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엮어나가시는 분, 읽어 나가시는 분들 사이에, 혁명이냐 ? 쿠데타냐..? 논의 있는 모양인데, 그런 현대적/유럽적 어휘보다는, 우리 역사엔 반정(反正)이란 말이 쓰이고 있으니 차라리 "태종반정"으로 규정지어 봄이 행결 낫다, 생각 드는군요. 중종반정,인조반정보다 한층 더 매몰차고 피비린내 자욱한... 역사학 전공도 아닌 주제, 쓰잘나위 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이제 춘당 변중량이 피살당하는 장면이 닥친 모양이니 이정근님께 "춘당을 암쭈룩 잘 서술해 줍소사..." 간청드리고 싶습니다. 박시백씨 만화에서 참혹히 조소 당하는 맑고 꼳꼳한 선비 분을 !! 물론 이 싯점에서 아직은 세자 방석과, 방번이 실낱처럼 살아있긴 하지만, 무장한 "반정군" 가운데 평복차림 변중량,노석주의 목숨은 그야말로 폭풍 앞 등불. 죽음 이후 정당한 명예나마 지켜 주소서~~ 변중량 살해와 관련 왕조실록에 기술된 행간을 꿰뚫고서.
///// 태조7년 8월26일(1차 왕자난) 1번째 기사에서 변중량(卞仲良) 참형에 관한 부분 /////
군사들이 변중량,노석주(盧石柱}와 남지(南贄) 등을 잡아 가지고 나오니, ~~(중략)~~ 모두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가 뒤에 길에서 목을 베었다.【왕조실록 영인본】1책 130면
/// 67회의 댓글 "해맑은 지성..." 위와 관련 부분에 ☆☆차라리 죽는게...☆☆를 추가했습니다///
정안군 이방원과 춘당 변중량, 이 두 사람의 출신배경/인생관/성품..등을 미루어 봐서, 대강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았을 거라고 함이 훨씬 합당하겠습니다. 그야 왕조실록을 무조건 100% 믿기 작심한 입장이라면, 문헌상 근거없는 말짱 헛소리라, 치부하고 싶겠지요만.
이방원/ 우리는 남과 달리 연사(사촌 매부/처남)간임에도, 어째서 줄곧 비협조, 고자질이나 하고 왕즙등 무리와 절교않고 끝내는 우리 종친들 병권을 몰수하라고, 2~3 번씩이나 소를 올렸는가 ? 내가 종당엔 중망을 얻어 민심을 깊이 거두게 될 줄을 몰랐는가 ?
변중량/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어둡기로, 공이 이미 2~3년전부터 득세하고 있다는 사정을 헤아리지 못했겠습니까 ? 그러나 얼마전에 거듭 소를 올린 내용은 이 사람의 평소 신념입니다.
이방원/ 흥, 참 잘났소오~~ 입만 살아 가지고...그럼 어디 내 손에 죽어봐라 !!
☆☆ 변중량/ 그렇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가(可)합니다 ! ☆☆
당시 춘당(春堂) 변중량은 53세로서, 22세 연하인 사촌처남 정안군 이방원의 잔혹한 사람됨을 충분히 알아 차렸을 것이고, 살려달라 해봤자 아무 소용없음을, 직전의 정도전 피살에서도 직감했을 터이며 설혹 일시 죽음을 모면하더라도 결코 내내 무사치 못할 것임 피부로 느꼈을 거라고, 어렵잖게 추정됩니다. 정안군은 태종이 된 뒤에도 처가집 민씨 일가와 며느리 친정 심씨 일가를 도륙내었으며, 형님 정종의 정실부인 지씨네 일가를 끈덕지게 핍박/폄훼한 기록과, 비록 정사에 기록된 바 아니지만 고려 왕씨네 일족을 깡그리 바다속에 몰살시켰다는 행적을 감안한다면 춘당처럼 명민한 사람이, 그에게서 삶을 구해보겠다는 기대는 아예 포기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 "차라리 죽는 게 가(可)하다 !" 절규는, 공교롭게도 약 600년 뒤인 1960년대~~1970년대 우리 서민들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다시 외치게 되는데 이 삶의 외침이, 참형된 변중량의 시신 운구 길 청량리와 중량천/중량교에 얽혀 있으니 퍽이나 기이하다 하지 않을 수 없군요. (관련 글을 떠와서 아래 옮겨 놨습니다)
이씨 왕조에선, 정쟁(전쟁 아닌 政爭)에 패배한 전 고관대작들을 승자의 위세를 뽑내기 위해 도성안 길 한복판 운집된 백성들 앞에서 참형한 일이 몇 차례 있었던 바, 이렇게 처형된 시신들은 수구문(광희문. 을지로 6가 근처)밖에 내버려지는데, 대부분 들짐승이나 까마귀 밥이 되고, 그 중 더러는 지켜보고 있던 유족들에 의해 수습돼기도 했습니다.
춘당의 목없는 시신은 그 아우 춘정(春亭) 변계량에 의해, 멍석 쪼가리 펴놓은 지게 위에 거적 덮여, 당시 도로 사정에 따라 청량리밖으로 나가 "큰 시냇 줄기의 이름 없는 나룻터"를 건너, 다락원 못미쳐서 왼편으로 꺾여 양주읍/마전/적성을 경유 임진강을 삯배 내어 건너, 변씨 가문과 연고 있는 장단 땅에 묻히게 됐다고 합니다. 한맺히고 암담/처량하기 그지 없을 상행(??喪行??)은 하룻 해론 모자라 며칠 걸렸을 겁니다. 명문세가 출신일 뿐 아니라 13살에 진사시(進士試) 16살에 문과시(文科試)에 급제한, 29살 다감한 천재 변계량의 그 때 쓰라림과 절망스러움이 그의 뒷날 일생에 얼마만큼의 그늘을 드리웠을지에 대해선, 여러 말 필요 없을 겁니다.
얼마전에 부친 변옥란(이성계가 원종공신 녹권을 내림)을 여의고 24살 위인, 부친과 같은 형님을 그리 초초하게 묻고는, 자신도 사후에 그 옆에 묻힙니다. 그 묘역은 휴전선 이북이라 북한의 "황해남도 장단"땅이 돼, 위성이 찍어 보낸 사진으로 희미하게, 두 형제분의 애틋한 묘지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을 뿐이라 합니다. 위에 언급한 "큰 시냇 줄기의 이름 없는 나룻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 입에 중량교라고 친숙히 불려졌던 자리입니다.
/// 춘당의 직계 후손 변희룡 (부경대학교 환경大氣과학과) 교수님의 글을 펴놓았습니다 ///
======= 중량(中良/中梁)이 중랑(中浪)으로 굳어지고 마는가 ? ======= 글: 변희룡
1960~70년대 서울의 시내버스엔 소리높여 호객하는 안내양이 있었다. "청량리 중량교 가요" 외쳐야 하는데 너무 춥고 지쳐 있어서 옳게 발음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차라리(청량리) 죽는게(중량교) 가요"라고 악에 바쳐 외치니, 행결 부르기도 편하고 마음도 조금 가라 앉더란다. 그러면 또 어떤 승객은 "뭐? 청량리 중량교 간다구?" 덜렁 타는가 하면 다른 일부 승객은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웃으며 적힌 행선표를 확인하고나서 승차했더란다. 태울만큼 손님들이 찼으면 "오라잇" 소리치며 차체를 손바닥으로 쾅!쾅!쾅! 기사에게 GO를 보낸다. 한창 성장하는 사춘기 처녀들이 늦게나마 기사식당에 들어가서 뜨끈한 시래기국에 밥을 풍덩 넣어 말아먹곤 추위와 가혹한 육체노동의 고달픔을 달랜다. 수치스런 몸수색 삥땅조사 받고나서 풀려나와 심야에나 귀가한다... 이제는 사장님이 된 친구, 그 부인의 뼛속 깊이 새겨진 체험담이다. 당시는 분명 중랑교가 아니라 중량교였다. 그런데 이제는 중량이란 이름이 사라졌다. 중량(中良), 충량(忠良), 중량(梁), 중랑(浪), 중랑(狼) 등으로 혼용되다가 결국 일본의 실수의 잔재인 중랑(浪)으로 남고 말았다..
중랑구, 중랑천, 중랑교 등의 어원은 중량포(中良浦)였다. 지금의 군자교 일대 및 장안평 주변이다. 변중량(卞仲良,1345~1398)의 이름에서 인(人)자를 뺀 것이다. 변중량은 고려 시인 20여인 중의 한사람이다. 조선 건국시 스승인 정몽주를 시해하려는 이방원 일파의 계획을 처가를 왕래하다가 우연히 알고 정몽주에게 미리 알린 이다. 이방원의 거사가 성공한 후에도 끝까지 이성계 곁에 있었다. 정종의 비인 성빈 지씨와 인척관계여서 이방원 일파에게 경원 대상이 되어, 결국 죽임을 당했다.
동생 변계량(1369-1430)이 형의 시신을 장단에 있는 선산으로 몰래 옮겨 장례를 치렀다. 운구하기 위해 사용한 이름 없는 나루터를 개인 문집인 춘정집 (초간 1445)의 초고에 중량포(中良浦)로 적힌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이름이 전파되어 20년 후인 태종 17년 (1417)부터 영조 때 까지 왕조실록에 20회 이상 등장한다. 변계량이 주관하여 편찬한 ‘신찬팔도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중량포가 없다. 변계량의 개인적인 작명임이 분명하다.
세종 2년(1420)에는 충량포(忠良浦)란 이름도 등장하여, 세조실록에서만 9번 더 사용되었다. 유독 세조가 중량을 충량으로 올린 이유는 집권과정에서 권력의 향배에 따라 움직이는 철새 정치인들을 스스로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문형의 위치가 된 변계량의 형에 대한 애정도 작용하였으리라. 변중량 사망 시에 이씨 부인의 울부짖음도 작용했으리라. ‘방원아 이놈아, 숙부(이성계)는 내 아버지(이원계)를 돌아가시게 하시더니, 너는 내 남편에게 이리하느냐.’ 라 했을 것이다.
이방원은 어릴 적 좋아하던 4촌 누나에게 평생을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으리라. 변중량에게 죄가 있다면 유능하고 충직했다는 죄, 형인 이방과(정종)와 가까워질 염려가 있다는 죄밖에 더 있었는가. <고려의 재상 지윤의 두 딸이 이방우, 이방과의 부인이 되어 각각 상속자를 낳았다. 변중량의 외할머니가 정종비 성빈 지씨와 4촌간이다. 지씨 쪽에서는 변중량이 가장 큰 기둥이었다.> 권력다툼은 본래 무도한 것이지만 변계량의 재능을 조선 왕조에서 활용하고 누나의 마음을 달래려면, 시골 나루터 이름 하나 주어 위로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세조 12년 (1466)을 마지막으로 충량포란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예종 즉위년 (1468)에 유자광이 주도한 남이 옥사가 생겼는데, 변영수가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한다. 실록은 英守 또는 永壽로 기록하여 변계량의 아들 영수(英壽)와 구별하고 있으나 우연이라면 너무 여러 번 겹친다. 장단에 있는 변중량과 변계량의 산소가 훼손된 것도 이즈음일 것이다. 이후에는 다시 중량(中良)포란 이름만 나타난다. ‘동국여지승람(1481)’, ‘해동지지(1866)’에는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변계량이 가진 문형의 지위가 간접적으로 작용하여 중량포라는 이름이 관변 문서에 대거 등장하여 중량포로 발전한 다음, 변계량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이 용어도 겨우 맥만 이어 간 것으로 가정하고 보면 모두 가 잘 맞아 들어간다.
영조 즉위년 (1724)에 경종의 능 자리로 중량포가 결정되었으나, 량(良)자를 량(梁)으로 모두 바꾸었다. 강 이름도 송계, 속계 등에서 중량천(中梁川)으로 통일했다. 해동지도(1750), 증보문헌비고 한성부(1770), 대동여지도(1861), 승정원일기, 일성록, 기타 각종 문집 등등에서 거의 모두 중량포(中梁浦)로 기록되었다. 남계집은 1732년 간행되었으나 남계 (박세채, 1631-1695)가 수기한 대로 옮기다 보니 중량(良)포로 기록된 것이 유일하게 특이한 예이다. 중량(良)이라고 쓰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모양이다. 이때까지 변중량은 죄인인 상태였기 때문이리라.
고종 5년 (1868), 대원군은 역사에서 변중량이란 이름을 발견한다. 권력이 바뀌어도 옛 주인과 스승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명나라로 잡혀가 죽는 판국임에도 사대주의를 버리고 견제외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변중량을 발견하자, 대원군은 그를 신원(伸怨)해 줌과 동시에 이조판서로 추증하였다. 그 후 민간에서는 다시 량(梁)보다 량(良)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우선 쓰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없는 일본인들은, 량(良)자를 랑(浪, 물결 랑)자의 오자라고 오인했다. 강가이니 랑(浪)자라야 하는데 실수로 량(良)자를 썼다고 본 것이다. 일본인이 기록하던 시절이니 결국 중랑(浪)이 많이 남았다. 일본인이 ‘량’을 발음을 못하여 ‘랑’으로 적었다는 설도 있다. 중국(광여도, 1555)도 랑(浪)을 썼다.
이렇게 이어온 중량(良, 梁)이란 이름을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폐기해 버렸다. 중랑구(中浪區)를 신설(1988)하면서 량(良, 梁)자의 흔적을 지워 버린 것이다. 발음의 편이를 중시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일제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답다. 국사학계도 책임이 없지 않다.
양주교 북쪽에 보이는 교량에 '중량(梁)교'란 간판 하나가 최근까지도 있었다. 그런데, 이도 2004년에 ‘중랑(浪)교’로 적힌 동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제 약 40km에 이르는 중량천 물줄기에서 중량이란 이름은 없다. 간혹 량(良 또는 梁)이 발견되어도 오자로 처리된다. 이렇게 우리 역사는 말살되었다. 어떻게 다시 살릴 것인가? 추운 겨울날 거리에 나가 ‘청량리 중량교 가요.’ 라고 외쳐야 할 일이다. == 변희룡 끝 ==
///// 이정근 기자님의 계속 건필과, 변희룡 교수님의 더욱 건투를 기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