山人) 인물세고(人物世考) |
[식][길][준][책][정준][양감][의영][약온][의원][광중][대균][대용][선][체]
2세 김식(金軾) 벼슬이 각간이니 평장의 품계이시다.
3세 김길(金佶)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삼중대광 사공에 이르렀다.
4세 김준(金峻) 길(佶)의 아들로 고려의 문신. 삼중대광(三重大匡) 좌복야(佐僕射)를 지냈다.
5세 김책(金策) 준(峻)의 아들로 고려 광종 15년(서기 964년) 甲子三月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있었는데 조익방(趙翌榜)에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니 임금께서 잔치를 베풀고 급제를 축하하고 특별히 의봉문(儀鳳門)을 열어 말(馬)을 하사하면서 마부로 하여금 고삐를 잡고 출입케 하여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였으며, 여러 요직(要職)을 거쳐 좌복야(左僕射), 한림학사,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이다.
한편 광산탁씨족보(光山卓氏族譜)에 의하면 그 始祖 탁지엽(卓之葉)이 光山 金文貞公 문하에서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김책(金策)이 관직을 떠난 후 바로 光州에서 터를 잡고 글을 가르쳤다고 본다.
6세 김정준(金廷俊) 김책(金策)의 아들로 고려때의 문신, 서기 1035년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되었고 1040년(정종 7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과 권지승선(權知丞宣)이 되었다가 1043년(정종 10년) 승선(丞宣)이 되었다. 1049년(문종 4년) 중추원사(中樞院事)와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를 거쳐 1053년(문종 8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가 1055년(문종 10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1057년(문종 12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할 때 어구마(御廐馬) 1필(匹)을 하사받았다.
7세 김양감(金良鑑) 정준(廷俊)의 아들, 고려 문종때의 문신이며 유현(儒賢). 1050년(문종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서기 1070년(문종 24년) 상서우승좌간의대부(尙書右丞左諫議大夫)와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가 되고, 이듬해 상서좌승지어사대사(尙書佐承知御史臺事)에 제수 되었으며, 1072년(문종 26년)에 태복경(太僕卿)이 되어 송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1074년(문종 28년)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부상서(戶部尙書)로서 송나라 사신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 1081년(문종 35년) 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使)를 거쳐 좌복야(佐僕射)가 되었다. 1083년(문종 37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아뢰었고 1086년(선종 4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어 이듬해 다시 시정의 득실을 진주(陳奏) 하였으며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로서 그 해 7월 선덕전(宣德殿)에서 또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다. 12월에 수태위(守太尉)가 되었고, 여러 요직을 거쳐 수태보문하시중감수국사(守太尉門下侍中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일찍이 宋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박문약례(博文約禮)하며 미사(微辭)와 오지(奧旨)는 친히 정자문(程子門)에서 배웠고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을 본뜨고 경(經)과 전(傳)을 가지고 돌아와 성현(聖賢)의 연원(淵源)을 닦고 공자(孔子)의 사당을 집 뒤에 세우고 춘추(春秋)로 제사(祭祀)하니 동국(東國:우리나라)에 문묘(文廟)가 시작된 것이 처음이었고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諡號는 문안공(文安公)이며, 1957년 고창(高敞)의 화동서원(華東書院)에 철향(綴享)되었다.
配는 贈서해군대부인 최씨(贈西海郡大夫人 崔氏) 父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추원사(中樞院事) 연하(延하)이다.
8세 김약온(金若溫) (1059∼1140) 82歲 양감(良鑑)의 아들로 고려 인종때 문신. 초명은 의문(義文), 字는 유승(柔勝),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122년(인종 1년) 평장사 검교사도(平章事檢校司徒)와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을 지냈고, 수태부문하시중판호부사(守太傅門下侍中判戶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성품이 공검하고 염정(廉正)하여 일찍이 부귀로 남에게 교태(驕態)를 보이지 않았으며 시호는 사정공(思靖公)이다.
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 父 문하시중 정헌공(門下侍中貞憲公) 祖 문하시중 장화공(門下侍中章和公) 자연(子淵) 曾祖 좌복야 문경공(左僕射文景公) 한(翰), 外祖 청주왕가도 상당현군(淸州王可道 上黨縣君) (依李氏譜)
8세 김의원(金義元) (1066∼1148) 83歲 양감(良鑑)의 아들로 고려 인종때 문신 17歲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아버지 문안공의 음덕으로 관직에 올라 장사랑과 군기시주부동정(同正)이 되었다, 1088년(선종 6년) 23세에 수어도감판관(戍御都監判官)을 지냈고 여러번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이 되어 감찰어사(叢察御史)로 연천(漣川)을 지킬 때 여진족을 쳐서 큰 공을 세웠다. 호부상서(戶部尙書)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등을 역임했다. 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 父 국자제주(國子祭酒) 석(碩). 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 父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事) 자인(資仁), 祖 문하시중 정헌공(門下侍中貞憲公), 曾祖 문하시중 장화공(門下侍中章和公) 자연(子淵) (依李氏譜)
9세 김광중(金光中) 의원(義元)의 아들로 고려 후기의 무신. 어머니는 인천이씨로 예부상서 자인의 딸이다. 1163년(의종 18년) 급사(給事) 벼슬로 있다가 병마부사(兵馬副使)에 승천(昇薦)되어 실지(失地)를 회복(回復)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금(金)나라를 공격하여 그 집을 불사르고 방수(防守)하는 둔전(屯田)을 두었다. 1170년(의종 25년) 간의대부(諫議大夫) 비서감(秘書監)이 되었고 8월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박광승(朴光升)의 밀고로 화를 입었다.
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 父 참지정사(參知政事) 식(軾). 祖 병부랑중(兵部郞中) 자효(資孝) 曾祖 문하시중 정헌공(門下侍中貞憲公), 外祖 부평이씨 이위 중서령(富平李氏瑋 中書令) (有李軾誌文)
9세 김대균(金大鈞)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충정공 의원이며 어머니는 이씨로 예부상서(禮部尙書) 자인(資仁)의 딸이다.
벼슬은 문림랑(文林郞)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이었다.
9세 김대용(金大庸)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충정공 의원이며 어머니는 이씨로 예부상서(禮部尙書) 자인(資仁)의 딸이다.
벼슬은 문림랑(文林郞) 위위주부동정(衛尉主簿同正)이었다.
9세 김선(金璇)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아버지는 사정공(思靖公) 약온(若溫) 벼슬은 병부시랑(兵部侍郞)이었다.
10세 김체(金체) 고려 후기의 문신, 비서감(秘書監) 광중(光中)의 아들로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냈으며, 『배순석(裵順碩)이 군사를 모집하므로 公이 군사를 훈련하여 접응하러 가다가 박광승(朴光升)이 제고사(祭告使)로 온다는 말을 듣고 먼저 광승(光升)의 아비를 잡아 원수를 갚았다.』(見高麗史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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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世-20世] 광산인(光山人) 인물세고(人物世考)
11세 김위(金位) 고려 후기의 문신. 벼슬은 삼사사(三司使)이며,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에 추봉(追封)되었으며, 황국(皇國)에서 상서령(尙書令)을 추봉(追封)하였다.
配는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 전주유(박?)씨(全州柳(朴?)氏)이다. (依元義誌文)
11세 김주영(金珠永) 고려 후기의 문신, 벼슬은 금오위중랑장동정행대정(金吾衛中郞將同正行隊正)을 지냈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호부상서상장군(戶部尙書上將軍)에 추증(追贈)되었다.
12세 김원의(金元義) (1147∼1217) 71歲 상서령(尙書令) 위(位) 첫째 아들로 初名은 광성(光成), 고려 중,후기의 무신. 벼슬은 특진(特進)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부 문하시랑평장사(守太傅 門下侍郞平章事) 상장군(上將軍) 판병부사(判兵部事)이며, 시호는 경간공(景簡公)이다.
配는 연안인씨(延安印氏) 父 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 영보(榮寶)이다. (有 兩位誌文及 氏族源流, 文獻備考,
※ 金元義 誌文은 國立博物館 第四二七에 있으며 年代는 高麗高宗四年(西紀 一二一七年)
【四二七, 金元義墓誌】
『住所 國立博物館
年代 高麗高宗4年(西紀 一二一七年)
高麗國卒特進守太傅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判兵部事金公墓誌銘
公諱元義海陽人追封守司空左僕射 諱位之長子也越庚寅秋 明廟自侯卽政公
以右中禁隨 駕以其功擢爲隊校及 西都叛公從征伐有功遷別將又以右軍兵馬
錄事討南賊轉郞將辛丑秋出爲雲中道監稅使戊申秋全羅道按察使先是西京叛亂
田簿蕩失 國家遺刑部郞中金卿量其土田積年乃成然分授不均人..................
門下侍郞平章事判兵部事加特進乙亥上章乞退
上重違其志以是□仍令就第於是懸車自樂室丁丑秋七月十三日以疾卒干正元里
享年七十一有一 上聞訃震悼命有司辨喪事爲轍朝三日諡曰景簡公以是年八月
庚申葬干法雲山之麓禮也公性貞正募欲歷官淸謹未................................』
※(참고문헌 : 광산김씨종보 제155호참조)
12세 김광세(金光世)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상서령(尙書令) 위(位)이다.
벼슬은 신호위(神虎衛) 중랑장(中郞將)이었고, 황국(皇國)에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추봉(追封)받고 조의대부(朝議大夫)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추증(追贈)되었다.
12세 김광존(金光存)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증,동지추밀원사(贈,同知樞密院事) 주영(珠永)이다. 벼슬은 흥위위(興威尉) 별장동정(別將同正)이었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와 이부상서겸판예부사(吏部尙書兼判禮部事) 상호군(上護軍)에 추증(追贈)되었다..
13세 김공수(金公粹)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특진(特進)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부 문하시랑평장사(守太傅 門下侍郞平章事) 상장군(上將軍) 판병부사(判兵部事) 원의(元義)의 장자(長子)이며 어머니는 연안인씨(延安印氏) 父 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 영보(榮寶)의 딸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내시(內侍) 감문위녹사참군사겸 직한림원(監門衛錄事參軍兼 直翰林院)을 지냈다. (見東文選)
13세 김룡(金龍)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특진(特進)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부 문하시랑평장사(守太傅 門下侍郞平章事) 상장군(上將軍) 판병부사(判兵部事) 원의(元義)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연안인씨(延安印氏) 父 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 영보(榮寶)의 딸이다. 一名은 취정(就貞) 或云 평(坪)이다. 조청대부(朝請大夫) 흥위위대장군(興威尉大將軍)을 지냈다. (依洪奎配金氏誌文, 氏族源流)
13세 김경량(金鏡亮)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증,대장군(贈大將軍) 광세(光世)이다.
벼슬은 황국조청대부(皇國朝請大夫)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이었고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13세 김대린(金大鱗)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증이부상서겸판예부사(贈吏部尙書兼判禮部事) 상호군(上護軍) 광존(光存)이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예빈경(禮賓卿)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추증(追贈)되었다.
配는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 父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齡)이다.
14세 김연(金鍊) 一作 練,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조청대부(朝請大夫) 흥위위대장군(興威尉大將軍)을 지낸 룡(龍)이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위 참지정사(守太尉參知政事) 이부상서상장군(吏部尙書上將軍) 판삼사사(判三司使)를 지냈다. 충렬왕 4年戊寅(1278)卒
配는 무송유씨(茂松庾氏) 父 추밀원좌부승지(樞密院左副承旨) 홍(弘)이다. (依洪奎配金氏誌文及茂松庾譜,見高麗史)
14세 김수(金須) (1225∼1270)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증,문하평장사(贈門下平章事) 경량(鏡亮)이다. 1255년(고종 4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원종때에 감찰어사를 거쳐 영암부사(靈巖副使)로 나갔다. 1270년(원종12) 진도(珍島)에서 패한 삼별초(三別抄)가 제주(濟州)로 몰려 들어 난(亂)을 일으키자 안찰사(按察俊) 권단의 명으로 2백명의 관군을 이끌고 제주(濟州)를 지키다가 11月3日 순절하였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참지정사(參知政事)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판예부사(判禮部事)에 추증(追贈)되었고 그 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누증(累贈)되었다. 문정공파조(文正公派祖) 태현(台鉉)의 아버지이시다
配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옥구고씨(沃溝高氏) 父 예빈경(禮賓卿) 정( ) 祖 동국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 영중(瑩中) 曾祖 감찰어사(監察御史) 세재(世材) 外祖 대사성(大司成)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조통(趙通) (高宗丙戌二月十一生. 忠肅王 丁卯七月一日卒 壽百二歲, 1226∼1327)
묘(墓)는 장단군 송남면 고장산(高張山)에 있었는데 국토가 분단되어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함을 한하여 1989년 4월 30일에 제주시에 설단(設壇)하였다.
14세 김주정(金周鼎) (문숙공 파조:文肅公派祖)(1228∼1290) 63歲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지숙(之叔), 아버지는 증문하평장사(贈門下平章事) 경량(鏡亮)이다.
1264년(원종6) 문과에 급제하였고 해양부록사(海陽府錄事)를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고 1274년(충렬왕1) 대부경좌사의대부(大府卿左議大夫)로 승진되었으며 1278년(충렬5)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가 되어 왕을 호종(扈從) 원나라에 들어가서 각군(各軍)의 공물(供物) 받는 일을 없애고 김방경(金方慶)이 큰 공이 있음에도 억울하게 유배(流配)된 것을 상소하여 석방케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오르고 1281년(충렬8) 원나라 세조(世祖)가 제2차 일본정벌을 계획하자 소용대장군우부도통(昭勇大將軍右副都統)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그 후 광정대부도첨의사사보문각태학사동수국사판삼사(匡靖大夫都僉議使司寶文閣太學士同修國史判三司使)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숙공 (文肅公)이다.
묘는 실전되어 수호하지 못하다가 후손 천상(天相)이 1749년(영조26)에 개성부 동문외 중서면 연하동 덕달곡에서 찾아 수호하게 되었으나 국토 분단으로 봉심(奉審)할 수 없어 설단 하였다. 配는 상질현대부인(尙質縣大夫人) 흥성장씨(興城張氏) 父 증,군부판서(贈軍簿判書) 득구(得球) 生一男二女, 配는 김씨(金氏) 父 찬성사(贊成事) 연(璉) 生一男, 配는 이씨(李氏) 父 판각문사(判閣門事) 신손(信孫)이다. (參考文獻 ; 高麗史)
14세 김규(金珪) (낭장공 파조:郎將公派祖) 구휘(舊諱) 찬(贊) 고려 충렬왕때 무신.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 대린(大鱗)이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齡)이다.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에 들어가 낭장동정(郎將同正)이 되어 전공을 많이 세웠다.
14세 김연(金璉) (양간공 파조:良簡公派祖) (1215년∼1291) 78歲 고려 충렬왕때의 문신. 初名은 중룡(仲龍), 자는 기지(器之), 아버지는 증문하시랑(贈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대린(大鱗)이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齡)의 딸이다. 公은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썹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內侍)가 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1255년(고종 43)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선정(善政)하였고 네 고을에 치적(治積)을 남겼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1275년(충렬왕 2) 경상도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동정(同征: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戰艦)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꿈에 허리에 찬 금어(金魚: 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으로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니 스스로 해몽(解夢)하기를 "몸의 장식이 이미 갔으니 이제 오래 머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승진시키고 이어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匡靖大夫 僉議侍郞 贊成事)로 치사(致仕)했다. 화상(畵像)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고 화상찬(畵像贊)만 남아있다. 1261년(원종 3)에 발행된 호적(戶籍)이 후손(後孫) 부필(富弼)의 종가(宗家)에 보존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현존(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이다. 시호는 양간공(良簡公)이다. 1781년(정조 6) 고창군 고수면 전불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配는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조씨(綾城曺氏) 父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저(著), 祖 검교신호위장군복정(檢校神虎衛將軍僕正) 추재(樞材), 曾祖 호장보윤(戶長甫尹) 자렴(子廉), 外祖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주(貞州) 정장(鄭莊)이다. (見高麗史列傳, 有畵像贊及辛酉戶籍)
『양간공 호적(良簡公戶籍』
대덕(大德)5년 고려 충렬왕(高麗忠烈王) 28년(1301) 11월에 동부 상동향 일리 신유(辛酉: 1261) 방(坊)에 기재된 호적(戶籍)에 준(准)한다. 조산대부 시소부강 김연(金璉)의 고명은 중륭(仲龍)이니 나이가 47이고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아버지는 추봉(追封)된 예빈경 대린(大鱗)이요 할아버지는 흥위위 별장동정 광존(光存)이오 증조는 금오위중랑장동정 행대정 주영(珠永)이고 어머니는 추봉 익양군부인 김씨(金氏)이니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외조는 호장 김준령이다. 처(妻)는 가봉(加封) 연주군부인 조씨(曺氏)이니 본관은 능성(綾城)이요 나이는 42이다. 아버지는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상장군 세자빈객 저(著)이니 고명(古明)은 시저(時著)요 할아버지는 검교 신호위장군복정 추재(樞材)이니 나이 67이요 본관은 정주(貞州)요 외조(外祖)는 좌우위 보승중랑장 정장(鄭莊)이다. 병산( 産)하니 1녀소사는 나이 19요 2녀소사는 나이 8이요 1남(男) 파지(巴只)는 나이 5이니 개명(改名)하여 원구(元具)요 3녀소사는 나이 7이다. (파지(巴只: 남자를 지칭), 소사(召史: 여자를 지칭함)
『양간공 화상찬(良簡公 畵像贊』
높고 훌륭한 평장(平章)이여 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도다 눈썹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도다. 일찍이 내시(內侍)로 임금을 지척(咫尺)에서 모셨도다 용(龍)이 아니면 봉(鳳)이니 상서(祥瑞)롭게 세상에 나리었도다. 나이 30이 못된 약관(弱冠)에 황금인패(黃金印牌)를 찼도다 사주에 애휼(愛恤)을 끼치니 백성이 감당(甘棠)으로 노래하네. 정승의 자리에 오르니 곽분양(郭汾陽)의 부귀를 누렸도다 아들 사위 생질(甥姪)들이 금성(禁省)에 가득하니 영화가 이어져서 조무(祖武)가 상접하니 문호(門戶)가 휘황(輝煌)하게 밝았도다. 청풍만고(淸風萬古)에 길이 영당(影堂)에 걸어 모시리라. ○선세에 집에 세사람 화상이 한 폭으로 되어 각각 찬(贊)이 있으니 한 분은 중산대부 국학대사성 보문서학사로 치사한 김찬(金贊)이요, 둘째 분은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사로 치사한 김련(金璉)이요, 셋째 분은 중산대부 판비서성사로 치사한 김제(金?)이다. 김찬(金贊)의 찬(贊)은 전하여지지 않았고 김련(金璉)의 찬(贊)은 위와 같고 김제(金?)의 찬(贊)에는 조부가 동복 있고 아버지 또한 그러하더니 공의 형제에 와서는 칠폭홍천이 있다 하였으니 다 문벌이 화려함을 성대히 칭찬함이었다. 그러나 김찬(金贊)과 김제(金?)는 김련(金璉)의 일가(一家)인 듯 하나 상고(詳考)할 수 없다. ○선조 26년 임진(壬辰: 1592) 병화에 화상이 소실되었으니 원통 하도다.
14세 김이(金珥) 구휘(舊諱) 김제(金제) 충렬왕(忠烈王)때 제안(提按) 황대전고(黃臺典誥)를 지냈으며 忠烈王 辛巳에 음죽감무(陰竹監務)를 지냈으며, 충렬왕(忠烈王) 정미(丁未)에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를 찬제(撰製)하였다. (見高麗史)
『광산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
이 고을은 신라 때 자사의 관할하던 곳이다. 이 때에 왕자 휘(諱) 흥(興)광(光)께서 장차 난리가 있을걸 예견하시고 서인(庶人)이 되어 이 고을 서쪽 한 마을에 오시어 거주하셨다. 마침 한 자제를 낳으시니 그 명함은 식(軾)이요 그 직함은 각간(角干)이라, 식(軾)께서 김길(金佶)을 낳으시니 길(佶)께서는 계교로 려조(麗朝)를 도와 통합하는 왕업에 큰 공이 있어 삼중대광 공신이 되시고 佶께서 좌복야(左僕射) 김준(金峻)을 낳으시고 峻께서 평장사(平章事) 문정공 김책(金策)을 낳으시니 策께서 광묘조에 특과로 뽑히어 상이 특별히 의봉문을 열고 어마를 태워 호송하여 영예를 후인에게 보였다. 策께서 평장사 정준(廷俊)을 낳으시고 廷俊께서 문하시중 문안공(文安公) 양감(良鑑)을 낳으시니 良鑑께서는 희령 갑인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태묘국자도를 본 떠서 본조에 바쳐 우리 동방에 비로소 창건되었다. 그리고 그 때에 송나라의 유명한 소동파(蘇東坡)가 작별하는 시를 지어 주었으니 이르되 "빌어 삼한 사신에게 주노니 새 그림이 낙랑에 이른다"고 하였다. 良鑑께서는 평장사 의원(義元)을 낳으셨다. 義元은 나의 현조(玄祖)이시라. 후인이 우리 시조 왕자공 興光께서 사시던 곳에 평장사가 많이 났다고 하여 동리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다. 이제 내가 제안(提按)으로서 여기에 와 이 사실을 기록함은 비록 우리의 내향(內鄕)이나 누세를 경과하여 그 고을 사람이 이 본말을 자상히 모르는고로 시에 가로되 "문정공이 해동에 어지시니 홀로 천장에 독보로 이르니 평장 한 마을이 오히려 의연하도다"
대덕 십일년 유월 일 제안 황대전고 김 이 씀(광주 평장동 유허비 음기)
15세 김지숙(金之淑) (1238∼1310) 73歲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위 참지정사(守太尉參知政事) 이부상서상장군(吏部尙書上將軍) 판삼사사(判三司使)를 지낸 연(鍊)이다. 고종(高宗) 25년 戊戌生이며 1270년 삼별초(三別抄)의 난(亂)때 관군의 장군으로 참전하여 진도(珍島)에서 적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승화후 온(承化候 溫)의 도움으로 참형을 면하고 거짓 투항하여 적정(敵情)을 수시로 관군에 알려 진도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후 관직이 누진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성품이 염결(廉潔) 강직하여 내,외직을 역임할 때 치적에 대한 성가(聲價)가 높았으며, 집안이 청빈하여 두 딸이 있었으나 가난으로 출가하지 못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子孫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3대에 거쳐 시호를 받는등 영광을 누렸다. 시호는 광절공(匡節公)이다. (見高麗史列傳)
15세 김지(金祉) 고려 후기의 무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위 참지정사(守太尉參知政事) 이부상서상장군(吏部尙書上將軍) 판삼사사(判三司使)를 지낸 연(鍊)의 셋째 아들이다. 一名은 유지(由祉),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趙延壽誌文)
配는 언양김씨(彦陽金氏) 父 수태부(守太傅)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익대공 전(翼戴公) 佺, 祖 평장사(平章事) 위열공(威烈公) 취려(就礪), 曾祖 대장군(大將軍) 부(富) (依孫金倫誌文)
15세 김도(金도) (?∼1317) 初名 지기(之沂) 고려 후기의 무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위 참지정사(守太尉參知政事) 이부상서상장군(吏部尙書上將軍) 판삼사사(判三司使)를 지낸 연(鍊)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무송유씨(茂松庾氏)로 대언(代言) 홍(弘)의 딸이다.
벼슬은 중대광(重大匡)이며, (趙延壽誌文) 밀직부사(密直副使), 광산군(光山君)에 봉(封)해졌다. (1317년)三月二十九日乙未卒.
配는 문화유씨(文化柳氏) 父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정신공(貞愼公) 승(陞), (依氏族源流,見高麗史)
15세 김태현(金台鉉)(문정공 파조:文正公派祖) (1261∼1330) 70歲 고려 후기 문신. 자는 불기(不器), 호는 쾌헌(快軒), 또는 설암(雪菴), 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참지정사(參知政事)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판예부사(判禮部事) 수(須)이며, 어머니는 옥구군대부인(沃溝郡大夫人) 고씨(高氏)로 예빈경(禮賓卿) 정(?)의 딸이다. 용모가 위장수려(偉壯秀麗)하고 담력과 지략이 출중하였다. 나이 15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부(詞賦)의 걸출(傑出)한 문장을 숙부 문숙공(文肅公) 주정(周鼎)이 보고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사람이라 칭찬하였다. 좌우위참군(左右衛參軍) 직문한서(直文翰署)에 제수 되었으며 이 때부터 7년 동안에 세 번 승진하여 관계(官階)가 7품에 이르기까지 다 학문과 문필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직책에 등용되었다. 1288년(충렬왕 15)에 당후관(堂後官)을 거쳐 권지(權智)가 되고 또 상의관제(商議官制)가 폐지되었으므로 따라서 퇴관하여 이로부터 10년간 집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심신을 정양하고 1321년(충숙왕 9)에 첨의평리(僉議評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판삼사사(判三司使)가 되었으며 그 후 요직을 두루 거쳐 1327년(충숙왕 15)에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 수문관 대제학전리사사(大提學兼典理司事)로 치사(致仕)하였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아들 광철, 광재와 삼부자가 명신으로 문장과 덕이 뛰어나 모두 文字 시호를 받았다. 묘(墓)는 개풍군 중면 대룡리 대야치 덕운산(開豊郡 中面 大龍里 大也峙 德雲山)에 있다. 국토가 분단되어 향화(香火)를 받들 수 없음을 후손들이 한하여 광산군 비아면에 설단하여 매년 3월 3일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 저서로는 《동국문감》이 있다. (見高麗史)
配는 화평김씨(化平金氏) 父 좌우위낭장(左右衛郎將) 의(儀) 生一子, 配 개풍군대부인(開豊郡大夫人) 왕씨(王氏) 父 신호위낭장(神虎衛郎將) 증추밀원사(贈樞密院事) 정단(丁旦), 祖 예빈경 (禮賓卿) 근(覲), 外祖 좌사간(左司諫) 이서춘(李瑞椿) 元宗丙寅生 恭愍王丙申三月十八日戊戌卒 壽九十一歲○墓 (牧隱李穡撰誌) 有短碣左刻金侍中右刻大夫人王氏墓(見豊德陵墓誌)
15세 김심(金深)(문숙공파/충숙공) (1262∼1338) 77歲.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연수(淵 ), 아버지는 문숙공(文肅公) 주정(周鼎)이며, 어머니는 상질현대부인(尙質縣大夫人) 장씨(張氏)로 증판서(贈判書) 득구(得球)의 딸이다.
충렬왕 때 뚤루게(禿魯花 :볼모)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낭장(郎將)이 되었고, 밀직부사(密直副使), 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1303년(충렬왕29)에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 들어가 있을 때 오기(吳祈) 석천보(石天輔) 등이 충렬왕의 총애를 미끼로 왕의 부자(父子)를 이간하므로 홍자번(洪子藩) 등과 함께 삼군(三軍)을 이끌고 왕궁(王宮)을 포위, 오기를 잡아 원나라에 압송했다 1375년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충선왕(忠宣王)을 모시고 나와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1309년(충선왕 1) 그의 딸이 원나라 인종(仁宗)의 황후(皇后)가 되자 원제(元帝)에 의해 고려 도원수(都元帥)의 벼슬을 받았다. 충숙왕(忠肅王) 때 수첨의정승총부사(守僉議政丞判摠部事)에 이르고 여절보안공신(勵節保安功臣)에서 수성수의충량공신화평부원군(輸誠守義忠亮功臣化平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고 협보공신(協輔功臣)의 호(號)를 더 받았다. 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 장백상(蔣伯祥)이 재물을 탐내고 권세를 남용(濫用)하여 백성의 원성을 사자 원나라에서 사신(使臣)을 보내어 장백상을 잡아 가둔 뒤 만호(萬戶) 홍수(洪?)와 함께 성사(省事)를 대행했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고 묘(墓)는 북한 개풍군 봉국산에 있으므로 설단 향사한다.(見高麗史及尹宣佐撰誌文(先有一男),
配는 변한국부인 왕씨(卞韓國夫人 王氏(生一男四女). 配는 진강군부인 함평노씨(鎭江郡夫人咸平魯氏) 父 밀직사사(密直司事) 창문(彰文), 祖 평장사 함풍군(平章事咸豊君) 관도(貫道), 曾祖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인후(仁厚), 外祖 라주손씨 유백(羅州孫遺白)(.生二男). 配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김씨(福州金氏)(生一女). 配 모씨(某氏)(生一男一女).
15세 김유(金流)(문숙공파/시중공) 고려 후기의 문신, 초명은 가(珂문), 아버지는 문숙공(文肅公) 주정(周鼎)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로 찬성사(贊成事) 연(漣)의 딸이다.
문림랑(文林郞) 감찰어사(監察御史) 문하시중(門下侍中)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지냈다. 묘(墓)는 실전하여 나주시 향교동 삽치에 설단(設壇)하였다.
15세 김사원(金士元)(양간공파) (1257∼1319) 63歲. 고려 후기의 문신. 初名은 구(?), 또는 원구(元具). 아버지는 양간공(良簡公) 연(璉)이며, 어머니는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조씨(綾城曺氏)로 예부상서(禮部尙書) 저(著)의 딸이다.
1293년(충렬왕 20) 총랑(摠郞)으로 있을 때 언(彦)을 국문(鞠問)하라 했는데 예전부터 아는 관리(官吏)인지라 (彦)을 데려다가 화(禍)와 복(福)으로서 잘 타이르니 언(彦)이 실상을 토로 하므로 이에 대언(大彦)과 영(領)등을 베었다. 1308년(충렬왕 35)에 이혼(李混), 최균(崔勻), 승지 권준(權準)과 함께 번양왕(藩陽王)이 제정한 관제(官制)와 비판서(批判書)를 쌓아가지고 원나라로부터 서울에 돌아오니 권세(權勢)부리던 세신(世臣)과 구관(舊官)들이 다 물러갔다. 홀로 임금을 뵈올 수 있는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1310년(충선왕 3)에 원나라에서 팔찰(八札)등을 보내어 황후책봉(皇后冊封)한 일을 반포했다. 처음 환관(宦官) 이대순(李大順)이 원나라에 들어가 총애를 받고 권세를 부리더니 구평궁(救平宮)으로 더불어 노비(奴婢)의 분쟁이 있자 황제가 제령(制令)을 내려 형부(刑部)에서 결정하라 하므로 그 때 전서(典書)로서 그 안건(案件)을 주장하여 구평궁(救平宮) 위씨(韋氏)에게 노비(奴婢)를 돌려주니 대순(大順)이 노(怒)하여 팔찰(八札)과 같이 황제의 명(命)이라 하여 귀양가게 되었다. 1311년(충성왕 4)에 평양윤(平壤尹)이 되었고 이어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1316년(충숙왕 4) 상의회의(商議會議) 도감사(都監事)를 거쳐 1318(충숙왕 6)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있을 때 왕명으로 온천(溫泉)에서 잡은 새를 "선조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보본(報本)하는 것이요 내가 몸소 새를 잡아 올리는데 유사(有司)가 그렇게 반대한단 말이냐 내가 깊은 궁중(宮中0에 있어 경(卿)이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알으랴"고 하였다. 시호는 정경공(貞景公)이며 묘(墓)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配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 父 문성공회헌유(文成公晦軒裕) 祖 판도판서(版圖判書) 부(孚), 曾祖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영유(永儒), 外祖 우사간(右司諫) 漢南金祿延
15세 김사형(金士亨)(양간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화항(花巷), 아버지는 양간공(良簡公) 연(璉)이며, 어머니는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조씨(綾城曺氏)로 예부상서(禮部尙書) 저(著)의 딸이다.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였고, 묘(墓)는 실전되어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16세 김인연(金仁沇)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이부사(判吏部事) 지숙(之淑)이다. 추성보절익찬공신(推誠補節翊贊功臣)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를 지냈으며, 광산군(光山君)에 봉(封)해 졌다. 시호는 경열공(敬烈公)이다. (見高麗史列傳)
配는 순창설씨(淳昌薛氏) 父 첨의정승(僉議政丞) 제간공(齊簡公) 지충(之?) 祖 중찬문량공(中贊文良公) 공검(公儉) 曾祖 추밀부사(樞密副使) 신(愼) (依薛氏譜,見高麗史)
16세 김인연(金仁衍)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상장군(上將軍) 지(祉)이며, 어머니는 언양김씨(彦陽金氏) 수태부(守太傅)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익대공 전(翼戴公 佺)의 딸이다.
벼슬은 상서(尙書)를 지냈고 광산군(光山君)에 봉(封)해 졌다.
16세 김광식(金光軾)(문정공파/의랑공) (?∼1298) 고려 후기의 문신,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첫째 아들.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1294년(충렬왕 2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총부의랑(摠部議郞)이었다.
묘(墓)는 실전되어 광주시 광산구 비아 풍영정에 설단하다. (見高麗史)
配는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양열공(襄烈公) 인경(仁卿), 祖 증평장사(贈平章事) 표(彪)(一云臣保) (依鄭仁卿誌文)
16세 김광철(金光轍)(문정공파/문민공) (? ∼ 1349) (忠定王 乙丑六月十七日丙子卒).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둔헌(鈍軒),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1305년(충렬왕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345년(충목왕 2) 서연(書筵)이 설치되자 그 시독관(侍讀官)이 되었고, 1349(충정왕 2)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여 여러 도(道)의 경전(耕田)을 고찰(考察)케 하였다. 기황후(奇皇后 : 원나라 順帝의 第2皇后)의 족제(族弟)인 기삼만(奇三萬)이 황후의 세력을 의지하여 불법으로 사람을 해치고 재산을 탈취하는 등 만행을 자행함으로 안렴사(按廉使)로서 기삼만을 장형(杖刑) 끝에 옥사(獄死)케 하니 원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정치도감 등을 국문 하였으나 병으로 사면되었다. 삼중대광밀직사사(三重大匡密直司事) 화평군(化平君)에 봉작(封爵)되었고,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며 묘(墓)는 실전되어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에 설단하였다. (見高麗史)
配는 원주원씨(原州元氏) 父 찬성사(贊成事) 관(瓘), 祖 첨의중찬(僉議中贊) 부(傅), 曾祖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진(瑨), 外祖 밀직우승지(密直右承旨) 경주 김신(慶州金信) (依氏族源流)
16세 김광재(金光載)(문정공파/문간공) (1294∼1363(恭愍王 癸卯三月十四日甲寅卒) 70歲)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자여(子與), 호는 송당(松堂),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1313년(충선왕 5)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고 충혜왕(忠惠王) 1330년에 원나라에 갈 때 모시어 호종(扈從)한 공으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조적의 난이 평정된 뒤 원나라에 잡혀가는 왕과 함께 갔다 와 군부총랑(軍部摠郎)·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으나 간신들의 모략으로 파직당했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 지신사(知申事), 판도판서(版圖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 제조전선(提調銓選) 등을 역임, 지사사(知司事)가 되었다. 1348년(충정왕 2)에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 때에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을 총괄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전리판서(典理判書) 및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겸직했다.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12년간 은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여묘(廬墓)에서 상(喪)을 마치니 왕명에 의해 효행으로 정려(旌閭)을 받았고 그가 사는 곳이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로 칭송받고 알려지게 되었다.이경섭, 김광재(金光載)의 후계는 제주(濟州)를 세거의 터로 삼았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見高麗史)
配는 안동김씨(安東金氏) 父 평장사양간공(平章事良簡公) 승택(承澤), 祖 전리판서(典理判書) 선(?), 曾祖 도원수(都元帥) 충렬공(忠烈公) 방경(方慶), 外祖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경주 김혼(金琿) (依氏族源流)
16세 김광로(金光輅)(문정공파/록사공) 고려 후기의 문신,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넷째 아들.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1317년(충숙왕 5) 문과에 급제하여 가안부 녹사(嘉安府錄事)를 지냈다.
16세 김석견(金石堅)(문숙공파/화평부원군)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계경(桂卿) 아버지는 충숙공(忠肅公) 심(深)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광정대부(匡靖大夫) 삼사우사(三司右使) 상호군(上護軍)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도첨의(都僉議) 우정승(右政丞)을 지냈으며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충혜왕(忠惠王) 때 에 조적(曺 )의 난(亂)을 평정하여 일등공신에 책훈(策勳)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하였으며 부모와 처(妻)에게는 3등을 초급9超級)하여 봉작(封爵)하고 아들에게는 7품직에 제수하고 밭 백결(百結)과 노비(奴婢) 십구(十口)를 하사받았다. (詳見麗史)
配는 전주최씨(全州崔氏) 父 사재령(司宰令) 신창(信昌)이다.
16세 김승사(金承嗣)(문숙공파/삼사좌사공)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충숙공(忠肅公) 심(深)이며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왕씨(王氏)이다.
충목왕(忠穆王)때 벼슬이 삼사좌사(三司左使)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대원(大元)에 들어가 토적(土賊) 이홍성(李弘成)등을 토평(討平)하였다. 묘(墓)는 실전되어 나주군 공산면 삼장산에 설단하였다. (見麗史)
16세 김승진(金承晉)(문숙공파/상호군)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충숙공(忠肅公) 심(深)이며 어머니는 진강군부인(鎭江郡夫人) 노씨(魯씨)이다.
벼슬은 상호군(上護軍)이었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책봉(冊封)되었으며 공검충직으로 칭송(稱頌)이 있었다. (見麗史及勝覽)
16세 김승로(金承魯)(문숙공파/예조판서공)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충숙공(忠肅公) 심(深)이다.
우왕(禑王)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냇다. 묘(墓)는 실전되어 평장동에 사우(祠宇)가 있다.
配는 경주이씨(慶州李氏) 父 민부상서(民部尙書) 복득(福得), 祖 가락군(駕洛君) 관(琯), 증조曾祖 문정공(文定公) 진(?), 外祖 시랑(侍郞) 남양 홍승속(南陽洪承續)이다.
16세 김중간(金仲幹)(문숙공파/밀직사사공) 고려 말기의 문신, 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유(流)이다.
벼슬은 상호군(上護軍)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였다. 묘(墓)는 실전되어 나주시 향교동 삽치에 설단하였다.
16세 김윤장(金允臧)(문숙공파/판도판서공)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유(流)이다.
벼슬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16세 김쟁(金錚)(낭장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낭서(郎署) 인원(仁元)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되었다.
16세 김진(金진)(양간공파) (1292∼ ?)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적재(迪齋) 아버지는 정경공(貞景公) 사원(士元)이며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로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딸이다.
1307년(충렬왕 34) 문과 추장제술과(秋場製述科)에 급제하여 1332년(충혜왕 3)에 중현대부(中顯大夫) 성균좨주(成均祭酒)로 통례문(通禮門) 부사(副使)를 겸하고 1333년(충숙왕 2)에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擧)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이 되었고 1342년(충혜왕 4)에 지공거(知貢擧: 과거의 총책)로 인재를 가장 많이 뽑았고 1333년(충숙왕 후 2)의 호적이 있으며 시호는 장영공(章榮公)이다. 묘(墓)는 개풍군 흥교면 조문리였으나 실전되었다가 1828년(순조 29)에 후손 성은(性 )과 수(燧)등이 다시 찾아 수호하였다.
配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안동)권씨(福州(安東)權氏) 父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 상호군(僉議評理 上護軍) 윤명(允明), 祖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병부상서 상호군(兵部尙書上護軍) 제(濟), 曾祖 병부상서 상장군(兵部尙書上將軍) 득공(得公), 外祖 삼중대광 세자사(三重大匡 世子師) 충렬공(忠烈公) 안동 김방경(安東 金方慶)
16세 김찬(金찬)(양간공파/참지정사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사형(士亨)이다.
벼슬은 상서(尙書)였다. 묘(墓)는 실전되어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에 설단하였다.
17세 김원명(金元命)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추성보절익찬공신(推誠補節翊贊功臣)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를 지낸 광산군(光山君) 인연(仁沇)이며, 어머니는 순창설씨(淳昌薛氏) 첨의정승(僉議政丞) 제간공(齊簡公) 지충(之충)의 딸이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에 녹선되었고, 벼슬은 삼사좌사 상호군(三司左使上護軍)이다.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해를 입었다.
配는 남양홍씨(南陽(唐)洪氏) 父 삼사좌사(三司左使) 남양군(南陽君) 주(澍)이다.(見高麗史)
17세 김속명(金續命)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추성보절익찬공신(推誠補節翊贊功臣)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를 지낸 광산군(光山君) 인연(仁沇)이며, 어머니는 순창설씨(淳昌薛氏) 첨의정승(僉議政丞) 제간공(齊簡公) 지충(之충)의 딸이다.
벼슬은 삼사좌사(三司左使) 첨의평리(僉議評理) 단성규의보리공신(端誠?義輔理功臣)에 책훈(策勳)되었으며 禑王丙寅卒.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見高麗史列傳,與地勝覽)
17세 김승조(金承祖)(문정공파/의랑공파)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총부의랑(摠部議郞) 광식(光軾)이다.
벼슬은 천우위해령별장(千牛衛海嶺別將)이었다.
단소(壇所)는 보성군 겸백면 용산리에 있다.
17세 김회조(金懷祖)(문정공파/문민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경선(景先), 호는 치당(致當) 아버지는 문민공(文敏公) 광철(光轍)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로 찬성사 관(瓘)의 딸이다.
벼슬은 통헌대부(通憲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였고 해양군(海陽君)에 봉(封)해졌으며 묘(墓)는 실전되어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에 설단하였다.
配는 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父 파평군(坡平君) 해(?), 祖 부윤 암(府尹 ?), 曾祖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정(珽), 外祖 장령(掌令) 최용(崔甬)이다.
17세 김도탁(金都卓)(문정공파/문민공파) 고려 후기의 무신, 문민공(文敏公) 광철(光轍)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로 찬성사 관(瓘)의 딸이다.
벼슬은 천우위해령별장(千牛衛海嶺別將)을 지냈고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에 추증되었으며 묘(墓)는 실전되어 정읍군 칠보면 무성리에 설단하였다.
配는 흥덕군부인(興德郡夫人) 조씨(曺氏)이다.
17세 김흥조(金興祖)(문정공파/문간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문간공(文簡公) 광재(光載)의 첫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로 평장사(平章事) 승택(承澤)의 딸이다.
수원 해주 판관(判官)을 지내으며 벼슬이 중현대부(中顯大夫) 군기감(軍器監)에 이르렀다.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에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었다. 1368년 김정(金精)등과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주살하려고 모의하다가 탄로되어 유배(流配)되는 도중에 신돈의 하수인에게 살해되었다. (見高麗史)
配는 평산신씨(平山申氏) 父 감찰대부은산백중 전(監察大夫殷山伯仲 全)
17세 김윤조(金胤祖)(문정공파/문간공파) 고려 후기의 은사(隱士), 戶籍作諱 逸. 문간공(文簡公) 광재(光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로 평장사(平章事) 승택(承澤)의 딸이다.
여말(麗末)에 신돈(辛旽)의 화를 피해 제주도(濟州道)에 입도은거(入島隱居)하여 자손이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17세 김순조(金順祖)(문정공파/록사공파)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녹사(錄事) 광로(光輅)이다.
벼슬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경상병마절도사(慶尙兵馬節度使)을 지냈다.
17세 김수(金粹)(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자수(子粹),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석견(石堅)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사재령(司宰令) 신창(信昌)의 딸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에 제주를 토벌(討伐)하고 포진(布陣)하는 방법을 계략하여 큰 공을 세웠다. 해양군(海陽君)에 봉(封)해졌고 도평의우정승(都評議右政丞)에 추증(追贈)되었다.
配는 현부인(縣夫人) 박씨(朴氏)
17세 김정(金精)(문숙공파/삼사좌사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승사(承嗣)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밀직부사(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이었고 말기에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국정을 문란케 하므로 숙청을 꾀하다가 신돈에게 해를 입고 卒하였다.
묘(墓)는 실전되어 나주군 공산면에 설단(設壇)하였다. (見麗史)
17세 김적선(金積善)(문숙공파/상호군파) 고려 후기의 무신, 상호군(上護軍) 승진(承晋)의 첫째 아들이다.
벼슬은 중추원사(中樞院事)로 일찍이 왜적(倭賊)을 격멸(擊滅)하는데 공이 있었다.
묘(墓)는 담양 옥천산에 있다.
17세 김덕선(金德善)(문숙공파/상호군파) 고려 후기의 문신, 상호군(上護軍) 승진(承晋)의 둘째 아들이다.
벼슬은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17세 김종선(金從善)(문숙공파/상호군파) 고려 후기의 문신, 상호군(上護軍) 승진(承晋)의 셋째 아들이다.
학문이 고매하였고 벼슬은 공민왕조(恭愍王朝)를 거쳐 조선(朝鮮)때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감사(慶尙監司)을 지냈다.
17세 김방(金倣)(문숙공파/예조판서공파) 아버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승노(承魯)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민부상서(民部尙書) 복득(福得)의 딸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를 거쳐 조선(朝鮮)초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통훈대부, 김제(金堤)군사 겸 권농병마단련부사로 근무할 때 황폐해 가는 김제 땅 벽골제(金堤 碧骨堤= 저수지)를 확장 보수하여 김제 만경(萬頃) 평야를 옥토(沃土)로 만들었고, 그 후 광주 목사로 재임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중농정책으로 경국제민하는 뜻을 받들어 공의 개인 소유지인 저습지(低濕地) 수만평(현 광주시 중흥동 효죽동 계림동의 일부)에 전천후(全天候) 사업으로 3년간에 걸쳐 경양제(光州 景陽堤) 방죽을 만들어 광주 일원의 농토를 옥답(沃畓)으로 만들어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공이 죽은 후 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향인(鄕人)이 광주 증심사(증心寺) 능주(綾州)의 쌍봉사(雙峰寺) 낙안(樂安)의 (증光寺)에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였다. 후손이 남면(南面) 재궁동(梓宮洞)에 재실을 지어 세일사를 봉행하고 있다. (見勝覽及兩郡誌)
配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17세 김덕룡(金德龍)(문숙공파/밀직사사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중간(仲幹)이다.
벼슬은 중직대부(中直大夫)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17세 김덕봉(金德鳳)(문숙공파/밀직사사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중간(仲幹)이다.
벼슬은 좌사랑중(左使郎中) 보문서사의(寶文署司議)였다.
17세 김성우(金成雨)(문숙공파/판도판서공파)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윤장(允臧)이다.
고려말에 약관(弱冠) 18세의 나이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되었고 1350년(충정왕 3) 도만호 겸 전라충청양호초토사(都萬戶兼 全羅忠淸兩湖招討使)에 발탁되어 왜구(倭寇) 토벌의 왕명을 받고 출정(出征)하여 전주, 나주, 부령(扶寧)등 전라지역의 오랑캐를 무찌르고 1380년(우왕 7)에는 진포구의 왜선 5백여척을 함몰시켰으며 임주(林州), 한주(韓州), 서주두둔의 왜구를 휩쓸었다. 또 다시 내포지역의 급보를 접하고 서해안의 도처에서 대첩(大捷)을 올렸다. 40여년에 걸쳐 왜구의 소굴인 이 지역을 소탕함에 있어 군둔전(軍屯田)으로 군량을 자족하고 군기제조(軍器製造)로 군의 장비(裝備)를 자급하며 군마목축으로 군마를 자축(自畜)하고 생포한 왜구는 군로(軍奴)로 노역에 충당하였다. 개선장도(凱旋壯途)에 이태조 등극으로 고려국통(高麗國統)이 무너지고 장군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로 업드려 쓰러진 애마(愛馬)의 목을 자르고 장군 역시 자처(自處)하였음으로 장군의 사적을 알 수 없으나 가노(家奴)의 전래도 군드리 모랭이 조잠이란 마을이 있고 옥마봉 남서고개에 사혁의 재가 있다.
配는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묘(墓)는 보령군 청라면 나원리 발산
17세 김여옥(金如玉)(郎將公派)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증문하시중(贈門下侍中) 쟁(錚)이다.
벼슬은 사공(司空)이었다.
17세 김광리(金光利)(양간공파/전리판서공) 고려 후기의 문신, 송도 서부향천11리에서 아버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장영공(章榮公) 진(?)과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安東)權氏)로 상호군(上護軍) 윤명(允明)의 딸이다.
공은 5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리(光利)는 장성하매 총명하였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부모에 효성이 있었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학문을 쌓아 좌우위보승산원(정8품)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벼슬을 거쳐 1352년에 좌부대언(左副代言)과 밀직부사(密直副使)(정3품)을 역임하고 봉익대부 전리판서(奉翊大夫典理判書)(현 행정자치부장관격)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이르렀다
配는 원성군부인(原城郡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 父 찬성사(贊成事) 충(忠), 祖 대제학(大提學) 관(琯), 曾祖 문순공(文純公) 부(傅), 外祖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광정공(匡靖公) 홍규(洪奎)이다. 5남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인우(仁雨)로 전리판서(典理判書)요, 2남은 갑우(甲雨)로 판전의사사(判典醫寺事) 대장군(大將軍)이요, 3남은 삼우(三雨_로 상서(尙書)요, 4남은 시우(時雨)로 판사(判事)요, 5남은 남우(南雨)로 공조전서(工曹典書)이다. 묘(墓)는 경기도 풍덕부동부망포리(현 개풍군 흥교면 조문리)있었으나 실전되었다가 1828년 후손 성은과 수등이 다시 찿아 수호하였다.
17세 김영리(金英利)(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 고려 후기의 문신, 初名은 정리(貞利), 아버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장영공(章榮公) 진(?)과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安東)權氏)로 상호군(上護軍) 윤명(允明)의 딸이다.
문정공 신현(申賢)의 문인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같이 성리학을 배웠다. 1347년(충목왕 4)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속관(屬官)을 지냈고 1351년(충정왕 4) 전라도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로서 민전(民田)을 다스렸으며 1354년(공민왕 4)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서 통의대부(通議大夫) 군기감사(軍器監事)에 이르렀다. 문정공 신현선생의 사실을 모아 화해사전(華海師全) 6권을 저술하였고 묘(墓)는 실전되었다. (見高麗史)
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父 선공부령(繕工副令) 승연(承演), 祖 첨의찬성사 양순공 경(僉議贊成事 良順公 敬), 曾祖 좌리공신 경흥군 첨의중찬 충정공 자번(佐理功臣慶興君僉議中贊 忠定公 子藩), 外祖 밀직부사 연안 이득량(密直副使 延安李得良)
17세 김성리(金成利)(양간공파/사온승공)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장영공(章榮公) 진(?)과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安東)權氏)로 상호군(上護軍) 윤명(允明)의 딸이다.
공은 장영공의 셋째 아들로 공민왕(恭愍王) 壬辰年 문과(文科)에 급제 하였으며 벼슬은 판전의사사(判典醫寺事)와 통정원 사온승동정(司 丞同正)을 역임하였다. 문학이 절륜(絶倫)하고 효우가 독실하여 사림의 추중한 바 되었다. 묘(墓)는 실전하여 장흥읍 행원리에 설단(設壇)하였다.
配는 순흥안씨(順興安氏) 父 낭장(郎將) 신검(信儉). 繼配 칠원윤씨(漆原尹氏) 父 충의공(忠義公) 길보(吉甫), 祖 군부판서(軍簿判書) 수(秀), 曾祖 신호위장군(神虎衛將軍) 양삼(養三)이다.
17세 김안리(金安利)(양간공파/판도판서공)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장영공(章榮公) 진(진)과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安東)權氏)로 상호군(上護軍) 윤명(允明)의 딸이다.
忠肅王 戊辰生이며, 벼슬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配는 죽산안씨(竹山安氏) 父 판서(判書) 한주(漢周)이다.
17세 김천리(金天利)(양간공파/밀직부사공)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장영공(章榮公) 진(진)과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安東)權氏)로 상호군(上護軍) 윤명(允明)의 딸이다.
忠肅王 癸酉生이며, 고려조(高麗朝)에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을 지냈으면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좌명원종훈(佐命原從勳)에 기록되었다. 묘(墓)는 고양이었으나 실전되었다.
配는 밀양박씨(密陽朴氏) 父 동지밀직(同知密直) 광후(光厚)이다.
17세 김서남(金瑞南)(양간공파/참지정사공)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 상서(尙書) 찬 이다.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광산군(光山君)에 봉(封)해졌다.
묘(墓)는 실전되어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에 설단(設壇)하였다.
17세 김영(金英)(사온직장공 파조) 고려 후기의 문신, 고려조 말기에 사온서직장(司온署直長)을 지내고 조선조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묘(墓)는 실전되어 중원군 금가면 잠병리에 설단(設壇)하였다.
18세 김첨(金膽)(문정공파/문민공파) (1354∼1418) 65歲, 고려 후기의 문신, 字는 자구(子具), 호는 연계(蓮溪), 아버지는 해양군(海陽君) 회조(懷祖)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파평군(坡平君) 해(?)의 딸이다.
학문에 전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했다. 1376년(우왕2)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친어군 호군(親 禦軍護軍)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지내고, 1392년(공양왕4) 정몽주(鄭夢周)를 탄핵하다가 파직 되었다. 이 해 조선이 건국되자 복직 ,1399년(정종 1) 봉상시 소경 (奉常寺少卿)에 임명되고, 그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예조전서(禮曺典書)로 예문관 제학(提學)을 겸임 , 1404년(태종4)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우군총제겸 보문각 제학(右軍摠制 兼 寶文閣提學)이 되어 여진족(女眞族)의 유민을 초유(招諭)했다. 민무질(閔無疾) 민무구(閔無咎) 형제와 가까이 하여 왕족간의 이간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파직, 후에 용서를 받았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복환되지 못하고 죽었다. 음률(音律)에 밝아 아악(雅樂)을 교정했고, 의례(儀禮)에도 정통했다.
配는 정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0이다.
묘(墓)는 실전되어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 남산촌에 설단 하였다. (見朝鮮王朝實錄, 與地勝覽)
18세 김계지(金繼志)(문정공파/문민공파/광성군) 고려 후기의 무신, 初名은 향(향), 호(號)는 송곡(松谷). 아버지는 천우위해령별장(千牛衛海嶺別將) 도탁(都卓)이며, 어머니는 흥덕군부인(興德郡夫人) 조씨(曺氏)이다. 조선초에 풍해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에 올랐고, 병조판서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제(兵曹判書兼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制) 순충보조명량공신(純忠輔祚明亮功臣)에 봉(封)해졌다. 태종조(太宗朝)에 태상왕(太上王)에게 충언 격군(忠言格君)하여 회천지공(回天之功)을 세웠다. 공의 공적을 황희의 상소로 전결노비(田結奴婢)를 하사(下賜)하였다. 선왕(先王)의 뜻을 이루었다 하여 王이 사명(賜名)을 계지(繼志)라 하시니 어사전민(御賜田民)이라는 문권(文券)을 지어 지금까지 전하여 온다. 광성군(光城君)에 봉(封)해졌다.
配는 정부인 남원양씨(南原楊氏)이다. (見太宗實錄 227∼233에 있다)
18세 김종연(金宗衍)(문숙공파/삼사좌사공파)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상호군(上護軍) 정(精)이다.
벼슬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동지밀직사사 겸 신호위 상장군(同知密直司事兼 神虎衛上將軍)이었다. 아버지 밀직부사 정(精)이 요승(妖僧) 신동(辛旽)을 죽이기를 꾀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화를 당하므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신돈이 복주(伏誅)됨에 나와서 신우(辛禑)때에 원수(元帥)가 되어 왜적을 격퇴한 공로가 있었다. 공양왕조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져 고려의 망함을 개탄하였다. 이성계를 살해하려 하다가 모사가 누설되어 각처로 숨어 다녔는데 부인과 처부(妻父)를 순군(巡軍)에 가두고 국문하니 부인이 울면서 "설사 내가 남편이 있는 곳을 안다 하더라도 어찌 참아 이를 말하며 내가 알지 못하는데 어찌 하겠는냐?"하였다. 그 후 곡주(谷州) 숲 속에 숨었다가 한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주리어 장차 죽겠으니 나를 구해달라"하니 그 사람이 "죽을 끓여 오겠다"하고 관(官)에 고하여 잡혔다. 모진 고문 끝에 지해(支解: 사지를 잘음)하여 제도(諸道)에 조리 돌리는 바가 되었다. (見高麗史列傳)
18세 김정(金鼎)(양간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영리(英利)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선공부령(繕工副令) 승연(承演)의 딸이다.
1367년(공민왕 17)에 양광도(楊廣道: 충청도)와 전라도찰방을 지냈는데 그 때 공로로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으로 책봉(冊封)되었고 중대광(重大匡) 광성군(光城君)에 봉(封)해졌다.
묘(墓)는 실전 되었다가 후손(後孫) 화택(和澤)이 춘천부사(春川府使)로 있을 때 찾아서 다시 수호(守護)하니 춘천시 칠전동 모란봉에 있다. 아들인 김약채(若采), 김약항(若恒), 김약시(若時) 3형제 대에서 광산 김씨가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18세 김인우(金仁雨)(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광리(光利)이며 어머니는 원성군부인(原城郡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찬성사(贊成事) 충(忠)의 딸이다.
공은 광리의 큰아들로 1329년에 출생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와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종2품)를 지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 난(紅巾賊亂)때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1363년 3월에 호종(扈從)한 공신(功臣)을 기록하니 우정승(右政丞) 홍언박(洪彦博)등과 더불어 일등공신(一等功臣)에 록훈(錄勳)되었다 이 때 일등공신(一等功臣)에게는 나라에서 벽 우에 초상(肖像)을 그려 걸고 그 부모와 처에게는 3등급을 올려 작(爵)을 봉하고 그아들 한사람에게 7품 벼슬을 주었으며 구사(驅使) 5명과 파수병 7인을 거느리게 하고 처음 벼슬에 들어오는 자손은 음직(陰職)으로 채용하게 했다 또 밭 1백결과 노비 10명을 주었다. 1374(공민왕 24) 아우 갑우(甲雨)의 화(禍)로 연좌(連坐)되어 장사(長沙: 현 고창군 무장면 대산면) 감무(監務)로 좌천(左遷)되었다. 묘(墓)는 실전되고 고창군 매산리 화동서원에 배향되어있다. (見高麗史 功臣錄)
18세 김갑우(金甲雨)(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광리(光利)이며 어머니는 원성군부인(原城郡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찬성사(贊成事) 충(忠)의 딸이다.
공은 인우의 아우로 1330년생이다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를 거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이 되었다. 1369년(공민왕 19) 천우위대장군으로 명나라 황태자(皇太子) 천추절(千秋節)에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2년(공민왕 22) 11월에 대호군(大護軍)으로 탐라(耽羅)의 공마(貢馬: 조공 바치는 말) 50마리를 몰고 명나라로 가는 도중에 두필을 잃어 대신 다른 말로 채워 바쳤으나 명나라 황제가 대노(大怒)하여 받아 들이지 않고 공민왕(恭愍王)을 책망하자 돌아와 통역관(通譯官) 오극충(吳克忠)과 함께 1374년 주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연좌(連坐)되어 형제분이 각처(전북, 경남등)로 이거(移居)하였다. (見高麗史,國史大事典)
18세 김삼우(金三兩)(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광리(光利)이며 어머니는 원성군부인(原城郡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찬성사(贊成事) 충(忠)의 딸이다.
1331년 생으로 벼슬은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나 중형(仲兄) 대호군공(大護軍公)의 무고죄에 연좌되고 고려가 운(運)이 다하자 경남으로 은거(隱居)하였다. 묘(墓)는 실전하여 산청군 신등면 가술리에 설단(設壇)하였고 원모재(遠慕齋)를 지었다.
18세 김남우(金南兩)(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광리(光利)이며 어머니는 원성군부인(原城郡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찬성사(贊成事) 충(忠)의 딸이다.
태조(太祖)때 가정대부(嘉靖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광리의 5째 아들로 호는 창주(滄州)며 문충공(文忠公) 이제현의 사위이다 벼슬이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광주에 은거하여 전왕(前王)을 생각하며 절개를 굳게지키고 숨어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예로부터 사대부는 국가가 위란할 때에 진퇴에 흠이없는 이가 드물거늘 오직 공은 절개가 백세에 본받을만 하였다. 1396년에 졸하니 묘소는 고양군 포답원 이었는데 실전하여 합천군 합천읍 영창리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10월9일에 제사를 올리고있다.
19세 김승길(金承吉)(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절신, 호는 사은(沙隱), 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인우(仁雨)이며 어머니는 일선부부인(一善府夫人) 선산김씨(善山金氏)로 화의군(和義君) 달상(達祥)의 딸이다.
벼슬이 함종현령(咸從縣令)이었으나 1374년(공민왕 24) 아버지 인우(仁雨)가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左遷)되니 벼슬을 버리고 따라나섰다. 평소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길재(吉再)와 더불어 도의로 사귀더니 정몽주의 죽음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되 "나라가 위태로워도 구하지 못하니 이는 불충(不忠)이요, 친구가 죽어도 조문하지 못하니 이는 무신(無信)이라, 이러고서야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서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자취를 감추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유(孟裕)등과 같이 불을 밟고 순절(殉節)했다고 전한다. 1751년(영조 28) 가을에 영조가 서도(西都: 현 개성)를 순시(巡視)할 때 그 절의를 추감(追感)하여 제사를 지내는 비(碑)를 세워 어제(御題)로 승국충신금언재특수기동표기절(勝國忠臣今焉在特竪其洞表其節: 고국충신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고 특별히 그 마을에 비를 세워 그 절개를 표한다)라 하였다. 전남 경현사(景賢祠) 유덕사(遺德祠), 화동서원(華東書院)에 배향 되었다
19세 김재(金滓)(문정공파/문민공파/광성군파/광산군)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병조판서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제(兵曹判書兼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制) 순충보조명량공신(純忠輔祚明亮功臣) 계지(繼志). 1408년(태종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순충명량보리좌명공신(純忠明亮輔理佐命功臣)에 책록 되었다.
광산군(光山君)이다.
19세 김유(維)(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고려 후기의 무신, 字는 사강(四綱) 아버지는 공조전서(工曹典書) 남우(南雨)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이다.
공민왕 때 중령랑장(中領郎將)(정5품)을 지냈다. 공민왕때 이성계와 함께 남정북벌(南征北伐)에 큰 공이 있었으나 신돈(辛旽)이 정사를 문란케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령군 도진에 은거(隱居)했다가 합천군 영창으로 옮겨 살았다. 후에 나라에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니 그 때의 사람들이 삼은(三隱= 鄭圃隱, 李牧隱, 吉冶隱)과 같이 절개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1440년에 卒하니 묘(墓)는 합천면 영창리이다.
19세 김약채(金若采)(양간공파/판군기감가공파) 고려말,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며 어머니는 숙신택주(肅愼宅主)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전법판서(典法判書) 방(昉)의 딸이다.
광성군의 첫째 아들로서, 1371년(공민왕 21)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의가 되었다. 이 때 조반(趙 )의 옥사를 다스릴 때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이 권세를 이용하여 조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고문이 참혹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앉은 관원들이 감히 잘못이라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홀로 불가함을 주장하여 고문을 중지시키고 조반의 죄를 면케 하고 염흥방 등을 죽이게 하니 조야가 다 통쾌히 여겼다. 1392년(태조 1) 지신사(知申事)로 나라를 바로잡고 치적이 많았다. 1400년(정종 3) 문하부좌산기상시(門下府左散騏常侍)로서 대사헌 권근(權近)과 같이 권세가문에서 사병을 양성하는 폐단을 막았다. 또 왕실의 종친을 봉군하여 정사에 참여하는 근원을 막았다. 그 해 겨울에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어 이 때 무신 권희달이 완폭하여 죄를 범하자 형리를 보내어 구속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권희달이 형리를 때리고 도망하였다. 그 후 임금은 권희달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으니 그 그릇됨을 상소하여 잘못을 탄핵하고 귀양보내 관의 악습을 막았다. 1401년(태종 2)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승진되고 1404년(태종 5)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어 논산군 연산면 거정리에 세거(世居)하였으니 지금까지 유적(遺蹟)이 전해오고 있으며 후손이 광산김씨의 중흥(中興)을 이루었다.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고 묘(墓)는 양주군 풍양이었으나 실전되어 논산군 연산면 거정리에 설단하였다. (見高麗史,朝鮮王朝實錄,國朝文科榜目,與地勝覽)
19세 김약항(金若恒)(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척약재공) 고려말,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절신,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며 어머니는 숙신택주(肅愼宅主)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전법판서(典法判書) 방(昉)의 딸이다.
광성군의 둘째 아들로서 字는 구경(久卿), 호는 척약재( 若齋), 1368년(공민왕 1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371년(공민왕 21) 문과(文料)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직언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 하여 외직으로 지곡주군사(知谷州郡事)에 좌천, 얼마 후 강원도 염문계묵사(江原道廉間計默使)로 승진되고 곧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는데 그 때는 고려 왕실이 이미 기울어져 친척과 친구들이 많이 조선조 태조에게 벼슬함으로 함께 추대하고자 요청하되 공은 홀로 물리쳐서 옳지 않다고 하더니 뒤에 천명이 태조에게 돌아갔음을 알고 벼슬길에 나아가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서적을 맡아 관리하던 관청의 우두머리 벼슬)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하정표(賀正表)를 동료들과 같이 지었는데 명나라는 자기 힘의 강대함을 믿고 또는 우리나라 문물의 번성함을 꺼리어 글 내용이 불공한 말이 있다고 성죄(聲罪)하고 장차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와서 글 지은 사람을 징계한다 하니 공은 회피하지 않고 개연히 명나라에 가려고 길에 올랐으나 대개 태조의 명령을 중하게 여기는 것만도 아니요 도는 만일 난리가 일어난다면 그 백성들의 상할 것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이 때에 태조는 중추원 학사로 벼슬을 올려주어 보냈다. 공이 명나라에 도착하니 고문이 심하였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리를 분석하여 조리있게 대답하니 명나라 황제가 고문에서 풀어주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멈추었으나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고 운남성(雲南省)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태조가 멀리서 광산군(光山君)으로 봉(封)하고 그 가족에게 후하게 보조하였다. 흉보가 들려오자 정종이 부의(賻儀)를 내리고 유의장(遺衣葬: 죽은 사람의 옷으로 장사지냄)을 명하였고 태종조에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소청으로 포은 정몽주와 같은날에 보국숭정대부 의정부찬성사로 추증하는 동시에 청백리(淸白吏)에 선정하고 자손을 등용하라 명하였으며 시호는 문온공(文溫公)이다. 묘(墓)는 용인군 금령역에 있다. (見高麗史, 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19세 김약시(金若時).(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 고려말, 조선 전기의 절신,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며 어머니는 숙신택주(肅愼宅主)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전법판서(典法判書) 방(昉)의 딸이다.
광성군의 셋째 아들로서, 1382년(우왕 9) 사마시(司馬試0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1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태조(太祖)가 등극하자 부인과 함께 걸어서 광주(廣州) 금광리(金光里) 산골짜기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으로 삼아 비바람을 막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의관을 괴이히 여겨 이따금 와서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혹은 술과 음식을 가져다가 대접해도 받지 않으니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부전어(不傳語)라고 이름하였다.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우울하게 상심하며 흐느끼나 사람들은 그의 듯을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태조가 물색하여 그를 찾아내어 원래의 관직을 주고 벼슬하게 하니 공은 병을 앓아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특별히 성명방(誠明坊)에 있는 집 한 채를 손수 "송헌(松軒: 이성계의 호)이라고 어호(御號)를 써서 주었다. 일찍이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좋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서 종묘사직의 망함을 직접 보고도 죽지 못하고 또 훌쩍 속세를 벗어나 멀리 숨지도 못하는 것은 선인의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곧 여기에 장사하되 봉분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를 좌우에 놓아두고 망국의 천부(賤 : 천한 죄인)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卒하자 자손이 그 말대로 하였다. 고상한 풍도와 절조는 길야은(吉冶隱) 제공(諸公)들과 대등한데 공은 다만 그 사적이 민몰(泯沒)되었기 때문이요 후인들이 또 감히 포장천양( 奬闡揚)하지 못하는 것은 공의 평소의 뜻을 상하게 할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공의 지조와 절개를 아는 사람이 적었던 것이다. 두문동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이며, 조선조 순조 때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묘(墓)는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에 있고 모충사(慕忠祠)와 장성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다. (見高麗名臣傅, 華東忠義錄, 崧陽耆舊傅, 朝鮮王朝實錄)
20세 김숭(金崇)(문정공파/문민공파/해양군파)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사겸(士謙), 호는 둔암(遯菴), 아버지는 직제학(直提學) 군제(群濟)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사간 유(瑜)의 딸이다.
천자가 영오하고 행의(行義)가 순지(純至)하여 도(道)를 즐겨 은거하더니 세종조(世宗朝)에 유일(遺逸)로 관학( 學)에 뽑히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고 누진하여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자 유등곡(柳等谷)에 은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配는 정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이다.
묘(墓)는 광주시 효천 송하동 금당산 59번지이다.
20세 김자진(金子進)(문숙공파/충숙공파/삼사좌사공파/수산공) 고려말의 충신, 호는 수산(首山)이다. 아버지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백균(伯勻)이다.
공민왕때 금위사정(禁衛司正)을 역임 하였으나, 고려가 망하게 되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등 제현으로 하여금 의리를 같이하고 나주(현 영암) 우정으로 은적하였다. 거주한 곳을 종오리(終吾里)라 하고 그 산을 수양산(首陽山), 정자(亭子)를 수산정(首山亭), 밭(田)을 여전(麗田), 우물을 여정(麗井)이라 하고 두문불출 하였다. 조선조(朝鮮朝) 태종이 대관(大官)을 세 번 제수 하였으나 불응하였다. 수산공은 고려가 망하자 나주로 은둔하여 백이숙재(伯夷叔齋)와 같이 수양산의 고사리를 케어 먹을망정 나아가 벼슬하지 않는 정신으로 자호를 수산(首山)이라 하고 그 정자를 수산정이라 명하고 고려에 충절을 다하였다.
묘(墓)는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 삼장산에 있다. (見忠烈錄)
20세 김맹권(金孟權)(문숙공파/시중공파/판도판서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세원(世遠), 호는 만취당(晩翠堂), 아버지는 증좌찬성(贈左贊成) 중노(仲老)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결성장씨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반유(泮儒: 옛날 성균관에서 유숙하며 학업을 닦던 유생) 20명중에 뽑혔는데 세종대왕이 원손을 안고 나와 후일 이 원손을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자 즉일 도보로 고향인 보령으로 내려와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문하에는 토정 이지함과 천휴당 이몽규등 명인이 있으며 보조공신 영의정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추증되었다.
配는 정경부인 나주전씨(羅州全氏)이다.
묘(墓)는 대천시 죽정동 산94번지에 있다.
20세 김문(金問)(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 (1373∼1393)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충청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약채(若采)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원주원씨로 문정공 송수(松壽)의 딸이다.
자질이 영민하고 학문이 일찍 성취하여 1392년(공양왕 5) 나이 20세에 문과(文科)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묘(墓)는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 (見朝鮮王朝實錄)
20세 김한(金閑)(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총제공) (1377∼1448) 71歲. 조선 전기의 무신,
아버지는 충청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약채(若采)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원주원씨로 문정공 송수(松壽)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였고 장성 하여서는 효우가 극진하여 백형 문(問)이 조졸하자 형수인 허씨부인이 친가로부터 시가에 돌아오니 형수 받들기를 자모와 같이 하고 조카 기르기를 친아들과 같이 하여 종사를 잇게 하였다. 벼슬은 중군 도총부 부총제를 지냈다.
묘(墓)는 용인군 고삼면 월향리이었는데 실전하여 안성군 삼죽면 덕산리에 설단(設壇)하였다.
配는 선혜옹주 완산리씨이며, 父는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다. 선혜옹주는 그 할아버지가 태조대왕(太祖大王) 이성계(李成桂)이며, 아버지는 태조의 3子 익안대군이다.
묘(墓)를 실전 하였다가 7대손 상빈(尙賓)이 풍기군수로 재직시 묘를 찾아 수호하였다.
20세 김열(金閱)(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자득(子得), 호는 퇴촌(退村)이다. 아버지는 충청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약채(若采)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원주원씨로 문정공 송수(松壽)의 딸이다.
사람됨이 총명 효우하고 문학이 일찍 성취하였으며 풍채와 위엄이 남달라 세상 사람들의 추중을 받았다. 큰형 문(問)이 조몰하니 큰 형수 허부인(陽川許氏)이 고아를 기르며 수절하고 살 때 어린 조카와 형수를 잘 보호하여 그 종통(宗統)과 가업을 이어 받들도록 하였다. 태종조에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형조도관 좌랑(刑曹都官佐郞)으로 재직하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 하였으며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합천의 화곡사(華谷祠)에 배향되었고 저서로 빙옥난고(氷玉亂稿)가 있다. 묘(墓)는 실전하여 춘천시 서면 모호산에 설단(設壇)하였으나 1983년에 후손(後孫) 대중(大中)등이 찾았으니 광주군 퇴촌면 관음리이다.
20세 김소(金遡)(사온직장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원지(原之),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화(華)이다.
1401년(태종 2) 증광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이조, 예조, 병조의 낭관을 거쳐 두 고을 군수로 나아가 있다가 한성부, 개성부, 상서사의 소윤으로 옮기고 대호군(大護軍)에 슨진 되었으며 성균관사성에 제수되어 종학박사를 겸임하였다. 1457년(세조 3)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보문각 제학(吏曹參判兼寶文閣提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추증되었고 1460년(세조 6) 좌익원종공신 3등에 추록되었으며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양주군 회천면 율정리 귀율 (見國朝文科榜目, 朝鮮王朝實錄)
20세 김안경(金安卿)(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부사공)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송은(松隱)이며, 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성지(誠之)이며, 어머니는 청주경씨(淸州慶氏)로 좌윤(左尹) 진(臻)의 딸이다.
태조 이성계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제수 하였으나 취임치 않았다. 개국원종공신이다.
配는 숙인 평산신씨(淑人 平山申氏)이다.
묘(墓)는 실전되어 창녕군 부곡면 항곡리에 설단(設壇)하였다.
20세 김오행(金五行)(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 조선 전기의 절의신, 호는 매은(梅隱), 아버지는 현령 승길(承吉)이다.
고려가 망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불충이다. 너희도 나의 뜻을 받들어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 하였다. 유훈을 받들어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니 조정에서는 학문과 절의를 가상히 여겨 군기시정의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취임치 않고 장사(長沙: 현 고창)에 은거하다가 죽으니 조정에서는 예장(禮葬)토록 명하였다.
묘(墓)는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에 있고 전남 경현사(景賢祠), 유덕사(遺德祠), 고창의 화동서원(華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20세 김청(金廳)(사온직장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화(華)이다.
태종 때 역과(譯科) 출신으로 중국어를 잘 하였다. 승문원의 정자, 저작랑, 교리, 참교등을 거쳐 1419년(세종 2) 천추사(千秋使)의 통역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곧 첨지 승문원사에 임명되었으나 그 이듬해 황제가 주본(奏本)에 날자를 정하지 않았다 하여 문책하자 임금이 부득이 신장(申檣), 허조와 함께 하옥시켰고 이내 상주로 귀양 보냈다가 12월에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서용(敍用)되었다. 1428년(세종 11) 대호군(大護軍)으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명나라 사신에게 성리대전의 어록을 물었고 1433년(세종 16) 지신사 안숭선(安崇善)과 같이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을 토벌하여 성죄하는 방문을 초하여 바쳤다. 이듬해 공조참의에 임명되고 곧 첨지중추원사에 승진 되었으며 1439년(세종 22) 경창부윤, 1441년(세종 24) 중추원 부사에 승진되었다. 1450년(문종 1) 지중추원사에 승진되고 1454년(단종 3) 임금이 명하여 종친 부마, 의정부당상, 육조판서, 친공신 이품이상, 승정원 당상에게 선물을 하사하는데 단자 한 필을 받았으니 장차 흉배단령을 입히고자 함이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시호는 희정공(僖靖公)이다
묘(墓)는 실전하여 중원군 금가면 잠병리 막현에 설단(設壇)하였다.
20세 김췌(金萃)(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직제학 약시(若時)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여산송씨로 좌랑 완(完)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1426년(세종 9) 지상원군사가 되었다. 이 때 경상도 성주고을은 아전들이 세력을 부리고 백성들이 사나워서 관청에서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자 그 고을을 장차 폐기하려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고을을 제대로 다스릴 사람을 구하기가 퍽 힘들었다. 그러나 임금이 특명으로 벼슬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고을을 맡을 만한 사람을 뽑게 하였는데 약관의 나이로 거기에 뽑혔다. 폐사(陛辭)하는 자리에서 왕이 공의 연소함을 보고는 공에게 " 그 고을은 본래 다스리기 어렵기로 일컬어진 고을인데 너는 가서 어떠한 정치로 다스리겠느냐?"고 묻자 공은 "수령은 형살을 마음대로 못하므로 아무리 극악 대죄의 중죄수 일지라도 반드시 상사에게 치보(馳報)하게 됩니다. 치보하자면 자연 시간이 천연되게 마련인데 이와 같은 틈에 간모 휼계를 부리게 되므로 그들을 놓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 저에게 전하께서 생살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제압할 수 있습니다."고 대답하자 왕이 특별히 허락하였다. 공은 부임한 지 7일만에 포악한 사람 7명 가량을 죽이니 온 고을이 이때부터 수령을 두려워 하고 한 달이 채 못되어 진압되었다. 아전을 다스릴 때에는 흙을 구워만든 도기로 갓끈을 만들어 매도록하여 아전들로 하여금 머리를 제대로 들지 못하게 하니 이 때부터 관리들이 부복(俯伏) 추창(趨 )하고 감히 우러러 보지 못했다. 그래서 존비의 구별이 이 때부터 분명해지고 경외하는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그리하여 포한(暴悍)이 유순으로 바뀌고 완우(頑愚)가 양선(良善)으로 바뀌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공의 교화로 이루어진 것이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配는 숙부인 비인김씨(庇仁金氏)이다.
묘(墓)는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東國與地勝覽)
20세 김치온(金致溫)(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사온승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성균관 대사성 성옥(成玉)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전의이씨로 판관 수동(秀東)의 딸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고양현감을 지냈다. 단종(端宗)이 손위하니 장차 큰 화가 임박하였음을 예지하고 벼슬을 버리고 장흥으로 내려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설암(雪巖) 김혼(金琿)과 더불어 교유하다가 단종의 흉변을 듣고 자탄하되 단종 재위시의 구신으로 삼상(三相) 육신(六臣)과 같이 못 죽은 것이 한이라 하고 못내 애통하였다.
20세 허씨 (許氏)(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 (1377∼1455) 79歲, 조선 전기의 열부, 관향(貫鄕)은 양천(陽川), 아버지는 대사헌 응(應)이며, 남편은 검열(檢閱) 문(問)이다.
17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니 친가의 부모가 불쌍히 여겨 개가 시키려 하자 부인은 죽기를 맹세코 부모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어린 아기를 업고 머나먼 길을 주야로 걸어 부백리길 연산의 시가까지 와서 아들을 훌륭히 길렀고 종신토록 수절하니 세종대왕이 장한 행실을 듣고 정려(旌閭)를 명하니 허씨부인 43세때였다. 명정(命旌)은 사후에 내리는 것이 통상례이나 이는 특수한 사례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260명의 효열포상이 상신되었으나 엄선하여 26명을 표상하였으니 정경부인 허씨가 포함되었다. 그 의 후손들이 현달하여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루었다. 정려(旌閭)가 도지정문화재 109호로 지정되었다. 묘(墓)는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見三綱行實錄, 與地勝覽)
20세 김효종(金孝宗)(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전서공파/둔암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절신, 호는 오옹(오翁), 아버지는 현감 집(緝)이며, 어머니는 의인 여산송씨로 직제학 운(雲0의 딸이다.
학문이 고매하여 학행으로 벼슬길에 올라 사복시정에 이르렀다. 1452년(단종 1)에 문조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이 인륜대의를 버리고 1455년(세조 1) 왕위를 찬탈했다. 이 때 세조로부터 국록을 받는 것을 꺼리고 곧 사퇴하고 부여 홍산지방으로 은거했다. 그 후 영월에서 단종이 승하(昇遐)하자 서운산(栖雲山)에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해가 뜨면 매일같이 궁검대(弓검臺)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피눈물로 통곡하며 3년을 지냈다. 매월당 김시습과 도의로 사귀었고 평생 검소한 옷과 음식으로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묘(墓0는 부여군 구룡면 상곡에 있고 청일사(淸逸祠)에 배향되었다. (見朝鮮王朝實錄)
[21世-25世] 광산인(光山人) 인물세고(人物世考)
21세 김달도(金達道)(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고명은 달존(達尊), 字는 도경(道卿). 아버지는 증참의(贈參議) 열(閱)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삼척진씨로 제학(提學) 의귀(義貴)의 딸이다.
벼슬은 영흥판관이었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김포군 검단면 한산하에 있다.
21세 김달손(金達孫)(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증참의(贈參議) 열(閱)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 삼척진씨로 제학 의귀(義貴)의 딸이다.
벼슬은 와요서 직장이었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는 실전되어 춘성군 서면 모호산에 설단하였다.
21세 김달전(金達全)(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고명은 달존(達尊), 字는 도경(道卿). 아버지는 증참의(贈參議) 열(閱)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삼척진씨로 제학(提學) 의귀(義貴)의 딸이다.
벼슬은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으며 부역(賦役)의 공정한 차출을 상소(上疏)하였다.
1460년(세조 6) 원종 3등공신에 록선되었고 1463년(세조 9) 사헌부 집의에 승진되었으며 이듬 해 충청도 부여 석성지방에 굶주린 백성이 많아 경차관으로 나가 구제케 하였다.
묘(墓)는 실전되어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화곡사에서 향사한다. (見朝鮮王朝實錄)
21세 김석원(金錫元)(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교리공)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매산(梅山)이며, 아버지는 군기시정 오행(五行)이며, 어머니는 숙인 진주정씨로 부사 이방(以方)의 딸이다.
1470년(성종 2) 록사와 승사랑이 되었다가 계공랑에 올랐을 때 예종이 승하하니 정혜왕후의 명으로 익대 순성명량훈을 받았고 승문원 부정자, 저작박사 등을 지냈다. 1472년(성종 4) 사헌부 지평으로서 좌리훈에 책록되었다. 1476년(성종 7) 승문원 교검을 거쳐 1481년(성종 13) 승문원 교리로서 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다. 1482년(성종 14) 성균관 직강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록권(錄卷)이 있고 장사지(長沙誌)에 그 사실이 기록 되어 있으며, 묘(墓)는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에 있고 전남 유덕사(遺德祠)와 고창(高敞)의 노산사(蘆山祠)에 배향 되었다.
21세 김명원(金命元)(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군기시부정공)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만운(晩雲)이며, 아버지는 군기시정 오행(五行)이며, 어머니는 숙인 진주정씨로 부사 이방(以方)의 딸이다.
1492년(성종 24)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32인으로 합격하였고 재주가 유생(儒生)의 스승이 될 만하다 하여 진원훈도로 제수하니 제자들을 예로 맞아 가르친 지 두어해에 인재가 배출되고 문풍이 크게 떨쳤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니 주민들이 애석하게 여겼고 후에 공의의 추천으로 통훈대부 군기시부정이 되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은거하였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호동에 있다.
21세 김백겸(金伯謙)(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전서공파/승사랑공파/광원군공)(1428 ∼ 1506) 79歲 전리판서공 광리(光利)의 현손(玄孫)이며 諡 양호공(襄胡公)이다.
조선 전기의 무신이며 훈신, 字는 자양(子讓),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혁(革)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청주곽씨(淸州郭氏)로 현감(縣監) 휴(休)의 딸이다.
아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힘이 뛰어나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더니 1460년(세조 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 때 북쪽 오랑캐가 변방을 소란케 하므로 임금이 상락군(上洛君) 김질(金?)에게 명하여 진압하라 하니 선전관으로 김질을 도와 전공을 세웠다. 또 상당군 한명회를 따라 서변(西邊)의 적(賊)을 진압하는데 공로가 많았으므로 여러번 승질(陞秩)되었다. 1467년(세조 14)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귀성군(龜城君) 준(俊)의 막하(幕下)로서 평정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공신 2등으로 책록되고 광원군(光原君)에 봉해졌으며 절충장군 겸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뒤에 임금이 문무를 겸전한 인재를 등용할 때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이 때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가 의주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므로 조정에서는 치안을 염려하여 수령과 목사를 여러번 교체하다가 公으로 의주목사를 삼으니 이만주 일당은 도망가고 노략질은 없어졌다. 병으로 퇴임을 청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는 오랑캐들이 침범하는 땅이니 덕망있는 당상관을 임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니 임금이 도리어 평안병사(平安兵使)등을 거쳐 광원군(光原君)에 봉(封)해 졌고, 1478년(성종 10) 황주목사(黃州牧使)가 되어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대궐에 몰려가서 한 번만 더 연임토록 글을 올려 간청하니 조정에서 이를 허락했다. 1484년(성종 16)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좌참찬(左參贊)이 되었고, 1485년(성종 17) 평안도 절도사로서 변경 경비를 소홀히 하여 충군(充軍)되었다가 뒤에 도총부총관이 되고,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였다. 늙어서 향리로 돌아와 쉬려하니 임금이 훈구신으로 우대 하려 했으나 사양했다. 뒤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묘(墓)는 경기도 성남시 태장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典故大方, 國史大事典)
21세 김극성(金克成)(문숙공파/판도판서공파/충정공)(1474∼1540) 67歲. 조선의 문신. 字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音羅), 우정(憂亭) , 아버지는 封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맹권(孟權)이다. 1469년(연산군2) 사마시(司馬試)와 149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각각 장원,전적(典籍)이 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수찬(修撰) 헌납(獻納) 병조 정랑(兵曹正郎) 사인(舍入)을 거쳐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請國功臣) 4등으로 광성부원군(光城席院君)에 봉해졌다. 의주 목사(義州牧使) 경상도 병마절도사 경상도 관찰사, 공조참판 (工曹參判) 등을 지내고, 1521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523년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어 우참찬(右參贊) 이조판서(吏曹判書)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찬성(贊成)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으로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흥덕(輿德)에 유배 되었다. 1537년(중종32)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기용되어 찬성 우의정(贊成 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별파 김구경(金久同) . 조선의 문신. 1405년(태종,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성균관 학유가 되고,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호군(護軍)을 거쳐 집현전 직학사(集賢殿 直學士)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이 뛰어났고, 여러 차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나 변계량(卞季良)과 사이가 좋지 않아 높이 등용하지 못했다.
21세 김순성(金順誠)(양간공파/직제학공파) (1429∼1481) 53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경순(景純), 아버지는 증도승지(贈都承旨) 췌(萃)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비인김씨(庇仁金氏)로 좌랑(佐郞) 효선(孝先)의 딸이다.
1450년(세종 33) 생원시에 합격하고 1459년(세조 5) 문과에 정과 23인으로 급제하여 곧 승문원(承文院) 정자에 보직되고 1462년(세조 8) 봄 저작에 제배되었다가 그 해 가을 봉상시 녹사로 옮겼고, 그 이듬해 가을 승문원 박사로 다시 옮겼고 그 해 겨울 통례원 봉례에 제수되었다. 1464년(세조 10)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곧 돌아와서 봉상시 주부에 제소되었더니 얼마 안가서 모친상을 당해 관직을 해면하였다. 복을 벗었을 때에 마침 경국대전을 고쳐 찬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므로 공선(公選)되어서 그 일에 참여 하였고 이내 훈련원 판관에 제수되었다. 1469년(성종원년)에 호조정랑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병조정랑으로 옮기고 원종공신에 참여했다. 그리고 1472년(성종 4)에 한성부 서윤이 되었다가 한 달이 지나서 외직으로 평창군수를 거쳐 이듬해에 평양서윤으로 옮겼다. 성품이 근직한 한편 온화 하면서도 엄하고 간이하면서도 세밀하고 화식을 싫어하고 성색을 미워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1세 김한로(金漢老)(낭장공파) (1367(공민왕 16 ) ∼ ? ) 조선 전기의 문신,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장인, 아버지는 증좌찬성(贈左贊成) 자빈(子빈)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이씨로 전법판서 사상(斯祥)의 딸이다.
1383년(우왕 10) 문과(文科)에 을과 제1인으로 급제하여 예의좌랑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07년(태종 8) 좌군통제에 올랐고 1409년(태종 10) 예조판서(禮曺判書)에 승진 되었으며 광산군(光山君)에 봉(封)해졌다. 이듬해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참지의정부사를 역임하고 1412년(태종 13) 중군도총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찬성, 판한성부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세자(世子) 양녕대군의 폐위로 연루되어 죽산(竹山)에 부처(付處)되고, 다시 청주 연기 등에 유배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광산군(光山君)에 추봉되었다.
묘(墓)는 시흥부 강사동 종실 양녕대군 금양내에 있다 하나 실전되어 광주시 지산동 서원사에 배향 하였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1세 김철산(金鐵山)(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관찰사공파)(1393∼1450) 58歲.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증좌찬성(贈左贊成) 문(問)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대사헌(大司憲) 응(應)의 딸이다.
음사로 벼슬길에 올라 세자참군 인수부승 예빈시 직장, 풍저창부사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 천품이 순후하고 강직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서로 비교하지 않았으며 좋고 나쁜일을 들어내지 아니하니 모두가 숨은 덕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에 책봉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광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21세 김예몽(金禮蒙)(사온직장공파)(1406∼1469) 64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경보(敬甫), 호는 만사(晩沙), 아버지는 증좌참찬(贈左參贊) 소(遡)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옥과조씨(玉果趙氏)로 소감 신우(臣祐)의 딸이다.
1429년(세종 12)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432년 친시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저작랑에 뽑혀 보임되었고, 이내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고 1440년 부사직(副司直)으로서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시관이 되어 진사 신숙주 등을 뽑았는데 이로부터 항상 시관을 맡아보아 뽑은 선비들이 많이 달관과 제상이 되어 그 때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세종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자 하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는데 조정공론이 公만한 적임자가 없다하여 드디어 거용하여 보내니 公이 해외의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기미의 빛이 얼굴에 나타남이 없으므로 보는자가 모두 칭찬하고 임금이 역시 중히 여기어 은례가 더욱 두터우며 그 재기를 알아줌이 매우 깊었다. 1447년(세종 30) 집현전 교리(集賢殿敎理)가 되어 그 해 중시 문과에 을과 3등 9인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고 대사성으로 옮겼다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초배(超拜)됨에 임금이 날로 고문을 주어 존례가 매우 높았으며 중국에 보낼 표찬이 있으면 반드시 公에게 명하여 지어 바치게 하니 왕이 그 지은 바를 보고 특히 참다운 문장이라고 허락하여 주었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전임하였고 1458년(세조 4) 가선대부에 승자되어 홍주목사로 나아갔다가 1460년(세조 6) 정조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청백하고 너그러운 선정을 베풀어 일도가 다 칭송하였다. 1464년(세조 10) 명나라 헌종황제가 등극함에 부사로 진하하였다. 1468년(세조 14) 정헌대부에 가자되어 공조판서(工曹判書)겸 지성균관춘추관사 판의금부사에 배수되고 팔준도명(八駿圖銘)을 지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配는 정부인(貞夫人) 창평조씨(昌平曺氏), 繼配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이다.
묘(墓)는 중원군 금가면 잠병리 막현이다.
21세 김의몽(金義夢)(사온직장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경원(敬愿), 호는 율리재(栗理齋), 아버지는 증좌참찬(贈左參贊) 소(遡)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옥과조씨로 소감 신우(臣祐)의 딸이다.
1432년(세종 15) 식년시 문과에 진사 23인으로 급제하고 1457년(세조 3) 중시 문과에 정과 13인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사간원 정언, 단양군사, 강화부사를 거쳐 승정원 좌승지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묘(墓)는 실전되어 중원군 금가면 잠병리 막현에 설단하였다.
21세 김태정(台鼎)(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전서공파/광암공)(1426∼1478) 53歲. 조선 전기의 학자. 字는 응삼(應三)이요, 호는 광암(光菴)이다. 아버지는 상호군(上護軍) 자휘(自輝)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 팔려현씨(八 玄氏)로 가선 귀명(貴命)의 딸이다.
6세때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한번 들으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18세 때에 그 고을 백일장에 뽑혔고 1450년(세종 33)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1452년(문종 3) 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수질과 요대를 벗지 아니하고 웃지도 않고 상을 마쳤으며, 과거를 폐하고 오직 학문만을 강구하여 여러번 참봉의 천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모현(茅峴)에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니 점필재 김종직이 찬하되 강양(江陽)의 주인이라하고 서재 이름을 광암(光菴)이라 했다. 1478년에 죽으니 향년이 53세였다. 후에 김장생 선생이 비명이 있었으니 '公은 명망이 있었고 부인도 또한 숙덕이 있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양미로서 그 칭찬하는 말이 많았네, 소년때 학문에 뜻을 두었고 효우가 천성에서 우러 나왔도다 일찍 사마시에 오르고 만년에 문장이 통달하였네 나는 공을 존경하며 그 행실을 탄복하였도다 글을새겨 칭미하니 남은 경사가 더욱 크도다 북악이 높이 솟아있고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네 돌을 세워 불휴를 꿰하니 오직 이 분묘의 송이로다' 하였다. 묘는 경남 합천군 합천읍 영창리이다.
21세 김효로(金孝盧)(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安東예안파 입향조)(1454∼1534) 81歲.
조선 전기의 학자. 字는 순경(舜卿), 호는 농수(聾 ), 아버지는 증참의(贈參議) 회(淮)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안강노씨(安康盧氏)로 현령(縣令) 응(膺)의 딸이다.
1480년(성종 12) 생원시에 3등 8인으로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일삼지 않고 시골에 살면서 청렴 결백으로 신조를 삼고 남과 사귀되 구차하지 않았으며 남의 악함을 보고도 관용을 베풀었다. 제사를 받들되 성경을 다하고 자손을 가르치되 효제로써 하였다. 부귀를 구하지 않고 조행이 탁이 하였으므로 향천을 받았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에 있다.
21세 김 호(金 瑚)(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참판공파 寶城 입향조)(1390 - 1452) 63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옥여(玉汝)요, 호(號)는 삼모헌(三慕軒)이다. 아버지는 성균관 좨주(成均館 祭酒) 사무(師武)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 윤씨(尹氏)이다.
1402년(태종 2) 13歲에 양촌(陽村) 권근(權近) 문하(門下)에서 배우니 권공(權公)은 지목(指目)하되 다른 날 대신(大臣)의 수완(手腕)이 있다 하고 말씀하되, 세상을 울릴만한 재목(材木)이 때를 위하여 나왔다 했다. 1414년(태종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416년(태종 16) 전생서 참봉(典牲署 參奉)을 하였고 1432년(세종 1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동년(同年)에 교리(校理)와 사예(司藝), 1434년(세종 16)에 응교(應敎),1435년(세종 17)행 장예원 판결사(行 掌隸院 判決事),1437년(세종 19) 이,예조 참의(吏,禮曹 參議)와 행 도승지(行 都承旨)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승진되고, 외직(外職)으로 청도군수(淸道郡守)와 함길도 안렴사(咸吉道 按廉使)를 보직(補職)받아 같이 성적(聲蹟)이 있었고 돌아오니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제수하니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조정(朝廷)에 들어선지 거의 이십년에 언제나 제왕가(帝王家)의 역대선정(歷代善政)을 아뢰고 힘쓰게 함이 정성스럽고 너그럽고 깊으니 간(諫)함을 좇아 어기지 아니했으며 본디 모앙(慕仰)한자는 하은주삼왕(夏殷周三王)이라 그 풍화(風化)의 밝음을 장차 우리 동쪽에 만회(挽回)하려 하여 하루 삼시로 임금께 아뢰어 임금에게 우(禹)임금과 탕(湯)임금과 문왕(文王)을 바라고 항상 스스로 힘쓰는 말은 익(益)과 후직(后稷)의 꾀를 내가 장차 밝힐지며 이윤(伊尹)과 래주(萊朱)의 도움을 내가 장차 따를지며 크게 펼 계책을 내가 장차 진달(進達)하리라 하며 그 임금 보기를 삼성(三聖)처럼 여겨 밤낮으로 사모하고 사랑하니 모애(慕愛)하는 정성이 또 당세치정(當世治政)에 도움이 있었다.
墓는 전남 보성군 보성읍 대야리 산 69번지 선산(先山) 을좌(乙坐)요 유갈(有碣)하니 전한(典翰) 탄수 김규(灘수 金규)가 찬갈(撰碣)하고 참판(參判) 심의신(沈宜臣)이 명(銘)하며 판서(判書)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찬지(撰誌)하였다.
22세 김문발(金文發)(문정공파/녹사공파/감사공) (1359∼ )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증참찬 거안(巨安)이다. 호는 부용(芙蓉)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수군만호 첨절제사로 왜침을 방어하고 순천부사, 황해도관찰사로 선정을 배풀었으며, 형조참판이 되어 국법을 바로 세웠고 시문을 즐겼다. 그 후 公은 신병을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온 뒤 평장동으로부터 광주 서쪽 대촌면 칠석리에 이거하였다. 신도비문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이 찬하였는데 이르되 『공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남보다 뛰어나고 총명하였으며 풍채가 위대하고 재주 또한 특별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놀이 할 때에도 신의와 질서를 잘지켰으며 장성하여 학문을 좋아하였고 항상 정몽주, 길재등 양현을 사모하였다. 하고 남원과 보성에서 왜적을 격멸한 공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돌산(突山) 만호와 순천부사로 임명되었으며, 누진하여 황해감사 참판에 이르렀다.』하였다.
配는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이다.
묘(墓)는 광주시 남구 원산동(이동) 안산이다. (見朝鮮王朝實錄)
22세 김자용(金自庸) (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집의공)(1415 - 1472) 58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호이(好而)요, 호(號)는 청류당(聽流堂)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호(瑚)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충주박씨(忠州朴氏)로 익찬(翊贊) 희묵(喜默)의 딸로써 무육(無育)하고, 생(生)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천안전씨(天安全氏)로 목사(牧使) 중영(仲英)의 딸이다.
자질이 영특하고 성품이 효우(孝友)하여, 포은(圃隱)과 목은(牧隱) 두 선생의 도(道)를 사숙(私淑)하였고, 돈독한 정성이 순진한 자질(資質)로 잠심(潛心)하고 수약(守約)하는 학문을 하고 안으로 살펴 익히고 강(講)하고 외우는 공(功)을 더하니 궁행실천(躬行實踐)하고 또 곁으로 찾고 널리 상고하는 힘을 폐(廢)하지 않았고, 벼슬은 행 한성참군(行 漢城參軍),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지례 현감(知禮 縣監),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通訓大夫 司憲府 執義)를 한 후 벼슬을 버리고 숨어서 살았다.
墓는 전남 보성군 보성읍 옥암리 성곡 비묘하(비墓下) 묘좌(卯坐) 상하조(上下兆)로 묘갈(墓碣)하고, 장흥 고광선(長興 高光善)이 찬갈명(撰碣銘)하였다.
22세 김숭조(金崇祖)(문숙공파/삼사좌사공파/수산공파/참군공파/사간공)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희지(禧之), 호(號)는 서청자(西淸子), 아버지는 판서 충손(衷孫)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진사 생명(生明)의 딸이다.
1480년(성종 12)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 2)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 7인으로 급제하였으며. 1507년(중종 2) 중시 문과(重試文科)에 2등 2인으로 급제하여 연산군에게 진소(陳疏) 극간(極諫) 하였으나 크게 미움받아 귀양갔다. 중종반정후 사간원 헌납, 사간을 역임하고 나주목사,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를 지낸 명신이다.
配는 숙부인(淑夫人) 탐진최씨(耽津崔氏)이다.
묘(墓)는 전남 장성군 동화면 동호리 박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2세 김기서(金麒瑞)(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군기시부정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효자, 字는 시견(時見), 호는 돈목재(敦睦齋), 아버지는 군기시부정 명원(命元)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 의창황씨(義昌黃氏)로 진사 보(潽)의 딸이다.
성효가 출천하고 덕행이 초륜(超倫)하였다. 상중(喪中)에는 죽을 먹고 시묘를 하였으며 복을 마친 뒤에도 그 여막에서 살으니 그 마을을 시묘동이라 하고 그 집을 돈목재(敦睦齋)라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정암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웠고 학포 양팽손과 더불어 경의를 강론했다. 1519년(중종 15) 기묘사화에 연루되었고 그 후 고향인 고창에서 은거하며 후학을 육성하였으며 그 때 건립된 돈목재 강학당이 현존하여 지방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효행으로 명종조에 정려(旌閭)를 명 받았으며 향인이 사당(祠堂)을 지어 향사한다.
묘(墓)는 고창군 고수면 전불에 있다. (見典故大方, 東國名賢錄)
22세 김국광(金國光)(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1415∼1480) 66歲.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훈신, 字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철산(鐵山)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부사 명리(明理)의 딸이다.
1438년(세종 21)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생으로 뽑혔을 때 황희 정승이 항상 말씀 하시기를 김생은 "작게 될 사람이 아니다" 하며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뒤에라야 공을 버았다. 1441년(세종 24)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처음 벼슬에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1445년(세종 28) 황해도 도사에 승진하고 1447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및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449년 전라도 도사 1452년 승문원 교리(承文院敎理)가 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사헌부 지평이 되어 이듬해 함안사람 최옥산의 옥사를 잘 다스리니 임금이 "김국광이 아니었으면 무죄한 백성을 죽일뻔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어 성균관 사예를 제수받았고 왕명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 후 부승지, 참의를 거쳐 1461년 병조참판에 승진되었는데 「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내리어 포상하고 문무전재라고 칭찬하였다. 1464년(세조 10)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승진되고 1466년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듬해 우참찬이 되고 병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게 하였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고 특명으로 도승지를 겸직하였다. 이 때 길주 적 이시애가 백성을 선동하여 감사, 절도사, 수령을 다 죽이고 반역하였는데 이를 평정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 2등 공신에 오르고 좌찬성에 승진되었다. 1469년(예종 2) 우의정(右議政)에 승진되고 편집중인 경국대전을 집대성하였다. 1470년(성종 2)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 1등공신에 녹선되었으며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封)해졌다.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다.
의정공(議政公) 국광(國光)은 광산김씨로는 처음으로 좌의정을 하셨다.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신도비명에 찬(撰)하기를 『광산에 모인정기 대대로 호걸과 영웅이 나는도다 공이 이에 큰 영걸이다 그 소리 크게 떨쳤도다 공은 경제 포부를 가졌고 공이 국책을 시설코자 하였도다 광묘를 만났으니 천년만에 한 번 있을 기회로다 은대에 뽑혔고 사마에 어른이로다 시정을 조치함이 모두 다 적당하니 어디를 간들 옳지 않으리오 계책을 임금께 아뢰니 오히려 군진의 벗이ㅇ 유악에서 운주하니 장자방 같은 사람이라 깊숙한 상부와 드높은 기린각에 단청이 빛나고 신흘이 엄연하다 충성과 근면이요 공훈과 인덕이로다 백성은 귀서같이 생각하고 나라에서는 주석같이 믿었도다 하늘이 돕지 아니하여 거연히 불행하였도다 한나라 개국공신 같은 공은 남았으나 위징같은 명감은 들을 수 없네 당저 슬퍼하여 부의와 제문을 내리었네 웅진강이 희고 계룡산은 푸르도다 연산의 한 언덕이 공의 현당이다 풍성한 비 서 있으니 영원토록 빛나리라 나의 아첨함이 아니라 후세에게 계고 함이로다』
配는 정경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니 영의정(領議政) 황희(黃喜)의 손녀이다.
묘(墓)는 논산시 두마면 왕대리에 있으며 충청남도지정문화재자료 제308호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與地勝覽)
22세 김겸광(金謙光)(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1419∼1490) 72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위경( 卿), 호는 서정(西亭), 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철산(鐵山)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부사 명리(明理)의 딸이다.
1441년(세종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3년(단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 23인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藝文館翰林)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감찰, 정언, 병조좌랑, 정랑, 장령을 역임하였고 1460년(세조 6) 북쪽 오랑캐 낭이승합(浪伊升哈)이 변방을 침범 하였을 때 체찰사(體察使: 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재상이 임금을 대신하여 겸임하던 軍職의 하나) 신숙주(申叔舟)의 종사관으로 오랑캐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또 건주위(建州衛) 이만주(李滿住)의 도당을 토벌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통훈대부에 승진되고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임명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오르니 그 때 형 국광(國光)이 호조판서로 세조의 은총이 두터웠는데 임금이 모자를 벗기고 꽃을 꽂아주며 "그대가 벼슬은 형보다 낮으나 현량한 것은 형보다 낫다." 하고 술을 권할 만큼 총애를 받았다. 1463년(세조 9)에 우승지, 1465년 호조참판, 이듬 해 평안도절도사, 개성부윤, 1467년 예조판서 겸 의금부사가 되고 1468년에 상시관(上試官)이 되어 인재를 많이 뽑고 1469년에 예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고 겨울에 성종이 즉위하자 1471년 임금을 보필한 공으로 순성명량좌리공신에 녹훈되고 광성군(光城君)에 책봉되었다. 1475년(성종 7)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우참찬(右參贊), 좌참찬(左參贊), 세자 우빈객, 좌빈객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공안공(恭安公)이며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다. 신도비(神道碑)는 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이 찬(撰)하였는데 "몸은 하나로되 쓰이는 것은 백가지요, 들어오면 재상이요 나가면 장수로다"하였다.
配는 정경부인 진주유씨(晋州柳氏)는 조졸(早卒)하고, 繼配는 정경부인 삼척진씨(三陟陳氏)요 三配는 문화류씨(文化柳氏)이다.
묘(墓)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與地勝覽, 典故大方)
22세 김연(金 緣)(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예안파) (1487∼1544) 58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자유(子由), 호는 운암(雲巖), 죽연(竹淵) ,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효로(孝盧)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군수 지(持)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생원(生員), 진사(進士)를 거쳐 1519년(중종 14) 식년시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혔고 1520년(중종 15) 춘추관 한림이 되었다. 대교와 봉교를 거쳐 1524년(중종 19)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 때 간신 김안로를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부모 봉양을 위하여 의흥현감을 자청하였고 1528년(중종 23) 전적으로 승진되었다. 공조, 예조의 정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 흥해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537년(중종 32) 지평, 사예를 거쳐 군자감정, 사간원 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김안로의 무리 채무택(蔡無擇), 심언광(沈彦光)이 모의하여 김안로를 다시 등용하려 하자 이언적과 함께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김안로가 다시 정권을 잡으니 군자감 판관으로 임명되어 돌아오니 중종이 위로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간신에게 미움을 당한 줄 모르고 외방으로 멀리 나가서 수고한 일은 내 마음에 불한함이 있다."고 하였다. 1538년(중종 33) 군자감정, 성주목사로 있다가 그 해 탁영시 문과에 병과 9인으로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승진, 영주부사로 나갔다. 1541년(중종 36)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오르고 1542년(중종 37) 가선대부로 승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이언적과는 도의로 사귀었고 옥산서재(玉山書齋)에 여러번 가서 학문을 토론하였다. 유고가 있으며 1544년(중종39)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병사했다후학이 사우(祠宇)를 지어 향사하고 있다.
묘(墓)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서현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2세 김굉(金?)(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이조참판공)(1470∼1526) 57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견중(堅中),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순성(順誠)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양주한씨(楊州韓氏)로 사예 집(緝)의 딸이다.
1469년(연산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4년(연산 11) 식년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1507년(중종 2) 사간원 정언이 되고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 1512년(중종 7) 장령으로 승진하고 이듬해 암행어사로서 함경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기민구제책을 건의하였고 1516년(중종 11) 의정부, 예조, 이조의 동의에서 사유(師儒)에 가당한 인물로서 조광조(趙光祖)등 52인 중에 간택되었고 대사간이 되어 범죄인을 엄벌 할 것과 관기를 바로잡을 것과 사문(射門)의 사건(사헌부의 문을 활로 쏜 사건)을 원만하고도 공정히 추국(推鞫)할 것을 왕에게 진언하였다. 그 후 경연참찬관,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고 이듬해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는데 유신으로서 궁마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아뢰어 사퇴하였다. 1522년(중종 17)에 이조참의, 이듬해에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묘(墓)는 아산군 둔포면 봉재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2세 김덕원(金德源)(사온직장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어버지는 문경공 예몽(禮夢)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창평조씨(昌平曺氏)로 참판 육안(陸安)의 딸이다.
1441년(세종 24) 진사시 동방진사과에 2등 17인으로 합격하였고 1447년(세종 30)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 1등 3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영천군수였고 홍문관정자, 사헌부장령,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춘추관기주관으로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예문관직제학에 이르렀고 좌익원종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配는 숙부인(淑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묘(墓)는 충북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막고개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2세 김성원(金性原)(사온직장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생부는 문경공 예몽(禮夢), 양부는 참의공 의몽(義夢)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字는 성지(成之)이며 1453년(단종 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동년 식년시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7인으로 급제하여 한림, 사예, 사성, 제학을 역임하고 일찍이 승지로 있을 때 상소로써 길야은의 증직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얻었다. 1466년(세조 12) 발영시(拔英試)에 책제(冊題)를 내니 그 때 사람들이 부러워 하였다. 1480년(성종 12)에 수찬관으로써 임금의 명을 받들어 노사신, 강희맹, 성임, 양성지, 서거정 등으로 더불어 여지승람을 편찬하여 바쳤고 좌익원종 2등공신에 책록되고 한림, 수찬, 승정원 우승지를 거쳐 통훈대부 성균사 사예에 이르고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조실록을 편찬하였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서산정씨(瑞山鄭氏)이다.
묘(墓)는 중원군 금가면 잠병리 막현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名臣錄)
22세 김 유(金 綏)(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예안파) (1491∼1555) 65歲. 조선 중기의 학자, 字는 유지(綏之), 호는 탁청정(濯淸亭),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효로(孝盧)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군수 지(持)의 딸이다.
1525년(중종 20)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24인으로 합격하였고 무예에 정통하여 무과에 응시하였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문무 양시를 그만 두고 덕을 숨기고 임천(林泉)에서 살았다. 집이 원래 부유하였으므로 재산이 향중에서 으뜸이었으며 조석으로 어버이를 공양하여 기쁘게 하였다. 또한 성품이 호협(豪俠)하여 빈객을 좋아하여 정자를 수리 확장하고 손님을 맞아 즐기니 선비들이 이 고을을 지나면 반드시 찾아와서 즐겼고 비록 폐의파립( 衣破笠)한 사람이라도 친절히 대접하고 옳지 못한 사람을 보면 준엄하게 꾸짖어 용서가 없었다. 그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안동시 와룡면 오천동에 있다.
23세 김 기(金 紀)(문숙공파/수산공파/참군공파/사간공파) (1500∼1533) 34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강(仲綱), 호는 옥곡(玉谷), 아버지는 대사간 숭조(崇祖)이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탐진최씨(耽津崔氏)로 생원 윤원(潤元)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식년시 문과에 병과 19인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을 역임하고 호당(湖當)에 뽑혔다. 의정부 사인에 이르러 임금을 보필할 대관(大官)의 물망에 올랐으나 불행히 일찍 졸하니 중종이 특히 지사점산관(地師占山官)에게 명하여 장례를 비호케하고 제수(祭需)를 하사하였다.
묘(墓)는 장성군 동화면 박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3세 김경희(金景熹)(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군기시부정공파) (1515∼1575) 61歲,
조선 중기의 유현, 字는 용회(用晦), 호는 노계(蘆溪), 아버지는 참봉 기서(麒瑞)이며, 어머니는 제주양씨(濟州梁氏)로 증승지(贈承旨) 이하(以河)의 딸이다.
학포(學圃) 양팽손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으며 시에 능하였고 중종조에 동국필원에 참여한 명필이었다. 1534년(중종 29)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3등 34인으로 합격하였고 벼슬길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하여 도의로 사귄 정자 정소 이만영 송인수 양응정등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교유하였다. 그 때 같이 놀던 정자가 고창읍 호동에 있으니 취석정(醉石亭)이다.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생으로 안지 오익창등 백여명이 있다. 고창의 월계서원(月溪書院)과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고창군 고창읍 호동에 있으며 저서로는 성리설(性理說), 언행록(言行錄), 노계집(蘆溪集)이 있다.
23세 김극뉵(金克?)(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1436∼1496) 61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의백(義伯),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국광(國光)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장수황씨로 전첨 보신(保身)의 딸이다.
처음 벼슬은 음사로 청진전직이 되었다가 찰방이 되었고 남원으로 옮겼다가 1468년(세조14) 춘장방 문과에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종부시정을 거쳐 의빈부 경력이 되어 광릉군 이극배의 종사관으로 승진되어 남방의 기근을 구제하는데 매우 공평하고 안정되게 하였다, 그 공로로 절충장군에 승진되어 오랫동안 판결사로 있다가 병조, 예조, 형조, 공조의 참의를 거쳤고 서추(西樞: 武班)도 겸했다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덕종추존시 대사간으로서 헌납 김일손 등과 함께 비례라고 역쟁하니 공의가 옳게 여겼고 연산조에 또 김일손 등과 소능(昭陵: 文宗王妃權氏陵) 복위를 헌의(獻議)하였다.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과 동지성균관사와 광원군(光原君)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순창군 마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與地勝覽)
23세 김극니(金克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한성좌윤공) 조선 전기의 절신,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국광(國光)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장수황씨로 전첨 보신(保身)의 딸이다.
음직으로 광흥창수 사헌부감찰 여산군수 사복부정등 여러관직을 역임하고 한성좌윤(漢城左尹)이 되었다. 단종이 손위함에 죽음을 각오하고 직언으로 기탄없이 논박하다가 출척되어 강화유수로 좌천되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백순과 남백공이 말하기를 "우리는 세종의 후한 은혜를 입어 고생함이 마땅하나 공은 우리와 다르니 세도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하니 공이 이르되 "천지가 큰 변란이 있을 때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리오"하니 다시는 권하지 않았다. 후에 이현로, 조청광의 파당에 연좌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묘(墓)는 경기도 파주시 향양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23세 김극수(金克羞)(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경력공)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국광(國光)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장수황씨로 전첨 보신(保身)의 딸이다.
천품이 총민하고 덕행이 있어 학문이 일찍 성취되었으며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올라 익위사세마에 제수되었고 원종공신 회맹제에 참여하였다. 군자감판관을 거쳐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으로 재직중 아버지의 상사에 집제하다가 애통함이 지나쳐 복을 마치지 못하고 이듬해 서거하였다.
묘(墓)는 논산시 양촌면 석서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23세 김극괴(金克傀)(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경력공) 조선 전기의 무신,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국광(國光)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장수황씨로 전첨 보신(保身)의 딸이다.
의표가 영매하고 지략이 과인하여 경세제민하는 도량이 뛰어났다. 성종이 그 인품을 듣고 입시토록 명하여 기꺼이 손을 잡고 국왕을 보필할 재목이라 칭찬하고 도총부도사, 의령고을을 제수하니 물러나와 비단으로 손을 싸매고 군은을 잊지 않을 뜻을 보였다.
1483년(성종 15) 영남좌도에 적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그 숙부 겸광을 불러 장재를 천거하라 하니 여몽정의 고사를 모방하여 추천하였다. 특명으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삼으니 도임한 지 얼마 아니되어 적을 토평하고 돌아와 장래가 유망하였는데 불행히 장지를 펴지 못하고 24세를 일기로 졸했다.
묘(墓)는 논산시 양촌면 명암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23세 김극핍(金克?)(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평정공)(1472∼1531) 60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성(子誠), 아버지는 공안공(恭安公) 겸광(謙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삼척진씨(三陟陳氏)로 사직 계손(繼孫)의 딸이다.
1489년(성종21)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8년(연산 5) 식년시 문과에 3등 23인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고,검열, 봉교, 전적, 예조좌랑, 수찬, 지평, 예조정랑이 되었다. 이 때 연산군의 정란(政亂)으로 언관(言官)을 주찬(誅竄)하자 고산현(高山縣)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이 즉위하자 귀양에서 풀려나와 교리가 되고 장령, 부정으로 옮겼고 승문원 교감(校勘)으로서 연산일기를 수록하는데 참여했고 그 후 사간, 집의 제용, 선공감정에 올랐고 직제학, 동부승지, 우승지,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 좌승지, 도승지, 공조참판, 충청도관찰사, 한성부우윤, 이조참판, 좌참찬, 병조판서, 세자좌빈객, 우찬성, 좌찬성 겸 세자이사에 이르렀다. 항상 음흉한 무리들의 횡포와 방자함을 임금에게 직언으로 간하여 출척(黜斥)할 것을 아뢰고 흉당들의 원한을 받았다. 1530년(중종 25) 김안로, 허항, 등에게 몰려 관작을 빼앗기자 단식 끝에 발병하여 서거(逝去)하였고 1537년(중종 32) 김안로 등이 사사(賜死)된 후 다시 복관(復官)되었다.
용모가 단아하고 식견이 풍부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교만하지 않았다.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 광악군(純忠輔祚功臣崇祿大夫光嶽君)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평정공(平靖公)이다
묘(墓)는 양주군 주내면 마전동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3세 김극개(金克愷)(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참판공) (1474∼1544) 7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무화(茂和), 아버지는 공안공(恭安公) 겸광(謙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삼척진씨(三陟陳氏)로 사직 계손(繼孫)의 딸이다.
1496년(연산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9년(중종 14) 식년시 문과에 병과 19인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이 되었고 훈련원 첨정과 사헌부 지평을 거쳐 1521년(중종 16) 사간원 사간, 사도시 부정이 되었다. 1522년(중종 17) 승정원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1526년(중종 21) 개성부 유수로 옮겼고 이어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가선대부 예조참판(嘉善大夫禮曺參判), 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묘(墓)는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3세 김여석(金礪石)(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충목공) (1445∼1493) 49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은경(殷卿), 호는 심재(心齋),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수(洙)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집의 항(恒)의 딸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1465년(세조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년 별시 문과에 을과 2등 1인으로 급제하였다. 세조가 영재라 칭찬하고 동궁에게 장차 좋은 보필이 될 것이다 하였으며 또한 최항을 시켜 "무기욕(母嗜欲: 욕심을 부리지 말 것)" 아홉자를 쓰게 하고 어새(御璽)를 눌러 주었다. 그 후 검열 성균관 학유, 군자감 주부, 이조, 병조의 좌랑을 지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에 영의정 조석문과 함께 동심협력하여 평정하니 정충출기포의적개(精忠出氣布議敵愾)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곧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으며 1479년(성종 11)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치는데 원수 윤필상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군중대소사를 임기웅변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오랑캐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하여 명나라 황제가 칭찬하고 후하게 상을 주었다. 이조 참의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더니 얼마 아니되어 한 게급 올리고 또 지방안찰사로 있을 때 치적이 있어 가자(加資)를 받았다. 이어 경상,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사헌부 대사헌, 호조, 병조, 예조의 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승진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니 특별한 은전이었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고 1813년(순조 14) 무주의 도산사(道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무주군 안성면 미륵암에 있고 안성면 사전리 동구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韓國故事大典, 虛白堂洪貴達撰神道碑銘)
23세 김용석(金用石)(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 (1453∼1523) 71歲.
조선 중기의 유현(儒賢), 字는 연숙(鍊叔), 호는 담암(潭庵),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수(洙)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집의 항(恒)의 딸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1472년(성종 4)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주문공(朱文公: 朱子)의 고사를 모방하여 향약을 설정하고 매월 1일 태학관(太學館: 成均館의 別稱)에 모여 삼강오륜을 주제로 소학을 강의하여 미풍양속을 진흥시켰다. 이 때 참여한 명사는 김용석(金用石), 신종호(申從濩), 박연(朴演), 손효조(孫孝祖), 정경조(鄭敬祖) 등이다. 추강(秋江) 남효온은 장안에서 10명의 준사 중 항상 김용석을 우두머리로 뽑았다.
천성이 청렴결백하고 강의강직하여 외물(外物)에는 추호도 동요되는 일이 없었다. 이 때 정정으로 보아 집권 간소배들의 소행이 미구에 사화를 일으킬 조짐이 보이므로 가솔을 데리고 안동으로 이사하여 학문을 탐구하며 가난하나 초수(樵 : 나무하는 늙은이)와 같이 세월을 보내며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사부(士夫: 남자의 美稱)가 성균 진사만은 아니 할 수 없으나 대과(大科: 文武科)에는 참여치 말라 하였다.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 ) 정여창(鄭汝昌) 선생과 같이 동문수학하였고 1796년(정조 21) 안동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되고 또 돈정사(遯靖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 있다. (見海東名臣錄, 秋江師友錄)
23세 김우서(金禹瑞)(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영흥판관공파/관찰사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천석(天錫),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호(浩)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전의이씨로 참의(參議) 청신(淸新)의 딸이다.
1496년(연산 3)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4년(연산 11) 식년시 문과에 병과 21인으로 급제하여 좌랑을 거쳐 도사와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가 의정부 사인에 올랐고 개천군수(价川郡守), 제주목사를 지냈으며 경기도 수군절도사, 북도병사, 방어사를 역임하였고 대사성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김포군 독정리 대봉하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3세 김신동(金神童)(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좌통례공파) (1486∼1546) 6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망이(望而), 아버지는 증좌통례 거( )이며, 어머니는 증숙인 의령남씨로 도사 초( )의 딸이다.
품행이 단정하고 미목이 청수하며 심행이 자연스럽고 재식과 기량이 있었다. 1506년(중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7년(중종 12)에 영릉참봉이 되었다. 처음부터 청백하다는 명예가 있었는데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3등 26인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한림이 되어 삼암(三菴: 靜菴 趙光祖, 菴 金淨, 自菴 金絿)과 더불어 정론을 주장하여 선치의 기대가 있더니 불행하게도 사화가 크게 일어나 홍패(紅牌)를 반납하고 백패(白牌) 또한 잃었는가 하면 오래도록 금고(禁錮)의 형을 입고 두문불출했다. 1546년(명종 2) 현량과의 복과(復科)로 종부시 주부가 되었으며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시흥군 수암면 물왕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典故大方)
23세 김부필(金富弼)(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예안파) (1516∼1577) 62歲, 조선 중기의 유현, 字는 언우(彦遇), 호(號)는 후조당(後彫堂), 아버지는 관찰사 연(緣)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진사 치당(致唐)의 딸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1537년(중종 32)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2등 11인으로 합격 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1567년(명종 23) 조정에서 돈독한 행의를 듣고 사관(祠官)으로 등용하였으나 부임치 않았고 이듬해에 효능(孝陵)참봉에 제수하니 퇴게선생이 편지를 보내 출사토록 권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익년 정능 참봉에 제수하여도 또한 부임치 않으니 퇴계 선생이 "후조당 주인은 절조가 굳세어 임명장이 내려도 반기지 않네, 앉아서 빙설같은 매화 향기를 대하여 도의 존재를 눈여겨 보며 읊조리기만 하네." 하고 시를 지어 보냈다. 학문을 근본에 두고 실지에 힘썼으며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보고듣는 것이 더욱 정순정대(精純正大)하여 평생에 힘을 쏟은 것은 심경(心經)이었다. 자제에게는 효제충신을 먼저 가르쳤고 항상 말하기를 "글 배우는데는 효제를 근본으로 함이 마땅하다."하였다. 1816년(순조 17) 영남 유생이 상소하여 작위와 시호를 내리기를 청하였다. 1822년(순조 23)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祭酒), 세자시강원 찬성(贊善)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며 그 때 거처하던 후조당 건물이 현존하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후인이 사우를 세워 향사하며 무사(無嗣)하므로 제남 해(弟男 垓)를 입양하여 후사를 의탁하였다.
묘(墓)는 안동시 와룡면 서현동에 있다.(見朝鮮王朝實錄, 國史大事典, 退溪集)
23세 김부륜(金富倫)(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설월당공) (1531∼1598) 68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돈서(惇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유(綏)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순천김씨(順天金氏)로 증판서(贈判書) 수홍(粹洪)의 딸이다.
1555년(선조 14) 생원시에 2등 7인으로 합격하여 1572년(선조 6)에 유일(遺逸)의 천거로 집현전 참봉을 제수 받았고 1575년 전생서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치 않았다. 1580년(선조 14) 무소전 참봉을 제수 받았고 곧 돈녕부봉사로 옮겨 정릉의 석역(石役)을 맡아 관리한 공으로 어구마(御廐馬)를 받았고 또 제용감 직장과 내첨시주부로 전임되었다가 동복(同腹) 현감이 되었는데 공자묘를 중건하고 봉급을 털어 책 800권을 구입, 학령(學令) 수십조를 만들어 학문진흥에 힘썼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용사(龍蛇) 난리에 가재를 털어 향병(鄕兵)을 보조하였다. 그 후 봉화원이 벼슬을 버리고 도망하자 관찰사의 격문에 의해 임시로 봉화 현성을 지켰는데 임금이 그 치적을 듣고 특명으로 봉화현감을 삼아 1년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일찍 학문이 뛰어나 16세에 책침시(責沈詩)를 지었고 심경(心經)과 태극도(太極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등을 연구하였다. 정자를 지어 설월당이라 현판하니 오천에 현존하고 있으며 퇴계의 친필이며 문집이 있다.
묘(墓)는 안동시 와룡면 오천동에 있다. (見故事大典, 人物考)
23세 김부인(金富仁)(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산남공) (1512∼1584) 73歲.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학자. 字는 백영(伯榮), 호는 산남(山南),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유(綏)이며, 어머니는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순천김씨(順天金氏)로 증판서(贈判書) 수홍(粹洪)의 딸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일찍 향시에 두 번 장원했고 1549년(명종 5) 무과에 나아가 좌씨춘추를 강하여 장원하니 명예가 높았다. 선전관에 뽑혀 비변사 낭청을 겸했고 곧이어 해주, 강릉 통판이 되었다. 1563년(명종 19) 낙안군수가 되고 1567년 호조정랑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창성부사에 옮겨 병사 김수문과 함께 서해평을 정벌한 공으로 통정에 승진되고 인산첨사가 되었다. 1571년(선조 5) 길주목사, 1573년 정주목사를 역임하고 1576년 진주목사를 거쳐 경상좌도병사가 되었다가 제주목사와 경원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그 후 영해부사가 되었는데 1582년 변방 오랑캐가 경원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적을 평정하고 돌아오니 안변으로 전보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문무를 겸전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선정을 베풀었다. 유고가 있으며 후인이 사우를 지어 향사한다.
묘(墓)는 안동시 와룡면 나소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故事大典)
23세 김내문(金乃文)(사온직장공파/부제학공)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경야(景野),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성원(性源)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서산정씨(瑞山鄭氏)로 계소(繼昭)의 딸이다.
1492년(성종 24)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3등 69인으로 합격하였고 1501년(연산 8) 식년시 문과에 3등 25인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고 1506년(중종 1) 홍문관 부수찬에 오르고 1510년 단양군수로 잠시 나아가 있다가 사헌부 지평에 옮겼다. 1512년(중종 7) 홍문관 교리에 승진되었고 사간원 사간에 승진되었다.
묘(墓)는 파주군 광탄면 당산에있다.(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3세 김말문(金末文)(사온직장공파/해백공) (1469∼1525) 5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성장(成章),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성원(性源)이며, 어머니는 서산정씨(瑞山鄭氏)로 계소(繼昭)의 딸이다.
1492년(성종 24)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3등 67인으로 합격하였고 1501년(연산 8) 별시 문과에 병과 3인으로 급제하여 1507년(중종 5) 도리(島夷: 일본) 건유(虔劉: 죽임)의 난을 토평할 때 종사관이 되어 계책을 도운 공이 크므로 승전하고 돌아오자 그 공으로 황해도 관찰사에 승임(陞任)되었다. 1512년(중종 7)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1516년(중종 11)에 형조참의, 이조참의에 옮겼고 1522년(중종 17)에 승정원 우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올랐다.
천성이 단중하고 부허하지 않으며 영민하여 재능이 있었다. 언관의 직에 있을 때는 실지를 들어 간하고, 도백에 임명되어서는 아전들이 굴복하고 백성에게는 너그럽고 어진 정치를 하였다.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지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중원군 금가면 잠병리 막현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3세 김철문(金綴文)(사온직장공파/직제학공)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지장(知章),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성원(性源)이며, 어머니는 서산정씨(瑞山鄭氏)로 계소(繼昭)의 딸이다.
1492년(성종 24) 생원시에 3등 66인으로 합격하였고 1496년(연산 3) 문과에 올라 7인으로 급제하여 1504년(연산 11) 사헌부 지평이 되었는데 이 때는 연산군의 혼정 시대였다. 이세좌(李世佐: 갑자사화에 김굉필 등 10여명과 함께 화를 입어 거제도로 귀양가는 도중 자살하였다)를 논죄치 아니하였다 하여 문경에 부처(付處)되었다. 1506년(중종 1)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검토관(檢討官)으로서 당시 중종임금에게 선왕의 만들어 놓은 법을 준수하도록 간언하였다. 홍문관 부응교 직제학에 승진되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4세 김극통(金克通)(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참판공파/집의공파/도사공파)(1484∼1553) 70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가수(可秀), 호는 우재(友齋), 아버지는 도사 적(籍)이며, 어머니는 공인 장흥위씨로 참봉 종복(宗復)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정통하여 정암 조광조 선생을 찾아가서 같이 강론하는데 정암선생이 "남주의 높은 선비는 참으로 그대이다" 라고 하였으니 그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고, 큰 형, 중 형과 같이 문장과 행의로 세상에서 추중받았고 사림에서 칭송하기를 김씨집의 삼통(三通) 또는 삼수사(三秀士)라 하였다. 1507년(중종 8)에 동몽교관이 되었다가 기묘사화이후 벼슬을 버리고 전리로 돌아와 하서 김인후, 눌재 박상, 송천 양응정 제현과 교유하였으며 충암 김정과는 시로써 교유하였고 저서로 우재 유고가 있다.
묘(墓)는 전남 장흥군 남면 포고에 있다.
24세 김보원(金輔元)(문숙공파/삼사좌사공파/수산공파/봉훈랑공파/은진현감공파/참봉공파)
조선 중기의 절의신, 字는 사미(士美), 호는 직방재(直方齋), 아버지는 참봉 회(繪)이며, 어머니는 장택고씨(長澤高氏)로 진(震)의 딸이다.
천자가 영리하여 백부로부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칭찬 받더니 장성하여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와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낭월산(朗月山)에서 무예를 닦았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重峯 趙憲)과 같이 청주에서 왜적을 소탕하고 황간, 선산, 함안 등지에서 많은 적도를 섬멸하였으며 1593년(선조 27) 진주에서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더불어 강물에 투신 자결하니 철종조에 공조좌랑에 추증되었고 장성(옛 영광) 장천사(長川祠)에 배향되었으며,
묘(墓)는 전남 영광군 삼남면 기동에 초혼장하였고 묘전에 순의비를 세웠다.
24세 김태정(金泰廷)(문숙공파/판도판서공파/좌통례공파)(1541∼1588) 48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형언(亨彦),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백간(白幹)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전주이씨로 명원군(明原君)의 딸이다.
1561년(명종 17)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29인으로 합격하고 1569년(선조 3) 알성시 문과에 병과 4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형조참판을 지냈다. 인성왕후의 복제를 기년으로 주장하다가 대세에 몰렸으나 당시 사류들은 정론이라 하였다. 또한 정여립이 난을 일으킬 때 접근해 왔으나 이를 물리치므로 뒤에 선견지명이 있다 하였다.
묘(墓)는 충남 대천시 죽정동 마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4세 김성진(金聲振)(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판중추부사공파/국재공)(1564∼1597)
50世, 조선 중기의 절의신, 字는 원지(遠之), 호는 국재(菊齋), 아버지는 참봉 한련(漢璉)이며, 어머니는 영월신씨(寧越辛氏)로 세인(世仁)의 딸이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삼종형 홍우와 같이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 의병과 의곡을 모집하여 장성 남문창의소에 나가 왜적 물리칠 계략을 세우고 장성을 출발하여 직산에 이르러 적 수백명을 죽였다. 진위에서 왜적 탐정자를 잡아 베이고 용인에 와서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했다.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인솔하고 전주에서 안성을 거쳐 소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적의 응원부대가 몰려와 고전 분투하다가 순절하니 장성 오산사(鰲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성송면 판정에 있다.
24세 김홍우(金弘宇)(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군기시부정공파)(1539∼1598) 60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백용(伯容), 호는 백곡(白谷), 아버지는 생원 경희(景熹)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사과(司果) 세원(世元)의 딸이다.
오음 윤두수의 문인이며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김경수, 윤진, 기효간과 같이 장성 남문에서 창의하였다. 참모장으로 의병 1651명을 소모(昭募)하고 김언욱, 서정후등과 같이 의곡을 모아 법성포에서 기효증을 시켜 행재소에 보냈다. 또 10개항의 건의서를 서류(徐流)로 하여금 도체찰사 정철에게 보냈다. 1592년 11월 24일 의병을 이끌고 직산에서 왜적 수백명을 참하고 진위에 이르러 정탐하는 15명을 잡아 13명을 죽이고 두 명을 돌려 보내어 싸우는 뜻을 갖지 말도록 전하라 하였다. 1593년(선조 27) 1월 10일 군사를 용인과 안성사일 옮겼는데 화의가 성립된다는 말을 듣고 고창으로 내려갔다. 동년 10월에 오익창, 김후진, 변성온, 오희길과 같이 무명을 많이 구하여 명나라 군사에게 보냈고 그 해 전주 별시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저작 박사가 되었다. 1596년(선조 30) 전적으로 승진되고 이어 예조좌랑으로 옮겼다. 1597년(선조 31) 8월에 명장, 해생과 같이 소사에서 왜적을 발견하고 4000여 철기를 다리밑에 잠복시켜 왜병을 대파했다. 전쟁이 끝나자 귀향할 것을 상소하니 특별히 남원부사에 제수되었다. 오산사(鰲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호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4세 김덕우(金德宇)(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군기시부정공파/양촌공)(1548∼1633)
86歲, 조선 중기의 훈신, 字는 언용(彦容), 호는 양촌(良村), 아버지는 생원 경희(景熹)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사과(司果) 세원(世元)의 딸이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에서 창의하였다. 이 때 의병을 모아 진주성에 보냈고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의곡을 모아 행재소에 운반했다.
19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 호우(湖右) 의곡장으로 천거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강화도에 보냈으며 의병을 인솔하여 여산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장성의 오산사(鰲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성송면 송암에 있다.
24세 김태우(金泰宇)(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군기시부정공파/진사공) 조선 중기의 학자, 字는 사용(士容), 아버지는 생원 경희(景熹)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사과(司果) 세원(世元)의 딸이다.
1606년(선조 40) 증광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61인으로 합격하였으며 학문이 높았다. 1613년(광해 6) 간신배들이 폐비(廢妃)의 일로 청류(淸流)들에게 화를 입히자 말하기를 "인륜이 무너지는데도 선비가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무엇으로 선왕의 은혜에 보답하랴" 하고 김효성, 고부천 등 24인과 더불어 이이첨, 정조, 윤인 등 삼적(三賊)의 머리를 베이고 이원익을 불러 드릴 것을 상소했다가 진도(珍島)로 유배(流配)되었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호동에 있다. (見典故大方, 東國文獻錄)
24세 김기수(金麒壽)(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감역공파/만옹공)(1542∼1626) 85歲.
조선 중기의 절의신, 字는 인부(仁夫), 호는 만옹(晩翁), 아버지는 도사(都事) 구(球)이며, 어머니는 공인(恭人) 경주김씨로 부장 진의(振義)의 딸이다.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여 기자전 참봉이 되었다. 1570년(선조 4) 선무랑을 거쳐 병절교위가 되었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김홍우와 같이 장성 남문에서 창의하여 의곡유사가 되어 서곤과 같이 의곡을 행재소에 운반하였으며 의병 800명을 모아 고종후(高從厚)의 막하에 보냈고 달천에서 적병을 만나 수십명을 베었다. 사복시정에 추증되었고 장성의 오산사(鰲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이당산에 있다.
24세 김질충(金質忠)(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전서공파/승사랑공파/광원군공파)(1519∼ ? )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직부(直夫), 아버지는 부호군 경(鏡)이며, 어머니는 영인 삼척김씨(三陟金氏)로 참의 연손(延孫)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3등 14인으로 합격하였고 1548년(명종 4) 별시 문과에 병과 18인으로 급제하였으며 황강 김계휘와 같이 호당(湖當)에 뽑혔으며 벼슬은 병조좌랑과 지제교를 지냈다.(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典故大方)
24세 김명윤(金明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평정공파/좌찬성공)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회백(晦伯), 아버지는 평정공(平靖公) 극핍(克 )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전주이씨로 파성군(把城君) 철동(哲仝)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16인으로 합격하였고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3등 26인으로 급제하고 1524년(중종 29) 별시 문과에 병과 26인으로 급제하여 정자, 형조좌랑, 사예, 승지, 특진관 등 승문원, 홍문관, 예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쳐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配는 정경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마전동에 있다.(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4세 김홍윤(金弘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평정공파) (1499∼1569) 7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의중(毅中), 아버지는 평정공(平靖公) 극핍(克 )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전주이씨로 파성군(把城君) 철동(哲仝)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2등 22인으로 합격하고 1526년(중종 21)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과 이조좌랑, 정랑을 역임하였다. 1530년(중종 25) 아버지 평정공이 시사에 대하여 극언(極言)함으로 삼흉(三兇)에게 원한을 사서 일문이 화를 입었다가 1537년(중종 32) 흉당이 복주됨에 따라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대사헌을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配는 정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와 繼配 정부인 전주리씨(全州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마전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4세 김의윤(金懿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평정공파/시은공)(1515∼1581) 6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대숙(大叔), 호는 시은(市隱), 아버지는 평정공(平靖公) 극핍(克 )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전주이씨로 파성군(把城君) 철동(哲仝)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 생원시에 2등 20인으로 합격하여 와서시 별제와 종부시 주부가 되었고 1553년(명종 9) 별시 문과에 병과 31인으로 급제하여 호조, 예조, 병조의 좌랑을 거쳐 정랑에 올랐다. 그 후 사간원 정언과 헌납, 사헌부 지평과 지제교를 제수 받았으나 곧 사직하고 광릉(廣陵)에 은거하여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미오한 이치를 강하며 토론하였다. 또 소재 노수신과 미암 유희춘으로 더불어 막역한 교분이 있었다. 1567년(선조 1) 선조가 즉위하자 어진 선비들이 다투어 벼슬길에 나갈 때 공의 뜻과 행검을 임금에게 여러번 아뢰니 사헌부 집의와 사간원 사간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또 영의정 박순(朴淳)이 경연에서 공을 불러서 인견하고 임금의 덕을 돕도록 하자고 아뢰니 선조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사람을 시켜 문병하고 초모(貂帽: 담비털로 만든 모자)를 하사하여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으나 그 철석같은 뜻을 고치지 않고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그 때 사람들이 그가 살던 곳을 염퇴(恬退: 명예나 이권에 뜻이 없어 벼슬을 사양함)고개라 하였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구룡에 있다.(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4세 김 주(金 籌)(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진사공) 조선 중기의 학자,
字는 유보(猷甫), 아버지는 진사(進士) 용석(用石)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익찬 형석(亨石)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같이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명예나 이권에 뜻이 없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여 학문을 탐구하였다. 글씨는 예서에 능하여 비백체(飛白體)를 잘 썼으며 안동향지(安東鄕誌)를 창간하였다.
묘(墓)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 어줄리에 있다.
24세 김 규(金?)(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정랑공파)(1522∼1565) 44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몽서(夢瑞), 호는 탄수(灘?). 아버지는 전적 세우(世愚)이며, 어머니는 의인 영산신씨로 진사 제담(悌聃)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45인으로 합격하고 1546년(명종 2) 식년시 문과에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1550년(명종 6) 형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사간원 정언이 되고 1552년(명종8)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 사간원 헌납, 이조좌랑을 거쳐 1554년(명종10) 이조좌랑에 승진되고 이듬해 사헌부 장령에 오르고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되었으며 1557년(명종 13) 장악원정에 올랐다. 이 무렵 공의 빠른 승진을 시기한 반대파의 정득(鄭得), 황림(黃琳)등의 무고로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그간의 경위에 대한 것이 모두 무고임을 장문의 소(疎)로서 올렸으나 반대파의 세력에 못이겨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원래 공과 김홍도(金弘度), 김계휘(金繼輝)는 함께 연소(年少)한데다 재기가 있어 사림의 중심이 되어 세칭 삼김(三金)이라고 불리운데다 청현직(淸顯職: 높고 좋은 지위)에 있으면서 시정의 득실을 과격하게 논란하였으므로 질시하는 무리가 많았다. 1564년(명종 22) 반대파의 실세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전리로 돌아왔다.
묘(墓)는 파주군 탄현면 법흥리 약산동에 있다.(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國朝人物志)
24세 김 해(金 垓)(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예안파/읍청정공파)(1555∼1593) 39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 字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 아버지는 참봉 부의(富儀)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정랑 습(習)의 딸이다.
1588년(선조 22) 생원시에 2등 9인으로 합격하고 이듬해에 증광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으나 동료중 사초를 불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향리로 내려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니 의병대장에 추대되고 이정백, 배용길을 좌우부장으로 삼아 좌도의진을 편성, 적을 추격하였다. 주요 전장인 당교, 용궁, 함창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 예천 송구천으로 진을 옮겨 많은 왜적을 생포 또는 참살하였다. 전진중에 있을 때에도 국운의 곤람함을 슬퍼하고 왜적의 방자함을 분하게 여겨서 말하다가도 반드시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는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의병을 모아서 거느렸은즉 추악한 오랑캐를 쳐 없애기를 기약하지마는 군사가 적고 형세는 약하여 성불성을 미리 요량할 수 없으니 불행히 지탱해 내지 못한다면 나는 오직 한 번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할 뿐이며 맹세코 구차하게 살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1593년 5월 밀양으로 내려오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주에서 전사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총명하여 태극 음양에 대한 변의와 심성 이기에 관한 논설, 치란 흥망 천문 지리 병법등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고 조목, 김성일, 유성룡, 남치리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수찬에 추증되고 1892년(고종 30)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 성균관 좨주에 가증되었다. 저서로 심의변(深衣辨), 거상의절(居喪儀節), 구익록(求益錄), 행군수지(行軍須知), 서행일기(西行日記), 향병일지(鄕兵日記)등이 있다.
묘(墓)는 안동시 와룡면 서현동 금학산에 있다.(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國史大事典)
24세 김 영(金?)(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예안파/설월당공파)(1577∼1641) 65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 아버지는 현감 부륜(富倫)이며, 어머니는 의인(宜人) 밀양박씨로 감찰 순(純)의 딸이다.
1612년(광해 5) 증광시 문과에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권지승정원 정자로 벼슬길에 올라 승정원 주서가 되었는데 북인들이 농간을 부림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 후 나라에서 승정원 일기를 쓰라고 수차 독촉하여 부득이 상경하여 성 밖에서 일기를 만들어 올리고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귀향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성균관 직강,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치 않았다. 이듬해 봄 다시 형조정랑, 의주판관, 예조정랑을 제수하였으나 부임치 않았다. 1627년(인조 5) 봄 다시 예조정랑, 사헌부 장령, 1633년(인조 11) 세자시강원 보덕, 사헌부 집의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치 않았다. 1636년(인조 14) 사간원 사간, 용양위 부사직, 집의를, 1637년 보덕과 사간을 겸하여 불렀으나 병을 핑계삼아 모두 사양했다. 병자호란에는 가재를 털어 군비를 보조하였고 화의가 성립되자 통곡하고 평생 서쪽을 향해 앉는일이 없었다. 숙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순조조에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며 저서로 계암문집이 3권이 있다. 묘(墓)는 안동시 와룡면 나소동에 있다.(見朝鮮王朝實錄, 尊周錄, 故事大典)
24세 김 강(金 綱)(사온직장공파/참봉공파) (1489∼1555) 6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강지(綱之), 호는 의암(宜庵), 아버지는 참봉 백문(伯文)이다.
1507년(중종 2)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2등 20인으로 합격하였고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 종형 구(絿)가 남해로 귀양가자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초야에 숨어 살았다. 그 후 10년만에 나라가 평온해지자 1528년(중종 23) 별시 문과에 병과 17인으로 급제하여 한림, 예문관, 홍문관 교리, 수찬을 역임하고 사헌부 지평, 장령이 되었다. 외직으로 경기 함경도 도사와 재령, 정선군수에 제수되어 청백과 관인으로 선정을 베풀어 치적이 있었다. 이조, 예조 좌랑과 정랑을 거쳐 성균관 사성이 되었고 홍문관 직제학에 승진,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 경연 참찬관에 이르렀다.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며 문학행의로 이름이 있었다. 자헌대부 의정부 우찬성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화성군 태안면 반월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4세 김구(金絿)(사온직장공파/대흥공파/문의공) (1488∼1534) 47歲. 조선 중기의 문신 및 서예가. 字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계문(季文)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전의이씨로 현감(縣監) 겸인(兼仁)의 딸이다.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1507년(중종 2) 생원 진사 양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별시 문과 2등 1인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고 저작박사, 수찬, 교리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조좌랑에 옮겼다가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사간원 헌납, 사간, 장악원정을 거쳐 홍문관 응교, 전한으로 이배(移拜)되었으며 항상 응교를 겸임하였다. 한 때 성균관 사성으로 휴가를 받아 옥당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느날 밤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을 무렵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임금이 서 있고 그 옆에 별감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깜짝 놀라 엎드리니 중종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기에 왔노니 어찌 군신의 예가 필요하리요" 하며 술을 같이 마셨다. 곧 승정원 동부승지에 오르고 좌승지로 승진 되었다가 부제학에 이르렀고 호당에 들어갔다. 이 때 중종은 조광조, 김구, 김식, 김정등 젊은 사류를 등용하여 성리학을 장려하고 문민정치를 구현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종전의 제도를 혁신하려 했다. 그러나 남곤, 심정등이 원한을 품고 임금에게 대역으로 모함하여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 나이 31세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곧 남해로 귀양중 화전별곡을 지었는데 문학적인 작품으로 유배가 아니고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귀한 소산이 아닐 수 없고 이런 작품은 음양으로 후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531년(중종 26) 임피(臨陂: 현 옥구군)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33년(중종 28) 석방되어 향리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부모가 구몰하였다. 부모의 산소에 가서 통곡하다가 기절까지 하였고 여막을 지어 조석으로 통곡함에 풀이 다 말라 버렸다 하며 이로 인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효우가 돈독하였고 학문이 고매하였으며 조선 전지, 중기 4대 명필의 한사람이며 서울 인수방(仁壽坊)에서 살았으므로 공의 서체를 인수체라고 한다. 선조조에 광국원종 1등공신에 추록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 되었다가 영조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가 증직되었다. 시호는 문의공(文懿公)이며,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남해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國史大事典, 東國筆苑, 海東名臣錄)
25세 김동준(金東準)(문정공파/문민공파/광성군공파/광산군공파/창계공파)(1575∼1661)
87歲.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동기(東起), 字는 이식(而式), 호는 봉곡(鳳谷), 아버지는 생원 희지(熙止)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楊氏)로 부위(副尉) 공신(公信)의 딸이다.
1617년(광해 10) 증광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2등 13인으로 합격하였다. 광해군의 폭정하에 서궁(西宮)에 유폐(幽廢)된 인목대비를 홀로 찾아 뵈었고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인조조에 선생의 추천으로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양성현감에 제수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는 어가(御駕)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여 윤황, 유계, 김반, 제공과 더불어 상소하여 척화(斥和)하였다. 난 후에 여러번 사헌부 지평, 한성판관, 세자사부등의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황명처사(皇明處士)라 자칭하고 날마다 후진으로 더불어 도의를 강하니 학자가 많이 따랐다. 저서로 유고 연역도(演易圖), 계몽편, 의례문혜(疑禮問解)가 있으며 전주 인봉서원(麟峰書院)에 종향(從享)되었고 호산서원(湖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완주군 비봉면 백조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韓國故事大典)
25세 김 정(金 珽)(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참판공파/참봉공파/남계공)(1527 - 1613) 87歲.
조선 중기의 충신, 字는 공서(公瑞)이고 호(號)는 남계(南溪)이다. 아버지는 제 참봉 판관(除 參奉判官) 중겸(仲謙)이며,어머니는 공인(恭人) 장흥임씨(長興任氏)로 미영(未英)의 딸이다.
전남 장흥(長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일곱 살에 지은 시에서 "산위에 오르니 지구는 작아지고, 샘 가운데 앉았더니 하늘도 크지 않네, 하늘도 작고 지구도 작은데, 우러러 보나 굽어 보아도 내가 제일 큰가 하노라"하였다. 충암(?菴)김 정(金 淨) 문인(門人)으로 1555년(명종 10) 29세때 사마시에 응시하여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시관(試官)으로 문장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 하였다. 그 후 양송천 응정(梁松川 應鼎),백옥봉 광훈(白玉峯 光勳)등과 많은시를 읊었다. 1558년 32세 되었을 때 본디 하늘이 낸 효자로써 어버이 돌아가실 무렵 손가락의 피를 드렸으며 돌아가신 뒤 3년 동안 시묘를 살게되어 후인(後人)이 이곳을 이르기를 효묘동(孝墓洞)이라 하였다. 1592년(선조 25) 66세 임진왜란 시 오천 김경수(鰲川 金景壽), 오봉 김제민(鰲峯 金齊閔) 제공(諸公)등과 장성에 의병 청(義兵 廳)을 설치 한 후 정송강 철(鄭松江 撤), 이충무 순신(李忠武 舜臣)이 누차 참모(參謀)로 힘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용만까지 왕을 모시고 갔으며, 1593년(선조 26) 정월(正月)에 명 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수복평양(收復平壤) 하였을 때 시를 지어 주면서 이르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면 효심이 일어났음을 알고 누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추운 것을 말하였는가?" 라고 하니, 이여송이 시를 읊으며 기뻐하여 옷과 양식을 주었다. 1598년 72세때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잠심성리(潛心性理)하였다.
墓는 전남 보성군 보성읍 옥암리 성곡 참판공 배위 묘하 묘좌(卯坐) 유갈(有碣)이다. 승지 임육(承旨 任?)이 찬상(撰狀)하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찬 갈명(撰 碣銘)하고, 귤옥 윤광계(橘屋 尹光啓)는 찬상(撰狀)하고, 좨주 송래희(祭酒 宋來熙)는 찬 묘지(撰 墓誌)하였으며, 백육창의비(百六倡義碑)에 있고 장유고(藏遺稿)하여 의열(義烈)로써 장성(長城)의 오산사(配享鰲山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남계(南溪) 유고(遺稿)가 있다.
25세 김 개(金 鎧)(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부호군공파)(1504∼1569), 66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방보(邦寶), 호는 독송정(獨松亭),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소윤(昭胤)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서(判書) 계겸(繼謙)의 딸이다.
1525년 (중종20)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40년 (중종35)에 식년시 문과에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로 선임되어 세자시강원 설서 사서와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과 호당(湖當)에 뽑혔고, 그 후 홍문관 부수찬으로 부름을 받아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 사헌부 장령, 군자감 부정, 사헌부 집의, 홍문관 응교, 선공감정, 예빈시정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고 1552년(명종 8) 정시에 장원 급제하자 특별히 통정을 제수하였으나 정시의 시종관으로 만류되었고 황해, 충청양도의 안찰사가 되었으며 공조, 형조, 이조참의와 장예원 판결사,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1559년(명종 15)에 특별히 가선으로 승자하여 대사헌 이조참판, 평안감사를 역임하였으며 1561년(명종 17)에 한성부 판윤을 배수하고 호조, 형조, 이조판서를 거쳐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고 지돈영부사가 되어 특진관으로 경연에 들어가 포부를 전달하는데 당시 사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금천농막으로 물러나 생을 마쳤다.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명종이 청렴 공근한 신하를 뽑아 연회를 베풀 때 퇴계 이황(李滉) 동고와 함께 참석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配는 정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이다.
묘(墓)는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5세 김언기(金彦璣)(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유일재공)(1520∼1588).
69歲, 조선 중기의 유현. 字는 중온(仲溫) , 호는 유일재(惟一齋) , 아버지는 진사 주(籌)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첨정 처정(處貞)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混)의 문인이며, 1567년(명종 2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조부(祖父) 담암공(潭庵公)의 정훈을 이어받아 벼슬길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학문에 힘써 구봉령(具鳳齡)과 함께 청량산에서 10년동안 잠심독서하고 내려오니 만물이 모두 글자로 보였다고 전해온다. 또한 惟一齋公은 사림불천지위(士林不遷之位)로 참판 김굉과 세마 이광정(李光庭)의 찬갈에 이르기를 『선생은 천품이 청고하고 방정하며 기국이 있고, 괴위하여 엄정하고 확실하였다. 평상시에는 조용한 모습으로 입을 다물고 있으나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두렵게 여기며 감히 가까이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을 대할 때는 훈훈하고 움직일 때는 의리에 합치됨으로 모든이가 매사를 물어보고 결정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퇴계 이황 이후 여강동주(廬江洞主)가 되어 서원을 여강에 세우고 선사를 높이며, 백운동고사를 모방하여 국학을 장려하고 유학전수에 노력 하였다. 또한 公은 기품이 청고하고 용모가 뛰어나 엄정 하였으며 화려한 것을 물리쳐 명예에는 뜻이 없었다.
惟一齋公께서 심도있는 학문을 강론하니 당시에 모여든 문도들이 수백인이었다. 성현의 심오한 진리를 강론하자 제자중에서 많은 명사가 배출 되었으니 남치리(南致利), 정사성(鄭士誠), 권위(權暐), 신지제(申之悌), 박의장(朴毅長), 권태일(權泰一)같은 유현으로 安東의 문학융성(文學隆盛)의 창도자라는 칭호를 받아 그 문인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보덕단(報德壇)을 세워 사림(士林)이 매년 享祀를 모시고 있다. (享祀日 : 음 3월 초정일(初丁日)·소재지 - 안동시 와룡면 산야동)
또한 안동의 용계서원(龍溪書院)과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 되었으며, 아들은 갈봉(葛峰) 득연(得硏)·만취헌(晩翠軒) 득숙(得숙)·청취헌(淸翠軒) 득의(得 ) = 出后 叔父 彦玲이다.
묘(墓)는 안동시 와룡면 산동 와룡산 남쪽기슭 丑坐
※ 유일재공은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 갈봉공(葛峰公) 득연(得硏) 字는 여정(汝精), 號는 갈봉(葛峰)
公은 西涯 류성용 문하에서 수학하여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 하였고, 학문이 고매 하였으며 임란에 창의(倡義)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그 후 나라에서 세 번이나 벼슬을 내렸으나 증조부 담암공의 정훈을 이어받아 응하지 않았고 선영하에 집을지어 지수정(止水亭)이라 편액하고 경서와 사기를 탐독하고 도의를 강마하며, 후진을 양성 하였다. 뒤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 되었고 특별히 교첩을 내렸으며, 문집이 있다. 아들은 생원(生員) 광주(光澍)와 오매당(五梅堂) 광부(光溥=出后 叔父 得숙)이다.
둘째 만취헌공(晩翠軒公) 득숙(得숙) 字는 익정(益精), 號는 만취헌(晩翠軒)
公은 구봉령(具峰齡)의 문인으로 문장과 학행이 당대에 뛰어났다. 일찍이 영남좌우도 선비들이 모여 講을 할 때 정경세(鄭經世)와 같이 수위에 뽑혀 장차 대성 할 것을 기약 하였더니 부친상을 당하여 禮를 다하고 애통함이 지나쳐 29세로 졸하였고 만취헌 유고가 있다. 아들은 오매당(五梅堂) 광부(光溥)이다.
셋째 청취헌공(淸翠軒公) 득의(得?) 字는 의정(義精), 號는 청취헌(淸翠軒)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김영(金?), 유진(柳袗), 김영조(金榮祖)와 도의로 사귀니 그 때에 4友라 하였다. 임란에 伯兄 득연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공훈이 많으며 아들은 남주고사(南州高士) 석당 광원(石塘 光源)이다. (見嶺南人物考)
25세 김인경(金仁慶)(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참판공파) (1515∼1583). 69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경유(景裕), 호는 송월헌(松月軒), 아버지는 증판서 헌윤(憲胤)이며, 曾祖는 참찬(參贊) 겸광(謙光)이다. 어머니는 증정부인 구성이씨로 동추 안세(安世)의 딸이다. 7세 때 중종 임금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결혼하여 부마로 선발되어 1522년(중종17 ) 순의대부 광천위가 되었다. 1527년(중종 22)에 혜순옹주의 어머니인 장모 경빈(敬嬪) 박씨가 작서(灼鼠: 당시 세자였던 仁宗을 저주하던 일로 진범은 김안로의 아들 延成尉 김희(金禧)로 밝혀졌음)의 변에 화를 입어, 이에 연좌되어 상주(尙州)에 유배되고, 1533년(중종28) 김안로(金安老)가 다시 옥사를 일으켜 당성위 홍려가 장살(杖殺)되었고 또 이듬해인 1534년(중종 29) 적소를 공주로 옮겼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복주되자 즉시 석방되어 복작되어 1546년(명종 2)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자의대부(資義大夫)로 승진되었다. 1560년(명종 16) 왕이 종실부마들을 모아 제술시(製述試)를 보이는데 장원하여 통훈대부로 승진되었다.
자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너그러워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제매와와 우애가 돈독했으며 부조(不?)의 은전을 받았다.
配는 혜순옹주(惠順翁主), 繼配 진주강씨(晋州姜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1리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史大事典)
25세 김위남(金偉男)(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공파/정랑공)(1563∼1618). 56歲.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종남(終男), 字는 자시(子始), 호는 약산(樂山), 아버지는 증좌승지 표(彪)이며,어머니는 증숙부인 용인이씨로 첨추 홍간(弘幹)의 딸이다.
1591년(선조 25)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12인으로 합격하고 1602년(선조 36)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7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통례원 좌통례를 지냈다. 우계 성혼에게 수학하였고 문필이 뛰어나 그의 시는 천연자득, 도위(陶韋: 도연명과 위소주)의 풍격이 있었고 필법은 비해당(匪懈堂: 安平大君)을 모방하였다. 1618년(광해 11) 인목대비의 폐모이후 두문불출 "시국이 이와 같은데 구차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하였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경기도 파준군 탄현면 법흥리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韓國書畵人名辭書)
25세 김지남(金止男)(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공파/사마공)(1559∼1631). 7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정(子定), 호는 용계(龍溪), 아버지는 재종숙(再從叔) 증참판 양(讓)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죽산박씨로 영조(榮祖)의 딸이다.
1591년(선조 25)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43인으로 합격하고 그 해 별시 문과에 병과 12인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에 파천함에 행재소에서 승문원 정자가 되고 곧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596년(선조 30) 예문관 대교, 황주판관, 예조좌랑, 경기도사가 되고 경차관(敬差官: 이조때 지방에 임시로 보내는 벼슬, 주로 전곡(田穀)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일을 맡음)에 임명되어 경기지방을 둘러보고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그 후 평안도사, 형조좌랑, 사간원 정언, 예조정랑을 역임하고 1602년(선조 36)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고 이듬해 통훈대부 행예조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서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손실된 실록을 재편찬하는데 간여했다. 전라도사 형조정랑, 예조정랑을 거쳐 1606년(선조 40) 왜(倭)의 사신이 옴에 접위관(接慰官)으로 임명되었다. 1608년(선조 42)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수찬, 사헌부 장령을 거쳐 암행어사로서 관서지방을 두루 살폈고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1611년(광해 4) 사헌부 집의, 홍문관 교리가 되고 세자시강원 보덕,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1613년(광해 6)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과 그 모후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했으나 절의로 반대했다. 1621년(광해 14)에 경상도 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1624년(인조 2) 순천부사가 되었다가 곧 좌승지가 되었다. 1629년(인조 7) 노령에도 청풍군수로 나갔다가 그 해 겨울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학문이 높고 문장이 깊고 박식하며 특히 시문에 능하여 우리나라 명승 고적을 두루 다니며 시 352수를 지었다. 또 광산김씨 족보도 가장 먼저 수집하였으니 용계보(龍溪譜)인데 현존치 않고 있다. 저서로 내학좌사절요(內學左史節要), 시문, 소설, 소사등이 있다.
묘(墓)는 경기도 성남시 창곡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5세 김영남(金穎男)(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공파/좌통례공파)(1555∼1617). 6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오(仲悟), 호는 소설옹(掃雪翁), 아버지는 증참판 기( )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연안이씨로 판관 장(樟)의 딸이다.
1572년(선조 6) 별시 문과에 을과 4인으로 급제하여 1589년(선조 23) 익산군수에 임명되고 1592년(선조 26) 경상우도 도사가 되었다가 진양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강(東江)의 왜적을 방어하는 한편 사천에 있는 적을 소탕하고 수천석의 군량미를 서울에 운반했다. 이듬해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과 우도 병사 김면이 모두 왜적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중위장(中尉將)으로서 그에 대신하여 군중을 통솔하였다. 1596년(선조 30) 전란동안에 세운 군공으로 당상관으로 품계가 승격되어 수원도호부사가 되고 이듬해 장예원 판결사가 되고 그 후 여주목사, 백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603년(선조 37) 이강중등과 함께 천추사로 중국에 갔을 때 그 곳 궁전에 새겨진 포도 그림으로 시운(詩韻)을 내어 글을 짓게 하였는데 즉석에서 글을 지어 주위 사람들을 경탄케 하였다. 1604년(선조 38) 죽산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형조참의가 되었다가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반대파의 방해로 부임치 않고 사직소를 올렸다. 그 후 1606년(선조 40) 경주부윤을 거쳐 공조참의가 되었다. 천품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7세에 능히 글을 지었고 효성이 지극하여 밤이 깊도록 독서하다가 혹 피곤하거나 졸음이 오면 몰래 어머니가 거처하는 내실앞 뜰의 눈을 종을 시키지 않고 스스로 쓸어 사람들이 소설옹(掃雪翁)이라 불렀다. 유고로 소설집이 있으니 시가 665수다. 금수강산 방방곡곡을 유람하며 감회가 있을 때마다 시를 지었다.
묘(墓)는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물왕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5세 김원록(金元祿)(사온직장공파/봉사공파/돈녕공) (1546∼1627) 82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경수(景受), 아버지는 증참판 종(終)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경주이씨로 양의 딸이다.
1578년(선조 12)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3등 36인으로 합격하였고 1588년(선조 22) 식년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고 병조, 형조, 공조좌랑을 거쳐 외직으로 강원도 도사, 어천찰방(魚川察訪)을 역임하였다. 1602년(선조 36) 예조정랑이 되고 이어서 사간원 정언, 헌납, 성균관 사예를 거쳐 외직으로 영해, 희천, 삼척, 금산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 3) 통례원 통례로서 태묘에 임금의 3년상을 마친 뒤 그 신주를 태묘에 모시는 예를 마치자 임금이 관복을 하사했다. 1617년(광해 10)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부당함을 지적하여 반대하고 물러나와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되자 돈녕부 도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1625년(인조 3)에 임금이 특히 우로의 은전을 베풀어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임명하였다.
묘(墓)는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자경촌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6世-30世] 광산인(光山人) 인물세고(人物世考)
26세 김남식(金南式)(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군기시부정공파/지평공파/참의공)(1617∼1683) 67歲. 조선 중기의 절의신, 字는 군언(君彦), 호는 의촌(義村), 26세 김 질(金 質)(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전서공파/광암공파/사과공파) 26세 김만수(金萬壽)(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전서공파/사직공파/판관공파) 26세 김은휘(金殷輝)(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첨추공)(1517∼1611) 75歲. 26세 김계휘(金繼輝)(양간공파/판군감사공파/의정공파) (1526∼1582). 5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아버지는 증좌찬성 호(鎬)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정랑 광원(光元)의 딸이다. 26세 김공휘(金公輝)(양간공파/판군감사공파/의정공파/목사공) (1550∼1615). 66歲. 26세 김성휘(金成輝)(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경력공파/오강공)(1535∼1629) 95歲. 26세 김득연(金得硏)(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진사공파)(1555∼1637) 26세 김득의(金得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진사공파)(1570∼1625)
아버지는 증지평 여성(汝聲)이며, 어머니는 증공인 청녕조씨로 종사랑 원(愿)의 딸이다.
신독재 김집의 문인으로 1636년(인조 15) 병자호란에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고창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따르는 사람이 수백명에 이르렀다.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청주에서 오랑캐의 무리 90여명을 참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려 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고 귀향했다. 그 후 과거의 뜻을 버리고 정읍군 소성면 계령산 아래에 집을 짓고 대명유계(大明遺界)라 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또 강학당을 지어 옥산정사(玉山精舍)라 이름하고 후진을 가르치니 백여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세칭 숭정처사라 하며 1804년(순조 5) 집의에 추증되고 충신의 정려(旌閭)를 명받았으며 정읍군 소성면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고수면 전불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朝鮮人名辭典)
(1550∼1593) 44歲. 조선 중기의 무신, 字는 여빈(汝彬), 호는 절재(節齋), 아버지는 참봉 군헌(君憲)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로 군수 팽년(彭年)의 딸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기국이 있어 어려서부터 군사놀이를 좋아했다. 1592년(선조 26) 내금위 봉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 곽재우등과 더불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했다. 의병장이 되어 피로써 맹서하고 군사를 통솔하여 진주로 가는 도중 단성에 이르러 왜병을 만나 수십명을 베고 임곡(林谷)에 이르렀다. 이때 수 많은 왜적에게 포위되어 대적할 수 없음을 미리 알고 편지를 써서 웃 옷과 같이 말 안장에 얹어 집으로 보냈다. 곧 바로 칼을 빼어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많은 왜적을 죽이고 장렬히 전사하니 동년 6월 5일이었다. 말이 집에 도착하니 부인 박씨는 옷과 신을 무덤에 묻고 초혼장(招魂葬)을 지내고 소(小), 대상(大祥)을 마친 후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아니하고 참아온 것은 너의 아버지가 떠나갈 때 약속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희들이 할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라고 자식들에게 이르고 곡기를 끊은지 10일만에 죽고 말았다.
묘(墓)는 경남 합천군 용주면에 있다.
(1553∼1607). 55歲, 조선 중기의 무신. 字는 덕로(德老), 아버지는 판관 대유(大有)이며, 어머니는 공인 낙안오씨로 감찰 세훈(世勳)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였고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의 세 아우들과 함께 용맹으로 알려졌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의병 9백명을 모아 대장(大將)이 되고, 아우 천수는 후위장(後衛將), 백수, 구수는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장단(長湍)에서 조방장, 유극량의 군사와 합세하여 임진강(臨津江)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했다. 이 싸움에서 아우 백수가 전사하여 남은 두 아우와 함께 산졸(散卒)을 수습하여 낙향, 재거(再擧) 준비를 했다.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인 아들 광협 (光鋏)과 함께 황해도 일대의 적을 크게 무찔러, 의병장의 칭호를 하사(下賜)받고 선전관(宣博官)에 임명되어 부차(富車)벌의 싸움에서 3전 3승 했으나 아들 광협을 잃었다. 1593년(선조27) 진도 군수(珍島郡守)가 되어 한산도(閑山島)에 진 을 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巨)의 군대와, 광주(光州)에 주둔한 의병장 김덕령 (金德齡)의 군대에 군량을 보급했다. 난이 끝나고도 시기하는 자들 때문에 공록을 받지 못하다가 공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봉산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시호는 장양공(莊襄公)이다.
묘(墓)는 봉산군 우기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人物考)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경회(景晦), 아버지는 한성부 서윤 석(錫)이며, 어머니는 숙인 안동권씨로 봉사 조(操)의 딸이다.
천부의 총명으로 학업이 진취되었고 추만 정지운(鄭之雲)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고 1571년(선조 5)에 수운 판관에 제수되고 1575년(선조 9) 동례원 인의와 사헌부 감찰로 승진 되었다가 곧 체임되었고 1576년(선조 10)에 종부시 주부, 그 해 겨울에 교하 현감으로 나갔는데 가는 곳마다 충실하여 다른 고을보다 치적이 뛰어났다. 1582년(선조 16)에 호조좌랑으로 회계장부의 명찰신묘한 실화가 있고 공조좌랑, 형조정랑등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익위를 제수받아 의병을 모집하여 체찰사(體察使) 송강 정철(鄭澈)과 함께 군무를 계획하여 여러번 군공을 세웠고 1594년(선조 28)에 온양군수가 되고 그 후 통례원 상례, 청풍군수, 천안군수, 광주목사를 거쳐 벼슬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묘(墓)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세 살, 네 살 때 문자를 알고 일곱 여덟살 때 문의(文義: 글의 뜻)를 통하고 15세 이전에 경서와 사기를 다 읽었고 한 번 보면 거의 다 기억하였다. 1548년(명종 4) 정시 및 과시에 연이어 장원하니 전시에 직접 응시하라는 왕명이 있어 이듬해 정시에 장원하고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곧 호당(湖當)에 뽑혔다. 이듬해 부정자를 거쳐 조금 있다가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 저작박사가 되었다. 1554년(명종 10) 부수찬, 지제교, 사간원 정언, 이듬해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곧 성균관 전적으로 이조좌랑에 피천되니 이 때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김홍도와 오로지 격탁양청(激濁揚淸)함을 주장하니 권간배의 꺼리는 바가 되어 한을 머금고 화를 전가 시키니 일시의 명류들이 혹은 귀양가고 혹은 파직당하였다. 서울을 떠나 연산에 은거하였고 1563년(명종 22) 조정의 조치가 달라져서 벼슬을 돌려주고 다시 등용한다는 명이 내렸으나 마침 아버지의 상중이라 이듬해 복제를 마치고 곧 승문원 교리, 예조정랑, 성균관 직강, 이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로부터 여러 시(寺)의 첨정을 한 번, 정(正)을 세 번 지냈고 양사의 사간과 집의며 의정부로는 검상과 사인이요 관직(官職)으로는 응교, 전한, 직제학을 지냈다. 1566년(명종 22) 중시 문과 을과 제1인으로 뽑히니 통정에 승진하여 동부승지를 배수하였다. 중시에 올린 시표가 시정에서 걸출일 뿐만 아니라 당송명문집에도 당당히 우두머리가 될 만하니 곧 학사가 당상관이 되는 예요 상감의 은총도 받았다. 그 후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이조참의, 대사간이 되었으며 중국에 사은사로 다녀왔고 1573년(선조 7) 가선에 승진되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로 대사간을 네 번, 대사헌을 세 번 지냈고 평안, 전라관찰사, 공, 형조참판, 상호군,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 때에는 동지성균관사,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경상감사를 재직시 백성의 제소(提訴)를 공정히 처결하여 흐르는 물같고 일의 작은 수나 이름이라도 한 번 듣고 본 것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잊지아니하니 이민(吏民)이 그 신명함을 탄복하였다. 또 급미(給米) 3백석을 연산으로 보내 고운산사에 있는 정회당을 대둔산으로 옮겨 서재를 짓고 학문을 권장했다. 종계변무(宗系辨誣: 왕조계통이 명나라 서책에 잘못 기록된 점을 바로 잡는 것) 교섭차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야 하는데 학식이 고명한 인재로 황제를 감동시켜야할 당시의 인물은 김계휘와 이이뿐이었다. 임금이 계휘로 주청사를 삼으니 고경명과 최립은 보좌관으로 수행하였다. 1600년(선조 34) 광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으로 추증되었다.
묘(墓)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고 신도비가 논산시 연산면 거정리에 있으니 지방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경명(景明), 아버지는 증좌찬성 호(鎬)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정랑 광원(光元)의 딸이다.
언행이 충신하고 다문박식하여 유현의 자질이 있어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전과 예학을 강구하였다. 1582년(선조 16)에 율곡의 추천으로 찰방이 되었고 1584년(선조 18)에 의금부 도사가 되고 1590년(선조 24) 유상국 홍과 같이 정여립의 난을 토평하여 원종훈에 책록되었다. 그 후 아산현감, 진위현감, 형조좌랑, 봉산군수, 가산군수, 비변사 낭청, 세자익위사 사어, 인천부사 임천군수, 파주목사를 역임하여 가는 곳마다 치적이 현저하였다. 1833년(순조 34)에 연산 휴정서원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見愼獨齋全書, 朝鮮王朝實錄)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입부(立夫), 호는 오강(梧岡), 아버지는 병절교위 균(鈞)이며, 어머니는 의인 담양국씨(潭陽鞠氏)로 세인(世仁)의 딸이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에 의병장 조헌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는데 많은 재산을 희사하였고 의병을 격려하여 크게 군공을 세웠다. 또 집안에 거느리던 노복을 시켜 많은 군량미를 호남에 보내 독전하였다. 한편 권율 장군의 이현(梨峴) 전투에서도 군량과 병기를 보냈고 7년동안을 전화에 시달리는 백성이나 병사, 의병의 가족에게도 곡식과 포백을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 수차에 걸쳐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했다. 그 후 임천군수, 동래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성품이 간결하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근검으로써 치부했다. 은진의 효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임화리에 있다.
83歲. 조선 중기의 학자, 字는 여정(汝精), 호는 갈봉(葛峰), 아버지는 생원 유일재(唯一齋)언기(彦璣)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로 주부 세용(世容)의 딸이다.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며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의창(義倉)을 설치하니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장무덕(張懋德) 등이 크게 경복하였다. 양호의 종사관들이 그 덕행과 문장 그리고 충의를 칭찬하여 영천과 경주사이에 비를 세우려 하였으나 그들이 개선하므로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 1612년(광해 5)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2등 5인으로 합격하였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나라에서 세 번이나 불러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선영밑에 집을 짓고 지수정(止水亭)이라 편액하고 경서와 사기를 탐구하고 도의를 강마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1858년(철종 10) 집의에 추증되고 특별히 교첩(敎帖: 임금이 내리는 서신)을 내리어 "도학의 연원이 진실로 순정하고 충훈의 절의가 뛰어나게 갖추었다." 하였다. 저서로 갈봉유고와 지수정가(止水亭歌)가 있는데 지수정가는 한글로 되어있어 현재 대학에서 국문학의 연구자료로 연구중에 있다.
묘(墓)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와룡산에 있다.
56歲. 조선 중기의 학자, 字는 의정(義精), 호는 청취헌(晴翠軒), 아버지는 생원 유일재(惟一齋)언기(彦璣)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로 주부 세용(世容)의 딸이다. 숙부 판관 언령(彦玲)으로 출계(出系)하였으며, 어머니는 공인 청주정씨로 생원 인(麟)의 딸이다.
선조조에 성균 생원으로서 생부 유일재(唯一齋) 언기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일직이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계암 김영과 수암 유진과 망와 김영조로 더불어 도의를 강론하니 시인이 사우(四友)라 칭송하더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갈봉, 득연과 같이 의병으로 출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아들은 남주고사(南州高士) 석당 광원(石塘 光源)이다. (見嶺南人物考)
묘(墓)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산동 서록에 있다.
26세 김질간(金質幹)(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감무공파)(1564∼1621) 58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문오(文吾), 호는 쌍오(雙梧), 아버지는 증참판 응구(應龜)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교하노씨로 진사 경기(景麒)의 딸이다.
1588년(선조 22)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59인으로 합격하고 1601년(선조 35) 식년시 문과에 병과 24인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고 이듬해 병조좌랑이 되고 1605년(선조 39)부터 외직으로 나가 제원찰방, 대동찰방, 경상도 도사, 전라도 도사, 창원판관, 강진현감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 1) 사헌부 지평이 되고 이듬해 선조실록의 기주관이 되었고 곧 사간원 헌납으로 옮겼다가 병조정랑, 세자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 겸 보덕을 역임했다. 1614년(광해 7) 사헌부 집의로 홍문록을 초하였다. 1615년(광해 8) 홍문관 교리로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1617년(광해 10) 충청감사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으로 부임치 못하고 다시 강원감사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부임치 못하였다. 이듬해 승정원 좌부승지 장예원 판결사가 되었다. 1620년(광해 13)에 승정원 좌승지, 이듬해에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가선대부에 올라 이조참판이 되었고 세조의 영정을 영변에서 봉안하여 온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충북 괴산군 청안면 청룡리 회룡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6세 김 헌(金 憲)(양간공파/대사성공파)(1561∼1593) 33歲. 조선 중기의 의병장, 字는 희도(希度), 아버지는 증참의 광진(光震)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 영광김씨로 좌랑 귀수(龜壽)의 딸이다.
중봉 조헌의 문인이며 1591년(선조 25)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에 조헌이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조헌의 막하에 들어가 참좌(參佐)가 되어 청주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이 때 왜적이 금산에 주둔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의병들이 왜적을 치다가 여러번 패했다. 의병장 조헌, 승장(僧將) 영규, 참좌 헌 등이 7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성밖 10리되는 곳까지 진격하였다. 후원부대가 없는 것을 안 성내 왜군은 몰래 군대를 뒤로 보내어 길을 차단하면서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의병들도 지지 않고 육탄전을 펼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조헌을 비롯하여 700여명이 전원 전사했다. 1604년(선조 37) 선무원 종훈에 기록되고 군자감정에 추증되었다. 1797년(정조 22) 장흥의 행원사에 조헌과 같이 배향되고 묘(墓)는 의리(依履)로 장흥 행원에 예장(禮葬)하였다. (見錦山殉義碑)
26세 김 총(金 摠)(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예안파/양정당공파)(1633∼1678) 46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휘(仲輝), 호는 오헌(오軒), 아버지는 광술(光述)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로 경진(慶進)의 딸이다.
1652년(효종 4) 증광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1인으로 합격하였고 1660년(현종 2) 식년시 문과에 병과 25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가 되었다. 1666년(현종 8) 의금부 도사에 승진되었으며 이듬해에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옥구현감으로 나갔다. 1673년(현종 15) 성균관 직강, 병조정랑,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이듬해에 원양도사(原襄都事)로 나갔다가 1677년(숙종 4) 수찬이 되었다가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시관으로서 시사(試事)에 연루되어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렸고 왜국 사신접위사로 있다가 동래공관에서 졸하였다.
묘(墓)는 방잠 영산에 있다.
26세 김대덕(金大德)(사온직장공파)(1577∼1639). 6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득지(得之) , 호는 소봉(蘇峰). 아버지는 증판서 원상(元祥)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전주이씨로 현감 헌 (獻)의 딸이다.
1601년(선조 35) 증광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51인으로 합격하였고 동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 24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벼슬길에 올랐다. 예문관 검열, 봉교, 사간 등을 거쳐 1610년(광해 3)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1613년(광해 6) 병조정랑 지제교를 지냈으며 외직으로 충청도 도사, 서산군수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통정대부에 승자되어 천추절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광해 10) 광해군의 폐모론에 극력 반대하였으며 1623년(인조 1) 인조가 즉위하자 대사간이 되었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임금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승자되어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척화신을 적에게 압송하자는 편에 극력 반대하여 상소를 올려 임금의 동의로 화를 면케 했다. 그 후 장예원 판결사와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나이 7세에 글 지을줄을 알았고 글씨를 잘 써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신동이라 일컬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항상 임금에게 직언하였고 문장과 명필이 일세에 뛰어났으며 초서와 해서를 잘 써서 국조필원(國朝筆苑)에 올랐고 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 자경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國朝筆苑)
27세 김명헌(金命獻)(문정공파/문간공파/정파/갑선악파)(1714∼1795) 82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사충(士忠), 아버지는 통정 장집(章緝)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허씨로 안(岸)의 딸이다.
호학능문하여 1782년(정조 7)에 가승을 정비하여 임인보를 편찬하고 가계의 체통을 세웠다.
1794년(정조 19)에 어사 심락수(沈樂洙)가 베픈 과장에 응시하였는데 시권(試券)을 올려 과차(科次)할 때 명헌의 나이가 81세였으며 책(策)에 차석이었으나 특별히 사제(賜第)하였다. 그러나 고령으로 직부(直赴)할 수 없음을 어사가 아뢰니 임금이 명하기를 "대정현(大靜縣) 유생 김명헌은 명년 급제자를 발표할 때 방미(榜尾)에 부기(付記)하고 화패(花牌)를 내려 보내어 창명(唱名)하게 하고 객사의 뜰에서 숙배하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창방(唱榜)하기 전에 서거 하였으므로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경 소장방와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27세 김화준(金華俊) (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참봉공파/당계공)(1602 - 1644) 4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사원(士元)이요, 호(號)는 당계(棠溪)이다. 아버지는 증 장악원정(贈 掌樂院正) 식남(式南)이며, 어머니는 증 숙인(贈 淑人) 평해오씨(平海吳氏)로 참봉 성(參奉 晟)의 딸이다.
부모 봉양에 전심을 다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매 3년 동안 시묘(侍墓)살기를 마치고 상경(上京)하여, 1633년(인조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동년(同年)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壯元 及第)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로써 벼슬길에 올라 있다가 휴가(休暇)중에 1636년(인조 14)병자호란이 일어 나게된 소식을 듣고 즉시 말을 타고 남한산성 왕이 있는 곳에 달려가 모셨으니 왕이 충절(忠節)과 문사(文詞)를 사랑하여 보연(寶硯:벼루)을 하사(下賜)하고 설서 지제교겸(說書 知製敎兼)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청(淸)나라와 굴욕적인 화의(和議)가 이루어졌으므로 벼슬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에 정승(政丞) 이경여(李敬輿)가 왕에게 아뢰기를 "김모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 하고자 하니 지방 원으로 보냄이 어떠한 가요"라고 상언(上言)하여 석성 현감(石城 縣監)에 제수(除授)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 죽게 되므로 심히 애통(哀痛)한 나머지 병에 걸려 다음 해 12월, 43세로 운명(殞命)하였다. 후에 영의정 문곡(文谷)김수항(金壽恒)이 효행(孝行)을 천(薦)하여 나라에서는 효자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墓는 전남 장성군 북이면 오월리 필동 후강(後岡) 해좌(亥坐) 이고, 현감 윤인규(縣監 尹仁圭)의 찬 행장(撰 行狀)과 판서 이돈영(判書 李敦榮)에 찬 묘갈(撰 墓碣)이 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27세 김여옥(金汝鈺)(문숙공파/충숙공파/삼사좌사공파/수산공파/참군공파/사간공파/추담공파)
(1596∼1662). 6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군수(君粹) , 호는 미산(微山), 아버지는 증참판 우급(友伋)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서산류씨로 경진(景進)의 딸이다.
1624년(인조2) 증광생원시 동방생원과에 3등 56인으로 합격하였고, 동년 식년시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24인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 검열(檢關)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인조를 강화(江華)에 호종(扈從), 환도 후 봉교(奉敎), 전적(典籍) 예조 좌랑(禮曹佐郎) 병조 좌랑, 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함평현(威平縣)을 수비하다가 의병을 일으켜 상경했으나 화의가 성립된 뒤여서 해산했다. 이어 지평(持平) 장령(掌令) 정언(正言) 사간(司諫) 집의(執義) 필선(弼善)을 역임, 1647년 밀양 부사(密陽府使), 1649년(인조27),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황해도, 충청도의 관찰사, 부총관,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657년 (효종8)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 이어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지낸 뒤 판결사(判決事)와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다.
묘(墓)는 장단군 소남면 왕후릉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7세 김장생(金長生)(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1548∼1631) 84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현, 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정릉동제(貞陵洞第)에서 출생,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이간공(夷簡公) 영(瑛)의 딸이다.
1557년(명종 12) 열 살의 어린 나이로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할 때 행동이 무게가 있고 말이나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식자들은 장차 덕성을 갖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말했다. 장성하여 1567년(명종 23)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오, 예학(禮學)의 태두(泰斗)가 되었다.
1575년(선조 9) 아버지 황강공(黃岡公)을 따라 관서지방(평양)에 갔었으나 언제나 조행이 방정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1578년(선조 1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배수하였고 1581년(선조 15) 변무사(辨誣使)로 중국에 가는 아버지 황강공을 돈녕부 참봉의 관직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황강공의 별세로 복제기간 효성이 지극하였다. 1584년(선조 18) 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병으로 사임하였는데 도리어 평시서 봉사로 승진되었고 1590년(선조 26)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되고 5월에 장자 은(?)이 왜병에게 해를 입고 서제(庶弟) 연손(燕孫)이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하는 등 불행이 겹쳤다. 1596년(선조 30) 정산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연산 향사(鄕舍)로 돌아왔는데 12월에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에 조정에서 명나라 원병에게 군량을 호남에서 조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니, 이 일을 완수하고 겨울에 해서(海西: 黃海道)로 돌아와 문생과 함께 강송을 하던 중 12월에 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98년(선조 32) 군자감 첨정, 호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가을에 「근사록해의서(近思錄解疑)」1권을 저술했다. 9월에 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이듬해 정월에 양근군수, 2월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치 않았다. 얼마 후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어 사양하는 것이 미안하므로 마침내 취임했고 6월에 안성군수가 되었고 9월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1601년(선조 35) 조정에서 주역의 구결(口訣)을 교정하는 일로 부름을 받아 종친부 전부(典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직무를 수행치 못했던 바 영의정 이항복(李恒福0의 천거로 염금리(廉謹吏)로 초선(抄選)되었다. 이듬해 봄에 정인홍이 권력을 잡자 선비들을 탄압하니,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에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도를 강의했다. 1603년(선조 37) 익산군수로 임명되고 이듬해 10월에 사임하였다. 1609년(광해 2) 익위에 임명되어으나 나가지 않고 8월에 회양(淮陽)부사를 제수받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못하고 11월에 부임하였다. 1610년(광해 3) 10월에 회양은 북방의 요충지대이기 때문에 무인(武人)으로 임명하는 것이 적합하므로 철원부사로 체임(遞任)되었다. 1613년(광해 6) 서제 경손(慶孫)과 평손(平孫)이 계축화옥(癸丑禍獄)에 연루되어 옥사하므로 이를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 10년간을 연산에서 은거하며 경서와 고훈(古訓)을 잠심탐독하고 후진 학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고 1618년(광해 11)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을 완성하였으며, 1623년(인조 1) 3월에 인조반정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니, 상소하여 늙고 병이 있음을 들어 사양하고 반정의 원훈들에게 「군의 덕을 도와서 잘 인도하고..... 조정을 잘 보전하며.... 」라는 글을 보내고 도한 정국삼장(靖國三將)의 과오를 밟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또 경연에서 임금의 위로 말씀이 간절하므로 차문(箚文)을 올려 제왕의 학문하는 길을 아뢰니, 기꺼이 받아드리고 곧 사재감 첨정으로 체임시키니 경연의 관원들의 건의에 따라 원자(元子)를 보양하고 유생을 가르치라고 성균사업(成均司業)을 설치하였다. 10월에 거듭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어가를 맞이하고 난리가 평정된 후 임금의 수례를 호종하고 서울로 돌아와 상의원정에 임명되고 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어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퇴하고저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 열세가지 일을 진주(陳奏)하였다.
8월에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사직하고 10월에 왕명으로 입궐하여 강의를 드렸다. 이듬해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동지중추부사를 배수하였고 1626년에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건립하였다. 이듬해 정월, 정묘호란에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되어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양호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4월에 마침내 적이 물러가니 호소사의 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9월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치 않았고 1629년(인조 7) 윤 4월에 왕이 「마차를 타고 오라」하교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경은 이 나라의 대로요 덕행이 뛰어나니....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노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하였으나 글을 올려 정중히 사양했다. 마침 1630년(인조 8) 4월, 83세 때 노인을 우대하는 식전이 있어 가의대부에 올랐다.
이와같이 천자가 돈후하여 자연히 도에 가깝고 뜻을 세워 대현에게 친히 배웠고 입지가 전일(專一)하여 약관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덕기(德器)가 혼연히 이루어 안면(顔面)에 나타남으로 선비들이 성덕군자(成德君子)라 일컸었다. 문하에는 우암(尤菴) 송시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등을 비롯한 여러 유현을 배출하여 기호(畿湖)학파를 이루었다. 저술을 일삼지 않고 글을 읽다가 얻은 것이 있으면 기록하여 경서(經書) 8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과 서소잡록략(書疏雜錄略) 천(千)편과 첨주가례집람(添註家禮輯覽) 3권이 있고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등을 저술하여 세상에 배포하였는데 지금은 이를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1631년(인조 9) 5월에 병이 났으나 요양하지 않고 매일같이 문인들과 강론하다가 8월 3일 서거하니, 향년이 84세라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고 세자도 강경(講經)을 폐하였다. 이때 문도(門徒)로서 복제(服制)를 갖춘분이 수백이고 장일(葬日)에 모인 사람이 수천이었다. 이해 11월에 진잠현 성북리에 안장하였고 1636년(인조 14) 조정의 공의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41년(인조 19) 묘를 연산군 고정리 우수산(連山縣 高井里 牛首山)으로 이장 하였으니, 현재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로 선조비 허씨 묘의 후편이다. 1657년(효종 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이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沙溪全書, 神道碑文)
27세 김자빈(金自?)(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평정공파/좌찬성공파)(1603∼1636)
34歲, 조선 중기의 무신, 字는 이중(而重), 아버지는 과의교위 덕린(德麟)이며, 어머니는 공인 전의이씨로 감찰 위( )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했고 자라서는 사계 김장생에게 배워 경서와 사기를 박통하고 병서를 염람하여 육도삼략의 뜻을 해득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충청 감사 정세규의 추천으로 종사관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가려다가 숙부 덕란(德鸞), 연산현감 김홍익과 같이 광주(廣州)로 출전하던 길에 검천에서 접전이 벌어졌다. 이 때 안개가 많이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는데 적이 말을 타고 달려와 분전하다가 칼이 불어지고 화살이 떨어져 적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김홍익과 더불어 굴복하지 않고 화를 당하였다. 1637년(인조 15) 판부사 이상진의 주청으로 나라에서 충신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논산의 충곡서원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거정리에 있다. (見沙溪全書)
27세 김씨 (金氏)(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1572∼1633) 62歲, 조선 중기의 열부,
관향(貫鄕)은 순천(順天), 아버지는 증참의 수언(秀彦)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두 번째 부인이다.
1453년(단종 2)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화를 당할 때 그 아들 승규(承珪)가 아버지를 보호하려다 함께 죽었다. 이 때 여종이 겨우 세 살된 승규의 아들을 업고 도망하여 섬과 육지로 숨어 다니며 성(姓)의 본관(本貫)을 바구어 은진에 살면서 혈통을 전하게 되었다. 1588년(선조 22) 17세 때 아버지가 말하기를 "우리 선조 절재공의 충성과 절개를 다시 밝히려면 현금 온 조정의 덕망이 사계 김장생보다 높은 분이 없는데 이 분이 지금 부인이 죽었으니 네가 만일 아내가 될 수 있다면 우리집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여 시집 갈 것을 말하고 아버지가 전해오는 절재의 친필과 선대의 사적을 보이니 세계(世系)를 쌓아주며 "아들을 낳기전에는 본색을 말하거나 사적을 보이지 말라." 하였다. 1590년(선조 14) 큰 아들을 낳은 뒤 울면서 조용히 시종 내력을 말하고 선대의 사적을 보이니 사계가 크게 경탄하고 불쌍히 여겨 장차 글을 올리려하였다. 자녀를 법도로 가르치고 평생에 선조의 원한을 풀어 드리지 못한 한이 뼈에 사무쳐 웃는일이 없었으며 남편이 죽자 심히 애통하고 3년동안 조석상식을 몸소 올렸고 길제(吉祭)를 마친 뒤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이와같은 효와 열행이 임금에게 상달되어 효열 포장( 奬)의 은전을 받았으며 칙명(勅命)으로 정부인에 추증되었으며 효열의 정려(旌閭)가 논산시 두마면에 세워졌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두마면 수암에 있다.
27세 김광원(金光源)(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진사공파)(1607∼1677)
71歲, 조선 중기의 학자, 字는 화원(和遠), 호는 석당(石塘), 아버지는 생원 득의(得 )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로 문우(文佑)의 딸이다.
1654년(효종 6) 증광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65인으로 합격하였고 학행과 문장이 사우들 중에서 뛰어나 여러번 향천에 올랐으나 선조의 유훈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은거하며 영재를 육성하고 백성을 계도하여 유풍을 진작하니 문하에 김세신(金世臣), 장우일(張遇一), 이유장(李惟樟) 등 훌륭한 명사가 배출되었으며 세인들이 그를 남주고사(南州高士)라 불렀다. 저서로 석당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북 안동시 풍산면 정산리에 있다.
27세 김우형(金宇亨)(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정랑공파)(1616∼1694) 79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도상(道常), 호는 기오당(寄傲堂), 아버지는 증좌참찬 헌( )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의령남씨로 장령 탁(晫)의 딸이다.
1650년(효종 2) 증광시 문과에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함평군수가 되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행색이 너무 초라할 정도로 청백하였다. 1657년(효종 9)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1659년(효종 11)에 부수찬, 홍문관 교리가 되어 시독관으로 임금앞에서 통감강목과 대학을 강론하였다. 헌납을 거쳐 1661년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고 사간, 수찬, 집의를 거쳐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이 『공의 신의와 청덕(淸德)은 세상에 으뜸이며 고금에 드문 분』이라고 하였다. 1666년 좌승지, 참의를거쳐 이듬해 황해도관찰사, 형, 병조참판, 도승지, 한성판윤, 공조판서를 거쳐 1685년에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1687년에 개성유수가 되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을 개탄하고 녹을 받지않았다.
어려서부터 기국이 뛰어나고 문행이 있으며 글씨를 잘 써서 공이 기주관으로 있을 때 조정에서 공을 비필주서(飛筆注書)라고 별명 붙였다고 하는데 특히 예서에 능하였다.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성삼문의 신주가 홍주로 돌아올 때 호송하여 사림이 이에 감동, 사우를 세웠다. 저서로 옥은유고(玉隱遺稿)가 있고 시호는 정혜공(貞惠公)이다
묘(墓)는 경기도 용인군 외서면 백암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7세 김효신(金孝信)(양간공파/사온승공파/대사성공파)(1574∼1627) 54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사성(士誠), 호는 귀래정(歸來亭), 아버지는 증참판 지(志)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관산임씨(冠山任氏)로 현감 팔원(八元)의 딸이다.
1600년(선조 34)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이 되었다. 1604년(선조 38) 선전관으로서 궁중을 순찰할 때 상의원(尙衣院)에 화재가 발생하자 화염속에서 열성조의 면복이 든 금궤를 꺼낸 공으로 절충장군 호군에 승진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귀성중군으로 출정하여 적과 싸워 숙천에 이르렀을 때 적당(賊黨) 강작(康綽)이 졸지에 후면에서 공의 경부(頸部)를 치니 기절할 지경이었으나 왼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작의 머리를 베어 원수부(元帥府)에 보내니, 금단은자(錦緞銀子)와 금창약(金瘡藥)을 하사받았다. 그 후 가선대부에 가자되어 훈련원 가의대부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626년(인조 4) 황해도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1627년(인조 5) 여름 금창이 재발하여 서거하였다. 진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장흥 행강사(杏岡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전남 장흥군 행원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28세 김주만(金胄萬)(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참봉공파/청헌공)(1632 - 1717) 86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태초(太初)요, 호(號)는 청헌(聽軒)이다. 아버지는 석성 현감(石城 縣監) 화준(華俊)이며, 어머니는 영인(令人) 울산 김씨(蔚山金氏)로 행 가선대부(行 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경수(景壽)의 딸이다.
도학(道學)이 박흡(博洽)하고 효행(孝行)이 순지(純至)하여 이 상공(李 相公) 숙(숙)이 천(薦)하여 익위사 세마(翊衛司 洗馬)에 제수(除授)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사미(賜米)를 받았으며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衷將軍 僉知中樞府事)요, 타계(他界) 17년 후인 1734년(영조 10)에 효행(孝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겸(承政院 左承旨兼)경연 참찬관(經筵 參贊官)에 증직(贈職)되었고, 부인(夫人) 숙인 김씨(淑人金氏)도 숙부인(淑夫人)으로 증직(贈職)되었다.
墓는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리 망산 서강(西岡 申坐)에 있으며, 양승지 덕촌 득중(梁承旨 德村 得中)의 찬 행장(撰 行狀)과 판서 조득림(判書 趙得林)에 찬 묘갈(撰 墓碣)이 있으며, 문집 건곤(文集 乾坤)이 있다.
28세 김 감(金?)(랑장공파/감무공파/찬성공)(1476∼1538) 6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옥여(玉汝), 아버지는 증참판 문손(文孫)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광산노씨로 진사 맹준(孟俊)의 딸이다.
1498년(연산 5)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04년(연산 11) 식년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감찰, 대사간, 승지, 대사성, 대사헌, 판결사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한때 서천군수로 재직시 서해로 침공하는 왜적을 방어하기도 하였으며 만년에는 향리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에서 그 염결을 가상히 여겨 공조참의에 탁용(擢用)하기도 하였다.
묘(墓)는 광주광역시 충효동 이치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8세 김 집(金 集)(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경공)(1574∼1656). 83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유현, 字는 사강(士岡), 호는 신독재(愼獨齋), 서울 정릉동제(貞陵洞第)에서 출생, 아버지는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창녕조씨로 첨추 대건(大乾)의 딸이다.
6세 때 이미 글을 읽고 작문하였으며 1581년(선조 15) 천곡 송상현과 귀봉 송익필에게 수학하였고 1586년(선조 20) 모친상에 정성껏 집상하다가 신병까지 얻었다. 1591년(선조 25)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4월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부친을 모시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 3)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치 않았고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관으로 특진하여 5월에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628년(인조 6) 임피 현령 (臨陂縣令)이 되고 이듬해 7월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했다. 1634년(인조 12) 선공감 첨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않았다. 1636년(인조 14) 5월에 사헌부 장령, 6월에 종친부 전첨, 7월에 집의(執義), 8월에 용양위 부호군, 10월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치 않았다. 이해 12월에 병자호란이 발발했고 1637년(인조 15) 적이 물러간 후 도성에 들어가 임금께 위안을 드리고 돌아왔다. 이듬해 8월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1639년(인조 17) 다시 집의에 제수되어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사은한 바 5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경연참찬관을 겸하라 하므로 수차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사은하고 경연에 입시하였다. 이어 우부승지에 임명하니 또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6월에 호군으로 바꾸어 연산으로 돌아온 바 7월 12월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출사치 않았으며 다시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643년(인조 21)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고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듬해 8월에 공조참의(工曹參議), 10월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645년(인조 23) 10월에 동궁을 보좌하라는 논지가 있자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11월에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고 이듬해 세 번째 사직의 글을 올렸다. 1647년(인조 25) 세자시강원 찬선에 제수 되었으나 글을 올리고 출사치 않았다. 이듬해 특명으로 세자시강원 찬선으로 부름을 받았고 11월에 사직을 간청하여 허락을 얻고 12월에 부친이 저술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다시 간행했다. 1649년(인조 27) 정월,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는데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 효종이 즉위하자 특명으로 부름을 받아 6월에 상경하니 왕이 식량을 하사하고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특별히 임명되어 네차례 사양하여 뜻을 얻었으나 바로 공조참판에 제수되니 또 사양하는 글과 함께 상례이동(喪禮異同)과 시무 7조를 올리니 왕이 탄복하여 그 소장을 옆에 두었다. 명을 받아 소학의 주(註)와 중용의 구두(句讀)를 교정했다. 7월과 9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고 사양했다. 9월에 왕이 의식을 내리고 공조참판을 제수하였고 10월에 상소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경연에 참가하여 중용을 강술하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 왕에게 말씀드렸다. 11월에 귀향을 간청하니 대신, 홍문관, 성균관생들까지 글을 올려 머물도록 청원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승지 익희(益熙: 조카)로 하여금 설득하여 왕명에 따르게하였다. 대사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 세 번 대면해서 말씀드리고 사양하였다. 12월에 왕의 간청에 못이겨 조정에 들어가 시무를 하였다. 1650년(효종 2) 정월, 왕의 간청에 따라 인물을 전형 선발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나 재상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고 물러나자 왕의 거듭된 부름과 대신과 대학 유생들의 소환상소에 겨우 응했고 4월에 호분위(虎賁衛) 사직(司直)에 제수되었다. 5월에 인조의 연제사(練祭祀)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면서 겸임을 사양하는 글을 올렸고 11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1651년(효종 3) 두 번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송시열과 서신으로 국상변복지제(國祥變服之制)를 논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거듭 사양했고 1653년(효종 5) 숭정대부로 승진되니 상소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1655년(효종 7) 의례경전(疑禮經傳) 11권을 해석했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조정의 중대의논이 있으면 왕이 낭관을 보내어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1656년(효종 8) 윤5월 13일 별세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김집은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에서도 중망이 있었도다」고 말씀하고 특별예우로 장사를 치루도록 했다. 장사 지내는 날 선비들이 사방에서 모여와서 눈물로 조곡하고 「이제 도학이 없어졌다.」고 한탄했다.
순수한 자질로 정도를 닦고 학문에 전일(專一)하여 아버지 문원공의 학통을 이어받아 도학의 종사(宗師)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정에 의롭게 봉사하면서도 벼슬을 사양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일세의 사표로서 성덕군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며 1883년(고종 21) 아버지 문원공(文元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자간 문묘(文廟)에 종향되었고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효종(孝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신독재전서 20권이 있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愼獨齋全書, 神道碑文)
28세 김 반(金 槃)(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시조)(1580∼1640). 6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사일(士逸), 호는 허주(虛舟), 아버지는 문원공 장생(長生)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창녕조씨로 첨추 대건(大乾)의 딸이다.
1605년(선조 39)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9인으로 합격하였고 1623년(인조 2) 인조반정후 이조의 추천으로 빙고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이듬해 이괄의 난에 상감을 모시고 공주로 피난하여 공주에서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바로 성균관 전적을 제수받고 형조좌랑을 거쳐 예조로 옮겨 사관으로 기사관을 겸했다. 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부교리에 승진되었다. 1625년(인조 3) 헌납, 직장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그때 대사헌이 혼조의 척신사객이므로 탄핵하다가 면직되었다. 다시 헌납네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그 뒤 교리, 이조좌랑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다. 지제교, 응교, 사간원 집의, 종부시정, 상의원정, 의정부 사인,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했고 홍문관 전한이 되었고 1633년(인조 11) 장악원정과 도감(都監)을 겸했다. 그 후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대사간,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병조, 형조참판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했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부임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고 화친을 반대했다. 그 후 가선대부로 승진되고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대사성, 예조참판, 부제학, 병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한성우윤, 이조참판,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이때 아우가 남의 무고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는데 궐문밖에 대죄하니 임금이 무고함을 알고 석방해 주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궁중에서 오락이 심하므로 「인군이 정무를 마친후에는 반드시 경사에 유념하여 흥망의 자취를 근본으로 치정하여야한다」고 말하였다. 평소에는 화기가 가득하나 일의 시비에 있어서는 의연히 분발하여 외세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말로 간사한 것을 물리쳤다. 정사(靖社), 영사(寧社)의 원종훈에 책록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8세 김행구(金行?)(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유일재공파/석당공파)
(1631∼1711) 81歲, 조선 중기의 무신, 字는 도방(道方), 아버지는 진사(進士) 광원(光源)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승의랑 태정(泰精)의 딸이다.
벼슬은 호군(護軍)이었다.
28세 김진구(金晋?)(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유일재공파/석당공파)
(1637∼1705) 69歲, 조선 중기의 학자, 字는 자방(子方), 호는 낙서(洛敍), 아버지는 진사(進士) 광원(光源)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승의랑 태정(泰精)의 딸이다.
1691년(숙종 18) 증광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23인으로 합격하였으며 시례명문의 가훈을 이어받아 부모공양하는 정성이 극진하였고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벼슬하지 아니하고 산림에 은거하여 경사를 강론하고 후학을 장려하여 현달을 구하지 아니하니 세인의 추중된 바 되었다. 낙서유고가 전하여지고 있다.
묘(墓)는 경북 인동 약목 두만산에 있다.
28세 김득남(金得男)(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좌통례공파)(1601∼1637) 37歲,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충신, 字는 선술(善述), 호는 매죽헌(梅竹軒), 아버지는 증참판 억창(億昌)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의성김씨로 참봉 지순(之淳)의 딸이다.
선원 김상용의 문인이었고 1620년(광해 13) 무과에 급제하여 1623년(인조 1) 선전관으로 인조반정으로 왕위가 바뀌어질 때 창졸간에 어보(御寶)를 분실했는데 공이 이를 찾아서 주정대신(主政大臣)에게 밀납(密納)하였다. 이듬해 이괄이 난을 일으킴에 공주까지 어가를 호종하였고 안현(鞍峴)에서 적을 격파하여 그 공으로 초계군수에 이어 백령진 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철곶첨사(鐵串僉使)로서 세자를 강화도에 호종할 때 오랑캐가 사녀(士女)를 포로로 잡아가는데 그 참상을 보고 추격하려 하니 세자가 활과 말, 갑옷을 주었다. 1637년(인조 15) 부평 계양산하(桂陽山下) 굴포(掘浦)까지 진격하면서 분전, 적 수백명을 베이고 포로된 사녀들을 모두 탈환하였다. 드디어 승세로 추격하였으나 날은 어두웠고 말은 지쳐 남한산성으로 향하여 달리다가 말이 넘어지고 기진맥진하여 역부족으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신의 정려(旌閭)를 명받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무안의 모충사 및 표충단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전남 무안군 해제면 상감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29세 김상벽(金尙碧) (문정공파/록사공파/현령공파/집의공파) 성재공(省齋公) 諱 치겸(致謙)의 아들. 1565년생으로 字는 광명(光明), 호는 묵헌(默軒)이다. 현신교위로 임란때 이충립(李忠立)등과 의병을 일으켜 이치(梨峙)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아들은 항(抗), 식(湜), 근암(謹庵), 원(源)이다.
묘(墓)는 전남 무안군 현령면 평산리 산61번지에 있다. (見光山金氏遺蹟寶鑑)
29세 김일천(金日遷) (문정공파/록사공파/육행당공파) 관찰사공 諱 존경(存敬)의 아들, 1616년생으로 字는 천교(遷喬), 호는 겸암(謙菴)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 용양위 부호군을 행하고, 통훈대부 예천군수를 지냈으며 선정을 베풀어 향인이 송덕비를 세웠다. 아들은 훈련원 봉사 필현(弼賢), 통덕랑 필량(弼良), 송죽당 필명(弼明), 필추(弼秋), 통덕랑 필흘(弼屹), 필원(弼元)이다.
묘(墓)는 전남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 산17번지에 있다. (見光山金氏遺蹟寶鑑)
29세 김익렬(金益烈)(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남원공)
(1602∼1665). 64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장(子章), 호는 학주(鶴洲),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안동김씨로 첨추 진려(進礪)의 딸이다.
1631년(인조 9) 선공감 가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귀후서(歸厚署) 별제로 승진되었다가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횡성현감이 되었고 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병정을 모아 원수의 막하로 가니 원수는 적의 세력이 팽창함을 두려워하여 자위하고 있을 뿐이었다. 원수에게 "지금 군부가 계시는데 어찌하여 앉아서 보고만 있고 나가지 않느냐."고 하였으나 듣지않자 물러나와 군사를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던중 화친이 이뤄졌다. 항상 이 일을 생각하면 주먹을 쥐고 탄식하였다. 1644년(인조 22) 이인찰방이 되어 선정을 베푸니 백성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1646년(인조 24) 진잠현감, 1650년(효종 2) 사복시 주부, 활인서 주부를 거쳐 한성부 판관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진산군수로 나갔다가 5년만에 돌아와 한성서윤에 제수되었고 곧 영천(榮川)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효종 9) 임천군수, 1659년(현종 1) 군자감 주부, 사복시 판관을 역임했다. 이듬해 옥천군수에 임명되었고 1664년(현종 6) 철원부사로 승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곧 선혜청랑(宣惠廳郞)에 제수되고 이듬해 남원부사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향리로 돌아왔다.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대전시 서구 정민동에 있다. (見典故大方)
29세 김익희(金益熙)(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창주공)
(1610∼1656). 4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신독재 김집, 기암 정홍명, 계곡 장유의 문인이며 1627년(인조 5)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50인으로 합격하였고 1633년(인조 11)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 2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었고, 곧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전적에 승진, 세자시강원 사서로 옮겼고 옥당에 선발, 수찬에 임명되어 정사의 대본과 천리, 인욕, 공사, 의(義)와 리(利)등을 나누어 상소하였으며 부교리 겸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임금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산성을 고수하며 척화를 주장했다. 1639년(인조 17) 어머니 상(喪)을 마치고 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다가 영광군수로 나갔다. 이듬해 아버지 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렸고 1644년(인조 22)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에 들어가 보덕을 겸했는데 이때 대소관원이 무사안일하고 법도가 해이하여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1646년(인조 24) 동부승지, 승문원 부제조를 거쳐 1648년(인조 26) 태안군수로 옮겨 선정을 베푸니 백성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인조가 승하하자 효종의 부름을 받아 우부승지가 되어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왔다. 1651년(효종 3) 강원감사가 되어 단종의 묘를 수축하고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653년(효종 5)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형조참의, 대사성을 거쳐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곧 성균관 대사성 겸 동지경연사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옮겼다. 1655년(효종 7) 대사헌, 이듬해에 양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곧 사양하니 형조판서로 임명하자 또 사직소를 올렸고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4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과 도의로 사귀었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며 문집이 있다.
配는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가정동에 있다. (대전시 도지정문화재 제5호)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29세 김익겸(金益兼)(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
(1615∼1637). 23歲, 조선 중기의 충신, 字는 여남(汝南),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증광생원시에 장원하고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1636년(인조 14) 건주의 오랑캐가 참람하게 황제라 일컬으니 우리 사신 이곽(李廓) 등이 겁내어 그 궁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들과 같이 축하하였다. 이때 상소하기를 "오랑캐가 오만무도하니 천지의 대변이요 이곽 등이 사신의 임무를 버리고 위조(僞朝)를 축하하여 군명을 욕되게 했으니 그 부도한 사람을 죽여 나라안에 조리돌리고 또 오랑캐의 사신이 거만하여 우리로 하여금 부모의 나라를 배반하고 흉한 무리와 화친하라 하니 이 말이 어찌 마땅하다 하리오, 청컨대 몽고 사신도 함께 죽여 함에 담아 명나라에 알리고 대의를 들어 삼군을 격려하면 벙어리와 앉은뱅이라도 백배나 기운이 날것이니 어찌 힘이 적은 것을 근심하랴." 하였다. 그러나 이 해 겨울에 오랑캐가 쳐들어와 어머니 서부인을 모시고 강화도로 갔다. 이듬해 정월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침범하자 동지들과 함께 군관을 도와 사수할 것을 약속하고 활을 잡고 성에 올라 말하되 한 사람씩이야 어찌 대적하지 못하겠느냐 하였다.
22일에 청병(淸兵)에게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자 강화(江華)로 가서 성을 사수(死等) 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선원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남성루문에 올라가 분신(焚身) 자결하였다. 뒤에 보조공신 영의정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이며,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 및 논산의 충곡사(忠谷祠)에 배향되었고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으며 충신의 정려(旌閭)를 받았다.
配는 贈정경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서구 정민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29세 김익훈(金益勳)(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
(1619∼1689). 7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무숙(懋叔),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1648년(인조 26) 음직으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고 사옹원 직장을 거쳐 전생서 주부로 승진하였다가 시복시로 옮겼다. 첨정에 승진되어 내승(內乘)을 겸했고 장성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을 세웠다. 공조정랑, 한성서윤, 군기시첨정, 사도시정, 장악원정, 돈녕부도정을 거쳐 외직으로 남원부사, 수원방어사, 충청병사를 지냈다. 1678년(숙종 5) 광주부윤으로 임명되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았다.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병사로 임명되었으나 또 반대파의 반대로 1680년(숙종 7) 다시 광주부윤에 임명되었다. 곧 가선에 승진되어 한성부 우윤에 부총관을 겸했고 경신대출척의 공으로 부사정훈에 추록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한성부 좌윤,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익년에 경기총융사를 겸했다가 어영대장으로 옮겼다. 1687년(숙종 14) 부총관에 제수되고 가을에 충청병사에 제수되었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세력을 잡자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헌공(忠獻公)이다.
配는 정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史大事典)
29세 김익경(金益炅)(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도헌공)
(1629∼1675). 4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계명(季明),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 진사시 동방진사과에 3등 66인으로 합격하였고 1662년(현종 4) 중광시 문과에 갑과 3인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집의(執義)가 되고, 1564년 형조 참의(刑曹參譏) 동부승지등을 거쳐 1666년 호조 참의(戶曹參譏) , 다음해에 대사간 원양도 관찰사(原襄道觀察使)를 지냈으며 1672 (현종 14) 대사헌을 지냈다.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674년(현종 16) 예조 참판(禮曹參判) 때 죽은 인선왕후(仁宜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서인(西人)으로서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 : 만1년)이 채택되자 양성(陽城)에 유배되었다가 바로 사면되어, 이듬해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어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配는 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건업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별파 김광진(金光瑨) (1625∼1698) 74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진옥(晉玉), 호겸(好謙)의 아들, 함북 길주(吉州) 출신. 1654년(효종 5) 식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675년(숙종 1 ) 예조 정랑(禮曹正郎)으로서,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宋時烈)이 화를 입자 그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파직당했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涉)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보직되었고, 삼화 현령( 三和縣令)을 지냈다.
29세 김윤제(金允悌) 자(字)는 공노(恭老), 호(號)는 사촌(沙村) 1527년(중종23)에 진사가 되고, 1531년(중종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料)로 급제, 교리(校理)를 거쳐 전주진영(全州鎭營)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론 지냈다.
29세 김우철(金遇喆) 호(號)는 입지당(立志堂), 1719년(숙종4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합격 , 형초참의(刑曹參譏)를 지냈다.
30세 김 담(金 담)(문숙공파/예조판서공파) (1678∼ ? )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사관(士寬), 호는 동강(東崗), 아버지는 통정 우화(遇華)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전주최씨로 생원 세장(世章)의 딸이다.
1708년(숙종 35) 진사시에 2등 3인으로 합격하였고 1713년(숙종 40) 중광시 문과에 병과(丙科) 41인으로 급제하였으며 1717년(숙종 44) 중시 문과에 을과(乙科) 1인으로 급제하였다.
농암 김창협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벼슬은 장령(掌令)을 거쳐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 파직되었다가 1725년(영조 1) 복직되고, 1742년 장에원 판결사(判決事)에 올랐으며 효로써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연산 백석면 장정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0세 김성원(金成遠) (낭장공파/감무공파/찬성공파) (1525∼1597). 7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강숙(剛叔), 호는 서하당(棲霞堂),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홍익(弘翼)이며, 어머니는 의인 해주최씨로 장사랑 한종(漢宗)의 딸이다.
하서 김인후의 문인이며 1558년(명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고 오직 학문과 덕행에만 힘썼다. 1580년(선조 14) 효행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그 이듬해에 제원찰방이 되었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同福假官)으로서 군량을 조달하여 의병들을 도왔고 이듬해에 종질(從姪) 김덕령(金德齡)장군에게 병기와 군량을 많이 조달해 주었다.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에 노모를 등에 업고 동복 모후산으로 피난 갔다가 갑자기 왜적을 만나 왜적들이 노모를 해치려하자 노모를 감싸고 보호하였으나 함께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 모후산을 모호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고 순효비가 그 산에 세워졌는데 주암댐의 축조로 수몰되어 충장사 앞에 옮겨 세웠다. 저서로 서하당유고 2권이 있다.
配는 숙인 서산유씨(瑞山柳氏)이며 父는 승지 설강(雪江) 유사(柳泗)이며, 繼配 숙인 선산임씨(善山林氏)이다.
묘(墓)는 광주시 북구 금곡동 접제에 있다.
30세 김 계(金 계)(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686∼1745) 60歲, 조선 중기의 무신, 字는 여언(汝彦), 호는 동호(東湖), 아버지는 증참의 수태(壽泰)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 경주김씨로 주민(株旻)의 딸이다.
1728년(영조 2) 이인좌가 모반하여 안의(安義)를 점령하니 이때 합천의 교활한 괴수 조성좌(曺聖佐)가 밤에 군수 이정필을 찾아가 정의의 세력임을 내세워 은연중 군수를 협박했다. 그러나 이군수는 그가 역도임을 알고 잡아가두고 이 고을 장사 김계, 이만갑으로 별군을 구성하고 공으로 천총(千摠)을 삼았다. 이군수는 급히 진주로 구원병을 청하려갔으나 그 사이 역도들이 틈을 타서 조성좌의 집 종 수백명을 동원 옥문을 부수게하였다. 그리고 조성좌를 옥에서 구해내어 장수로 삼고 객사에 모여 반격을 시도했다. 이때 공은 전략을 세워 조성좌를 유인 밤중을 이용하여 송원평등의 의군과 같이 적의 군막을 넘어뜨리고 칼을 빼어 치니 적의 무리는 일시에 괴멸되었다. 조성좌 일당을 소탕하고 평안을 되찾으니 백성들이 모두 김계의 공이라하였다.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787년(정조 12) 공적비 건립의 발의가 성립되어 1890년 합천읍에 비를 세웠다.
묘(墓)는 경남 합천군 합천읍 영창리에 있다. (見與地勝覽)
30세 김성은(金性은)(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765∼1830). 66歲, 조선 중기의 학자, 字는 성연(聖淵), 호는 인일정(引逸亭), 아버지는 윤중(允重)이며, 어머니는 연안김씨로 창문9昌文0의 딸이다.
이재 황윤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86년 평장동 왕자공 유허에 사우를 짓는데 책임을 맡았고 1797년 문안공의 위에 시조 왕자공위를 봉설하고 서원강당 중수기를 썼다. 1803년 임진왜란때 장성남문 창의한 곳에 비를 세웠고 1812년 양호거의록을 발간하고 1814년 금산사에 호남 선비들의 모임을 갖고 역천 송명흠 옥과 영귀사에 성담 송환기, 중주 이직보를 무주 주계사에 배향할 것을 발의했다. 1824년에 영주 삼강록을 발간하고 1826년 유림의 발의로 노산사를 창건하였다. 1828년 풍덕망포에서 장영공 전리판서공 묘소를 찾아 수호하였고 동국문헌록을 교정하였다. 인일정유고가 있다.
묘(墓)는 전북 정읍시 소성면 모촌에 있다. (見國史大事典)
30세 김만균(金萬均)(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창주공파)
(1631∼1675). 45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정평(正平), 호는 이호(梨湖), 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익희(益熙)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한산이씨로 대사간 덕수(德洙)의 딸이다.
1652년(효종 4) 증광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6인으로 합격하였고 1654년(효종 6) 춘당대방 문과에 병과 4인으로 급제하여 설서, 검열, 교리(校理), 응교, 보덕, 사인을 역임하고 1669년(현종 11)에 문성공 이율곡(李栗谷)과 문간공 성우계(成牛溪)을 문묘에 종향할 것을 소청하였으며 승정원 좌부승지에 오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配는 정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묘(墓)는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0세 김만증(金萬增)(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창주공파)
(1635∼1720). 86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경능(景能), 호는 돈촌(遯村), 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익희(益熙)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한산이씨로 대사간 덕수(德洙)의 딸이다.
1663년(현종 5) 진사시 동방진사과에 3등 34인으로 합격하였고 교관을 배수하고 세자익위사의 벼슬과 고을의 수령을 거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며 하사 제문(祭文)과 영정(影幀), 돈촌유고(遯村遺稿)가 있다.
配는 정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모촌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0세 김만기(金萬基)(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33∼1687). 55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영숙(永叔), 호는 서석(瑞石), 아버지는 충정공(忠正公) 익겸(益兼)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해평윤씨로 참판 지(지)의 딸이다.
숙종(肅宗)의 국구(國舅: 즉 숙종대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이며, 숙부 익희(益熙)에게서 수학(受學)하였고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1652년(효종 4) 생진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장예원, 승문원(承文院) 주서, 설서를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60년(현종 2) 교리, 이듬해 병조좌랑이 되었고 곧 정랑으로 승진되고 1662년(현종4) 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응교, 사복시정, 성균관 사성, 의정부 사인, 동부승지를 거쳐 1666년(현종8)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대사간이 되고 곧 좌승지로 옮겼다. 이듬해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71년(현종 13) 예조참판에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부총관, 관상감 제조를 겸했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 1671년(현종12) 딸이 세자빈(世子嬪)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양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했다. 이듬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고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에 승진,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 및 총융사(摠戎使)를 겸관(兼管)함으로써 병권을 장악하여 남인(南人)인 윤휴(尹鑛) 허적(許積) 등의 질시를 받았고,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다. 1680년(숙종 7) 경신대출척(廉申大黜涉)때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공을 세워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1686년(숙종 13) 풍정도감(豊呈都監) 도제조를 지냈다.
효종(孝宗)이 승하한 뒤로 국세가 쇠약해 지고 국방력이 차츰 무너지므로 벼슬을 버리고 정양할 뜻이 있었으나 갑자기 국구가 되어 거취가 양난할 뿐 아니라 위기를 당하여 형세가 급박하고 사화가 잇따르니 충성과 지혜를 다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고 훈업을 이룬 뒤 벼슬을 헌신같이 버리고 일 없는 듯이 자처하려 했으나 국가에서는 주석같이 의지하고 선비들은 산악같이 우러렀다.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헐뜯었으나 아무리 살펴도 털끝만큼도 흠 잡을 곳이 없으므로 결국은 따랐다. 경서 사기외에도 제가서에도 달통하였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다. 시문(詩文) 16권과 문집이 있으며, 광산김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편간하니 서석보(瑞石譜)라 이른다. 1719년(숙종 46) 현종(顯宗) 묘정에 배향되었다.
配는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에 있다. (도지정문화재 제131호)
문충공(文忠公) 만기(萬基) 신도비(神道碑) (도지정문화재 제131호)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人物考, 國史大事典)
30세 김만중(金萬重)(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37∼1692). 56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자, 字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아버지는 충정공(忠正公) 익겸(益兼)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해평윤씨로 참판 지(지)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며 1652년(효종 4)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65년9현종 7) 정시 문과에 갑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에 임명되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사임하고 곧 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다. 1667년(현종 9)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병조좌랑으로 전보되고 교리, 헌납을 거쳐 함경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었으나 노모곁을 떠날 수 없다고 사양하니 교리에 제수되었다. 1670년(현종 12) 이조정랑에 지제교를 겸했고 이듬해 암행어사로 경기도 일원을 순찰하였다. 집권파의 허적을 논박하다가 도리어 임금의 미움을 받아 국문을 받고 금성으로 귀양갔다. 1674년(현종 16) 석방되어 교리 겸 사서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헌납, 이조정랑을 제수받았으나 부임치않았다. 곧 응교로 승진, 사간으로 옮겼다가 호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나가지않았다. 병조참의가 되고 그 후 예조참의, 대사간, 대사성으로 승문원 부제조를 겸했다. 홍문관 제학, 동지경연사, 대사헌을 거쳐 교서관 제조와 예문관제학을 겸했다. 1681년(숙종 8) 예조, 병조참판을 거쳐 대사성, 공조참판, 도승지, 호조참판이 되었다. 공조판서, 양관대제학, 좌, 우참찬에 도총관을 겸했고 1685년(숙종 12) 지중추, 지돈녕, 예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숙종 13) 장희빈에게 은총을 줌이 잘못이라고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선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689년(숙종 16) 다시 남해에 위리안치되었다. 이곳에서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 하기 위한 글을 지으니 그 유명한 소설 구운몽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어머니에게 극진히 효도하여 밤이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옛 사기와 잡기를 모아 읽어 드렸고 남해에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신위를 차려놓고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며 통곡하니 섬 사람들이 따라서 슬퍼했다. 담제를 마치고 애통한 나머지 병들어 죽었다. 1694년(숙종 21) 복관되어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으며 숙종(肅宗) 묘정에 배향되었고 효자의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다. 저서로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西浦漫筆), 영정(影幀)이 있다.
配는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니 父는 판서 은상(殷相)이요, 曾祖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이다.
묘(墓)는 경기도 장단군 서도면 대덕산 하고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人物考, 國史大事典)
30세 김만채(金萬埰)(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644∼1715). 72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봉(子封), 아버지는 충헌공(忠獻公) 익훈(益勳)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김씨로 민숙공(愍肅公) 언(언)의 딸이다.
1666년(현종 8) 생원시에 2등 25인으로 합격하였고 1680년(숙종 7) 사복시 주부로 별시 문과에 병과 16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정언, 지평을 지내고 참의, 대사간, 관찰사, 개성부 유수(留守)를 거쳐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配는 정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0세 김만길(金萬吉)(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정자공파)
(1645∼1697). 5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적(子迪), 아버지는 증참판 익후(益煦)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청송심씨로 청성군(靑城君) 정화(廷和)의 딸이다.
1669년(현종 11)에 생진양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9) 사복시 주부로 춘당대방 문과에 올라 2인으로 급제하여 부수찬 지평, 정언, 교리,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의 등 여러관직을 거쳐 강원, 전라관찰사로 재직시 치적이 나타났고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에 이르렀다.
묘(墓)는 화성군 동탄면 장지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1世-35世] 광산인(光山人) 인물세고(人物世考)
31세 김덕령(金德齡)(낭장공파/참봉공파/습독공파)
(1568∼1596). 29歲,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며 충신, 字는 경수(景樹), 아버지는 습독 붕변(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로 직장 계종(繼宗)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從軍)의 명령을 받고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하루아침에 6천여명의 의병이 모집되어 사기가 충전하였다. 그러자 광해분조(光海分朝)에서 익호장군(翼虎將軍)을, 선조임금은 충용군(忠勇軍)이란 군호(軍號)를 내리고 형조좌랑에 제수되었다. 1594년(선조 28) 의병 6천여명을 거느리고 호남, 영남, 거제도, 등지에서 신출귀몰하는 계략으로 왜적을 무찔렀고 전략노선도 발표했는데 영, 호남지방과 동해와 대마도를 거쳐 일본 대판으로 쳐 들어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놀란 왜장 가등청정은 몰래 화가를 시켜 장군의 초상을 그려다 보고는 「참으로 장군이다」하고 경탄하면서 소진(小陣)을 철수하고 대진(大陣)으로 구축해 놓고 감히 도전해오지 못하였다. 이때 승병(僧兵) 팔도 도대장인 사명대사 유정(惟政)에게 격려편지를 보냈고 또 왜적 2백여명이 고성지방에 칩입하여 남녀 50여명을 생포해 가는 것을 장군이 복병을 배치하여 모두 무사히 탈환하였다. 이에 선조는 장군에게 호피립(狐皮笠), 이엄(耳掩: 관복을 입을 때 사모밑에 쓰던 모피로 만든 방한구)등을 하사하고 1594년(선조 28)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거제도에서 수륙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왜적들을 무질렀고 이듬해에는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의령, 정암에서 합동 기습작전으로 왜적을 크게 섬멸하였다.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1596년(선조30) 도체찰사(都體察使)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한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이때부터 왕의 신임을 질투하는 대신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이던 신경행(幸景行)의 무고로 피체, 국문을 받았으나 혐의 사실을 부인, 대신들 간에도 찬반 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6차례의 엄형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춘산화연곡(春山火燃曲)을 남기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원통하게 옥사(獄死)했다. 1661년(현종 3)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 참의(兵曹參譏)에 추증(追贈)되었으며, 1678년(숙종 5) 벽진서원(碧津書院)에 합향(合享)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고 벽진서원에 의렬사(義烈祠)로 사액(賜額)하였다. 1712년(숙종 39)에는 장군의 봉사손 수신(守信)을 음직으로 녹용하여 벼슬이 별검에 이르렀다. 1788년(정조 13) 충장공(忠壯公)의 시호가 내리고 이듬해 좌찬성(左贄成)에 추가 증직되었으며 1974년 정부에서는 장군의 묘하에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하여 성역화 하였다.
묘(墓)는 광주시 충효동 이치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亂中日記)
『춘산화연곡(春山火燃曲)』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31세 이 씨(李氏)(낭장공파/참봉공파/습독공파)
(1568∼1597). 30歲, 조선 중기의 열부, 관향은 흥양(興陽), 아버지는 첨정 대록(大祿)이며, 남편은 충장공(忠壯公) 덕령(德齡)이다.
부군의 비보를 듣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하종하려 하였으나 친정 어머니의 위안과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다. 정유재란에 담양 추월산에서 피난하다가 왜적의 위협을 받자 굴복하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절벽 아래로 투신 순절하니 1840년(헌종 7) 조철영이 담양부사로 부임하여 그 석벽(石壁)에 "金忠壯公德齡 夫人 興陽李氏 罵倭賊殉節處" 라고 각자(刻字)하였다.
묘(墓)는 충장공 묘와 합폄.
31세 김진구(金鎭龜)(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51∼1704). 54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수보(守甫), 호는 만구와(晩求窩), 아버지는 문충공(文忠公) 만기(萬基)이며, 어머니는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청주한씨로 군수 유랑(有良)의 딸이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
1673년(현종 15) 사마양시에 합격하였고 1680년(숙종 7)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16인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어 「현종실록(顯宗實錄)」을 수찬(修撰)하고 정언(正言), 헌납(獻納), 교리(校理), 응교(應敎), 집의(執義) 등을 거쳐 좌승지(左承旨), 광주 부윤, 수원 부윤(水原府尹), 경상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고 서인(西人)이 실각하자, 앞서 김석주(金錫胄)와 함께 남인을 가혹한 수법으로 숙청했다는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호조 참판(戶嘗參判)으로 기용되었다. 도승지(都承旨), 전라도 관찰사,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등을 역임하고 형조, 공조, 호조, 병조, 예조의 판서를 지낸 뒤 지돈녕부사, 좌우참찬(佐右參贊) 겸 어영대장, 도총관, 수어사, 세자빈객, 판의금에 승진하였다. 숭정대부에 승진되고 광은군(光恩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헌공(景獻公)이요, 유가가 전하여 가장되어있다.
配는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군포시 반월면 대야미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1세 김진규(金鎭圭)(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58∼1716). 59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아버지는 문충공(文忠公) 만기(萬基)이며, 어머니는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청주한씨로 군수 유랑(有良)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며 1682년(숙종 9)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686년(숙종 13) 정시 문과에 갑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여 전적에 제수되고 예조좌랑(禮曺佐郎)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다시 지평(持平)으로 기용되어 수찬, 헌납, 부교리, 이조좌랑, 정랑, 사서, 교리 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으로부터 척신(戚臣)으로서 궁중 출입이 잦고 월권 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고, 그 후 대신들의 천거로 사인, 보덕, 사간, 필선, 부응교를 지냈고 1696년(숙종 23) 회양부사가 되었다. 1699년(숙종 26) 통정에 승진되어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되어 스승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을 공박하여 소론(少論)과 대립하였다. 1700년(숙종 27) 예조참의, 좌부승지, 공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간, 대사성, 좌승지, 호조참의을 거쳐 가선에 승진 호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이조참판(吏曹參判), 공조참판을 거쳐 1706년(숙종 33) 병조참판에 이르렀다가 소론의 집권으로 덕산에 유배되었다, 1710년(숙종 37) 양관대제학, 1712년(숙종 39) 예조판서, 이듬해 정헌에 승진, 좌참찬(左參贇)이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전서(篆書), 예서(隸書) 및 산수화(山水畵), 인물화(入物畵)에도 능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며, 저서로 축천집이 있으며 아버지 서석보를 이어 광산김씨의 족보를 편찬했으니 죽천보(竹泉譜)이다. 영정(影幀)이 있으며, 거제(巨濟)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配는 정경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 繼配 정경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國史大事典)
31세 김진옥(金鎭玉)(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창주공파)
(1659∼1736). 78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백온(伯溫) , 호는 유하(柳下) 온재( 齋), 아버지는 증판서 만균(萬均)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연안이씨로 문숙공(文肅公) 일상(一相)의 딸이다.
1700년(숙종 27)에 감역이었고 그 후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수원부사, 경주부윤을 지냈고 호, 형, 병조참의, 동부승지, 통정대부 강원도관찰사에 승진되었다. 숙종조에 대보단(大報壇)을 설립하자는 조정의 공의가 통일되지 않으니 공이 비원안에 축단하고 소지제천(掃地祭天)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함을 주장하여 조정이 이에 따랐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유고가 있다.
配는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묘(墓)는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1세 김진상(金鎭商)(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684∼1755). 72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여익(汝翼), 태백(太白), 호는 퇴어자(退漁子), 아버지는 증판서 만채(萬埰)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현손, 어머니는 증정부인 전의이씨로 집의 항(抗)의 딸이다.
1699년(숙종 26) 진사시에 3등 45인으로 합격하였고 1712년(숙종 39) 정시 문과에 병과(丙科) 15인으로 급제하여, 1718년(숙종 45) 주서, 수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다. 1722년(경종 3) 신임사화(辛壬士禑)로 무산(茂山)에 유배 되었다가 1724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이조 정랑(吏曹正郎)에 등용되었고, 이어 수찬, 필선, 부교리,사간, 이조참의,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1741년(영조 18) 대사헌에 승진되고, 1753년(영조 30)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학덕으로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고 글씨에도 능하여 이름을 떨쳐 많은 비문(碑文)을 썼다. 타인의 소점이 된 평장동에 처음으로 왕자공의 유허비를 세워 유허를 보존토록 하였다. 저서로 퇴어자유고가 있으며 1864년(고종 2)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다.
配는 정부인 한양조씨(漢陽趙氏), 정부인 경주박씨(慶州朴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1세 김진동(金鎭東)(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도헌공파)
(1683∼1765). 83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진경(震卿), 아버지는 증판서 만재(萬哉)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청주한씨로 증승지 태유(泰愈)의 딸이다.
1721년(경종 2) 참봉이 되고 현감 돈녕부 도정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차되고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광산김씨 정묘대보(丁卯大譜: 1747년)를 발간 하였다.
配는 정부인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묘(墓)는 강원도 춘천시 칠전동 모란봉 하에 있다.
31세 김효건(金孝建)(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 (1752∼1815). 64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충백(忠伯), 아버지는 동추 종범(宗範)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의령남씨로 응로(膺老)의 딸이다.
1777년(정조 2) 증광생원시에 2등 17인으로 합격하였고 1783년(정조 8)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丙科) 27인으로 급제하여 현감을 거쳐 승정원 좌부승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고 외직으로 안주목사로 나갔으며 가의대부에 승진되어 여주목사와 양주목사로 재직하였으며 한성부 판윤과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임금이 공의 단정한 풍모를 사랑하여 기주관으로 있을 때 충백(忠伯)이라는 字를 내리고 후한 상을 주었다. 지조가 굳고 안빈하며 일호의 불의와 비행도 없었다.
묘(墓)는 홍성군 갈산면 신촌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성택(金晟澤) (문정공파/의랑공파) (1874∼1914). 41歲. 字는 경윤(敬允), 일명은 영성(永聲), 전남 보성군 겸백면에서 종일(鍾鎰)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 4월 고흥군 동강면 전투와 8월에 과역(過驛)전투에 의병장으로 참전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1910년 돌산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았고, 사면후에도 항쟁하였다. 정부에서는 198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을 승인하였다.
32세 김용국(金龍國)(문숙공파/삼사좌사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견지(見之), 아버지는 성환(聲煥)이며, 어머니는 순창조씨(淳昌趙氏)이다.
1873년(고종 11) 식년시 문과에 병과 35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정언이었다. (見國朝文科榜目)
32세 김 권(金 權) (문숙공파/밀직사사공파) (1805∼1866). 62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달중(達中), 호는 운계(雲溪), 아버지는 갑원(甲源)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창윤(昌潤)의 딸이다.
1825년(순조 26) 식년시 문과에 병과 38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사간을 지냈으며 유고가 있다.
묘(墓)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 쌍행정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2세 김 수 (金 燧)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786∼1847). 62歲, 조선 후기의 학자, 字는 여형(汝亨), 아버지는 광찬(廣燦)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종령(宗齡)의 딸이다.
재질은 경륜을 쌓았고 행동은 효우에 돈독하였으며 족조 성은(性 )과 더불어 장영공(章榮公) 진( ) 전리판서공 광리(光利)의 묘를 풍덕 망포 응봉하에서 비로서 찾아 수호하였고 저서로 동유록(東遊錄) 및 풍천일기(豊仟日記)가 있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 있다.
32세 김춘택(金春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70∼1717). 48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훈신과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대호군에 제수되었고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서인(西入)이 제거되고,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그 집안이 크게 화를 입어 그도 여러 번 유배 또는 투옥되었다.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이 실각하자 사면되어 재등장 하였으며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도운 공이 있었다. 서인(西人)이 다시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갈라지자 노론에 속하여 1697년 소론의 탄핵으로 한때 유배, 1701년 무고의 옥사(獄事)로 부안(扶安)에 다시 유배, 1706년 세자(世子: 景宗)를 모해(謀害)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죄가 가중되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으나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1886년(고종 24) 이조판서, 성균관 좨주, 광령군(光寧君)에 추증되었고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으며 시호는 충문공(忠文公)이요, 시재(詩才)가 뛰어나 명망이 높았으며, 종조부(從祖父) 김만중이 지은 소설 「구운몽(九雲夢)」과「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했고, 저서로는 시문 10 책과 만필(漫筆) 1책을 남겼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작품으로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이 전한다. 《별사미인곡》은 작자가 제주도로 귀양가 있을 때 지은 가사인데, 그 시대에 한문 숙어가 거의 없는 순한글체로 언어 구사의 평이성을 살린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글씨로는 《호판김진귀표(戶判金鎭龜表)》가 있다.
配는 정부인 완산리씨(完山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대야미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史大事典)
32세 김보택(金普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72∼1717). 46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시(仲施), 호는 척재( 齋),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695년(숙종 22)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 11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감사, 검열(檢閱) 정언(正言) 등을 역임했다. 1703년(숙종 30) 노론(老論)의 선봉으로서 소론(少論)인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이 윤강을 무너뜨리고 오역( 逆)을 두둔한 죄를 상소하여 논박하였고 1717년(숙종 44)에 또 윤선거,, 윤증 등의 어진이를 모욕하고 스승을 배반한 죄를 논척하여 간악한 무리들의 시기를 받게되었다. 1722년(경종 3)에 화를 입어 벼슬을 추탈당하였다가 1725년(영조 2)에 복관되었고 1887년(고종 5)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익헌공(翼獻公)이며 문장, 글씨, 그림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대양미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운택(金雲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73∼1722). 50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행(仲行), 호는 백운헌(白雲軒),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699년(숙종 26) 진사시에 3등 15인으로 합격하였고 1704년(숙종 31) 춘당대방 문과에 병과(丙科) 5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설서, 병조좌랑, 전라도 도사, 지평을 거쳐 홍문관의 선발로 이조(吏曹)에 녹선되었다. 그 후 사복시정에 승진 되었다가 응교, 동부승지, 형, 형조참의,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副提學)등을 역임했다. 글씨를 잘 써 존호를 색인 인장 및 능비의 전자를 쓰고 가선에 승진되었다. 호조참판(戶曺參判) 등을 거쳐 형조참판, 좌승지에 임명되고 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홍문관의 금오(金吾), 춘추(春秋), 비국(備局)을 겸했다. 그러나 1721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영변(寧邊)에 유배된 뒤 다시 반역을 도모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무고로 옥중에서 장살(杖殺)되었다. 1725년(영조 2)에 신원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1852년(철종 4)에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고 유고가 있다.
配는 정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묘(墓)는 충남 서산군 성연면 아남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민택(金民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78∼1722). 45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치중(致仲),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702년(숙종 29)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31인으로 합격하였고 1719년(숙종 46) 별시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동년 교리, 지평(持平), 정언(正言) 수찬(修撰)등을 역임하였고, 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옥중(獄中)에서 혹형을 당하여 졸하였다. 김제겸(金濟謙) 조성복(趙聖復)과 함께 신임(辛壬)의 삼학사라 일컬었다. 1725년(영조 2)에 신원되어 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죽헌집(竹軒集)이 있다.
묘(墓)는 충북 청원군 진현면 중척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조택(金祖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80∼1730). 5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극념(克念), 호는 평재(平齋),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711년(숙종 38) 생원시에 3등 21인으로 합격하여 음사로 현감이 되었고 1721년(경종 2) 정시 문과에 병과 5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1722년(경종 3)에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2) 사면되어 귀환하였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마명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복택(金福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682∼1740). 59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후오(厚吾), 호는 묵헌(默軒),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1722년(경종 3)에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노론 사대신의 일파로 지목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2)에 사면되어 영휘전(永徽殿)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나가기를 주저하다가 은권이 융숭하여 부득이 부임하였으나 1727년(영조 4) 사퇴하고 귀향하였으며 그 후 익릉참봉과 사옹원 봉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740년(영조 17) 신임여흉(辛壬餘兇)인 당시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등의 무고로 또 다시 투옥되어 옥중에서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1746년(영조 23)에 신원(伸寃)되어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配는 숙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대야미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2세 김양택(金陽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1712∼1776). 65歲,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서(士舒) , 호는 건암(健菴)이며, 아버지는 문청공(文淸公) 판서 진규(鎭圭)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일정씨로 소하(昭河)의 딸이다.
1741년(영조 18)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743년(영조 20) 알성 문과에 병과(丙科) 3인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문학을 거쳐 강동현감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홍문관 부수찬이 되자 좌의정 정석오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노여움을 받았다. 곧 산청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다시 수찬이 되고 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1751년(영조 28) 통정에 승진되어 좌승지가 되었다가 부사로 나갔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 이조참의, 양관대제학과 병조, 이조판서를 거쳐 1776년(영조 53) 의정부 영의정에 오르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며 1784년(정조 9) 벼슬을 추탈당하였다가 1864년(고종 2) 복관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配는 정경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건건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용택(金龍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 ? ∼ 1722).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덕우(德雨), 호는 고송재(孤松齋)이며, 아버지는 목사(牧使) 진화(鎭華)이며 대제학 만중(萬重)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숙인 덕수이씨로 대사간 합( )의 딸이다.
명현의 후예로 덕망이 있었고 효우하였으나 1722년(경종 3) 신임사화때 포의(布衣)로서 목호룡(睦虎龍)의 상변(上變)으로 역모(逆謀) 혐의를 받아 고문 치사되었다. 뒤에 1766년(영조 43)에 신원(伸寃)되고 1802년(순조 3)에 사헌부 집의(執義)에 추증(追贈)되었고 저서로 유고가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2세 김화택(金和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파/허주공파/도헌공파)
(1728∼1776). 49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경숙(景肅), 호는 묵와(默窩), 아버지는 지중추 진동(鎭東)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은진송씨로 첨추 상증(相曾)의 딸이다.
1750년(영조 27) 생원시에 20인으로 합격하고 1753년(영조 30) 식년시 문과에 병과 26인으로 급제하여 검열, 설서, 승지를 거쳐 춘천, 곡산부사로 외직에 나갔음은 양친을 위함이었다. 1762년(영조 49) 네차례나 귀향 양친할 뜻을 표명하니 왕이 허락하고 미육(米肉)을 하사하였다. 그 후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에 상소하여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춘천부사로 재직시에는 실전된 선조 광성군(光城君) 정(鼎)의 묘소를 찾아내어 봉심하기도 하였다.
配는 숙부인 전주리씨(全州李氏)이다.
묘(墓)는 강원도 춘천시 칠전동 모란봉 하 선영서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2세 김갑교(金甲敎)(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 (1846∼1885). 40歲, 조선 후기의 문신,
일명은 병연(炳淵), 字는 경원(景元), 호는 남파(南坡), 아버지는 탁(鐸)이며, 어머니는 해주정씨(海州鄭氏)이다.
1867년(고종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882년(고종 20) 별시 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승문원 정자였다.
묘(墓)는 양주군 광적면 덕도리 지연동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2세 김낙룡(金洛龍)(사온직장공파) (1777∼1853). 77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덕중(德仲), 호는 만취당(晩翠堂), 아버지는 첨추 행건(行健)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전주이씨로 시형(時馨)의 딸이다.
1801년(순조 2) 식년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내직으로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헌납, 사간, 사헌부 집의, 세자시강원 필선, 병조, 이조좌랑, 병조참의,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편수관을 거쳐 대사간에 승진하여 동부승지에 이르고 외직으로 여러 고을을 역임하여 초산부사에 이르렀다. 그 초산에 재임 할 때 봉급을 출연하여 서적을 구입해서 재생(齋生)으로 하여금 수업하여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겨우 1년이 지나 북방풍속이 개선되어 빈빈한 문장의 선비가 많이 나왔다.
묘(墓)는 청양군 사양면 매곡리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2세 김낙준(金洛駿) (사온직장공파) (1785∼1840). 56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공진(公珍), 아버지는 첨추 행건(行健)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전주이씨로 시형(時馨)의 딸이다.
1819년(순조 20) 식년시 문과에 병과 29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 수찬에 이르렀다.
묘(墓)는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3세 김재문(金在文) (문정공파/문간공파/대교동파/신소파, 장태전파)(1850∼1930). 81歲,
처사공 재문(在文)은 諱 성길(聖吉)의 아들이며, 配는 남평문씨(南平文氏)와 繼配는 나주김씨(羅州金氏)이다. 손자 용훈(容訓)은 諱 태하(泰河)의 아들로 (1918∼1957) 6,25전쟁 참전 후 건설사업에 종사하여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78년 제주향교 유림총회(儒林總會)의 결의로 향도 도훈장을 추서받았다. 配는 경주 이관숙(慶州 李寬淑= 1918∼1992)이니 父는 기형(基炯)이요, 아들은 광산김씨대종중 이사회 의장을 역임한 광수(光秀)와 경두(京斗)이다.
묘(墓)는 제주도 제주시 연동 2489-9번지에 있다. (見光山金氏遺蹟寶鑑)
33세 김좌겸(金佐謙) (문정공파/문간공파) (1851∼ ). 제주도 북제주군 한경면 판포에서 계현(季賢)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한말에 태어난 한학자로 일제의 치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응호등 12동지가 집의계(集義契)를 조직하고 제주시 오라연 미동에서 조설대(朝雪臺)를 설치 기울어가는 국운을 통탄했다. 한일합방이 되자 여기에 모여 망국을 통탄했다.
묘(墓)는 제주시 오라사 천동에 있다.
33세 김상면(金相勉)(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 (1773∼1859). 87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사강(士强), 호는 평암(平菴), 아버지는 원택(元澤)이며, 어머니는 장흥마씨로 윤권(允權)의 딸이다.
1822년(순조 23) 식년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동년에 정자가 되고 1823년(순조 24)에 가주서가 되었다가 성균관 전적, 장령을 거쳐 금산현감으로 나갔다가 사간원 헌납, 이조정랑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1852년(철종 4) 형조참의에 승진하였다.
묘(墓)는 전남 보성군 옥암면 성곡촌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3세 김두삼(金斗三) (문숙공파/밀직사사공파) (1844∼1931). 88歲, 조선 말기의 학자,
字는 태겸(台兼), 호는 영빈(穎濱), 아버지는 지수(止洙)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로 일연(一淵)의 딸이다.
천부의 재덕으로 연재 송병선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대성하여 고종 24년 전주 감시에 합격한 후로 과업을 폐하고 향리에 영양재와 영빈정사를 짓고 성리학에 전념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후학이 삼일사(三一祠)를 세워 사림이 향사한다. 저서로 영빈유고가 전한다.
묘(墓)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죽장리에 있다.
33세 김진휴(金震休)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807∼1883). 77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용여(用汝), 호는 둔암(鈍菴), 아버지는 문연(文淵)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로 수민(秀民)의 딸이다.
1834년(순조 35) 식년시 문과에 병과 39인으로 급제하였고 벼슬은 찰방을 거쳐 여러 벼슬에 올랐다. 저서로 둔인수록(鈍人隨錄)이 있다.
묘(墓)는 전남 옥과군 입면 입석촌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3세 김상복(金相福)(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창주공파)
(1714∼1782). 69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수(仲受), 호는 직하(稷下), 아버지는 효정공(孝靖公) 원택(元澤)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청송심씨로 우윤 정보(廷輔)의 딸이다.
1740년(영조 17) 알성방 문과에 을과 1인으로 급제하여 검열(檢閣), 사서, 정랑, 필선, 보덕, 부제학, 양관대제학, 이조판서, 혜당을 역임하고 1763년(영조 40)에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 1772년 영의정을 배수하였으나 영상(領相0이 된 처음 자리에서 왕실을 바로잡고 의리 밝힐 것을 진주(陳奏)하니 왕이 기뻐하지 않고 파직을 명했고 또 다시 쌓인 포부를 진주하니 왕이 삭직을 가시(加施)하였다. 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벽파(僻派)로서 1775년(영조 51) 전 참판(前參判) 서명선(徐明善)이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영의정 한익모(韓翼蓍)와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을 논박하는 상소를 했을 때, 왕으로부터 서명선의 상소문에 대한 의견을 질문받았으나 여론을 잘 알지 못해 대답을 못하겠다고 하여 삭직당하고 삼사가 발의하여 마침내 공주(公州)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전리로 돌아왔고. 1800년(선조 1)에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配는 정경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이다
묘(墓)는 충남 홍성군 서부면 양곡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3세 김상악(金相岳)(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724∼1815). 92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순자(舜咨), 호는 위암(韋菴), 아버지는 증참판 성택(聖澤)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가림조씨(嘉林趙氏)로 판관 정의(正誼)의 딸이다.
정조조 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또 다시 참봉에 제수 되었으며 여러번 승진하여 벼슬이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당시 정쟁이 심한 때라 벼슬길에 나가 영달할 뜻을 버리고 관악산에 들어가 오직 학문에 진념하였다. 문장, 학문이 당대에 뛰어났고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산천역설(山天易說) 12권과 위암시록(韋菴詩錄) 3권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史大事典)
33세 김상익(金相翊)(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721∼1781). 6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우(仲佑), 호는 현암(弦菴), 아버지는 증좌찬성 경택(慶澤)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덕수이씨로 도정 태진(台鎭)의 딸이다.
1750년(영조 27)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22인으로 합격하여 1753년(영조 30)에 초사(初仕)로 혜릉참봉을 지내고 1759년(영조 36) 별시 문과에 을과 2인으로 급제하여 수찬, 통신종사(通信從事), 이조참판에 이르렀고 지도적소(智島謫所)에서 졸하였으며 1783년(정조 8)에 신원되고 1800년(순조 1)에 복관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配는 정경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3세 김상정(金相定)(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722∼1788). 67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 字는 치오(穉五), 호는 석당(石堂), 아버지는 증사복시정 영택(令澤)이며, 어머니는 증숙인 평산신씨로 평운군(平雲君) 성하(聖夏)의 딸이다.
1762년(영조 39)에 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1771년(영조 48) 현령 재직시 정시 문과에 갑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여 수찬, 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에 이르렀고 성리학과 학문이 높았으며 석당유고 6권이 있다.
配는 숙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 繼配 숙부인 남양서씨(南陽徐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3세 김상휴(金相休)(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도헌공파)
(1757∼1827). 7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계용(季容), 호는 초천(蕉泉), 아버지는 증찬성 무택(茂澤)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해평윤씨로 정자 득영(得英)의 딸이다.
1803년(순조 4) 별시 문과에 갑과 3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승지를 거쳐 이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이었고 좌참찬을 지냈으며 1826년(순조 27) 기사에 들어가고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며 초천유고가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3세 김상순(김상순)(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 (1775∼1840). 66歲, 조선 중기의 무신, 字는 치화(致和), 아버지는 증판서 준악(峻岳)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덕수이씨로 영장 한정(漢鼎)의 딸이다.
벼슬에 있을 때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겼고 거가에는 어버이를 효도로 봉양하였으며 몸 가짐이 담백하고 검소하여 사치와 화려함을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조야간에 저명하였다. 벼슬은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으며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경기도 양평군 고읍면 신촌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3세 김성관(金星觀)(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유일재공파)
(1776∼1854). 79歲, 조선 후기의 학자, 字는 회극(會極), 호는 귀산(龜山), 아버지는 용구(用九)이며, 어머니는 재령이씨로 첨추 승운(承運)의 딸이다.
1828년(순조 29) 생원시에 1등 2인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천성이 고결하고 명민하여 자혜를 베풀었으며 위엄이 있고 강직하여 그 앞에서 함부로 비리를 행하지 못하였다.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임천에서 자연을 벗하고 구도수학에 전념하였다.
묘(墓)는 안동시 와룡면 가야채곡에 있다.
33세 김병돈(金秉暾) (사온직장공파) (1842∼1895) 54歲, 조선 후기의 무신, 字는 덕경(德敬), 호는 난정(蘭汀), 아버지는 증참판 낙현(洛顯)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밀양손씨이다.
1883년(고종 21) 무과에 급제하고 1894년(고종 32) 봄에 동학의 교도가 난을 일으키니 군관이 되어 초토사 홍주목사 이승우를 따라 관군을 통솔하여 나가서는 싸우고 돌아와서는 지키는 한편 계책을 세워 적군을 무지르고 진을 끊어놓아 실계(失計)하는바 없이 싸우면 이겼다. 왕이 그 전공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등용코자 하였으나 예산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통정대부 군무참의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충남 홍성군 금마면 신곡리에 있다.
33세 김낙수(金樂壽) (사온직장공파) (1779∼1863). 85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덕옹(德翁), 아버지는 증참판 경(璟)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남양홍씨로 동추 이근(以謹)의 딸이다.
1811년(순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년 경과 정시 문과에 병과 16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집의, 통례원 좌통례, 사간원 사간, 대사간, 형조참의, 돈녕부 도정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문천, 운산군수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묘(墓)는 죽산부 내장선리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4세 김해병(金海柄) (문정공파/문간공파/고령전파) (1884∼ ) 향도 도훈장공 諱 기효(基孝)의 차자. 향교 장의를 역임하였고, 성품이 청고하여 칭송을 받았다. 配는 고씨이니 시집온지 6개월만에 타계하다. 繼配는 경주김씨이니 유향좌수 두평(斗平)의 딸이요, 아들은 종(鐘), 염(琰), 인(仁)이다. 종(鐘)의 아들 태휴(台烋)는 공학박사요, 염(琰)의 아들은 태희(台喜)이며, 인(仁)의 아들은 광석(光錫), 공학박사 광호(光鎬)이다.
묘(墓)는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의귀리 동경 81번지 매아진돌 자좌이다.
34세 김석윤(金錫允) (문정공파/문간공파) (1877∼1949). 73歲. 제주시에서 창규(昌圭)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근수(謹受), 일명은 종화(鍾華), 호는 석성(石惺), 1908년경 장성의 기우만등과 연락을 취해 오다가 이해에 고사훈등과 합세하여 제주와 광양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준비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병사를 모집하던중에 체포되어 광주 및 대구에서 옥고를 치루고 출옥후에도 일본에 타협하지 않고 후진교육에 힘썼으나 여러차례 검거당하는 탄압을 받았다. 1977년 정부에서는 대통령 표창장을 추서하였다. 제주 사라봉 모충사(慕忠祠)에 의병항쟁기념탑이 세워졌다.
묘(墓)는 오동동 병문천 서쪽에 있다.
34세 김석익(金錫翼) (문정공파/문간공파) (1886∼1956). 71歲. 재주시에서 창규(昌圭0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홍점(鴻漸), 호는 심재(心齋), 독립지사인 석윤(錫允)의 아우이며, 조설대(朝雪臺) 12동지의 한 사람이다. 한학자이며 서예에 능했고 사학(史學)에 조예가 깊었다.
일제의 침략에 망국의 한을 품고 "탐라기원(耽羅紀元)"을 저술했고 일제의 창씨개명의 강권에 종족의 보존을 염려하여 1942년에 임오보(壬午譜)를 발간하게 되니 그 주무를 맡았다.
묘(墓)는 오등봉에 있다.
34세 김용우(金容愚)(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830∼1900). 71歲, 조선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진휴(震休)이며, 어머니는 순창설씨(淳昌薛氏)로 현(絢)의 딸이다.
1869년(고종 7) 별시 문과에 병과 29인으로 급제하여 황산도 찰방과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고 학문이 고매하며 경사에 밝았고 글씨를 잘 썼다. 유고로 역의(易義), 건원형이정(乾元亨利貞)이 있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대산면 토봉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4세 김기균(金箕均)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871∼1953). 83歲. 전북 정읍에서 상성(相聲)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평중(平中), 호는 모암(모菴), 최익현 선생에게서 수학하였다. 한말 국운이 기울어짐에 육군 부위가 되었고, 최익현이 호남에 내려와 창의하니 임병찬과 더불어 그 막하에서 의병을 모병하여 순창에서 일군(日軍)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이 때 세부족으로 최익현은 잡혀 대마도(日本)로 갔고 공은 총을 맞아 일군에 잡혀 옥고를 치뤘다. 최익현이 크게 아끼어 모암(엄지손가락)이라 호를 내렸다.
34세 김기택(金箕澤)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900, 3, 13∼1959, 10, 2). 60세. 전남 함평군 월야면에서 상범(相範)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용회(龍回), 호는 도은(桃隱), 향리에서 한학을 배웠다. 1919년 4월 8일 문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각지방민을 선동하여 독립만세 집회를 갖고 미리 준비한 대창(竹槍)으로 무장하여 일본 헌병파견소와 면주재소를 습격하여 왜병에게 대항하였다. 이 때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감금을 수없이 당하고 가산이 탕진된 뒤 사망하였다. 함평군에서는 애국지사를 위해서 군민의 이름으로 비를 세웠다.
34세 김기상(金箕象)(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744∼1808). 65歲, 조선 중기의 문신, 일명은 두상(斗象), 字는 상경(尙卿), 아버지는 증영의정 상익(相翊)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남양홍씨로 현감 계백(啓百)의 딸이다.
1773년(영조 50) 증광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36인으로 합격하였고 동년 정시 문과에 병과 16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4세 김기서(金箕書)(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창주공파)
(1766∼1822). 5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치규(穉奎), 호는 죽하(竹下), 아버지는 문헌공(文獻公) 상복(相福)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죽산안씨로 충헌공(忠憲公) 윤행(允行)의 딸이다.
1798년(정조 23)에 돈녕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고 1809년(순조 10)에 감역을 제수하였으나 또한 불취하니 시의(時議: 조정공론)로 공을 초선(抄選: 의정대신과 이조당상관이 모여서 경연관을 뽑는일)하므로 공이 마지못해 나가서 시직(侍直), 부솔(副率), 위솔(衛率)을 거쳐 청도군수에 이르고 학업과 문장이 뛰어나 조야의 중망을 받았다.
묘(墓)는 충북 청주시 원흥리에 있다.
34세 김기성(金箕性)(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752∼1811). 60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성여(成汝), 아버지는 증영의정 상익(相翊)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남양홍씨로 현감 계백(啓百)의 딸이다.
1765년(영조 42)에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녀(庶女)와 결혼하여 유록대부 광은부위(光恩副尉)가 되었고 1790년(정조 15)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연경(燕京)으로 떠날 때 어제노행시(御製勞行詩)를 하사 받았고 1870년 왕세자의 책봉의례(冊封儀禮)에 공로가 있었으며, 이 해 순조가 즉위하자 의령현감(宜寧縣監), 1805년(순조 5)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시호는 효헌공(孝憲公)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란동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4세 김기순(金箕순)(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 (1799∼1866). 68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성소(聖素), 아버지는 현감 상종(相鍾)이며, 어머니는 의인 평산신씨로 지(智)의 딸이다.
1816년(순조 17)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32인으로 합격하였고 1829년(순조 30)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주, 군의 수령을 거쳐 1864년(고종 2) 나주목사에 임명되자 이를 사양하고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간의 치적이 현저하니 임금이 교서를 내리고 우부승지에 특진시켰다.
묘(墓)는 홍천군 두촌면 한계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4세 김기은(金箕殷)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66∼1843). 78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상언(商彦), 아버지는 증좌찬성 상의(相儀)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위솔 사찬(思贊)의 딸이다.
1799년(정조 24) 춘당대 문과에 을과 2인으로 급제하여 교리, 사인, 대사성, 승지를 거쳐 이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고 형조,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남면 환도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4세 김의표(金儀表)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 (1809∼1860). 52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정오(正吾), 호는 정암(正岩), 아버지는 공조참의 상기(尙基)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밀양박씨로 신준(愼俊)의 딸이다.
송재 양호의 문인으로 1873년(헌종 4)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부터 저작, 박사를 거쳐 성균관 전적과 종묘서령을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이조정랑으로 옮겼고 외직으로는 자여찰방이 되었고 1853년(철종 5)에 제주목사가 되었다가 1855년(철종 7)에 사헌부 장령에 올랐으며 조금 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에 승진되었다.
묘(墓)는 전남 장흥 평웅치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4세 김기석(金箕錫)(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참판공파) (1828∼1890). 63歲,
조선 중기의 무신. 字는 성극(聖極), 호는 우정(藕汀), 아버지는 증숭록대부 상순(相順).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좌,우승지, 병조참의,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 삼군부 훈련원사, 의정부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고, 이어 총융사(摠戎使)요, 숭록대부에 승자되었다.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금위대장(禦衛大將) 등을 역임했다. 1884년 친군영(親軍營)이 설치되자 우영사(右營使), 별영사(別營使), 해방영사(海防營使) 등을 지냈다.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이다.
配는 정경부인 전주리씨(全州李氏)이다.
묘(墓)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2리에 있다.
34세 김 희(金 憙)(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29∼1800). 72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선지(善之), 호는 근와(芹窩), 사호(賜號)는 술우평(述尤坪), 아버지는 증영의정 상경(相庚)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후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덕수이씨로 참봉 광택(廣澤)의 딸이다.
1762년(영조 39)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경릉참봉, 북부봉사를 지냈다. 1773년(영조 50)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 50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가주서를 거쳐 권지부정자에 선보되었다. 그 후 설서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문학으로 중망에 올랐고 전라좌도 경시관으로 있을 때는 과거의 공정을 기하였다. 이어서 수원부사, 대사간 대사성을 역임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왕명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점비(點批)해 올렸으며 병조, 호조, 이조, 공조, 예조참판을 거쳤다. 송자대전을 교정해 올려 왕이 술우평이라 사호하였고 광주목사로 있을 때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유사를 지었으며 형조, 예조판서와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서흥부사와 규장각 직제학,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의정부 우의정에 올랐다가 만년에 연산 향리로 퇴거하였다. 시호는 효간공(孝簡公)이며 임금이 지은 제문을 하사받았고 영정과 유고가 있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4세 김기석(金箕晳)(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84∼1859). 76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성여(聖與), 호는 석하(石河), 아버지는 군수 상목(相穆)이며, 어머니는 영인 전의이씨로 동지돈녕 낙배(樂培)의 딸이다.
1804년(순조 5)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13인으로 합격하여 1847년(헌종 14) 선치수령으로써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승진되었다.
묘(墓)는 여주군 금사면 부곡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4세 김기문(金箕文)(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 (1801∼1887). 87歲, 조선 후기의 문신, 일명은 문교(文敎), 字는 경완(景緩), 호는 과호(果湖), 아버지는 상구(相耉)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희수(禧秀)의 딸이다.
1861년(철종 13) 전시 문과에 병과 46인으로 급제하여 장영전 별검을 지내고 병인양요 때 양성(兩聖)의 어진(御眞)을 받들어 승희전(承禧殿)에 봉안항 공으로 통훈대부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열관,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다. (見國朝文科榜目)
34세 김석상(金奭相)(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 (1857∼1899). 43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주경(周卿), 호는 소당(小棠), 아버지는 제연(濟淵)이며, 어머니는 풍산류씨로 통덕랑 도린(道麟)의 딸이다.
1883년(고종 20) 전시 문과에 병과 27인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내고 갑오경장이후 국정이 문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묘(墓)는 경북 의성군 가음면 대동리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5세 김병구(金炳龜) (문정공파/문간공파) (1858, 1, 3∼1942, 12, 24). 85歲. 제주시 도평동에서 계담(桂淡)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자옥(子玉), 호는 연수(蓮 ),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제주향교 훈도를 역임하였다. 조설대9朝雪臺)를 중심으로 애국활동을 하다가 1919년 기미 3·1 운동때 제주도에서의 봉기를 주도한 뒤 지하활동을 전개하여 상해임시정부에 헌납했다. 1927년에 고향인 도평에 명진학숙(明進學塾)을 세워 후생들에게 애국심을 일깨워 주었다. 해방 후 조설대에 대한광복의사비(大旱光復義士碑)와 집의계광복의사경모비(集義契光復義士敬慕碑)가 세워져 공의 기록이 남아있다.
35세 김병로(金炳潞) (문정공파/문간공파) (1865∼1946). 82歲. 제주시 이호에서 이환(利桓)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설대 12동지의 한 사람이고 한학자이다.
묘(墓)는 제주시 해안동 구위전에 있다.
35세 김영오(金玲午) (문숙공파/삼사좌사공파) (1858∼1910). 53歲. 조선 말기의 독립운동가, 字는 경화(景和), 호는 의재(毅齋), 아버지는 기현(奇炫)이다.
어려서부터 자품이 기위하고 도량이 컸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암암리에 동지를 규합하여 김참봉의 군막에 들어가 왜적을 격멸하는데 앞장설 것을 다짐하였으나 어산(魚山) 싸움의 패전에 이르러 군졸이 이산(離散)되고 굴복하지 않는자를 색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왜적에게 죽느니 자결할 것을 결심하고 집 뒷산에 올라가 낫으로 목을 베어 자진하였다. 1990년 8월 15일 대통령의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묘(墓)는 광주시 광산구 고룡동에 있다. (見義士 金玲午傳)
35세 김재관(金在寬)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888, 5, 15∼1958, 1, 19). 71歲.
전북 고창군 고수면 월계리에서 태어났다. 字는 순명(舜明), 호는 후석(後石), 아버지는 기락(箕洛)이다.
지은 최전구 선생에게 수학하고 1905년 최면암의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1908년 기삼연 등의 호남 의병 창의대와 합동하여 고창전투에 참가하여 5∼6차의 전투를 치루었다. 1913년 경술국치이후에 새로 조직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창립에 가담하여 참모관의 직책을 받고 첩보활동에 종사하였다. 고종황제의 인산(因山)때에는 고창에 곡망대(哭望臺)를 축조하여 2년복을 마치어 충의의 정을 극진히 하였다. 1980년 광복절날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35세 김재규(金在圭)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893, 10, 12∼1963, 6, 11). 71歲.
전북 정읍군 소성면에서 기순(箕淳)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덕운(德云), 호는 도송(島松: 도산 안창호선생이 지어줌) 아버지에게 수학하고 경술국치 이후 고향을 떠나 독립운동에 몸바쳐 안창호선생을 따랐다. 만주를 무대로 국내를 드나들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뒤에 그 공적을 추모해서 유적비를 세웠다.
35세 김재문(金在文)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902, 6, 8∼1951, 1, 15). 50歲.
전남 함평군 대동면에서 기연(箕衍)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광수(光守), 호는 목양(牧羊), 1919년 상경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고향에 돌아와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20년 3월 26일에 함평보통학교 학생들과 함평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에 참가한자 중 20여명이 경찰에 구속되었다. 같은해 4월 2일 같은 군의 내산면 장터에서 다시 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뒤에는 상해임시정부에 소속되어 있던 김철(金鐵)과 연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함평읍 기산공원에 군민의 이름으로 세운 비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35세 김재창(金在昌)(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770∼1849). 80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덕여(德汝), 호는 향포(香圃), 아버지는 광은부위(光恩副尉) 기성(箕性). 1801년(순조 1)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내외직을 거쳐 이조판서, 1830년(순조 30) 원접사(遠接使), 1835년(헌종 1)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정시무과(庭試武科) 초시(初試)의 시험 일자를 통지하지 못하여 지방 무사들이 응시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으로 한때 파면, 1843년 판중추 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35세 김기석(金基石)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77∼1843). 67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계서(季瑞), 호는 상괴당(尙槐堂), 아버지는 전적 우검(禹儉)이며, 어머니는 의인 반남박씨로 통덕랑 필백(弼伯)의 딸이다.
천품이 총명하고 영민하여 학문을 익히매 문리가 빨리나서 약관에 경서와 사기를 통독하여 학문이 성취되고 글씨에도 능하여 향당의 추앙을 받았다. 1811년(순조 12) 정시 문과에 병과 16인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냈으며 상괴당 문집이 있다.
묘(墓)는 충북 중원군 신니면 문락니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5세 김기주(金基周)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87∼1859). 73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경문(景文), 아버지는 부호군 노검(魯儉)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전의이씨로 생원 덕신(德新)의 딸이다.
1811년(순조 12) 정시 문과에 병과 16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 원릉별검이 되고 6품직에 올라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감찰, 정언, 장령, 집의, 봉상시정 등 여러요직을 거쳐 1847년(헌종 14)에 좌통례로 재임시 나라의 특전으로 통정에 승진하여 돈녕부도정이 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이 되자 그 직위를 탐하는자 있어 곧 춘천부사로 옮겼다.
묘(墓)는 충북 중원군 신니면 모도원 서생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경(金在敬)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91∼1864). 74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치함(稚涵), 호는 졸재(拙齋), 아버지는 증참판 기헌(基憲)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여흥민씨로 승지 백순(百順)의 딸이다.
1822년(순조 23)에 명릉참봉, 부솔, 개령, 나주, 남원의 수령을 거쳐 1859년(철종 11) 통정대부 형조참의, 승정원 우부승지에 이르렀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5세 김재원(金在元)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68∼1833). 66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이형(而亨), 아버지는 증참판 기응(基應)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양주조씨로 참봉 영건(榮建)의 딸이다.
1803년(순조 4) 증광 생원시에 3등 53인으로 합격하였고 1816년(순조 17) 별시 문과에 병과 16인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고 그 후 통정에 가자되었다가 벼슬이 의주부윤에 이르렀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임피군 남일면 술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용(金在容)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헌경(軒卿), 아버지는 이조판서 기만(箕晩)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전주이씨로 완원군(完原君) 유명(惟命)의 딸이다.
1861년(철종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882년(고종 12) 별시 문과에 병과 51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見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일(金在一)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26∼1898). 73歲,
조선 후기의 학자, 초명은 재락(在樂), 字는 도심(道心), 호는 일부(一夫), 만년에 항(恒)으로 개명, 세칭 일부선생이라 한다. 아버지는 인로(麟魯)이며, 어머니는 대구서씨로 유추(有秋)의 딸이다.
천자가 영민하여 어려서부터 호학하며 성리학에 잠심하였고 심청신명(心淸神明)하여 역리에 정통하였다. 1861년(철종 13) 부터는 동학의 최제우와 남학의 김광하 등과 연담 이운규에게서 수학하여 종래 성리학의 차원을 넘어서 유학의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여 서경과 역경을 중심으로 연구 정진하였다. 저술활동으로는 1879년(고종 17)에 복희 문광래와 공자 십익의 도학전통을 계승하여 정역괘를 그리고 정역의 서문인 대역서를 썼다. 1884년(고종 22)에는 정역 상편의 십오 일언을 저술하고 이듬해에 정역 하편의 십일 일언을 저술하여 정역을 완성하였다. 그 후 논산군 부적면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성균관(당시 경학원)에서 정역의 대가인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찬양문을 씀과 아울러 비각을 세우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은 찬양문만 남아있고 묘소에는 후학들에 의해 묘갈비와 성덕비가 세워졌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침동에 있다.
35세 김재전(金在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85∼1862). 78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여견(汝見), 아버지는 증참판 기주(箕疇)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기계유씨로 진사 언종(彦鍾)의 딸이다.
1819년(순조 20)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1인으로 합격하였고 1830년(순조 31)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교리, 사옹원정을 거쳐 봉산군수와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여주목사에 전보되었다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묘(墓)는 청룡면 마니산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창(金在昌)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헌공파) (1770∼1849). 80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덕여(德汝), 호는 향포(香圃), 아버지는 효헌공(孝憲公) 기성(箕性)이며, 어머니는 청연군주(淸衍郡主)다.
1784년(정조 9)에 돈녕부 주부였고 1801년(순조 2) 군수로 정시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부수찬, 승지를 거쳐 보국 이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묘(墓)는 광주 세촌면 탄동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청(金在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07∼1855) 49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치직(稚直), 아버지는 증참판 기헌(箕憲)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덕수이씨로 형빈(亨彬)의 딸이다.
1847년(헌종 14)에 참봉이었고 1848년(헌종 15) 별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수찬,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를 지내고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경기도 용인시 수여면 삼거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헌(金在獻)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99∼1882). 84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문징(文徵), 아버지는 증좌찬성 기순(箕詢)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풍천임씨로 증남대 춘(春)의 딸이다.
1831년(순조 3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40년(헌종 7)에 처음 벼슬하여 금성현령, 금산군수 등을 거쳐 1874년(고종 12)에 호조참의를 역임하고 공조참판을 지냈다.
묘(墓)는 토진면 건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5세 김재현(金在顯)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08∼1889). 82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덕부(德夫), 호는 미서(薇西), 아버지는 증우의정 기순(箕詢)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풍천임씨로 태춘(泰春)의 딸이다.
1843년(헌종 1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58년(철종 10) 식년시 문과에 갑과 3인으로 급제하여 서사(筮仕)로 현감을 지냈고 제학(提學)을 거쳐 승지,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승진되었으며 시호는 효문공(孝文公)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진(金在晋)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90∼1869). 80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명숙(明叔), 아버지는 기춘(箕春)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로 현감 기명(紀溟)의 딸이다.
1825년(순조 26) 생원시에 3등 5인으로 합격하여 1833년(순조 34)에 도사를 거쳐 여러 주(州), 군(郡)의 수령을 거쳐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묘(墓)는 남양 분양면 한절동에 있다.
35세 김재삼(金在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75∼1837). 63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자강(子綱), 아버지는 효헌공(孝憲公) 기성(箕性)이며, 어머니는 청연군주(淸衍郡主)다.
음사로 직장, 현령, 선산부사를 거쳐 형조참판,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묘(墓)는 장단군 승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35세 김재봉(金在琫)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86∼1863). 78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춘헌(春獻), 아버지는 기범(箕範)이며, 어머니는 나주임씨로 형진(亨振)의 딸이다.
1801년(순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시 문과에 병과 4인으로 급제하여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다.
묘(墓)는 오산면 청단리 광문산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겸(金在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94∼1833). 40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자익(子益), 아버지는 증참판 기필(箕弼)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해평윤씨로 현감 재동(在東)의 딸이다.
1819년(순조 20) 생원시에 2등 6인으로 합격하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광덕변 마무리에 있다.
35세 김재은(金在殷)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
조선 후기의 무신, 字는 천뢰(天賚), 아버지는 병사 기홍(箕弘)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평산신씨로 병사 성호(性浩)의 딸이다.
천품이 웅위호방하였고 춘추와 병서를 암암리에 읽어서 정통하지 않음이 없고 기력이 과인하여 말 타고 활 쏘기를 잘 하였으며 고종조에 무과에 올라 병조참판을 지냈다.
묘(墓)는 횡성군 둔곡면 요동에 있다.
35세 김재찬(金在燦)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유일재공파)
(1811∼1888). 78歲, 조선 후기의 학자, 字는 찬옥(贊玉), 호는 서계(西谿), 아버지는 도진(道振)이며, 어머니는 선성김씨(宣城金氏)로 태련(兌鍊)의 딸이다.
강고 류심춘의 문인으로 학문이 정수심오하여 향리의 중망에 올랐으며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더. 저서로 태극도설, 서명연주(西銘演註), 용학고설(庸學考說), 퇴서유요(退書類要), 해동명현록 등 서와 서계집(西谿集) 세권이 있다.
묘(墓)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산야 보덕단소등에 있다.
35세 김재정(金在鼎)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척약재공파) (1835∼1895). 61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공삼(公三), 아버지는 익련(益鍊)이며, 어머니는 금화김씨(金化金氏)로 낙문(樂文)의 딸이다.
1869년(고종 7) 정시 별시 문과에 병과 29인으로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다.
묘(墓)는 대보면 문현리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건(金在健)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척약재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병건(秉健), 아버지는 종묵(宗默)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로대명(大永)의 딸이다.
1863년(철종 15) 정시 문과에 병과 15인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과 평안도 도사를 지냈다.
(見國朝文科榜目)
35세 김재혁(金在赫) (사온직장공파) (1793∼1875). 83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명부(明夫), 호는 인암(忍庵), 아버지는 봉서(鳳瑞)이며, 어머니는 충주박씨로 내일(來一)의 딸이다.
과재 김정묵의 학통을 이은 문장과 경학이 당세의 대학자 매산 김재범 문하에서 수학하여 화려함을 버리고 진실을 취하여 학문이 해박하고 행의가 독실하였다. 부모를 효로 섬기고 종족에 화목하였다. 말년에 우로(優老)로 첨지중추부사 겸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인암유고가 있다.
묘(墓)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 사곡리에 있다.
[36世-40世] 광산인(光山人) 인물세고(人物世考)
36세 김보석(金寶錫) (문정공파/문민공파) 1914년 6월 3일에 광주시 북구 누문동에서 명일(明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송암(松庵), 광주제일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하고 해방후에는 광주시 사회과장을 역임하였다. 1982년 11월 3일에 광주제일고등학교장으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36세 김이현(金利鉉) (문정공파/문민공파) 1920년 11월 6일 광주시 북구 누문동에서 명일(明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동경의 중야중(中野中)과 만몽(滿蒙)학교 남방과를 졸업했다. 1943년 보안법위반으로 평양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고 해방후에는 대한체육회 아마권투연맹 이사와 전남체육회 이사를 근20년간 연임하였다. 1986년 12월 16일 정부에서는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높이 사 대통령표창장을 수여하였다.
36세 김직순(金稷舜) (문숙공파/화평부원군공파) (1881, 11, 10∼1908, 5, 21). 27歲.
전남 고흥군 고흥면에서 재근(在根)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성여(性汝), 호는 설송(雪松), 보명(譜名)은 직현(直鉉),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고 대의를 숭상(崇尙)하여 왜적의 간섭을 통탄하던바 1904년 국난에 직면하니 의병에 가담 고흥마을의 의병장이 되고, 보성, 광양의 의병장 안규홍과 합세하여 왜병과 항쟁할 때 맨손으로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1908년 5월에 불행하게도 왜병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함구하니 총검으로 찔려 죽음을 당했다. 그 때 나이 27세였다. 정부에서는 1980년 8월 14일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묘(墓)는 대전국립묘지이다.
36세 김마리아 (金瑪利亞) (문숙공파/판도판서공파) (1892, 6, 18∼1944, 3, 15). 53歲.
황해도 장연군 대두면에서 윤방(允邦, 譜名 彦淳)의 딸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고 1906년 서울 연동(蓮洞) 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중 민족교육에 전념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에 전력하였다. 1915년에 동경여자학원에 입학하였고 1918년에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일경에 체푀되어 옥고를 겪게 되었다. 동경에 있는 동안 2·8 독립선언에 가담하고 그 선언문을 국내에 운반하는 책임을 수행하여 3·1독립운동의 계기를 조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서대문 감옥에 갇치고 출옥하여서는 대한 애국부인회 회장을직을 맡아 독립투쟁을 계속하다가 다시 검거되어 3년형을 받았다. 1920년에 중병에 결려 병원에서 지내다가 도주에 성공하여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대의원직을 맡아 활약하다가 192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 사회학과를 이수하고 뉴욕에서 신학(神學)을 수학하는 등 학구에 전념하다가 13년만에 귀국하여 원산 마르다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 때 일본이 우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지병이 재발되어 1944년 평양기독병원에서 별세했다. 정부는 1962년 3·1절을 기해서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하였다. 순국열사 김마리아 기념사업회에서는 보라매공원에 동상을 건립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평생을 쉬지않고 활동한 그 거룩한 투쟁은 우리 광김의 피를 이어받은 힘이라 아니할 수 없다
36세 김창현(金昌鉉) (문숙공파/판도판서공파) (1916, 11, 13∼1950, 7, 23). 35歲.
충남 청양군 청양읍에서 재한(在漢)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한헌당(閑軒堂),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십수년간 한학을 수학하였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관헌의 정책에 대치항거하고 수차에 걸친 일군에 지원병으로 지원할 것을 강압으로 설득하였으나 한민족으로서 어찌 왜군에 지원할까보냐고 추상같은 호령으로 끝내 버티었다. 해방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청양군지부 조직부장,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충남지부 조사위원을 역임하고 1950년 7월 23일 동란시 적구(赤狗)의 총검에 장렬히 순국(殉國)하였다. 정부에서는 공의 반공정신을 높이 사 1963년 1월 11일에 내각수반표창장을 추서하였다.
36세 김 수(金 銖)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890, 5, 24∼1943). 54歲. 경남 합천에서 한 장(漢章)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에 정재규에게 글을 배우고 곽종석에게 성리학을 배워 당대의 석학으로 크게 기대되었다. 3·1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유림들이 만세운동과 별도로 파리에서 열렸던 세계평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정신을 전달하기 위해서 유림들만이 서명운동을 전개해서 제출한 "파리장서" 사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7년에는 집근처에 창계정사를 짓고 후손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켰다. 이러한 활동에 의심을 받아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추궁을 받가가 끝내는 음식을 끊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4세였다.
36세 김호현(金浩鉉)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892, 12, 11∼1919, 3, 3)/ 28歲.
경남 의창군 진동에서 재명(在明)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형(在亨)에게 입양(入養)하였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시에 진동(鎭東)에서 변상태 등 지방 유지들과 같이 면민 5백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순절했다. 삼진(鎭東, 鎭北, 鎭田)지구 8의사(義士)중의 한 분이다.
36세 김경현(金敬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06∼1854). 49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공재(公宰), 아버지는 재희(在羲)이며, 어머니는 임천조씨(林川趙氏)로 증참판 덕함(德涵)의 딸이다.
1843년(헌종 10) 식년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승지를 지냈다.(見國朝文科榜目)
36세 김공현(金公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94∼1849). 56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공기(公器), 아버지는 증참판 재원(在元)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로 익헌공(翼憲公) 문원(文源)의 딸이다.
1831년(순조 32) 식년시 문과에 갑과 3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참판이었다.
묘(墓)는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어리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6세 김광현(金光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 (1828∼1896). 69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백승(伯昇), 아버지는 재주(在周)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로 최수(最壽)의 딸이다.
1867년(고종 5) 생원시에 합격하여 처음 벼슬을 의금부 도사, 주부, 별제 등을 역임하고 연기현감을 지냈다.
묘(墓)는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에 있다.
36세 김구현(金九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30∼1901). 72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경락(景洛), 호는 소계(小溪), 아버지는 참판 재헌(在獻)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달성서씨로 현감 은보(殷輔)의 딸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 부사를 지내고 1874년(고종 12) 별시 문과에 병과 35인으로 급제하여 교리, 이조참의, 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율암리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6세 김기현(金琦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08∼1873). 66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치헌(稚獻), 아버지는 증참판 재관(在寬)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은진송씨로 진사 환극(煥極)의 딸이다.
1852년(철종 4) 전시 문과에 갑과 3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호조참판을 지냈다.
묘(墓)는 황간 저피동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6세 김낙현(金洛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17∼1892). 76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정여(定汝), 호는 계운(溪雲), 아버지는 돈녕도정 재진(在晋)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청송심씨로 부사 응규(應奎)의 딸이다.
1859년(철종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릉참봉을 처음 벼슬로 현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이다.
묘(墓)는 보은읍 전강에 있다.
36세 김문현(金文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46∼1899). 54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원부(元敷), 아버지는 관찰사 재청(在淸)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현감 명하(命河)의 딸이다.
1877년(고종 15) 별시 문과에 병과 15인으로 급제하여 검열, 직제학, 사간을 거쳐 광주유수, 전라감사, 예조판서를 지냈다.
묘(墓)는 경기도 용인시 수여면 삼가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6세 김보현(金輔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 (1826∼1882). 57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공필(公弼), 호는 난재(蘭齋), 아버지는 호조참판 재성(在成)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임천조씨로 판서 덕윤(德潤)의 딸이다.
1848(헌종 14) 별시 문과에 을과(乙料) 7인으로 급제하여, 대교(待敎)가 되고, 1859년(철종 10) 이조참의(吏曹參議),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이듬해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이 되었다. 이어 예방승지(禮房承旨)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내고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해 추방된 뒤 곧 척족 민씨 일파가 되어 형조, 이조판서를 거쳐 1881년(고종 18) 궁궐 안에 신설한 내아문(內衛門)의 통상당상(通商堂上)이 되었고, 이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귈내에 뛰어든 난군들에 의해 전에 선혜청 당상이었다 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상두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6세 김삼현(金三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26∼1896). 71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공헌(公軒), 아버지는 재승(在承)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현령 관하(觀夏)의 딸이다.
1855년(철종 7) 진사시에 합격하여 1890년(고종 28)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묘(墓)는 충남 홍천군 두촌면 철정리 대왕당산에 있다.
36세 김상현(金商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07∼1874). 68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가보(可寶), 아버지는 재미(在美)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현감 매원(邁源)의 딸이다.
1848년(헌종 15) 생원시에 합격하여 1861년에 교관이었고 영양현감을 지냈다.
묘(墓)는 광주군 초월면 무갑리에 있다.
36세 김상현(金尙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11∼1890). 80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위사(渭師), 호는 경대 (經臺),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9대손, 아버지는 증판서 재곤(在崑)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기계유씨로 경주(擎柱)의 딸이다.
1827년(순조 28) 증광 생원시에 3등 2인으로 합격하여 인릉참봉, 사재감 봉사, 군자감 봉사, 직장, 주부, 청양현감, 증산현감을 지냈는데 가는곳마다 유도를 숭상하고 학문을 진흥시켰다. 영평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859년(철종 11) 별시 문과에 갑과(甲科) 3인으로 장원급제하여, 통정에 승진, 공조참의, 동부승지, 좌부승지, 병조참의, 대사간, 안동부사를 거쳐 1864년(고종 2) 좌부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1866년(고종 4) 가선에 승진, 한성좌윤, 형조참판, 도총부부총관, 동지경연, 의금부, 돈녕부, 춘추관, 성균관사, 개사성,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도승지, 제용감 제조를 역임했다. 그 후 경기, 평안감사, 양관대제학, 도승지, 제용감 제조를 역임했다. 그 후 보국 봉조하에 들어가고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묘(墓)는 서이면 일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6세 김수현(金壽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25∼1895). 71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경일(景一), 아버지는 정간공(貞簡公) 재창(在昌)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덕수이씨로 정모(鼎謨)의 딸이다.
1848년(헌종 15)에 참봉 현감을 거쳐 1860년(철종 12) 식년시 문과에 갑과 3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보국 이조판서였다.
묘(墓)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상심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6세 김양현(金亮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38∼1886). 49歲.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진현(晋鉉), 字는 문일(文一), 아버지는 사복시정 재헌(在獻)이며, 어머니는 숙인 덕수이씨로 노득(魯得)의 딸이다.
1881년(고종 19)에 처음 벼슬로 계방(세자익위사의 별칭)을 거쳐 태인현감을 지냈고 1886년(고종 24) 문과에 갑과 1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동부승지를 지냈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왕성동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6세 김오현(金五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22∼1903). 82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규보(奎甫), 아버지는 재양(在養)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기대9基大)의 딸이다.
1870년(고종 8) 생원시에 합격하여 1875년(고종 13)에 세마였고 목사를 거쳐 돈녕도정, 가선에 올랐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벌곡면 신파운에 있다.
36세 김각현(金珏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66∼1921). 56歲.
조선 말기의 문신, 字는 사극(士克), 아버지는 진사 재두(在斗)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로 종영(宗英)의 딸이다.
1891년(고종 29) 정시 별시 문과에 병과 68인으로 급제하고 국장, 부윤, 협판, 궁내부 특진관등을 거쳐 자헌대부에 승진되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6세 김익현(金翼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조선 말기의 문신,
字는 공직(公直), 아버지는 참판 재성(在成)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임천조씨로 판서 덕윤(德潤)의 딸이다.
1858년(철종 10) 별시 문과에 병과 22인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암행어사, 부응교를 역임하고 참판에 이르렀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6세 김철현(金喆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55∼1931). 76歲.
조선 말기의 관리, 字는 공길(公吉), 아버지는 진사 재두(在斗)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로 종영(宗英)의 딸이다.
1872년(고종 10) 사과(司果) 벼슬을 시작으로 참서관, 국장, 영산군수를 거쳐서 가선대부 한성부 판사에 이르렀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장지리에 있다.
36세 김용현(金龍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유일재공파)
(1833∼1896). 64歲, 조선 후기의 학자, 字는 이원(而遠), 호는 좌암(左庵), 아버지는 재기(在璣)이며, 어머니는 청주정씨로 내동(來棟)의 딸이다.
품성이 온유하고 의용이 준수하여 선조의 정훈을 이어받아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효우가 극진하여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사림의 추천이 있었고 학행으로 여러번 도천과 어사천이 있었으나 마침내 임천에서 도학을 강마하여 일생을 보냈다. 저서로 좌암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구에 있다.
36세 김우현(金佑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00∼1881). 82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우보(佑輔), 아버지는 증참판 재원(在元)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연안이씨로 익헌공(翼憲公) 문원(文源)의 딸이다.
1844년(헌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처음 벼슬로 목사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올랐다.
묘(墓)는 충북 괴산 신주막곡에 있다.
36세 김정규(金正奎)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 (1810∼1857). 48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대현(大鉉), 아버지는 재권(在權)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희신(羲莘)의 딸이다.
1837년(헌종 4) 식년시 문과에 병과 38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묘(墓)는 전남 무안군 해제면 상감산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6세 김증현(金曾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96∼1879). 84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기중(沂仲), 아버지는 증참판 재화(在華)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청송심씨로 참봉 능협(能協)의 딸이다.
1827년(순조 28) 증광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26인으로 합격하여 1843년(헌종 10) 처음 벼슬하여 목사를 지냈고 1870년(고종 8)에 통정, 1875년(고종 13)에 가선에 올라 참판에 이르렀다.
묘(墓)는 경기도 용인시 동면 천리에 있다
36세 김직현(金稷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40∼1908). 69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원명(元明), 아버지는 부사 재홍(在弘)이며, 어머니는 숙인 우봉이씨로 참의 휘승(輝承)의 딸이다.
1888년(고종 26) 별시 문과에 병과 35인으로 급제하여 교관, 현감을 거쳐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냈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 수락동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6세 김태현(金兌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84∼1860). 77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자삼(子三). 호는 광석(廣石), 아버지는 증참판 재량(在良)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은진송씨로 주서 양정(養鼎)의 딸이다.
음사로 군수를 지냈고 1854년(철종 6) 별시 문과에 을과 2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6세 김응현(金應鉉)(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 (1889∼1970). 82歲.
경남 의령군 화정면 덕교에서 재오(在五)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에 고향에서 동지인 김구현, 조균영 등과 함께 3월 20일 덕교리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당시 면장인 강재언(姜載彦)을 같이 참여하기를 권했으나 불응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진압에 나선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진주지원에서 형을 언도받고 8월을 복역하였다. 1926년 6·10만세 때는 동지 조균구 등과 사전에 모의하다가 다시 구금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손자 만수(滿洙)가 활동하여 증거 자료를 수집하여 정부에 유공자 표창을 제출하고 있다. 삼일운동사(3·1동지회편집)에 기록되어있다.
36세 김구현(金九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 (1861∼1922). 62歲.
경남 의령군 화정면에서 재호(在昊)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상삼(象三), 족숙인 정로공 재우(井盧公 在祐)밑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에 응현(應鉉)등과 함께 30여명이 20일밤에 덕교리 마을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날 면사무소에서 면장을 구박하여 앞세우려고 하였으나 불응하였다. 다음날 출동한 경찰에 검거되어 진주지원에서 8월의 형을 복역하였다. 고향에서는 청유(淸儒)의 집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36세 김문현(金文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총제공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재사(在師)의 아들로 태어났다. 후손이 없어 생몰의 기록이 없다. 성품이 강직했던 공은 봉현(鳳鉉)과 같이 행동하여 양지(陽智)주재소를 위시하여 일본기관과 주택을 습격 파괴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된 뒤 혹독한 고문과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수감된 1년만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억울하게도 후손이 없어 이러한 사실을 주장하는자가 없어 정부의 포장도 받자못하고 있다.
36세 김봉현(金鳳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총제공파)
(1887, 9, 20∼1930, 2, 28). 44歲.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재익(在益)의 아들로 태어났다. 강직 격렬한 성품을 지닌 공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며 안성군 각면을 석권하면서 여기 기록되는 일가등 외에 이근수등과 함께 안성군의 각면과 주재소를 습격하여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일인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방화하고 추방하는등 일본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극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정부간행 독립운동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투쟁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 때의 모진 고문과 마음의 고통으로 출소한 지 얼마안되는 1830년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군 원면 칠곡리에 있다. 1977년에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36세 김익현(金益鉉)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총제공파)
(1871, 12, 23∼1944, 12, 21). 74歲. 경기도 양평에서 재주(在周)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광현(光鉉), 호는 청암(靑岩), 1910년 경술국치에 즈음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합류하고 1921년 당시 설립된 임시정부와 군부대의 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국에 잠입하였다가 일경에 발각되었으나 이를 격파하고 소임을 다했다. 그 뒤 비밀임무를 띄고 청진으로 들어왔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옥고를 치르는 동안 오른쪽 눈을 잃고 귀향하였다. 원래가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상세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36세 김희인(金熙仁) (사온직장공파) (1890, 4, 3∼1949, 6, 25). 60歲. 경기도 연천군 중면에서 완식(完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인복(仁復), 호는 회현당(會賢堂),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기독교청년회관 고등과를 수료하였다. 대한제국 토지조사국 서기로 근무하면서 뜻한바가 있어 3·1독립만세운동사건 직전에 독립운동차 상해로 밀항중 일경에 체포되어 공주 감옥에서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후에는 옥고에서 얻은 신병으로 고생을 함에도 불고하고 해박한 법률상식으로 법망에 걸린 많은 서민을 변호함은 물론 향리에 학원을 세워 스스로 선생이 되어 농촌계몽과 문맹퇴치에 힘썼다. 옥고에서 얻은 지병으로 60세의 나이로 타계하다.
37세 김영관(金永寬) (문정공파/록사공파) (1855∼1926). 72歲, 조선 말기의 문신,
초명은 영옥(永玉), 字는 야홍(冶洪), 호는 석포(石圃), 아버지는 사현(師鉉)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가선 윤진(倫震)의 딸이다.
벼슬은 효릉참봉이었다. 1920년 시조왕자공 설단시 단비를 건립하지 못하였다가 3년후인 1923년 4월에 취사당에 출재하여 단비를 건립하는 등 종사에 많은 공헌이 있었다.
37세 김영두(金永斗) (문정공파/록사공파) (1884, 2, 26∼ ) 전남 광산군 지황면(현 광주시 지원동)에서 경현(敬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字는 구(球), 호는 덕산(德山), 22세때 망국의 한을 품고 해외로 도피,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중국 및 서구등에서 독립투쟁을 10여년이나 벌이다 외국에서 사망하니 행적을 자세히 밝힐 수 없고 한국효열록(韓國孝烈錄: 성균관간행)중 부인 함평문씨의 행적에 공의 독립투쟁의 기록이 약간 남아 있다. 묘는 전남 영광군 군남면에 있다. (외국에서 사망하였기에 시신을 찾지 못하고 초혼묘(招魂墓)이다.
37세 김영남(金永南) (문숙공파/상호군공파) 1926년 11월 16일 전남 화순군에서 시현(時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 서중을 졸업하고 1943년에 징병으로 일군에 입대하여 훈련중 항일운동에 뜻을 품고 동지 5인을 규합하여 병사(兵舍)에 불을 지르고 화약고를 폭파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44년 3월에 군법회의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사세호형무소에서 복역중 8·15 해방으로 출소하였다. 정부에서는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하고 국가유공자로 대우하고 있다.
37세 김영숙(金永肅)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
(1886, 9, 4∼1952, 3, 28). 67歲. 충남 논산시 양촌면에서 방현(邦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백주(白舟), 1910년 경술국치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종교교주(大倧敎敎主)인 윤세복 등과 함께 봉천성환인현에 동창학원을 설립하고 이극로 등과 함께 민족교육을 통한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34년 하얼빈에서 김응, 윤세복 등과 합작하여 대종교 선도회를 설치하여 단군성조의 혼을 심었다. 그러나 1942년 11월 19일에 일본이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그 간부들을 체포할 때 19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15년의 형을 받아 복역중 1945년 8월 12일 소련군의 진주로 목단강성 감옥에서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공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국외용의자 조선인명부 및 독립운동사에 기록되어 있다.
37세 김영기(金永騏)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871, 5, 9∼1919, 3, 20). 49歲. 경남 합천군 문양면에서 재현(在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성품이 강직 고결하고 재주가 비범하였다. 일찍이 향리에서 동학(同學)들과 더불어 청년구국단을 결성하여 민족정기를 높이는 한편 야학을 열어 청소년에게 조국혼을 일깨워주었으며 중앙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결된 비밀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서울에 다녀온 향리 동지 강홍열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전달받고 3월 19일 합천장날 오후 4시경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니 약5백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였다. 일본 경찰이 이 운동에 가담한 심재기등 17명을 구금하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튿날인 20일 오후 7시에 구금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12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선두에서 지휘하고 다른 수백명의 군중과 합세하여 농기구로 무장하여 경찰서를 습격 돌진하다가 일본 경찰의 발포로 인해서 순절(殉節)하였으니 당년이 48세였다. 정부에서는 1980년에 대통령표창장을 추서하였다. 군수를 설립자로하여 출생지인 합천군 대월면에 애국지사비를 세웠으나 현재 향리에는 후손이나 연고자가 없어 군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37세 김영기(金永驥)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902, 9, 14∼1984, 1, 2). 83歲. 충남 부여시 홍산면에서 옥현(玉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한메, 충남도 임시교원양성소, 일본동경대 동문화학원본과를 졸업후 총독부학무국 편집과에서 우리말과 학문등 교과서를 만드는일을 맡았다가 1932년에 대구사범학교 교유로 취임하여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재임중 반일사상자로 의심을 받던중 조선어시간에 시조 단군과 단기연호(檀紀年號)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문예부를 중심으로 비밀결사를 지도하여 재학생들은 물론 졸업후까지도 유대를 맺도록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1940년 비밀독서회원들의 "반딧불"이라는 표제가 달린 출판물이 일본 경찰에 압수되어 관련자가 체포됨에 따라 다초당(茶草堂)이라는 비밀결사모임까지 폭로되어 대검거선풍이 불게되었다. 1941년 8월에 이사건의 배후지도자로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투옥되었던바 제자들이 무혐의 주장으로 4개월만에 풀려났으나 실직(失職)과 사찰로 고통을 겪다가 1942년 5월에 사립개성송도(松都)중학교 교유로 부임하였다. 해방후에는 대구여중, 경북여고, 대구사범, 경복고, 대구여고 교장, 경북도교육회장, 명지재단이사 겸 5.16장학회 이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서울시교육위원, 서울특별시문화위원, 사단법인 삼락회 2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건국공로를 높이 사 대통령표창장을 수여했다. 묘는 부여시 홍산면 정동리에 있으며 제자들이 추모비(追慕碑)가 건립되어 대구사범학교와 경북고등학교에도 기념비가 있다.
37세 김영수(金永壽)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914, 5, 9 ∼1944, 2, 12). 31歲. 전북 고창군 대산면에서 학현(學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독립운동단체인 비밀결사대에 가입하여 40여명을 규합하고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0년에 김제주둔 일본헌병대를 습격하려는 준비도붕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동년 12월 17일에 검거되어 7개월간의 고문과 조사를 받고 1941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년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4년 2월 12일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의사를 추모하기 위해여 고향의 청년들이 기금을 모아서 추모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1986년 12월 16일에 대통령표창장을 추서하였다.
37세 김영헌(金永憲)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921년 11월 24일 충남 서천군 마서면에서 상현(上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산계(山溪), 배재중하과 서울대 사대국문과를 졸업했다.
1941년 배재중학 5학년 재학시 몽양 여운형 선생 지도하에 독립동지회를 조직하여 주도자로 활동하였으며 1942년부터는 팔탄 및 시초초등학교 교사로 재임하면서 학생들과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농민조직과 동지규합 활동에 앞장섰다. 1944년 7월에 서울의 종로 및 광화문일대에 우리 민족의 궐기를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하다가 강진규의 밀고로 경기도 경찰부에 피검 2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8·15 해방으로 출옥하였다. 해방후에는 서울대 사대부고, 공주고, 이화여고 교사로 근무하고 정년퇴임하였다. 1986년 12월 16일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퇴임시에는 국민훈장목련장,, 1990년 12월 26일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37세 김영운(金永運)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67∼1932). 66歲.
조선 말기의 학자, 字는 덕오(德五), 호는 서운(瑞雲), 아버지는 문현(文鉉)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로 제대(濟大)의 딸이다.
자품이 준수하고 기우가 굉장하였으며 문학으로 성명이 있고 조리가 정대하며 효제충신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 실천하는데 노력하였고 계지술사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1910년 충정공(忠貞公: 諱 義元)의 묘소를 찾는데 큰 공헌이 있었고 저서로 서운유고가 있다.
묘(墓)는 금적동에 있다.
37세 김영주(金永柱)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총제공파)
(1900, 3, 4∼1946, 1, 17). 47歲.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태현(泰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명은 기성(基聲),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참을 수 없던 차에 3·1 만세운동에 대비하여 이유석, 홍창섭, 이근수등과 같이 안성군 양성면과 원곡면에서 1천여명을 동원하여 양면의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등을 불지르고 전화선을 절단하는등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부인 최수성여사는 노부모봉양, 남편의 뒷바라지, 외아들의 양육등 과로에 못이겨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으며, 공이 출감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자금의 조달등 활동을 하다가 옥고에서 얻은 병으로 시달림을 받던중 8·15 광복을 맞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하고 다음해 1월 17일에 한많은 생을 마치니 1977년에 정부에서 대통령표창장을 추서하였다.
묘(墓)는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방삼리에 있다.
37세 김영기(金永冀)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59∼1907). 49歲.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영후(永厚), 字는 덕용(德用), 아버지는 동부승지 양현(亮鉉)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대구서씨로 염보(念輔)의 딸이다.
1882년(고종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1891년(고종 29) 별시 문과에 병과 68인으로 급제하여 대교, 비서승을 지냈다. (見國朝文科榜目)
37세 김영덕(金永悳)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59∼1910). 52歲.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절신, 의사(義士). 字는 수경(樹卿), 아버지는 참판 익현(翼鉉)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해평윤씨로 판서 치정(致定)의 딸이다.
1877년(고종 15)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884년(고종 22) 여주목사(麗州牧使)를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 및 감리서 부산항 통상사무를 맡아 보았으며 벼슬이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인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통탄하고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자결하였다. (見國朝文科榜目)
37세 김영로(金永 )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49∼1891). 43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경구(景九), 아버지는 도사 삼현(三鉉)이며, 어머니는 공인 예안이씨로 원문(源文)의 딸이다.
1864년(고종 24)에 동몽교관이었고 1865년(고종 3) 식년시 문과에 병과 33인으로 급제하여 검열에 발탁되고 교리, 선전관을 지냈다. 1871년(고종 9) 해직소를 올리고 하향독서하였다. 1880년(고종 18)에 연(連)하여 교리, 응교, 순천부사를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명에 응하지 못하였다.
묘(墓)는 홍천읍 갈마곡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7세 김영목(金永穆)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35∼1903). 69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청우(淸友), 아버지는 증판서 주현(周鉉)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덕수이씨로 노화(魯和)의 딸이다.
1861년(철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870년(고종 8) 별시 문과에 병과 19인으로 급제하여, 한원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문장과 덕행으로 당세(當世)에 이름을 드러냈다.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재동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7세 김영석(金永奭)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37∼1902). 66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보경(保卿), 아버지는 승지 경현(敬鉉)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용인이씨로 재찬(在纘)의 딸이다.
1864년(고종 2) 별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見國朝文科榜目)
37세 김영수(金永秀)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18∼1881). 64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정부(定夫), 호는 경암(警菴), 아버지는 증참의 백현(百鉉)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 용인이씨로 익우(益祐)의 딸이다.
1849년(헌종 16) 식년시 문과에 병과 26인으로 급제하여 현감을 역임하고 우승지에 올랐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37세 김영수(金永壽)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29∼1899). 71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복여(福如), 호는 하정(荷亭), 아버지는 증우의정 우현(宇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남양홍씨로 목사 집규(集圭)의 딸이다.
1858년(철종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사로 군수를 지냈고 1870년(고종 8)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 2인으로 급제하여, 규장각의 요직을 거쳐 승지에 승진되었고 임오군란과 신미양요에 호종한 공이 있으며 양관대제학, 시강원(侍講院) 이사를 역임하고 보국에 승자(陞資)되었으며, 평안도, 경상도 관찰사, 1884년 전환국 관리(典還局管理), 협판내무부사, 1886년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어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고 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지음리 사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7세 김영의(金永儀)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54∼1907). 54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양수(陽 ), 호는 춘관(春觀), 아버지는 대사헌 낙현(洛鉉)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남양홍씨로 군수 재과(在果)의 딸이다.
1888년(고종 26) 별시 문과에 병과 35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승지였으며 유고가 있다.(見國朝文科榜目)
37세 김영익(金永翼)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782∼1835). 54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성여(成如), 아버지는 군수 종현(宗鉉)이며, 어머니는 영인 연안이씨로 현감 득원(得源)의 딸이다.
1809년(순조 10) 증광 생원시에 3등 8인으로 합격하여 벼슬은 이천부사였다.
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대야미리에 있다.
37세 김영적(金永迪)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60∼1903). 44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재존(才尊), 아버지는 참판공현(公鉉)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한산이씨로 보국(輔國) 희갑(羲甲)의 딸이다.
1865년(고종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익위사 부솔을 거쳐 김포군수를 지냈고 1889년(고종 27) 문과에 병과 50인으로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고 자헌에 올라 종묘 제조가 되었으며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이매리에 있다. (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7세 김영철(金永喆)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의정공파) (1836∼1901). 66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윤명(允明), 호는 심타(心 ), 아버지는 부사맹 광현(光鉉)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전주이씨로 영록(永錄)의 딸이다.
1858년(철종 10) 무과에 급제하여 1862년(철종 14)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장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고 철종 15년에 대구종군이요. 1882년(고종 20) 당상관에 올라 선전관, 희천군수, 내금위장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강경읍 채산동에 있다.
37세 김영철(金永哲)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41∼1923). 83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문경(文卿), 아버지는 이조판서 보현(輔鉉). 1872년(고종 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교리(校理), 헌납(獻納), 장령(掌令), 응교(應敎), 병조좌랑(兵曹佐郎), 사복시정(司璞寺正), 예조참의(禮曺參議)를 지내고 승지(承旨), 대사성(大司成), 이조참의(吏曹參譏), 예조참판(禮曹參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형조, 예조, 이조판서 등을 역임, 1902년(광무 6) 시종원경(侍從院卿), 특진관(特進官)이 되고, 1910년(융희,4)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7세 김영준(金永準)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조선 말기의 무신,
아버지는 판서 보현(輔鉉)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남양홍씨로 증영의정 종원(鍾遠)의 딸이다.
참봉, 한성판윤을 거쳐 육군참장을 지냈다.
37세 김영숙(金永肅)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 (1886∼1952). 67歲. 조선 말기의 절의신, 독립운동가. 일명 백(白), 호는 백주(白舟), 충남 결성(結城) 출신으로 1911년 중앙고보(中央高普) 사범과(師範科)를 졸업, 승동소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만주로 망명, 동창(東昌), 청일(靑一), 송화(松花), 여명(黎明) 등 여러 학교에서 12년간 후진을 교육했다. 그 후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을 벌이는 한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참교(參敎), 지교(知敎), 상교 등을 거쳐 정교(正敎)에 올라 대형(大兄)이 되었다. 1942년 일본경찰에 잡혀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해방으로 석방되어 귀국, 단군전 봉건회 (壇君殿奉建會)를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6.25사변 때 남하하여 대구(大邱)에서 병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37세 김진수(金鎭秀) (양간공파/사온승공파) (1829∼1889). 61歲. 조선 후기의 무신, 字는 영여(英汝), 아버지는 석현(錫鉉)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로 이우(履祐)의 딸이다.
담략이 뛰어나 무술과 궁마를 익혀 무과에 급제하였고 갑신정변후 의병을 모집하여 거의(擧義) 하였으나 성과없이 그침에 뜻을 이루지 못함을 한하여 분사하니 조정에서 공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충무위 사과 겸 부장에 추증하였다.
묘(墓)는 장흥읍 행원리에 있다.
37세 김영엽(金泳燁) (양간공파/사온승공파) (1869, 11, 27∼1908, 2, 13). 40歲.
전남 장흥군 관산면에서 의현(義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여회(汝晦), 호는 치재(痴齋), 어려서부터 호용(好勇)이 있었다. 족숙 소석 김노현 선생에게 수학하고 장성하여서는 송사 기우만 선생에게 배웠다. 을사, 정미변란뒤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남에 이르러 전남지역의 각 의병진에 출입하여 계책을 세워 협조하였다. 1907년에 호남창의 맹소를 세움에 있어 기삼연, 김준등 의병장과 합세하였으며 같은해 의병 50명(총기 40정)과 더불어 장성 , 순창에서 일어났다. 1909년에 남평거성동 접전에서 능주, 나주, 영암의 세곳에서 공격해오는 왜병과 싸워 70여명을 사살하였다. 10년 전열 정비를 위해서 장성, 백양사에 유진(留陣)하던중 내부에 숨어든 반적에게 살해당했다. 공이 돌아가신뒤 부인 수원백씨는 삼년상을 마치고 공을 따라 자결하였다. 1985년 정부의 도움으로 의사의 묘역정화사업이 진행되고 묘비를 제막함에 이르렀다. 장성군민은 의사를 추모하여 장성읍 남산공원에 의적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1980년에 대통령표창장을 추서하였다. 그때 향리에서는 직계자손이 살 수 없어 타지로 분산되어 살고 있으니 후예들이 받은 박해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광주 포충사에 배향되었다.
37세 김영윤(金永胤)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
(1859∼1937). 79歲. 조선 말기의 학자, 字는 석여(錫汝), 호는 섬계(剡溪), 아버지는 헌주(憲周)이며, 어머니는 선성김씨로 휘태(輝兌)의 딸이다.
경서에 관한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예학에도 밝았다. 도산, 병산서원의 원장을 수차 역임하였으며 안동지방의 유학자로 추중을 받았다. 저서로 섬계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북 안동시 풍천면 구담동에 있다
37세 김영순(金永淳)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담암공파/유일재공파/석당공파)
(1898, 6, 16∼1977, 12, 23). 80歲. 字는 인필(仁弼), 호는 인동(仁同), 아버지는 성현(聖鉉)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재주와 덕을 갖추어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고 종족과 화목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配는 의성김씨(義城金氏)이고 父는 재용(在用)이다. 繼配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고 父는 성하(聖夏)이고 生2男2女. 子는 昌洙, 鎭洙이다.
38세 김용근(金容根) (문정공파/문민공파) 1917년 8월 23일 전남 강진군 작천면에서 준수(俊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석은(碩隱), 평양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영광군 소재 개량서당의 교사가 되어 친구 및 서당 생도들에게 일본의 패전 및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다가 1937년에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6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2년을 중퇴하고 목포의 온금학원의 교원으로 재직하면서는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43년 다시 체포되어 전주지법에서 징역2년을 언도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38세 김양수(金良洙)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1896, 9, 4∼1971, 1, 19). 76歲.
전남 순천에서 영묵(永默)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자력원장, 국회의원, 광산김씨대종회장을 역임한 공은 일본 조도전대학 정치학부 재학중인 1919년 2월 8일 동경유학생 6백여명이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 채택하여 독립국임을 선포하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는데 가담하였다. 이 사건이 기미독립운동을 거사하는데 큰 자극을 주었다.
38세 김필수(金弼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56∼1890). 35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계량(季良), 아버지는 부사 영응(永應)이며, 어머니는 숙인 동래정씨로 좌랑 세신(世臣)의 딸이다.
1880년(고종 18) 별시 문과에 병과 59인으로 급제하여 대교, 승지를 지냈다.
(見國朝文科榜目)
38세 김학수(金學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47∼1907). 61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윤교(允敎), 호는 국사(菊史). 아버지는 문헌공(文憲公) 영수(永壽)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풍양조씨로 부사 규영(揆永)의 딸이다.
1873년(고종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1874년(고종 12) 정시 문과에 을과(乙科) 2인으로 급제하여, 한림관이 되고 정헌대부 지돈녕원사에 이르렀다. 1890년(고종 28) 함창(咸昌)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안핵사(接蘿使)가 되어 난을 진압했다. 감찰(叢察)을 거쳐 1894년 김흥집(金弘集) 내각의 외무 참의(外務參議)로 임명 되었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저음리 사동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8세 김귀수(金龜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 (1859∼1935). 77歲.
조선 말기의 문신, 字는 경련(景蓮), 호는 서운(西雲), 아버지는 증참판 영수(永秀)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밀양박씨로 수명(秀明)의 딸이다.
1888년(고종 26) 생원시에 합격하여 1889년(고종 27)에 헌릉참봉을 거쳐 세마, 시직을 지냈고 1892년(고종 30) 별시 문과에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사어, 부수찬을 지냈고 1893년(고종 31)에 부응교, 정언, 전랑(銓郞)을 거쳐 통정대부 동부승지에 승진되었다.
묘(墓)는 충북 중원군 이류면 가정리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8세 김덕수(金德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57∼1916). 60歲.
조선 말기의 문신, 字는 기로(麒老), 아버지는 군수 영구(永耉)이며, 어머니는 영인 청송심씨로 판서 경택(敬澤)의 딸이다.
1885년(고종 23) 별시 문과에 병과 41인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응교를 거쳐 1893년(고종 31)에 예조참의를 역임하고 통정대부 좌부승지에 승진하였다.
38세 김도수(金道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53∼1921). 69歲.
조선 말기의 절의신, 字는 노언(魯彦), 호는 서은(西隱), 아버지는 영복(永福)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멸(蔑)의 딸이다.
희재 김휘준의 문인으로 1896년(고종 34) 의병운동으로 봉화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대향회(大鄕會)를 개최하여 원근 각향에 일제토죄(日帝討罪)의 격문을 보내어 민심을 고취(鼓吹)하고 많은 의거원병이 운집 결속하였을 때 권세연 의병대장의 휘하 의병장교로 출정하여 군공을 세웠다. 7대조 아계공( 溪公)이 신원되자 국은에 감동하여 고종이 승하함에 3년간을 소식하고 상기가 지남에 24일간을 절식(絶食)하고 운명하였다.
묘(墓)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에 있다.
38세 김지수(金志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45∼1911). 67歲.
조선 말기의 절의신, 우국지사. 字는 심일(心一), 호는 심암(心巖), 아버지는 영학(永鶴)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로 판관 석보(錫輔)의 딸이다.
학행으로 여러번 도천에 올랐고 처음 벼슬로 통사랑 선공감 가감역이었으며 또 1900년(광무4)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했고 1910년(융희 4) 경술국치인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이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고 1911년 산직리 본제에서 두문불출하고, 왜적의 위협과 유혹을 물리치며 조용히 자결 순절하니 조국 광복후 순국선열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유고 3권이 가장되어 있다.
묘(墓)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아곡리에 있다.
38세 김천수(金天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60∼1911). 52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성언(聖言), 아버지는 문헌공(文憲公) 영목(永穆)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풍산홍씨로 현령 영주(寧周)의 딸이다.
1876년(고종 14) 진사시에 합격하고 1877년(고종 15) 별시 문과에 병과 18인으로 급제하여 한림, 승지를 거쳐 자헌에 올랐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8세 김춘수(金春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72∼1921). 50歲.
조선 말기의 문신, 字는 영사(詠士), 아버지는 교관 영식(永式)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진사 인보(麟普)의 딸이다.
1893년(고종 31) 별시 문과에 병과 30인으로 급제하여 가선, 장례소경(掌禮少卿)을 지냈다.(見國朝文科榜目)
39세 김용원(金容元)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54∼1920). 67歲.
조선 말기의 문신, 字는 순거(舜擧), 아버지는 증참판 태수(泰洙)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풍산홍씨로 판서 철주(澈周)의 딸이다.
벼슬은 참봉 시직 주부였고 1885년(고종 23)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 36인으로 급제하여 좌부승지 경주부윤을 지냈다.
묘(墓)의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건건리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8세 김학수(金鶴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48∼1920). 73歲.
조선 말기의 문신, 字는 경문(景聞), 호는 확재(確齋), 아버지는 증참판 영수(永秀)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밀양박씨로 수명(秀明)의 딸이다.
1885년(고종 23) 별시 문과에 병과 41인으로 급제하여 설서, 필선, 상례, 전랑을 저쳐 1890년(고종 28) 통정에 올라 형조참의, 동부승지를 지냈고 1892년(고종 30) 가선에 올라 예조참판, 동춘추우윤(同春秋右尹), 병조참판, 형조참판, 좌윤을 역임하고 가의대부 특진관에 올랐다.(見國朝文科榜目)
38세 김희수(金喜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61∼1919). 59歲.
조선 말기의 문신, 字는 문재(聞哉), 아버지는 영학(永學)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목사 재순(在純)의 딸이다.
1876년(고종 14) 진사시에 합격하고 1879년(고종 17) 식년시 문과에 병과 39인으로 급제하여 한원을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見國朝文科榜目)
38세 김익수(金益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파) (1880, 2, 26∼1920, 11, 1). 41歲.
전남 무안군 해제면 양매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구(永求), 1896년부터 최면암 문하에서 수학한바 지조가 고결하였다. 1905년 11월에 동지 민종석등 88인을 몰아 결의동맹하고 1906년 충청도 정산군에서 4백명과 함께 의병활동을 시작해서 그해 2월중순에 부여에 입성해서 병기(兵器)를 빼앗아 무장을 갖추고 남하하여 남포군 새재에서 일병을 무찌르고 서천에 입성하였다. 그해 4월에 홍주에 이르매 군세가 일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홍주에서 일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했다. 1907년 익산군에서 동지 수십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군산을 무찔렀다. 1909년 익산에서 체포되었다가 압송도중에 탈출하고 다음해 논산에서 체포되었다가 다시 탈출하였다. 그 뒤 왜군이 소위 조선폭도토벌대 작전을 전개함에 따라 서남해안과 도서지방으로 밀리게 되었다가 1909년 9월 19일 일본 토벌대에 체포되니 그 때의 의병수는 50명에 불과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17년 병보석이 되었으나 3년뒤인 1920년 11월 1일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1980년에 대통령표창장을 추서하였다.
38세 김익수(金益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81, 12, 27∼1950, 7, 13). 70歲. 충남 논산군 연산면에서 영두(永斗)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낭산(朗山), 합방이전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가 망국뒤에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국경을 넘나들면서 비밀임무를 수행하였으며 태백산, 소백산 지대인 경북 안동, 봉화등지와 강원도 정선, 삼척등지에서 독립자금을 거출하여 백산 선생의 아들인 안상훈에게 전달하는등 독립운동을 하여 일본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으나 은밀한 활동이 민첩하여 체포를 면하였다. 해방뒤에는 백범(白凡)선생 밑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평안도지방의 종유계(宗儒契)간부명단에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의 동생 인수에 대한 기록도 적혀있다.
38세 김철수(金 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893, 5, 25∼1986, 3, 16). 94歲. 전북 부안군 백산면에서 영구(永九)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지운(遲耘), 16세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일본조도전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유학중 한국유학생은 물론 중국, 인도, 대만등에서 온 유학생들과 뜻을 모아 반일제국운동을 위하여 신아동맹당을 결성하였다. 귀국후 3·1독립운동을 맞았다. 선생은 지속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은 사회주의적인 방법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920년에 이봉수, 주종건, 장덕수등 10여명이 사회혁명당을 결성하였다. 1921년 3월에 혁명당 몇몇동지들과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이동휘 중심의 연해주 한인사회당과 협력하여 고려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이는 중국공산당보다도 앞선 창당이었다. 선생은 상해임시정부를 독립운동집행기구로 개조하여 안창호, 김동삼, 신익희등 당시 좌우익 애국지사들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소위 창조파의 과격행동으로 실패하였다. 1923년에는 귀국하여 제2차, 제3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모스코바국제당에 가서 승인까지 얻었다.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소련 정부의 양해하에 연해주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연해주 연해 어획권까지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1929년말 왜경에게 체포되어 10년을 복역하고 출옥 후 다시 감호(監護)라는 명목으로 수감되어 4년형을 받아 복역중 8·15해방으로 출옥하였다. 1945년 11월에 전국독립촉성국민대표회의에 각정당, 사회단체의 대표로 7인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조선공산당 대표로서 이승만, 안재홍, 정노식, 장덕수,등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진력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공산당내의 파쟁에 반대하여 1946년 10월에 54세때에 정치에서 손을 떼고 초야에 돌아와 쓰러져가는 초막에서 글을 벗삼고 화초를 가꾸며 세월을 보내다. 통일조국을 보지못하고 94세의 상수(上壽)로 타계하였다.
38세 김현수(金玄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1914년 6월 27일 충남 논산군 부적면에서 영승(永承)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정안(汀岸), 서울중앙고보와 중화민국황보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상해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의 지휘를 받아 독립투쟁을 전개, 왜군헌병을 저격했으며 왜경의 밀정인 이갑룡(당시 재중국한인거류민단장)이란 자가 많은 우리 독립투사를 괴롭히므로 김구주석의 밀명을 받아 이갑룡을 저격하려다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중 무기수로 감형되어 서대문, 대전, 공주, 전주형무소에서 복역중 9년6개월만에 8·15 해방으로 풀려났다. 광복후에는 오광선 장군과 광복군국내지대를 조직하여 부사령관겸 제1지대장에 취임했다. 그 후 미군정의 명에의해 해산이 되자 이승만박사의 초대 특별경비대장을 역임하고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수도경찰청장에 취임제의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요양중 6·25발생 2일후 행방불명이 되어 현재까지도 소식이 없다.
38세 김철수(金哲洙)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퇴촌공파) (1863∼1921). 59歲.
조선 말기의 문신, 字는 세유(世有), 호는 도계(道溪), 아버지는 도사 영하(永廈)이며, 어머니는 공인 경주최씨로 문수(文秀)의 딸이다.
1890년(고종 28) 별시 문과에 병과 29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비서랑을 지냈다,
저서로 도계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계동에 있다. (見國朝文科榜目)
38세 김익수(金翼洙) (양간공파/사온승공파) (1830∼1921). 92歲. 조선 말기의 무신, 아버지는 동추 영룡(永龍)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해주최씨로 시린(時麟)의 딸이다.
풍의(風儀)와 언행이 일문의 모범이 되었고 1853년(철종5) 무과에 급제하여 삼군부 낭청(三軍府郎廳)을 거쳐 훈련원정, 도총관과 승지를 지내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1882년(고종 20)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사군대(思君坮)를 쌓고 삭망으로 경사(京師)를 향하여 망배하였다
묘(墓)는 전남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에 있다.
38세 김석용(金碩龍) (양간공파/사온승공파) 1901년 3월 23일 평북 정주군 안흥면에서 의현(義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엄해(嚴海. 庵海), 정주오산학교 재학중 3·1만세운동에 가담한 관계로 중퇴하고 중국남경대학을 졸업하였다. 1926년 상해임시정부의 호위, 주구숙청, 난동분자의 엄중단속, 왜제중요시설파괴 및 중요인물 격살을 목적으로 조직된 병인의용단의 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9년 6월 순종(純宗)의 인산(因山: 國葬)을 기하여 중요기관의 파괴와 고관의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국내에 잠입하려다 황포강 입구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 3심까지의 재판 결과는 사형에서 7년으로 감형되고 5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광복후에는 신익희, 이시영등 임정요인과 같이 환국하여 건국준비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얼마후에 정치적으로 연금상태라는 소문만 들었을 뿐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38세 김석숭(金碩崇) (양간공파/사온승공파) 1914년 4월 8일 평북 정주군 안흥면에서 의현(義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동경 일본대학 예과문과 및 동대학법문학부 법률학과졸, 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선천경찰서에 1934년 조선유학생사건(왜경구타), 1947년 조선민주당사건으로 각각 피검 구치됨, 대한민국 국군법무관시험 합격, 강원도서북청년회를 조직, 회장으로 피임되고, 서북전이재민협회 강원도본부조직 회장피임, 재서울조선민주당 선천군당부위원장, 대한민국정부 중앙감찰위원회조사관, 민주당용산을구당 감찰위원장, 국가공무원공개경쟁채용시험위원, L.A한국노인회부회장, 문교부장광표창2회, 서울시교육위원회교육감표창, 저서로는 "왔다간다"가 있다.
38세 김남수(金南洙) (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 (1899, 4, 2∼1945, 3, 12). 47歲.
경북 안동시 예안면에서 영수(永壽)의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중심(仲尋), 호는 우전(雨田), 아버지에게 처음 한학을 배우고 류인식 선생이 주재한 협동학교에서 신문학을 익혔다. 1920년대부터 신민회 계통에 참여하고 소작조합 노동조합등의 조직에 참여 반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서 투쟁하였다. 공은 형평사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노동조합운동의 발판으로 삼아 영천, 대구, 진주등지와 서울, 부산, 평양등을 돌아다니면서 소작쟁의에 가담하고 서울에서는 경성고무 직공의 파업투쟁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아 투옥되었다. 1925년에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대회 하루전날밤에 일경에 발각되어 실패로 그치고 이어 김준연이 주동한 M,L당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 서울에 신간회가 조직되자 이 조직을 전민족활동의 중심으로 삼아 합세하기에 이르렀으나 계속 M,L당의 잔여세력과 지하활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동안 복역하였다. 출옥뒤에도 계속 일경의 탄압을 받았으나 건국동맹계와 연락을 이어 나갔다. 오랜 옥살이에 몸을 심히 상하여 광복을 보지못하고 47세의 아까운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墓)는 고향인 경북 안동시 예안면 오천에 있다.
39세 김용준(金容俊) (문정공파/문민공파) (1903, 12, 30∼1986, 12, 9). 87歲.
전남 보성군 보성읍에서 평수(平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양은(養隱), 3·1 독립운동에 참가 활동중 체포되어 목포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광복후에는 민족청년단 군단장, 보성군청년결사대 조직, 국방부정훈특수공작대장, 광산김씨대종중 이사회의장(22, 23대)을 역임하였다.
39세 김용숙(金容淑) (문정공파/문민공파) 1915년 6월 3일 전남 보성군 보성읍에서 건수(建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덕은(德隱), 세심당 백홍인 선생 문하에서 수학한 후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중 1930년 5월 1일 숙부 봉수(鳳洙)의 지도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였으며 노농독서회를 조직하는데 참여 농촌항일운동등 투쟁에 대비한 기본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후 만보산 사건에 동맹투쟁으로 학교내에 침투하여 일본인 교사배척, 만보산사건 진상폭로등 동맹휴학을 선동하다가 3학년때 퇴학을 당했다. 광산김씨대종중 이사회의장, 문정공파종중고문, 문민공파종중도유사, 고문을 역임하였다.
39세 김용욱(金容旭)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경력공파/오강공파)
(1869, 3, 6∼1921, 8, 9). 53歲. 충남 연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치언(致彦), 아버지는 이수(履洙)이다. 주로 활동무대가 경북 울진군 근남면이었다. 공은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영동일대에서는 축지법(縮地法)을 쓰는 "노랑장군"이라는 전설로 통하고 있었다. 1905년 10월 7일 울진군 북면의 흥부시장에서 창의(倡義) 일을 시작하여 일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울진군 서면에 있는 불영사(佛影寺)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울진 평해의 관포 및 무기와 민병을 규합하고 영양, 울진, 봉화의 세(勢)까지 아울러 병력이 5백에 달했다. 1906년 영릉(寧陵)의 의병장인 신돌석(申乭石)과 합세함에 이르러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일군이 주둔하고 있던 장호관을 습격하여 왜병 일백여명을 무찌르고 함선(艦船) 9척을 파괴하여 해안을 일소하였다. 1907년에 울진의 매화, 영월의 서면(창수면), 청송읍등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09년 안동, 울진, 삼척, 강릉과 합세하여 안동, 예천, 영주, 영양등지를 순회하면서 일군을 소탕하고 태백산맥으로 옮겨서 활동하다가 1921년 8월 9일에 최후를 마치었다. 1977년 12월 13일에 건국공로포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