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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 비평(마르크시즘 비평 / 마르크스주의 비평 / 맑스주의 비평)
이번 글은 맑시즘 비평에 대해서입니다. 맑스와 맑시즘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에 맑스를 쓰면서도 맑시즘을 쓰는 것은 조심스럽고 부담스럽습니다. 게다가 맑시즘이란 손을 대기엔 너무도 거대한 녀석이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적어야 할지도 막막했습니다. 맑스에 대해선 나름 열심히 읽어온 터라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이것저것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더 복잡했습니다. 더 쓸 말이 있으면 차후에 추가하도록 하고 이번에는 비평 방법론에 맞춰서 간단한 개념들만 몇 가지 적어보려고 합니다.
맑스의 경제학 이론이 이전 고전파 경제학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는 굳이 서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길고 비평과는 크게 연관이 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헤겔의 관념론과의 차이에 대해서도 적지 않겠습니다. 이것 역시 배경지식일 뿐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지용. 비록 변증법적 유물론은 어디서든 자주 언급될 수 있기에 적는 게 도움이 더 되겠지만 그 정도의 지식은 백과사전 정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으니 굳이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자본론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 개념들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그것이 어떻게 비평적 방법론을 통해 나타나는가를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교환가치 & 사용가치
맑스는 그의 자본론의 초입에서 상품에 대해서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상품의 축적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부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면 상품 분석을 가장 처음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 듯한데, 가뜩이나 어려운 책의 첫 장에서 야마포와 다른 상품을 비교해나가는 논증은 나중에는 구토까지 유발할 정도입니다. -_-; 하지만 이 논증은 굳이 요즘에 와서 다시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만 적겠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지닙니다. 사용가치는 상품이 사용될 수 있는 가치이고 교환가치는 상품이 교환 될 때의 가치입니다. 다시 말해 사용가치란 상품의 쓸모입니다. 망치가 있으면 망치의 사용 가치는 못을 두드리는 것이죠. 뭐 다른 것도 두드릴 수는 있지만……. 이왕이면 못으로 만족합시다.
교환가치는 사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가치인데 예를 들면 망치 하나로 못 10개를 교환할 수 있다면 이 차이가 교환가치인 셈입니다. 따라서 교환가치는 항상 상대적인 것이죠. 만약 어떤 이유로 못의 값어치가 올라가면 못의 교환가치는 올라가고 이것은 다른 모든 상품들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 다른 예로 우리나라에선 기름 값이 오르면 거의 모든 물가가 오르는데 이것은 교환가치가 움직이는 것입니다.(물론 사용가치는 그대로죠.) 아직 화폐를 설명하기 전이기 때문에 가격이라는 말을 하기엔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교환 가치'란 거의 '가격'을 의미하는 거라고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을 거라는 것을 밝혀두겠습니다.
교환가치를 보고 뭐 당연히 물가란 상대적인 것이니까, 그리고 모든 것은 변동하니까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맑스의 설명은 또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맑스는 모든 물건이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 공통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맑스가 말하는 이 공통 속성은 노동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어느 날 외계인이 지구에 내려와 듣도 보도 못한 무엇을 내밀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외계인이 내민 물건과 대체 무엇이 같은 값어치인지 짐작도 할 수 없으니 아무 것도 주지 못한 채 멀뚱히 볼 수밖에는 없습니다. 즉 외계인이 내민 물건의 교환가치를 알 수 없으니 뭘 줘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죠.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물물교환 장터에 있고 우리가 교환하려는 물건이 한 번 밖에 입지 않은 티셔츠 두 장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와 포장도 뜯지 않은 등산 가방을 놓고 말없이 티셔츠 한 장만 들고 사라진다면 우리는 뜻밖의 행운에 환호성을 지를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사탕 하나를 놓고 티셔츠 한 장을 가져간다면 우리는 당장 멱살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등산가방 > 티셔츠 > 사탕이라는 교환가치의 순위를 알 수 있을까요. 맑스는 모든 상품 안에 공통 속성, 즉 노동이 있기 때문에 다른 조건들이 같다면 노동의 정도가 상품의 교환가치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의문도 제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애초에 희소성이 높은 자원은 그 재료의 희소성 때문에 노동에 비하여 엄청난 가치를 가지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고. 이런 부분은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맑스가 말하는 노동에 의한 상품의 교환 가치의 결정이란, 평균 노동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희소성이 높은 자원 또한 노동시간으로 환원이 가능하다고 말이죠. 약간 복잡할 수 있으니 한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100명의 심마니가 산에 올라 산삼을 찾는데 이 100명이 각각 1년 동안 산삼을 하나씩 캤다면 1년에 산삼이 100개 나옵니다. 그런데 경우를 달리해서 만약 이 100명의 심마니가 1년 동안 산삼을 찾아 헤맸는데 단 한 명만 1개의 산삼을 캤다면 산삼은 1년 전부를 해도 1개 나온 셈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두 경우에 100명의 심마니가 산삼을 찾기 위해 투자한 노동시간은 같습니다. 개수의 차이는 있지만 노동시간은 같으니 이 경우에는 산삼을 하나 캔 경우가 산삼을 100개 캔 경우보다 100배의 가치를 갖는 셈입니다. 즉, 재료의 희소성이란 그것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희소한 것이기에 그것 또한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결국 노동이 많이 집약된 상품이 비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흡사 수요ㆍ공급 법칙과 비슷한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묘하게 다릅니다. 수요공급이 판매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맑스의 교환가치는 생산에 맹점이 있는데 이 두 가지 개념은 간혹 꼬이기도 하고 서로 보완을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화폐
상품이 교환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물물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물물교환이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편리하게 할 방법을 고안하게 됩니다. 가장 처음으로 모든 상품을 한 가지 다른 상품으로 교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석기시대였다면, 잘 다듬어진 돌칼은 조개껍질 두 개, 덜 다듬어진 돌칼은 조개껍질 한 개, 활과 화살은 조개껍질 세 개. 이런 식으로 한 가지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을 교환할 수 있으면 물물교환은 조개껍질이라는 대체물로 인해 보다 편해질 것입니다. 처음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역사에 등장했던 가장 우람한 대체물은 금(金)인데, 이것이 요즘에는 화폐로 변화했습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 화폐는 재미있는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일단 물물교환에서부터 나온 화폐의 특성을 보면 화폐를 사이에 둔 두 상품이 존재해야만 화폐는 존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화폐는 대체물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상품 - 화폐 - 상품'으로 이어지는 교환 과정에서는 화폐가 없어도 '상품-상품'의 교환이 가능하지만 두 상품 중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화폐 또한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화폐에 속성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점 잊히기 시작합니다. 특히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갈수록 분업화되어 한 가지 상품만 생산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어떻게든 화폐로 바꾸지 않으면 다른 상품 모두를 구입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가 생산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모든 상품을 열망하게 되는데 이것은 각각의 상품을 갈망하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화폐를 숭배하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사실은 화폐가 아닌 화폐를 통한 다른 여러 상품들, 그에 대한 욕망을 열망하는 것인데도 ‘화폐’자체를 욕망하는 것이죠. 이로 인해 사람들은 화폐를 보면서 화폐가 어떤 신비한 힘,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만능의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보통 화폐의 물신적 성격이라고 부르는데, 맑스는 이 화폐의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치고자 했습니다.
자본
교환가치와 화폐라는 틀을 따라 다음에 설명할 것은 자본입니다. 이 자본까지 보고 나면 이제 맑시즘에서 가장 비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맑시즘에서 화폐와 자본은 다른 개념입니다. 쉽게 보면 둘 다 돈인데 서로 다릅니다. 자본은 축적을 위해 운동하는 화폐입니다. 예를 들어 '상품 - 화폐 - 상품'의 과정에서 화폐는 상품을 구매/판매하기 위해 개입한 것이고 이 때 교환된 상품은 사용가치를 따라 구매자가 소비하게 됩니다. 이때의 화폐는 그냥 돈입니다. 그런데 '화폐 - 상품 - 화폐'의 과정도 있습니다.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상품을 이용하는 화폐. 이 화폐가 바로 자본입니다.
이 때 '화폐 - 상품 - 화폐'의 구도에서 상인이 흥정을 통해 더 많은 이윤을 내는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맑스가 산업화를 바라보며 자본론을 썼던 것을 생각해보기시 바랍니다.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움직이는 돈, 자본이 가장 명료하게 가리키는 것은 사실 광장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소상인이 아니라 거대 산업자본입니다.
예를 들어, 한 상인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구매했다면, 여기까지는 '화폐 - 상품'의 과정입니다. 만약 이 상인이 이것을 흥정을 통해 더 비싼 값에 판다면 그것 역시 '화폐 - 상품 - 화폐'의 과정으로 자본이 움직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공한다면 상인은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상인은 노동자를 고용해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공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상인은 '화폐 - 상품+또 다른 상품(노동)' 까지의 과정에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다이아몬드 원석의 가공이 끝나고 다이아몬드 원석보다 더 가치있는 다이아몬드가 되면 이걸 내다 팔면 됩니다. 그럼 이제 비로소 '화폐 - 상품 - 화폐'의 과정이 완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내다 팔았을 때보다 더 많은 이윤을 얻습니다. 이것이 산업자본이며 맑스가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했던 것입니다. 중간에 끼어서 노동했던 노동자는 이용만 당할 뿐 불쌍하다는 사실 말이죠.
여기까지 왔다면 맑시즘 비평에 대한 전제는 거의 다 알게 되었습다. 자본론은 정말 미친 듯이 길고 어렵지만 굳이 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다음부터가 맑시즘의 핵심이기는 한데, 여기부턴 그래도 좀 낫습니다.
노동과 착취
자본가가 '화폐 - 상품 - 화폐'의 과정에서 어떻게 더 많은 이윤을 만드는가,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의 맹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쥐어 짜낼수록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본가가 자본을 들여 노동자를 고용하고 생산설비를 갖추었을 때 자본가로서는 최대의 효율을 내는 방법이란 노동자를 죽도록 갈구고, 생산설비를 한 시도 쉬지 않게 가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생산설비는 수명연장을 위해서 잠시 쉬게 할 수도 있고 혹은 마감기간을 맞추기 위해 계속 굴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게 자본가에게 더 이윤이 돌아오느냐 하는 것이죠. 하지만 노동자는 죽도록 갈구는 게 제일 좋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사람으로 인식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행여 다치기라도 하면 알아서 치료를 하고 돌아오는 게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노동자의 노동력을 자본가가 구매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갈궈서 최대의 효율을 내도록 하는 것이 자본가에게는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렇게 노동자를 내모는 것이 당시에는 당연했습니다. 10세도 안 된 아이들이 공장으로 들어가 죽도록 일하다가 15세 이전에 쓰러져 죽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심지어는 수면이 부족해 자는 아이를 깨우기 위해 강제로 커피를 먹이기도 했습니다.) 자본과 생산수단과 노동 중에서, 자본가가 채찍질을 하면 할수록 이윤이 늘어나는 게 확실한 것은 분명 노동이기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다그치는 것을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럼 이 착취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상품과 교환, 그리고 자본을 이해했다면 간단합니다. 일단 노동자는 그의 노동력을 ‘판매’했다는 것에서부터 모든 억압이 출발합니다. 노동력을 판매하는 순간 노동자의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일 뿐 더 이상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상품이 된 노동자의 노동력이란 '화폐 - 상품 - 화폐'의 틀 안에서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내기 위해 쉬지 않고 이용되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가치가 상품이 되어버린 이 사태가 노동의 물상화이며, 사람이라는 가치가 사물처럼 다뤄지고 심지어는 기계보다도 못하게 전락해버린 이런 상태를 ‘소외’라고 부릅니다. 시간급으로 책정해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한 경우에는 자본가는 노동자를 최대한 닦달하여 더 많은 단위시간당 생산량을 뽑아낼수록 많은 이익이 나게 됩니다.
이 경우에 일부 순진한 친구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어머 그럼 성과급으로 하는 곳은 인간적인 곳이네?’라고. 정말 순진하시기도 하지. 이런 점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자본가는 이윤이 나지 않는 짓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성과급을 적용한 곳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몫을 가져갈 때 자본가는 역시나 그 만큼의 이윤을 챙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1개의 연필을 만들었을 때 가져가는 돈이 100원이라면 사실 그 연필의 가치는 100원을 웃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연필이 판매될 때 가치가 150원이라면 노동자가 연필 한 개를 만들 때마다 자본가는 50원의 이익을 얻습니다. 따라서 노동자가 한 달 동안 연필 10,000개를 만들고 100만원을 벌었다고 좋아할 때, 자본가는 한 달 동안 별 노동 없이 50만원을 얻은 셈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 더 생각해 볼 점은, 공장에 노동자가 한 명만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수 백, 수 천 명의 노동자는 그들이 생산한 것만큼 임금을 받아가지만 자본가는 그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있는 대로 끌어 모으게 됩니다. 노동자가 1,000명이라면 노동자 개개인은 100만원씩 한 달 급여로 가져가지만 자본가는 한 달에 5억을 벌게 됩니다. 물론 원자재 값도 있고 뭐 이것저것 유지비도 있겠지만……. 그래도 차이가 좀 심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연필 한 개의 판매 값이 110원이라고 해도 1억입니다. 전에 다른 글에서 적었던 말을 다시 해보면 세계의 하층 노동자들은 16~17시간씩 일하다 쓰러지고 그들 대부분은 최저임금도 몇 달째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월마트의 CEO 데이비드 글래서(David Glass)는 1년에 450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립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착취를 당하는 건 어쨌거나 운명이라는 것.
처음 자본주의가 촉발되고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기 최저임금은 눈물이 앞을 가리기 전에 쓰러져 죽을 정도로 턱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4,000원을 웃돌고 있죠. 요즘 신문을 보면 누군가는 이 정도면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최저임금 10원 올리는 것도 안 된다고 바락바락 대들던데(귀신은 뭐하나 이런 놈들 안 잡아가고) 맑시즘에서는 최저임금에 대해 꽤 재미있는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최저임금이란 노동자가 집에 돌아가 다시 노동력을 회복하고 또다시 노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돈입니다. 받는 돈이 최저임금이기 때문에 노동자는 항상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도(원치 않는 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맑스의 노동에 대한 관점에 대해 오해를 할까봐서입니다. 맑스는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보고 있고 이 신성성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산업사회에서는 이것이 억압되어 있다고 보고 있죠.) 이것을 놓지 못하고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받은 돈을 가지고 가정에 돌아가 생계를 꾸리고 자식을 낳고 겨우겨우 기르고 또 노동시장으로 내몰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 맑스가 최저임금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요약하면 최저임금이란 인간이 가장 기본적인 생활이라도 할 수 있도록 노동자에게 법으로 보장해주는 임금이 아니라, 맑스의 관점에서는 노동력이 재생산되게 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계속 굴러가도록 하는 악질적인 임금 책정인 셈입니다. 영화 ‘매트릭스’나 ‘데이브레이커스’에서 인간에게 호스를 꽂아 놓고 죽지 않게만 두고 기계 / 뱀파이어 체제를 유지하는 광경을 생각하면 딱 어울리죠. (맑스나 엥겔스는 사실 가정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좀 이단아적인데, 엥겔스가 『가족, 사적 소유의 기원』이라는 책을 썼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굳이 이것까지 적을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건 이쯤에서 생략하겠습니다.)
산업 예비군
앞서 노동자가 이렇게 착취를 당하고 산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맑스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누군가 맑스에게 아마도 이렇게 묻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 말대로 노동자들이 그렇게 당하고 사는 거라면 그들은 왜 멍하니 당하고만 있습니까!’라고. 그에 대한 맑스의 대답이 산업 예비군이었습니다. 산업 예비군이란 사실 이것저것 생소한 어휘가 필요한 좀 달갑지 않은 개념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자본론을 적어보려는 게 아닌 이상 쉬운 설명으로 하고자 합니다.
산업 예비군은 간단히 말해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어떤 노동자가 삼x xx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려 죽었다고 해도 다른 노동자들이 ‘에이 더러운 x성, 우린 저항하겠다! 자를 테면 잘라 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진짜 잘렸다간 갈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리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널려있으니까요. 이 사람들을 맑스는 산업 예비군이라는 다소 저돌적인 어휘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산업 예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일정 수준의 실업률을 유지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사회가 일정 수준의 실업률을 유지하게 될 때 실업 상태에 있는 백수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편이 사회에는 더 유리합니다(엄밀히 말하면 사회 전체가 아니라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에게 유리한 것이죠.).
산업예비군, 그러니까 지금은 백수지만 자리만 나면 어디든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미 직장을 가진 노동자들은 자기가 처한 불합리한 상황에 저항할 수 없으며 그들을 통제하는 세력의 말에 열심히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손을 잡고 저항을 한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냥 살아야 하죠. 이게 바로 노동자가 밑바닥까지 내놓고 저항할 수 없는 이유이고 산업 예비군은 노동자와 사실상 비슷한 계층임에도 노동자를 억압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맑시즘의 핵심 개념들, 상품, 교환가치, 사용가치, 화폐, 자본, 노동력의 상품화와 착취, 산업 예비군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맑시즘에서는 더 중요한 부분들이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가장 중요한, 역사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과 그리고 그것이 몰락하는 과정(맑시즘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이나 아니면 몇 가지 경제적 공식들 그리고 자본의 구분이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대한 서술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을 적기엔 너무 길고 비평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적지 않고 두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맑시즘과 연관이 있지만 보통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몇 가지 개념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애국심
헤겔이 그의 관념론을 설명하면서 국가 이성을 가장 높은 가치로 두고 있는 것과는 정 반대로 맑스는 국가를 향한 애국심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그리고 헤겔도요). 헤겔학파였으며 헤겔의 변증법을 차용한 점을 생각하면 좀 의외인데, 후에 헤겔보다 포이어바흐에게 무게를 두는 맑스의 입장을 보면 별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맑스의 입장에서 애국심이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에 대항해 저항해야 하는 현실을 가리는 개념에 불과합니다.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것은 결국 부르주아인데 이 둘의 역학관계를 국가라는 체제로 가리고 묶어 타 국가와의 대립관계를 형성하면서 프롤레타리아는 원래 저항했어야 할 부르주아라는 상대를 잃고 국가 vs 국가의 구도에 매몰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노동자 A는 자본가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다가 독일과 전쟁이 터지자 프랑스 군인으로서 종군하게 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독일 군인으로 종군한 또 다른 노동자 B와 죽어라 싸우게 됩니다. 맑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노동자 A와 B는 서로 국적은 다르지만 둘 다 자본가에게 착취를 당하는 프롤레타리아이기 때문에 자본가에 대항해 공동 투쟁을 해야 하는 동지인 셈인데(누구 말대로 알고 보면 서로 돕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 국가 권력이나 애국심에 의해 서로 죽고 죽이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진 셈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일부 자본가들은 전쟁을 기반으로 또 다시 수익을 올립니다. (물론 이 부분에서 노동자=힘없는 계층이 반드시 등가는 아니라는 논리적 반박이 가능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또 길고 긴 구토를 유발하는 서술이 있으나 도저히 쓰고 싶지는 않으니 그만 두겠습니다. 그냥 이렇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정말 아닐까? 라고. 누군가는 로마 시대의 군인은 중산층이었다고 반박하기도 했지만 로마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해 주세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애국심에 의해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사라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은 월드컵이 벌어지면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고 모두가 하나가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나가 되면 될 수록 누가 손해이고 누가 이익인지를 생각하면 맑스가 왜 애국심을 그렇게 비판적으로 생각했는지를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물론 저도 월드컵에는 울고 웃습니다. 이미 맑스를 기억하기엔 너무 자본주의에 물들었는지도 모르죠 -_-;; 코리아팀 파이팅..ㅠ.ㅠ)
종교
맑스는 종교는 마약이라는 말을 했는데, 애국심과 비슷한 맥락에서 종교를 싫어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나 혹은 칼뱅주의에 부르주아가 심각하게 얽혀 있고 성직이라는 것 자체가 또 자본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리고 이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는 종교가 현실을 마취시키기 때문입니다. 사후세계라는 미끼를 붙잡고, 노동자들이 현실을 진리인 것처럼 수용하게 하고 저항할 수 없게 마취시키기 때문에 맑스는 종교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막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노동자가 회사나 공장에서 있는 대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와서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표출하려고 하면 대게는 종교에서 그것을 가로막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한 계율이라던가, 아니면 그럴 듯한 말들로. 맑스는 이것은 어느 한 순간에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마약이라고 했고 그의 이런 발언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많은 종교인들이 맑스를 싫어한다고 합니다.(전 무교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소비 지상주의
소비 지상주의도 맑시즘에서 큰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가장 간단히 설명하면 앞서 노동 시간에 따라 물건의 교환 가치가 정해진다는 말을 했는데 소비 지상주의는 이것을 뻥튀기 하면서 자본가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예를 들어 커피 한 잔을 만드는 데 들어간 모든 값어치(노동을 포함하여)가 500원이라면, 거기에 스타벅스 마크를 박는 순간 더 이상 500원이 아니게 됩니다. 이 소비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차후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소비를 바라보는 관점을 서술할 때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테니 그 때 추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비평에 적용하느냐하는 문제가 남는데, 전에 심리비평을 적었을 때 기술했던 질문들 같은 시작점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위에 서술한 개념들이 작동하는 걸 발견하거나 아니면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의 계급투쟁을 발견하게 되면 무엇이든 맑시즘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비평과 마찬가지로 독자나, 시대, 작가의 의식까지도 맑시즘에서 언급하는 개념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비평의 대상이 됩니다.
정말 쓸 내용이 많은 게 맑시즘인데, 오히려 그래서 추리고 추리다보니 적은 게 별로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핵심 개념들은 전부 다 설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냥 혼자만 편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ㅋㅋ
첫댓글 오, 후르크스 형 잘 읽었어욤.ㅋㅋㅋㅋ 체계적으로 정리된 느낌.ㅎㅎ 짧은 글로 마르크스의 사상을 요약한 글은 많지만, 이렇게 알맹이만 가지고 쉽게 설명한 글은 없을 것 같아요.ㅋㅋㅋ 나중에 나올 보드리야르도 기대돼요.ㅋㅋㅋ
근데 '맑시즘'이란 단어가 조금 거슬려요;; 굳이 왜 영어 발음으로 '맑스'라고 발음하는지도 모르겠고, 독일 사람이니 독일어 발음대로 '마르크스'라고 해야 되지 않나요? 또 영어 발음 '맑스'라고 한다고 해도 외래어표기법상 '막스'라고 써야 맞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참, 그리고 '맹점'이라는 단어가 잘못 사용된 거 같아요.;;
마르크스로 적을라면 길거든....-_-;; 그리고 맑스가 좀 착착 붙잖아? ㅋㅋ 그리고 맹점은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