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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한 '까미노 레알 라 이슬라 ~ 비야비씨오사'
한 잔씩 받아 마신 와인에 취했다.
노르떼 길 초반인 마르끼나-헤메인의 밤이 재연되었으니까(8회 글 참조)
인색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네 술 인심과 달리 저들의 음주문화가 자기 술을 좀처럼 남에게
주지 않는데도 내게만은 예외인가.
취기(醉氣)가 수면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훼방꾼이 된데다 미지의 길이 불러온 긴장이 겹쳐서
너른 독방을 무수히 서성댄 밤이었다.
알베르게에 비치되어 있는 정보들은 모두 까미노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노르떼 길을 이탈
하는 순간 쓸 모 없는 폐지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빈 손으로 알베르게를 나설 수 밖에.
떠나가라는 가랑비인가.
약하기는 해도 내리는 비에 아랑곳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이른 아침의 뻬레그리노들.
잠시 더불어 마을길(Camino Corvera)을 따르다가 모두와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에서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외톨이가 된 나는 엄동설한의 황야에 홀로 서있는 느낌이었다..
왼쪽의 꼴룽가 길로 가는 뒷 모습들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화들짝 오른쪽 좁은 길에 들어섰다.
얼마쯤 가다가 어디쯤에서 막힐지도 모르는 길을 걷고 있는 나.
아는 것이 힘이라면 아는 길이 안전하고 편한 길이다.
편한 길을 두고 무슨 똥고집이냐는 자아비판(?/목가적이라는 꼴룽가길로 즉시 돌아가라는)이
고개를 들고 있을 때 세월의 때가 묻어 희미해진 노란 화살표(까미노마커)가 나타났다.
이 화살표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추정해본 까미노 레알(노르떼 길)이 이 길이라고 확신해도 되는가.
생기 잃은 노란 화살표 하나가 강렬한 힘이 될 줄이야.
끊길 것 같던 길이 짙푸른 풀숲으로 이어졌다.
나는 해안 따라 펼쳐지는 광활한 우엘가(La Huelga/비옥한 경작지)의 숲길에 탐닉하여 1km
이상을 무아경에 빠져 있었다.
꿈에서라도 상상해 보지 못한 길이다.
겁을 주지만 길이 있는 곶(串/punta)이 있고 해변(playa)과 만(bahia)도 있다.
목장과 과수원이 있고 놀랍게도 통나무 벤치도 있다.
집도 있고 옥에 티 처럼 볼성사납기는 해도 생활용품 폐기장도 있다.
사람의 왕래가 끊기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길 잃고 방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현장들이다.
비는 그쳤고 해가 떴음에도 햇볕이 들지 못할 만큼 칙칙한 유칼립투스 숲을 통과했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헤매기 십상인 숲길이다.
캠핑장(Camping Costa Verde) 앞에서 긴 목교를 통해 리베르돈 강(Rio Liberdon)을 건넜다.
지자체 꼴룽가에 속한 마을 산 후안 데 두스(San Juan de Duz)의 미니 마을인 산 뗄모(San
Telmo)의 강이 바다로 빠져드는 하구에는 그리에가 해변(Playa La Griega)이 있다.
강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에 돋보이는 자연친화적인 정비 등 삼위가 일체인 아름다운
해수욕장에서 나는 흥분을 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환호했다.
이 길이 오리지널 노르떼 길이라는데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조깅을 하다가 내 앞에서 스스로 멈춘 한 장년남.
환호는 그가 먼저 했다.
에레스 뻬레그리노, 아부엘로(Eres Peregrino, abuelo/노인양반, 순례자입니까)?
그의 말인 즉, 본래 이 길이 노르떼 길인데 같은 지자체(Colunga)의 내륙쪽으로 옮겨갔단다.
그가 환호한 것은 이 길이 원래의 노르떼 길임을 어떻게 알았으며 아무도 걸으려 하지 않는 이
길을 택한 내게 감동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
내가 이 길을 택하게 된 과정을 들은 그는 마치 절대자의 어떤 계시인 듯 신앙적으로 이해하려
했으며 남은 노정(오늘의)을 백지에 그려가며 설명하고 자기 이름도 적어주었다.(함께 촬영도
했건만 아무 것도 없으니 오호 통재!)
그러나, 내게는 계시를 받을 만큼 돈독한 신심이 없고 단지 막연한 가능성에 의지해 길을 택할
만큼 무모하지도 않으며 노르떼 길의 꼬스딸 루트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무수한 루트의 까미노를 걸으면 절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까미노'라 하나 까미노니까 유일무이하거나 불변한 길이 아니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사도 야고보가 걸었다는 터무니 없는 전제(믿음) 때문에 빚어지는 착각이며 오류다.
그러므로, 까미노는 이 길처럼 이동하거나 복수의 길이다.
일본의 까미노인 1.200km 시코쿠헨로(四國遍路)는 5~6개 코스로 나뉘었다가 합치기도 한다.
내가 이 길을 택한 것은 해안의 지형으로 볼 때 해안로가 라스뜨레스까지 이어지지 않을 이유
없는데 내륙으로 틀어버린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꼴룽가 루트의 홍보가 거슬리기도 했고.
까미노는 관광길이 아니며 숱한 애로가 도사리고 있는 형극의 길이었는데'빠스또랄(pastoral/
牧歌的'이라니 가당한 말인가.
라 이슬라~그리에가 해변 길이 지금은 숲과 해안이 어우러진 신명나는 길이지만 노르떼 길을
개설할 당시에는 무척 험한 가시밭 길이었을 것이다.
BIC 라스뜨레스는 통째로 전망대
출발지는 꼴룽가지만 그리에가 해변을 거쳐가므로 해발 기저와 다름 없는 지점에서 완만하게
올라가는 AS-257지방도로를 따라 걷기를 재개했다.
부엔 까미노를 연발하는 그(조깅 남)의 환송을 받으며.
아쉬운 것은 왼쪽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쥐라기박물관/Museo del Jurasico de
Asturias)을 모르쇠로 대한 점이다.
초대형 홍보판으로 미루어 볼 때는 경남 고성의 공룡박물관 보다 월등할 것으로 짐작되었는데.
라스뜨레스를 1km쯤 남겨놓은 지점의 바르 앞에서 잠시 쉬며 주변을 살폈다.
중간지점의 전망 좋은 해안, 라스뜨레스 해변(Playa de Lastres)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름 대로 휴게 바르(Bar El Descanso)다.
행정구역은 산 후안 데 두스 마을에서 라스뜨레스 마을로 바뀌고.
라스뜨레스는 해발30~110m지형의 해안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산 뗄모에서 오르는
현금의 길은 AS-257지방도가 거의 유일하다.
해안에 길이 있기는 하나 위험한 암석지대와 뿐따(Punta/곶)로 인해 단절되는 듯.
차량의 왕래가 뜸하며 부분적이나마 갖길도 있어서 보행자가 긴장하지 않고 다닐 만한 도로다.
걸을 수록 해안으로부터 높이 올라감으로서 시야가 넓어지고 경관이 많이 확보되어 힘들거나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길이다.
노르떼 길에서 걷고 싶은 길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이 길을 택하겠다.
라스뜨레스(Lastres) 마을의 초입(해발30m쯤?)에 전망대(Punta del Caballo)가 있다.
주행중 잠시 주차, 전망하고 가라(?)는 편의시설(승용차2~3대 주차공간과 벤치)이다.
주차 공간이 없는 것 말고는 마을로 진입하기 까지의 AS-257도로변 전체가 전망대지만.
거미줄 같이 뻗은 마을길들도 건물에 가려진 지역 외에는 모두 일품 전망대다.
스페인 공식어는 야스뜨레스(Llastres)인 라스뜨레스(아스뚜리아스 지방어)는 아스뚜리아스
주의 지자체에 속한 꼴룽가의 마을이며 13개 교구마을 중 하나다.
하얀 벽에 붉은 지붕의 2~3층 건물들이 해안가 해발30m에서 고도80m의 경사면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마을.
아름답고 독특한 이 단지(마을)가 1992년 5월 7일에 스페인의 BIC(Bien de Interes Cultural/
관심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단다.(Categoria de Conjunto Historico/역사지구 분야)
마을 중심부를 돌고 돌아가는 AS-257도로를 따라가다가 한 건물벽에서 희미한 노란화살표와
가리비를 또 발견함으로서 까미노 레알에 대한 내 확신이 요지부동해졌다.
라스뜨레스의 세요(sello/stamp)야말로 다른 어느 것 보다 더 의미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마을
사무소를 찾고 있는데 업은 아이 삼년 찾기 였는가.
바로 옆에 두고 묻고 있었으니.
정상부에서 내려다보면 건물집단과 항구(Puerto de Lastres)의 경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농.어업이 기반인 마을에 신 성장산업인 관광업이 가세해 생동감을 느끼게 한단다.
세요를 찍어주며 마을 홍보에 열 올리는 여직원과 달리 마요르(Mayor)는 향토사에 무지한가.
꼴룽가 다운 타운으로 가야 하는데 잘못 들었다며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음은 물론 연민하는
표정이던 그가 인터넷 검색으로 깨달았나.
귀중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그랴시아스를 연발하고 지도까지 출력해 주었다.
거의 정상부의 산따 마리아 데 사바다 교회(Iglesia de Sta. Maaria de Sabada)에도 들렀다.
18c에 신축했으며 19c말에 타워를 보축했다는 교구교회로 라스뜨레스의 BIC에 포함된단다.
도로에서 1블록 떨어져 있음에도 여직원의 자랑이 작용했기 때문인데 과연 허언이 아니다.
조금 더 떨어져 있는 산 로께 예배당(Ermita de San Roque)은 더 상급 전망대라는데 접었다.
본분의 일탈에 제동을 걸어야 할 지경이 되었으니까.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 꼴을 면하려면 이렇게 하고 바로 길떠나야 했다.
라스뜨레스 이후의 해안길은 극히 부분적으로는 가능하나 전체적으로 히혼 한하고 막힌다.
내륙 길이 불가피하며 현 노르떼 길과의 결합이 용이한 지점은 세브라유(Sebrayu)다.
아스뚜리아스 지방도로(AS-257)가 끝나는 지점에서 국도(N-632)를 통해 접근하면 되는데 두
길이 모두 라 이슬라를 기준으로 15km 안팎이다.
꼴룽가 다운타운에서 10km, 라스뜨레스는 중간점인 AS-257지방도를 따라서 이 도로의 종점
이며 A-8고속도로(E-70/Autovia del Cantabrico)와 만나는 지점까지 갔다.
라스뜨레스에서 5km쯤 되는 왕복 각1차선 도로다.
해안지대에서 해발100m 이상이면 고지대인데 110m가 넘는 지역이라 시야는 탁 트이었지만
유칼립투스 등 일부 장신 숲 외에는 평범한 농. 목장지대를 관통하는 길이다.
라스뜨레스와 종점의 중간쯤에 미려하게 꾸민 임간(林間)학교가 있다.
독특한 정문의 이마에 붙어있는 교명은 'IES Luces'
'IES'는 IInstituto de Educacion Secundaria(인스띠뚜또 데 에두꺄씨온 세꾼다리아/중학교/
Institute of Secondary Education)의 약자로 '루쎄스 중학교'일 것이다.
루세스는 구역은 넓으나 작은 마을로 라스뜨레스와 한 마을 처럼 되어 있으며 두 마을을 합한
인구가 2.000명도 못 되는데 공터가 많은 동네 주변을 두고 왜 멀리 떨어진 여기에 학교를?
스페인의 중등교육(Educacion Secundaria)적령기는 12~16세라는데 학생수가 얼마나 될까.
2005~2010년의 스페인인 평균수명이 80.9세였으므로 적령기 5년의 인구는 125명이다.
그러므로 적령기 인구 100%가 중학교 학생이라 해도 125명인데 이같은 시설이 필요했을까.
우리나라 지방학교들이 학생수 부족으로 인해 폐교, 타 용도로 전용되고 있는 것 처럼 이 시설
역시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경우, 백두대간과 심산, 강원도 산간벽지 등 외에는 길에서 사람 만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으나 땅이 넓은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에서는 온 종일 사람 구경 못하기 일쑤다.
(포르뚜갈은 한반도와 비슷하지만)
나는 평생의 대부분을 홀로 걸은데다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 길을 역(逆)코스로 걸을 때 온갖
체험으로 단련되고 적응됨으로서 홀로 걷는 것이 내게는 되레 행운에 해당된다.
오늘 이 길이 그런 경우다.
두 루트의 비교와 판단은 유보할 수 밖에 없지만
아스뚜리아스 지방도(AS-257)를 받아 고속도로를 건너가는 고가도로는 N-632국도다.
고속도로 양 주변에 로터리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표지판을 잘 살펴야 한다.
국도의 상태는 아스뚜리아스 지방도에 비해 나을 것 없으며 차량의 통행도 비슷하게 적어서
이따금 있는 병행 소로를 이용하는 것 외에는 국도(N-632)를 따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침의 우엘가와 라스뜨레스에서 보낸 시간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국도가 고속도로를 건너면 꼴룽가의 까스띠에요 데 루에(Castiello de Lue)다.
다음 마을은 또 하나의 까스띠에요인데 지자체가 꼴룽가에서 비야비씨오사로 바뀐 마을이다.
고속도로와 나란히 가던 국도는 고속도로 위로 난 다리를 건너 교구마을 셀로리오(elorio)의
자연마을인 바르사나(Barzana)를 지난다.
현재의 노르떼 길로 진출하려면 바르사나 입구에서 국도를 떠나야 한다.
센다를 따라서 전형적인 농촌마을 세브라요(Sebrayo)로.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국도를 따랐다.
조금 전까지의 생각을 바꾼 것이다.
약간 더 돌아가지만 비야비씨오사 입구까지 더 독자적이고 싶어서.
비야비씨오사가 3k 남았다는 안내판이 비로소 마음을 여유롭게 할 때 내 기분을 고양시키려는
듯 달리는 어느 자전거 순례팀이 부엔 까미노를 외쳤다.
무슬레라(Muslera)를 지나 로터리에서 마침내 세브라요를 거쳐 온 노르떼 길과 합류했다.
국도로 들어서는 몇명의 낯선 얼굴들.
3km 내외를 더 걸어온 내가 현 시점에서는 이단인데도 그들이 N-632국도(내가 걷고 있는)에
들어옴으로서 마치 내가 그들을 수용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보다, 7시간 가량의 반동이 무사히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옴으로서 성취감을 갖게 되었다는
뿌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꼴룽가 ~세브라요 길을 걸어보지 않았으므로 까미노를 왜 옮겼는지 두 루트의 비교와 판단은
유보할 수 밖에 없지만.
반동과 긴장의 하루를 끝낼 비야비씨오사를 향해 마지막 스퍼트(spurt)가 시작되었다 싶었을
때 시드라 엘 가이떼로(Sidra El Gaitero)를 지났다.
긴 직선로 국도변에 자리한 거대한 시드라 공장이다.
19c 말(1990년대?)에 사이다 공장으로 출발해 세계적인 상표가 되었으며 근래에는 사과즙을
비롯하여 무알콜 음료수와 음식류를 생산하고 있단다.
최근에는 자회사를 통해 와인류와 독한 술도 생산하고.
3시 방향으로 비야비씨오사 강 하구(Ria de villaviciosa)로 흘러드는 강물이 꿈틀거린다.
고가고속도로 밑으로 난 국도를 따라 전진하면 비야비씨오사다.
13c에 레온의 왕 알폰소 10세(Alfonso X/1221~1284)가 세웠다는 마을이다.
아스뚜리아스 주에서 인구가 6천명에 육박하는 큰 지자체의 중심 타운이다.
41개의 교구 마을 전체의 인구는 15.000여명이란다.
동구에는 마을지기 장승이 눈을 부릅뜨고 서있다.
노르떼 길은 장승 앞 국도에서 갈리는 샛길이라고 까미노마커가 안내하고 있다.
국도의 개설과 타운의 발전 전에는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지만 지금도 굳이 그 길을
고집해야 하는지.
의미 없는 까미노마커(yellow Arrow) 따라 가는 까미노는 오늘만은 무의미할 것이다.
처음부터 깡그리 외면당한 것들일 뿐 아니라 까미노를 통째로 무시한 하루의 마지막에 마커에
예민하다니 심한 모순 아닌가.
샛길을 흡수한 국도를 따라서 도심(시청/Ayuntamiento de Villaviciosa)으로 가는데 왼쪽 소
공원(Parque Ballina)의 검은 조형물(Monumento a la Manzana)이 시선을 끌었다.
조각가 우르쿨로(Eduardo Urculo/1938~2003)의 작품으로 이 마을의 상징물인 '사과'라는데
왜 검은 사과?
또한 사과가 마을의 주 산품으로 대규모 시드라공장(sidra는 사이다 외에 사과즙의 뜻도 있다)
이 있고 사과 길(Calle de Manzana)이 있을 만큼 사랑받는 사과가 왜 사과 거리에 있지 않고?
4.25€로 4명을 행복하게 하는 밀라그로
대형 타운인데도 알베르게가 없는 비야비씨오사.
잠자리 만들 만한 장소를 물색해야 하는 시점이라 공원과 처마 넓은 건물을 살피며 걸었는데
시청사 코 앞까지 갔다.
검은 사과 조형물에서 100m도 못되는 지점에 자리한 음식점(Rice Cafeteria)의 옥외식탁에서
각기 비노(wine)와 쎄르베사(cerbeza/맥주)를 마시던 3명의 초로남이 합창하듯 나를 불렀다.
시니어 킴.(Senior Kim)
나는 그들을 모르는데 나를 알고 있는 그들.
아마도, 구에메스 알베르게의 100여명 중에 포함되었던 그들이었나.
최고 연장자 킴으로 소개되기는 그 곳과 산따 끄루스 데 베사나 알베르게 뿐이었는데 후자는
20명 미만이라 모두 낯익은 사람들이니까.
여러날 만의 재회지만 지기의 해후인 듯 반가워하며 자리를 만들어주고 자기네 이름으로(자기
네가 산다는 뜻) 생맥주를 주문해 주며 늙은이의 그간의 경위를 듣고 싶어했다.
그들은 알라인(Alain Hebert), 디디에르(Didier Chin) 등 가나다 꿰백 주(Québec) 출신 2명과
영국인(이름 적은 수첩을 도둑맞았음) 등이다.
시니어 킴이 도중에 접고 귀국할 줄로 생각했는데 다시 만났을 뿐 아니라 6개월 4.000km 여정
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면서도 즉석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 있었다.
오늘(5월 27일/스페인의 시간으로는 5월 26일)이 알라인의 61회 생일이란다.
밤에 생일 축하 파티를 가지려 하는데 시니어도 함께 해달라는 것.
천막집 짓는 문제가 걸리기는 했으나 파티가 끝난 후에도 가능하므로 흔쾌히 동의했다.
그 사이에 40대 말의 알레만(Angela Plate/女)이 당도했다.
그들 사이는 이미 익힌 안면인 듯 그녀도 기꺼이 응해서 우리는 5명이 되었다.
내 문제도 쉽게 해결되었다.
그들이 묵는 오스딸의 2인용 방(twin bed)값이 20€인데 혼자인 알라인의 방을 이용하면 각기
10€를 부담하므로 내 룰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그들도 내 룰을 기억하고 있다니)
나 때문에 잠을 설치게 될 알라인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내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그가 적극
적으로 원한 일이라(그의 부담도 반으로 줄어드니까) 우리는 알라인의 방으로 갔다.
가까운 곳,시청 옆에 있는 오스딸(Hostal)은 시드레리아 레스따우렝떼 엘 꽁그레소 데 벤하민
(Sidreria Restaurente El Congreso de Benjamin).
오스삐딸레라로부터 각자 키를 받고 짐을 풀고 샤워도 한 후 내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약속시간 7시까지 시내를 돌아보고 생일 선물도 사려고.
노르떼 길의 마을 출구를 확인하고 산따 마리아 데 라 올리바 교회(Iglesia de Sta. Maria de
la Oliva)를 돌아보았다.
13c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건물로 비야비씨오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란다.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19시가 되어 가는데 스페인 가게가 문을 열고 있을리 없고 죽국인 가게다.
백팩에 달아줄 녹슬지 않는 비철금속 십자가(Trinity)를 샀다.
4사람 모두에게도 줄 작은 자물쇠(lock)도.
장식용으로 백팩에 달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할 수도 있는 것으로.
산따 끄루스 데 베사나에서 가진 프랑세사의 생일처럼 요란하지 않고 조촐한 생일 파티였다.
가나다인이지만 프랑스령 출신이라 영어가 시원치 않고 알레만녀도, 늙은 꼬레아노도 그렇고
영어는 브리티시(British) 독무대였으나 아무도 불편하지 않았다.
분위기의 고조에 불을 붙인 것은 단연 내 선물이었다.
늦게 알았지만 주인공(알레만)은 크리스천이 아닌데도(라마교) 감동을 먹은 듯 했고 자물쇠를
받은 모두도 그랬다.
4.25€로 4명을 행복하게 하는 마히아(magia/요술)
밀라그로(milagro/기적)가 별건가 나도 흐뭇했다.
특히 작은 키(key)로 자물쇠를 열고 잠그며 내 닉네임(nickname)이 'key'라고 소개하자 모두
환호했다.(나는 이름 끝자 '기'의 영어 표기를 'key'로 하고 있다)
게다가 예수의 천국 열쇠 이야기를 했을 때는 절정에 올랐다.
"I will give you the keys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whatever you bind on earth wi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will be loosed in heaven"
(내가 네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메면 하늘에도 메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가장 많이 감동먹은 사람은 영국인.
암기하고 있을 뿐인데, 그렇다 해도 81세 시니어가 그렇게 말하다니 엄청난 일이라는 것.
더구나 생일 축하한다면서도 모두가 빈 손이니 더 돋보일 수 밖에.
잘 마치는 듯 했던 생일 파티는 막판에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내일 구긴에 높은 고개가(alto) 있기 때문에 버스로 이동하겠다니 흥이 깨져버릴 수 밖에.
알라인이 내 기분을 눈치챈 듯 숙소로 돌아온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이미 약속된 내일 이후에는 자기도 진지하겠다고.
아래 글은 다음날 내 핸드폰에 와 있는 그의 메시지다.
"This is an honor for me Kim.You are an example for me.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계 속
라스뜨레스의 임간학교 IES Luuces(위)와 비야비씨오사의 숙소 시드레리아 레스따우렝떼 엘 꽁그레소 데 벤하민(아래)
비야비씨오사 시청 앞(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