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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
*마태복음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들어가는 말)
노무현의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 삼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강한 부르짖음으로 다가온다. 그를 싫어했던 사람이나, 그를 추종했던 사람 모두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한 시대를 신념으로 살다 간 그에게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의 죽음은 권력무상을 가르쳐주고, 나태해져가는 양심을 깨워주며, 욕심과 편견을 내려놓게 한다. 그의 죽음은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왜 천국에 가기 어려운지를 알게 해준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의도적으로 폄하되거나 미화되어서는 안된다. 정쟁에 이용되거나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어서는 더욱 안된다. 고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의 죽음이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생긴 분열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는 엔학고레, 지역주의로 막혀 있는 담을 허물고 모두가 하나되는 평화와 화해의 엔학고레가 되어야 한다. [국민일보 이승한 부장]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성품, 즉 팔복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두 가지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첫째 ‘세상의 소금’이요, 둘째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을 등지고 살거나 도피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상의 한복판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썩어져 가고 냄새나는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고, 어둡고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소금이란 두 가지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썩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이요, 둘째는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소금은 언제나 조용히 소리 없이 스며들어 변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부터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일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소금과 빛을 비교해 보면 소금은 은밀하게, 조용하게 역사하는 반면에 빛은 분명하게 공공연하게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소금은 안에서 녹으면서 역사하지만 빛은 밖에서 힘있게 역사합니다. 빛은 속성상 숨겨질 수 없습니다. 높은 데 두어서 온 집안이 다 보일 수 있도록 빛을 비추게 됩니다.
1. 세상은 본질적으로 악하기에 빛이 필요합니다.(14절.세상의 소망= 빛)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본문 14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내면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즉 이 세상의 본질은 매우 캄캄하고 절망적이고 죽음의 세상이므로 빛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을 살펴보면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세상의 임금들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신론적인 물질주의자들이나 과학주의자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타락한 이 세상은 더 이상 최초의 에덴동산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이상 세계나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둡고 죄악이 많은 곳이기에 빛이 필요한 것이요, 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착각하지 말고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만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뿐 아니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별로 훌륭한 존재가 압니다. 가만히 자신을 돌이켜 보면 선은 없고 죄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마다 못된 것들, 욕심과 권력과 잘못된 구조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이 천국까지 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리고 한 가지 비록 세상이 이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14.위치)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어느 글에 보니 “누가 불빛을 꺼버렸는가?”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빛을 감추려고 애쓰는가?”
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 우리의 빛을 감추고 있습니다.
-말을 해야 할 때에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군중의 무리를 무조건 따름으로써
-진리를 부인함으로써
-죄가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증거를 약화시키도록 허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무시함으로써
-..........
--우리 안에 생명의 빛이 꺼져 있지는 않습니까? 빛이 있기는 있지만 너무나 약해서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두움에 사로잡혀 꼼짝달싹 못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우리 스스로 돌아보십시오.
-어제 대통령 영결식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교회는 그분이 자살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침묵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500만이 넘는 국민들이 그분을 애도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정치 권력에 대해, 기득권 세력에 대해, 부도덕한 사회에 대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율법에 맞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분리한다면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베다니 마을에 가서 함께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이 필요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롬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빛은 어두움을 밝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태초의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심으로 밝고 광명한 세계로 바꾸셨습니다. 빛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양이나 달과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로등이나 등불, 그리고 날아다니는 반딧불도 제각기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문의 빛은 이러한 빛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빛’자체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철저하게도 남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습니다.
마치 한 자루의 양초가 어둠을 밝히려 자신의 몸을 녹여 빛을 발하듯 예수께서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과 맞서 자신의 몸 전체를 불꽃처럼 사르신 분이십니다.
찬양가사 - 빛으로 오신 예수
어두운[죄악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여 어두운[죄악된] 세상을 밝히러 오신 예수여
나의 어두운[더러운] 맘속에 들어오셔서 나의 어두운[더러운] 맘 맑혀 주소서
3. 세상 속에서 빛의 역할(15-16절)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의 고유하고 독특한 역할은 어두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빛이 없을 때는 어두움이 어두움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즉 죄는 죄에 대해서 무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캄캄한 방에 불이 켜졌을 때 드디어 어둠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생애 들어오기까지는 내가 어두움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지만 예수님이 나의 생에 들어오면 그 동안의 나의 삶이 얼마나 절망 속에 있었고, 허무와 죽음 속에 있었고, 잘못된 삶이었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이며 빛의 역할인 것입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의 이 빛은 예수님의 생명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이 빛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빛입니다. 즉 죽음과 어두움을 깨시고 부활과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더 이상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빛의 자녀답게 산다”고 하셨고, 또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역할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두움을 노출시키는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두움을 분명하게 노출시키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다른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여기에서 갈등과 고통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누구를 정죄하거나 비판하거나 고발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활이 곧 빛이기 때문에 어두움과 비교되고 거짓과 죄악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빛 때문에 어두움이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의 간절한 소망은 자기 남편이 예수를 잘 믿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부인의 기도대로 어느 날 회개하고 예수를 잘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잘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당황해서 그렇게까지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니 좀 점잖게 믿어 달라고 합니다. 하루 종일 예수님을 생각하고 매일 교회에 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남편이 진짜 아닙니까?
-또 부모들은 기도 중에 자녀들이 예수를 잘 믿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진짜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여 헌신하면 오히려 그 부모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진짜 신앙은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부모를 당황하게 만들고, 친구, 직장동료, 이웃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만큼 충격을 줄 만큼 남들과 다른 질의 삶을 살아 합니다.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등불은 등경 위에 두어 세상을 비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삶에 있어서 어두운 곳이나 숨겨진 부분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부분이 노출되고 공정해야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늘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이라고 할 때 촛불이나 전깃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춧불의 경우에는 심지와 기름이 있어야 빛이 비추어 집니다. 즉 기름은 전우이고 심지는 전구로 비유해 볼 때 아무리 전구가 좋다고 하더라도 전원에 연결되어 있지 아노으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전원에 잘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전구가 깨지거나 그 안에 필라멘트가 끊어지면 빛을 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조명(샹들리에)에도 반드시 전원이 연결되어야 빛을 발할 수 있듯이 빛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빛을 주실 때만 우리는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발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1)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잘 연결되어 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들의 선행이 아무리 훌륭하고, 구제와 도덕적 삶이 아무리 훌륭해도 빛이 되지 못합니다.
2)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만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졌다면, 심지가 다 타버렸다면 빛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전구는 우리의 도덕적 삶입니다. 곧 8복 8가지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아 예수 잘 믿고 일도 많이 하는데 열매가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의 전구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도덕적 성품이 흔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 (영화) “네가 유혹했지?”
요셉은 10대 소년으로 애굽에 팔려 가는 노예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애굽의 바로 왕의 제 1경호실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온 요셉은 주인의 신임을 얻어 그 가정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어선 요셉은 젊음의 광채가 나는 멋진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우아하고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가 눈독을 들였습니다.
상대가 노예였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함께 잠자리에 들어가자고 날마다 유혹했지만 요셉은 거절합니다.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만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둘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옷자락을 잡고 사정을 합니다. 너무나 급한 나머지 요셉은 자기도 모르게 웃옷을 벗어 놓고 도망갔습니다. 요셉의 옷을 움켜쥔 채 그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요셉을 향한 이 여자의 그리움은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이 놈 두고 보자. 내가 너를 가만히 둘 줄 아느냐? 너는 오늘 끝장이다.’ 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습니다.
드디어 남편이 오자마자 옷을 내놓으면서 ‘당신이 돈을 주고 사온 히브리 소년 저 요셉이라는 자가 나를 성폭행하려고 달려들길래 내가 쇠를 질렀더니 옷을 벗어 놓고 도망갔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보디발은 매우 불쾌했고 요셉을 감옥에다 넣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요셉을 감옥에 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인의 아내를 범하려고 한 노예라면 감옥이 필요 없습니다. 노예인데 무슨 재판이 필요합니까?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로서는 당장 요셉이 죽는 꼴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남편이 그를 살려서 감옥에다 집어 넣는 것을 보자 이만저만 화가 난 게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에 남편을 걸고 넘어졌습니다. ‘당신 아내를 겁탈하려고 하는 그 나쁜 짐승같은 놈을 왜 살려 둡니까? 뭐가 좋아서 살려두는 것니까? 그대 보디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말을 한 번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어.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믿어.’ 이 소리를 듣고 그 부인은 화가 나서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그럼 내가 거짓말을 했단 말이예요?“ 하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은 그동안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아내를 때립니다. ‘이 요사스러운 것 같으니, 네가 유혹했지? 네가 고리친 것지?’라고 고함쳤습니다.
굉장히 실감나는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보디발이 요셉의 말을 아내의 말보다 더 믿었던 것은 요셉의 도덕성이 얼마나 높은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 이런 악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도덕적인 표준은 사람도 아니고 상황도 djk니었고,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평소에 그것을 보고 있었던 보디발은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면서 맹세하다시피 하는 말에는 절대로 거짓이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유지해야 할 도덕성의 우위는 요셉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가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세상의 빛된 삶의 결과(16절)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겁게 하는 데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빛이 비추어지면 빛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광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면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이 계시다” “예수님은 참 진리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착한 행실이란 바로 빛된 삶입니다.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롬13: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가는 말)
우리는 그동안 마태복음 5장 1절-16절까지의 산상설교에 대한 부분을 배웠습니다.
이 부분을 정리하며 결론을 맺겠습니다.
첫 번째 결론은 소금이나 빛이 그 역할을 하려 했을 때 자기를 소모시키고 태운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생활과는 전혀 다릅니다.
자기 희생, 헌신, 자기 부정 없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좇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거이니라’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하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얻기 위해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얻은 것 같은데 허전하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결론은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는 영향력은 어떤 외적이 능력이나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성품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앉은뱅이에게 기도하여 벌떡 일으키고, 암환자를 고쳤다고 가정해 보면 이 교회에는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세상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내적인 성품을 가지고 존재할 때 부패가 막아지고 어둡던 것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삶을 사십시오.
판단은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행동은 소처럼 신중하게 조심조심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호시우행 했으면 합니다.
호랑이처럼 이 세상을 예리하게 분별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십시오. 동시에 소처럼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우직하게 말없이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사십시오.
- 또한 맛과 멋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맛과 멋’
--소금의 중요함은 맛입니다. 이 맛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설렁탕’....
이웃과 좋은 신뢰관계를 유지하십시오. 신뢰가 깨진다면 이미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행여 신뢰관계에 금이 갔다면 회복하십시오. 화해와 용서로 신뢰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소금의 참 맛은 바로 신뢰입니다.
--빛은 중요함은 ‘멋’입니다.
멋은 매력을 말합니다. 유난히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호감이 갑니다. 멋을 내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외부치장에만 멋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멋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그 사람에게서 풍겨나오는 그리스도의 향기, 즉 인격의 멋, 인격의 매력을 의미합니다. 오늘 나에게 이 맛과 멋이 있습니까?
삶의 맛을 내는 신뢰, 삶에 아름다운 매력을 풍기는 멋을 아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두날개공동체 카페/ 한우리교회 벅석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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