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프랑스를 물리쳤지만, 통일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제네바 협정은 베트남 승리의 문서가 되어야 했지만, 사실은 국제적 따돌림의 문서였습니다. 하노이 정권은 분노하였습니다. 특히 프랑스를 대신하여 남부를 통제하고자 하는 미국 그리고 그에 호응한 남부 세력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네바 협정은 베트남 혁명의 물줄기를 더욱 거세고 사납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호치민이 기대한 ‘평화’의 수로를 훨씬 넘어가 버렸습니다. 이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호치민은 혁명의 전선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다만, ‘열혈 용사’들을 격려하고, 또 주의를 당부하고, 또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정치사회적 갈등을 조율하는 원로로 남게 되었습니다....
제네바 협정 후 베트남의 과제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해방된 북 베트남에서의 국가건설, 다른 하나는 남 베트남의 해방과 통일이었습니다. 여기서 호치민은 더 이상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호치민은 언제나 그렇듯이 온건하고 점진적인 길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지도부와 열혈 동지들은 호치민을 추월하여 질주하였습니다.
북 베트남 건설에서 호치민이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명확히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호치민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남부의 바오 다이 정부와의 통합의 과제 그리고 그 후견인인 프랑스 그리고 새로운 패권자 미국을 생각할 때,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의 결단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류사오치의 증언입니다. 철저한 공산주의자 류사오치는 호치민의 온건한 입장이 불만이었습니다. 토지개혁 문제가 핵심이었습니다. 북 베트남 재건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가난 즉 토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토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의 경우 북한의 토지개혁과 남한의 토지개혁은 달랐습니다. 호치민에게도 ‘경자유전’의 원칙은 토지개혁의 기본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토지개혁을 언제 어떻게 진행해 나갈지, 지주들, 부농의 토지를 어떻게 얼마만큼 회수할지 그리고 농민들에게 어떻게 분배할지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호치민은 토지개혁을 서둘러 시행할 생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압박과 당내 강경한 지도자들의 요청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왜 그렇게 베트남의 토지개혁을 부추겼을까요? 어쩌면 중국 자신들이 했던 공산 혁명의 명분과 경험(중국은 이미 1950년에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을 국제적으로 전파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피후견국’인 베트남이 자신들의 모델을 따라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류사오치의 증언입니다.
“호치민은 언제나 우파였습니다. 우리가 토지개혁을 실시할 때에도 저항했습니다. 그는 베트남 노동당(베트남 공산당)의 의장이 되기를 원치 않았고, 당 밖에 남아 초당적 지도자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후에 그 소식이 모스크바에 전해졌고, 스탈린은 호치민을 엄중 비판하였습니다. 그제서야 호치민은 토지개혁을 결정하였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호치민은 베트남을 자본주의로 할지, 사회주의로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을 결정해 준 것은 바로 우리였습니다.”
이는 1963년 중소 분쟁이 한창일 때, 즉 중국이 소련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와 격렬하게 맞서던 시절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류사오치가 소련의 입장에 가까웠던 호치민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며 했던 발언입니다.(Pierre Brocheux(Claire Duiker 영역), Ho Chi Minh: A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172-173쪽)
호치민은 공산주의의 이상을 가슴에 품었지만, 실제 공산 사회의 건설이 쉽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46년 베트남민주공화국 탄생 직후 호치민이 1946년 프랑스와 협상을 위해 파리를 방문했던 때 호치민은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마르크스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산업과 농업의 발전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베트남은 이런 조건 어느 쪽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 칼 마르크스의 꿈이 언제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그것도 아직 꿈으로 남아있지 않습니까?”(윌리엄 듀이커, 호치민 평전, 푸른 숲, 556쪽)
물론 빈농들의 가난과 수탈 문제는 해결해야 했습니다. 토지개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 참여한 인원들에게 먼저 땅이 지급되었습니다. 그리고 1955년 마침내 토지개혁위원회가 구성됩니다. 당 총서기 추옹 친이 위원장으로 진두지휘하였습니다. 지주와 부농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전국적인 사업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법과 절차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대신 각 지역에서의 인민재판에 의한 몰수, 처벌, ‘재교육’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의 예와 유사하였다고 합니다.(Pierre Brocheux(Claire Duiker 영역), Ho Chi Minh: A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154쪽)
중국의 경우 비록 1950년 토지개혁법을 공포하고 법절차에 따라 토지개혁을 개시하였지만, 그 시행과정은 폭력으로 얼룩졌습니다. 공산당원들의 혁명의 열정과 빈농들의 원한이 합쳐져 각 지역에서 지주와 부농에 대한 무자비한 인민재판과 총살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이매뉴얼 쉬, 조윤수/서정희 역, 근-현대 중국사(하), 까치, 초판 2쇄, 2013, 802쪽)
베트남 토지개혁은 현지에 주둔 중이었던 중국 고문들에 의해 지도받았습니다. 마오 쩌둥은 혁명은 ‘잔치’가 아니라며, 계급 투쟁을 고취하였다고 합니다. 베트남 가난한 농촌에는 부농이라고 하더라도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행자들은 중국의 예를 따라 주민의 4-5 퍼센트는 계급의 적으로 선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윌리엄 듀이커, 호치민 평전, 푸른 숲, 608-701쪽) 토지개혁을 주도한 총서기 추옹 친은 마오 쩌둥의 관점을 공유했습니다. 추옹 친은 냉정하고 엄격한 인물로 사람들에게 존중은 받았지만, 사랑은 받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계급의 고통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실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약화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토지 개혁의 부작용은 속출하였습니다. 많은 선량한 주민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심지어 해방운동에 참여하였던 애국적인 농민들도 희생당했습니다. 1만5천 명(어떤 통계로는 5만명)이 학살당하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무고한 주민들이었다고 합니다.(Pierre Brocheux(Claire Duiker 영역), Ho Chi Minh: A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156쪽) 공산당에 대한 환멸이 퍼져나가고, 민심이 이반하였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당 세포들의 30%가 해체되었다고 합니다.(윌리엄 듀이커, 호치민 평전, 푸른 숲, 715쪽)
호치민은 토지개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행상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동지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고 합니다. ‘뜨거운 국은 천천히 마셔야 잘 먹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토지 개혁에 고문이나 사적인 폭력 등 야만적인 방법이 사용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토지개혁 문제에서 호치민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도 호치민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도부 동료들을 제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지에서 계급투쟁적 토지개혁의 주범이었던 중국 고문들에도 맞서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1956년 9월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호치민은 토지개혁의 과오에 대하여 공식 인정하였습니다. 그 연설에는 토지개혁의 문제점들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당 중앙위원회와 정부는 전반적 리더십을 유지하지 못하였고, 일부 영역에서 엄격한 관리에 실패하였습니다. 그 결과 토지 개혁이 여러 과오를 낳았고, 마을의 유대관계, 우리의 재건, 적에 대한 투쟁 전선에서의 우리의 노력들을 훼손하였습니다. 당 중앙위원회와 정부는 그 오류와 일탈들을 엄하게 시정하고 체계적으로 개선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목표는 마을에서의 평화회복, 생산력 증대입니다. ... 우리는 지주 혹은 부농으로 잘못 낙인찍힌 사람들을 주의 깊게 재분류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릇되게 처벌받은 당원, 간부들, 시민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하며, 당원 자격, 정치적 권리를 복구해야 합니다. ... 우리는 해방 투쟁에 참여하고, 혁명을 지지하고, 그 자녀들을 군인과 간부들로 키워 낸 지주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곡물 수확량를 과다 계상하였다면, 그것을 정확히 재산정해야 합니다. 수정 작업에 있어서 우리는 확고해야 하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고칠 수 있는 것은 즉시 시정해 나가야 합니다.”
(Pierre Brocheux(Claire Duiker 영역), Ho Chi Minh: A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157쪽)
총서기 추옹 친을 비롯하여 토지개혁 위원회 지도부는 문책당했습니다. 마을 단위로 구성되었던 인민재판소들은 모두 해체되었습니다. 토지개혁위원회는 단순한 자문기구로 격하되었습니다. 부당하게 수감된 사람들은 석방되었고, 부당하게 몰수한 땅은 돌려주었습니다.
추옹 친은 총서기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당장 후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호치민이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총서기 대행을 맡았습니다. 1년 뒤 곧 레 두안이 총서기직을 계승합니다. 응우옌 지압 장군이 총서기직에 오를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뜻밖의 인물이 총서기가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바로 남베트남 혁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