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자>-그들은 영웅이 아니다
거친 숨소리.
어두운 숲속을 달리는 두 소년.
그들을 뒤쫓는 위협적인 그림자들.
형~!
식은땀에 젖은 채 악몽에서 깨어나는 김혁(주진모 분).
그의 등에 난 끔찍한 상처들.
태국.
영춘(송승헌 분)과 태민(조한선 분), 그리고 혁은 무기밀매 조직원들이다.
혁은 급박한 와중에도 태국과 미얀마 국경 지역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다.
3개월 후, 혁과 영춘은 부산으로 밀입국한다.
오래 전 탈북한 혁은 헤어진 동생 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박 경위(이경영 분)는 동생을 찾으면 '손을 씻으라'고 당부한다.
"태국, 라오스, 미얀마를 거쳐 몽골로 넘어왔습니다."
"몽골엔 얼마나 있었어?"
"넉 달 정도 있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 김철(김강우 분)은 정부기관의 심문에 자신은 '혼자'라고 진술한다.
누적 된 피로에 심문 도중 의자에 앉은 채로 잠에 빠져드는 그의 몰골은 너무도 비참하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의 상처, 흙먼지에 찌든 덥수룩한 머리칼, 주르륵 흘러내리는 코피.
한국에 오기까지 낯선 땅에서 그가 겪었을 고통과 공포가 불안한 그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북한 최고 명문 대학인 '김책 공과대학'을 나온 수재인 김철은 '엄마를 죽게 만든 원수'를 찾아다녔다고 말한다.
반수면 상태이던 그의 눈빛이 일순 날카롭게 빛난다.
(김강우의 첫 등장은 강렬하다. 자연스러운 북한 말투, 피로에 지친 둔한 몸짓, 분노와 서글픔이 뒤섞인 눈빛은 '김철'이라는 인물에 내재된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감없이 전달한다. 켜켜이 쌓인 아픔은 어릴 적 헤어진 형인 혁을 만나면서 극적으로 표출된다)
"철아…김철이 맞지?…나 형이야."
천천히 고개를 든 철의 입가에 냉소가 떠오르고, 미세한 눈가의 떨림과 함께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보라우, 그래…잘 보라. 너 혼자 살겠다고 버리고 간 이 얼굴 똑바로 보라."
수용소에서 맞아 죽은 어머니에 대한 원한으로 오랫동안 형을 증오해 온 철.
"죽여버리겠어."
목을 조르는 동생의 분노를 피하지 않고 숨죽여 흐느끼는 혁.
안타깝고도 절절한 형제의 상봉이다.
(이 신에서 김강우의 에너지는 대단하다. 거친 태도 속에 숨겨진 철의 유약함을 순간순간 변화하는 표정으로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철은 형의 면회를 번번이 거부하고 혁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영춘은 은밀한 방법으로 형제의 만남을 주선한다.
"니가 주는 벌 얼마든지 받을 수 있어…대신 제발 헤어지지만 말자. 그거 하나만, 그거 하나만 하게 해 주라우."
혁과 영춘은 북한, 태국을 거쳐 부산까지 십 년 세월을 함께 해온 형제나 다름없는 관계다.
영춘은 혁에게 철을 위해 이번 거래가 끝나면 은퇴하라고 권유한다.
혁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태민은 혁을 함정에 빠뜨리고 간신히 탈출한 그는 박 경위에게 동생을 부탁하고 태국 경찰에 자수한다.
혁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영춘은 홀로 태국으로 건너가 배신한 조직을 몰살시키지만 다리에 총을 맞고 만다.
철이 하나원 텅 빈 목욕탕에서 소리죽여 오열하는 모습은 매정하던 그의 태도가 실은 형을 향한 오랜 원망과 그리움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는 걸 느끼게 한다.
3년 후, 박 경위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내려와 경찰이 된 철은 태민의 조직원들을 검거하고 진술을 확보한다.
(조폭 심문 중 철이 회상하는 인육에 관한 일화는 뼈에 사무친 그의 트라우마에 대한 방증이다. 혁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철의 모순된 태도는 그렇게 설득력을 얻는다)
혁이 수감되어있는 동안 태민은 러시아 마피아로부터 밀매한 총으로 숙적을 제거하고 킬러를 죽여 증거를 없애는 방법으로 부산을 평정하고 그로 인해 영춘과 혁까지 수사선상에 오르게 된다.
벌써 일 년 넘게 태민을 미행 중인 철.
'마약 팔고, 여자 팔고, 총 팔고, 사람 죽이는' 무법자 태민은 형을 거론하며 철을 도발하고 분노한 철은 '김혁과 나는 형제가 아니'라며 소리친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혁은 부산으로 돌아와 먼발치에서 철의 모습을 보며 안도한다.
총상 후유증으로 한 쪽 다리를 절며 허름한 주차관리소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영춘은 돌아온 혁과 뜨겁게 재회한다.
놀란 혁의 질문에도 영춘은 그저 '불의의 사고'라고만 대답한다.
혁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와신상담하던 영춘은 화려한 재기를 꿈꾸지만 철은 대리운전으로 연명하며 조용히 철의 주변을 맴돌 뿐이다.
삼촌인 정 사장(김해곤 분)을 밀어내고 보스 자리를 차지한 태민은 급기야 영춘까지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총기사건에서 철을 배제시키려는 조 검사(서태화 분)에게 형을 '범죄자, 배신자'로 규정하며 선을 긋는 철.
박 경위는 '배신 안 해본 니가 배신 해본 니 형 고통을 알 것 같냐'며 혁이 쓴 편지들을 주고, 어린 시절 해묵은 사진 한 장을 보며 철은 갈등한다.
혁은 경찰의 집중 감시로 사업에 차질이 생긴 태민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지만 그들의 만남으로 철은 사건에서 완전히 제외되고 조금씩 호전되던 형제의 관계는 철의 오해로 다시 악화되고 만다.
철이 형사가 되서 기쁘고 미안하고 행복하다는 혁.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온 철은 혁의 편지들을 보며 서럽게 운다.
'경찰의 반대말은 가족'이라던 이 형사(임형준 분)가 태민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철은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혁에게 말한다.
"부탁 하나만 할게. 이제 끝내자. 내 앞에서 사라져 줘, 제발…다시는 서로 보는 일 없도록 해 줘, 형!"
슬픈 미소를 지으며 혁은 동생 곁을 떠나고, 영춘은 혁에게 안녕을 고한다.
"건강하고, 다시 보자."
발톱을 감춘 채 숨죽이던 영춘은 태민의 경계를 풀게 한 후 회사를 습격해 금고를 부수고 비밀장부를 탈취한다.
때마침 영춘을 구하러 온 혁.
"10억, 을숙도, 12시 까지."
장부를 경찰서에 보내고 태민을 인질로 잡은 혁과 영춘은 배가 기다리고 있는 선착장으로 간다.
태민을 조검사에게 넘기려는 계획을 뒤늦게 전해 들은 철은 미친듯이 차를 달려 형에게로 가지만 태민의 부하들에게 붙들리고 만다.
"또 혼자서 어디로 도망가려고 하는 건데!"
"이젠 아무데도 안 가."
혼자 탈출하던 영춘도 결국 배를 돌려 혁에게로 돌아온다.
영춘으로 인해 위기를 모면하는 것도 잠시, 수적으로 절대적으로 불리한 세 사람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영춘이 죽기 전 철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행복한 새끼!'다.
영춘은 혁을 대신해, 혁은 철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다.
"우리 다시 돌아가자, 형.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내가 왜 왔는데…"
죽은 형을 껴안고 울부짖던 철은 자수하려던 태민을 쏘고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형, 우리 같이 가자."
다시는 손을 놓지 않겠다는 형제의 약속은 그렇게 지켜진다.
<무적자>가 1980년대 홍콩 액션 누아르의 시초로 불리는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을 리메이크 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늘 그렇듯이 완성도 높은 작품을 재구성하는 건 매력적인 일임과 동시에 그만큼의 위험도 따른다.
양날의 검이라고나 할까.
원작의 마크(영춘 역)가 장렬한 희생으로 우정과 의리의 전설이 된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무적자>는 혁과 영춘의 끈끈한 우정 외에도 혁과 철의 처절한 형제애가 주축이 되어 한국적인 정서로 재탄생 되었다.
원작의 서사를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도 환경과 시대적 변화에 따라(홍콩 반환을 앞둔 시점과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차이) 인물의 성격은 확연히 달라진다.
이들은 '영웅'이 아니라 어디에도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한 서글픈 '무적자'로서 잡초처럼 스러지는 것이다.
<영웅본색>과 <무적자>는 같은 듯 다른 영화다.
글/배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