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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 아래 썩어 들어가는 족질로 재위 13개월 만에, 조선 27 왕 가운데 단종을 제외한 가장 젊은 나이인 20세에 급서
조선 8대왕 예종(1450~1469: 휘는 황)은 세조의 차남으로 20세에 죽은 형 의경 세자를 대신하여 19세에 등극한 후 13개월 만에 사망했다. 결국 세조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 모두를 나이 스물에 잃었지만 ‘다행히’ 둘째 아들이 죽기 1년 먼저 자신이 세상을 떠났다. 예종은 8세 때부터 세자가 되어 만 11년간 정치 수업을 받았던 것인데 그 말은 맏이인 의경 세자가 20세 때 예종이 8세였고, 예종은 이때부터 발병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예종은 성년이 되기 전에 즉위한데다 무엇보다 건강 상태가 나빴다. 정비 2명, 후궁 2명에게서 적자 3명, 적녀 2명의 총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 중 정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큰 딸로 16세 때 다섯 살 어린 예종과 혼인하여 산후 3일 만에 산후후유증으로 17세에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태어난 예종의 아들(인성대군) 또한 3세 때 돌림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예종은 세자시절 사냥을 즐겨서 아버지 세조와 자주 사냥을 다녔다고 하지만 혈액 순환에 문제가 있었던 그에게는 아무래도 무리한 활동이었을 것이다. 건강은 즉위 후 급속히 악화됐다. 예종의 성정은 아버지 세조를 닮아 강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으나 강한 기질도 육체적 질병 앞에는 허물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종의 직접적 사인은 족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예종은 즉위 원년 정초부터 산에 올라 족질 완치를 위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족질은 각기병이라고도 하며 속된 말로 발목 아래가 썩어 들어가는 병이다. 7, 8세 무렵부터 창진(온몸에 부스럼이 나는 병)으로 발의 살갗이 헐고 상하기를 반복했다고 하는데 추위가 닥치면 증상이 더 심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예종 1년 11월 28일에 병이 위중해 지면서 2일만에 급서하고 만다. 조선 27명의 왕 가운데 폐위되어 교살된 단종을 제외하고 가장 젊은 나이에 비운을 맞았던 것이다. 세조의 예종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 때 같은 큰 아들을 어이없이 잃었으니 둘째 아들이 병에 걸리자 소금에 절인 채소로만 밥상을 차리라고 명했을 정도다. 이는 창진에 해로운 음식을 일체 상에 올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세조는 세자 시절 예종에게 금기 음식을 적은 패를 늘 차고 다니도록 했는데, “사람의 기력과 하늘의 명은 믿을 수 없다. 하지 않으려 해도 되는 것이 명이요, 믿고서 보전하는 것이 명이요, 방탕해서 잃을 것도 명이다. 그러나 믿지 못할 것이라도 힘써 노력하면 지켜낼 수가 있다.”고 병약한 아들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런가 하면 세조는 큰 아들이 술을 좋아해서 요절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가졌던 탓에 예종에게는 철저히 금주를 시켰다. 그것이 또 예종에게는 반감으로 작용하여 아버지 세조가 죽자 그간 억눌렸던 음주 욕구가 폭음으로 이어져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이다. 직접적 사인인 족질은 술과는 상극인 병이었던 것을 그는 정녕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운명적으로 아버지 세조가 뿌린 죄업을 아들이 거둔 결과였을까. 예종의 질환을 현대의학적으로 검증해보면 그 참상이 보다 심각하다. 위독한 증상이 시작된 후 2일 만에 사망했음에도 염습을 할 때 시신이 이미 변색되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추론하자면 사망 당시 예종은 종아리 아래뿐 아니라 신체 대부분의 동맥에 염증이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결절성 동맥염이라는 일종의 희귀병을 앓았던 것인데 폐를 제외한 모든 기관과 장기 등에 분포된 일체의 동맥이 염증으로 인한 괴사를 일으키는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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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만약 지금이라면 어처구니없는 죽음일수도...
그렇지요. 종기로 죽은 왕이 가장 많고요. 우리는 왕보다 더 혜택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데도 불만이 넘 많아요.^^
예종은 워낙 존재감이없는분으로만 알고있었는데...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과 이별을하셨군요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