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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구 가위질 당했던 언론검열 .............
지난 79년 말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각종 언론도 검열을 받아야 하는 어려운 시기를 맞아야 했다.
당시 시청상황실에 마련된 군 검열 단은 각 신문사에서 가져오는 기사 대장을 받아 령관 급들이 가위질을 해댔다.
그래서 처음엔 기사가 통 채로 삭제되면 빈칸을 메우지 않고 그대로 신문을 내보내기도 했으나 좀 뒤에는 이런 것도 용인 안 해줘 꼭 다른 기사로 대체해 빈칸 없는 신문을 만들어 내놔야 했다.
따라서 마감시간을 앞두고 기사대장을 들고 신문사와 검열 사무실을 왔다갔다하는 일이 여간 불편한일이 아니었다.
이 대장을 갖고 다니는 일을 기자들이 교대로 맡아 했다.
이런 상황인 만치 검열장교에게 행여나 잘못 보일라치면 한 번이라도 더 왔다갔다 해야하고 또 그만큼 마감시간도 지연돼 제작, 발송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이래서 이런 불편을 줄이기 위해 신문사의 국장급이 검열관을 상대로 정치(?)에 나서기도 했고 자연히 양쪽이 술자리도 함께 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당시의 모 신문사 편집국장이 그들의 추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당의 중역으로까지 기용되는 신화(?)를 낳기도 했다.
하여튼 이런 검열 와중에서 신문을 만들어야 했던 당시, 필자도 검열사무소에 몇 차례나 대장을 들고 왔다 갔다 했지만 주간한국의 경우 정준용 화백의 만화(복사 사진)가 통째로 삭제되고 또 필자가 쓴 「동 가족」순례기사인 「종로구 궁정동」등등이 역시 대폭 삭제되는 등의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궁정동은 당시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곳이어서 처음부터 이런 기획을 한다는 일 자체부터 좀 무리한 일이기도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좀 위험한 일도,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도전해보는 기자정신의 속성 때문에 시도된 것이었다.
이런 여건상 그래도 기사내용은 가급적이면 부드럽게 표현하는 등 조심히 다뤘으나 궁정동일대(일부러 대통령시해 현장이 보이는 쪽)를 택한 앵글의 사진이 통째로 날라 가고 기사뒷부분에 있는 「조심스런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은 이곳 주민에게 큰 부담이 된다고 한다. 우선 아이들이 비록 골목길에서도 마음대로 뛰어 놀 수가 없다. 사복 신사들이 아이들에게 다른 곳에 가서 놀라는 주의를 주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
주민들이 살기에 불편한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길 쪽에 창문이 나있는 창문을 열어 놓았다가는 낯선 신사들이 자주 방안을 들여다 봐 한 여름에도 창문을 닫고 지내야 한다고 한 주민은 털어놓는다.
여러 가지 통제 때문에 자연히 밤 10시만 지나면 인적이 없는 거리가 된다.
이런 덕분에 도난 사건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밤낮 대문을 열어놓고 살아도 괜찮고 청소와 소독이 제일 잘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10·26사건」뒤로는 많이 달라지고 있다.
우선 골목길이나 차 없는 큰길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낯선 신사들이 사라져 거리의 풍경은 한결 부드러워 졌고 동네 개구쟁이들의 목성이 높아가고 있다고 한다.」는 맨 끝까지가 잘려 나갔다.
다행히 이 동네에는 토박이도 저명인사도 모두 딴 곳으로 이사가 한 명도 없다는 동장의 얘기는 잘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 아기 고환처럼 중요한 맨 끝 얘기가 다 잘려나가고 또 사진까지 잘린 만큼 나머지 빈칸을 다른 기사로 메운다해도 「궁정동」기사는 뼈다귀 없는 갈비탕 격이어서 싣지 못하고 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상계엄령 속에서도 당시 국민들은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싹틀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낙관적인 희망을 갖는 경향이 많았고 이래서 「물은 흐르기 마련」이라는 말들이 유행했다.
심지어 동료부원들의 경우도 데스크인 부장은 물론 거의 전원이 완전한 자유선거가 이뤄지고 이젠 본격적인 민주화가 이뤄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단지 한사람인 필자는 좀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는 한강다리들의 실태를 취재하다가 당시 컴퓨터설계의 개가인 서독 디비닥 공범의 원효대교 설계자인, 육사출신의 한 인사를 몇 차례 만나 취재 끝에 군의 움직임을 듣는 통에 군의 집권작전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필자는 「물은 흐르지 않을 것 같다.」는 평을 했는데 뒤에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하는 등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같은 부 동료들은 기차게 잘 알아 맞췄다며 「무슨 정보통이 있느냐?」는 질문까지 해왔다.
하여튼 이런 혼미한 상황 속에서나마 민주화에로의 열기가 높아가던 80년 초 어느 날 12층 강당에서 우리회사의 전 기자가 다 참가해 「군 검열을 즉각 중지하라.」는 대 정부, 대 회사 건의안을 놓고 열면 토론을 벌였다.
동창회 같은 때는 회칙 실력을 동원, 아예 사회를 맡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건설적인 안들을 많이 내놓기도 하고, 또 회장단의 운영 불합리성을 꼬집어 심지어 「총회 꾼으로 아주 적격이다.」는 동창들의 농 섞인 핀잔을 받기도 한 필자지만 기자 직을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 못해선 지 기자 모임 때는 함구만 해온 터였고 또 이날 모임 때는 정세가 혼미한 만큼 정말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저녁부터 시작된 회의가 밤9시가 넘어도 중구난방 식의 대 정부나 대 회사에 대한 발언만 산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2백 명에 가까운, 내노라 하던 기라성 같은 기자들도 다 모였건만 발언내용은 극히 빈약했고 심지어 여기자들도 두서 없는 주장들을 내놓고 있었으며 회장단도 회의진행 요령이 부족해 지지부진했다.
모두들 시장한데다 지루하기만 한 것 같았다.
회의에서는 기자답지 않게 이렇게 요령이 없는 그들에 답답함을 금치 못한 필자는 견디다 못해 일어나 「이제까지 긴 시간동안 각종의견들이 다 나온 만치 우리들의 뜻을 다 알게된 회장단에 대 정부 결의문작성, 대 회사 요청 건을 일단 모두 일임하자」는 긴급동의를 내 많은 제청을 받고 또 만장일치로 통과됨에 따라 이날 밤 회의는 간단하게 마무리 되어버렸다.
이런 소문은 어느새 회사 상부에 까지 알려져 이튿날 낮에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모 이사는 필자에게 「어! 배 차장 어젯밤에 수고 많이 했다며∼」라는 위로. 격려 투의 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화와는 반대로 대세가 기우러지기 시작한 한참 뒤에야 그 날 밤의 토론 효과가 무섭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회장단이 모두 검거되어 갔다. 특히 그 날 사회를 본, 기자협회 한국일보 지부장은 고대 후배였는데 괜스레 필자가 회장단에 대 정부 결의문 내는 일까지 일임하는 바람에 그들만 멍에를 뒤집어 쓴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얼마 뒤 회사측이 전 기자 사원들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 받아내고는 친 김대중씨 파 등 반정부 색깔이 짙은 기자들, 그리고 정말 비위사실이 많은 기자들의 사표를 대거 수리(이는 뒤에 언론청문회에서 허문도씨 등의 각본에 의해 보안사에서 주관한 것으로 밝혀졌지만)했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 날 밤 12층 강당회의에서 말을 많이 한 기자들은 대개 포함되었었다.
이래선 지 당시 조사부의 한 기자는 어느 날 필자에게 「배차장도 그 날 밤 꾀 큰 역할을 했는데 별탈이 없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사실 그 날 밤의 필자발언은 당시의 시국에 대한 발언은 일체 없었고 오로지 효율적인 회의진행으로 유도한 발언밖에 없었으니 어떤 문제가 생길 리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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