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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타시켄트
18시 36분에 타시켄트시로 진입했다. 타시켄트는 1966년에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소련의 15개 공화국이 적극 지원하여 5년 만에 복구되었으니 새로 건설된 도시나 마찬가지다. 소련 시절에는 비행기를 조립하는 중공업지역으로 지금도 수송기 분야에서는 세계 1위라고 하나 경공업에서 중간 단계 없이 중공업 단계로 발전한 기형적인 산업구조가 문제다.
이곳에는 2개의 박물관과 2개의 미술관, 조주 스님이 다니는 함자역사예술대학을 위시하여 여러 대학교가 있다. 타시켄트 법대, 타시켄트 의대, 타시켄트 국립대학의 순으로 대학교의 순위가 매겨져 있다는데 타시켄트 법대를 졸업하면 변호사 자격을 준다고 하며, 타시켄트 법대에는 고관의 자녀들은 500달러를 내면 입학할 수 있고, 일반인들은 5,000달러를 내어야 입학할 수 있다고 한다. 학위는 학사-준박사-박사-원사로 구분된다.
18시 47분 타시켄트의 카림벡(KARIM BEK)식당에 도착하여 20시까지 저녁식사를 했다. 식당이 크다. 나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다른 일행들이 첫날 저녁식사를 했던 곳이라고 한다. 조주 스님이 고려인 여신도(女信徒) 2명에게 시켜 밥솥 채로 들고 와서 밥을 퍼주고 김치찌개도 가져 왔다. 김치찌개 맛은 별로지만 계속 느끼한 현지 음식만 먹다가 이것도 감지덕지다. 양고기와 소고기의 꼬치도 나왔다. 음악이 나오니 현지 손님 남녀 3명이 가운데 공터로 가서 춤을 추고 들어가고, 좀 있다가 군인들 5-6명 나와서 춤을 추니 우리 일행들도 나가서 춤을 추고, 나도 못 추는 몸을 흔들었다.
21시 30분경 고급 주택가라는 곳의 골목으로 들어가서 호텔 RADDUS-JSS로 갔다. 원래의 일정에 타시켄트에서는 1박하지 않으나 일정이 바뀌어 1박하는 바람에 호텔 잡는데 문제가 있었다. 호텔 건물 양쪽 공터에 르망과 라세티가 1대씩 주차되어 있다. 확실히 이곳은 대우차 세상이다. 여행사측에서 호텔비를 부담해야 하는데 여행사측과 타협이 안 되어 1인당 20달러씩 추가로 부담해야 했다. 201호실로 들어가니 TV도 대우전자 제품이다.
10월 29일 (월)/ 06시 40분에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서 약 15분을 걸어가니 사범대학(NIZZAMY University)이 나온다. 한산한 길에 때로 궤도 전차가 느리게 달리고 있고, 인도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아낙네들이 낙엽을 쓸고 있다. 이곳도 우리나라와 같은 낙엽 지는 가을이다. 도중에 한글로 ‘청기와’라는 간판을 단 식당이 있었다. 출입문 위에 한글로 ‘어서오십시오!’라고 씌어있고, 출입문 바로 앞에는 양쪽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장승 2개를 세워놓았다. 건물들이 대체로 낮고 아파트도 3-5층 규모의 저층인데 모두 소련 때 건설한 것으로 이곳에서는 고급주택이라고 했다.
구내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식사를 했는데 고작 빵 3가지, 전병 2가지, 우유죽, 과자, 치즈, 버터, 요구르트, 토마토, 오이, 커피, 녹차 등이 나와서 지금까지의 여행기간 중 먹을 것이 가장 부실했다.
09시 10분경 버스에 올라 호텔을 출발했다. 남쪽에 새로 지은 아파트 군락은 꿀육의 고려인들이 농사를 짓고 살던 농장 쪽에 공장을 지으면서 그곳에 살던 고려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지은 아파트라고 한다. 고려인들은 봄에 농사를 지으러 집을 떠났다가 가을이 되면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조주 스님의 활약상]
조주 스님은 이곳 고려인들에게 명정(銘旌)을 써주고, 제사 때는 절을 두 번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이유 등을 설명해주고, 심지어는 돌잔치 때 초청하여 날을 받아달라고 하고, 환갑이나 결혼식의 의식 등을 정확하게 몰라서 알려 주면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현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장례를 지내지만 고려인들은 반드시 삼일장을 지낸다. 그런 것을 우상숭배라며 이단시하는 기독교인들은 현지인에게 조상도 모르는 자들이라고 배척을 당한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관혼상제(결혼, 환갑, 장례, 제사, 돌) 등 행사시에는 떡, 인절미, 시루떡 등은 기본 음식으로 반드시 하고, 국수나 시래기 장국도 내어놓는다. 결혼식은 식당을 빌려서 친지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인다. 결혼 날을 받으러 오고, 사주를 봐주고, 주례를 서 달라고 부탁해서 주례를 서 주기도 하며, 폐백 혼례복을 한국에 부탁해서 차려주기도 한다. 작명도 하고 풍수도 가르쳐 준다. 우즈베크인들은 고려인들의 그런 풍습을 존중하여 잔치에 초대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기들 행사에도 고려인들이 찾아가면 좋아한다. 반면에 러시아인들은 자기들을 지배하며 압박했다고 하여 싫어한다.
버스 왼쪽은 원래 갈대밭이었으나 고려인들이 개간하여 농장으로 만들었다. 꿀육 시장부터 고려인 집단농장으로 연결된다. 고려인 농장에서는 주로 목화와 쌀을 재배하고, 그 다음으로 밀을 재배한다. 타시켄트주에는 빅트미르, 김병화, 뽈리타질, 드미트리 등 4개의 고려인 집단농장이 있어 지금도 28,000명의 고려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 드미트리 농장은 이곳에서 약 4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우주인 가가린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하며, 러시아 최고의 영웅에게 수여되는 황금별 훈장을 24명이나 받았을 만큼 모범적인 농장이었다고 한다. 조주 스님에 의하면 고려인농장 견학 대상을 주로 김병화 농장으로 하는데 김병화는 아버지를 고발하여 죽게 만들어 그것이 출세의 발판이 되었으나 그 죄를 받아 아들 셋도 다 요절하였다고 악평을 하면서 반면에 뽈리타질의 고려인 책임자인 황만금(HWANG MAN GIM)은 처음에 갈대밭인 이곳을 그의 지도로 개간하여 잘 사는 농장으로 바꾸었고, 그 음덕으로 황만금의 아들들도 다 잘되어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꿀육 시장]
09시 45분 꿀육시장에 도착했다. 김정위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꿀육 시장의 ‘꿀육’이라는 명칭은 고려인들이 시베리아에서 강제 송환되어 올 당시 그들이 타고 온 열차의 번호가 ‘916’이라고 해서 생겼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꿀육 시장은 시르다리야강의 지류인 치르치크(Chirchik)강 서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데 원래 갈대밭이었던 이곳을 고려인들이 개간하여 시장으로 만든 고려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버스를 잠깐 세워 내리면 될 텐데 경찰이 세우지 말라고 하여 우리는 치르치크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나서 건너편에 버스를 세우고 다시 걸어서 다리를 건너와야 했다. 다리와 나란히 철교가 걸려 있다. 현지인들은 일본인들이 철교를 잘 만들었다고 하며 일본인들이 만든 줄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일본 관동군이 소련군의 포로로 끌려와서 건설한 것인데 일본군 포로가 조선인 포로에게 조선인임을 밝히면 불리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인으로 행세한 사람이 많아 철교가 사실은 거의 조선인 포로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고 했다.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자식에게 성을 잊지 않게 하려고 성을 이름으로 물려주어 ‘오’씨는 ‘오가이’, ‘유’씨는 ‘유가이’로 불렀다고 하니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조주 스님에 의하면 꿀육 시장은 고려인들이 이곳에서 살게 되면서 두부, 콩나물, 떡, 김치를 만들어 팔던 곳인데 지금은 시장의 규모도 작고, 고려인들은 얼마 없으며, 우즈베크인들이 고려인 보다 더 잘 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 상인들은 물건을 사라고 했다가 안 산다고 하면 나가는 척 하다가 다시 들어와서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또 사라고 권하여 살 때까지 반복한다고 했다. 외국인 상대 소매치기가 많으므로 시장에 다닐 때에는 가방을 앞으로 하고 몇 사람이 같이 다니라고 했다. 강 건너 빅티미르 지역에도 고려인 시장이 있는데 이들은 1년에 한 번씩 싸운다고 했다. 현지인들은 한국 놈들은 머리에 든 것도 없고, 가슴이 따뜻하지도 않고, 돈 뿐이므로 한국 놈들한테는 돈을 뺏어야 한다며, 북한 사람이 오면 물건을 싸게 팔고 덤까지 주지만 남한 사람이 오면 물건 값을 2배로 비싸게 받는다고 했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 가락농산물 시장의 축소판이다. 곡식, 과일, 채소, 김치, 각종 양념, 반찬, 국수, 당면, 떡, 고기, 고춧가루 등 없는 것이 없고, 심지어 시래기, 오이지, 가지 말린 것, 고춧잎, 고추장아찌 등도 있다. 수수 빗자루, 싸리 빗자루도 있고, 자줏빛 마늘도 있다.
고려인 할머니와 사진을 찍었다. 이 할머니는 2세 때 이곳으로 와서 지금 72세라고 한다. 또 한 곳에 갔더니 고려인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빵과 김치와 보드카를 마시면서 내게도 빵과 김치를 건네준다. 고려인들도 현지에 동화되어서인지 대개 뚱뚱하다. 현지인들은 사진 찍는 것을 아주 좋아하여 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하기도 한다. 인심이 더없이 좋아 보이는데 보기와는 달리 이 나라에서 물건을 사려면 무조건 반 이상을 깎아야 한다고 한다. 건포도 1kg을 6,000숨, 호두 1kg을 7,000숨에 사서 다리를 건너오니 도로에 전기케이블에 연결된 버스가 다니고 있다. 식사 때 자주 나온 당근 채에 양파를 버무려 숙성한 김치 비슷한 반찬은 꿀육 시장의 고려인 수니(순희)가 개발했다고 하여 ‘수니채’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말꼽채’(당근을 러시아어로 말꼽)라고 부른다는데 김치 대용으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11시 20분에 꿀육 시장을 출발했다.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대지가 약 3만평 되는 넓은 곳으로 한국에서 온 영락교회라고 하며, 지금은 등록이 취소되었다. 양쪽에 고려인촌의 집은 대개 단층집에 슬레이트 지붕이다(위로 노란색파이프는 소련 때 건설한 가스관). 지금은 고려인보다 우즈베크인이 훨씬 많이 사는데 우즈베크인은 고려인이 살던 집을 좋아한다고 한다.
11시 45분경 검문소에서 버스를 세우고 검문을 하면서 쉽게 보내주지 않아서 조주 스님이 내려서 몇 마디 나누더니 금방 통과되었다. 검문소에서 돈을 뜯으려고 안 보내주려고 하여 스님이 카메라를 얼굴에 들이대며 찍은 체 하면서 혼을 내 주겠다고 하였더니 보내주더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가 더 부패되었음은 중국이나 여기나 마찬가지다.
오른쪽에 낡은 건물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은 고려인이 만들었다는 스타디움이다. 조주 스님은 법명을 ‘덕우’라고도 쓰고, 속명은 ‘양기훈’인데 ‘양’은 우즈베크어로 ‘새로운’이라는 뜻이고, ‘훈’은 ‘왕’이라는 뜻으로 자기는 ‘새로운 왕’이라고 농담을 했다.
[뽈리타질]
11시 50분쯤 뽈리타질의 중심부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60km를 가면 천산산맥이 있고,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은 물 20억㎥를 저장하는 인공호수 ‘차르박’이 있어 그곳에서 뽈리타질을 비롯한 고려인 집단농장은 물론 타시켄트주의 식수와 농업 및 공업용수를 공급한다.
뽈리타질은 후르시초프의 역사가 깃든 곳이다. 1937년 이전부터 이곳에 살던 고려인은 공민증이 나와서 잘 살고 있었으나 1937년 이후 이주자에게는 공민증이 나오지 않았다. 후르시초프가 이곳에 와서 숙소에 있는데 2층 창문 앞에 칼을 든 자객이 나타나 찾아보았더니 옥수수가 너무 커서 2층을 넘어 자객으로 보였다. 심은 사람의 마술이라고 하여 심은 사람을 잡아왔더니 고려인 할머니였다. 이 할머니는 옥수수 농사를 지은 지 3년이 되는데 3년째가 되니 키가 3m 넘게 자랐다는 것이다. 이에 감격한 후르시초프가 고려인에게 공민증을 수여하여 그 후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옥수수를 러시아어로 ‘쿠쿠루자’라고 하는데 후르시초프의 별명이 쿠쿠루자다. 후르시초프는 2차 대전 후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소련에 옥수수를 심게 하였으나 3년이 지나도 성과가 없었다. 그 이유는 고려인들은 거름도 주고 농사를 잘 짓는데 소련인들은 거름도 잘 안 주고 씨만 뿌려 토질이 척박해져서 다른 농사조차 망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밀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이 후르시초프가 실각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뽈리타질은 고려인의 정체성을 비교적 많이 지키는 집단농장의 하나다. 고려인들은 갈대밭인 이 지역을 개간하여 농장으로 만들었고, 그 갈대밭에 세웠다는 마을극장(소극장), 마을회관(읍사무소) 등의 건물이 있다. 갈대밭을 일구어 농장을 만들고, 건물을 짓고 하던 고려인들의 간난신고가 눈에 보이듯 선하다. 그 당시 고려인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심정으로 이 농장을 개척했을 것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간 동포들이 대견하다. 더구나 소련 때 뽈리타질 여자 핸드볼 팀이 세계 2위까지 했다고 한다.
고려인 몇 사람이 지나다녔지만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아쉽다. 우리가 서 있는 곳 바로 옆에도 교회로 쓰던 건물이 있는데 기독교는 아예 비자 발급을 해 주지 않기 때문에 편법으로 봉사단체로 등록하여 활동을 하며, 그 대가로 매월 경찰에 3,000달러를 상납한다고 한다.
소련 때에는 국가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 주었다. 이곳에는 조산원도 있고, 임신 9개월째에는 유급휴가를 주었다. 교육제도는 3세까지 영아원에 다니고, 6세까지 유치원에 다닌 후 11년간의 학교를 다닌다. 9학년이 되면 학부모와 진로를 상담하여 대학교에 진학할 실력이 안 되면 전문학교로 들어가고, 실력이 되면 11학년을 수료하고 대학교에 진학하며, 대학생에게는 성인 월급의 ½을 지급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성적에 따라 러시아 각지에 취업을 한다고 한다. 토지는 국유이고, 개인은 건물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주의적인 자본주의사회가 되어 토지를 임대차하려면 집단농장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소련 때는 15년간 광부로 일하면 연금이 나온다고 하여 광부가 인기 있었으나 소련 체제가 무너지면서 연금으로는 생활할 수 없으며, 그동안 받던 많은 다른 혜택들도 거의 없어졌다.
12시 15분 출발했다. 검문소를 경계로 타시켄트주와 타시켄트시로 나뉜다. 타시켄트 시내로 들어오면서 오른쪽에 골프장이 있다. 이 골프장은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땅을 제공하고 한국인 7명이 주주로서 건설하였는데 언제든지 부킹이 가능하여 한국에서 골프투어를 많이 온다고 했다.
타시켄트 시내에 비행기 조립공장이 있고, 비행기를 시운행하는 넓은 연습장도 있다. 조주 스님이 오른쪽을 가리키며 한의과대학과 성당이라고 했다. 한의과대학은 한국인 한의사가 경영하며 원칙은 무료진료지만 6개월이나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빨리 받으려면 6,000숨을 내야 한다. 성당은 1860년 폴란드에서 만들다가 1990년대 한국인에 의해 완성되었다. 기차박물관과 중앙기차역도 있다. 타시켄트에서 모스크바까지 열차로 3박 4일이 걸리며, 옛날에는 서유럽까지 연결되었으나 지금은 모스크바까지만 운행된다.
대통령궁까지 일직선으로 넓은 길이 뚫려있다. 그 왼쪽에 한국대사관이 있다. 출퇴근 때 이 길을 지나가려면 1시간 이상 대기해야 한다고 하니 아직은 그렇게 권위주의적이다. 1800년대 말의 러시아정교회의 아름다운 건물이 있는데 약 7년 전에 정비했다고 한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온누리 슈퍼마켓, 한밭식당, 들소가든 등의 한글 간판이 눈에 띈다.
[자은사(慈恩寺)]
13시 조주 스님이 포교를 하고 있는 자은사로 갔다. 자은사 앞에는 이곳에서 ‘(주)동남우즈모터스’라는 상호로 현대자동차대리점을 하는 이종국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종국 사장은 자은사의 신도인데 이곳에 온 지 6년, 직원이 20여명 되고, 해마다 매출을 늘리고 있다고 했다.
입구에 한자로 ‘慈恩寺’라는 문패를 걸어놓았고, 좁은 터에 단층의 작은 건물이지만 이 나라 수도 중심지에 포교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 대견하다. 거실을 법당으로 삼아 삼존불을 모셔놓았다. 스님들과 함께 삼존불 앞에서 예불을 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법당에서 14시까지 점심공양을 했다.
밥, 상추, 파, 고소, 소고기국, 김치, 된장, 고추장, 와인 등으로 모처럼 한국 음식으로 푸짐한 식사를 했다. 꿀 2병을 20달러에 사고, 보드카 3병을 2병은 10달러, 1병은 5달러에 샀다.
[함자예술역사대학]
14시 20분에 출발하여 오른쪽에 러시아 시절에 건축한 발레학교를 보면서 대통령궁 부근 정부청사에 붙어있는 함자예술역사대학으로 갔다. 조주 스님이 공부하는 곳이다. 건물 입구 벽에 'ACADEMY OF ARTS DF UZBEKISTAN' 그 아래 ‘FINE ARTS SCIENTIFIC RESERCH INSTITUTE’라고 쓴 동판을 붙여 놓았다. ‘함자’는 이 지역의 예술가 겸 문인이라고 했다.
대학 내 박물관을 둘러봤다. 테레미즈의 캄푸리데파 출토 유물, 테레미즈 지역의 그리스 유물, 달베르진데파의 출토유물 등 꽤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아직 정리가 안 된 유물도 많다고 했다. 타시켄트에는 재정이 빈약하여 제대로 진열하지 못하고 처박아둔 다른 유물도 많다고 했다.
나오면서 컵을 8달러 주고 샀다. 그 돈은 학교의 발전기금으로 쓰인다고 하여 몇 사람이 컵을 샀다. 나오면서 입구에서 일행들과 함께 에드워드 루트블라제 사학과 주임교수와 인사를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역사박물관(State Museum of the History of Uzbekistan)]
15시 40분 역사박물관으로 갔다. 월요일은 휴일인데 조주 스님이 박물관장 겸 함자대학의 역사교수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입장할 수 있었다. 박물관장은 한국복식협회에서 초청하여 1주일 전에 한국에 다녀왔다고 했다.
BC 3000년경의 석기(완벽한 모습), 그리스와 스키타이의 유물, 유골과 토기가 들어있는 무덤, 동경(銅鏡), 상수관, 동전, 아람문자 등이 찍힌 도편, 테레미즈의 화이자데파에서 출토된 유물, 3000-3500년 전의 도장(인더스 문명의 특징), 신상(神像), 막새, 페르가나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 등이 진열되어 있다. 불교경전 4차 결집은 카로스티 문자, BC 5세기-AD 5세기의 브라흐미 문자, 아람어 등 세 가지 문자로 했다. 카로스티 문자는 호탄에서 출토된 도자기 파편에 각인되어 있었다. 조주 스님은 불상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면서 간다라에서 불상을 최초로 만들었다고 하나 간다라의 불상은 수염이 있고, 테레미즈의 불상은 수염이 없다며. 테레미즈의 불상이 간다라의 불상보다 시기가 앞선다고 했다. 3층은 현대의 미술품이 진열되어 있다고 해서 둘러보지 않고 나와서 부근 알릭세이 나보이를 기념한 나보이 대극장을 지나 길 건너 슈퍼마켓(TOSHKENT UNIVERMAGI)에 들렀다. 나보이 대극장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17시 50분 슈퍼마켓을 출발했다. 조주 스님의 경리를 맡고 있는 라이샤 콘스탄틴 박이 따라왔다. 레닌그라드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수재였으나 혼기를 놓쳐 결혼도 안 한 50대 초반의 여성이다. 오빠는 볼가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에 따로 살고 있고, 그녀는 현재 언니, 여동생과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버스 안에서 라이샤가 우즈베크 노래 2곡을 부르고, 일행 조명희 씨가 시조창으로 화답했다. 7박8일의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하루에 수 백 km를 여행하였으니 1주일이라는 날들이 꿈결같이 흘러갔다.
18시 5분부터 19시 35분까지 베크(BEK)라는 식당으로 가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했다. 신근재 교수가 마시던 시바스리걸을 내어놓았고, 이영자 교수가 효녀상을 받은 기념으로 와인을 샀다. 라이샤가 밀양박씨라고 하여 내가 밀양아리랑을 불러주었더니 조영록 교수가 옆에서 듣고는 다 들을 수 있도록 부르라고 하여 밀양아리랑으로 타시켄트에서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19시 55분 출발하여 20시 20분 타시켄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조주 스님, 라이샤, 샤얼로흐, 김정위 교수가 끝까지 우리를 배웅했다.
23시 20분 HY511기에 올라 이륙했다. 비행기가 올 때보다 더 작다. 기내식을 주는 닭고기덮밥 비슷한 음식은 꿀꿀이 죽 같아 도더히 먹을 수가 없어 빵만 먹고 남겼다. 10월 30일 (화)/ 09시 30분 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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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변호사 자격을 준다는 타슈켄트 법대 입학금이 고관 자녀들은 500 달러고 일반 학생들은 5000 달러라...
작가의글을 읽으니 물국수 넘어 가듯 술술 편하게 읽을수 있어 좋았고,
기내식 남긴 닭고기 덮밥 조금 아까운 마음 드네...
재호! 오랜만이네. 인터넷이 있어 종종 소식을 알 수 있어 반갑네
인천공항까지 도착했는데 다음 글에선 무엇 이야기가 나올까나? 계속 기다리고 있다네.
농장 돌보랴 정신없을 텐데 여기까지 행차해주어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