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학대학교 초대 교장은 이자익 목사였다. 그는 김제 최고 갑부 조덕삼 장로의 머슴이었다.전라도 지역에 선교하던 최의덕 선교사(L.B.Tate)는 김제지역의 거부 조덕삼을 만나 전도를 했다.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조덕삼(1867~1919)은 41살이었고, 그의 집 머슴인 이자익(1882~1961)은 26살이었다. 17살 때부터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은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하고 함께 신앙생활도 했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곧 이어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다. 조덕삼은 김제의 최고 갑부였기에,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1907년 금산교회에 장로 선거가 있었다.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최종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동네 많은 사람들이 조덕삼의 집에 머슴살이를 했었고 나이도 조덕삼이 15살 많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은 경상도 마산 출신으로 외지인이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의외였다.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분을 뛰어넘고, 지역 차별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모두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할 때 조덕삼 영수는 일어나서 말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주일이 되면, 머슴 이자익은 교회에서 설교하고 주인 조덕삼은 마룻바닥에 앉아서 설교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조덕삼은 주인이고 이자익은 머슴이 되었다. 그 다음 해에 조덕삼도 이자익에 이어 장로가 되었다. 그 후 주인 조덕삼은 선교사와 의논을 하여 모든 비용을 부담하면서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그리고 이자익이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자 조덕삼은 이자익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 목사 기념관 현판식을 하게 되었다. 조덕삼 장로의 손자인 조세형 장로(언론인, 국회의원, 주일대사 역임)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인 이규완 장로(고분자화학의 대가)가 함께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이규완 장로가 인사말을 한 후, 조세형 장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90도로 굽혀 절하면서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만약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나지 못하셨다면 오늘 우리들도 없고, 할아버지도 안 계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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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집니다. 이익에 따른 만남이 다르고 필요에 따른 만남이 다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어떤 만남이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좋은 만남은 상생의 관계를 이끄는 만남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