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에서의 모습과 발언은 그 사람의 됨됨이나 속마음을 헤아리는 데 종종 유용한 단서가 된다. 고민 끝에 강준만 교수와 사석에서 나눈 얘기도 일정 부분 기사화하기로 결정했다. ‘인간 강준만’을 이해하는 데 그보다 좋은 ‘자료’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메일을 통해, 그런 뜻을 전하는 한편 몇 가지 보충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다운 행동이었다. 인터뷰와 기고, 강연 요청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전화조차 끊고 사는 그가 아닌가. 아마도 그는 하룻밤 지나고 나서 인터뷰에 응한 것을 곧바로 후회했거나 지금쯤 인터뷰한 사실을 깡그리 잊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날 그가 안내한 횟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쯤이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싸면서 맛도 좋고 서비스도 좋은” 식당이다. 주인이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는 것으로 봐 그가 단골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할 말을 다 못하기라도 한 듯 많은 얘기를 쏟아냈다. ‘지식인사회의 위선’에 대한 분노를 좀더 강도 높게 표출하는가 하면 자신의 내면세계를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술은 처음에 맥주 3병을 시켰다가 몇 차례 추가 주문을 했다. 그는 “딱 한 병만 더”를 즐기는 편이었다. 담배도 많이 피웠다. 특유의 독설은 한층 빛을 발했고 인터뷰 때는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유머감각이 돋보였다. 그는 옆방에 든 단체손님들이 식당이 떠나갈 듯 시끄럽게 떠들자 ‘자리를 잘못 잡은 데’ 대해 몹시 미안해했다. 그러다 나중엔 도저히 못 참겠는지 칸막이 문을 열고 옆방 사람들에게 한소리 했는데, 효과가 없진 않았다.
밤 11시가 넘어 식당에서 나왔다. 그 길로 그의 작업실로 갔다. 외부인에게 공개하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건물 2층에 자리잡은 작업실 출입문에는 ‘인물과 사상’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 악명 높은 ‘강준만식 글쓰기’의 산실인 셈이다. 30평 남짓한 작업실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작은 방은 그가 원고를 쓰거나 편집하는 곳으로 PC가 몇 대 놓여 있다. 탤런트 심은하의 대형사진이 벽 한가운데 걸려 있다. 그에 따르면 같이 일하는 직원(전북대 졸업생)이 ‘환경미화’ 차원에서 걸어놓았다는 것이다.
▼ “오늘, 완전히 망가졌다” ▼
전체 공간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큰 방은 서고다. 책과 인물파일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왕성한 독서량을 과시하는 그는 특히 정치인 언론인 등 사회적 공인들이 펴낸 책은 빼놓지 않고 사들인다. 인물파일들은 가나다 순으로 서가에 꽂혀 있어 찾기에 편리해보인다. 인물파일에는 해당 인물에 대한 스크랩 자료가 잔뜩 채워져 있다. 그는 1996년에 펴낸 ‘고독한 대중’이라는 책 후기에서 인물파일이 1000여 개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필요할 때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손으로 분류해놓은 자료를 찾는 것이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뽑아내는 것보다 빠르고 편하다”며 인물파일의 장점을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얘기도 했다. “나한테는 너무 소중한 것들이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휴짓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내가 이 작업을 더 못하게 되면 다 내다버려야 할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 처분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다.” 그의 표정이 쓸쓸해보였다. ‘고독한 대중’에서 밝힌 대로라면 그의 행동반경은 집과 학교를 벗어나지 않는다. 학교 도서관과 기숙사를 오가며 ‘죽어라 공부만 했던’ 미국 유학시절 몸에 밴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전까지 그의 작업은 주로 집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외부에 따로 작업실을 마련한 후로는 학교에서 퇴근하면 곧장 그곳으로 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 1∼2시까지 책을 읽거나 글쓰기에 몰입한다. 작업실에서 나온 후 그의 제의로 한잔 더 하러 인근 술집으로 갔다. 역시 맥주를 시켰다. 그는 꽤 많이 마신 편인데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 등산을 꾸준히 하고 매일 자전거를 타는 덕분인지 체력이 좋은 듯싶었다. 여전히 열변을 토했고 잠시도 쉬지 않고 분노를 술잔에 쏟아부었다.
새벽 2시 반. 헤어질 때 그가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 참 오늘 할 일이 많았는데… 완전히 망가졌네요.” 다음은 그가 사석에서 한 얘기 중 일부를 요점만 정리한 것이다. 편의상 주제별로 나눴다.
●DJ정권 DJ의 최측근들이 나라를 다 말아먹는다. 지방자치단체장의 행태는 오만방자 그 자체다. 저마다 이권 챙기기에 급급하고 있다. 그 동안 굶주렸으니 많이 챙기기나 하자는 심보다. 정권교체 후 많이 실망했다. 인사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보상인사가 판친다. 어떡하든지 과거에 신세 진 사람에게 한자리 주려고 애쓴다. 호남 인사들의 중용을 자제했으면 좋겠다. 영남권이라고 옳은 생각과 능력 있는 사람들이 왜 없겠나. 그런 사람들을 찾아 기용했더라면 욕 안 먹고 평가받을 텐데. 한풀이 차원에서 그런 인사를 했다면 할 말이 없다. 이번에 못 해먹으면 언제 또 하겠냐고 인사를 그런 식으로 하면 의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깡패 조직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DJ 인사를 비판하는 쪽에도 문제는 있다. 호남인들이 지금까지 소외 돼온 게 사실 아니냐. 좀 해먹으면 어떠냐. 하면 얼마나 한다고. 이때까지 수십 년 동안 경상도 사람들이 해먹은 건 생각도 안하고 일방적인 비판만 한다. 내게 ‘DJ 죽이기’로 돈 벌고선 DJ를 비판할 수 있냐고 혹자는 말하지만 잘못한 것에 대해선 비판하는 게 옳지 않은가.
●전라도 나는 전라도 사람이 아닌데도 호남 입장에서 얘기하는데 나를 가장 욕하는 사람들이 호남 사람들이다. 내 부모는 이북 황해도 출신이다. 그래서 제3자 입장에서 호남을 바라볼 수 있다. 차별과 멸시를 받고 있음에도 호남에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오히려 호남 출신으로 타지에 가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호남 차별을 뼈저리게 느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전라도 억양이 있다고 깽깽이라고 놀리더라. 양귀자 신경숙 은희경 등 전라도 출신 문인들, 문제가 많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성향을 알면서 어떻게 조선일보에 글을 쓸 수 있나.
●안티조선일보운동
조선일보 기자들이 뭔 죄가 있나. 이한우 기자한테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1억원을 내놓으라는 건 말이 안 된다. 항소심 계류중인데 대법원에 상고까지 하겠다. 김동민(한일장신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안티조선일보운동 지식인선언 대표)은 낙관주의자다. 그러나 나는 안티조선운동을 비관적으로 본다. 지는 게임이다. 지금 와 생각하면 운동방법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도덕성을 내세우는 정공법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나도 힘들다. 나라고 왜 편하게 살고 싶지 않겠나. 뭐가 좋다고 남들한테 욕먹는 피곤한 짓을 계속 하겠는가.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수가 돼 가만히 보니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영역이 있더라. 내가 보기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현상인데 다들 아무 말 않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어떻게 언론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나.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나. 나는 그 모순을 견딜 수 없다.
●지식계·교수들
대한민국에서 가장 썩은 집단이 지식계, 교수 집단이다. 교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뭔지 아나. 돈이다. 기자가 교수 인터뷰하면 누가 돈 내는 줄 아는가. 유일하게 기자 등쳐먹는 게 교수다. 언론을 개혁하려면 일단 신문방송학과 교수들부터 잡아야 한다. 지식계는 쓰레기라고 기사 부제로 붙여달라. 서울 교수들이 지방에서 열리는 세미나 같은 데에 왜 자주 내려오는지 아는가. 재미있거든. 끝나면 술집으로 모시고 가니까. 교수 집단의 문제점을 파헤치려면 각종 학회장 선거과정을 취재해보라. 대선이나 총선과 똑같다. 단 남들 눈이 있으니 돈을 받지는 않고 술 접대를 받는다. 그게 얼마인 줄 아는가. 한국 사회 교수집단은 철저하게 학연에 의해 움직인다. 상호비판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안 된다. 다행히 나는 학연에 얽매이지 않는 조건을 가졌다. 그런 점에서 행운이다.
김우창 교수(고려대 영문과)에 대한 비판을 본 적 있는가. 학연에 얽매인 교수들은 절대 서로 공격할 수 없다. 내가 이런 작업을 하니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난 교수들과도 잘 지내고 사람도 잘 사귄다. 그러나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선 학연이나 지연 등 사적으로 연결되면 잘못한 것을 알고도 아무 말 못한다.
●운동
나는 70년대 대학 다닐 때 운동권이 아니었다. 뒤에서 돌 던지는 정도였다. 대학 때 나보고 운동에 적극 참여하길 권유하던 친척이 강제징집당한 후 의문사 비슷한 죽음을 당했다. 나보고 ‘학교 다닐 때는 운동도 안하고 조용히 있다가 외국 가 편하게 공부하고 돌아온 놈이 지금 세상 좋아지니까 떠드냐’라고 비판한다면 할 말 없다. 그런데 내가 비판하는 내용에 대해 시비를 건다면 수긍 못한다. 나를 이해시킬 만한, 내 주장이 틀렸다는 걸 알게 해줄 만한 주장을 아직 못 봤다. 내가 틀렸다는 걸 입증해준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겠다. 내가 운동권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골에 있는 부모가 자식만 바라보며 고생고생해 대학에 보냈는데 운동권이 돼 그 집안이 결딴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봤다. 그게 뭐냐. 나는 그렇게는 못산다고 생각했다. 그게 개인한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소수가 다수를 위해 희생하는 게 내게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절대 운동가가 아니다. 운동가로 바라보는 데 대해 부담을 느낀다. 강연을 중단한 것도 그런 기대가 부담스러워서다. 나는 다만 문제 제기를 하고 비판할 뿐이다. 운동가라고 하면 허름한 집에서 살며 뭔가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지 않나.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진 않다. 나한테는 가족을 편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는 게임인데도 이 작업을 계속하는 건 비판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작업이 빛을 볼 것이라 믿는다. 지금은 욕을 먹고 있지만 죽은 후엔 분명히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 확신한다. 난 죽을 때까지 이 일을 계속 할 것이다.
●교수직
강의시간으로만 따지면 노동시간이 9시간밖에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교수란 직업은 혜택 받은 직업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건 강의 외에 교수라는 직업이 내게 부여한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이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갖는 책임감이고 나는 그 의무에 충실할 뿐이다. 내가 만약 삼성에 들어갔다면 그 조직의 룰에 충실했을 것이다. 삼성의 직원으로서 사회 경제에 이바지할 것이다. (기자가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생각을 해보라. 재미있는 일 아니냐. 잘못되고 썩은 사회현상을 비판하고 비판의 이론을 만들어가는 것은 너무 즐거운 일이다. 여러 현상들을 분석해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갈수록 재미있다.
●아내와 아이들
나는 7년 연하인 아내한테 존대말을 쓴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닌데, 아내에게 반말하는 것도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생각이 든 후부터 고쳤다. 존대말을 쓰면 부부싸움을 할 때 화가 나도 “왜 그래”가 아니라 “왜 그랬어요”가 되니까 싸움이 더 커지지 않더라. 나는 집안에서 남녀차별 받고 산다. 딸 둘 아들 하나인데, 애들이 엄마가 훨씬 능력 있는 줄 알고 더 존경한다. 돈은 내가 벌어다주는데 폼은 아내가 잡는다. 아내는 자가용 타고 다니고 나는 자전거로 출퇴근한다(강교수는 운전면허증이 없다). 내가 아내에게 “이것 좀 먹어봐”라고 하는 경우는 있어도 아내가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법은 없다. ‘인물과 사상’을 통해 “이제부터 여자 나오는 술집에 안 가겠다”고 선언한 것을 아내가 무척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당연한 걸 갖고 뭘 그러냐는 표정으로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하고 한마디 던지는 게 고작이었다.
연애할 때는 자기가 나를 적극적으로 쫓아다녔는데, 요즘은 자신이 데리고 살아주는 것을 고맙게 여기라는 식이다. 나는 공처가다. 아내에 대해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매일같이 작업실에서 새벽 늦게까지 일하다 들어가도 잔소리 한번 안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는 교회 집사다. 나는 교회엔 안 나가지만 중·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을 다녀서 기독교에 친숙하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아내보다 더 많이 안다. 학교 다닐 때 신약과 구약을 몇 번이나 읽었다. 처음엔 아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교회에 나가다가 지금은 안 나간다. 내가 운동을 전면적으로 못하는 것도 평생 15평 아파트에 살며 운동하는 사람들처럼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처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강교수는 아내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무척 즐거워 보였다)
●책 읽기와 글 쓰기
교수 월급만으론 보고 싶은 책을 다 살 수 없다. 교수라면 누구나 많은 책을 구하고 싶어한다. 나는 내가 쓰는 글과 책을 판 돈으로 보고 싶은 책을 원없이 사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한 달에 자료 수집비(책구입비)가 200만 원 가량 든다. 요즘은 (작업실에서) 일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 생겨 편하다. 전북대 졸업생인데, 신문 자료 스크랩과 인터넷에서 자료 뽑는 일은 그 친구한테 맡긴다. 덕분에 예전에 비해 시간을 배 이상 벌고 있다. 그래서 요즘 가장 왕성하게 글을 쓴다. 지금 나와 논쟁을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뭐 어떠냐. 지켜보라. 나는 나이 60이 돼서도 20대, 30대와 논쟁할 것이다. 내 글쓰기에 다작에 따른 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한다. 그러나 많이 쓰지 않을 수 없는 건 그만큼 내가 보기에 분노할 일들이 자꾸 생기기 때문이다.
●‘인물과 사상’
계속 부수가 떨어지고 있다. 한때 정기독자 수가 1만 명을 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이하로 떨어져 더 늘지 않는다. (기자가 대책이 뭐냐고 묻자) 하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다. 1000부로 떨어지더라도 계속 책을 낼 것이다. ‘조선일보 얘기 좀 그만 하라’는 독자들의 항의도 많다. 지겹다는 것이다. 참 죽겠다. 나도 안하면 편하다. 그런데 ‘이건 아닌데’ 싶은 현상들이 내 눈에 자꾸 비치니 어떡하겠나. 그러다 보니 같은 문제를 또 짚고 비판할 수밖에. 이걸로 내가 돈 버는 줄 알고 상업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거 돈 안 된다. 기고만 하는 것이 돈은 더 된다.(월간 ‘인물과 사상’의 정기구독자 수는 9월10일 현재 8750명. 8월호 서점 판매부수는 1750부다)
●콤플렉스
지방 차별이나 지역주의를 얘기하면 서울에 못 올라오는 지방대 교수라서 그런다고 쑤군거린다. 그래 맞다. 그렇지만 서울대 출신이 서울대 비판하는 것 봤는가. 서울대 못 간 놈이 서울대 비판하지. 지방대 교수이기 때문에 지역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다. 피해의식·한풀이라고 말하는데, 그래 맞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떠냐. 나는 학력 콤플렉스는 없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성균관대 들어갔다면 잘 한 것이다. 남들은 나보고 웃긴다고 했지만 나는 성균관대 들어간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친구들을 보니 은근히 서울대 못 간 데 대해 상처받고 있더라. 내 제자들도 평상시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얘기해보면 서울대 콤플렉스가 상당하다. 인생은 평생 경쟁하며 살아가는 건데 어떻게 10대 때 잠깐 경쟁한 것으로 20대, 30대, 40대, 50대를 결정할 수 있나. 이건 분명히 잘못된 것 아닌가.
서울대 들어간 애들은 소수인데 그 소수로 인해 나머지 다수가 상처를 받는 세상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성균관대 출신이라 그런지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보니, 경영학과 출신이라 줄 댈 곳이 없었다. 전북대 교수가 된 것도 운이 좋아서였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기엔 지방이 불편하다. 모든 일이 서울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에 있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운동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 사업인데 지방에선 사람 만나는 게 쉽지 않다. (강교수는 1980년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전공을 신문방송학으로 바꿔 1984년 조지아대에서 석사를, 4년 뒤엔 위스콘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실명비판과 독설
(기자가 독설과 모욕적 표현이 갖는 부정적 측면을 거론하자) 나라고 왜 그러고 싶겠나.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으니까. 그런데 나를 보고 독선이니 과격하다느니 오만하다느니, 하도 그러니까 앞으로 자제하겠다. 앞으론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대신 이론적으로 격파해나갈 것이다. 자신 있다. 사실 지금도 많이 자제해서 쓰는 것이다. 진짜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쓰면 난리날 것이다. 그래도 많이 순화해서 쓰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 알고 있어도, 사생활 비판은 하지 않는다. 다만 공인으로서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발견할 경우엔 앞으로도 여지없이 비판할 것이다.
인터뷰 도중 내 글쓰기와 관련해 관성 문제를 지적해주셨는데, 가끔 내가 관성에 빠진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석에서 진지하게 그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하면 “무조건 옳다. 잘하고 있다. 계속 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등뒤에서 꼭 독설이니 인격모독이니 하는 얘기가 들려온다. 참 미치겠다.
●이문열(소설가)
나는 이문열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첫째, 나는 예전에 이문열의 소설을 읽고 크게 감명받았다. 글이라는 게 사람에게 이토록 감동을 줄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을 알게 해준 데 대해 감사했다. 둘째, 그가 쓰는 신문 칼럼을 읽고 감사했다. 글쓰기 분야에 따라 글의 질이 저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하는 안도의 감사였다.
●강의
(‘강의가 재미있다’는 기자의 평에 대해) 교수를 하기 전 MBC 라디오국에서 코미디 프로의 PD를 맡은 적이 있다. (강교수는 시종 차분하게 강의를 진행했는데, 몇 차례 우스갯소리로 학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제사
모교수가 신문에 제사의 의미를 강조하고 그 제도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글을 썼더라. 제사라는 건 남자들을 위한 제도다. 그것을 준비하는 여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어떻게 그런 시대착오적인 소리를 할 수 있나.
▼강준만 교수 강의 요약▼
10월4일 오후 2시. 강준만 교수의 ‘국제 커뮤니케이션’ 강의가 시작됐다. 도강(盜講)을 하는 기자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교재가 따로 없었다. 강교수가 학생들에게 나눠준 유인물엔 이날 강의 내용의 요점이 적혀 있었다. 그는 강의 시작 전 약식으로 학생들의 출석을 확인했다. 몇 명의 학생들이 강의 도중에 들어왔는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강의 내용 중 기자의 관심을 끈 것은 국내 언론에 대한 비판. 이날 강의 주제는 일본의 매스 미디어. 일본의 신문과 잡지, 방송을 소개하면서 국내 언론 매체들에 대한 평가와 분석을 곁들였다.
그는 일본의 유력 신문 중 하나인 산케이신문에 대해 ‘위험한’ 우익신문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또다른 유력지인 아사히신문은 산케이신문과 대조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데, 일본신문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신문이라는 것. 얼마 전 김대통령이 아사히신문하고만 인터뷰했다가 나머지 일본 신문들로부터 집단적인 항의를 받은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강교수는 또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을 비교하면서 ‘배달사고 일화’를 들려줬다. “언젠가 조선일보가 배달되지 않아 보급소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보급소장은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곧 보내드리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이 배달돼 왔다. 한번은 한겨레신문이 배달되지 않았다. 보급소에 전화했더니 ‘내일 아침에 배달할 때 같이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날자 신문만 배달돼 왔다. 다시 보급소에 전화했더니 ‘여분이 없다’고만 말했다.” 강교수에 따르면 두 신문 보급소의 행태에 차이가 나는 것은 ‘자본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 그는 “조선일보 보급소 직원보다 한겨레신문 보급소 직원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차이가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며 두 신문을 각각 레스토랑과 구멍가게에 비유했다. 자본력이 풍부한 레스토랑과 빈약한 구멍가게 직원의 서비스정신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의 ‘폭로 저널리즘’에 대한 소개와 국내 매체와의 비교도 있었다. 강교수는 일본과 달리 국내엔 “진정한 ‘폭로 저널리즘’이 없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몇 년 전 발행인의 구속 파동을 겪은 후 폐간된 월간지 ‘인사이더월드’가 비슷한 축에 드는 매체다. 그러나 이 매체는 폭로성은 뛰어났지만 원칙이 없고 지나치게 무책임해 저널리즘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게 강교수의 평.
월간 ‘말’은 폭로성은 인정되지만 이데올로기에 치중한다는 점이 ‘결격 사유’. 강교수에 따르면 현재 국내 언론 매체 가운데 폭로 저널리즘에 가장 근접한 매체는 주간 ‘일요신문’이다. 그러나 이 매체도 한계를 안고 있다. 다른 매체에 비해 폭로정신이 돋보이긴 하지만 언론 권력에 대한 비판이 약하다는 게 흠이라는 것. 강교수는 “국내에도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는 진정한 폭로전문 잡지가 나와야 한다”며 ‘폭로 저널리즘’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했다. 학생들에게 “언론계 틈새 시장을 노려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며 ‘유망한 사업’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시사월간지들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강교수는 특정 매체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요즘 시사월간지들이 한동안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안 하던 짓’이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이나 ‘문제가 있는 인물’ 또는 기업인에 대한 ‘느닷없는’ 인터뷰다. 강교수는 “그런 인터뷰 기사의 경우 책이 발간된 후 인터뷰 대상자가 보통 수백 권씩 책을 사주는 게 관행”이라고 꼬집었다.
그에 따르면 그런 ‘못된 짓’은 지방에서 발간되는 영세 잡지일수록 심하다. 아예 드러내놓고 하는 잡지도 많은데, 그 경우 인터뷰한 인물의 사진을 표지에 크게 싣는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인물과 사상’은 예외”라는 그의 익살에 웃음을 터뜨렸다. 개그맨 남희석씨가 지난 9월 동아일보에 쓴 ‘반성문’도 화제가 됐다. 그 글은 남씨가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SBS ‘남희석의 토크 콘서트, 색다른 밤‘)이 여성민우회에서 선정한 최악의 프로그램으로 뽑힌 데 대해 사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씨는 ‘무조건 반성한다’로 시작하는 그 글에서 ‘국내 방송 여건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방송의 오락기능을 너무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방송이 NHK는 아니지 않는가”라고 썼다. 강교수가 문제 삼은 것은 바로 NHK 관련 부분.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NHK가 영국의 BBC와 더불어 세계적인 공영방송으로서 매우 점잖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상업주의나 선정주의적 성격도 강하다”고 말했다. 그가 나눠준 유인물에는 NHK의 상업성과 비윤리성을 보여주는 몇 건의 사례가 소개돼 있었다.
강교수는 일본 방송의 상업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철저한 상업주의’가 갖는 긍정적 측면도 강조했다. 예컨대 일본의 방송국엔 각종 편의시설이나 ‘놀이 공간’이 마련돼 있어 그에 따른 수입이 상당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국내 방송국엔 방송 시설만 가득 차 있을 뿐 방송국을 찾는 일반인들을 배려하는 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교수는 “방송국에서 조성모나 서태지의 공연이 있을 때면 학생들이 몇 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때로 밤을 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학생들을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놀거나 쉴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개마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