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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위구르 실크로드 12일차 '26.6.14 서안성벽(西安城墙), 대안탑(大雁塔), 화청궁(华清宫), 화청지(华清池)
□ 여행트랙 :
□ 여행일시 : 2026년 6월 14일 일요일 맑음, 영상 38도
□ 여행코스 :
07:58 서안햄튼바이힐튼주점 출발(407m) ~
08:36 서안성벽( 西安城墙, 장락문, 长乐门, 411m, 14.0km) ~ 답사1.7km/0:41 ~ 09:17 서안성벽 출발 ~
09:37 대안탑 (大雁塔, 약429m, 22.4km) ~ 답사 1.7km/0:40 ~ 10:17 대안탑 출발 ~
11:05 화청궁(华清宫, 445m, 61.5km) ~ 답사 2.6km/1:03 ~ 12:05 화청궁 출발 ~
12:16 점심식사(약445m, 67.5km) ~ 13:22 출발 ~
14:00 병마용 (兵马俑, 약483m, 79km - 화청궁에서 15km) ~ 2.6km/1:32 ~ 15:30 출발 ~
종고루 ~ 장한가 ~ 무슬림테마거리
□ 동 행 인 : 등산지부 31인, 산바라기투어 임경성 부장, 현지 가이드 김정길
<당현종과 양귀비>
중국내 실크로드를 역으로 엮으면서 마지막으로 찾게 되는 서안이다. 당나라때의 장안, 진시황의 함양을 품은 서안에서 먼저 성벽을 찾아간다. 이 성벽은 한바퀴 도는데 약 15km 이니 여유를 갖고 돌아보고 싶은데, 향후를 기약할 수 밖에 없다.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고온에 뜨겁게 달아오른 성벽에 있는 것은 많은 참을성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아주 짧은 시간의 자유시간을 주어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성벽을 걷다가 뛰다시피 내려간다. 거의 주마간산형 관광인지라 성벽의 장락문만 살짝 보고 지나치는 것이다.
그 다음에 갈 곳은 대안탑이다. 대자은사란 절 안에 있는 7층의 탑을 한바퀴 둘러보고 해우소를 이용하고 나온다. 7층 64.5m의 거대한 탑 앞에서 어떻게 이렇게 지을 수 있을까하며 입을 다물지 못함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이 이 탑과 견줄만한 것으로 보이는데 현존하지 않으니 아쉽다.
약 40km를 달리던 버스는 시 외곽으로 나오는가 했는데 화청궁에 내려준다. 양귀비와 당현종에 얽힌 기막힌 이야기를 가이드가 유창하게 늘어놓는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우리의 장희빈과 비슷한 점이 몇군데 있는 것 같다. 안사의 난을 유발시킨 세계사의 주인공들인지라 재미있게 화청궁과 화청지를 오고간다. 오늘 저녁에는 여기서 장한가를 보게 될 것인데 실제 인물들을 대입하여 극적으로 미화한 작품이 기대되는 것이다.
서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병마용을 직접 보게 된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그런데 너무 많은 인파가 가득하여,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고 가이드와 해설사의 소리가 으르렁거리며 포효하는 듯하여 귀가 멍멍하다. 아직도 발굴 중이고, 정비중인 지하무덤을 둘러보고 실크로드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시안성벽 ~ 대안탑>
<화청궁 ~ 병마용>
<실제 이동 트랙>
<서안성벽 개요도>
<화청궁 개요도>
<서안 관광지도>
08:00 호텔 출발(西安希尔顿欢明酒店, 약407m), 새벽에 도착한 것을 감안하여 늦게 출발한다.
벌써 서안 고성이 보인다.
각루는 성벽 방어 체계의 중요한 요소로, 성벽의 네 모퉁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08:35 서안성벽 장락문 도착(약416m, 13.8km, 0:28), 버스 창문으로 우선 성벽을 바라보면서 진입하고 있다.
서안성벽(西安城墙)은 산시성 시안시 성구에 위치해 있다. 명나라 초기에 당나라 장안황성의 기초 위에 만든 것이다. 이후 수차례 보수 공사를 거쳐, 방어체계를 구축하였고,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성벽이 완성되었다. 1961년 시안성벽은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오늘날의 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된 것이다. 당나라 말기 뤄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원래의 도성인 당나라 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명나라 초기 주원장에 의해 둘째 아들 주협이 진왕으로 봉해졌고, 서안부를 두었다.
홍무 7년인 1374년에 서안장벽의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장벽을 중건할 때 서쪽과 남쪽은 원래의 당나라 장안성 황성의 터 위에 성을 연장하여 만들었고, 동쪽과 북쪽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 공사는 1378년 8년을 진행하여 기초를 완공하였다. 그 후 1568년 장벽 위쪽 공사와 외벽쪽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636년 명나라말 섬서순무 손정정이 이자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네 문의 옹성을 추가로 만들었다. 청대에 이르러 명나라 때 기본골격을 따랐고, 열 두차례에 걸친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건륭제 46년인 1781년 포와 해자를 추가하여 대다적인 방어능력을 향상시켰다. 성벽은 방어용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서로 길쭉한 장방형이다. 동벽은 2,590m, 서벽은 2,631m, 남쪽 장벽은 3,441m, 북쪽 장벽은 3,241m로 전체 둘레 13.75km이다. 성내의 면적은 총 12평방킬로미터로, 당나라 장안성의 1/7 정도의 크기이다. 성벽의 높이는 12m, 아래에서 15~18m에 이른다. 서안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있고, 각각 장락문(长乐门), 안정문(安定门), 영녕문(永寧門)과 안원문(安遠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문 밖에는 옹성이 고르게 쌓여있다. 각 문은 3층으로 3중으로 나뉘어 있고, 바깥이 안쪽을 향하게 되어있다.
시안 성벽에는 현재 18개의 문이 있으며, 영녕문에서 시계 방향으로 영녕문, 주작문, 물막문, 함광문, 안정문, 옥상문, 상무문, 안원문, 상덕문, 해방문, 상검문, 상근문, 조양문, 중산문, 장락문, 건국문, 화평문, 문장문이다. 이 18개의 문에 대한 건축시기와 그 용도는 각기 다르다. 그중 영녕문, 안원문, 문창문, 안정문은 당시 군사 방어 필요로 인해 단일 문으로, 각 성벽 사이에 세 개의 벽이 형성되어 있다. 영녕문을 제외한 세 문에는 이제 두 성벽만 남아 있다. 현대 중국에는 점차 원래의 군사 방어가 아닌, 교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네 개의 성문 양쪽에 새로운 문을 설치했고, 나머지 14개의 성문은 이후 재건되었다. 전쟁으로 무너진 성벽 틈새에 재건되거나, 당나라 황성 성문 유적지 또는 위대한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신축되었다.
08:43 서안성벽(약404m, 12.8km, 0:36), 버스에서 내려 장락문에서 자유시간을 갖고 뜨거워진 성벽을 즐긴다. 각종 안내판이 즐비하다.
장락각, 장락문에 있는 성곽이다.
작렬하는 태양과 스모그가 결합하여 해무리를 이루고 있다.
08:51 장락문 성루(약418m, 12.9km, 0:43), 허용된 자유시간 범위 안에서 종종 걸음으로 동문가까이 갔다가 오기로 한다.
성벽 아래에서는 이 시간에 체조하는 이들도 있다.
서안성벽 1호 고루까지 왔다가 돌아간다.
고성을 제대로 답사하려면 성루를 동서남북으로 걷고, 해자를 또 한바퀴 돌고나서, 성내 맛집을 찾아다녀야 하는데 지금은 겉핥기에 바쁘다.
성벽 고루에 대한 안내문을 읽어보고 돌아간다.
회화나무, 중국에서 국목 대접을 받을 만큼 역사적으로 격조 높은 나무로 꼽힌다. 주나라 때부터 조정의 최고 관직인 '삼공'의 자리에 회화나무를 심어 상징으로 삼았다. 잎은 아까시나무와 매우 유사하지만 가시가 없다.
10:18 서안성벽 출발(약412m, 14.5km, 1:10), 장락문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려 승차하고 이동한다.
버스 안에서 창문으로 시안건축과기대학을 바라보며 지나간다.
09:37 대안탑 (大雁塔, 약429m, 22.4km) ~ 10:17 대안탑 출발
대안탑(대자은사탑)은 ‘대자은사탑’이라고도 하며, 당나라 영휘 3년(652년), 현장(玄奘)은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가져온 경전과 불상을 보관하기 위해 대안탑을 건설했다. 처음에는 5층이었으나, 나중에 9층으로 확장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 현재 7층 구조의 탑은 높이가 64.517미터, 기단의 길이는 25.5미터입니다. 대안탑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당나라 시대의 사방형 벽돌탑으로, 불탑은 고대 인도의 불교 사찰 건축양식이 중원 지역으로 전파되어 중국 문화와 융합된 대표적인 유적이다. 대안탑은 5A급 관광지로, ‘실크로드 장안-천산’의 일부 유적지로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대안탑은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대량의 불교 경전과 불상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다. 현장은 629년부터 645년까지 인도로 여행하며 657부의 경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귀중한 불교 유산을 보관하기 위해 그는 당나라 황제에게 탑 건설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대자은사 내에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대자은사는 중국 불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찰 중 하나로, 당 고종이 어머니 문덕황후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곳이다.
대안탑 탑돌이 행사가 진행중인데, 거룩함보다는 재미있게 하려는 것 같다.
정문 앞에는 해우소가 있다.
대안탑 내부에는 별도의 요금을 지불해야해서 들어가지 않고 돌아본다.
수령 약 200년의 3급 보호 고목인 당버들이 경내에 심겨져 있다.
당나라 수도 장안성의 구역별 지도에서 자은사의 위치(노란색)를 찾아본다.
서안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해무리가 아주 뚜렷하다.
11:05 화청궁(华清宫, 445m, 61.5km) ~ 12:05 화청궁 출발
화청궁은 당나라 초기에 건축하여, 당현종이 권력을 잡은 후 웅장한 궁전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건축했으며, 거의 매년 10월마다 방문하고, 연말에야 장안으로 돌아왔다. 714년부터 755년까지 40년에 걸쳐 화칭궁을 36회 방문을 했다. 수천 대의 마차와 만 개의 깃발이 평원, 구름, 안개, 식생을 함께 빛나게 했다. 81대의 전차와 만 명의 기병, 아침에는 연회, 저녁에는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장안의 관청을 리산으로 옮기고, 화청궁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를 형성한 것이다. 안사의 난 이후 정치 상황이 극적으로 변했고, 현종제는 결국 왕위에서 물러났다. 화청궁은 쇠퇴하였다.
당대에 화청궁은 궁전과 온천을 활하여 웅장한 궁전으로 만들었다. 여산을 따라 확장되어 지형을 활용해 다양한 정자들을 배치한다. 또한 각종 나무를 심고 정원을 곳곳에 배치한다. 화청궁의 건물들은 산과 물가와 조화를 이루고 있고, 주변에는 성벽도 있다.
당 현종과 양귀비가 계속 춤을 추고 있다.
화청궁의 매표소는 조금 한가해 보인다.
백거이의 장한가를 양각해 놓았다. 맨 좌측에 있는 후반부만 읊어본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주고받은 맹서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고자했으니
天長地久有時盡 높은 하늘 넓은 땅도 다할 날이 있으련만 此恨綿綿無絶期 두 사람의 서러운 한은 끝없이 이어지리라.
베제클리크에서 보았던 도사와 비슷한 알바 도사가 있다.
당대 여성들의 생활상을 표현하고 있다.
양귀비가 뜨거운 햇살아래, 분수로 샤워를 하고 있다.
태자탕, 당 정관18년( 644년)에 지어지고, 1982년에 발굴된 태자탕은 10명의 태자가 목욕을 했다
당 현종의 전용탕인 연화탕
해당탕, 747년에 당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하여 마련해준 "귀비탕"이다.
신하들의 온천탕과 배수로를 바라본다.
화청궁의 외부 정원을 둘러본다.
사진으로 세계 유명인사들이 다녀간 것을 벽에 게시하고 있다.
화청궁 출구로 나와 병마용으로 향한다.
<당나라 현종>
당 현종은 정변을 일으켜 황권을 장악했다. 당 현종 이융기는 당나라 제6대 황제 현종(玄宗)의 이름으로, 예종(李旦)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모 측천무후 시대에 낙양(洛陽)에서 태어났다. 태종(이세민) 이후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를 가져오기도 한 황제이다. 그가 26세 때(710년) 태평공주(측천무후의 딸)와 연합하여 당융(唐隆)정변을 일으켜, 아버지 예종을 제위에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712년 예종이 28세의 현종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태상황(太上皇)이 되어 섭정을 실시하였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태평공주와 그 측근이 모두 차지하였다. 713년 현종은 태평공주와의 권력투쟁에서 이기고 공주가 자결함으로써 황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당시 그와 대등한 권세를 가졌던 태평공주 일파를 타도하여, 측천무후 이래 반세기에 걸친 여인의 정권 개입을시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현종은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정치에 본격적으로 임했다. 재상들의 도움을 얻어,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 개발 등으로 경제를 튼튼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 병농일치)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동돌궐·토번·거란 등의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개원·천보(天寶) 시대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재위 초기에 민생위주의 정치에 전력을 쏟았다. ‘개원의 치(治)’로 불렀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든 현종은 점차 정치를 등한시하기 시작하고 도교에 빠져 막대한 국비를 소비하였다. 737년 무혜비가 죽자,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를 시켜 자신의 며느리이자 35세나 연하인 양귀비를 데려오게 한다. 그 뒤로 그는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였고, 국정은 권신 이임보가 대신 맡아보게 하였다.
천보 14년인 755년, 안녹산이 부하 사사명과 함께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반란이 일어나자 현종과 양귀비, 양국충과 그 일가친척들은 모두 장안(長安)을 떠나 피신하였고, 반란군은 계속 진격했다. 하지만 현종을 호위하던 관군이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마외파(馬嵬坡, 지금의 시안 싱핑현)에서 양국충과 그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도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양귀비는 울면서 역관 옆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고, 이때 그녀의 나이 38세, 때는 756년이었다.
양귀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환성을 내지르며 다시 현종을 호위하여 서쪽으로 행군했다. 그러나 같이 따라온 황태자 이형(숙종)은 마외파에 남아 조정 일을 주관하였고, 북쪽으로 올라가 영무(靈武, 지금의 닝샤후이족 자치구 링우시)에서 황제에 오르고, 현종을 태상황으로 삼았다.
757년 12월,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장안으로 돌아와 감로전(甘露殿)에 거처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내던 현종은 5년 뒤인 762년 5월 2일,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날의 영화에 대한 허무함 때문에 병이 들었다. 그는 옥피리를 처량하게 불고, 궁녀를 불러 자신을 목욕시키라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5월 3일 새벽에 붕어하니 그때 나이 78세였다. 묘호는 현종이고,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그는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음악에 뛰어나 스스로 작곡까지 하고, 이원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서도(書道, 서법)에도 능하여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현종 두 황후 이후 양귀비를 황후로 삼았고, 양귀비의 사촌 4명, 사사명의 고종사촌 기녀 등, 환관이 바친 일본인 마사코 등의 비빈을 두었으며, 이들과의 사이에 수만은 자녀를 두었다.
당 현종의 무덤은 산시성 푸청(蒲城)현 동북쪽으로 15킬로미터에 오용(五龍)산맥의 분지인 금속산(金粟山) 남쪽에 위치한다. 이 산은 해발 716미터 높이다. 현종은 일찍이 금속산에 이르러 용이 서리고 봉황이 나는 듯한 산세를 보고는 이곳을 자신의 장지로 정하였다. 현종의 태릉은 이 산을 능으로 삼았고 산 중간에 무덤 석실(墓室)을 만들어 사방에 벽을 쌓았다.
화청지(華淸池)는 시안(西安) 동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여산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북으로는 위수를 마주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온천으로 43도의 온천수가 샘솟는다. 온천이 드문 지역이다 보니 3,000년 전인 주(周)나라 때로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 때는 ‘여궁’, 진(秦)나라 때는 ‘여산탕’, 한나라 때는 ‘이궁’, 당나라 때는 ‘화청궁’으로 불렸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지어준 ‘해당탕’이 있는 곳이며 이때 전성기를 맞게 된다. 현종 말기 안사의 난으로 화청지는 대부분 불에 탔고, 후에 청나라와 중국 정부에서 30%만 정도 복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