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문인 성진호(成瑨鎬) 그는 누구였던가 ?
광무 2년 4월 18일생 성재조(成載朝)와 주창조(朱昌朝)의 4남으로 태어났다.
이 기록은 그의 호적에 쓰여 있지만 오류이다. 광무 2년이면 1898년생인데, 호적에는 ()표 안에 명치 43년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면 이것은 분명 오류이고 잘못 기록된 것을 후에 정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진호의 출생년도는 명치 43년(1910년)생이다.
조선총독부재판소 소화8년 형공 제231호에 보면 그의 본적은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면 예산리 27번지이면 직업은 동아일보기자이고 소화2년(1927년) 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여 가정 사정으로 1학년 때 중퇴하고, 예산읍내 금오인쇄소에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29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기자(1929.6.13-1932.5.6)를 거쳐 중외일보 조선일보 예산지국장을 지내게 된다.
1932년 4월 28일 성진호는 무정부결사 사건으로 검거되는데, 이미 동년대의 신문에서는 신간회와 무정부의 검거가 전국적으로 진행 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아산 경찰서는 경성과 당진 예산 지역의 아니키스트 수십명을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모두 혐의가 없는 것으로 석방되었으나, 성진호만 보안법위반의 죄명으로 공주검사국에 송치되고,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자유연합신문 사건에 (‘無産者新聞, 讀賣新聞, 朝鮮日報, 보라 元山의 革命的 勞動者의 英雄的 鬪爭을, 福井新聞, 大阪每日新聞, 東京日日新聞, 自由聯合新聞, 東京 朝鮮勞動組合 南部支部 鬪爭 뉴스, 東京朝日新聞, 報知新聞, 國民新聞, 時事新報, 인터내셔널, 農民의 隊伍에, 現階段, 飢餓와 迫害中에 第十週年 民族解放데이를 맞아, 第十一回 民族解放데이를 맞아 朝鮮 被壓迫民衆에게 檄함, 社會主義, 黑戰, 黑色靑年, 나가자, 政治批判, 無産者自由大學, 全國勞動者는 猛起하여 元山爭議를 勝利로, 全國的 勞動者는 總罷業으로 元山爭議를 死守하자, 우리의 勝利는 最后의 一人 一刻까지, (在日本 東京 朝鮮人團體協議會)檄文, 自由靑年, 三一新報, 全朝鮮 苦學生 諸君에게, 露西亞無政府主義運動小史, 勞動農民新聞, 붉은 별(赤星), 레닌主義 初步, 勞農新聞支局 設置에 관한 通文’-문서제목 密送刊行物 取締에 관한 건 문서번호 朝圖秘 제1847호, 발송자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연류 시켜 형을 받게 된다. 이것은 성진호가 당시의 강봉주가 주축이 되었던 예산 공립농업학교 학생 비밀결사사건[지수걸(공주대역사교유과), 충남예산공립농업학교 학생비밀결사 조직사건에 대한 고찰]에 있어 좌익토론와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이후 토요회라 칭함)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지지 찬동적 기사를 싣게 되면서 부터이다. 위 기사에서 성진호는 토요회를 예청토론회라 칭하였다.
성진호의 판결문에는 “공산주의 서적을 소지하였고, 일본 공산주의와 연계하여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하였으며, 흑기사건의 활동 인물로 자백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예청토론회에 참석하여 무정부주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토론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성진호의 체포가 체포되었던 시기의 동아일보(1932,9,27)일자 신문에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록되었으며 이듬해 동아일보(1933.1.14)에는 일본공산당 잡지 전기를 구입하여 적색사상을 선전한 혐의라고 되었다. 예산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은 학생권공산주의 운동과 비학생권 공산주의 공조에서 성진호 사건을 정점으로 하여 이후 학생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32년 11월 만경좌 사건을 계기로 예산공립학교의 공산주의 비밀결사사건은 극에 달하게 되고 1932년 12월 9명의 학생들이 체포되면서 서서히 그 불길이 잦아들게 된다.
성진호는 1920년대 이후에 공산주의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아나키스트 활동을 전개한 김화산의 문학적 경향을 쫓아 아나키스트 문학에 선봉으로 예산지역에서 뿐 아니라 박열을 중심으로 했던 흑우회에도 관여하였을 것이다. 예산지역에서는 신언상, 장자익 (예산면 신례원리)가 관서흑우회 단원으로 기록 되어지지만, 성진호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단주 유림의 작고동지추도사에서 거론 것으로 보아 이에 깊숙히 관여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채호, 유자명, 박열, 유림, 하기락은 아나키스트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민족 지도자들은 표출할 수 없는 자유와 민족 해방을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게 하였으며, 직간접적으로 뜻을 같이 했다. 예산지역에서도 시대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지몽매의 민중을 깨어나게 하여야 한다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예산지역 당시의 문인들 중 이규홍, 이해문, 조영하, 윤병구, 유진훈, 이명우, 성원경, 최옥진 등은 자신들이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할지라고 뜻을 같이 했으며,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또한 덕산지역에서 농촌 계몽운동을 벌이고 있었던 윤봉길과도 긴밀한 관계를 지녔을 것이다.
또, 예산농업학교를 중심으로 이뤄졌던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 (강봉주, 한정희, 정종호, 박희남, 박정순)과도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적극적인 방법으로 활동했던 공산주의학생동맹과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33년 1년 4개월을 끌어오던 성진호의 재판은 징역 2년에 집해유예 5형을 받고 석방되어 집에서 요양 중 1933년 8월 11일 급성장결핵으로 경성제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던 중 8월 28일 오전 3시 사망하여 예산 감리교회당에서 장례를 지내고 29일 신양면 대덕리에 묻히게 된다. 당시의 많은 문인들과 지인들이 참석하였으며 일년 후배이면서 친구이자 문우였던 이해문은 조시를 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또한 단주 유림선생은 「작고동지추도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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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사건에 연좌하셨다가 다시 진우연맹사건으로 전후 7년간 복역중 병을 얻어 출옥 후 돌아가신 서동성 동지의 영령이시여!
흑기사건으로 1933년 공주감옥에서 돌아가신 성진호 동지의 영령이시여!
흑우연맹원으로서 적지 일본경시청에서 고문으로 돌아가신 오치섭동지의 영령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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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들의 싸움은 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선열동지 제위의 영령이시여! 기뻐하소서. 우리들의 원수 일제는 마침내 패망하고 이 땅에서 물러갔습니다. 목숨바쳐 싸우신 동지들의 보람 헛되지 않아 이제 조국의 광복은 약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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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이 온양경찰서에서 대전으로 이송되었다가 공주로 옮겨다니며 갖은 고초를 겪는 동안 급격한 체력저하로 인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젊은 지성인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슬퍼하였다.
성진호는 1926년 최덕옥과 결혼하였다. 성진호의 호적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이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후손들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성진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며 예산의 성씨 종친회에서도 그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더 이상의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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