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그리스도교인 청년에게
도산(島山)과 같은 교회
안창호 선생(1878~1938)이 그 호를 도산(島山)이라고 지은 것은 1902년,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미국으로 가던 뱃길에서였다. 드넓은 태평양에서 가도 가도 기다리는 육지는 나오지 않았고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지쳐갔다. 열흘 넘게 지난 어느 날 먼 곳에서 구름 사이로 산봉우리가 보였다. 하와이였다. “산이다! 육지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안창호 선생은 이 때, 망망대해에서 육지를 간절히 기다리며 지쳐가던 배의 승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도산(島山), 곧 섬의 산봉우리처럼, 망해가는 나라와 도탄에 빠진 동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하면서, 자신의 호를 도산으로 지었다. 그리고 그의 평생을 온 힘을 다해 도산에 담긴 큰 뜻에 걸맞게 살았다.
필자가 도산의 뜻을 글머리에 밝히는 이유는 바로 오늘날 교회가 존재론적으로 흑암 같은 이 사회의 도산이며, 또 당위론적으로 도산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한미FTA, 신자유주의 세계화 등 빈부 격차가 심각해지는 현실은 구한말의 상황과 견줄 수 있는 암울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데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新) 빈곤층을 의미하는 ‘근로 빈곤층’은 결코 생겨서는 안 되는 심각한 사회문제인 것이다. 근로 빈곤층의 핵심에 88만원 세대가 있고, 비정규직이 있다. 그리고 이런 근로 빈곤층을 확대하고 고착화하는 것이 바로 한미FTA이고, 한미FTA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거대한 전 세계적 탁류(濁流)를 반영한 것이다. 서해안 바닷가에 낀 시커먼 기름덩어리처럼, 우리를 옭죄면서 들어오는 이 짙은 어두움의 힘, 잔인한 악의 세력이 창궐하는 이 사회 앞에서, 복음의 실체인 하느님의 나라를 맛보게 해 주어야 할 교회는 과연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마땅한가? 어렴풋이 새 날을 기다리지만 그 날이 오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자꾸만 지쳐가며 희망과 용기를 잃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는 바로 도산이며 도산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인 - 만인을 위한 숭고한 삶

김남주 시인은 그 유명한 ‘자유’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후략)
이 시는 불행히도 시인이 절규했던 시대보다 오늘날 더더욱 뼈에 사무치는 노래가 되고 말았다. 소시민이 되어 자기 혼자 잘 살려고 몸값을 높이기 위해, 부당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영어와 자격증에 매달리고 있는 파편화된 개인주의자들은 과연 자유로운가? 시인은 만인을 위해 일하고 싸우고 몸부림칠 때, 비로소 자유롭다고 노래했다. 지금 악의 세력은 음흉하게도 “분열시켜서 지배하라(Divide & Rule)”는 전략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오랑캐를 이용해서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의 현대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열시켜서, 정규직에게는 차별적 특혜를 베푸는 척하며, 비정규직에게는 살인적 저임금으로 혹사시키면서, 정규직과 취업준비생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비정규직이 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헨리 조지(1839~1897, 미국, 경제사상가)의 예리한 통찰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궁핍에 대한 두려움’을 그 잠재의식 속에 갖고 있다. 혹시라도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아 온 궁핍한 사람들과 같은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악의 세력은 사람들에게 있는 이 ‘궁핍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서, 불의한 사회 구조에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악의 세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귀는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요한 8,44), 살인적인 폭력과 속이는 거짓말로 하느님의 형상인 사람들을 불의하게 착취하는 것을 구조화시킨 세력은 바로 마귀와 연합한 악의 세력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대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속아서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궁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만인을 위한 숭고한 삶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 아닌가! - 을 부정하고 개인주의적 소시민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 악의 세력이 정규직에게 베푸는 차별적 특혜는 사실 특혜도 아니고 정상적으로 지급되어야 할 노동의 대가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금액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비정규직이 되지 않기 위해, 오로지 정규직이 되기 위해 안쓰러운 발버둥을 치며 매달리는 그리스도교인 청년들은 이제 눈을 들어 우리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강도 만난 사람들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과연 자유로운가? 나는 지금 만인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만인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만인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가?
비정규직보호법 개정
이제 가야 할 길은 아주 단순하다. 첫째, 이랜드 사태에서 똑똑히 확인했듯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는커녕 오히려 해고하는 데 악용된 비정규직보호법을 반드시 개정해야 한다.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비정규직을 없애고 정규직의 임금을 노동의 정당한 대가의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측의 개별적·주관적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제도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유한킴벌리의 실천은 아름답다. 그러나 해를 넘겨서도 아직도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 이랜드를 보라! 지금의 비정규직보호법은 비정규직해고조장법에 다름 아니다. 비정규직에 대한 해고 방지 및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법이 필요하다.
자영 노동 활성화
둘째, 비정규직 노동의 진정한 대안은 정규직 노동이 아닌 자영 노동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인간의 자유를 실제화하는 최선의 노동 형태는 바로 자영 노동이다. 구약이 이상으로 삼는 희년 사회는 바로 자영 노동 사회였다.
그리고 자영 노동은 아나키즘의 중요한 토대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의 원어와 정신에 충실한 정확한 번역은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하는 기존의 부정적 뉘앙스의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어느 누구도 지배하지 않으며 동시에 어느 누구로부터도 지배당하지 않는 ‘무지배주의’이다. 박홍규 교수는 아나키즘의 현대적 핵심 가치를 자유, 자치, 자연으로 잘 정리하였다. 이와 같은 아나키즘의 가치는 오늘날 사람들이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사실상 시민단체들과 개혁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미 보편화된 가치이기도 하다.
요컨대 자영 노동은 명실상부한 자유를 위한 최선의 노동 형태이며 구약 희년 사회와 아나키즘의 기초가 되는 노동 형태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자영 노동이 활성화되는 데까지 가야 한다.

사진출처: 여성신문
한미FTA 저지
셋째,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한미FTA를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 정부는 한미FTA로 빈부격차가 해소된다고 선전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한미 FTA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제도를 전 사회경제부문에 도입하는 것인데,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이다. 미국이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도입한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빈부격차는 극단적으로 심화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빈부격차를 심화시킨 신자유주의 제도를 한국에 전면 도입하여 한국도 미국처럼 부익부빈익빈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것이 바로 한미FTA인 것이다.
한미FTA의 대표적 독소조항인 ‘투자자-정부 소송제’는 특히 중요하다. 2006년에 발간된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에서 저자인 우석훈 박사는, 한미FTA가 한국정부가 미국에 대해 종속적인 협상을 했는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준이 바로 투자자-정부 제소권의 보장이 협정에 포함되느냐 여부일 것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투자자-정부 소송제는 중요한 이슈였다. 그런데 2007년에 발표된 한미FTA에 끝내 이것이 포함되고 말았다. 투자자-정부 소송의 대상에 표면적으로는 국민이 민감하게 여기는 주요 공공 정책을 예외 조항으로 기재하고 난 다음 다시 사람들이 얼른 알아차리기 어렵게 그 예외 조항을 실제적으로는 무효화하는 세부조치를 삽입함으로써, 한국 정부는 국민들을 안심시키면서 투자자-정부 소송의 대상을 모든 부문에 열어 놓는 지능적인 수법을 썼다.
그러나 그 핵심은 명백하고 간단하다. 한미FTA가 투자자가 투자대상국 정부의 공공정책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고 판단하게 되면 상대국 정부를 국제중재판정부에 제소할 수 있는 투자자-정부 제소권을 보장함으로써 - 한국 정부가 제소당하면 거의 100% 패소할 것이다 - 상대국 정부의 공공정책을 무력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공공정책은 부동산 정책, 조세 정책과 같이 공공성 강화와 소득재분배 효과 등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직간접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인데, 이것이 무력화되는 것이다. 투자자-정부 소송제를 통해 투자자의 이익을 절대 보호함으로써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부자는 더욱 부하게 되고,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직간접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공공정책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이 강화되는 것이다.
한미FTA, 투자자 이익 절대 보호주의
한마디로 “투자자(특히 미국 투자기업) 이익 절대 보호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한미FTA에서 관철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는 양심적 주류 경제학자인 제프리 D. 삭스와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이미 비판했듯이, IMF(국제통화기금)가 애초의 설립 목적을 잊고 변질되면서 최근 수십 년 간 견지해 온 것이다. IMF는 경제위기에 처한 나라들에 대해 돈을 빌려주면서 이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책 - 대표적인 예를 들면, 재정지출을 축소하여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순위에 두는 정책인데 그 숨은 목적은 (특히 미국인)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대책은 이와 반대로 재정지출을 확대하여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하고 실업을 해소하면서 고용을 촉진하는 정책이다. IMF의 설립목적도 경제위기에 처한 나라에 국제 금융을 제공해서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경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 을 권고했는데, 그런 정책은 만약 미국이 경제위기에 빠진다면 결단코 사용하지 않을 정책이다. 결국 라틴 아메리카 국가를 비롯하여 IMF의 정책 권고를 받아들인 나라들의 경제는 오히려 더 침체되었고 그 나라의 대다수 국민들은 심대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요컨대 한미FTA는 한국 사회의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며 대다수 국민에게 큰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므로 한미FTA의 국회 비준을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미FTA는 이제 더 이상 저지할 수 없고 다 끝난 사안이라는 비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지금 최선을 다해 국회가 한미FTA 비준을 졸속으로 강행 처리하는 것을 막아야 하고, 국회가 공청회와 청문회와 국정조사를 통해 한미FTA를 철저히 검증하고 통상절차법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국회를 압박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비준이 되면, 그리고 미국 의회에서도 비준이 되어 결국 한미FTA가 발효되면,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한미FTA의 폐해를 국민에게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하고, 한미FTA의 심각한 문제점이 마침내 백일하에 드러날 때 그 파기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개혁적 그리스도교인들은 한국 교회가 한미FTA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에 기초한 찬성론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희년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다. 한국 교회가 이 사명을 자각하고, 희년 정신에 역행하는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해 기도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개혁적 그리스도교인들은 노력해야 한다.

대안 마련과 제시
넷째, 개혁적 시민 단체와 그리스도교인들이 힘써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대안을 마련하여 제시하는 것이다. 한미FTA를 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한국 경제의 활로는 한미FTA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뿐이라는 보수적 학계와 정치권의 선전에 기만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동안 국민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개혁적 시민 단체와 그리스도교인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 ‘티나’(TINA: There Is No Alternative!), 곧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며, 1980년대 초반에 영국에 신자유주의를 전격 도입한 수상 대처는 교만했을 뿐만 아니라 무지했다. 신자유주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훌륭한 대안이 분명히 있다. 세계사회포럼에 등장하는 표어대로, 진실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 그리고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Better world is possible!). 다른 세계,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필자는 그 가능성을 구약 성서의 희년 사회에서 보았다. 구약 희년 사회는 한 마디로 “희생적 사랑에 기초한 자유인의 공동체”이다. 여기에서 ‘희생적 사랑’이란 근족(近族)이 가난한 친족을 대신해서 물질적 손해를 무릅쓰고 값을 지불하여 빈자의 토지·주택과 자유를 회복시켜 주는 ‘근족의 토지·주택 무르기 제도’와 ‘근족의 사람 속량 제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리고 ‘자유인의 공동체’란 자기 기업 토지에서 자기 자본으로 부를 생산하는 자영노동자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희년 사회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바로 희년 경제인데, 희년 경제는 토지, 주택, 대부, 노동 등 4대 경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토지이고, 토지 위에 나머지 3대 경제, 곧 주택, 대부, 노동이 서 있다. 그 각각의 성서적 원칙은 평균 지권(토지), 만민 주거권(주택), 빈민 무이자 대부/채무 탕감(대부), 노예 노동 금지/적극 고용/가혹 노동 금지/정당 임금 지급/자영 노동 지향/빈자 생존권 최우선(노동)이다.
희년 사회와 희년 경제의 성서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 방안에 대한 설명은 글의 분량 상 여기에서 더 이상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개혁적 시민 단체와 그리스도교인들 내에서 다른 세계,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치열한 건설적 논쟁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을 토대로 진정한 대안을 마련하여 국민 앞에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더 이상 한미FTA 같이 어리석고 잘못된 길을 찾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진정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한미FTA 같은 이상한 것들이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 때마다 반대 투쟁을 해야 한다면 그 얼마나 재미없고 힘든 일이겠는가!
그리스도교인 청년에게
글을 마무리하며 그리스도교인 청년에게 요청하고 싶다.
분노하라! 이 불의한 현실에 대해서.
사랑하라!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기도하라! 골방에서 홀로, 교회에서 합심하여.
공부하라!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성서와 상황을.
행동하라! 공동체를 이루어 십자가에 못 박힐 각오를 하고서.
변혁하라! 도산(島山)처럼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이 불의한 세상을.
박창수
한미FTA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이며,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이고, '희년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다.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http://cafe.daum.net/cchereandnow 박창수 2008-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