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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일치하는 점이 많으며, 다음은 공통점의 일부이다.
케네디 가문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상징적 존재인 케네디 가문은 1840년대 패트릭 케네디가 보스턴에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패트릭은 술집, 청과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뒤 정계에 진출했고, 아들 조셉을 하버드대학에 보냈다.
조셉 케네디는 은행가, 실업가로 성공해 1914년 보스턴 시장의 딸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했다.
죠셉 케네디는 1930년경 미국내 금주령이 발표되었을 때, 마피아의 보호 아래 밀주를 만들어 팔아 거부가 되었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조셉 케네디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지원했으며 영국 대사까지 지냈다.
죠셉 케네디는 9남매를 두었는데 이중 아들이 4명이다.
만약 1963년 JFK가 암살 되지만 않았더라면, 1964년 선거에서 재선이 되었고,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도 형의 후광과 함께,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JFK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확실히 당선 되었을 것이라는 역사학자의 추측이다. 또한 두형제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둘째인 에드워드 케네디도 대통령에 당선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경우 케네디가에서만 24년간 대통령직을 수행 할 수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케네디가의 인간학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아일랜드의 한 가난한 젊은이가 가족과 헤어져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갔다. 케네디가의 역사는 바로 그 청년의 미국 이민에서 시작된다. 젊은이의 이름은 패트릭 케네디, 그리고 같은 아일랜드인 이민자인 브리짓 머피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아들은 1858년에 태어났고 패트릭 조지프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그러나 패트릭 케네디는 자신의 증손자가 장차 미국의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이듬해인 1859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다.
후일에 패트릭 조지프는 P.J 케네디라 불리게 되는데 28세의 젊은 나이에 주의회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P.J 케네디는 후에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를 좁은 아일랜드계 사회에서 앵글로색슨계의 사회로 진출시키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모토 아래 아들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1등을 하라, 2등 이하는 패배다.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너의 도덕적 인격과 깨끗한 평판을 흐려 놓는 행위를 절대로 하지 마라.” 미국 사회에서 최고의 1등이란 대통령이다. 아직 차별을 받고 있던 가톨릭 교도의 이민 2세인 그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대통령이 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말은 아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것이 케네디가의 가훈(家訓)이 되고, 아들을 통해 손자에게 전해져 마침내 대통령을 배출하게 된다.
아버지는 흔히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됐어’라고 말씀하셨다.” 왜 아이들에게 이처럼 ‘이겨라, 최선을 다해라’라는 요구를 하였을까? 그들의 어머니인 로즈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인생에 있어 ‘이기는 버릇’이 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포츠에서나 공부에서나 ‘지는 버릇’이 들면 사람이 위축되고 열등감이 생겨서 결국 자신의 능력을 다 살리지도 못하고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 한편 ‘이기는 버릇’이 들면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이기는 버릇’은 스포츠나 학업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도 급속도로 파급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에 의하면 인생은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잡는 경쟁이며 2등 이하는 패배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케네디가의 교훈이었다.
평소 아버지는 저녁식사에서 으레 루즈벨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든가, 세계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든가 하면서 정치적, 국제적 화제를 꺼내곤 했다. 이리하여 국가적인 문제가 아이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강하게 지배하였다. 그 결과, 아이들은 국가적 활동이 가정생활의 연장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케네디가의 형제들은 어른이 되면 세상에 이바지하는 공직에 앉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게 되었다.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그것은 아일랜드계에 대한 오랜 동안의 차별을 한꺼번에 부수는 일이 되므로 아버지는 장남 조에게 미래의 대통령을 기대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공직에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버드에 들어간 존 F. 케네디는 전과는 딴판으로 학업에 정진했고, 성적도 좋아졌다. 무엇이나 잘하는 형에 대해 대항의식을 가지면서도 병치레 때문에 따라갈 수가 없어 팽개쳐 두었던 잭도 겨우 그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런던에 부임하기 1년 전까지 친구와 둘이서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을 돌아다니면서 아버지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는 특히 정계에 투신하고 싶은 뜻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저널리즘에 매혹되어 언젠가는 정치학이 소용되리라 생각하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아버지는 그에게도 국제적 감각을 익히게 하려고 1939년 일부러 하버드를 휴학시키고, 소련, 발칸의 여러 나라와 그밖에 팔레스타인까지 파견했다. 그동안 그는 미국 대사관에 묵으면서 각지의 여러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고, 객관적 관찰을 레포트로 정리하여 런던의 아버지에게 보냈다.
1944년, 조가 탄 비행기는 공중에서 원인불명의 폭발을 두 차례 일으켰고, 조의 몸과 기체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945년, 나치스 독일이 무너지고 일본도 항복하였다. 비록 겉으로나마 조의 죽음에서 벗어난 케네디 집안은 이제 실질적인 장남이 된 존 f 케네디에게 새로운 희망을 걸게 되었다. 그는 좋든 싫든 형의 뜻을 이어 정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마침 매사추세츠 주의 제11 하원선거구에서 선출된 하원의원이 보스턴 시장으로 당선됨으로써 공석이 나자 1946년에 보궐선거를 하게 되었다. 케네디가로서는 처음 치루는 선거운동이었다. 식구들 모두가 똘똘 뭉쳐 선거 운동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여성들의 표를 따 낼 방법으로 다과회(티 파티)를 열어 나이 많은 부인들이 그에게 모성애적인 것을 느끼게 하고 젊은 처녀들은 연애기분을 느끼도록 유도하였다. 개표 결과, 잭은 2위의 네빌을 두 배나 되는 42퍼센트의 표로 눌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가을의 본선거에서도 잭은 공화당의 대립 후보를 3대 1로 압승함으로써 약관 29세의 하원의원이 탄생했다.
존 F. 케네디는 하원의원이 된 2년 후, 또 다른 도전을 한다. 메사추세츠 상원의원으로 나서려고 한 것이다. 미국 선거사 기록에 남는 52년의 케네디 대 로지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앵글로색슨계의 명문에 대한 아일랜드계 신흥귀족의 도전이기도 했다. 조지프 P. 케네디 부처는 워싱턴의 법무성에 근무하고 있던 보비를 불러 선거 총지휘자의 자리에 앉혔다. 보비는 그 때 겨우 하버드를 거쳐 버지니아대학의 법학부를 나온 아직 26세 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아버지는 보비 밑에다 선거운동에 밝은 로렌스 오브라이언을 조직부장으로 앉혔다. 보비는 또 보비대로 케네드 오드넬 등의 친구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모두 아일랜드계이며 이 선거 이후에도 케네디의 친위대로 활약하며 후일 ‘아일랜드 마피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병역으로 유럽에 가 있는 막내인 테드만 빼고는 집안사람 모두 보스턴에 모여들었다. 문제아 선도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유니스가 6개월의 휴가를 얻어 왔는가 하면 NBC방송에서 일하고 있던 패티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왔으며, 진도 6개월의 휴가를 얻어 보스턴으로 달려왔다. 처음 시내에 집 한 채를 빌려 보비와 패티가 자리잡고, 나중에는 세 자매만 아파트로 옮겼다.
가족도 많고 친척도 많았기 때문에 저마다의 특기를 살려서 일이 배당되었다. 잭이 입후보를 공표하자 곧바로 로즈 부인은 티 파티의 초대장을 발송하였다. 저녁이면 저녁대로 자매들은 집회를 열고 케네디가 출연한 텔레비전 영화를 돌려서 보여 주었다. 매사추세츠 주에는 레바논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았는데 레바논 여행을 한 적이 있는 유니스가 나가 그 곳에서 사온 숄을 어깨에 걸치고 모임에 나가서 레바논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는지를 이야기하였다. 로지의 진영에서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젠장, 어디를 가나 케네디네 식구들 투성이야’하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케네디는 한창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 도중 등뼈의 통증이 재발했다. 대학 시절 미식축구를 하다가 넘어져서 등뼈에 금이 갔었는데 솔로몬 앞바다에서 어뢰정이 침몰되었을 때 헤엄을 치다가 더욱 악화가 된 것이었다. 그는 결국 목발을 짚게 되었다. 그러나 목발을 짚는 것이 선거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그는 차의 뒷자석에다 목발을 숨기고 차에서 내리면 이를 악물고 집회장까지 걸어갔다. 연설이 끝나면 질문에 대답하고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교환했다. 차까지 돌아오면 수행자의 부축을 받아 차 안에 들어가서 고통에 겨워 눈을 감으며 시트에 등을 기댄다. 호텔에 도착하면 목발을 꺼내서 짚고 방으로 올라가 따뜻한 목욕물 속에 한 시간 동안 들어앉아 등을 좀 부드럽게 한 뒤 침대에 들어갔다. 날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로즈 부인은 부지런히 티 파티를 열었다. 투표일까지 무려 32 회의 잔치를 벌였고 7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참석했다. 결국 선거는 케네디의 승리였다. 이 선거에서 로지가 진 것은 케네디 집안의 티 파티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넘치는 돈의 힘이 큰 힘이 된 것은 물론이지만 식구들이 하나로 뭉친 힘이 ‘절대 승리’라고 장담하던 로지를 무너뜨린 것이고, 그 상징이 바로 티 파티였던 것이다.
형제자매는 차례로 결혼하여 제각기 살림을 차리고 나갔지만 여름 휴가가 되면 모두 가족들을 데리고 부모한테 모여들었고, 보비가 마침 부모의 옆집이 하나 비었기 때문에 그것을 사들였다. 2, 3년 뒤에는 그 바로 뒷집도 비어서 잭이 샀다. 차를 타고 몇 분이면 진 부부의 집도 있었고 거기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유니스 부부의 집도 있었다. 다시 10분 정도 걸으면 대서양을 내려다 보는 언덕 위에 테드의 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곳을 ‘케네디 단지’라고 불렀다. 조의 죽음으로 인해 가까스로 ‘그늘’에서 벗어난 잭은 상원의원이 되고 결혼도 하여 확실한 동생들의 리더가 되었다. 그러나 케네디가의 행복은 언제까지 계속되지 않았다. 잭은 겉으로는 건강하게 보였으나 언제나 등뼈가 아파 괴로워하였고 다시 목발을 짚는 몸이 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불구자가 된다는 말을 듣게 되자 54년, 뉴욕에서 수술을 받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수술은 실패였다. 뿐만 아니라, 병균에 감염되어 위독상태에 빠져 가톨릭 교회의 종유성사까지 받았다. 기적적으로 위험의 상태를 벗어나자 들것에 실린 채로 비행기로 팜비치에 운반되어 요양에 힘쓰게 되었다. 수술의 상처가 그대로 크게 드러난 채 피가 계속 흘러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러나 갓 결혼한 재클린은 그 일을 태연하게 해냈다. 몇 개월 후, 다시 수술을 받을 만큼 체력이 회복되어 재수술을 받았다. 이번엔 어느 정도 성공이었다.
1956년 민주당대회에서 케네디는 영광스럽게도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을 맡게 되었다. 그가 연설을 하게 되자 그의 젊고 매력 있는 모습이며, 우아한 거동에 대회장에서나 TV중계를 보고 있던 유권자들 사이에서 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이런 여론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잭 자신도 당황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부통령 후보로 에스터스 키포버 상원의원과 쟁탈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했다. 그러자 그는 연단에 올라가서 만면에 웃음을 띄며 패배를 인정하고 키포버를 만장일치로 부통령 후보로 밀자고 제안했다. 이 깨끗한 태도에 대회장의 대의원뿐만 아니라 안방에서 TV를 시청하던 유권자들도 감동을 받았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질 것이 뻔한 스티븐슨과 함께 뛰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는 지명받지 못한 불운이 오히려 복이 되어 전국적으로 정치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것이 4년 후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1960년 1월 2일,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은 상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그 해의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겠다고 선언한다. 매스컴은 차라리 그가 부통령 후보로 나섰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해설하였다. 이제 겨우 43세이고 상원의원 2년 생이니 경험도 부족할 거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가 가톨릭 교도라는 것이었다. 신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 나라에서는 가톨릭 교도가 대통령이 되면 로마 교황으로부터 지령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 군단은 이러한 핸디캡을 향해 정면으로 덤벼들었다. 전부터 케네디의 친척, 친구, 지지자, 프런티어, 유급 운동자들이 아직은 이른 봄인 위스콘신 주에 대거 몰려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케네디의 육친들은 전국의 주를 돌아다니며 예의 티 파티를 벌였다. 전국의 매스컴은 처음으로 보는 신선하고 다채로운 케네디 캠페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그늘에서 전화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고, 3월 중순이 되자 70세가 되는 어머니까지 위스콘신 주로 달려왔다. 그리하여 보비가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하여 조찬클럽에서 연설하기도 하고 라디오나 TV에 출연하여 이야기하기도 했다.
예비선거로 많은 대의원표를 따놓고 있던 케네디는 뒤쫓아오는 스티븐슨파를 일거에 밀어내고 제1차 투표에서 지명을 획득했다. 공화당대회에서는 47세의 부통령 리처드 닉슨이 어려움 없이 지명을 땄고 헨리 캐보트 로지를 부통령 후보로 삼았다. 가을의 본선거에서는 케네디와 닉슨, 40대끼리 한판 붙게 된 것이다. 그 해는 세계가 극도로 긴장한 해였다. 소련에서는 미국의 U2기가 격추되었고, 파리에서 열린 동서수뇌회담에서는 흐루시초프가 신경질을 터뜨려 결렬되고 한국에서는 학생 데모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을 방문한 아이크는 안보반대 데모로 제대로 방문도 마치지 못하고 돌아섰다. 케네디와 닉슨 두 후보는 이들 국제 문제를 논쟁의제로 삼았다. 케네디가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라고 말하면, 닉슨은 “아니,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며 반론을 폈다. 그러나 쌍방의 쟁점에는 별로 두드러진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닉슨이 전국 50주를 모두 돌아다니는 유세여행에 지쳐서 TV 대토론에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음에 비해 케네디는 언제나 신선하고 기운찬 얼굴을 보인 점이라고 하겠다.
개표 당일이 되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이애니스의 케네디 단지에 모였다. 아침이 되자 케네디의 승리가 확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의 경호가 이미 집 주위를 둘러싸고 경계하고 있었다. TV에서는 닉슨의 패배선언이 방송되고 있었다. 케네디가의 형제자매들의 경쟁심과 단결이 아일랜드계 가톨릭 교도의 첫 대통령 당선이라는 기적을 가져온 것이다.
오오마에 마사오미 지음 / 장백일 옮김
第35代 大統領 就任辭
John F. Kennedy / 1961. 1. 20.
우리는 오늘 한 정당의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끝과 시작을 동시에 상징하며 또한 변혁과 갱신을 동시에 뜻하는 자유를 위하여 축하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러분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조상들이 170여년 전에 정해 놓은 엄숙한 선서를 하였습니다.
세계는 이제 많이 변했습니다. 인간은 온갖 형태의 빈곤을 타파할 수 있는 힘과 아울러 모든 인간의 생명을 말살할 수 있는 힘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쟁취하려던 바로 그 혁명적인 신념, 즉 인간의 권리는 국가의 寬容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주어진다는 신념은 아직도 전 세계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우리가 그러한 최초의 혁명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敵에게나 친구에게나 해 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 혁명의 횃불이 미국의 신세대에게,--금세기에 태어나서 전쟁을 겪고, 고되고 쓰라린 평화에 단련되고, 유구한 우리의 유산을 자랑으로 여기는 신세대의 미국인들에게, 또한 이 나라가 국내외에서 우리의 책임으로 여겨왔고, 또한 지금도 우리의 책임으로 여기고 있는 인간의 권리가 서서히 침해되는 것을 결코 방관하지 않을 신세대의 미국인들에게 계승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나라이건 못되기를 바라는 나라이건, 모든 나라에 대해, 우리는 자유의 생존과 성취를 위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를 것이며, 어떠한 부담이라도 짊어질 것이며, 어떠한 곤란에도 맞설 것이며, 어떤 친구라도 도울 것이며, 어떤 적에게라도 대항할 것을 알려 줍시다. 이러한 것을 약속, 아니 약속 이상의 것을 하는 바입니다.
우리와 같은 문화와 정신을 가진 오랜 동맹국들에 대하여는, 충실한 친구로서의 友情을 약속합니다. 뭉치면, 그 막강한 협동의 힘으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흩어지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서로 反目하고 분열된 상태에서는 강력한 도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생국에 대하여는, 식민지배가 종식되고, 이제 자유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을 환영하는 바이지만, 식민지배의 뒤를 이어 그보다 더욱 강압적인 독재체제가 들어앉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언제나 우리의 견해를 지지해주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들이 그들 자신의 자유를 지켜나가기만을, 또한 과거에 호랑이 등을 타고 권력을 추구했던 자들이 내부에서 멸망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전 세계의 半을 차지하고 있는 陋屋과 僻村에서 대량 빈곤의 굴레에서 헤어나려고 애쓰고 있는 국민들에 대하여는, 아무리 기간이 오래 걸릴 지라도, 그들의 自立을 돕기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겠습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도 아니요, 그들의 지지를 바라서도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유 사회가 빈곤한 다수를 도울 수 없다면, 그 사회는 부유한 소수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경 남쪽의 우리 자매 국가들에 대하여는, 자유민과 자주정부가 빈곤의 사슬을 타파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진보를 위한 새로운 동맹체제 하에서 우리의 약속을 실천에 옮기겠다는 특별한 약속을 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 평화적 혁명이 적대세력의 먹이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웃나라에 대하여, 아메리카의 그 어느 곳에서나 침략과 파괴행위를 막기 위해 기꺼이 그들과 협력할 것을 알려 줍시다.
전쟁의 기구가 평화의 기구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 유엔에 대하여는 우리의 지지를 다시 한번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곧 주권국가들의 세계기구인 유엔이 단순한 독설의 토론장이 되는 것을 막고, 신생국과 약소국에 대한 보호력이 강화되고, 그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 확대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적대시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약속이 아니라 要求를 하겠습니다. 즉, 과학이 내놓은 비참한 파괴력이, 계획적이건 우발적이건, 自爆裝置로서 모든 인류를 삼켜버리기 전에, 양 진영이 평화를 위한 추구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들에게 아무런 촉구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가 충분할 때에만 그 무기가 결코 사용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강대한 두 국가 진영은 어느 쪽도 현재의 노선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양 진영은 현대무기의 개발에 너무 많은 비용을 들이고 있으며, 가공할 원자무기의 확산에 극도로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인류의 마지막 전쟁의 손길을 억제하고 있는 불확실한 공포의 균형을 깨뜨리려고 서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공손함이 약하다는 징조는 아니며, 성실함은 언제나 입증되고야 만다는 것을 양 진영이 함께 기억하면서, 다시 시작합시다. 결코 두려움 때문에 협상하지는 맙시다. 그렇다고 해서 협상하기를 두려워하지도 맙시다.
우리들을 분열시키는 문제에 주력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단결시킬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연구해 봅시다.
우리 양 진영은, 처음으로 군비의 축소와 감시에 대한 중대하고 명확한 계획을 세우고, 다른 나라를 파괴할 수 있는 절대적인 파괴력을 모든 국가들의 절대적인 통제하에 두도록 해 봅시다.
우리 양 진영은, 과학의 공포가 아니라 과학의 신비를 찾아봅시다. 우리 함께 별을 탐구하고, 사막을 정복하고, 海底를 개발하고, 예술과 산업을 장려합시다.
우리 양 진영은 힘을 합하여, “무거운 짐을 내려 주어라, 압박받는 자를 풀어 주어라”고 한 이사야의 분부를 방방곡곡에서 명심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협동의 거점이 불신의 벽을 허물어 준다면, 우리 양 진영은 새로운 노력, 즉 새로운 세력 균형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질서――강자는 공정하고, 약자는 안전하며 평화는 보전되는 그러한 세계 질서를 창조하기 위하여 협력합시다. 이러한 일은 석달만에 될 일도 아니요, 삼년만에 될 일도 아닙니다. 나의 임기 중에 마칠 수 있는 일도 아니요, 어쩌면 이승에서 우리의 생애 중에 마칠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선 시작하고 봅시다.
우리가 가는 길의 최종적인 성패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나라가 건국된 이래로 어떤 세대의 미국인이든지, 모두 다 軍務에 종사하여 그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였습니다. 소집명령에 응하여 戰場에서 生涯를 마친 미국 젊은이들의 무덤은 세계의 어디에를 가나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팔은 또다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기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무기를 들라는 나팔도 아니요, 우리가 현재 전투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전투를 하라는 나팔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 때로는 희망에, 때로는 시련에 부딪히게 될 黎明의 투쟁, 곧 인류의 공동의 적인 독재와 빈곤과 질병과 전쟁 그 자체와의 투쟁을 위해 임무를 맡으라는 나팔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더욱 결실이 있는 삶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남국과 북국, 동방과 서방이 합심하여, 이러한 적에 대한 거대하고 전 세계적인 동맹체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역사적인 과업에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
유구한 역사 속에서 불과 몇세대의 사람들만이, 자유가 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자유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아 왔습니다. 나는 이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영합니다. 나는 우리 세대의 어느 누구도, 다른 세대의 여느 사람들과 그 처지를 바꾸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쏟는 정력과 믿음과 헌신은 우리나라를 밝혀 줄 것이며, 또한 그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모든 사람과, 그리고 灼熱하는 그 불길은 진실로 세계를 밝혀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조국이 여러분에게 무슨 일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전 세계의 국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마시고, 우리들이 함께 인류의 자유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마지막으로, 미국 국민과 전 세계 국민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같은 정도의 힘과 희생을 여기 있는 우리에게 요구하십시오. 양심만이 가장 확실한 보답을 주는 것이며, 역사만이 우리 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자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빌면서, 한편으로는 또 이 지구상의 하나님이란 진실로 우리들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 나라를 이끌고 전진합시다.
<출처 : tangchil [등급:박사] 님이 2001-10-08 18:24 작성>
President John F. Kennedy, Inaugural Address
January 20, 1961
We observe today not a victory of party but a celebration of freedom-- symbolizing an end as well as a beginning--signifying renewal as well as change. For I have sworn before you and Almighty God the same solemn oath our forebears prescribed nearly a century and three quarters ago.
The world is very different now. For man holds in his mortal hands the power to abolish all forms of human poverty and all forms of human life. And yet the same revolutionary beliefs for which our forebears fought are still at issue around the globe--the belief that the rights of man come not from the generosity of the state but from the hand of God.
We dare not forget today that we are the heirs of that first revolution. Let the word go forth from this time and place, to friend and foe alike, that the torch has been passed to a new generation of Americans--born in this century, tempered by war, disciplined by a hard and bitter peace, proud of our ancient heritage--and unwilling to witness or permit the slow undoing of those human rights to which this nation has always been committed, and to which we are committed today at home and around the world.
Let every nation know, whether it wishes us well or ill, that we shall pay any price, bear any burden, meet any hardship, support any friend, oppose any foe, to assure the survival and the success of liberty. This much we pledge--and more.
To those old allies whose cultural and spiritual origins we share, we pledge the loyalty of faithful friends. United, there is little we cannot do in a host of cooperative ventures. Divided, there is little we can do--for we dare not meet a powerful challenge at odds and split asunder.
To those new states whom we welcome to the ranks of the free, we pledge our word that one form of colonial control shall not have passed away merely to be replaced by a far more iron tyranny. We shall not always expect to find them supporting our view. But we shall always hope to find them strongly supporting their own freedom--and to remember that in the past, those who foolishly sought power by riding the back of the tiger ended up inside.
To those peoples in the huts and villages of half the globe struggling to break the bonds of mass misery, we pledge our best efforts to help them help themselves, for whatever period is required--not because the Communists may be doing it, not because we seek their votes, but because it is right. If a free society cannot help the many who are poor, it cannot save the few who are rich.
To our sister republics south of our border, we offer a special pledge --to convert our good words into good deeds--in a new alliance for progress--to assist free men and free governments in casting off the chains of poverty. But this peaceful revolution of hope cannot become the prey of hostile powers. Let all our neighbors know that we shall join with them to oppose aggression or subversion anywhere in the Americas. And let every other power know that this hemisphere intends to remain the master of its own house.
To that world assembly of sovereign states, the United Nations, our last best hope in an age where the instruments of war have far outpaced the instruments of peace, we renew our pledge of support--to prevent it from becoming merely a forum for invective--to strengthen its shield of the new and the weak--and to enlarge the area in which its writ may run.
Finally, to those nations who would make themselves our adversary, we offer not a pledge but a request: that both sides begin anew the quest for peace, before the dark powers of destruction unleashed by science engulf all humanity in planned or accidental self-destruction.
We dare not tempt them with weakness. For only when our arms are sufficient beyond doubt can we be certain beyond doubt that they will never be employed.
But neither can two great and powerful groups of nations take comfort from our present course--both sides overburdened by the cost of modern weapons, both rightly alarmed by the steady spread of the deadly atom, yet both racing to alter that uncertain balance of terror that stays the hand of mankind's final war.
So let us begin anew--remembering on both sides that civility is not a sign of weakness, and sincerity is always subject to proof. Let us never negotiate out of fear. But let us never fear to negotiate.
Let both sides explore what problems unite us instead of belaboring these problems which divide us.
Let both sides, for the first time, formulate serious and precise proposals for the inspection and control of arms--and bring the absolute power to destroy other nations under the absolute control of all nations.
Let both sides seek to invoke the wonders of science instead of its terrors. Together let us explore the stars, conquer the deserts, eradicate disease, tap the ocean depths, and encourage the arts and commerce.
Let both sides unite to heed in all corners of the earth the command of Isaiah--to "undo the heavy burdens [and]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if a beachhead of cooperation may push back the jungle of suspicion, let both sides join in creating a new endeavor, not a new balance of power, but a new world of law, where the strong are just and the weak secure and the peace preserved. All this will not be finished in the first one hundred days. Nor will it finished in the first one thousand days, nor in the life of this administration, nor even perhaps in our lifetime on this planet. But let us begin.
In your hands, my fellow citizens, more than mine, will rest the final success or failure of our course. Since this country was founded, each generation of Americans has been summoned to give testimony to its national loyalty. The graves of young Americans who answered the call to service surround the globe.
Now the trumpet summons us again--not as a call to bear arms, though arms we need--not as a call to battle, though embattled we are --but as a call to bear the burden of a long twilight struggle, year in year out, "rejoicing in hope, patient in tribulation"--a struggle against the common enemies of man: tyranny, poverty, disease, and war itself.
Can we forge against these enemies a grand and global alliance, North and South, East and West, that can assure a more fruitful life for all mankind? Will you join in that historic effort?
In the long history of the world, only a few generations have been granted the role of defending freedom in its hour of maximum danger. I do not shrink from this responsibility--I welcome it. I do not believe that any of us would exchange places with any other people of any other generation. The energy, the faith, the devotion which we bring to this endeavor will light our country and all who serve it--and the glow from that fire can truly light the world.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together what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
Finally, whether you are citizens of America or citizens of the world, ask of us here the same high standards of strength and sacrifice which we ask of you. With a good conscience our only sure reward, with history the final judge of our deeds, let us go forth to lead the land we love, asking His blessing and His help, but knowing that here on earth God's work must truly be our own.
서베를린 연설문
President John F. Kennedy / s Berlin Wall Speech (1963.6.26 / google)
『모든 자유인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베를린 시민이므로 저 또한 한 自由人으로서 베를린 시민임이 자랑스럽습니다』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 Ich bin ein Berliner."
존 F. 케네디
미국 제35代 대통령. 매사추세츠주 출생. 하버드大 졸업. 해군 장교로 2차 대전 참전. 상원의원을 거쳐 1960년 대통령에 선출. 1963년 11월 암살됨.
I am proud to come to this city as the guest of your distinguished mayor, who has symbolized throughout the world the fighting spirit of West Berlin. And I am proud to visit the Federal Republic with your distinguished chancellor, who for so many years has committed Germany to democracy and freedom and progress, and to come here in the company of my fellow American General Clay, who has been in this city during its great moments of crisis and will come again if ever needed. 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 Civis Romanus sum. Today, in the world of freedom, the proudest boast is Ich bin ein Berliner.
I appreciate my interpreter translation my German! There are many people in the world who really dont understand, or say they dont, what is the great issue between the free world and the Communist world. Let them come to Berlin. There are some who say that communism is the wave of the future. Let them come to Berlin. And there are some who say in Europe and elsewhere we can work with the Communists. Let them come to Berlin. And there are even a few who say that it is true that communism is an evil system, but it permits us to make economic progress. Lass sie nach Berlin kommen. Let them come to Berlin.
Freedom has many difficulties and democracy is not perfect, but we have never had to put a wall up to keep our people in, to prevent them from leaving us. I want to say, on behalf of my countrymen, who live many miles away on the other side of the Atlantic, who are far distant from you, that they take the greatest pride that they have been able to share with you, even from a distance, the story of the last eighteen years. I know of no town, no city, that has been besieged for eighteen years that still lives with the vitality and the force, and the hope and the determination of the city of West Berlin. While the wall is the most obvious and vivid demonstration of the failures of the Communist system, for all the world to see, we take no satisfaction in it, for it is, as your mayor has said, an offense not only against history but an offense against humanity, separating families, dividing husbands and wives and brothers and sisters, and dividing a people who wish to be joined together.
What is true of this city is true of Germany―real, lasting peace in Europe can never be assured as long as one German out of four is denied the elementary right of free men, and that is to make a free choice. In eighteen years of peace and good faith, this generation of Germans has earned the right to be free, including the right to unite their families and their nation in lasting peace, with good will to all people. You live in a defended island of freedom, but your life is part of the main. So let me ask you, as I close, to lift your eyes beyond the dangers of today, to the hopes of tomorrow, beyond the freedom merely of this city of Berlin, or your country of Germany, to the advance of freedom everywhere, beyond the wall to the day of peace with justice, beyond yourselves and ourselves to all mankind.
Freedom is indivisible, and when one man is enslaved, all are not free. When all are free, then we can look forward to that day when this city will be joined as one and this country and this great continent of Europe in a peaceful and hopeful globe. When that day finally comes, as it will, the people of West Berlin can take sober satisfaction in the fact that they were in the front lines for almost two decades.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 Ich bin ein Berliner.●
저는 서베를린이 갖고 있는 불굴의 정신을 全세계에 잘 알려주신 저명하신 시장님의 초청으로 이 도시를 방문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지난 수년 동안, 독일이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진보를 위해 全力을 다할 수 있도록 이 나라를 이끌어 오신 총리님과 함께 이 도시를 방 문하게 된 것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저의 친구인 미 국의 클레이 장군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클레이 장군은 이 도시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이곳에 있었고,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또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2000년 전 가장 큰 자랑 거리는 Civis Romanus sum이 었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Ich bin ein Berliner」입니다. 내 독일어를 옮겨준 통역에게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는 자유세계와 공산세계 간의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인지 정말 모 르는 사람들도 있고, 모르는 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베를린에 오게 합시다. 세상에는 공산주의가 미래의 흐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 니다. 그들도 베를린에 오게 합시다. 유럽이나 다른 곳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베를린으로 데려 옵시다. 공산주의는 악마의 제도지만, 경제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라 고 말하는 이들도 일부 있는 모양인데, 그들도 베를린으로 오게 합시다. 자유란 어려운 것이고, 민주주의가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높은 담을 쌓아 사람들을 가두고, 그들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비록 대서양 반대편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먼 곳에 서나마 지난 18년간의 역사를 여러분과 共有하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 해온 미국인들을 대신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서베를린은 18년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활력과 힘, 희망과 결의를 잃지 않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지구상 어느 곳에도 이런 도시는 없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체제의 실패를 가장 생생하고 명백하게 세계 앞에서 보 여주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는 흡족할 수가 없습니다. 시장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남편과 아내, 형제 자매들을 갈라놓고,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떼어놓는 것은 역사에 反하는 일일 뿐 아니라 인륜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를린에 진리인 것은 독일에도 진리이듯이 네 명 중 한 명의 독일인이 자 유인으로서의 기본권, 즉 자유로운 선택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한, 유럽 에서 지속적이고 진정한 평화가 이뤄지기는 어렵습니다. 평화와 착한 신념 을 18년 동안 유지하면서, 독일의 현 세대는 자유로울 권리, 지속적인 평화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善意로써 가족과 조국을 통일할 권리를 얻었습 니다. 여러분들은 자유의 섬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 은 중심에 속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의 위 험을 넘어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베를린市나 독일의 자유를 넘어서서 모든 곳에서의 자유의 전진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베를 린 장벽 저 너머의 정의로운 자유의 날, 너와 나를 넘어서서 全인류를 생각 하라는 것입니다.
자유란 불가분의 것이므로 누군가 단 한 사람이 노예상태에 있어도 모든 사 람이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날, 우리는 비로 소 이 도시가 평화롭고 희망에 찬 이 지구상의 유럽 대륙 그리고 독일의 한 도시로 결합되는 그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날이 오면, 서베를린 시민들은 20년 가까이 최전방에 있었다는 사 실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자유인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베를린의 시민이므로 저 또한 한 자 유인으로서 「Ich bin ein Berliner」란 말이 자랑스럽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詩人 로버트 프로스트 추모 연설
(1963년 10월27일)
비단 힘 때문만이 아니라 그 文明 때문에 全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I look forward to an America which commands respect throughout the world not only for its strength but for its civilization as well.”
번역·해설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강사
[原文] John F. Kennedy Remembers Robert Frost(October 27, 1963)
This day, devoted to the memory of Robert Frost, offers an opportunity for reflection which is prized by politicians as well as by others and even by poets. For Robert Frost was one of the granite figures of our time in America. He was supremely two things―an artist and an American.
A nation reveals itself not only by the men it produces but also by the men it honors, the men it remembers. In America our heroes have customarily run to men of large accomplishments. But today this college and country honors a man whose contribution was not to our size but to our spirit; not to our political beliefs but to our insight; not to our self-esteem but to our self-comprehension.
In honoring Robert Frost, we therefore can pay honor to the deepest sources of our national strength. That strength takes many forms, and the most obvious forms are not always the most significant.
The men who create power make an indispensable contribution to the nation’s greatness. But the men who question power make a contribution just as indispensable, especially when that questioning is disinterested.
For they determine whether we use power or power uses us. Our national strength matters; but the spirit which informs and controls our strength matters just as much. This was the special significance of Robert Frost. He brought an unsparing instinct for reality to bear on the platitudes and pieties of society. His sense of the human tragedy fortified him against self-deception and easy consolation.
“I have been,” he wrote, “one acquainted with the night.” And because he knew the midnight as well as the high noon, because he understood the ordeal as well as the triumph of the human spirit, he gave his age strength with which to overcome despair.
At bottom he held a deep faith in the spirit of man. And it’s hardly an accident that Robert Frost coupled poetry and power. For he saw poetry as the means of saving power from itself.
When power leads man toward arrogance, poetry reminds him of his limitations. When power narrows the areas of man’s concern, poetry reminds him of the richness and diversity of his existence. When power corrupts, poetry cleanses. For art establishes the basic human truths which must serve as the touchstones of our judgment. The artist, however faithful to his personal vision of reality, becomes the last champion of the individual mind and sensibility against an intrusive society and an officious state.
The great artist is thus a solitary figure. He has, as Frost said, “a lover’s quarrel with the world.” In pursuing his perceptions of reality, he must often sail against the currents of his time. This is not a popular role.
If Robert Frost was much honored during his lifetime, it was because a good many preferred to ignore his darker truths. Yet in retrospect we see how the artist’s fidelity has strengthened the fiber of our national life. If sometimes our great artists have been the most critical of our society, it is because their sensitivity and their concern for justice, which must motivate any true artist, makes him aware that our nation falls short of its highest potential.
I see little of more import!ance to the future of our country and our civilization than full recognition of the place of the artist. If art is to nourish the roots of our culture, society must set the artist free to follow his vision wherever it takes him.
We must never forget that art is not a form of propaganda; it is a form of truth. And as Mr. MacLeish once remarked of poets, “There is nothing worse for our trade than to be in style.”
In free society, art is not a weapon and it does not belong to the sphere of polemics and ideology. Artists are not engineers of the soul. It may be different elsewhere. But democratic society―in it―the highest duty of the writer, the composer, the artist is to remain true to himself and to let the chips fall where they may.
In serving his vision of the truth, the artist best serves his nation. And the nation which disdains the mission of art invites the fate of Robert Frost’s hired man “the fate of having nothing to look backward to with pride and nothing to look forward to with hope.” I look forward to a great future for America―a future in which our country will match its military strength with our moral restraint, its wealth with our wisdom, its power with our purpose.
I look forward to an America which will not be afraid of grace and beauty, which will protect the beauty of our national environment, which will preserve the great old American houses and squares and parks of our national past and which will build handsome and balanced cities for our future.
I look forward to an America which will reward achievement in the arts as we reward achievement in business or statecraft. I look forward to an America which will steadily raise the standards of artistic accomplishment and which will steadily enlarge cultural opportunities for all of our citizens.
And I look forward to an America which commands respect throughout the world not only for its strength but for its civilization as well. And I look forward to a world which will be safe not only for democracy and diversity but also for personal distinction.
Robert Frost was often skeptical about projects for human improvement. Yet I do not think he would disdain this hope. As he wrote during the uncertain days of the Second War take human nature altogether since time began… And it must be a little more in favor of man, Say a fraction of one percent at the very least… Our hold on the planet wouldn’t have so increased.
Because of Mr. Frost’s life and work, because of the life and work of this college, our hold on this planet has increased.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모하는 오늘은 詩人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정치가들도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우리 시대 미국의 화강암과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최고의 면모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술가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는 그 나라가 배출하는 인물만이 아니라, 그 나라가 기념하는 인물, 기억하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미국의 영웅들은 보통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대학과 이 나라는 우리의 규모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에 기여한 사람을 기념 합니다. 우리의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우리의 통찰에 기여한 사람을 기념합 니다. 우리의 自尊(자존)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기여한 사람을 기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버트 프로스트를 기념함으로써 우리나라 힘의 가장 깊은 원천을 기념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눈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반드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 나라가 위대해지는 데 권력을 창조하는 사람들의 기여는 불가결합니다. 그러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기여 역시 불가결합니다. 그 문제 제기가 私心(사심)없는 태도에서 나온 것일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권력을 이용하느냐 아니면 권력이 우리를 이용하느냐를 결정하는 것 이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힘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의 본질 을 이루며 그 힘을 통제하는 정신 역시 똑같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그는 현실을 가차 없이 꿰뚫는 直觀(직관)을 통하여 사회의 진부하고 위선적 인 태도들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인간의 비극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기만과 손쉬운 위안에 굳건하게 저항했습니다.
『나는 밤을 아는 사람이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는 대낮만이 아니라 한밤중도 알았기 때문에, 인간 정신의 승리만이 아니라 시련도 이해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의 바탕에는 인간 정신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었습니다. 로버트 프 로스트가 詩와 권력을 결합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권력을 권력으로 부터 구원하는 수단이 詩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인간을 오만으로 몰고 갈 때 詩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줍니다. 권력이 인간의 관심 영역을 좁힐 때 詩는 인간 존재의 풍요와 다양성을 일깨워줍니다. 권력이 부패할 때 詩는 정화해줍니다.
예술은 우리 판단의 시금석이 되는 기본적인 인간 진실들을 확립합니다. 예술가가 현실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충실히 따른다 해도, 결국 그는 사회의 침입과 국가의 개입에 맞서 개인적 정신과 감성을 옹호하는 마지막 보루가 됩니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는 고독한 인물입니다. 프로스트 말대로, 예술가는 「 세상과 사랑싸움을」 합니다. 예술가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좇다 보면 시대의 조류를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기 있는 역할이 아닙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생전에 큰 명예를 누렸다 해도,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 드러낸 어두운 진실들을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예술가의 충실성은 우리나라의 삶의 핵심을 강화해주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이 우리 사회에 가장 비판적 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의 동력인 예민한 감수성과 정의 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리나라가 잠재적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와 우리 문명의 미래를 놓고 볼 때 예술가의 자리를 온전히 인정 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예술이 우리 문화의 뿌리를 북돋워주는 것이라면, 사회는 예술가가 자신의 비전이 이끄는 대로 어디로 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예술이 선전의 형식이 아님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술은 진리의 형식입니다. 매클리시가 시인들에 대해 말했듯이, 『업으로 치자면 시를 쓰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자유 사회에서 예술은 무기가 아니며, 논쟁과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영혼의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다른 곳에 가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 사회에서는 작가, 작곡 가, 화가의 최고의 의무는 결과에 관계없이 끝까지 자신에게 진실한 것입니다. 예술가는 진실에 대한 자신의 비전에 복무함으로써 나라에 가장 큰 봉사를 합니다. 예술의 임무를 경멸하는 나라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詩에 나오는 고용된 사람의 운명을 맞이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돌아볼 것도 없고, 희망을 가지고 바라볼 것도 없는 운명』입니다.
나는 미국의 위대한 미래를 바라봅니다. 우리나라의 군사력이 도덕적 억제력에 부합하고, 富가 지혜에 부합하고, 권력이 목적에 부합하는 미래입니다.
나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국, 환경의 아름다움을 보호 하는 미국, 과거로부터 내려온 오래고 큰 집과 광장과 공원을 보존하는 미국,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균형 잡힌 당당한 도시를 건설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나는 사업이나 정치적 업적에 보답을 하듯이 예술적 업적에도 보답을 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예술적 성취 수준을 꾸준히 높여가고, 국민 모두를 위하여 문화적 기회를 꾸준히 확대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비단 힘 때문만이 아니라 그 문명 때문에 全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나는 민주주의와 다양성만이 아니라 개인적 우수성도 안전하게 육성될 수 있는 세계를 바라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인간의 개선을 위한 기획들에는 회의적인 경우가 많았습 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런 희망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불확실한 시기에 그가 이렇게 노래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간을 모두 모아보아라… 인간에게 호의적인 쪽이 그래도 조금 더 많을 것이다. 다만 일 퍼센트의 몇 분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 行星에 대한 우리의 지배력이 이처럼 확대되지는 못했으리라.” 프로스트의 생애와 작품 때문에, 이 대학의 역사와 업적 때문에,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배력은 확대되었습니다.
<출처: 노원마니아>
쿠바 미사일 위기 발생(1962.10.22)
1962년 10월 22일,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조치를 발표하는 케네디 대통령 ‘치킨게임’이란 말을 아시는지? 도로의 양쪽 끝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차를 몰고 전속력으로 마주보며 달려오다가 충돌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 말입니다. 이 경기에서는 핸들을 꺽은 사람은 ‘치킨’, 즉 겁쟁이로 낙인찍히고 말죠. 하지만 어느 한 쪽도 핸들을 꺾지 않는다면? 둘 다 게임에서는 승자가 되겠지만, 결국 충돌하면서 양쪽 모두 끝장을 보게 되겠죠. 1962년 오늘,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전 인류의 생명을 담보삼아 치킨게임을 벌입니다. 1959년,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하자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바티스타 정권의 든든한 뒷배였던 미국은 새로운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고, 생존에 위협을 느낀 쿠바는 소련과 밀착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토지개혁과 국유화 등 일련의 사회주의 개혁과정에서 70여 만 명의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들 반 카스트로 세력을 부추겨 1961년 4월, 쿠바 남부 ‘피그스’ 만(灣)에 상륙작전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쿠바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반 카스트로 세력의 쿠바 침공은 실패로 돌아가고, 쿠바와 미국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습니다. 1962년 미국은 쿠바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봉쇄에 들어가고, 카스트로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소련의 후르시초프는 쿠바에 대한 방어를 약속합니다. 미군의 항공정찰 사진에 나타난 미사일 시설물 1962년 여름, 미국 정부는 쿠바에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10월 14일 U-2기를 이용한 항공정찰을 통해 쿠바에 4곳의 미사일 기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미국 정부는 이를 미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하죠. 당시 미소간의 핵전력은 7대 3 정도로 미국이 소련에 비해 우세를 점하고 있었고, 핵탄두를 투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ICBM)과 잠수함발사미사일(SLBM)의 숫자에 있어서도 미국이 압도적 우위에 있었습니다. 한데 소련이 미국의 동부해안에서 불과 9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한다면, 미국의 핵 우위는 상쇄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케네디 대통령과 커티스 르메이 미 공군 참모총장(앉은 이들 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르메이 대장은 당시 미 군부 강경파 중 대표적 인물로 쿠바와 소련에 대한 전면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습니다 팽팽한 긴장 속에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10월 22일, 케네디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한 대국민 연설에서 소련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전달하죠.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 중이며, 미국과 서방 세계의 안전을 위해 쿠바에 무기를 운반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해상봉쇄를 단행한다’는 것이었죠. (당시 케네디의 표현으로는 봉쇄를 의미하는 blockade 대신 격리라는 뜻의 quarantine를 사용합니다) 또한 소련에 대해 14일 이내에 쿠바에 설치된 미사일을 철수하라는 압력을 가하죠.
![]() 소련 화물선과 나란히 항해중인 미 해군 구축함 피를 말리는 듯했던 일주일간의 군사적 대치상황은 10월 28일, 후르시초프 서기장이 전격적으로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 할 것을 선언하면서 마무리 됩니다. 전문가들은 만약 당시 핵전쟁이 벌어졌다면 미국과 소련 양국에서 각각 1억 명, 유럽에서도 수 백 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죠. 46년 전 오늘은 인류가 핵전쟁에 가장 근접하게 되었던 계기가 된 날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곰PD전쟁이야기>
케네데 암살 장면(화보) |
오픈카가 댈라스 파클랜드 병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가 6초. 병원에 도착하기 전 대통령은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당시 나이 46세. 뉴 프런티어 정신을 제창, 미국인들에게 전후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며 패기만만하게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된 지 3년만이었다.
살해 용의자인 오스왈드는 줄곧 범행을 부인하다가 사건 이틀 후 형무소로 이송 도중 댈러스의 나이트 클럽 주인에 의해 암살됐다. 10개월 뒤 워런조사위원회는 대통령이 뒷통수에 총을 맞았다고 결론지었으나 사건 당시 현장을 포착한 유명한 비디오 필름은 대통령이 흉탄을 맞는 순간 머리가 뒤로 젖혀졌음을 보여줬다. 댈라스에서 시신을 담았던 관과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의 관이 달랐다는 관계자들의 증언이 나왔다.
케네디 죽음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 중 하나는 당시 미국에 냉전의 종언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있었고 케네디는 그들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출처: 세상만사요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