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 세계 최고의 지성이며 영국의 저명한 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라고 명명했다. 지금 막 장막을 내리게 되는 현생인류의 100년 기간은 총력전과 세계혁명의 여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공황의 경제적 심연속으로의 추락과 자유주의 몰락의 일반적 위기의 벼랑에서 인간 가치와 존엄에 도전하는 팟시스트 살육을 자유 진보의 공동 대응으로 지켜 낼 수 있었으나 제국이 종식되고야 마는 20세기 전반기를 일단 넘기고, 다시 인간과 민족과 계급이 새로운 세계 창조의 지향성에서 냉전적 동서 대립과 빈부의 남북대립의 불균등 불균형을 돌파해내며, 생산력과 기술진보속에서 사회혁명과 문화혁명을 전진시킬 수 있었던, 그러나 선진 블록의 축적구조의 위기와 제3세계 혁명 그리고 현실사회주의의 종식의 굴곡을 경과하면서, 이른바 세계체제속에서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독주자로 군림하는 초강자 (수퍼 파우어)에게 인류사회를 더 이상 정글의 법칙으로 방치해 놓을 수 없는 후반기 20세기 경과의 종착역에 다달아 새로운 천년의 인간의 생존법과 인류의 생활규범을 찾아야 하는 「파괴와 황금의 시대와 산사태」의 대장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를 관통하는 인간 사고와 행동의 특징이 「극단」으로 표상되었고 그것은 다음 세기에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구시대의 악폐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에릭 홉스봄의 시대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竹山 조봉암은 이와 같은 극단의 시대가 막을 올리는 1899년 9월 25일 제국주의의 침략적 극단 세력이 한반도 상륙의 첫발을 닫던 강화도에서 반식민지 봉건사회의 빈곤의 극단점인 빈농가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러나 竹山의 자전적 기록 「내가 걸어온 길」(1957년 희망 2, 3, 5월호)과 「나의 정치백서 -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신태양 1957년 5월호 별책)에서 준별해 낼 수 있는 竹山의 내면세계는 자유와 평화, 사랑과 연민의 끝없는 확장과 그것의 인간적 실천의 승화였다. 인간 심성과 덕성 형성의 유년시절 가족사의 회고를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 우리 집은 구차스럽기는 해도 평화스러웠다. 어머니는 좀 사나우신 편이지만 아버지께서는 거의 절대적인 평화주의자이셨다. 그저 착하기만 하셔서 집안 사람에게나 동리 사람에게나 도무지 남과 시비를 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그 덕분으로 나는 자유로운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자랐다. 집안 살림이 가난하기는 해도 마음에 구김살 없이 의젓하게 자랐다. 4년제 소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마치고는 공부할 것은 단념해 버리고 열네 살부터 직업을 구하러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6년제 학교하고 다니기는 했는데 성적은 결코 양호한 편이 아니었다. 아침에 책보를 들고 학교를 가서 책보를 펼쳐 놨다가 하학해서 책보를 싸들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는 책보를 펴보지도 않고, 그 이튿날 책보를 그대로 들고 학교로 간다. 나는 6년 동안에 몇 번쯤 우리 형님에게 붙들려 머리를 쥐어 박히면서 몇 십분씩 무엇을 좀 읽어본 것 이외에는 복습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성적이 양호하지 못한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늘 아주 꼴찌는 면했다. 공부하는 성적은 그러하나 장난꾼으로서는 실력은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학교 유리창이 깨지면 조봉암을 부르고 어디서나 학생이 울고 있으면 조봉암을 불렀다. 형세가 이쯤 되고 보니 동리아이들의 머리가 터져도 먼저 봉암이를 부르게 되고, 동리 장독이 깨어져도 먼저 봉암이를 찾겠금 되었다.
먼저 말씀드린 것 같이 우리 아버지께서 나에게 대해서 전연 불간섭주의시니까 꾸중을 듣는 일도 없지만 어머니께서는 나를 몹시 사랑하긴 하셨어도 입에서 꾸중하는 말씀이 떠날 새가 없으셨고 부지깽이를 들고 대문 밖가지 쫓아나오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봉암이가 우리 애 머리를 깨었소, 우리 집 돌담을 허물었소, 우리 애 옷을 찢었소 하고 동리 여인들이 날마다 백활을 하게 되니 우리 어머니는 집집에 찾아다니며 사과를 하고 큰 것은 배상을 해 주어야 되고, 작은 것은 고쳐 주어야 되었으니 역정이 안 나실 수가 없고, 꾸지람이 아니 나실 수가 없으셨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두려워하지 아니했다. 꾸중을 하시면 다소곳이 듣고 자막대기로 좀 치실 때는 엄살을 해 맞기도 하지만 부지깽이로 단단히 치실 듯하면 밖으로 튀어 나갔다가 한 두시간 뒤에 슬금슬금 어머니 눈치를 보면서 집안으로 들어가면 그동안에 모든 것을 다 잊으신 듯이 부지깽이도 안 들으시고 꾸지람도 안하시고 밥때면 밥상을 놓아주시고 잘 때면 이부자리를 보아주시는 우리 어머니였다.
그러나 우리 형님은 무서웠다. 자기 사정이 바빠서 집안 일은 잘 모르지만 내 장난이 심해서 어머니께서 몹시 걱정을 하시고 고생을 하신다는 것쯤은 물론 잘 아는 터이고, 또 공부라고는 도무지 안한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는 까닭에 언제든지 나를 만나기만 하면 몹시 꾸짖기도 하고 가끔 두들겨 패기도 했다. 하루는 내가 장난질 하다가 왼 팔을 삐어서 끈으로 팔을 둘러매고 있을 때 형님을 만났다. 우리 형님은 그렇지 않아도 좀 때려 줄 일이 있었던 판에 또 무슨 못된 장난을 쳐서 팔까지 매고 있는 내 꼴을 보니, 더욱 미움이 북받쳐서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한다. 나는 형세가 급함을 직감하고 밖으로 뛰어 달아났다. 만약 얻어 맞기나 하면 또 모르겠는데 도망쳐 달아나는 것을 보니까 더울 미워서 사랑방 헛마루에 있던 고무래를 들어서 힘껏 던졌다. 그런데 그 고무래 자루가 마침 뛰어 달리고 있는 내 엉치뼈 끝에 맞았다. 어찌 아픈지 앞으로 꼭 고꾸라졌다가 다시 급히 일어나서 뛰었는데 뛰면서 보니까 지금까지 아파서 못견디던 왼팔이 거뜬해져서 두팔로 활개를 치며 달릴 수가 있었다. 위골이 된 것을 엄살을 부리고 맞추지 않고 있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뼈가 도로 들어 맞은 것이었다. 노여움이 상투 끝까지 올랐던 우리 형님도 이 꼴을 보고는 한참이나 껄껄되고 웃었다. 우리 형님은 내 장난이 심한 것을 미워했을 뿐 아니라, 내가 공부도 아니 하려니와 좀 바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또래의 누구누구를 가리키면서 그 애들은 머리가 좋고 무엇도 알고, 무엇도 잘 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하다고 나무라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그 애들이야말로 머리도 그리 좇지 못하고 무엇 잘 하는 것도 없는 패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형님이 내게 대해서 약간 인식이 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형님이 꾸짖고 대려도 한번도 항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형님이 내가 열여덟살 되던 해부터는 또 너무 과하게 그야말로 과대평가를 해가지고 세상에는 없는 동생같이 아끼고 사랑하기를 마치 늙은이가 막내를 사랑하듯 했었다. 그러던 그 형님이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지하에서나 이 장난꾼 동생의 회고담을 듣고 웃어 주실는지.........]
식민지 무단통치하 10대의 죽산의 성장은 거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가족적 온기속에서 싱싱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영글어 갔다. 식민지경제 기초작업으로서의 토지조사사업 시기 군청 사환고원으로 가계를 도우면서 토지대장 작성에 주산 재기와 능률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관료사회의 부당한 억압에 소년적 항거로 벌이를 그만두는 것을 마다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竹山 입신의 첫 사회적 선택이었다.
竹山에게 고향과 지역 공동체는 인간적 성장과 사상적 태동을 위한 넉넉한 보금자리였다. 竹山은 열살 때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 고원 일을 그만 두고는 기독교 예배청년회 일을 보면서 교회 일을 열성적으로 다루게 되어 교역자로부터의 신뢰를 받고 권사라고 불리움을 받았다. 실로 기독교 세계는 죽산의 사상적 개화의 첫 물고를 틔운 것으로 사랑과 포용, 화해와 협력, 대화와 설득, 평화와 낙관, 참을성과 결단 그리고 인간애, 인인애, 민족애를 내화(內化)할 수 있었던 심층적 계기가 된다. 竹山의 술회를 빌리면 「뒤의 일이지만 고학이라고 한다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서부터는 생활에 쪼들리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물이 들어서부터는 다시 교회를 잊어 버린 뒤에 오늘에 이르렀고」라든지, 신의주 감옥생활에서의 독서편력에서 「감옥안에서 비로서 사서삼경이란 것을 통독해 보았고 한시(韓詩)의 작법이니 한시가 어떤 것인가도 약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영어, 독어, 사회학 서적열람 금지로 입옥하자마자 독일어를 시작했는데 동화쯤은 원서를 그냥 읽을 수 있었고 신약성서는 여러번 공부를 한 셈인데 출옥해서 몇해 되니까 아주 깨끗이 잊어 버렸다」는 회고는 그가 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과는 매별되었으나 인생의 고난과 위기의 절정에서 자기를 추스리고 삶을 다시 도약하는 그의 인간 심성에 용해된 신앙 고백과 같은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59년 7월 31일, 그 전날의 재심기각이 있고서 하루만에 전격 법살을 당하게되는 집행 직전에 竹山은 목사에게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의 성경구절을 읽어 달라고 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의 죽을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내려서 놓으리라... 한데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이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竹山은 살아서 카이저의 것은 카이저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로 기독교 천리(天理)에 자기를 맡겼던 것이다. 竹山 인간론의 심층적 기초는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영글어 졌다고 할 수 있으며 복음적 메시지로 하여 따뜻해진 竹山의 심장은 이후 식민지 억압을 극복하는 민족사상, 인간존엄과 개성 발양의 자유사상, 개혁과 창조를 지향하는 진보 평등사상, 그리고 평화와 복지의 공동체의 이상론인 보다 전향적인 현대사상의 진화의 전과정과 그의 생의 마감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변증론이 전개되어간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竹山의 민족과 민중에게의 보시, 엄격한 자기관리와 도덕율의 지계, 일제의 물리적 폭력에 맞섰고 이승만 전제권력의 법살에 의연했던 인욕(사형선고 받은 조봉암이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 됐다. 무죄가 안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박사는 한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한다.」라는 생사를 초월한 초연 달관은 폭군 가리왕이 전생 석가를 활전신체할 때에 인욕함으로써 부처로 후생의 몸을 받은 아상(我相)을 버린 달관 비견된다.. 조국 광복을 위한 가장 역동적인 사상의 모색으로부터 해방 국면에서 신생독립의 올바른 방도와 건국과 민족통일 그리고 복지사회의 건설을 위한 가장 이상적이고도 가장 현실적인 사상의 진전에 투신한 정진, 그로부터 얻어내는 선정과 지혜의 6바라밀의 불교적 보살도의 체현은 어쩌면 竹山은 그를 배태시킨 유교적 사회관으로부터 기독교적 인생관을 넘어서 또 다른 초극의 단계로 지양한 무욕(無慾), 무소유(無所有)의 중도(中道)의 체현인지도 모른다. 竹山의 독립투쟁과 건국 혁신운동은 개인의 영욕을 넘어선 것이었으며 두차례에 걸친 대통령선거에의 출마도 민주주의 대본(大本)의 수호와 국민대중에의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개혁과 진보의 실천적 매진도 역사적 소명에 충실한, 그리하여 당대 뿐만 아니라 후세에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민족이 공멸하지 않는, 사회가 생명을 감싸않는 공동체적 보금자리로 되게하는 선지자의 살신성인의 굵은 족적이었다고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휴머니즘과 내쇼날리즘(인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궤적에서 영글어진 竹山의 사상은 철저한 개혁적 실천론이었으며 이상적 현실론이었다. 竹山의 사상의 성장단계는 제 1기 그의 20대인 1920년대, 제 2기 1930년대로부터 해방까지의 30대와 40대 전반, 제 3기 1945년 해방 이후로부터 민족의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40대 후반 50대의 기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竹山의 육체적 주검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민주주의와 개혁론 그리고 평화통일론으로 부활되어 전개되는 竹山사상가의 물활기(物活期)를 덧붙일 수가 있을 것이다. 제 1기는 竹山사상의 맹아기로써 청년적 역동성으로써 당시 시대상황의 요구에 부응하는 안티 테제로서의 사회주의 사상, 민족해방투쟁의 가장 적의한 수단으로서의 혁명적 실천론이었다. 제 2기는 竹山사상의 성숙과 심화기로서 혹자는 휴면기라고도 하나 죽산에게 있어서 정체와 나태는 그의 인생 사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제 3기는 정(正), 반(反)을 지양한 합일(合一)로서의 竹山사상의 완성기이며 그것은 건국 과정과 분단 지양의 통일과정 그리고 수구와 시폐를 혁파하는 새로운 공화제적 복지민주주의 민족공동체 사회모형의 실현을 위한 개혁적 실천론으로 전개되며 시대적 정합성과 사회적 보편 가치에 충실한 국민대중의 지지와 결집을 흡인해 내는 창조적 파괴력으로 역사의 순행을 거역하는 세력에게는 가히 전율적 공포로 되었던 것이다.
죽산의 유년기의 성자에 이어 죽산사상의 맹아와 성숙과정을 그의 인생 역정을 통하여 더 논구해 보기로 한다.
竹山이 강화에서 삼일운동에 연루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것은 청년기로의 전환점에서 민족의식 자각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출옥 이후 서울 YMCA 중학부에서 수학중 항일운동 거사에 연루되어 재차 평남경찰부에서의 1개월관 고문 고초는 청년 죽산으로서 하여금 민족감정과 애국열 이외의 다른 불순물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투지의 화신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竹山의 투지와 결의 그리고 대자적 의식은 외향적 인간 성장의 면모로서만 이해할 수 없다. 옥고의 저항과 자기 중심을 고추 잡는 노력과 의지는 참선 수행과 같은 내면적 단련법으로서 자아(自我)에의 인식과 인간 존엄에의 확신과 자긍에 도달 하게 된다. 우리는 3·1만세운동 경성감옥 고문과 평남경찰서 취조고문을 이겨내는 죽산의 면모에서 진아(眞我)를 지키며 자기 자신에의 엄격성과 타자의 반인간성을 굴복시키는 깨달은 사람(?者)의 실천상을 확인하게 된다. 「‥‥‥그때 옥중에서는 가끔 만세소동이 있었다. 외부에서 이 땅의 독립에 대한 무슨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든지 옥내에서 애국자들을 학대했다는 소문이 들린다든지 하면, 전 감옥이 떠들석하도록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방마다 만세를 부르는 소리를 지르고 감방문을 두들기고 야단이난다. 그런뒤에 으레 감방 안에서 몇사람씩 끌어내어서 여러 가지의 고문도 하고 마구 두들겨 패기도 한다. 나도 그 사건에 가끔 걸려들어서 매달리기도 하고, 두들겨 맞기도 했었다. 하루는 또 고함을 치고 만세를 부르고 문짝을 발길로 차고 날뛰다가 또 붙잡혀 나갔다. 나는 붙잡혀 나가면서도 기를 쓰고 만세를 불렀다. 놈들이 가죽띠로 마구 후려 갈기면 갈길수록 더 악을 써 가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니까 놈들은 독사같이 약이 바싹 올라가지고 발길로 차고 혁대로 갈기면서 '이놈의 자식 만세 한 번에 혁대 한번씩 해보자. 어느 편이 이기나 해보자' 한다. 그래서 나는 몹시 빨리 만세! 만세! 만세! 하고 한 삼십번 연속해 불러 댔더니 놈들도 기가 막혔든지 '참 알수 없는 자식이군' 하고는 때리는 경쟁은 그만 두었으나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기정한채로 콘크리트 바닥에서 하룻밤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무살이었다.」「‥‥‥그때 편안도에서 제일간다는 형사 나까무라(中村)라는 놈이 담당이 되어서 날마다 고문을 하는데 '이 새끼 여기가 어디인 줄 아나, 평양경찰서다. 대동강 돌맹이도 여기에 들어오면 바들바들해 진다. 취조받다가 뒤진 새끼사 얼만지 알아. 이 새끼!' 욕지꺼리도 어찌 그리 많은지 한국인인 나도 모를 욕이 수두룩했다. 비행기를 태운다고 해서 두 팔을 뒤로 묶고서 그 묶은 두 손목을 끈으로 매어서 천장으로 끌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 옛날 말로는 주릿대 방망이에 학춤을 춘다는 것이고, 또 둥근 의자에 눕혀놓고 혁대 혹은 검도용 죽도로 마구 두들겨 패고 벌거 벗겨진 궁둥이를 밤뱃불로 바싹바싹지지기도 했다. 견디다 못해 기절을 하면 냉수를 이마로부터 뒤집어 씌운다. 그러면 사오분 후에 다시 소생한다. 기절했다가 냉수를 뒤집어 쓰고, 다시 제 정시ㅐㄴ이 돌아설 때처럼 서글픈 일은 없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때에 눈물짓지 않을 수가 없다. 고문을 당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같은 소감일 것이다. 별짓을 다 하던 나가무라란 놈은 나중에는 나를 유도장으로 끌고가더니 다짜고짜로 수십차례 메쳐 꼬났다. '고시나게'라는 것이다. 하도 여러 번 똑같은 방법으로 둘러 메치니까 쓰러질 때에 좀 덜 상하고 덜 아프게 쓰러지려고 정신도 차리고 방법도 생각해 보았다. 차차 꾀가 늘어서 아무리 동댕이를 쳐도 그저 나무 토막처럼 넘어가지는 않고, 머리고 다리고 두 팔로 몸뚱이를 어느 정도 보호하게끔 되었다. 제 몸이 지치지 땀이 흐른 뒤에야 그 놈은 나를 붙잡고 앉혀놓고 다시 따지기 시작한다. '이 새끼야, 맛이 어떠니? 그래도 말을 않겠냐?' 하며 뺨을 치기도 하고 가죽띠로 후려갈기기도 한다. 하도 여러번 맞다가 한번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나도 유도라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줄은 몰랐소.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나는 당신 덕분에 유도 초단쯤은 될 것 같소,' 그랬더니 그 놈이 껄걸 웃으면서 '참 할 수 없는 새끼로군!' 하더니만 그 후로는 유도장으로는 끌고 가지 않았다. 그 후에 수차의 감옥살이, 수십차의 유치장 살이를 해보았지만 평양때보다 더 어려운 고비는 별로 없었다.」竹山은 폭력에 파괴되지 않았다. 竹山은 불의(不義)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竹山은 인간이 인간되기를 거부하는 것을 관조와 포용으로 무릎 꿇게 했다. 竹山은 참에 살고 의(義)에 죽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하나의 득도(得道)이다. 竹山이 환감의 나이, 민족의 운명이 순행되었다면 차기 대선에서 국가의 영도자가 되었을 우뚝한 희망봉에서 이민족으로 받던 꼭같은 고문, 식민통치 책략보다 더 야비한 음모와 모략 그리고 불의(不義)의 어처구니없는 검은 보자기에 씌어 끝내는 분단 전제권력이 미쳐 돌아가는 험준한 역사의 골고다 언덕을 오르며 바리새 율법과 유태 재판보다도 더한 악법 법살앞에서 민족의 십자가를 초연히 질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 청년 竹山의 인간존중 인간 승리에서 벌써 예비되었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竹山의 회고를 빌리면 홀로 기차표 한 장만 들고 호혈(虎穴)에 들어가는 심경으로 동경으로 건너갔는데 竹山의 장도가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에 실려있다. 竹山은 이후 유수한 교육자가 된 세사람의 친구이며 동지 유학생 (竹山생애를 관통하는 좋은 교우)의 신세에 힘입어 동경 고학생으로 생활을 해가면서(엿장수) 정규 영어학교 그리고 중앙대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당시 1920년대 대정(大正)민주주의의 사상과 학문의 개화국면에서 죽산은 인간 자유와 계급해방 그리고 민족 독립을 견인하는 신지식의 홍수속에서 조석을 가리지 않고 오직 책속에 틀어박혀 있기를 일년남짓 지냈다. 그것은 竹山사상의 과학적 토양과 실천적 세계관이 기초잡혀지는 계기였다. 竹山은 당시의 지식 사상풍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그 때 일본 사상계는 혼란기였다. 일본에 본래부터 있던 사상분야는 그만두고라도 자유주의 민본주의 등등, 요새 흔히 말하는 '데모크라시의 사상' 이 상당히 완성한 위에 새로 수입된 여러 가지 사상이 짧은 시일내에 한꺼번에 머리를 들고 일어섰다. 고토쿠 (德秋水 : 일본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활실부인론자)가 불경죄로 처벌을 당한 이래로 일부 지식층간에 아나키즘의 뿌리가 박혔고 내가 동경에 있던 1921년부터 몇해 동안은 오오스기 사카이(大杉?)를 중심으로 해서, 와다, 이또 등 쟁쟁한 투사들이 선두에 서서 언론으로 사상계를 리드하고 일부 노동운동을 지도했으며 혼란기에는 으레 있듯이 많은 젊은 지식인들이 저의 나라에 재래에 있던 일체의 것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아나키즘을 숭상하는 경향도 많아서 한때는 무정부주의의 전성을 이룬 감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상이 위축되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주의를 내걸고 웅성거렸다. 그때 흔히 떠들던 상디칼리즘, 페비어니즘, 사회민주주의, 니할리즘 그리고 그때야 우행처럼 된'볼셰비즘' 등등 세상에 있는 주의 사상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일본 사상계에서 북데기쳤다..... 내가 제일 흥미를 가지고 덤벼든 것은 아나키즘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흑도회까지 조직하기를 했으나 아나키스트들의 관념적 유희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생각에도 지식적 충족이나 관념적 만족만으로서가 아니고 무슨 조직을 가지고 힘을 만들어서 일본놈과 싸우고 독립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되고 또 독립이 된 뒤에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된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나키즘으로부터 볼셰비즘으로 기울어졌다...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한국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것이며, 우리나라가 일본과 싸워서 이기자면 우리 자신이 좋은 조직을 가져야 되겠고, 러시아의 협력과 지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작정했다.」제 1차 세계대전 종결과 신 국제질서로서의 위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동아시아 판으로서는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지배의 추인으로 무위로 되고 독립운동의 배후적 안전판으로 구미제국주의 효용론의 환상이 깨어진 국면에서 러시아에서의 변혁론과 사회주의의 반제 지원과 연대는 당시 동아시아 식민지 피압박민중에게는 하나의 구명정이었으며 5·4운동 이후 중국의 지식계 민족계의 급격한 사회주의 사상의 편만은 이의 전형적 반영이었다.「그때의 우리들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고 포부도 컸지만 용기도 대단했었다.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일은 안될 것이 없는 듯하였다.」동경 적도에서 사상과 신념의 꽃망울이 튀인 줏산은 촉망을 받는 민족운동 사회운동의 중핵적 역할의 인사로서 서울로 귀환하여 청년운동, 사상운동, 대중운동을 통하여 독립투쟁의 실천적 의지를 펴기 시작한다. 이어 국내에서의 소시민적 분파주의 운동작풍과 해외에서의 기득권 추구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조정하고져 소집된 베르흐네우스크대회에 참가하였다가, 코민테른의 오르그뷰로에 참가하는 것은 거절하고 그때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카우부트(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들어가서 수학하게 된다. 竹山의 진취성과 개척성의 자주적 행보가 돋보이는 하나의 결단이다. 竹山은 피압막 민족혁명가들에게 주어지는 귀족적일 수 있는 특혜를 마다하고 결연히 귀국을 결심한다. 당시 竹山의 술회를 옮기면 「소련에서의 러시아혁명사 수학이나 전지요양 따위에 매몰되었다가는 내가 조선놈으로 낳았다가 고기값도 못하고 병신으로 이국 귀신이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이 되어서 조국으로 돌아가서 일하다가 죽기로 작정을 했다」는 것이다. 죽산이 동경대지진의 조선민족학살의 참경을 접하고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한 이후의 활약은 조직과 대중운동에서 발군의 지도자 역할이었다. 竹山은 1920년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태두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 중국, 러시아의 한반도 독립운동의 배후지에서도 역량있는 실천가였다. 1925년부터 1932년 왜경에게 피검될 때까지 상해를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으로 지속적 투쟁과 경험축적 및 사상적 성숙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며 협애한 계급투쟁을 넘어서서 범민족적 전선투쟁과 국제적 연대투쟁의 중심 자리에서 기층역량뿐만 아니라 상층 각계층 애국민족역량과의 제휴속에서 사상적 외연과 정치력의 원숙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죽산은 열린 감각과 세계관을 함양할 수 있었던 선진적 사상실천가였으며, 그러나 그 사상의 중심자리는 항상 인간과 민족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竹山은 상해시절 인간사랑과 민족사랑의 결정물로서 혁명적 가정의 열매를 맺는데 이것이 독립투사, 정치가 이전의 드라마적 주인공으로서의 가장 극적이고 가장 절절한 인간적 진면모이다.) 우리가 살펴본 죽산의 사상적 진보는 사회역사적 상황에 추수되는 풍운아로서의 정열적 혁명가적 독립투사로서의 모습이다. 그러나 죽산 사상의 진정한 면모는 투쟁속에서의 안심입명(安心立命), 동중정(動中靜)의 끊임없는 자기 혁신과 내면화 그리고 수련과 결단적 의지력의 면모이다. 이른바 사상의 내재적 개발, 주체적 의식개혁 그리고 일체 실천의 자기책임과, 보다 증진되는 인간적 창조성과 도덕성이다. 우리가 竹山의 인간적 면모의 내면성과 개혁사상의 외연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칫 간과하기 쉬운 죽산의 끊임없는 중도(中道)의 자기 수련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竹山이 상해에서 피검되던 1931년부터 일년여의 취조 예심을 거치고 1932년 7년 징역의 신의주 감옥생활(일본황태자 출산은사의 1년감형에도 불구하고 꼬박 7년 옥고)을 채우고 출옥이후 전시경제 제국주의 일제의 전쟁광란하에서의 표면적으로 범상한 생활 그리고 태평양전쟁하 예비검속 구금을 거치고 해방을 맞게된 기간은 어쩌면 더 철저하고 가열한 사상의 수련기, 자기 수양과 연마의 기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기간을 竹山사상의 제 2기의 원숙기라고 하며 그 성숙성의 면모는 다음의 죽산 옥중기 술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3·1운동때 1년동안 감옥살이를 해 보았고 우리나라 안에서나 또는 일본에서 수십차의 유치장 생활을 해 보았고 별의 별 고문도 다 당해 보았다. 그러나 이번같이 7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안에서 살게되는 것은 처음인만치 생각이 많았다. 사람이 7년동안을 감옥생활을 하는 수가 있을까. 감옥생활을 실컷 해 주다가 중도에 옥사라도 당하면 그럴바에는 하루라도 더 빨리 죽어 버릴 수는 없을까. 그러나 우리들이 아는 바는 우리 애국자, 선구자들 중에는 지금도 10여년 내지 20여년은 감옥살이를 하고 계시고, 또는 감옥살이를 치르고 무사하게 살아계신 분도 있느니 만치 나도 7년쯤 치러주고 무고하게 출옥해서 장래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어째든지 얼마동안 살아보면서 무슨 구체적인 방침을 세우기로 하되 하가지 결심을 했었다. 그 결심이란 이렇다. 우선 살아가는 도중에 내 인격이 무시되고 금수같은 취급을 당하는 경우면 언제든지 그자와 일대 일로 사생을 결단짖는다. ‥‥‥ 감옥살이는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많다. 견디기 어려운 명령과 규칙이 있다. 그 규칙 그 명령을 규칙적으로 지켜주고 그 외의 무리에 대해서는 일보도 양보않고 싸운다. 그런 각오를 가지고 붉은 수의를 입었다. 사람이 어떤 중요한 결심을 하고 그것을 굳게 실천하려 들면 그 굳은 결의가 얼굴에까지 나타나는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섯불리 달려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내 체험에서 알았다..... 나는 붉은 수의를 입자마자 독방생활이 되었고 독방에서 소위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딴 것이 아니라 바늘을 가지고 걸레를 깁는 일이었다.
동상으로 인해서 손가락을 여러 개 잘라 버렸다. 그러니 손가락을 가지고 바늘을 쥔다는 것은 난사 중에 난사였다.... 사람의 육체적 조직은 어떠한 야생동물 보다도 완강하고 환경에 적응성이 강하다는 것을 나는 깊이 깨달아다... 사람이 사람끼리 사는 데에는 그 환경여하를 막론하고 서로 살아갈 길을 찾고 살아갈 방도를 알아내는 것이며 그러하다 보면 그 안에서도 삶의 의의도 있고 가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괴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는 감옥살이도 그리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살인적인 옥고도 竹山의 심신을 결코 훼손시킬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 각오와 결의로부터 생긴 긴장상태의 지속이 그러한 기적을 일으켰다고 보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그러나 출옥이 죽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처절한 인간적 고통이었다. 「나는 고향에도 안가고 서울에 있지도 않고 어린 딸 하나가 일가 댁에 신세지고 있는 인천으로 갔습니다. 물론 재산같은 것이 있을리 없고 부모도 안계시고 형제도 없고 처 마져 내가 옥중에 있는 동안에 어린 것 하나만 두고 세상을 떠난 뒤이니 그 쓸쓸하고 서글픔이야 이루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먹고 살아 나갈 수도 없는데 왜놈들은 창씨 안한다고 지랄질을 치고 박해를 하는데....」다수의 민족주의 지도자, 개량주의자 심지어 지식인 종교인까지 친일 황민으로 부화뇌동하는 판국에 죽산의 안심입명은 곤란을 당하여 자기를 지키고 위기를 당하여 견일불발하는 정중동(靜中動) 사상의 강인성을 말하는 것이다. 소위 대동아전쟁의 단말마적 일제의 발악으로 예비검속의 생사에 기로를 넘기고 해방으로 방면되면서부터 죽산은 원숙한 중도적 사상의 실천을 보여준다. 예비적 성숙기를 거쳐 발효하는 죽산사상의 완성적 진화는 인간본성과 이성 그리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의 중심축은 극단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아우러 통합과 통일을 이루어내는 중도사상(中道思想) 바로 그것이었으며, 이것이 민족의 공감에 의한 평화통일론으로 그리고 민중의 에너지에 의한 개혁론으로 발양되었던 것이다. 우선 해방공간에서는 민족사회의 새 질서와 주권 국민국가 창설의 과도적 전개과정에서 죽산 중도사상(中道思想)의 예비적 실천과 전개가 진행된다. 그것이 정파와 이데올로기의 혼재속에서 외세에 의존하여 창궐하는 극좌 극우의 편향성과 모략 분열의 폭력적 극단론의 정치행태에 대한 단호한 질타 매별이며, 죽산노선의 구체성은 극좌적 공산당과 극우적 수구기득세력 한민당에 대한 대결이었다. 「나는 일제 헌병사령부에서 나오자마자 인천으로 직행했습니다. 인천 도착하던 날부터 치안유지회를 조직해서 치안유지에 전력했고 그 뒤 즉시 건국준비회 인천지부로 개조했고 또 노동운동, 공산당 재건운동에도 열중했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조직되자 인천 민전의장이 되어 활동했습니다. 내가 인천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동안에 인천에서는 한 개의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고 공업지대인 인천의 많은 공장들이 한 개의 예외도 없이 전부 노동자들의 자치적 조직으로써 공장을 지켰고 인천 인사로서는 부당한 수단으로 공장 한 개도 차지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미군정이 되자마자 미군정 최고기관으로부터 굉장한 명령서, 지시서들을 손에 쥔 많은 모리배드리 달려들어서 인천에 있는 모든 공장을 접수했고 오늘 우리들이 보는바와같이 모든 공장을 속속들이 팔아먹고 빈 껍질만 남겨 놓았고 그 빈 껍질은 6·25사변으로 인해서 거의 전부가 파괴되고만 것입니다.
인천에서 내가 민전의장일 뿐 아니라 공산당 등 모든 좌익운동의 지도자로 지내는 중에도 조선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 등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처사도 있었지만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일으켜서 대중적 동원운동을 하는 중에 신탁통치 반대대회를 열어놓고 소련정부의 지시다 해서 신탁통치 찬성결의를 하게 한 것 같은 일은 전연 한국사람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는 폭거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때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등의 정치적 행동은 대부분이 우리 민족의 감정과 이익을 무시하고 오직 소련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소련의 주구적 역할을 했을 뿐이었고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많은 구호를 함부로 내걸고 일시적 선동으로 일시적 효과만을 노리는 좌익소아병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청년의 대부분이 3·1운동 이후로 많이들 사회주의자가 되고 혹은 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 독립을 위한 사회주의이고 한국 독립을 위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한국 민족을 버리고 한국 독립은 불구하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생각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독립을 하되 일부 특권층이나 일부 부자들을 위한 독립이 아니고 전 민족이 잘 살고 전 민족이 행복스러울 수 있는 독립, 특히 노동자나 농민이나 그 외에 많은 근로 대중이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그런 독립이 와야 한다는 것은 지금도 똑같은 이상이며 주장입니다. 그러나 내 나라도 잊어 버리고 내 민족도 생각하지 않고 소련의 지시대로만 하는 것을 옳다고는 생각이 안됩니다.」
이데올로기는 종속변수일 수 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의 사회경제적 발전단계와 변혁론은 공산주의의 기계론적 투입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 소련식 사회주의 볼셰비즘의 도식적 교조적 대입으로 전후 한국민족의 생도를 의탁한다는 것은 과학성도 현실성도 없는 것이엇다. 역사적 경험칙은 동구 위성국가의 주권상실과 궤멸, 그리고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소련 헤게모니의 거부와 아시아적 전통의 회기 그리고 정장과 효율의 자본주의적 구미와의 접목을 통한 사회경제 발전의 현재적 양상이 민족과 문화를 방기한 계급독재 수입노선의 오류를 극명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竹山은 역사의 싫증적 경험 이전에 그의 사상적 혜안으로 세계속에서의 새로운 민족국가의건설의 정도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해방되고 이듬해 즉 1946년 7월에 민전의장을 비롯한 공산당 관계의 좌익단체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박헌영에게 편지로 모든 잘못을 지적하고 공산당에서 탈퇴하는 것을 명확히 하였고 박헌영 일파는 나를 제명처분한 것입니다. 그 뒤 나는 "삼천만 동포에게 격함"이라는 작은 책자를 내어서 공산당과 극우파들의 반민족적인 정치행동을 규탄하고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자주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이 계속되어 할 것을 강경히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그래서 나는 서울에서 소위 중앙노선이라해서 민주주의 독립전선이란 단체를 만들고 극좌극우 배척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중도(中道)는 극을 배제하면서 일체 사물과 사유를 비단비상(非斷非常) 비유비공(非有非空)으로 포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중도(中道)란 정립(定立) 반정립(反定立)의 두 극단을 종합한다는 의미이며 그변의 치우친 삿된 것을 여읜 중정(中正)한 도(道)라는 말이다. 죽산의 중도사상(中道思想)에의 완성과 도달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류의 편린으로 규정할 수도 폄하할 수도 없다.(「‥‥‥민주세력의 총결집체 구성을 주장하는 것이니 여야를 막론하고 공산당 외에는 모든 사람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보수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자휴협동주의자 등 자칭 타칭의 모든 주의자와 무주의자(無主義者), 심지어는 독재적 요소가 있는 사람이든지 외세의존자 또는 부패분자로 지목되는--이 총집결하여 민주진영의 단일전선을 만들어서 정치적으로 절대의 행동통일을 하게 함으로써 극좌공산당의 대결에 승리를 거두자는 것이다.」(내가 본 내외 정국, 1995. 6. 16 - 7. 11 한국일보)라는 竹山의 서술에서 중도사상의 폭을 알 수 있다). 竹山의 중도사상(中道思想)에는 국민기본권으로서의 사상의 자유, 민주주의적 질서하에서의 가치선택의 다양성, 자연과 역사적 조형으로써의 민족공동체의 복원과 통일국가의 회복, 사회진보와 평화세계 쟁취를 위한 실천적 개혁론과 인간예지 그리고 인류 이상의 무한 추구의 에너지 그 모두를 포섭 수렴하는 용광로이며 부단히 인류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새로운 양약을 정제해 내는 가장 현대적이며 가장 선도적인 한국의 진보적 양심의 산실이며 보고가 아닐 수 없다.
2. 竹山 개혁론의 재조명
죽산 개혁론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치용(經世治用)의 현대 한국의 실학론(實學論)이라고 할 수 있다. 竹山 갸혁론은 竹山 진보사상의 주체적 진화와 객관적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그 내용이 채워지며 연속적 계기적 변증적으로 발전한다. 竹山 개혁론의 구상과 실천적 전개는 대체로 다음의 세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단계는 1920년대의 죽산 청년기의 맹아적 사상기의 개혁 이데아이다. 그 둘째 단계는 해방국면을 경과하면서 건국 참여와 竹山 개혁론의 정책적 투입과 실천적 검정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1950년대의 의회활동과 대선투쟁을 통한 경제개혁, 정치개혁, 사회구성체 개혁의 마스터 플랜의 창출이었으며 그것의 추동력으로서의 진보당 결성과 강령 제시로 종합된다.
竹山 개혁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개혁론의 이상주의와 현실론의 통일이다. 이는 인간본성에 대한 신뢰, 사회진보에 대한 확시느 역사이행에 대한 낙관을 근저에 깔고 있음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둘째 개혁론의 방법과 동력의 통일이다. 竹山 개혁론은 위로부터의 개혁(Reformation von oben)과 아래로부터의 개혁(Reformation von unten)의 통합적 추동이며 이는 주권재민론과 진보사회를 위한 이데올로기를 가치론의 기저로 하는 것이다. 「민중은 물이요 정부는 그 속에사는 고기라, 민중과 정부는 물과 물고기와의 관계이다」라는 죽산의 강조는 동아시아 도가 사상과 전통적 한국사회의 개혁 노름(norm)의 동원을 제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사회 민중적 동력의 추동으로서만 개혁의 성공과 재생산을 담보해 낼 수 있다는 사회철학에서 연원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竹山 개혁론은 개방성과 정론(正論)적 담론, 그것을 통해 여과된 통합주의 성취를 목적론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이성과 합리주의를 존중하는 근대적 가치론에 충실하면서 절차적 일반민주주의, 의회주의, 정당정치, 법치국가의 궤도를 수호하고자 하는 것이며, 배타적 배제적 「제3의 길」과는 다른 중도주의적 수렴과 통합을 실현함으로써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구현코져하는 것을 목적론으로 지향한다. 총괄적으로 이야기하여 竹山의 개혁론은 공화제 민주주의 제도(형식)와 한국적 진보사회로서의 복지공동체(내용)의 통일로 특징지워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竹山의 개혁론을 이야기할 때 그 개혁의 개념은 혁명과 변혁 그리고 개량과 개조의 중간항으로서의 개혁의 절충적 용어법이 아니다. 竹山 개혁론은 사회역사적 조건의 객관적 요구의 진폭과 용량에 상응하는 포괄적 범주로서의 개념이며, 그러므로 일제식민통치하에서는 피압박민족의 억압과 착취질서를 전복시키는 것이 개혁이었고, 해방국면에서는 식민지 잔재 척결과 신생독립국가 수립의 혁명적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개혁이었고 정부수립 후에는 공화제적 민주주의 질서 확립에 장애되는 파행적 수구기득세력을 혁파하는 것과 민중 민생의 지평을 가로막는 특권부패정치 수탈경제를 폐절하는 것이 개혁이었고, 종국에는 전쟁을 지양하고 평화통일의 노선으로 민족의 사멸을 막아내는 것과 진보사회로서의 민주주의 복지공동체를 구현하는 것이 개혁 목표의 정점이었다. 竹山 개혁론은 그러므로 사회 변혁과 현실 개량의 과제와 실천론 모두를 포괄함으로써 중도사상(中道思想)을 종축으로하고 진보노선을 횡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竹山 개혁론의 총제적 이해를 위해서 개혁주체에 대한 인식, 개혁방법에 대한 인식을 竹山 자신의 입론에 의거하여 개관해 보고, 죽산 개혁론의 참여적 실험의 구체상을 그의 실천 궤적을 통하여 추적해 보고자 한다.
竹山은 개혁의 주체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청년기의 죽산사상의 맹아적 형성기에는 계급론을 중심축으로 한 민중역량으로 제시된다. 「우리 조선 민중은 과거 십여년에 여러 가지 형식으로 진로를 찾았었다. ‥‥‥조선 민중의 해방의 방법이 어디 있는가. 오직 똑같은 소약(小弱)한 사람끼리 모여서 강한자의 무리로 더불어 결할 뿐이다. 이것이 조선인의 진실한 진로요, 오직 하나의 살길이다.」「우리가 말하는 사회운동이라는 것은 한 국가, 한 사회에 있어서도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 대립한 경우에는 계급투쟁을 전제로하여 철저한 사회를 개선하라는 것입니다. 글ㄴ 까닭에 서로 이해가 충돌되는 양대 계급을 혼동하여 같은 민족이라는 막연한 관념아래서 부르짖는 민족운동과는 본질상으로 차이가 되는 것이 올시다. 그 실례를 들어 쉽게 말한다 하면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적으로 독립이 되어 있는 영국이나 불란서나 독일같은 나라에서도 가장 맹렬히 사회운동이 일어나는 것만 보아도 족히 알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 반면에는 민족운도이라고 할 만한 반동세력이 사회운동과 대립하여 한 가지 운동이 되어 있는 것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올시다. 이태리의 파씨스트나 일본의 적화방지단 같은 것이 모두 이러한 종류의 민족운동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올시다. 만일 민족운동자로서 적당히 관찰해보면 반드시 그 가운데에서도 한 민족의 독립으로 말미암아 자기 민족 전체가 동일한 행복과 동일한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다시 쉽게 말하면 노동계급이 처해있는 무산대중은 생산과 분배의 관계가 공평하게 변경되기 전에는 항상 한 모양으로 자본가의 발길 아래서 신음할 것이 올시다.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 그 물건도 결국 침략의 정체를 발견하지 못하는 날에는 항상 피상적 운동으로 헛수고에 돌아가 버리고 말게 됩니다.」이것이 사회주의 실천운동가로 변모했던 20대 중반기의 청년 죽산이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상에서 설파한 입론이다. 개벽(1925년 6월) 잡지의「치안유지법의 실시와 금후의 조선사회운동」의 글은 개혁 주체로서의 민중 동력의 운동론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사회운동 전선이, 전위부대의 결속이 운동의 제일보라면 이 결속된 소수부대는 대중 속에서 민중을 동하여야 될 것이니 곧 민중을 동케 하는 방법을 배워야 될 것이다. 민중을 동케 함에는 무산계급의 당면한 문제를 정확히 관찰해서 분투할 것이다. 하여 종래의 운동자대 운동자의 운동을 떠나 민중이 동하는 현실적 운동의 진로를 취하여야 될 것이다. 이로서 운동의 전선은 점차 확대되고 다라서 현실에 입각을 둔 실지운동이 된 것이다.」이 글은 일견 전위(아방가르드)와 대중과의 관계론, 레닌주의 노선의 공식론의 복사판같이 비춰오나, 죽산의 현실 감각과 개혁의지의 중심 추는 민족문제 해결에서 발원된다는 점을 인식하면 교조주의적 인식론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 竹山에게서 계급과 민족에 대한 인식론은 인간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은 전술한 바 있으며 竹山사상의 내면적 성숙기에서 竹山 자신의 수양을 통하여 이는 체계를 잡은 것이다.
해방과 건국 그리고 우리 현대사회에서의 개혁 주창 과정에서의 장년기의 원숙한 죽산의 입론은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주체 개념인 국민과의 관련하에서 민중론을 포섭한다. 그리고 그 민중과 국민은 의식화된 존재, 깨어 실천하는 개혁 주체이다. 「우리의 당면과제」에서 竹山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우리들은 마땅히 심기를 일전하여 철저한 국난극복책을 수립할 필요가 절박한 것이니 인간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국민의 임무를 강조하기 위하여 생산적 비판과 조직적 발전이 지정(至情)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우리들의 생활을 스스로 비판할 것으로써 생활력을 강화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묵은 생활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지 새 생활을 창조하고 있는지 이를 잘 분석하고 비판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한 우리의 생활은 결국 이상도 구상도 계획도 체계도 없는 생활일 것이다. 이런 생활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꼭 같이 자기 민족, 자기 진영의 결함이라 하여 공정한 비판을 회피하고 외래 문물이라 하여 비판의 공정을 떠나서 배척에만 열중한다면 이는 반드시 문화의 퇴보와 고립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이를 수반하는 신문화를 건설하려는 우리로서는 모든 사태를 엄중히 비판하여 취사를 결정하는 동시에 남의 의사에 지배되는 무사려한 행동을 피해야 할 것이다. 비판력의 강화는 생활력의 양양인 동시에 국민의 자각을 가장 급속히 촉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니 민주국민의 일동일정은 모두가 자기 주장의 발로이어야 할 것이요, 그리 됨으로서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등 전반에 긍한 혼란도 차츰 정돈의 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비판은 먼저 평범한 생활로부터 시작하여 그 생활력의 낭비를 조절함으로서 출발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민중의 조직, 특히 그의 정치적 조직을 발전시켜야 하겠다. 무릇 민주주의 정치라는 것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초라한 한 사람의 주장과 요구라도 선명히 나타낼 수 있고 또 그것은 다른 사회 성원에 의해서 정당하게 평가되는 길을 열고서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주장과 요구를 사회적으로 반영시키는 정치제도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지금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그 궤도를 채택하고 있는 대의적 민주주의 제도가 이의 실천방법에 있어서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대의제 민주주의는 개인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조직에 의한 정치가 되는 것이며 이 개인과 정권을 연결시키는 중간적 조직이 바로 정당이요 모든 형태의 사회단체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조직이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활발히 움직여가는 데서만 그 발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니, 개인과 정권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및몇 조직을 통해서 연결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민주정치하에서는 각 개인이 정부나 그 하부단체 이외에 반드시 어느 단체에 가입함으로써 비로소 정치에 침획하게 되는 것이며 그리 함으로서 그 정치는 올바르게 운용될 수 있다. ‥‥ 그러므로 정치지도자들은 특히 이런 점에 대하여 반성함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이 정치와 민중의 자연적인, 그리고 이상적인 결합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끝끝내 민중 자신의 책임감과 꾸준한 노력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개개의 민중이 민주정권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이 마치 자기의 눈동자처럼 사랑과 정열과 각오가 있어야 하며 이것을 방해하는 모든 조건을 제거하기 위하여 과감히 싸워나갈 기백과 용기가 필요하다.」
竹山 개혁론의 현대사적 목표로 되는「민족이 잘살고 민주주의 토대위에서 모든 백성이 다 잘 수 있는 세상, 즉 완전히 통일된 민주주의적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들의 염원」을 추동하는 개혁철학에서의 민중의 주체적 역할에 대한 신념은 그의 전 사상과 실천의 진화에서 일관되게 관찰되며 현대 세계의 보편가치율로 외연되어 인간과 계급, 민족과 민중이 합일되어 제시된다. 「우리들이 굳게 믿고 의심치 않는 것은 민중은 현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역사의 진리로서 과거가 그러하였고 현대가 또한 그러하며 미래 역시 그러할 것이다. 본질적으로도 그렇거니와, 하나와 또 하나가 합치는 종합원칙에서 더욱 그러하며 고난을 겪은 민족이면 그럴수록 두뇌는 가일층 명석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처럼 정치적으로 머리를 쓰고 정치에 관심을 가진 민족도 드물다고 할 것이니 이는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가진 반면에 고난의 역사도 가진 민족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나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은 더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골 벽지에 있는 농부들까지도 세계정세에 관심을 가지며 비록 전체는 모른다고 할지라도 정치에 나타나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세밀한 비판을 내린다. 더욱이 정치고위층의 인물에 대해서는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한가지까지도 일일이 엄중하고도 결정적인 비판을 내리는 것이며, 면서기나 순경 한사람의 대수롭지 않은 언행이 정치적 결과로서 준엄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면 민중이 얼마나 현명한가를 깨닫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현명한 토대위에 서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는 모름지기 정직하고 공명정대해야 할 것이니 정치의 작은 부분까지라도 민중앞에 공개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들을 순리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정치라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나니 민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실을 뚜렷이 알고 있으며 이대로 이 짓을 되풀이하다가는 나랏일이 잘못 될 것도 알고 모든 폐해가 하루 빨리 청산(개혁) 되어야 하겠다는데 대해서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중들은 자기네가 할 바 의무를 다하여도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원인에 대해서 철저한 비판을 내리고 있다」竹山의 민중에 대한 투시는 정확하고 냉철하며 대자적 의식, 조직적 실천 주체로서 민중 참여를 통하여서만 민주주의의 총체적 개혁과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입론은 오늘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유의미한 시사가 아닐 수 없다.
죽산 개혁론의 방도는 어떻게 특징지워지는가. 그것은 민주주의 원리론의 철저한 고수와 대의정치 메카니즘의 정상적 작동에 큰 가닥의 방향을 두고 구체적 방도는 이에 종속시킨다는 것이다.「우리들이 항상 상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민주정치는 의회정치이고, 의회정치는 정당정치라고 합니다. 그것은 소위 현정의 상도론(常道論)이고 그 원칙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의심할 사람도 없습니다.」죽산은 개혁 작업을 민중의 민주주의적 역량 결집체로서의 정당 매개를 통해서 추동해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정당이 순조롭게 발달하고 확실히 자기의 정당 정책과 주장이 인민속에 침투하여 있는 그러한 적당한 시기까지 이르지 않을 것 같으면 정당정치의 운명이라는 것은 비상히 곤란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또한 죽산은 개혁방도의 모태로서 민주주의와 여론 즉 국민의 의사와 요구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며 민중속에서의 개혁 검증의 공명성과 공정성을 강조한다.「‥‥근대 민주정치의 요체는 모략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국민 여론의 반영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췌언을 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거늘 해방이래 자기의 정권장악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시종 일관 모략지상주의를 충실하게 실천해 온 정당은 없는가. ‥‥」「뿐만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내걸고 의회정치를 말하는 사람들이지만 저들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경험에 비추어 볼 것 같으면 정권을 잡은 정당 그 계열 이외의 모든 정치세력은 확실히 몰락할 것은 물론이고 그의 반대세력이 될 만한 모든 분자들은 빨갱이라는 모략으로 또 까닭도 없이 죄명으로 감옥에 가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치 못할 것이 눈에 환희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민주주의는 꼴도 볼 수 없을 것이고 모든 백성은 못 살게 되고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 때는 이 민족이 피를 흘리고 무서운 희생을 치르고야 다시 개혁의 마루턱에 올라설 것입니다」(죽산은 이승만 독재정권 마수의 간첩 모략과 그 자신에게 법살 그리고 4월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을 이로서 다 예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죽산은 사회진보와 개혁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이렇게 피력한다.「우리나라가 아무리 후진국가라 하여도 우리나라에는 전통적 민족 정기가 생생히 살아있고, 왜정의 무서운 야만적인 폭압밑에서 굴치않고 싸우고 견뎌온 쓰라린 투쟁의 경험을 뼈속 깊이 지니고 있는 우리 민족은 이번에도 그 무서운 시련에서 과히 어렵지 않게 벗어났습니다. 민주주의 정치는 민주주의라는 말로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방법으로 인민의 의사가 표시되고 인민의 의사가 정치현실에 나타나고ㅡ 사실이 인민의 의사대로 진행되고 인민이 사실을 파악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곧 민주주의 정치입니다.」한마디로 竹山 개혁론의 실천적 방법론은 철저히 일반민주주의 정칙을 따르는 것으로 민중 주체적 국민개혁론이다. 이것은 서구적 사회민주주의나 남미적 포플리즘(「남미는 남미일 따름이지 한국이 아닙니다」)과도 다른 것이고, 우리 역사과정의 전통적 개혁론을 계승하면서(이중환의 팔역지(八域志)를 인용하며 개혁을 저해하는 붕당론을 맹박한다.) 시폐를 혁파하는 현실론적이고 독창적인 개혁방도를 시사하는 것이다. (죽산의 서술과 언술은 철두철미,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의 전통적 지혜와 귀감, 동양적 고사성어와 지식을 능숙하게 그리고 즐겨 인용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우리는 이제 竹山 개혁론의 참여적 실험의 구체상을 살펴봄으로서 竹山 개혁론의 현실성과 이상 그리고 성취와 미완의 과제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해방은 한국민족에게 감격과 재생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인 죽산에게는 신생국가의 건설과 새사회로의 개혁의 소명과 기회 그러나 고난과 역경을 부하받는 것이 되기도 하였다. 극단적 냉전 초강대국의 한반도 분단 책략에서 자주성을 지키고 극좌 극우의 극단 세력에 맞서서 민족을 연맹함으로서(죽산의 민족자주연맹의 노선) 중도사상의 이상을 견지했던 죽산에게 해방 공간은 하나의 시련이었다. 죽산은 탁월한 현실감각과 멀리 내다 보는 역사적 혜안으로서 정부수립을 전기로 하여 참여속의 개혁의 실천적 실험 행보에 진입한다.
제헌국회 개회에 때맞추어 헌법 기초위원으로 역할한 竹山은 생활의 기본적 수요. 균형있는 국민 경제의 발전, 토지개혁 등의 경제부분의 헌법적 대강을 확보함으로써 민중이익 평등사회의 초석을 깔고자 진력했고, 내각책임제적 권력분산구도를 유인해 냄으로써 합의와 협력의 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의욕했다. (그러나 대통령중심의 권력구조로 헌법이 결정되고, 이후 한민당이 당략 반동의 내각제 개헌을 책동하자 헌법 정신에 입각 헌법수호에 철저했다.) 그리고 남북통일, 자주독립, 균등사회 건설에 매진코자 무소속의원의 리더로서 무소속구락부를 결성했다. 당시 정치경제 개혁과제로서는 주한미군철수, 반민족행위자 처벌문제, 농지개혁, 지방자치제 등이었는데 竹山은 농림부장관 입각의 제약조건에도 큰 흐름에서 일제친일지주세력의 집결인 한민당과는 물론, 친미극우 집권자 이승만과는 준별되는 참신한 정치적 개혁노선을 고수했다. 신생한국에서의 초미의 개혁과제는 토지문제였다. 식민지지주제의 봉건적 소작의 유산과 봉건지대의 살인적 착취를 폐절하는 것은 영세농민이 절대다수의 구성으로 되어있는 국민경제의 균형과 성장을 위해서 선차적인 일이었다. 한민당 지주세력의 모략과 훼방에도 불구하고 이후 농지개혁의 기초를 竹山이 닦았다. 竹山은 공출제와 수집법을 폐지하고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키는가 하면 금융조합 개편 농업협동조합 창설의 농촌종합개발계획 추진과 그것을 다그치는 농지국, 농촌지도국 설치 등의 위로부터의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 농민신문의 창간과 농업협동조합의 농민 주체적 조직을 견인하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과감히 진력했다. 竹山이 개혁저지 수구세력에 밀려 농림부장관 자리에서 밀려난 뒤에는 농가회의의 전국적 범위에서의 조직을 통한 민중역량의 축적으로 개혁정치세력, 정당 결성을 추진하고자 의도했다. 이승만은 竹山의 개혁적 정치 토대를 와해시키고, 한민당은 집요하게 죽산을 반대했다. 죽산의 2대 국회당선과 두번에 걸친 국회부의장의 활약은 죽산 개혁론의 웅지를 정치의 장에서 유감없이 펼치게 하는 계기였다. 죽산은 개혁의 정치기반 구축으로 전국농민대표자회의를 조직 개최했고 여기에 노동자 조직과 지역조직도 가세하는 국면이었다.
발췌개헌안 파동이 있고 대통령직선제 실시로 竹山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 개혁과 진보사회를 향한 죽산의 정치적 장도는 뚜렷해졌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는 죽산의 술회대로 「나는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대통령과 싸울 사람이 없으면 국민이 너무 불쌍하다. 나는 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대변하기 위해 대통령후보에 나서기로 했다」눈 대승적 결단이었다. 전쟁중 민족노선과 개혁노선은 죽산만이 해낼 수 있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죽산죽이기의 협공은 이승만 뿐만 아니라 수구적 보수야당으로부터도 마찬가지였다.「투표에는 이기고 개표에는 지고」라는 竹山 회고가 아니더라도 극우반공 히스테리와 호전광란에 질린 국민의 향배는 개혁에로 결집되었고 竹山은 민심을 아우르는 중심자리에 서게되고 민족영도자의 예비카드를 쥐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그의 정적 모두를 죽인 악행의 연장으로 죽산 제거를 집념하는 가공스러운 음모에 집착한다.
휴전이후 이승만의 팟쇼적 광란국면에서 竹山은 민족생존권의 담보로서의 평화통일론을 과감히 내걸고 민주대동의 연합전선 정계개편을 주창하며 민주주의 정도(正道)에 의한 정치개혁, 경제개혁, 민생개혁의 프로그램을 내 놓았다. 「우리의 당면과업」의 청사진이 그것이며 그 주장과 논지는 죽산 개혁론에서, 방법론에서 전술한 바 있다. 그러나 극우적 극단적 수구보수 기득부류의 저항으로 죽산의 민주대개혁의 역사적 제의는 좌절되었다(김성수는 유언에 까지 竹山과 연합하여야만 이승만 전제통치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하였고, 신익희도 죽산의 참여를 적극 찬성했다.)
1955년 개혁의순정 세력, 한국양심과 진보인사들의 결집으로 '민주수호와 조국통일'의 기치로 혁신정당 창당을 모색하게 되고 진보당 결당까지는 미루어지면서도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 竹山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우게된다.(민주당의 신익희 후보와는 죽산의 개혁노선 수용을 전제로 한 대승적 양보의 협약이 있었다.) 竹山은 개인영웅주의적 야욕도 정치권력에의 집념도 그의 인생관과 목표가 아니었다. 竹山에게 있어서의 일관된 화두는 민족이었고 개혁이었다.(竹山의 대통령 후보관을 잠깐 소개한다. 주어진 여건에서의 대통령선거의 인물로서는 왜정시대 우리 민족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고 또 민족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아니한 분 사리에 밝고 재(財)를 탈하지 않는 분 민족의 자주성을 견지할 수 있는 분 독재적 폭행을 자행할 위험성이 없는 분 동족 동포를 사랑할 줄 아는 분 행정을 알고 또 정성껏 일할 수 있는 분.) 竹山의 대선 선거공약은 竹山 개혁의 포괄적 시무론이 담겨있다. 첫째 진보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유엔 보장하에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통일의성취, 둘째 외교를 쇄신하고 집단안전 보장의 확립에 의하여 국방문제를 해결하고 군비부담을 경감, 셋째 집권자가 국민앞에 책임지는 정치체제의 확립, 넷째 서민 생활에 대해서 정부가 가지고 있는 유해무익한 간섭, 허가제도의 일소, 다섯째 행정기구를 대폭 감소시키고 공무원 생활의 완전보장, 여섯째 종래의 대중적 수탈 정책을 폐지하고 생산, 분배, 소비에 걸친 종합적인 연차 계획경제를 수립하여 법령화, 일곱째 농촌고리채를 일정기간 지불 유예케하고 현물세를 폐지하고 자율적인 농업협동조합의 조직, 여덟째 노동자의 자유로운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의 보장, 아홉째 상이군경 유족등이 생활을 국가적으로 보장, 열째 교육의 완전한 국가보장제 실시와 학제개혁 연한 단축이다. 선거는 조작이었고 개표는 부정이었다. 그러나 죽산은 2대 대선의 3배수인 216만 3808표(23.9%)를 얻어 이승만의 조작표 504만 6437표(55.6%)를 큰폭으로 육박했다.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통일 그리고 개혁과 민생 해결 그리고 사회진보의 국민적 열망이 이제 의심할 바 없이 죽산을 제도권력의 중심자리로 성큼 올려 놓았던 것이다. 진보당은 대선의지지 득표를 기반으로 하면서, 그러나 혁신계 내부의 진통을 여과하면서 1956년 11월 창당하게 된다. 진보당의 강령은 1.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 생산 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 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 통일의 실현 4. 교육 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竹山이 생존했던 기간의 개혁론의 현실론이며 시상주의적이었던 마스터 플랜의 전체상이었다.
竹山 개혁론은 竹山중도사상을 모태로 하고, 죽산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의 양심적인 진보주의로서 진보당 지도이념으로 현상한다. 竹山 개혁론은 그것의 현대 정치사상 사회사상 경제사상의 좌표를 가늠하는데는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으며, 민족주권국가의 민주주의적 공화제의 진보적 사회공동체를 응결해 내는 요소의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하여 서구적 개념의 사상 스펙트럼으로 재단하기에는 우리 사상의 고유성과 색깔과 특징이 너무 개성있게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竹山은「개성과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고 보장되는 사회, 사람이 사람을 착취함이 없이 각자의 노력에 의해서 평화롭고 여우있게 살 수 있는 사회, 전쟁이 없는 사회, 전 인류가 모두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회는 없을까」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것이 죽산의 개혁철학의 정수이며 죽산이 살았던 20세기 한국 땅의 이상향의 설계였으며 다가온 밀레니엄의 인류에게 제시하는 혼신의 담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3. 현단계 竹山 유산의 함의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마녀재판에서 화형을 당하면서도 '지구는 둥글다'라고 했다. 그것이 인간 양심이며, 과학이며, 진리의 복음이다. 竹山은 법살의 마지막 순간에도 민족 생존은 평화통일로, 민중 생도는 개혁 균등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 민족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竹山의 법살은 20세기 야만이다. 또한 그것은 동양적 인륜에 배치되는 것이며, 서양적 합리주의에도 배치되는 것이고 문명시대의 사회규범에도 배치되는 것이다.
법의 이름으로의 살인은 법치국가 그 자체의 폐기이며, 오류와 오욕의 역사 추인과 지속은 민주주의와 법치질서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전후 최대의 세계적 비극이었던 콩고의 루뭄바, 미국의 케네디, 칠레의 아옌데 살인은 폭력 그 자체의 동원이었고 국내적으로도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는 암살의 비극사로 점철되었다. 그에 이어 이승만의 죽산 법살은 정적의 살인, 민주주의 매도의 가장 극악한 수법으로서 그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광인 일기였다.
竹山 법살은 이후 색깔논쟁 용공음해 반란뒤집어씌우기의 D.J에 대한 법살 재연을 제지했다.
竹山 법살은 4월혁명을 종내 유발했다.(竹山에대한 대선 부정조작은 3·15부정선거를 국민이 응징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주검으로도 부활된 竹山의 민주대통합과 개혁론은 한국정치사의 밑거름이 되었다. 竹山의 평화통일론은 전쟁 재발을 막고 7·4공동성명 오늘의 남북합의서를 도출해내고 통일조국의 마루턱을 힘차게 밀어붙이고 있다.
竹山사상과 개혁론의 오늘의 함의는 무엇인가. 竹山 농업개혁과 자립적 민족경제의 산업화 프로그램이 1950년대 그대로 실현되었더라면 종속경제구도를 지양하고 균형 복지의 한국경제의 전범을 1960년대에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밑천은 평화통일의 촉진제 윤활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竹山의 평화통일론과 개혁론은 동전의 양면이며 竹山 구상이 현실에 내화(內化) 되었더라면 남한의 민주개혁 뿐만아니라 북한의 민주개혁을 유인할 수 있었을 것이며 한반도의 양극화와 소모적 대결구조는 지양되었을 것이다. 竹山의 개혁론, 평화통일론은 결코 공상적인 것이 아닌 국제역학구도에서의 민족문제 해결의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내외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생활론 이었으며 남북인민의 지지, 가능한 총선거에서의 대안정치와 경제질서로서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한국 복지사회의 해(解)였다고 결론된다.
오늘에 있어서의 竹山의 유산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완의 4월혁명 과제로서의 자주, 민주, 통일의 종국적 완성의 대도(大道)를 그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 개혁, 사회진보의 대도를 그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통일과정 통일이후의 민족사회의 현대적 모형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21세기 세계속에서의 통일민족의 위상을 예시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