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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慶山) 左道. 8일. 서울과의 거리는 7백 10리이다
異名: 장산(獐山). 장산(章山). 옥산(玉山). 압독(押督).
* 경산현령겸진주진관병마절제도위.
* 경산훈도. 종9품.
동쪽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9리, 남쪽으로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 29리, 서쪽으로 대구부(大丘府) 경계까지 21리, 북쪽으로 하양현(河陽縣) 경계까지 21리, 서울과의 거리가 7백 1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압량(押梁 압독(押督)이라고도 함.)은 작은 나라였는데 신라(新羅) 지미왕(祗味王)이 이를 점령해서 군(郡)을 만들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장산(獐山)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년에 장산(章山)으로 고쳤다. 현종(顯宗)이 경주(慶州)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초년에 임금의 이름과 음이 같은 점을 피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충숙왕(忠肅王)이 국사(國師)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해서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 공양왕(恭讓王)이 왕비(王妣) 노씨(盧氏)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켜,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에 다시 현령(縣令)으로 낮추었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압량(押梁)ㆍ압독(押督)ㆍ장산(獐山)ㆍ장산(章山)ㆍ옥산(玉山).
【성씨】 본현(本縣) 전(全)ㆍ김(金)ㆍ백(白), 서(徐)ㆍ유(劉) 모두 당(唐) 나라에서 투화(投化)했다. 녹(綠)ㆍ주(珠) 모두 일본(日本)에서 투화했다. 박(朴)ㆍ정(鄭)ㆍ노(魯) 모두 온[來] 사람들이다.
【풍속】 풍속이 검소하고 소탈함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산천】 마암산(馬巖山) 현의 남쪽 21리에 있는 진산(鎭山). 동학산(動鶴山) 현의 서쪽 8리에 있다. 장고산(長鼓山)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황율천(黃栗川) 현의 북쪽 9리에 있다. 영천군(永川郡) 보현산(普賢山)에서 발원하여 성주(星州) 무계진(茂溪津)으로 들어간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마암산(馬巖山)에서 발원하여 황율천(黃栗川)으로 들어간다. 갑지(甲地) 현의 동쪽 11리에 있다.
【토산】 은어(銀魚)ㆍ입초(笠草)ㆍ붕어[鯽魚]ㆍ대추ㆍ매실ㆍ백복령(白茯笭)ㆍ벌꿀[蜂蜜].
【봉수】 성산 봉수(城山烽燧)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북쪽으로 하양현(河陽縣) 시산(匙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대구부 수성현(大丘府壽城縣) 법이산(法伊山)에 응한다.
【누정】 망북루(望北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차군헌(此君軒) 채신보(蔡申保)의 기(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을유(乙酉)년 초여름에 부임해서 관사에 있는데 한 달이 넘지 못하여 자식을 잃는 액운을 만났다. 창과 문지방, 뜰과 섬돌에 지난날 드나들던 모습과 글 읽는 소리가 항상 귀에 들리는 듯, 눈에 보이는 듯하니, 우울하여 여기에 어찌 오래 있을 수 있겠는가. 동쪽에 무성한 숲과 키 큰 대나무가 있어 낡은 집을 비치니 옛 청사였다. 가서 보니 먼지는 낡은 벽을 덮고 이끼는 헌 기왓장에 끼어 있다. 무너진 담과 남은 주초에는 푸른 풀만이 가득한데, 오직 동헌[廳事]과 서쪽 마루[西軒]만은 우뚝하게 홀로 남아 있다. 나는 이것을 수리할 것을 결심하고 아전에게 차례로 돌려 가면서 공사하도록 명했다. 기울어진 기둥은 바로 세우고, 깨진 기와는 갈아끼웠다. 또 옛 재목을 가지고 안팎의 낭무(廓廡)를 만들었다. 초가을에 시작해서 늦가을에 완공하여 가족들을 데려다 거처하기 시작했다. 기왓장 하나에 새겨진 것을 보니 연우(延祐) 7년(1320)에 만들었고, 그때의 감독과 목수의 성명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원(大元) 연우(延祐)로부터 지금까지 계산하면 2백여 년만에 중수(重修)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 하게 되어 있는 운수라 하겠다. 이 땅은 연우(延祐) 이전으로 올라가 천지가 개벽(開闢)한 때까지 소급될 것이고, 오늘 이후로 내려가 천지가 뒤집힐 때까지 이를 것이니 강하(江河)가 뽕나무 밭이 되며 또 관청이 되기를 얼마나 많이 할지를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작게는 개인의 영욕에서, 크게는 국가의 성쇠(盛衰), 음양(陰陽), 소장(消長)의 이치에 이르도록 모두 일정한 운수가 있는 것이지 맘대로 옮기고 망녕되어 움직일 수 없는 것인데, 이제 갑자기 인위적(人爲的)인 지혜나 꾀를 그 속에 베풀려고 하니, 이는 한갓 스스로 곤란함을 취하는 것이다. 마루 앞에 대나무 숲을 묶어 세운 듯한 바람 부는 달밤을 만나거나, 눈 오는 아침에 대하면 탐욕으로 더럽혀진 속세의 마음이 얼음녹듯 풀어진다. 아름다운 손이나 좋은 친구와 더불어 푸른 댓잎 소리 들으며 그 밑에서 거나하게 먹고 마시면, 이야말로 양주(楊州)의 학(鶴)이 아닌가! 왕자유(王子猶 왕휘지(王徽之)의 자(子))의 ‘하루도 차군(此君 대[竹])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뜻을 따라 여기에 ‘차군헌(此君軒)’이란 현판을 다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현의 서쪽 3리 되는 곳에 있다.
【역원】 압량역(押梁驛) 현의 동쪽 12리 거리다. 속설에 전하기를 압독국(押督國)의 옛터라고 한다. 건흥원(乾興院) 현의 북쪽 18리 거리다. 신원(新院) 현의 남쪽 20리 거리다. 월연원(月淵院)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시지원 현의 서쪽 11리 거리다. 광리원 현의 남쪽 1리 거리다.
【불우】 심천사(深泉寺)ㆍ망월사(望月寺)ㆍ밀암사(密巖寺)ㆍ구주사(鳩住寺) 모두 동학산(動鶴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포성(古浦城) 현의 서쪽 9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1백 70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성(金城)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1백 55척이더니 지금은 없어졌다. 우곡성(于谷城) 현의 서쪽 6리에 있다.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신라 때 이 세 성을 합쳐서 압량군(押梁郡)을 만들었고, 통합한 뒤에는 고쳐서 세 성으로 만들었다.
【명환】 신라 김유신(金庾信) 진덕왕(眞德王) 때에 압량주 군주(押梁州軍主)가 되었는데 군사 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항상 음주와 풍악을 즐겼으므로 고을 사람들은 용렬한 장수로 여겼으며 한 번도 싸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유신은 그 사람들을 쓸만하다 생각하고, 곧 백제(百濟)를 쳐서 크게 승리하고 적장 8인을 사로잡았다. 김인문(金仁問) 무열왕(武烈王) 때에 압량주총관(押梁州總管)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요새지(要塞地)를 만든 공으로 식읍(食邑) 3백호를 받았다. 본조 손욱(孫旭)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법을 잘 받들었다.
『신증』 안만철(安萬哲).
【인물】 고려 김정미(金庭美) 충선왕(忠宣王)을 따라서 원(元) 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본조 전백영(全伯英) 벼슬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평(文平)이다.
【효자】 본조 손일선(孫日宣) 부모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에서 살았다. 세종조(世宗朝) 때 이 일이 조종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지고 서요직(西窯直)이 제수되었다.
【제영】 산색농저함(山色濃低檻) 서거정(徐居正)의 시(詩)다. “옛 고을이 말[斗]보다 큰데, 사군(使君)의 재주는 강과 같도다. 어진 소문은 으뜸이었으니, 치적 또한 짝할 이 없으리. 산 빛은 짙어 난간에 나직하고, 가을 소리가 가느다랗게 창에 들어오네. 선비들의 아름다운 모임 성하니, 이 글 쓰는 붓 장광[杠]과 같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34년에 대구(大邱)와 합하였다 왜적으로 인하여 시들어 쇠잔한 까닭이다. 40년에 다시 분리되었다.
【방면】 읍내(邑內) 사방으로 끝이 7리이다. 상동(上東) 처음은 7리, 끝은 10리. 하동(下東)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중남(中南)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외남(外南)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서면(西面) 처음은 7리, 끝은 20리. 북면 처음은 7리, 끝은 15리.
【성지】 읍성(邑城) 둘레는 4천8백 척이며 서문(西門)은 진옥루(鎭玉樓)라 부른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3년에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른다.
【토산】 대[竹]ㆍ연자(蓮子)ㆍ지치[紫草].
* 남해(南海) 右道. 10일.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5리이다.
異名: 해양(海陽). 전산(轉山)ㆍ화전(花田)ㆍ윤산(輪山)
* 남해현령겸진주진관병마절제도위. 과만3년.
* 남해훈도. 종9품
동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쪽으로 바닷가까지 15리이며, 남쪽으로 바닷가까지 36리이고, 북쪽으로 노량까지 38리이며, 서울까지는 1천 45리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이 현령을 두었던 곳이나, 공민왕 때에 왜적에게 땅을 빼앗기고,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우접하였다. 본조 태종조에 하동과 합쳐서 하남현(河南縣)이라 일컫다가 뒤에 다시 하동현을 설치하고, 진주의 금양부곡을 내속시켜서 해양현(海陽縣)이라 일컬었다. 얼마 안 되어 금양을 진주에 환속(還屬)하고 다시 남해라 하였으며, 세종조에는 곤명현과 합쳤다가 다시 쪼개고 그대로 현령을 두었다. 전하(殿下) 4년에 현 사람이 구례(求禮) 백성 배목인(裵目仁)과 서로 연결해서 모반했으므로 현감으로 강등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군(燕山君) 4년에 현감으로 강등되었고, 지금 임금 2년에 다시 현령을 두었다.
【군명】 전야산(轉也山)ㆍ해양(海陽)ㆍ전산(轉山)ㆍ화전(花田)ㆍ윤산(輪山) 관풍안에 있다.
【성씨】 본현 배ㆍ김ㆍ백ㆍ진(陳), 제(諸) 촌성(村姓)이다. 난포(蘭浦) 정(鄭)ㆍ박ㆍ고 촌성(村姓)이다. 평산(平山) 조(趙)ㆍ배ㆍ백ㆍ조(曺)ㆍ화(和) 촌성(村姓)이다.
【형승】 진도(珍島)ㆍ거제(巨濟)와 함께 솥발처럼 우뚝한 것이 하늘 남쪽에 훌륭한 곳이다 모두 정이오의 기문에 있다.
【산천】 망운산(望雲山)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소흘산(所訖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원산(猿山) 현 남쪽 16리 지점에 있다. 녹두산(鹿頭山) 현 북쪽 23리 지점에 있다. 금산(錦山) 현 동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성현(城峴) 현 남쪽 24리 지점에 있으며 요해처이다. 미조항(彌助項) 현 동남쪽 87리 지점에 있다. 노량(露梁)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적량(赤梁) 현 동쪽 41리 지점에 있다. 동천곶(凍川串)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둘레가 55리이며 목장이 있다. 상주포(尙州浦) 현 남쪽 45리 지점에 있다.
관음포(觀音浦) 현 북쪽 21리 지점에 있다. 신우 때에 원수 정지(鄭地)가 수군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이 우리에게 패전한 것은 이 싸움에서 처음이었다.
○ 정이오의 시에, “망운산 아래에서 돛배 바람 바라보니, 동서로 오가는 배가 통행한다. 영웅의 당시 일을 묻지 마소. 지금도 사람들이 첫째 공이라 기쁘게 말한다네.” 하였다.
대포(大浦)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파천포(巴川浦)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난포(蘭浦)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이상은 아울러 어장(魚場)이 있다. 차산포(車山浦) 현 동쪽 6리 지점에 있다. 평산포(平山浦)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두음포(豆音浦) 현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염전포 (鹽田浦)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호을포(湖乙浦)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모답포(毛沓浦)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가을곶포(加乙串浦)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이상은 모두가 염밭이다. 소도(蘇島) 현 동쪽 6리 지점에 있으며, 온 섬이 모두 동백이다.
【토산】 살조개[江瑤柱]ㆍ문어ㆍ홍어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ㆍ대구[大口魚]ㆍ석류ㆍ유자ㆍ석이버섯[石蕈]ㆍ미역ㆍ애끼찌[弓幹桑]ㆍ비자(榧子)ㆍ닥종이[楮]ㆍ청어ㆍ모래무지[鯊魚]ㆍ홍합ㆍ송이[松蕈]. 『신증』 낙지[絡締]ㆍ준치[眞魚]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농어ㆍ해삼ㆍ치자.
【성곽】 읍성 석축인데, 둘레는 2천 8백 76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 안에 우물 하나, 샘 하나가 있는데 사시로 마르지 않는다.
○ 정이오의 기문에,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ㆍ거제와 함께 솥발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지역이 왜국과 아주 가까워서, 경인년부터 왜적에게 침략을 당하기 시작하여, 붙들려 가기도 하고, 이사하기도 하여 군의 속현인 평산ㆍ난포가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8년이 지난 정유년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진양 선천(鐥川)의 들판에 거처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도 지키지 못하고, 공물과 부세도 바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판도(版圖)에 기재된 재물과 부세가 나오는 곳이, 모두 풀이 무성한 사슴의 놀이터로 되어버렸고, 왜구들의 소굴이 된 지가 46년이었다. 그러나 계모가 있는 신하와 지략이 있는 장수의 빈틈없는 책략으로 선함을 수리하여 수전에 대비하고, 성과 해자를 설치하여서 수비를 엄하게 하니, 왜적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쇠하여졌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지 4년만에, 우수(雨岫) 임덕수(任德秀)를 등용하여 구라량 만호(仇羅梁萬戶)로 삼고, 겸하여 이 고을의 현령이 되게 하였다. 후가 와서는 계획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어서, 이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민폐를 없애니, 군무(軍務)가 정비되고 민사 또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지역이 좁고 험하여서 백성들이 옛날에 살던 곳을 생각하였다. 후가 이 말을 듣고 민중과 협의한 다음,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최유경(崔有慶)공에게 사유를 갖추어서 조정에 알리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이웃 고을, 하동ㆍ사천ㆍ명주(溟州)ㆍ고성(固城)ㆍ진해 등 다섯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고현 외딴 섬 복판에 성을 쌓았는데, 돌로 포개어 견고하게 하고 해자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 2월에 일을 시작해서 3월에 준공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죄다 돌아와서 그 밭을 갈고 그 집을 꾸며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즐기고 화락하였다. 물고기ㆍ소금ㆍ벼ㆍ따위 이익이 장차 지난 날의 부유함을 회복하리니, 이에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내 생각하니, 왕(王)이나 공(公)이 요해지를 방비하여, 그 나라를 지키는 것은 《주역》의 가르침이요,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서 죽기를 기약하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맹자》의 격언이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가 북방에 성을 쌓으니, 험윤(玁狁)의 난(難)이 없어지고, 정(鄭) 나라에서 호뇌(虎牢)에 성을 쌓으니 초인(楚人)으로 인한 걱정이 없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바닷가 고을에 성을 쌓으니 왜구의 침해가 그치게 되었다. 대개 성보(城堡)로 지키면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고,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있으며, 편한 것으로써 수고하는 것을 대적할 수 있게 된다. 하물며 이 고을은 남방의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물의 풍족함과 토산물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꼭 필요한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지금 바다에는 쓸만한 수군이 있고, 성곽에는 지킬 수 있는 누(樓)와 순(楯)이 있으며, 주야로 조심하는 봉수(烽燧)가 있으니, 흉악한 적을 방어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딴 섬, 외로운 성에 외방의 구원이 없다 하여, 베개를 높이 베고 편하게 눕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나는 장차 돛대를 두드리며 남해 터를 죄다 찾아다니고, 성루의 난간 위에서 술을 들며 국가에서 인재를 얻었음을 경하하리라.” 하였다.
【관방】 평산포영(平山浦營) 석성이 있으며, 둘레는 1천 5백 58척이다. ○ 수군만호가 1명이다.
성고개보(城古介堡) 현 남쪽 22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7백 60척이다. ○ 권관(權管)을 설치하여 방어한다.
우고개보(牛古介堡)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으며 둘레가 9백 13척이다. ○ 권관을 설치하여 방어한다.
『신증』 미조항진(彌助項鎭) 현 동쪽 87리 지점에 있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진이 설치되었다. 그 뒤에 왜적에게 함락되어 혁파했다가 가정 임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석축이며 둘레는 2천 백 46척이고 높이는 11척이다. ○ 수군첨절제사 1명이다.
곡포보(曲浦堡)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9백 60척이고, 높이는 11척이다. 가정(嘉靖) 임오년에 우고개보(牛古介堡)를 혁파하고 여기에다 옮겼다. ○ 권관을 설치하여 방어한다.
상주포보(尙州浦堡) 현 남쪽 60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9백 85척이다. 가정 임오년에 성고개보를 혁파하고 여기에다 옮겼다. ○ 권관을 설치해서 방어한다.
【봉수】 금산 봉수(錦山烽燧) 북쪽으로 진주 대방산(臺方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소흘산(所訖山) 및 원산(猿山)에 응한다. 소흘산 봉수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원산에 응한다. 원산 봉수(猿山烽燧)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소흘산에 응한다.
『신증』 【누정】 주변루(籌邊樓)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덕신역(德新驛) 현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노량원(露梁院) 노량 남쪽 억덕에 있으며, 현 북쪽 40리 거리이다.
【불우】 보리암(菩提庵)ㆍ상도솔암(上兜率庵)ㆍ중도솔암(中兜率庵) 모두 금산에 있으며 남쪽 바다를 굽어본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19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현 산성(古縣山城) 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1천 7백 40척이고 높이는 10척이다. 관당성(官堂城) 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7백 20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난포 폐현(蘭浦廢縣) 본래 신라 내포현(內浦縣)이며 본 섬 안에 있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시켰으며, 현 동쪽 21리 지점에 있다. 평산 폐현(平山廢縣) 본래 신라 평서산현(平西山縣)인데, 서평(西平)이라 하기도 한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시켰으며,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우산소(于山所)ㆍ미조항고진(彌助項古鎭)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8백 35척이다.
『신증』 【유우】 본조 김전(金詮) 연산조에 귀양갔다.
【효자】 고려 함부(咸富) 낭산도(狼山島) 백성 능선(能宣)의 딸이다. 아비가 죽자 침실에다가 빈소를 차리고, 5개월이나 찬을 받들기를 생시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성종 9년에 정문하고 요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섬에서 나오게 하고, 소원에 따라 호적을 주현(州縣)에 편입시켰다.
【제영】 운개오배삼산근(雲開鰲背三山近)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자라 등에 구름 트이니 삼신산이 가깝고, 바람은 고래 같은 물결을 말아 올려서 만리에 아득하다.” 하였다. 염점연청해초향(鹽店煙靑海草香)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장기(瘴氣) 끼는 귀로에 풍경 적으나, 염점에 연기 푸르고 해초는 향긋하다.” 하였다. 조성편해객(潮聲偏駭客) 김조(金銚)의 시에, “조수 소리는 매우 객을 놀라게 하는데, 신기루는 벌써 물가에 생겼네.” 하였다. 이역내조수도장(異域來朝水道長) 옛 사람의 시에, “성상의 은택이 끝이 없어 바다 바라보는 느낌인데, 섬 오랑캐도 은혜를 사모하여 강포한 버릇 버렸다. 궁벽진 지역이나 편하게 지내니 밥짓는 연기 둘렀고, 이역에서 조회 오는데 물길이 멀다. 태수는 계엄(戒嚴)하면서 화각(畫角)으로 전하고, 사신은 흥이 나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았네. 좋은 때에 훌륭한 경치 만나기 어렵나니, 내 말을 꼴 먹여서 바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대[竹]ㆍ김[海衣].
【방면】 현내(縣內) 사방 5리이다. 이동(二東) 처음은 10리, 끝이 40리이다. 삼동 처음이 45리, 끝이 90리이다. 남면 끝이 25리이다. 서면 끝이 20리이다. 고현(古縣)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설천(雪川)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 우산소(于山所).
【진도】 노량진(露梁津) 북쪽으로 38리, 하동ㆍ곤양으로 통한다.
【목장】 금산곶장(錦山串場)ㆍ동천곶장(凍川串場).
【창고】 읍창ㆍ외창(外倉)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조창(漕倉) 노량에 있다.
【사원】 충렬사(忠烈祠) 인조 계유년에 세우고,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이순신(李舜臣) 아산(牙山) 편에 보라. ○ 승첩비(勝捷碑)를 사(祠) 앞에 세웠다.
* 고성(固城) 右道. 10일 반. 서울과의 거리는 9백 10리이다.
異名: 固州(고주). 鐵城(철성)
* 고성현령겸진주진관병마절제도위.
* 고성훈도. 종9품.
동쪽으로 거제현(巨濟縣) 경계까지 53리이고, 남쪽으로 바닷가까지 1리이며, 서쪽으로 진주(晉州) 경계까지 25리이고,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는 40리이다. 북쪽으로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 4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5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가야국(伽倻國)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서 고자군(古自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成宗) 때에 고주 자사(固州刺史)로 하였다가 뒤에 현으로 강등하였다. 현종(顯宗)이 거제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령을 두었고, 원종(元宗)이 주(州)로 승격시켰다. 충렬왕(忠烈王)이 남해(南海)와 합병하였으나 곧 복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현령으로 강등하였고,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고자(古自)ㆍ고주(固州)ㆍ철성(鐵城).
【성씨】 본현 채(蔡)ㆍ이(李)ㆍ박(朴)ㆍ김(金)ㆍ남(南), 김 촌성(村姓)이다. 등(登)ㆍ주(朱) 모두 당(唐). 오(吳) 해주(海州). 궤촌(跪村) 남. 발산(鉢山) 이 곤의(坤義) 김ㆍ이 해빈(海濱) 박ㆍ하(河). 구허(丘墟) 김ㆍ박 보안(保安)과 같다. 도선(道善) 김 진여(珍餘)와 같다. 녹명(鹿鳴) 이ㆍ김ㆍ최(崔). 어례(魚禮) 박 적진(積珍) 이ㆍ박. 곡산(曲山) 김.
【풍속】 풍속이 검소하고 솔직하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 외로운 성이 바다에 임했다. 이선(李宣)의 시에 있다.
【산천】 무량산(無量山)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미륵산(彌勒山) 현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우산(牛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좌이산(佐耳山) 현 서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남산(南山)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옛 성터가 있다. 불암산(佛巖山)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옛 토성(土城) 터가 있다. 성산(城山) 현의 북쪽 24리에 있으며 옛 성터가 있다. 벽산(碧山)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날씨가 가물면 비가 내리도록 기도한다. 무기산(舞妓山)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속세에 전하기를, “예전에 고주 자사(固州刺史)가 기생을 데리고 여기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하였다. 용수암(龍水巖)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샘이 있는데 바닥이 없는가 싶을 정도로 깊다. 가물 때에 비 내리기를 빌면 영험이 있다. 성현(城峴) 현 서쪽 60리 지점에 있으며 옛 성터가 있다. 천왕점(天王岾)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바다 현 동남쪽에 있다. 말을상곶(末乙上串)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둘레가 1백 30리이며, 목장이 있다. 주악곶(住岳串) 현 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해평곶(海平串) 현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둘레가 1백 40리이며 목장이 있다. 죽도(竹島) 열락산(悅樂山)이라고 한다. 남문(南門) 밖에 있으며 온 섬에 대나무가 있다. 종해도(終海島) 견내량(見乃梁) 서남쪽에 있다. 둘레가 21리이며 예전에는 양을 기르는 목장이 있었다. 송도(松島)ㆍ자란도(自卵島)ㆍ하박도(河撲島) 둘레가 50리이다. 상박도(上撲島) 둘레가 24리이다. 연대도(煙臺島)ㆍ오아도(吾兒島)ㆍ적화도(赤火島) 이상은 모두 현 남쪽 바다 복판에 있다. 가조도(加助島) 말을상곶(末乙上串) 남쪽에 있으며 민전(民田)이 있다. 추라도(楸羅島) 둘레가 40리이다. 노태도(老太島) 크고 작은 두 개의 섬이 있다. 욕지도(欲知島) 둘레가 65리이다. 연화도(蓮華島) 둘레가 53리이다. ○ 위의 두 섬은 왜놈의 고깃배가 보통 때 왕래하는 곳이다. 적질도(赤叱島) 이상은 모두 현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시락도(時落島) 둘레가 41리이다. 어응적도(於應赤島) 이상은 모두 현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수월포(愁月浦)ㆍ양지포(陽知浦) 모두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마소포(馬所浦) 현 서쪽 70리 지점에 있다. 자화포(資火浦) 현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가화포(加火浦)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소소포(召所浦)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춘원포(春元浦)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구허포(丘墟浦)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장평포(長平浦) 현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어례향포(魚禮鄕浦)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쌍봉포(雙峯浦)ㆍ수대포(水大浦) 모두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지포(池浦) 현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당항포(當項浦)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증』 상족암(床足巖) 소을비포(所乙非浦)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돌기둥 네 개가 있으며 바위가 평상 같다. 파도가 밀려오면 물이 그 밑을 지나간다. 둔미도(芚彌島) 가도(柯島) 밖에 있다. 독박도(禿朴島) 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토산】 녹반(綠礬) 주악곶(住岳串) 바닷가 바위에서 난다. 대구[大口魚]ㆍ전복[鰒]ㆍ해삼ㆍ굴[石花]ㆍ청어ㆍ문어ㆍ전어ㆍ홍합ㆍ미역ㆍ대[竹]ㆍ송이[松蕈]ㆍ석류ㆍ유자, 왜저(倭楮) 자란도(自卵島)에 심는다. 표고[香蕈]ㆍ감 『신증』 황어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농어[鱸魚]ㆍ오징어[烏賊魚]ㆍ낙지[絡締]ㆍ곤쟁이[紫蝦]ㆍ맥문동ㆍ녹용(鹿茸)ㆍ차[茶].
【성곽】 읍성(邑城) 석축(石築)이며 둘레는 3천 5백 24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안에 우물 넷과 못 하나가 있다.
【관방】 사량영(蛇梁營) 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물길로 70리 거리이다. 석성(石城)이며 둘레는 1천 2백 51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 수군 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당포영(唐浦營) 현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며 둘레가 1천 4백 45척, 높이 13척이다. ○ 수군 만호 1명이다. 가배량수(加背梁戍) 현 남쪽 34리 지점에 있다. 예전에는 수군 도만호영(水軍都萬戶營)이 있었으나 거제현(巨濟縣) 옥포(玉浦)로 옮겼는데, 성종(成宗) 22년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므로 다시 석성을 쌓았다. 둘레는 8백 83척, 높이는 13척이다. ○ 권관(權管)을 차임(差任)하여 방수(防戍)한다. 소을비포수(所乙非浦戍) 현 서쪽 47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며 둘레 8백 25척, 높이 14척이다. ○ 권관을 차임하여 방수한다. 좌신포(佐申浦) 현 동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혜질이곶(惠叱伊串)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모두 순라(巡邏)하는 곳이다.
【봉수】 미륵산 봉수(彌勒山烽燧) 동쪽으로 거제현 계룡산(鷄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우산(牛山)에 응한다. 우산 봉수(牛山烽燧) 남쪽으로 미륵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좌이산(佐耳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천왕점(天王岾)에 응한다. 천왕점 봉수 동쪽으로 곡산(曲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곡산 봉수(曲山烽燧) 동쪽으로 진해현(鎭海縣) 가을포(加乙浦)에 응하고, 서쪽으로 천왕점에 응한다. 좌이산 봉수 동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누정】 안청루(晏淸樓) 현성(縣城) 남쪽 문루(門樓)이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동남쪽 지역에도 성대(聖代)의 아름다움은 모두 한결같아서, 극남(極南) 변방의 군성(群城)을 다스렸네. 강은 마도(馬島)와 이어져 파도가 넓고, 땅은 진한(辰韓)에 들어가니 귤과 유자 달리네. 아전들 관청에서 물러가니 봄이 적적하고, 삽살개 달 아래에 잠드니 밤도 명랑하다. 변방 백성이 왕화(王化)를 알고자 치첩(雉堞)에 다락이 높고 깃발도 눕혀 놓았네.” 하였다. 관해루(觀海樓) 견내량(見乃梁) 북쪽 벼랑에 있다. 낙열정(樂悅亭) 죽도(竹島)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작은 섬이 창해(滄海) 물가에 깎아지른 듯, 만죽(萬竹)은 묶어 놓은 듯 짙푸르구나. 만죽을 뚫고 가서 반석 위에 앉으니, 만고의 티끌 마음 한번 씻기네. 부상(扶桑)에서 돋는 해 붉은 산호(珊瑚) 같고, 만 이랑 물결은 번쩍번쩍 금이 굼실거리는 듯. 눈 속에 누른 귤 별처럼 달리고, 갑자기 파랑새 한 쌍이 날아오네. 먼저 묻노니 어느 곳이 단구(丹丘)이던가. 삼신산(三神山)도 지척일사 금오(金鰲) 머리에 있네. 자진(子晉)을 불러서 생학(笙鶴)을 타고, 12동천(洞天)에 한껏 놀고 싶어라. 아래로 구주(九州)에 놀고 다시 9주가 있으니, 하루살이 같은 사람 세상 3천 년인가.”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역원】 배둔역(背屯驛) 현 북쪽 27리 지점에 있다. 송도역(松都驛)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구허역(丘墟驛)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도선원(道善院)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성산원(城山院)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견내량원(見乃梁院) 견내량 북쪽 벼랑에 있다. 송정원(松亭院) 현 서쪽 18리 지점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신증』 그 지방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5일까지 모여서 두 대(隊)로 나눈 다음, 사당(祠堂)의 신상(神像)을 싣고 화려한 깃발을 세우고 여러 마을을 두루 들른다. 마을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제사하고, 광대[儺人]이 다 모여서 온갖 놀이가 벌어진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관음점사(觀音岾祠)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봄ㆍ가을이면 현령이 여기에서 상박도(上撲島)ㆍ하박도(下撲島)ㆍ욕지도(欲知島)의 신에게 망제(望祭)를 지낸다.
【고적】 문화량페현(蚊火良廢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신라 때에는 고성군(固城郡)의 속현이었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곤의부곡(坤義部曲)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해빈부곡(海濱部曲) 현 동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도선부곡(道善部曲)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진여부곡(珍餘部曲) 현 동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구허부곡(丘墟部曲)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죽림부곡(竹林部曲) 현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박달부곡(博達部曲)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활촌부곡(活村部曲)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궤촌부곡(跪村部曲) 현 서쪽 50리 지점에 있다. 발산부곡(鉢山部曲) 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곡산향(曲山鄕) 현 동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녹명향(鹿鳴鄕)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어례향(魚禮鄕)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보령향(保寧鄕) 현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적진향(積珍鄕)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의선향(義善鄕)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번계(樊溪) 현 서쪽 33리 지점에 있다. 예전에 만호영(萬戶營)이 있었으나 지금은 당포(唐浦)로 옮겼다.
【명환】 신라 김양(金陽) 흥덕왕(興德王) 3년에 태수를 지냈다. 본조 신처강(辛處康) 정치를 잘하여 백성이 아전을 보지 못하였다. 『신증』 성수재(成秀才).
【인물】 고려 이존비(李尊庇) 예전 이름은 인성(仁成)이다. 원종(元宗) 초 과거에 뽑혔고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이ㆍ호부 시랑(吏戶部侍郞)을 지냈다. 충렬왕(忠烈王) 때 원(元) 나라에서 일본을 정벌할 적에 존비가 경상ㆍ전라ㆍ충청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서 군량과 전함을 조달하게 하였는데, 일 처리가 적당하여 백성을 뒤흔들지 않았다. 판밀직사 세자원빈(判密直事世子元賓)일 때 죽었다. 세자가 부음(訃音)을 듣고 울면서, “존비는 정직한 사람이었는데 수명이 어찌 이같이 짧은가.” 하였다. 이암(李嵒) 예전 이름은 군해(君侅)이며 존비의 손자이다. 충선왕(忠宣王) 때 17세로 과거에 올랐다. 충정왕(忠定王) 때에 왕을 모시고 원 나라에 갔다. 공민왕 초년에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으나, 다시 불려와서 문하시중 철성부원군(門下侍中鐵城府院君)으로 제수 되었다. 집에 있으면서 양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묻지 아니하고 그림과 글씨만을 낙으로 삼았으며, 당대에 글씨 쓰는 솜씨가 묘하니, 일찍이 태갑편(太甲篇)을 써서 왕에게 바쳤다. 호는 행촌(杏村)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강(李岡) 이암의 아들이다. 15세 때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직되어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그때에 외적이 침입했다는 변방 보고가 잇달았으나, 조정과 민간이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강의 공이 대부분이었다.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러서 죽었으니, 나이 36세였다. 왕이 매우 슬퍼하여, 보통 전례에 추밀(樞密)에게는 시호를 내리지 않는 법이나 특별히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본조 이원(李原) 이강의 아들이고, 18세 때 과거에 올랐다. 본조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서 벼슬이 좌정승(左政丞)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용헌(容軒)이다. 아들 이대(李臺)와 이비(李埤)는 동지중추(同知中樞)를 지냈고, 이지(李墀)는 과거에 올라 돈녕부정(敦寧府正)을 지냈다. 남수문(南秀文) 병진년 과거와 중시(重試)에 장원하였고 문장으로써 세상에 알려졌으며, 벼슬은 직집현전(直集賢殿)에 이르렀다. 이칙(李則) 이원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고,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성품이 활달해서 얽매이지 않았다. 이육(李陸) 이원의 손자이다. 갑신년 친시(親試)에 장원하였고 또 중시와 발영시(拔英試)에도 뽑혔다. 벼슬은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고, 문명이 있었다.
『신증』 【열녀】 본조 옥지(玉只)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시어머니와 살았다. 남이 욕보이고자 하니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제영】 누상농동수고성(樓上籠銅戍鼓聲) 이첨(李詹)의 시에, “군성(郡城)을 새로 철문성(鐵門城)으로 쌓았는데, 누 위에는 북소리가 둥둥거리네. 유민(流民)을 점검하니 예전 수효가 돌아왔고, 절후는 3월이라 두루 봄갈이하고 있네.” 하였다. 박도연분운외기(撲島煙氛雲外起) 이집(李集)의 시에, “박도 연기는 구름 밖에서 일고, 대숲 봉화는 밤이 깊도록 맑네.” 하였다. 장진왜산백일명(瘴盡倭山白日明) 이인손(李仁孫)의 시에, “적을 제어하는 데에 어찌 반드시 정벌해야 하랴. 예의(禮儀)로서 절충하면, 이것이 장성(長城)과 같네. 밭갈이 해변까지 이어져 누른 보리 구름 같고, 장기(瘴氣)가 다 없어지니 왜국의 산도 대낮같이 밝네.” 하였다. 병수산형수지진(竝水山形隨地盡)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관하(關河)가 아득한데, 기러기처럼 남으로 가서, 하늘가를 두루 돌아 철성(鐵城)에 이르렀네. 물에 접한 산형은 지세를 따라 끝났는데, 공주에 가득한 바닷빛은 사람 가깝자 환하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동읍내 끝이 10리이다. 서읍내 끝이 15리이다. 상서(上西)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하리일운(下里一運) 서로 처음은 25리 끝이 45리이다. 하리이운(下里二運) 서로 처음은 40리, 끝이 65리이다. 가동(可洞) 북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대둔(大芚) 북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30리이다. 마암(馬巖) 동북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구만(九萬) 동북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45리이다. 회현(會賢) 동북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2리이다. 광내일운(光內一運) 동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광내이운(光內二運) 동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50리이다. 도선(道先) 남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춘원(春元) 남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70리이다. ○ 곡산향(曲山鄕)은 동북으로 20리, 녹명향(鹿鳴鄕)은 북으로 30리, 죽림부곡(竹林部曲)은 동으로 40리에 있는데, 후에 죽림수(竹林戍)라 고쳤다. 어례향(魚禮鄕)은 서로 30리에 있다. 보령향(保寧鄕)은 서로 40리, 적진향(積珍鄕)은 동으로 20리, 의선향(義善鄕)은 북으로 40리, 곤의부곡(坤義部曲)은 북으로 15리, 해빈부곡(海濱部曲)은 동남으로 67리, 도선부곡(道善部曲)은 동으로 20리, 진여부곡(珍餘部曲)은 동남으로 25리, 구허부곡(邱墟部曲)은 동남으로 30리, 박달부곡(博達部曲)은 서로 20리, □촌부곡(□村部曲)은 서로 20리, 궤촌부곡(跪村部曲)은 서로 50리, 발산부곡(鉢山部曲)은 동으로 1리에 있다.
【영아】 우수영 겸 삼도통제영(右水營兼三道統制營) 남으로 50리에 있는데, 본조 초에 우수영(右水營)을 거제(巨濟)의 오아포(烏兒浦)에 두었다가, 선조(宣祖) 26년에는 처음으로 통제사(統制使)를 두어, 경상ㆍ전라ㆍ충청 3도의 주사(舟師 수군)를 관장하게 하고 이순신(李舜臣)을 통제사로 하였다. 35년에는 본현의 두룡포(頭龍浦)로 옮기고 오아포를 행영(行營)으로 하였다가 뒤에 폐하였다. 관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삼도 수군통제사중군(慶尙右道水軍節度使兼慶尙全羅忠淸三道水軍統制使中軍) 우후(虞侯)가 겸하는데 3월부터 8월까지 견내량(見乃梁)에 머무르며 지킨다. 한학훈도(漢學訓導)ㆍ왜학훈도(倭學訓導)ㆍ심약(審藥) 각 1인. ○ 영성(營城) 둘레가 1만 1천 7백 30척, 우물이 10, 못이 5이다. ○ 본영 수군의 속읍 창원(昌原)ㆍ진주(晉州)ㆍ김해(金海)ㆍ하동(河東)ㆍ거제(巨濟)ㆍ고성(固城)ㆍ곤양(昆陽)ㆍ남해(南海)ㆍ웅천(熊川)ㆍ진해(鎭海)ㆍ사천(泗川). 창고 저향창(儲餉倉)ㆍ포량창(砲粮倉)ㆍ원문창(轅門倉)ㆍ유방창(留防倉)ㆍ진휼창(賑恤倉)ㆍ군창(軍倉)ㆍ섬향고(贍餉庫)ㆍ보민고(補民庫)ㆍ군기고(軍器庫)ㆍ화약고. 본영에는 각종의 전선(戰船) 36척이 있고, 속읍(屬邑)ㆍ속진(屬鎭)에는 각종 전선 1백 48척이 있다.
【진보】 사량도진(蛇梁島鎭) 도중(島中)에 있었는데, 진주(晉州) 구라량(仇羅梁)으로 옮겼으며, 이곳에는 만호가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2백 52척이다. ○ 수군 만호 한 사람이 있다. 당포진(唐浦鎭) 남으로 67리이다. 통영은 남으로 20리에 있다. 성종 19년에 쌓았으며, 둘레는 1천 4백 45척이다. 수군만호가 한 사람이 있다. 남촌포보(南村浦堡) 동남으로 30리에 있으며, 광해주 6년에 현의 남쪽인 도선촌(道善村)에 세웠다가 11년에는 적진포(積珍浦)에 소모진(召募鎭)을 옮겨 세우고 남촌(南村)이라 칭하였다. ○ 별장(別將)이 한 사람이다. 구솔비포보(舊乺非浦堡) 서로 47리이며, 처음에는 권관(權管)을 두었다가 성종 22년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8백 25척이다. 선조 37년에는 거제의 수영(水營) 옛 터에 옮겼다가 39년에는 이곳에 소모진(召募鎭)을 다시 옮기고 금명(今名)이라 칭하였다. 별장(別將)이 한 사람이다. 삼천포보(三千浦堡) 통영(統營)의 서남쪽 5리에 있는데, 광해주 11년에 사천현(泗川縣)으로부터 미륵산(彌勒山) 아래로 옮기고 삼천포라 하였다.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0척이며, 권관(權管)이 한 사람이다.
혁폐 가배량보(加背梁堡) 남으로 34리인데 옛날에는 수군 도만호(水軍都萬戶)가 있었으며, 후에 거제현의 옥포(玉浦)로 옮겼다. 성종 22년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다시 권관을 두고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8백 83척이다. 선조 37년에는 다시 거제의 우수영 옛 터로 옮겼다. 번계진(樊溪鎭) 서로 34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수군만호가 있었다. 후에 당포(唐浦)로 옮겼다. 성산진(城山鎭) 서로 24리에 있는데 미공(未攻)으로 고쳐 설치했으며, 고성(古城)이 있다. 좌신포(佐申浦) 동남으로 30리에 있다. 혜질이포(惠叱伊浦) 서로 30리에 있는데, 위 두 곳은 예전에 후라(候邏)하던 곳이다. 죽림수(竹林戍) 죽림부곡(竹林部曲)에 있는데 고려 때 수자리를 두었었다.
【창고】 읍창(邑倉)ㆍ제민창(濟民倉) 남으로 5리에 있다. 속창(屬倉) 바로 진주(晉州) 가산창(駕山倉)의 속창(屬倉)으로 견내량(見內梁)에 있다. 고성(固城)ㆍ거제(巨濟)를 위해서 설치했는데 원창(元倉)과 같이 군수물자를 실어 보낸다. 진보창(鎭堡倉)이 다섯이다.
【목장】 혁폐 말상곶(末上串) 남으로 30리이다. 해평곶(海平串) 남으로 40리이다. 삼천포(三千浦)ㆍ당포(唐浦)ㆍ종해도(終海島)ㆍ포도도(葡萄島)
【진도】 견내량진(見乃梁津) 동남으로 50리인데 거제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맞은 편은 바로 영등포진인데, 나룻가에는 관해루(觀海樓)가 있다.
【토산】 비자(榧子)ㆍ지황(地黃)ㆍ김[海衣].
【사원】 충렬사(忠烈祠) 강산도(剛山島)에 있는데 광해주 갑인년에 세웠고, 경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이순신 아산(牙山) 편에 있다.
* 의성(義城) 左道. 6일 반.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0리이다.
異名: 소문(召文). 문소(聞韶). 고현(古縣). 고근(高近).고구(高丘)
* 의성현령겸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 문음 5품
* 의성훈도. 종9품.
별좌(座首)1인. 별감(別監) 2인. 군관(軍官) 60인. 인리(人吏) 140인. 지인(知 印)40인. 사령(使令) 56名. 관노(官奴) 77名. 관비(官婢)六十一口.
0 호구己卯式元戶 영조 11년
호수: 8,012호. 인구: 29,303명. 남자: 13,304명. 여자: 15,999명.
八千十二戶人口二萬九千三百三口內 男一萬三千三百四口女一萬五千九百九十九口
안동진관의성현(安東鎭管義城縣)
동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5리,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4리,
남쪽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40리,
서쪽으로 군위현(軍威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9리,
비안현(比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7리,
북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91리이다.
남쪽으로 대구감영까지 1백50리. 1일 반정.
남쪽으로 고성통제영까지 5백30리 5일 반정.
남쪽으로 울산병영까지 2백90리 3일정.
남쪽으로 동래수영까지 4백리 4일정.
0【건치연혁】
본래 소문국(召文國)이었다. 신라가 이를 취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이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고,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귀속시켰고, 인종(仁宗)은 현령(縣令)을 두었고, 신종(神宗)은 일찍이 적에게 함락되었다해서 감무(監務)로 강등시켰고, 충렬왕(忠烈王)은 대구(大丘)에 병합시켰다가 다시 현령(縣令)으로 삼았다. 본조에서는 이를 따랐다.
0 관청건물(公廨)
문소관(聞韶館) 객사(客舍) 東曰 봉의헌(鳳儀軒) 西曰 구성헌(九成軒)
○金誠一詩
信宿聞韶館, 居然一夢成. 高車過故國, 負弩被恩榮,
驛路春將盡, 山城雨乍晴, 如何好時節, 萬里不停行.
조양관(朝陽館) 쌍청헌(雙淸軒) 향사당(鄕射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기고청(旗皷廳) 인리청(人吏廳)
【성씨】 본현 김(金)ㆍ심(沈)ㆍ홍(洪), 정(丁)ㆍ강(康)ㆍ설(薛)ㆍ노(盧) 지금은 노(魯)로 쓴다. 김(金) 모두 촌성(村姓)이다. 왕(王)ㆍ유(柳) 모두 개경(開京). 오(吳) 장기(長鬐). 강(姜) 진주(晉州). 박(朴) 속성(續姓)이다.
【풍속】
검소ㆍ솔직함을 숭상하고, 잠상(蠶桑)에 힘쓴다 관풍안(觀風案). 주민이 순박하다 조서강(趙瑞康)의 시다.
『신증』 운반에는 곡거(曲車)를 쓴다.
【형승】
산천(山川)은 백 리(百里)이고 연화(煙火)는 천 가(千家)이다 이발(李潑 호는 동암(東巖))의 시에, “깨끗한 산천은 백 리요, 태평한 연화(煙火)는 천 가라.”하였다.
【산천】
*금성산(金城山) 현 남쪽 25리에 있다.
*선암산(船巖山) 현 남쪽 50리인 의흥현(義興縣) 경계에 있다.
*금학산(金鶴山) 현 남쪽 25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현 서남쪽 30리에 있다.
*모현(茅峴) 현 동쪽 45리에 있다.
*마산(馬山) 현 북쪽 20리에 있다.
*황산(黃山) 현 동쪽 50리에 있다. 산중에는 뽕나무가 많이 있어, 인근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두 이에 의지해서 누에를 기른다.
*빙산(氷山) 현 동남쪽 40리에 있다. 빙혈(氷穴) 빙산의 큰 바위 밑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높이가 4척 8촌, 옆으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위 밑에 직하(直下)로 나 있는데 넓이가 1척, 길이는 1척까지는 잴 수 있는데 아래로는 굽어 있어 잴 수 없다. 입하(立夏) 뒤로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딱딱하게 되고,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ㆍ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 한다.
*혈동(穴洞) 사곡리(舍谷里)에 있는데, 현에서 동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바위구멍[岩穴]이 아주 깊어서, 음수(陰獸)가 숨어 있는가 의심스럽다. 날이 가물 때 기우제를 드리면 곧 응험이 있다.
*천암(穿巖)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구부리면 깊은 못에 다다르며 구멍이 바위 가운데 있다. 기괴하고 이상하며 가뭄든 해에 기우제를 지내면 바로 응한다.
*장천(長川) 현 서쪽 3리에 있다. 근원은 모현(茅峴)에서 나온다.
*하천(下川) 현 남쪽 20리에 있다. 그 근원은 빙산에서 나오며, 현 서쪽 20리에서 남천(南川)과 합류되어 병천(幷川)이 되는데, 바로 비안현(比安縣) 쌍계(雙溪)의 상류이다.
*황산천(黃山川) 현 동쪽 34리에 있다. 그 근원은 황산(黃山)에서 나온다. 바로 안동부(安東府) 독천(禿川)의 상류이다.
*탄지(炭池) 현 남쪽 30리에 있다.
『신증』
*둔덕산(屯德山) 현 동쪽 3리에 있다.
*두음산(豆音山) 현 서쪽 35리에 있다.
*백장령(百丈嶺) 현 서남쪽 28리에 있다.
0【토산】
사(絲)ㆍ솜[緜] 잠실(蠶室)은 현 북쪽 사진리(沙眞里)에 있다. 꿀[蜂蜜]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ㆍ옷[漆]ㆍ송이[松蕈]
0【봉수】
*마산(馬山)봉수 북쪽으로 안동부(安東府)의 감곡산(甘谷山)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고성산(古城山) 봉수 현 남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 영니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마산(馬山)에 응한다.
*영니산(盈尼山) 봉수 현 남쪽 25리에 있다. 남쪽으로 의흥현(義興縣)의 승목산(繩木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0【누정】
문소루(聞韶樓) 객사(客舍) 북쪽에 있다. ○ 화지원(華之元)의 기(記)에, “현령 이광제(李光濟)군이 화산(花山)을 지나는 길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네는 우리 현(縣)의 공관(公館)을 아는가. 지세가 낮고 건물이 비좁아서 손님이라도 올 경우 여름이면 답답해서 숨쉬기도 어렵다네. 화풀이를 현령(縣令)에게 하고 관리들을 못살게 굴어서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네. 좀 넓게 새로 짓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전쟁이 10년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이 편히 살 수도 없었지. 다행히도 주상 전하께서 천명(天命)ㆍ인심(人心)에 순응하시어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반정(反正)하였으니,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고 겨우 숨을 돌리게 된 것이 몇 년 못 되었소. 이 마당에서 역사를 한다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것이요, 또 개작(改作)한다는 비난을 살 것도 같아서, 다만 관청의 북쪽에 옛터가 있길래 이를 누정으로 세우고자 하니, 고을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서 일해 줬다네. 산에서 재목을 얻고 흙을 파서 기와로 만들어 집을 짓되, 농한기를 틈타서 며칠 만에 준공을 보았다네. 역사를 한 사람은 백성이 아니면 중들이었는데, 모두들 품삯을 주어서 노고를 보상했네. 이후로는 사신으로 이 누정에 오른 자는 즐거워하기만 하고 화내는 일이 없어서, 화풀이가 백성을 박탈하는 재앙이 없게 되겠지. 아직 다 되지 않은 것은 단청 뿐일세. 이제 임기가 다 차서 언제 떠날지 모르겠네. 나를 위해서 그 본말(本末)을 적어주게. 그리고 성명을 써두어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주도록 하세.’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현에 북루(北樓)가 있다는 것은 나 또한 알던 바이다. 옛날 학사 김지대(金之岱)가 일찍이 이 도(道)의 안렴(按廉)으로 있을 때, 이 누대에 대해 읊기를, ‘문소(聞韶)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 백여 척 되는 높은 누정이 있네.’ 했었다. 어느 해에 이것이 쓰러지게 되었는가. 부로(父老)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마 현명한 이가 이를 일으켰고 우둔한 이가 이를 쓰러지게 했을 것이니, 다시 이를 일으키는 것은 또한 현명한 일이겠고,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은 더욱 우둔한 것이다. 이(李)군은 청렴하게 정치를 하고, 백성을 사역시키되 괴롭히지 않았고, 재물을 없애고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오랫동안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일으켰으니, 현명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기록할 만한 것이다. 건축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나 조망의 넓고 좁은 데에 대해서는 내 아직 본 적이 없으니, 잠시 대가의 손을 기다리기로 하자.” 하였다. ○ 김지대(金之岱)의 시에, “문소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는 백여 척 되는 높다란 누정이 있네. 향기로운 바람 십 리(十里)에 구슬 발이 걷히고, 밝은 달 일성(一聲)으로 옥피리 날리네. 연기는 가벼워 버들 그림자가 서로 가늘게 이어졌고, 비는 개어서 산빛이 짙은데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용황(龍荒 흉노(匈奴))이 팔을 꺾은 갑지랑(甲枝郞), 그냥 난간에 기대고 있는 것 더욱 애석하네.” 하였다. 지대의 이 시는 사람 입에 오르내리다가 시판(詩板)을 잃었다. 그 뒤 10년에 어떤 군수가 이 시를 몹시 찾으니 고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시 현수(縣守) 오적장(吳廸莊)에게 딸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일(張鎰)의 아들 정하(廷賀)와 약혼했었다. 오(吳)가 딸을 데리고 임지에 간 동안 정하는 다른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오녀(吳女)가 듣고 미쳐서 함부로 지껄이다가 갑자기 이 시를 암송해내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를 베껴서 바치니 군수가 놀랐다고 한다. ○ 고려 이문화(李文和)의 시에, “문소(聞韶)의 산수(山水)는 깨끗하여, 밤은 고요하고 발은 성기고 달은 기울었네. 버들 빛 푸릇푸릇한 객사(客舍), 향기로운 내[煙] 모락모락하는 절간[僧家], 백성 걱정에 금방 변한 흰머리[鶴髮], 비[雨]를 얻어 기슭에 돌아온 검은 모자[烏紗], 여섯 달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다만 앞뒤의 황화(皇華 사신(使臣)에게 부끄럽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문소(聞韶)의 누정 아름다운 곳, 비를 피해 오르니 해가 기운다. 풀빛의 푸름은 역로(驛路)에 닿았고, 복숭아 꽃의 따뜻함은 인가(人家)를 덮는다. 봄의 시름은 꼭 술같이 진하고, 세상의 맛은 점점 깁처럼 얇다. 애끊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또 서울로 간다.” 하였다. ○ 김자수(金子粹)의 시에, “오천(烏川) 선생의 훌륭한 작품은 점과 획이 바르고 비스듬. 도덕(道德)은 성역(聖域)에서 자유로이 놀고, 문장(文章)은 시가(詩家)에서 홀로 뛰어났네. 벽 사이에서 농묵(濃墨)을 즐겁게 보고, 마루 위에서 농사(籠紗)를 한탄치 않누나. 우뚝하게 높은 산을 우러러 보니, 얼굴 시드는 것 바로 나이가 두렵다.” 하였다. 『신증』 죽루(竹樓) 객관의 남쪽에 있다. 현령 이종준(李宗準)이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철파역(鐵破驛) 현 북쪽 5리에 있다.
*청로역(靑路驛) 현 남쪽 32리에 있다.
*남원(南院) 현 남쪽 2리에 있다.
*허어리원(許於里院) 현 동쪽 35리에 있다.
*윤곡원(尹谷院) 현 동쪽 24리에 있다.
*염곡리원(廉谷里院) 현 남쪽 12리에 있다.
*황산원(黃山院) 현 동쪽 30리에 있다.
*승봉원(僧逢院) 현 남쪽 20리에 있다.
*건현원(件峴院) 현 남쪽 35리에 있다.
*빙산원(氷山院) 현 남쪽 30리에 있다.
*도리원(都里院) 현 서쪽 32리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골짜기가 멀어서 맑은 물 흐르고, 모래가 평평해서 짧은 뗏목 없구나. 나루를 물었으나 길을 잃어버렸고, 연기 나는 곳은 두어 집뿐이다.” 하였다.
북원(北院) 현 북쪽 2리에 있다.
이곡원(梨谷院) 현 북쪽 18리에 있다.
【불우】
*빙산사(氷山寺) 빙산에 있다.
*수량암(修量菴) 금학산(金鶴山)에 있다.
*백장사(白丈寺)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비둘기와 제비가 서로 재잘거리니, 바야흐로 천하는 삼월 삼짇. 봄물은 기름 돌아 푸르고도 맑은데, 바위에는 꽃이 얼키설키 붉기도 하네. 시를 읊고 노니나니 술보다 흥겹고, 풀밭을 거니나니 쪽빛보다 푸르구나. 90일의 봄빛을 한번 훑으니, 조개(皁蓋 일산(日傘))가 성 남쪽에 가득해도 상관이 없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3리에 있다.
『신증』
속담에 전하기를, “김홍술(金洪術)의 모습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와 비슷했는데, 백제의 견훤(甄萱)과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다. 이에 여기에서 제사지낸다.” 한다.
○ 유호인(兪好仁)의 영신가(迎神歌)에, “공은 어찌하여 이 구석에 있는고. 덩굴 풀에 의지하였는데, 산은 검푸르도다. 하늘을 위해 일했거늘 문란하도다. 진인(眞人)이 우뚝 일어섰으니, 푸른 나무 옆이로다. 물고기에 날개가 붙었으니, 다투어 뛰고 달리는도다. 황옥(黃屋 황제의 수레)의 좌도(左纛 황제 수레의 깃발)여, 범ㆍ이리를 당해내고, 유가(劉家 한(漢) 나라의 황가(皇家))의 기신(紀信)이여, 멀리 서로 바라보는도다. 사당에서 백세(百世)를 잡수시니 신(神)은 양양하고, 우리 백성이 보답하니 잊지 못하는도다.” 하였다.
○ 유호인의 송신가(送神歌)에, “신령이 양양함이여 산(山)의 머리로다. 구름은 뭉게뭉게 무턱대고 헤매는도다. 북은 두둥둥 둥둥 주저주저 춤추는도다. 여지(荔枝)가 누래지지 아니하니 계수나무는 부끄러워지는도다. 내가 드린 메를 받으시니 물리치지 않으시도다. 팔사(八蜡)는 해마다 가을이면 온 지경 안에서 구슬처럼 모여들어 삼밭처럼 빽빽하도다. 여귀(厲鬼 역귀(疫鬼))를 쫓으니 큰 복을 내리시는도다. 우리 백성이 보답하니 해마다 증수(增修)하는도다.” 하였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고구현(古高丘縣) 현 북쪽 20리에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구화현(仇火縣)을 고구현(高丘縣)으로 고쳤다. 혹은 고근(高近)이라고도 한다. 뒤에 의성부(義城府)에 예속시켰다.
*태일전(太一殿) 빙혈(氷穴) 옆에 있다. 매년 상원(上元 정월 보름)에 임금이 향(香)을 내려서 제사지낸다. 성화(成化) 14년 무술(戊戌)에 충청도(忠淸道) 태안군(泰安郡)으로 옮겼다. ○ 신인손(辛引孫)의 시에, “태청(太淸 하늘)의 새 전각은 빙산(氷山)에 창건되었고, 하한(河漢 은하(銀河)) 돌아감은 정환(定環)에 벌여 있다. 오색(五色)이 보광(寶光)은 하토(下土)에 이었고, 삼태(三台)의 화개(華蓋)는 중간에 끼어 있다. 마음을 재계하기 10일 황궁의 섬돌로 달리고, 수명을 축수하기 천년 황제의 모습에 절한다. 원하옵기는, 비ㆍ바람 순조롭도록, 화기애애함이 인환(人寰)에 가득토록.” 하였다.
*소문국(召文國) 옛터는 현 남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소문리(召文里)라 부른다.
*어정(御井) 소문리에 있다. 아마 소문국 시절의 어정(御井)인 모양이다.
*피촌향(皮村鄕) 현 남쪽 25리에 있다.
*신촌부곡(新村部曲) 현 동북쪽 30리에 있다.
*굴어곡부곡(屈於谷部曲) 현 남쪽 5리에 있다.
*우곡부곡(牛谷部曲) 현 동쪽 20리에 있다.
*골라소(骨羅所) 현 동남쪽 50리에 있다.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4천 7백 20척이었는데, 지금은 황폐해졌다. *황산성(黃山城) 현 동쪽 40리에 있다. 서쪽만 돌로 쌓은 것이, 둘레 45척이었는데 지금을 황폐해졌다, 동ㆍ남ㆍ북은 모두 절벽이다.
*금성산고성(金城山古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 9천 백 척, 높이 13척으로 아주 높고 험하다. 안에는 네 곳의 샘물이 있다.
【명환】
본조 김속(金續) 성품이 청렴ㆍ정직하다. 상공(常貢)의 물품은 모두 보(寶 재단(財團))를 세워 백성들에게서 걷지 아니하였다.
정종소(鄭從韶) 정치에 성적이 있다.
名宦
本朝
* 金續 性廉直常貢之物皆立寶不賦於民
* 鄭從韶 有政績 新增兪好仁 號㵢溪 成廟朝被 隆眷以校理乞養除本縣及登道 成廟命 內官往搜 詩稿內官追及烏嶺得北望君臣隔南來母子同之詩以進 成廟賞詠日好仁身雖 在外心不忘君
* 李耔 號陰岸 大司諫 禮堅子燕山政亂禮堅忤旨出牧星州爲便養丐本縣中廟反正召還歷 官至右參贊己卯名賢 謚文懿
* 張顯光 號旅軒 莅官五月棄歸 謚文康 享本縣 氷溪院祠
* 李益著 居官廉潔秋毫不犯値丙子大歉盡心救活以政最陞拜淸州牧將行民攀軒涕泣後以 尙州牧過縣男女老少塡街迎拜達宵露立於所館門外曰苦過是夜不復見賢使君矣
* 鄭澔 號丈巖官至領議政
【인물】
고려
김홍술(金洪術) 태조(太祖 왕건(王建)) 때의 아전[吏]으로서 성주(城主)가 되었다. 태조 12년 가을에 견훤(甄萱)이 갑졸(甲卒) 5천 명으로 쳐들어와 홍술이 전사하니, 태조가 울면서, “나는 좌우의 팔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홍유(洪儒) 궁예(弓裔)의 말년에 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과 함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청주(靑州)가 배반하자. 유가 유검필(庚黔弼)과 더불어 진주(鎭州)를 진압했으므로 청주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19년에 백제(百濟 후백제) 토벌에 따라가서 이를 멸망시켰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김훤(金晅) 원종(元宗) 초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환(淸宦)ㆍ요직(要職)을 많이 지냈다. 충선왕(忠善王)이 세자(世子)로서 원 나라에 가 있을 때 훤은 시독(侍讀)으로 따라갔다. 벼슬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성정(性情)이 깨끗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않았으며,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호(號)는 철촌(鐵村)이다.
김개물(金開物) 훤(晅)의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서정(瑞庭)이다. 성품이 굳세고 정직하였다.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가법(家法)이 있었다. 남과 사귐에 있어 신용을 지켰다. 벼슬은 대간(臺諫)에 이르렀고, 옛날의 쟁신(爭臣)의 기풍이 있었다.
본조
김순(金淳)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헌(僖憲)이다.
김말(金末)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가르치기를 열심히 했다.
『신증』
【효자】
본조 제연동(諸延同) 어머니가 나쁜 질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금방 나았다. 금상(今上 중종(中宗)) 11년 정려(旌閭)되었다. 도금동(都今同) 아버지가 죽자 여묘(廬墓)살이하였고, 상(喪)이 끝나서도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으며, 조석(朝夕)의 제사를 한결같이 하였다. 금상(今上) 16년에 정려(旌閭)되었다.
0 人物 여지도서
高麗
*김홍술(金洪術) 太祖時以吏爲城主十二年秋甄萱以甲卒五千來侵洪術戰死太祖哭之慟曰吾失左右臂矣
*홍유(洪儒) 弓裔末年與裴玄慶 申崇謙 卜智謙同爲騎將推戴太祖功爲第一靑州反側洪儒與庾黔弼鎭鎭州靑州不克叛十九年從討百濟滅之卒謚忠烈
*김훤(金晅) 元宗初登第多歷淸要忠宣以世子在元晅以侍讀從累官至贊成事性淸介疾惡如讐所至人懷之善隷書號鐵村
*김관물(金關物) 晅之子初名瑞廷性剛貞詩與字畫俱有家法與人交一以信累歷臺諫有古爭臣風 本朝金淳 登第官至知中樞院事謚僖憲
김말(金末) 登第官至判中摳府事謚文長精於性理之學誨人不倦 舊增孝子本朝都延同 母得惡疾斷脂和藥以進病卽愈事 聞旌閭 都今同 父歿廬墓終喪猶不脫衰尊朝夕如初事 聞旌閭
新增
*김광수(金光粹) 高麗 上洛公 方慶後號松隱中弘治辛酉進士天性恬慡風儀端絜嘗遊太學見時象不佳卽辭歸未幾士林禍作自是謝絶擧業作十箴以自警平生口不道營産事取古人嘉言善行諷詠不輟婢㒒亦習聞而能傳之享藏待院祠
*신원록(申元祿) 高麗孝子祐後호는 회강(悔堂)從遊曹植 周世鵬門性至孝甫十歲父病登山採藥及喪廬墓終制事母務得歡心及歿又廬墓哀毁成疾而卒 國恤以素餐終三年周世鵬卒心喪三年 朝命旌閭 贈參議享藏待院祠
*이광준(李光俊) 호는 학동(鶴洞)登嘉靖壬戌文科除江陵府使倭寇充斥領兵出戰斬獲甚多事 聞增秩官至觀察使 文康公 張顯光 題其墓曰 篤志力學 律已以正 居官守法 不畏强禦云
* 贈參判 이민성(李民宬) 광준(光俊)의 아들.호는 경정(敬亭)登萬曆丁酉文科選湖堂光海朝在玉署箚論造訒廢 母后之罪爲爾瞻所逐廢錭十年癸亥 改玉奉使 皇都辨誣而歸華人敬其文學稱先生而不名官至左承旨享藏待院祠
*이민환(李民冤) 민성(民宬)의 동생. 호는 자암(紫巖).登萬曆庚子文科入翰苑戊午深河之役以從事官赴兵敗欲自裁爲虜所枸繫囚柵中十七月矢死不屈臥起常持本 國印信馬牌辛酉我 國刷還迯夷虜感而出送癸亥 改玉被 知遇超遷至參判
*신지제(申之悌) 우(祐)의 후손. 호는 오봉(梧峯).孝友篤至學鮮通慱文忠公 柳成龍帝稱以第一人物登萬曆己丑文科出入臺閤盡忠敢言歷典州郡皆有治績父喪泣血廬墓官至承旨 贈吏曹參判享藏待院柌
*신달도(申達道) 원록(元祿)의 손자. 호는 만오(晩悟) 월천 조목(趙穆). 여헌 장현광(張顯光) 문인. 萬曆庚戌生員値光海政亂不赴擧癸亥後首擢庭試出入臺省遇事敢言丁卯與趙綗 尹煌共斥和議世稱三學士官至修撰 贈都承旨
*節義金致中 壬辰倭亂與弟致和倡義殉節妻申氏婢福分并死之世稱一門三綱以其夫死於 國妻死於夫婢死於主也事聞命竝旌閭
*孝子李希玉 父喪守墓三年又加 三年事 聞旌閭 李擢英 鄕吏也早喪父事母盡孝母兩眼俱盲晝夜不離側躬執匙進飯病劇沐浴禱天嘗糞號泣壬辰倭亂從軍有征蜜錄孫光喆亦有孝行母病七年衣不解帶遭喪哀毁啜粥三年父病嘗糞甜苦竝因道臣啓 聞命復戶
*突尙 寺奴也父病斷指和藥以進絶而復甦 顯廟朝因道臣啓 聞命復其家
*崔億石 丙子亂父榮觀從軍戰死雙嶺億石其遺腹子也及長以不識父面爲平生恨啜泣哀慕六十年如一日及丙子周甲追服三年 肅廟丙戌旌閭
*신렴(申濂) 달도(達道)의 증손. 호는 툇간(退澗)中 肅廟己卯生員十五歲火賊入室冒白刃衛父母身被數瘡父病有飛鴉堕藥用以卽效人以爲孝感因道臣啓 聞 贈持平
*金允山 甫十歲偕其父適野虎咬其父允山將鎌赴虎救其父虎棄去事 聞旌閭
*烈女金召吏 丁大年妻早喪夫守喪三年又加三年事 聞旌閭
*朴氏 鄭太乙妻也壬辰倭變率二女避山中猝遇賊欲汚之朴氏以死拒之二女同死家有所養枸在尸傍烏鳶狐狸之來輒卽歐逐故尸得全完人皆嘆異萬曆四十年事 聞旌閭
*申氏 義士金致中妻事見上 權氏 金致綱妻壬辰倭變猝遇賊權氏知不免自投巖下折齒破面萬曆四十年事 聞旌閭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남부(南部) 읍으로부터 끝이 15리이다.
*북부(北部) 끝이 10리이다.
*점점곡(點谷) 동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이다.
*빙산(氷山) 동남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소야(巢野) 동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이다.
*산운(山雲)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가음(佳音)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상천(上川)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하천(下川)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석전(石田) 위와 같다. 금뢰(金磊) 위와 같다.
*소문(召文)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억곡(億谷)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안평(安平)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옥산(玉山)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귀산(龜山)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단촌(丹村)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외야(外也) 위와 같다.
*내사곡(內舍谷) 동쪽으로 처음은 1리, 끝은 40리이다.
*외사곡(外舍谷)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50리이다.
*우곡(羽谷) 서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이며, 안동 남쪽 경계와 비안(比安) 북쪽 경계를 넘어 있다.
*이혜(泥兮)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며, 일계(日谿)의 옛 현이다.
*구화(仇火) 북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40이며, 고구(高邱)의 옛 현이다.
*반촌향(反村鄕)은 남쪽으로 25리,
*신촌부곡(新村部曲)은 동북쪽으로 30리,
*굴어곡부곡(屈於谷部曲)은 남쪽으로 5리,
*우곡부곡(牛谷部曲)은 동쪽으로 30리,
*골라소(骨羅所)는 동남쪽으로 50리이다.
【토산】 뽕[桑]ㆍ옷[漆]ㆍ닥종이[楮]
【누정】 기양정(岐陽亭)ㆍ능파정(凌波亭) 모두 서쪽으로 1리에 있다.
【사원】
빙계서원(氷溪書院) 명종(明宗) 병신년에 건립하고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김안국(金安國) 태묘(太廟) 조에 있다.
이언적(李彦迪) 문묘(文廟) 조에 있다.
유성룡(柳成龍) 안동조에 있다.
김성일(金誠一) 안동(安東) 조에 있다.
장현광(張顯光) 성주(星州) 조에 있다.
[주1]기신(紀信) :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사이에 있는 산인데, 당(唐) 나라 때 시인(詩人) 이백(李白)이, 이 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의 옛날 글 읽던 곳이라는 뜻이다.
[주2]팔사(八蜡) : 중국 하남(河南)현에 있는 성인데, 이백이 이 성을 지나면서, “광무성(廣武省) 가에서 모춘(暮春)을 만나니 문양(汶陽)으로 돌아가는 손의 눈물이 수건을 적신다.”라는 회고시를 지었다는 고사이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이 회고(懷古)하면서 눈물을 뿌린다는 뜻이다.
0 堤堰 여지도서
九龍堤 在縣南七里周圍二千三十尺深十尺 八智堤 在縣南十里周圍一千三百三十尺深五尺 新堤 在縣南七里周圍二千四百七十七尺深十一尺 於義
谷堤 在縣西七里周圍六百四十尺深五尺 新峴堤 在縣東三十里周圍九百五十四尺深六尺 延谷堤 在縣東二十里周圍三百三十三尺深六尺 梧桐堤 在縣東二十里周圍八百二十五尺深八尺 外全風堤 在縣東三十里周圍四百三十二尺深六尺 諸非乃堤 在縣東三十里周圍三百尺深五尺 枝洞堤 在縣東三十里周圍六百二十八尺深七尺 漆田堤 在縣東三十里周圍四百二十八尺深六尺 外洞堤 在縣東三十里周圍一百四十七尺深四尺 鋤乙堤 在縣東三十里周圍五百五十尺深五尺 炭堤 在縣南三十八里周圍五千五百五十尺深十尺 下思美堤 在縣南四十里周圍四百二十尺深五尺 思美堤 在縣南四十里周圍九百三尺深六尺 屯田堤 在縣南四十里周圍六百八十尺深六尺 九卽堤 在縣南四十里周圍六百五十五尺深七尺 獻岱堤 在縣南五十里周圍六百四十尺深六尺 孝是卽堤
在縣南五十里周圍六百六十七尺深七尺 碩南堤 在縣南十三里周圍三千五百七十五尺深五尺 後洞堤 在縣南二十里周圍五百三十八尺深六尺 堤豆毛堤 在縣南二十里周圍四百三十八尺深五尺 可倉洞堤 在縣南二十里周圍七百九十尺深七尺 鳥走只堤 在縣南三十里周圍一千九百尺深八尺 大也谷堤 在縣南二十里周圍一千二百二十六尺深七尺 機堤 在縣南二十里周圍三百九十尺深七尺 雲如堤 在縣南三十里周圍八百九十八尺深六尺 道堤堤 在縣南三十里周圍五百一尺深六尺 新坊堤 在縣南三十五里周圍五百八十四尺深八尺 仇水洞堤 在縣南四十里周圍五百四十尺深五尺 沙火卽堤 在縣西三十里周圍七百六十四尺深七尺 豆音峴堤 在縣西四十里周圍六百六十尺深五尺 松洞堤 在縣西三十五里周圍三百二十尺深六尺 麻田堤 在縣西三十里周圍一千四百五十五尺深八尺 粉土洞堤 在縣西十五里周圍九百二十六尺深十尺 泉洞堤 在縣西三十里周圍八百七十尺深七尺 間洞堤 在縣西二十里周圍五百二十四尺深五尺 方下谷堤 在縣北十五里周圍四百八十一尺深七尺 檢城洞堤 在縣北二十里周圍七百二十尺深六尺 佛毛洞堤 在縣東十五里周圍四百六十尺深四尺 後洞堤 在縣西三十里周圍五百六十六尺深五尺 可樹洞堤 在縣北七里周圍八百尺深七尺 檢洞堤 在縣北二十里周圍五百二十五尺深四尺 赤洞堤 在縣北三十里周圍四百八十尺深四尺 是於非堤 在縣東四十里周圍五百五十尺深七尺 堤洞堤 在縣東三十里周圍六百二尺深七尺 內全風堤 在縣東二十里周圍三百四十尺深六尺 牛洞堤 在縣東三十里周圍八百二十尺深五尺 沙役洞堤 在縣南三十里周圍四百尺深四尺 大沙役洞堤 在縣南三十五里周圍四百尺深四尺 尺火堤 在縣南四十里周圍六百十尺深五尺 大思美堤 在縣南三十里周圍四百四十五尺深七尺 甲長洞堤 在縣南二十里周圍八百五十一尺深六尺 方下洞堤 在縣南二十里周圍四百四十二尺深三尺 屯基洞堤 在縣南三十里周圍二白九十五尺深四尺 瓦家洞堤 在縣南二十里周圍一千四十尺深十尺 鋤丁洞堤 在縣南三十里周圍二百四十尺深四尺 梨亭堤 在縣南三十里周圍五百一尺深七尺 廩谷堤 在縣南三十里周圍三百十尺深五尺 梨洞堤 在縣南十里周圍五百八十尺深四尺 老梅谷堤 在縣西三十里周圍六百四十五尺深七尺 九番堤 在縣西二十里周圍五百九十一尺深七尺 馬轉堤 在縣西三十里周圍二百七十尺深六尺 細義谷堤 在縣西三十童周圍五百六尺深四尺 朴谷堤 在縣西三十里周圍八百十四尺深六尺 箕谷堤 在縣西三十里周圍四百七十四尺
深五尺 栗谷堤 在縣北二十里周圍三百七十八尺深五尺 道通堤 在縣北六里周圍一千三十七尺深五尺 毛乃谷堤 在縣東二十里周圍六百二十一尺深八尺 仇老谷堤 在縣東二十五里周圍一千六十二尺深六尺 上思美堤 在縣南三十里周圍四百四十尺深六尺 菖堤 在縣南三十里周圍二千三百八十八尺深六尺 德川堤 在縣南三十五里周圍一千六百九十尺深五尺 長生堤 在縣南三十里周圍四百十尺深三尺 獐堤 在縣南三十里周圍四百四十尺深六尺 羅浮堤 在縣南二十里周圍一千三百六十五尺深九尺 安谷堤 在縣西三十里周圍一千一百十五尺深九尺 龜尾堤 在縣西三十里周圍四百三十尺深八尺 無所洞堤 在縣西二十里周圍七百五十尺深五尺 突谷堤 在縣南三十里周圍三百五十三尺深四尺 上禾谷堤 在縣北二十里周圍一千三百二十一尺深五尺 分明堤 在縣南二十里周圍四百四尺深五尺 柯亭子堤 在縣北三十里周圍一百五十尺深四尺 元興洞堤 在縣南十里周圍二百六十尺深十二尺 杏村堤 在縣北十里周圍一千一百四十尺深十二尺 孝仙堤 在縣南三十里周圍五百九十尺深十尺 鉢卽洞堤 在縣南四十里周圍七百七十八尺深八尺 半鉢堤 在縣東三十里周圍七百七十一尺深七尺 子抱谷堤 在縣東四十里周圍六百四十三尺深七尺 新洞堤 在縣北四十里周圍九百二十尺深九尺
0 倉庫
軍器庫 賑恤庫 司倉 佳音倉 在縣南四十里 召文倉 在縣南二十五里 安平倉 在縣西三十里
玉山倉 在縣北四十里
0 物産
絲 綿 蠶室在縣北沙眞里 ○今廢 蜂蜜 今無 紫草 今無 人蔘 今無 漆 今無 松蕈 今無
新增
席 柴胡 白朮 蒼朮 桔梗 澤瀉
0 橋梁
石橋 在縣館門外
0 關阨
黃山城 在縣東四十里俗名城洞不知築於何代而東南北皆絶壁西面底微如甁項石築其上周回四十 五尺防守之固眞萬夫莫開者也城內東西七八里南北五里東麓有宮基石築頹圯
0 題詠
俗帶召文風 文簡公 金宗直送兪好仁詩侍講分符地川原僅一同人多洪術裔云云蚕課何須急鷄夕亦 有功北慺佳句在酬詠韻應窮 風門夏日永 金宗直詩萬古蒼厓底云云星辰移道觀瓊壁屬胡僧遣神沖 沖鑿供㕑片片凝剩爲賓祭用不獨洗尖蒸
0 旱田
元帳付六千六百九十結九十四負三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二千九百二十三結二十負八束己卯時起三千七百六十七結七十三負五束
0 水田
水田 元帳付二千一百三十三結四員七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八百二十九結四十六夏六束己卯時起一千三百三結五十八頁一束
0 進貢
生雉 乾雉 生猪 人蔘 柴胡 桔梗 白茯苓 赤茯苓 白芍藥 赤芍藥 山藥 乾地黃 紫草茸 淸蜜 胎水 斑猫 赤箭 白茯神 蒲黃 金銀花 甘菊 麥門冬 蓮翹 五味子 當歸 川芎 槐實 苽蔞仁 滿花席 雜彩花席 滿花方席 別紋上席 別紋席 歲幣花席 黃花席 彩花席 草席
0 糶糴
元會米二千一百七十二石五斗九合二夕雜穀一萬四千八十三石三斗三刀四合賑色米一千一百六十二石十三斗六刀一合八夕雜穀六千四百七十二石十四斗二刀五合一夕常平廳米一千八百十石七斗五刀六合四夕雜穀二萬四千八十七石七斗一刀二合私賑雜穀二千九百五十石八斗九刀八合五夕別會米一百八十六石十斗九刀八合四夕雜穀三千一百六十九石三斗五刀一合二夕十月關倉十二月封庫己卯條爲准
0 田稅
作木九十三同九疋九尺三寸位木九同二十三疋三月收捧四月由鳥嶺路至樓巖裝船八曩島六日達于京納于戶曹而位木則納于宣惠廳己卯條爲准
0 大同
作木一百六十一同四十七疋二十尺錢木參半田稅一時上納惠廳米八十石五斗儲置本縣一從惠廳區劃多寡無常己卯條爲准
0 均稅
田稅條木六同二十六疋二十九尺八寸結錢二千八百七十一兩五錢大同條木十一同四十七疋二十尺錢木參半收捧裝載道路竝與田稅同納于均役廳選武軍官布二同三十疋九月收捧十月上納于均役廳己卯條爲准
0 俸廩
衛祿位四十結木八疋菉豆二石十四斗六刀七合六夕白米八石十斗二刀粘米四石五斗一刀八合公須位十五結木三疋菉豆六斗二刀七合白米三石五斗八刀二合粘米一石十二斗九刀一合需米三百二十五石民夫所出每夫柴一丹炭二斗蒿草二十五斤雉一首鷄式一首捧用
0 軍兵
訓鍊都監砲手保三百一名御營正軍九十二名資保九十九名官納保三百六十一名禁衛正軍三十七名資保四十一名官納保一百四名兵曹騎兵六百五十三名步兵三百四十二名別騎兵三十一名禁軍保一百六十七名袱直七名扈輦隊保十名內吹保五名補充隊軍六名掌樂院樂生二名樂生保十五名樂工保二十三名可饔匠人一百十九名工曹匠人一百三十九名牙兵步軍一名主鎭軍八名烽軍五百名水軍七百四十五名武學四十八名炭射夫二十二名炭匠六名束伍別隊隨率竝一百四十五名保二百八十四名步軍隨率并九百五十五名保九百五十五名
* 현감(縣監) 종6품 (35고을) 무관직. 兵馬節制都尉 겸직
* 훈도 : 1 명
* 서원 : 18 명
* 일수 : 28 명
* 연일(延日).영일(迎日) 左道. 9일.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 다.
異名: 烏川(오천). 臨汀(임정). 오량우(烏良友)
* 연일현감겸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
* 연일훈도. 종9품.
동쪽으로 해안까지 14리이고, 장기현(長鬐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10리이며, 서쪽으로 경주부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으로 흥해군(興海郡)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으로 일명 오량우현(烏良友縣)이라고도 했다. 경덕왕(景德王) 때 임정현(臨汀縣)이라 개칭하여 의창군(義昌郡)의 속현으로 하였고,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는 경주에 속했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를 두어 군을 관장한 만호가 겸하게 했고, 본조 태종 때, 진을 두어 병마사가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했으며, 세종(世宗) 때, 병마첨절제사로 개칭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근오지현(斤烏支縣)ㆍ임정현(臨汀縣)ㆍ오천현(烏川縣)ㆍ오량우현(烏良友縣).
【성씨】 본현 정(鄭)ㆍ성(成)ㆍ주(周), 주(朱)ㆍ김(金)ㆍ최(崔) 모두 내성(來姓)이다.
【형승】 해적들이 내왕하는 요충지이다 이숭인(李崇仁)의 〈신성기(新城記)〉에 있다.
【산천】 운제산(雲梯山) 현의 남쪽 1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진전산(陳田山)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대흥산(大興山) 현의 북쪽 23리에 있다. 사화랑산(沙火郞山)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사현(沙峴) 현의 동쪽 17리에 있다. 동을배곶(冬乙背串) 현의 동쪽 73리에 있다. 장기현(長鬐縣) 조에도 있다. 향점(杏岾)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바다 현의 동쪽 14리에 있다. 주진(注津) 현의 북쪽 15리, 즉 경주 안강현(安康縣) 형산포(兄山浦) 하류에 있으며, 동쪽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년 겨울이면 청어가 반드시 맨 먼저 여기에서 잡힌다 하는데, 먼저 나라에 진헌한 다음에야 모든 읍에서 그것을 잡았다. 잡히는 것의 많고 적음으로 그 해의 풍흉을 짐작했다 한다. 임곡포(林谷浦) 현의 동쪽 27리에 있다. 통양포(通洋浦) 현의 북쪽 22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만호영(萬戶營)이 있었으나 지금은 흥해군(興海郡) 칠포(漆浦)로 옮겼다. 벌지(伐池) 현의 동쪽 3리에 있다. 죽도(竹島) 현의 북쪽 16리에 있으며 대밭이 있다.
【토산】 꿀[蜂蜜], 죽전(竹箭) 대흥산(大興山)에서 난다. 송이[松蕈]ㆍ해달ㆍ방어(魴魚)ㆍ연어(鰱魚)ㆍ전복[鰒]ㆍ방풍(防風)ㆍ넙치[廣魚]ㆍ대구(大口)ㆍ홍합(紅蛤)ㆍ은어[銀口魚]ㆍ청어(靑魚)ㆍ김[海衣]ㆍ미역[藿], 벼룻돌[礪石] 운제산(雲梯山)에서 나는데 그 품질이 아주 좋다. 황어(黃魚)ㆍ전어(錢魚)ㆍ상어[鯊魚]ㆍ송어(松魚)ㆍ홍어(洪魚)ㆍ고등어[古刀魚].
【성곽】 읍성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2천 9백 40자, 높이는 12자이고 안에 3개의 우물이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에, “일찍이 《맹자》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단 대목이 있었다. 그렇다면 성곽(城廓)이나 성지(城池)가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말단적인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춘추》의, ‘호뢰(虎牢)에 성을 쌓다.’란 대문[策]을 읽음에 이르러서 그 서법(書法)을 보면 옳게 여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 성현의 말씀들은 본말과 선후의 순서가 있으니, 어느 것이고 세도를 위해 마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중원(中原)에 봉사(奉使)한 적이 두 번이었는데, 지나는 길에 비록 몇 집 안 되는 고을이라도 역시 모두 보장하는 것이 있음을 보았다. 지형을 점거하고 성을 쌓는 일을 어찌 적게 여길 수 있겠는가. 우리 동방에도 국가제도가 있고 중국을 배울 줄 알았지만, 소박 간략하고 문채가 적어, 선조(先祖) 이래로 백성을 휴양하고 생식함에 있어서 백성들이 태평한 그 속에 살고 죽고 한 지 4백 년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문(文)으로 다스림을 제어할 수 없었고, 무(武)로는 난을 평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다 섬의 고약한 것들이 감히 연변에 침입하였으니. 경인년에 침입한 왜적이 바로 그것이다. 짓밟혀서 경신ㆍ신유년 두 해 동안에 병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 치안이 극진하게 되면 사세가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적을 막고 방비하는데 있어 그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일(迎日)은 계림(鷄林)의 속현으로, 동쪽 해안에 위치해 있고, 그 치역(治域)은 또 통진포(通津浦)에 임하고 있으니, 실로 해적들이 내왕하는 요충이다. 경인년에 병들기 시작함으로부터 30년이 지났으니 생산하고 모은 것이 쓰러버린 듯하였다. 기사년에 삼도 도체찰사가 현의 옛 치역을 지나다가 두루두루 살펴보고 위연(喟然)히 탄식하며, ‘이것을 어찌 왜적에게 주어서 그들의 좋은 일이 되게 할 수가 있겠느냐.’ 하고는 축성(築城)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으나 얼마 후엔 지반이 좁은 것같다 하며 구촌(丘村)에 장소를 옮겨 흙으로 쌓기에 힘썼지만 비가 오면 무너졌다.
경오년 오월에, 익양(益陽) 최후(崔侯)가 만부장(萬夫長)으로 여기에 오게 되어 현의 일을 겸하여 맡게 되자, 정령(政令)이 크게 실행되어 백성들이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즐겼다. 최후가 이에 도관찰사에게, ‘우리 고을이 힘입어 존재하는 바는 성인데, 성이 이미 무너졌으니, 이는 우리 고을이 없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라고 말했다. 관찰사도 최후의 말을 옳게 여기고, 옆 고을에 명령을 내려 천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고, 인해서 전 선공령(繕工令) 정인생(鄭麟生)을 시켜 최후와 함께 일을 감독하게 했다. 최후는, 생각하기를, ‘공은 오래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러기엔 돌로 쌓는 것이 낫다.’ 하고 이에 선부(船夫)를 보내어 형산(兄山)의 돌을 떠서 날라다가 성을 쌓으니, 두 길 남짓하고 둘레는 모두 몇 리나 되었다. 남북에 두개의 문을 두었는데, 문에는 각각 문루(門樓)를 세웠으니, 남쪽의 것은 대개 손님과 나그네를 맞이하고 갈고 심는 것을 시찰하는 것이요, 북쪽은 바다를 내다보고 간악한 도적을 살피자는 것이었다. 7월에 착공하여 9월에 준공하니, 이때부터 읍성에는 전에 떠났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고, 새로 오는 자도 연이어서 성 둘레에는 황폐한 전답이 없어졌다.
금년 가을, 최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기문을 써주오.’ 하고 또 말하기를, ‘두 문루를 이름지으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최후가 바야흐로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고 있는 때를 만나서, 조정에서 뽑혀 이 먼 곳 백성을 맡아서 위문하고 보호하는 방법과 막고 보위하는 제도가 모두 칭찬하여 말할 만하니, 모든 역사에 실려 있는 바에 비교해 보면 그의 발길이 미친 바는 하나도 부끄러울 것 없는 것이다. 나는 병들었고, 게을러졌다. 비록 그러나 남의 잘한 일을 말하기 좋아함은 본시 나의 뜻이다. 뿐만 아니라, 최후의 선친 시어(侍御)는 내가 제생(諸生)으로 있을 제 모시었으니, 그러므로 최후의 청함에 사양하지 못하겠노라. 문루(門樓)의 이름을 지으라는 일은, 내 병이 조금 낳으면 말을 타고 놀러 가서 최후를 따라 누 위에 올라가서 지도를 살펴 보고, 또 지형을 파악한 다음, 그때 가서 마땅히 붓에 먹물 찍어서 쓰려 한다. 최후의 이름은 자원(自源)이요, 벼슬 품계는 봉순대부(奉順大夫)이다. 훤출한 마음으로 공을 세우고 이름내기를 좋아한다. 도관찰사는 낙안 김씨(樂安金氏)로 이름은 주(湊)이고,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종실(宗室)로 이름은 강(康)이다.” 하였다.
【봉수】 동을배곶(冬乙背串) 봉수 동쪽으로 장기현(長鬐縣) 장곡(獐谷)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흥해군(興海郡) 지을산(知乙山)에 응한다. 사화랑산(沙火郞山) 봉수 서쪽으로 경주 형산(兄山)에 응하고, 동쪽으론 장기현 뇌성산(磊城山)에 응한다.
【누정】 의운정(倚雲亭) 객관의 북쪽에 있다.
인빈당(寅賓堂) 의운정의 서쪽에 있다. 성화(成化) 경자년에 현감 어득호(魚得湖)가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문에, “동녘 바닷가에 고을이 있으니, 그 이름은 영일(迎日), 혹은 임정(臨汀)이라 하는데, 대개 신라 동편 가에 위치한다. 신라 초기엔 혼돈(渾沌)이 개착(開鑿)되지 않은지라. 제도가 들을 만한 것이 없더니, 그 중엽에 이르러 현군(賢君)이 잇달아 일어나서 처음으로 중국과 통하여 상고하고 연구해서 날로 문화가 발전하여 아침 해와 같은 것은 《국어(國語)》에 실린 것과 같고, 춘분(春分)에 아침 해를 맞고[賓出], 추분(秋分)에 저녁 해를 보내던[餞納] 일들은 〈요전(堯典)〉에 적혀 있다. 이는 옛 제왕들이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에게 때를 정하여 주었던[授入時] 일인 줄로 여겨지는 바, 그 정치라는 것은 이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비록 조종(祖宗)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도 또한 옳은 것을 따라서 하는 것이다. 관제에는 태사(太史 천문(天文)과 역사를 맡은 벼슬)를 두어 대(臺)를 높이고, 별을 관측[瞻星]하여 역상(曆象)과 규측(圭測)의 제도가 따라서 점점 갖추어졌으니, 그때에 있어서는 이 현(縣)이 그 양곡(暘谷)의 차례에 당해 있으므로, 이름을 영일(迎日)이라고 한 것은 이 까닭이었다. 그런데 고려 태조(太祖)는 국가가 교체되는 즈음에 있어서 임정(臨汀)이란 이름을 버리고 지금의 이름으로 복귀시켰으니, 어찌 까닭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현의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도기야(都祈野)가 있고 일월지(日月池)가 있어서 지금까지 사람들은 신라 때 제천(祭天)하던 곳이라 하니, 이것이 그 명확한 증거인데, 속설에 전하는 바 영오(迎烏)와 세오(細烏) 부부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 적당하지 아니한가. 신라 사람들의 괴상한 일 좋아함이 이와 같아 증빙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성화(成化) 13년 중원(中原) 출신 어득호(魚得湖) 후(侯)는 무예와 관리의 재능으로 이곳에 인을 맡아 가지고 와서 덕망이 두터우니, 사람들이 믿으며 바다는 편안하고 농사도 풍년이 들었다. 늘 의운정을 배회하면서 훌륭한 경개를 구경하더니, 또 빈객으로 놀러 오는 이들을 이곳에서 따뜻하게 하고 시원하게 해주기 위해 다시 정자 오른편에 당(堂)을 지어 냉방과 난방을 갖추기도 했다. 바르고 꾸미는 것이 끝나자 나한테 기문을 써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내 일찍이 울산(蔚山)에 부임하여 군사를 사열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현에 이르러서 소위 의운정에 올랐는데, 고을 사람들 말에, 이것은 옛날 이사군(李使君) 지명(知命)이 세운 것이라 한다. 내 멀리 바라보니, 남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산이 있었는데, 운제산(雲梯山)이라 한다. 높이 솟아 있고 나무가 울창하였으며, 구름을 뿜고 안개를 빨아들이는데 산중에는 소성거사(小性居士)의 유적이 있다 한다. 동북쪽으로 7리를 가면 큰 바다가 있는데, 거센 파도가 하늘에 맞닿았고, 신기루가 저자를 이루었으니, 곧 일본의 서녘 바다이다. 산과 바다의 사이에는 전원이 넓고 크고, 내와 못이 있으며, 겹겹이 쌓인 곳에 언덕이 있어 그 이름 피막(皮幕)이요, 정자 있어 그 이름 대송(大松)이다. 모래톱은 흰빛을 발하고, 송죽(松竹)은 푸른빛을 보내며, 뽕나무와 삼으로 울타리하여 멀고 가까운 것 비추고 둘려서 한데 어울리고 서로 도와서 이 성문 밖에 재주를 펼쳐 놓았다. 저물어 자고 다음날 이른 새벽, 정자 위에 기대서서 고개 들고 동녘을 바라보니 구름과 물이 한 빛이라, 날이 샐락말락할 무렵이었다. 금시에 분홍빛이 수십장 치솟더니, 태양이 용솟음치며 하늘에 떠오른다. 나는 깜짝 놀라, ‘오늘의 장관이야 말로 정말 고을의 이름과 부합되는도다.’ 라고 탄식했다.
이후는 선배이며 또 호걸스런 선비이다. 그래서 그의 규획한 바가 이와 같이 천기의 깊은 데까지 볼 줄 알았다 하겠다. 지금의 어후는 이후보다 약 40년 뒤에 왔지만, 이후가 미처 못한 것을 윤색(潤色)하였으니, 이 당(堂)의 이름을 굳이 누정(樓亭)의 이름과 같게 할 필요는 없고 인빈당(寅賓堂)이라고 편액을 써서 현의 이름에 짝지어 본다. 아, 천하에 해변이 한 군데가 아니건만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우이[嵎夷]를 측후소(測候所)로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해변이 한 군데가 아니지만 계림(鷄林)의 임정(臨汀)을 해 맞는 곳으로 삼았으며, 어후가 비록 희씨(羲氏), 화씨(和氏) 같은 측후관도 아니지만 6년 동안을 어느 하루도 부상에서 돋는 해를 맞이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내가 한 말이 적중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어후께서 만약 마음에 드신다면 이 기문을 전해도 좋고, 아니면 다시 당세의 훌륭한 문장가를 구하여 기록함이 좋을까 한다.” 하였다.
대송정(大松亭) 현의 동쪽으로 7리 떨어진 곳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삼아 백사장이 있는데 푸른 소나무 수백 그루가 그 사장을 덮고 있다.
【학교】 향교 현의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역원】 대송역(大松驛) 현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혜제원(惠濟院) 현의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미라원(阿彌羅院) 현의 북쪽으로 12리에 있다. 주진원(注津院) 주진(注津)의 북녘 기슭에 있다.
【불우】 원효사(元孝寺)ㆍ오어사(吾魚寺) 모두 운제산(雲梯山)의 동쪽 항사동(恒沙洞)에 있다. ○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신라 때, 중 원효(元曉)가 혜공(惠公)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서 먹다가 물 속에 똥을 누었더니 그 물고기가 문득 살아났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고기(吾魚)’라고 말하고, 절을 짓고 인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자장사(慈藏寺) 운제산(雲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동쪽으로 8리 떨어진 곳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대왕암(大王巖) 운제산 산마루에 있으며, 현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바위 틈에서 샘물이 솟아 나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곧 비가 내렸다 한다.
일월지(日月池) 현의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도기야(都祈野)에 있다. ○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때에 동해 가에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랑(迎烏郞)이라 했고, 아내는 세오녀(細烏女)라 했다. 하루는 영오가 바닷가에서 해조(海藻)를 뜯다가 갑자기 표류하여 일본의 작은 섬에 이르러서 왕이 되었고, 아내는 그 남편을 찾아 일본에 가서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자, 태양을 관측하는 자가 왕에게, “영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기를 탄 사람들인데, 이번에 일본에 갔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있는 것입니다.” 라고 아뢰니,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두 사람을 데려오라 했다. 그랬더니 영오는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이르러 곧 세오가 짠 비단을 부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하오.” 하여 사자가 돌아와 그 말대로 아뢰어 못[池]에서 제사하니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내었다. 드디어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두고는 따라서 그 못을 이름 지어 일월지(日月池)라 했고, 현의 이름을 영일(迎日)이라 했다 한다. ○ 이제 상고해 보면 고려 초에 임정현(臨汀縣)의 이름을 고쳐 영일현(迎日縣)이라 했으니, 신라 아달라왕 때에 비롯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영오의 이야기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와 권근(權近)의 《동국사략(東國史略)》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삼국유사》에만 수록돼 있으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고읍성(古邑城) 현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9백 자이나 지금은 없어졌다. 도지부곡(都只部曲)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고현성(古縣城) 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둘레가 1천 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 고려 이인부(李仁夫) 통양포(通洋浦)의 만호로서 현의 감무를 지냈다. 군사에 정숙(整肅)히 했고, 정치를 공평히 하고, 송사(訟事)를 이치에 합하게 하니, 비록 우부(愚婦)라 해도 그의 덕망에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인부의 아버지가 군사에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기를 간청하고 옷을 벗고 형을 받으려 하니 그것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인물】 고려 정습명(鄭襲明) 성격이 대범하고 기이하며 위대하였고, 힘써 배워 글을 잘하고 향공(鄕貢)에 급제하였다. 인종(仁宗)조에 여러 번 벼슬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고,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추밀원 지주사에 올랐다. 선조(先朝)의 부탁이 있다고 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왕이 그를 꺼리는 데다가 김존중(金存中)과 정함(鄭諴)이 밤낮으로 그를 헐뜯었다. 마침 습명이 병을 고하자, 김존중에게 임시로 그 직을 대신하게 하니, 습명이 왕의 뜻을 알아차려 독약을 먹고 죽었다. 정몽주(鄭夢周) 습명(襲明)의 후예이다. 사람됨이 매우 호방하고 뛰어나며,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이 있었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는데, 성리학(性理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깊이 얻은 바가 있었다. 공민왕(恭愍王) 9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잇따라 삼장(三場)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드디어 제1인자로 발탁되었다. 예문관 검열에 뽑혀 보임되었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삼한 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에 이르렀고, 익양군 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때엔 국가에 변고가 많았고, 기무(機務)가 번다하였으나, 큰 일을 처리하고 큰 의혹을 처결하는데 말소리와 얼굴빛을 동요하지 아니하고, 왼편과 말하고 오른편에 대답하는데 모두가 합당하게 처사하였다. 많이 갱신하고 시설하였는데 당시에 왕좌(王佐)의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뒤에 우리 태조(太祖)를 방해하고자 꾀하다가 조영규(趙英珪)에게 피살되었다. 본조에서는 그 충절을 가상하게 여겨,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益陽府院君)을 내리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며, 그의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아들 종성(宗誠)은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렀고, 종본(宗本)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정사도(鄭思道) 나이 19세에 과거 급제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과 성균관 사예를 역임했고, 대언(代言)에 발탁되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졌다.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모든 천신(天神)에게 빌어 청하는 일이 있는 경우엔, 왕은 반드시 정사도를 임명하였으니, 그 정직함을 취택함이었다.
『신증』 【효자】 본조 전희(田禧) 부모가 죽자 3년 동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고, 뒤에는 그대로 무덤 곁에 살면서 조석으로 곡을 하며 제사하기를 오랜 뒤에도 처음과 같았다. 일이 알려지자 정려하였다.
【제영】 일금상기재초루(一襟爽氣在譙樓)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산나물, 물고기로 진수성찬을 벌여 놓고, 들바가지에 촌막걸리로 오래 못 돌아간 정 위로하네. 한밤에 깊은 시름 나그네 꿈을 쫓으니, 한소매 시원한 바람 문루에 감도누나. 흥이 나면 붓을 들어 시편을 거듭읊고, 늙어가며 정에 겨워 눈물 자주 흘리네. 이 설음 씻을 길 종당엔 희망 있으련만, 하늘이 기꺼이 이 몸을 구제해 줄 것인지.” 하였다.
일성장적석양루(一聲長笛夕陽樓) 정흥(鄭興)의 시에, “고향이 황폐한 것을 노인들은 부끄럽다지만, 나는 기이한 경관을 사랑해서 또 좀 머물겠네. 두어 폭의 외로운 범선 남포 언덕이요, 한 가락 긴 피리 석양의 다락일세. 부생(浮生)이란 뒤숭숭한 것, 나그네도 다감하고, 지난 일은 유유한 것, 강만이 흐르누나. 흥폐가 본시 오가는 것이라면, 이번엔 백성에게 부요하기 기대하네.” 하였다.
거해만만제천원(巨海漫漫際天遠) 유관(柳觀)의 시에, “앉아서 청산을 마주하면, 다시 부끄러워지네. 하는 일없이 녹만 축내며 오래도 머물러 있네. 시를 지으려다 못 이루고 되려 붓을 던지고, 경개 즐겨 구경하다가 돌아갈 것 잊고 홀로 누대에 기대본다. 큰 바다는 넓고 넓어 하늘에 닿은듯 멀고, 장강(長江)은 출렁출렁 성을 끼고 흘러가네. 야인(野人)의 정회로 푸른 물결 달빛 아래에 오래 앉았으니, 파도 위의 백구야 너는 나를 이해하려느냐.” 하였다.
야활천수벽(野闊天垂碧) 정예(鄭枻)의 시에, “넓은 바다 고현(古縣)에 이어 있으니, 연기와 물결 먼 하늘에 닿았도다. 들이 넓으니 하늘은 푸른 들과 맞닿았고, 파도가 맑으니 해가 붉은 빛을 물들였네. 섬의 왜적들 모두 자취를 감추어서, 마을 풍속 다 농사 일로 돌아갔네. 성지(城池)의 견고함이 무엇에 필요하랴. 인화(人和)만이 성화(聖化)에 통하는 길인 것을.” 하였다.
강원수탄공(江遠水呑空) 강진덕(姜進德)의 시에, “땅이 외지니 연기가 바다에 닿았고, 강이 멀리 흘러 물이 하늘을 삼킨 듯하이. 들이 넓어서 봄바람 담담하고, 처마가 비었으니 아침 햇살 붉게 비친다. 옛날에 일찍이 백전(百戰)을 겪었더니, 이제는 삼농(三農 평지ㆍ산ㆍ못에서 경영하는 농업의 총칭)으로 돌아갔네. 성군의 은택은 동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서, 변방의 구석까지 대도가 절로 통하였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서면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남면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고현(古縣) 동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역면(驛面) 동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고읍(古邑)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부산(夫山)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70리인데, 장기현 북쪽 경계를 넘어서 동을배곶의 바닷가에 있다. ○ 도지(都只)부곡은 북쪽으로 8리에 있다.
【진보】 혁폐 통양포진(通洋浦鎭) 북쪽으로 22리에 있으며 수군만호를 두었다가, 뒤에 흥해군(興海郡) 칠포에 옮겼다.
【창고】 읍창(邑倉)ㆍ포항창(浦項倉) 북쪽으로 20리, 통양포 주진(注津) 하류에 있다. 영종(英宗) 8년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북관(北關)의 자본으로 창(倉)을 설치하였으며, 별장을 두어서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본도 감사 조현명(趙顯命)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진도】 주진(注津) 북쪽으로 15리, 경주 형산포(兄山浦) 하류이며 흥해로 통한다.
【사원】 오천서원(烏川書院) 선조 무자년에 세웠으며 광해주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정습명(鄭襲明) 영일 사람이다. 고려 의종(毅宗) 신묘년에 약을 마시고 죽었으며, 벼슬은 추밀원 지주사였다. 정몽주 습명의 후손이다. 문묘 편을 보라. 정사도(鄭思道) 고려 때 사람이며,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고, 오천군(烏天君)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철(鄭澈)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본관은 영일이다. 벼슬은 좌의정이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 위 두 사람은 영조 경신년에 별사(別祠)를 세워 그들을 배향하였다.
* 장기(長鬐) 左道. 9일 반.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異名: 只沓(지답). 鬐丘(기구). 蓬山(봉산)
* 장기현감겸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
* 장기훈도. 종9품.
동쪽으로 해안까지 6리, 남쪽으로 경주부 경계까지 16리, 서쪽으로 영일현(迎日縣)의 경계까지 28리, 북쪽으로 영일현의 경계까지 5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지답현(只沓縣)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기립현(鬐立縣)이라 고치고 의창군(義昌郡)의 속현으로 하였으며,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경주부(慶州府)에 속하게 했다. 공양왕(恭讓王) 때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때 지형이 바다와 접했다 해서 무신(武臣) 가운데 벼슬이 높은 자만을 임명하여 진수(鎭守)하게 했는데, 드디어는 지현사(知縣事)가 되었고, 뒤에 다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지답현(只沓縣)ㆍ기립현(鬐立縣), 봉산현(峯山縣) 봉(峯)자는 봉(蓬)으로 쓰기도 한다.
【성씨】 본현 정(鄭)ㆍ오(吳)ㆍ안(安)ㆍ임(任)ㆍ신(申), 이(李)ㆍ최(崔)ㆍ배(裵)ㆍ김(金) 모두 내성(來姓)이다.
【산천】 거산(巨山) 곧 봉산현의 치소(治所)로서 옛 성에서 이 산의 마루에 옮겼다. 현의 서쪽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묘봉산(妙峯山) 현의 서쪽 18리에 있다. 뇌성산(磊城山) 현의 북쪽 19리에 있다. 망해산(望海山) 현의 서쪽 19리에 있다. 시령(柿嶺) 현의 서쪽 16리에 있다. 천을이천(淺乙伊川) 현의 북쪽 12리에 있다. 동을배곶(冬乙背串) 현의 북쪽 66리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양포(梁浦) 현의 남쪽 9리에 있다. 송길포(松吉浦) 현의 북쪽 24리에 있다. 바다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토산】 뇌록(磊錄 회록색(灰錄色)의 도료(塗料)) 뇌성산(磊城山)에서 난다. 넙치[廣魚]ㆍ해삼(海蔘)ㆍ상어[鯊魚]ㆍ대구(大口)ㆍ방어(魴魚)ㆍ청어(靑魚)ㆍ송어(松魚)ㆍ전복[鰒]ㆍ홍합(紅蛤)ㆍ미역[藿]ㆍ김[海衣]ㆍ해달(海獺)ㆍ송이[松蕈]ㆍ마황(麻黃), 정분(丁粉) 동을배곶에서 난다. 방풍(防風).
【성곽】 읍성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2천 9백 80자이고, 안에 4개의 우물과 2개의 못이 있다.
【관방】 포이포영(包伊浦營) 현의 북쪽으로 17리 떨어진 곳에 있다. ○ 수군만호 1인.
【봉수】 뇌성산(磊城山) 봉수 서쪽으로 영일현(迎日縣)의 사화랑산(沙火郞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대곶에, 남쪽으로는 복길(卜吉)에 응한다. 대곶(大串) 봉수 현의 북쪽 48리에 있으며, 남쪽은 뇌성산에 응하고, 북쪽은 사지에 응한다. 장곡(獐谷) 봉수 현의 북쪽 34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사지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영일현 동을배곶에 응한다. 사지(沙只) 봉수 현의 북쪽 55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곶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장곡에 응한다. 복길(卜吉) 봉수 현의 남쪽 18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경주(慶州) 독산(禿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뇌성산에 응한다.
【누정】 자봉정(紫鳳亭)ㆍ욕일당(浴日堂) 모두 객관의 동쪽에 있으며, 성화(成化) 신축년에 현감 최영(崔泳)이 지었다.
【학교】 향교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봉산역(峯山驛) 현에서 남쪽으로 3리에 있다. 모이현원(毛伊峴院) 현에서 서쪽으로 23리에 있다. 평안원(平安院) 현의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불우】 석남사(石南寺)ㆍ평등사(平等寺)ㆍ영취사(靈鷲寺) 모두 묘봉산(妙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 내에 있다. 성황사 현의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읍성 현의 남쪽에서 2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다. 둘레는 4백 68자이고, 높이는 12자이며, 그 안에 샘이 2개 있다. 신촌부곡(新村部曲) 현에서 북쪽으로 12리에 있다. 팔오곡부곡(八於谷部曲) 현의 서쪽으로 7리에 있다. 허오리부곡(許於里部曲) 현의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인물】 고려 오방우(吳邦祐) 현의 아전으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5도(道)의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했다.
【제영】 고헌압해의산성(高軒壓海倚山城) 홍일동(洪逸童)의 시에, “높은 동헌이 바다를 누르고 산성에 의지해 있는데, 피곤한 나그네 난간에 기대 서니 눈앞이 문득 밝아지누나. 비 개자 맑은 아지랑이 북악(北嶽)에 비껴 있고, 구름 걷자 아침 해가 동해에 솟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 끝이 15리이다. 남면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서면 처음은 10리, 끝은 65리이다. 북면 처음은 10리, 끝은 65리이다. ○ 신촌(新村)부곡은 북쪽으로 12리, 팔오곡(八於谷)부곡은 서쪽으로 7리, 허오리(許於里)부곡은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진보】 혁폐 포이포진(包伊浦鎭) 북쪽으로 17리이며, 옛날 수군만호를 두었었다가 선조 25년에 동래부에 옮겼다.
【봉수】 발산(鉢山) 북쪽으로 60리이다. 복길(福吉) 남쪽으로 18리에 있다.
【목장】 동을배곶(冬乙背串) 울산 목장에 소속되었다.
* 기장(機張) 左道. 11일. 서울과의 거리는 9백 40리이다
이명: 거성(車城).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
* 기장현감겸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 임기 3년.
* 기장훈도. 종9품.
동쪽으로 해안까지 8리, 남쪽으로 동래현(東萊縣) 경계까지 14리, 서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32리, 북쪽으로 울산군(蔚山郡) 경계까지 4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백 7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동래군의 속현으로 두었다가 뒤에는 양주(梁州)에 속하게 했으며, 고려 현종(顯宗) 때에는 울주(蔚州)에 붙였다.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 와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ㆍ차성(車城).
【성씨】 본현 이(李), 전(全) 김(金)이라 하기도 한다. 정(鄭), 허(許)ㆍ박(朴) 모두 내성(來姓)이다.
【산천】 탄산(炭山) 현의 서쪽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바다 현의 동남쪽 5리에 있다. 무지포도(無只浦島) 현의 남쪽 4리에 있다. 죽도(竹島) 현의 남쪽 8리에 있다. 이을포(伊乙浦) 현의 동쪽 6리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가을포(加乙浦) 현의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동백포(冬柏浦) 현의 동쪽 9리에 있다. 공수포(公須浦)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기포(碁浦) 현의 남쪽 7리에 있으며, 검은 바둑돌이 생산되므로 붙인 이름이다. 『신증』 운봉산(雲蜂山)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백운산(白雲山)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
【토산】 넙치[廣魚]ㆍ전자리상어[占察魚]ㆍ청어(靑魚)ㆍ대구(大口)ㆍ홍합(紅蛤)ㆍ전복[鰒]ㆍ홍어(洪魚)ㆍ상어[鯊魚]ㆍ전어(錢魚)ㆍ고등어[古刀魚]ㆍ김[海衣]ㆍ미역[藿]ㆍ가사리(加士里)ㆍ참가사리[細毛]ㆍ해삼(海蔘)ㆍ석류(石榴)ㆍ감[枾]ㆍ유자[柚], 오해조(烏海藻) 가을포(加乙浦)에서 난다. 대ㆍ방풍(防風).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3천 1백 97자이고, 높이는 12자이다.
【관방】 두모포영(豆毛浦營)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 수군만호 1인. 『신증』 정덕(正德) 경오년에 비로소 석성(石城)을 쌓았으며, 둘레는 1천 2백 50자이고, 높이는 10자이다.
【봉수】 남산 봉수(南山烽燧) 남쪽으로 동래현 간비오산(干飛烏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울산군(蔚山郡) 임랑포(林郞浦)에 응한다.
【누정】 척서루(滌署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성 안에 있다. 『신증』 지금은 현의 북쪽 3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역원】 아월역(阿月驛) 현의 북쪽 48리에 있다. 신명역(新明驛) 성의 서쪽으로 1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읍성(邑城) 지금 치소의 동북 5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2백 8자이다. 고촌부곡(古村部曲)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결며부곡(結㫆部曲)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사량촌부곡(沙良村部曲)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사야부곡(沙也部曲) 현의 동쪽 3리에 있으며, 지금은 사야촌(沙也村)이라 한다.
【명환】 고려 김이(金怡) 밀직부사로 있다가 감무(監務)로 좌천되었다. 이세황(李世黃) 이인로(李仁老)의 아들로, 감무(監務)를 지냈다.
『신증』 【효자】 본조 옥종손(玉從孫) 현리(縣吏)의 아들로, 11세 때 아버지가 악질을 앓자,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먹였는데, 이 말이 보고되어 상으로 벼슬을 내렸다.
【제영】 해장천욕진(海長天欲盡) 홍자원(洪子圓)의 시에, “바다가 기니 하늘이 끝나려 하고, 산이 머니 눈이 더 밝은 것 같구나.” 하였다. 어점취연기(漁店炊煙起) 이인전(李仁全)의 시에, “고기 잡는 마을 주막에 밥짓는 연기 오르고, 마을 동산에는 죽순이 돋는다.” 하였다. 낙일동운유념념(落日凍雲猶淰淰)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달려 다니는 병과 늙음이 서로 겹쳐서, 동쪽 마루에 와서 앉으니 발[簾] 걷기에도 귀찮구나. 지는 해에 먹구름 아직도 찌푸리고, 산들바람에 이슬비 더욱 가늘게 내리누나. 산허리로 난 길은 양의 창자처럼 험악하고, 개포 어구의 먼 봉우리는 말 귀처럼 쭝긋하다. 적막한 나그네 회포 긴 밤이 구슬픈데, 성문에서 치는 북소리는 밤 늦은 것 알려온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 32년에 동래에 합하였다 왜구로 소탕되고 잔탕되어서이다. 광해주 9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방면】 현내 끝이 10리이다. 동면 처음은 3리, 끝은 15리이다. 남면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중북(中北) 처음은 20리, 끝은 49리이다. 하북 처음은 22리, 끝은 40리이다. 상서(上西) 처음은 10리, 끝은 25리이다. 하서 처음은 25리, 끝은 45리이다. ○ 고촌부곡ㆍ결미(結彌) 부곡은 서쪽으로 10리, 사량촌부곡은 동쪽으로 5리, 사야부곡은 동쪽으로 3리인데, 지금의 사야촌이다.
【성지】 임랑포성(林郞浦城) 북쪽 45리 해변이다. 왜성(倭城) 이상 두 성은 일본인이 쌓은 것이다.
【진보】 혁폐 두모포진(豆毛浦鎭) 동쪽으로 7리이며, 중종 5년에 성을 쌓았다. 둘레가 1천 2백 50척이며, 옛날엔 수군만호를 두었다가 선조 25년에 동래로 옮겼다.
【봉수】 아이(阿爾) 북쪽으로 20리이다.
【토산】 검은 바둑알 기포(碁浦)에서 난다.
【누정】 식파루(息波樓)ㆍ공진루(拱辰樓) 성의 남쪽 문루이다.
* 청하(淸河) 左道. 9일 반.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異名: 아자(阿子). 덕성(德城). 해아(海阿).
* 청하현감겸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
* 청하훈도. 종9품.
동쪽으로 해안까지 7리이고, 남쪽으로 흥해군(興海郡) 경계까지 11리이며, 서쪽으로 경주(慶州) 신광현(神光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 영덕현(盈德縣) 경계까진 19리이다.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아혜현(阿兮縣)으로, 신라 때 해아현(海阿縣)으로 개칭하여 유린군(有隣郡)의 영현(領縣)으로 두었는데, 고려조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경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 들어와서 태조(太祖) 때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아혜(阿兮)ㆍ해아(海阿)ㆍ덕성(德城).
【성씨】 본현 이(李)ㆍ김(金)ㆍ명(明), 주(朱) 웅신(熊神). 정(鄭) 속성(續姓)이다. 남계 길(吉).
【형승】 동쪽으론 푸른 바다를 누르고, 서쪽으로는 중첩된 봉우리가 나란히 섰다 홍여방(洪汝方)의 기문에, “동쪽으론 넓은 바다를 눌러 파도가 만경이요, 서쪽으론 중첩된 봉우리와 나란히 서 있어 운하가 천태로다.” 하였다. 돌성[石堡]은 큰 강을 베개 삼고 조서강(趙瑞康)의 시에 있다.
【산천】 호학산(呼鶴山) 현의 서쪽 9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내영산(內迎山) 현의 북쪽 11리에 있다. 산에는 대(大)ㆍ중(中)ㆍ소(小)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사람들이 3동석(動石)이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견훤(甄萱)의 난을 이 산에서 피했다. 도리산(桃李山) 현의 북쪽 11리에 있다. 신귀산(神龜山) 현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세 용(龍)이 웅덩이에 있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응한다 한다. 별내현(別乃峴) 현의 남쪽 15리에 있으며 흥해군(興海郡)과의 경계에 있다. 용산(龍山)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바다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개포(介浦) 현의 동쪽 6리에 있는데, 일찍이 병선(兵船)을 배치했었으나, 해문(海門)이 광활하기 때문에 항상 풍랑의 근심이 있어서, 영일현(迎日縣) 경계인 통양포(通洋浦)로 옮겨 배치했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신라 때에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해안 개포 세 곳에 해자(海子)를 파서 왜구를 막았다.” 하였는데, 그 길이는 각각 2리이고, 깊이는 두어 길이 되었으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기로포(二岐路浦)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허혈포(虛穴浦) 현의 동쪽 7리에 있으며, 돌에 빈 구멍이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고송라포(古松羅浦) 현의 북쪽 13리에 있다. 도리포(桃李浦) 현 북쪽 11리에 있다. 벌지(伐池) 현의 서쪽 7리에 있으며 둘레가 1만 3백 척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토산】 방어(魴魚)ㆍ전복[鰒]ㆍ대구(大口)ㆍ청어(靑魚)ㆍ홍합(紅蛤)ㆍ백조어(白條魚)ㆍ김[海衣]ㆍ미역[藿]ㆍ넙치[廣魚]ㆍ꿀[蜂蜜]ㆍ석이[石蕈].
【성곽】 읍성 돌로 쌓았다. 둘레는 1천 3백 53척이며, 높이는 9자이고, 안에 2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도리산(桃李山) 봉수 남쪽으로 흥해군(興海郡) 오산(烏山)에 응하고, 북쪽으론 영덕현(盈德縣) 황석산(黃石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서청관(西淸館) 객관의 서쪽에 있다.
【누정】 부옹루(孚顒樓) 곧 성(城)의 동문루(東門樓)를 말한다. 홍여방(洪汝方)의 기문이 있다. 『신증』 매죽루(梅竹樓) 동헌의 곁에 있다. 봉송정(鳳松亭)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큰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해문(海門)을 가린다.
【학교】 향교(鄕校)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송라역(松羅驛)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 본도에 딸린 역이 일곱이니, 즉 병곡(柄谷)ㆍ대송(大松)ㆍ망창(望昌)ㆍ주등(酒登)ㆍ봉산(峯山)ㆍ육역(陸驛)ㆍ남역(南驛)이다. ○ 승 1인. 고현리원(古縣里院) 옛 청하현(淸河縣)에 있다. 금정원(金井院) 현의 서쪽 7리에 있다. 고송라원(古松羅院) 현의 북쪽 13리에 있다.
【불우】 보경사(寶鏡寺) 내영산(內迎山)에 있으며, 고려 때 이송로(李松老)가 지은 원진국사(圓眞國師)의 비가 있다. 상태사(常泰寺) 호학산(呼鶴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용산(龍山)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청하(古淸河) 지금의 현청 소재지 남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북아부곡(北阿部曲) 현의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등정부곡(等汀部曲)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김해부곡(金海部曲) 현에서 서쪽으로 7리에 있다. 모등곡부곡(毛等谷部曲)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신지부곡(新池部曲)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우천부곡(于川部曲)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남계부곡(南界部曲)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명환】 본조 민인(閔寅) 읍성을 쌓았고 또한 의창(義倉)을 설치했다. ○ 이행(李行)의 시에, “청하(淸河) 고을 생김은, 궁벽하게 넓은 바닷가에 있다네. 밭도 좋고 호구도 많아서, 부창(富昌) 보다 못지 않았건만, 한번 왜적 일어나면서부터, 쇠하고 죽는 것 날로 심하였네. 동네와 마을이 언덕이 되고 풀밭 되어, 오랫동안 노루와 사슴 노는 고장 되었었네. 현관(縣官)이 성을 쌓고, 만호(萬戶)에 신부(信符)를 두고, 배를 만들어 개포(介浦)에 대니, 수륙의 군사 위력이 생겼네. 흩어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밭갈고 집 지어서 제자리로 돌아갔네. 민후(閔侯)는 나의 친구, 일을 맡은 지가 두 해 남짓. 애써서 백성 진휼하고, 개연(槪然)히 의창(義倉)도 회복했네. 또 따라서 관사도 지었으니, 점차로 청당(廳堂)이 마련되었도다. 손님과 나그네 잠자리 편하고, 관리들도 주림을 면하였네. 예전부터 수령의 직분은, 이 밖에 다른 것은 없는 것일세.” 하였다. 『신증』 조동호(趙銅虎).
【제영】 천수상겸회차명(天水相兼晦且溟)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회호리 바람 문득 일어 바다를 뒤엎으니, 하늘과 물이 서로 어울려 어둡고도 침침하다. 은산(銀山)의 일만 봉우리 낮았다 다시 솟고, 백 천의 천둥 소리와 북 소리 일시에 일어나네. 부상(扶桑)이 떠나갈 듯 지축이 흔들리니, 누구의 장난인가 경(鯨 숫고래)ㆍ예(鯢 암고래)의 짓일세.”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은 7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서면 처음은 5리, 끝은 10리. 북면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역면(驛面) 북쪽으로 끝이 5리. ○ 북아(北阿) 부곡은 북쪽으로 10리, 모등곡(毛等谷) 부곡은 서쪽으로 5리, 신지(新池) 부곡은 서쪽으로 4리, 우천(于川) 부곡은 서쪽으로 10리, 남계(南界) 부곡은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성지】 덕성(德城) 남쪽으로 10리에 터가 남아 있다.
【토산】 대나무[竹].
【누정】 해월루(海月樓) 읍내에 있다.
* 언양(彦陽) 左道. 9일 반.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7리이다.
이명: 헌양(巘陽). 헌산(巘山)
* 언양현감겸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
* 언양훈도. 종9품.
동쪽으로 울산군(蔚山郡)의 경계까지 19리, 남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28리,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 31리이며, 북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거지화현(居知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헌양헌(巘陽縣)으로 고쳐 양주(良州)의 속현으로 했고, 고려 현종 때 울주(蔚州)에 예속시켰다. 인종(仁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개칭하였는데, 본조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하고,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거지화(居知火)ㆍ헌양현(巘陽縣)ㆍ헌산현(巘山縣).
【성씨】 본현 박(朴)ㆍ김(金), 현(玄)ㆍ최(崔)ㆍ김(金) 모두 내성(來姓)이다.
【산천】 고헌산(高巘山) 현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취서산(鷲棲山) 현의 남쪽으로 12리에 있으며, 대석산(大石山)이라고도 한다. 석남산(石南山) 현의 서쪽으로 27리에 있다. 천화현(穿火峴) 현의 서쪽 28리에 있으니, 밀양부(密陽府)와의 경계이다. 부로산(夫老山) 현의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송동(松洞) 현의 북쪽으로 2리에 있다. ○ 김취려(金就礪)가 어릴 때 놀던 곳으로, 손수 심은 소나무가 아직도 있으며, 혹은 무덤이 송동의 안에 있다고도 하지만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으로 1리에 있으며, 물의 근원은 석남산에서 나와서 울산군(蔚山郡) 대화진(大和津)으로 흘러 들어간다. 취성천(鷲城川) 현의 남쪽으로 10리에 있으며, 물의 근원은 대석산에서 나와서 여남천(與南川)과 합류하여 대화진으로 흘러 들어간다. 『신증』 가사현(加士縣) 현의 서쪽 31리에 있으니, 청도군과의 경계이다.
【토산】 쇠 석남산에서 난다. 표고[香蕈]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ㆍ석청[石淸蜜]ㆍ지황(地黃), 참외[苽] 북쪽 성 밑에서 난다. 그 종자가 서울의 적전(籍田 임금이 손수 경작하는 밭)에서 나왔으므로 적전 참외[籍田苽]라고 한다. 매년 겨울철에 심었다가 4월 그믐 전에 임금께 진상해 들이는데, 그 심고 기르기가 매우 어려움으로 성종(成宗) 초에 없애 버렸다. 은어[銀口魚] ㆍ황어(黃魚)ㆍ석류(石榴). 『신증』 죽전(竹箭).
【성곽】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 4백 98자이고, 높이는 8자이며, 안에 우물 2개가 있다. 『신증』 홍치(弘治) 경신년에 돌로 다시 쌓았으며, 둘레는 3천 64자, 높이는 13자이고, 안에 3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부로산 봉수(夫老山烽燧) 남쪽으론 양산군(梁山郡) 원적산(圓寂山)에 응하고, 북쪽으론 경주 소산(所山)에 응한다.
【역원】 덕천역(德川驛) 현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신원(新院) 현의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저촌원(猪村院) 현의 남쪽으로 24리에 있다. 우천원(于川院) 현의 북쪽으로 11리에 있다. 석남원(石南院) 석남산 아래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현의 동쪽으로 1리에 있다.
【불우】 석수사(石水寺) 부로산에 있다. 연고사(連高寺) 고헌산(高巘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인물】 고려 김취려(金就礪) 벼슬은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사람됨이 절조있고 검소하며 정직하였다. 충(忠)과 의(義)를 스스로 지키고, 군사 다루기를 엄하고 질서 있게 하여 사졸들이 조금도 범하지 못하였다. 술이 있으면 곧 잔 하나를 가지고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함께 고루 나누어 마셨다. 그러므로 그들의 죽을 힘을 다하는 충성심을 얻을 수 있었다. 강동(江東)의 싸움에 있어서도 일을 모두 조충(趙沖)에게 양보했으나, 싸움에 당하여 적을 제어할 때에 이르러서는 기발한 계락을 많이 내어 큰 공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스스로 자랑한 적이 없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낯빛을 엄정히 하고, 아랫사람을 거느리니 누구도 감히 속이질 못했다.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김문연(金文衍) 사람됨이 활달하며 오활하고 꼬부라진 것이 없었다. 여러 번 벼슬하여 첨의중호(僉議中護)에 이르렀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김변(金賆)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이르렀고, 성품이 순후하며 사치함이 없었고, 정도로 공사를 다루었다. 김윤(金倫) 변의 아들로, 충열왕(忠烈王) 때, 합단(哈丹)이 내침하여 나라 사람들은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 피했는데, 윤의 외숙 허공(許珙)이 김윤으로 하여금 가족을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윤이 나이 비록 14살이었지만 지휘함이 어른과 같아서 일족들이 힘입었다 한다. 음관(蔭官)으로, 여러 번 승진하여 경상ㆍ전라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의 직에 임명되어 합포(合浦)를 진수하였는데, 호령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관리며 백성들이 편안하고 화목하였다. 충목왕(忠穆王) 때, 좌의정에 올랐으나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물러갔다. 후에 왕이 충혜왕(忠惠王)의 시호를 청하고자 윤을 불러 보내려 하였는데, 윤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늙어서 72살이옵니다. 길에서 쓰러져 밝으신 명령을 욕되게 할까 두렵사오나, 목숨이 아직도 붙어있으니,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 나와 행장을 정돈하고 원 나라에 가려 하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풍질(風疾)에 걸려 10일 동안 물과 국물을 마시지 못하더니, 주위 사람들한테 부축하여 일으켜 달라 하고는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죽었다. 시호는 정열(貞烈)이고, 벼슬은 수사도 상주국 언양배(守司徒上柱國彦陽伯)에 이르렀다. 본조 김자(金赭) 병신년 복시(複試)에서 장원했다.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신계은(辛繼誾) 부모상을 입고 전후 6년을 여막에서 거처했다. 정종문(鄭宗文) 부모가 잇따라 죽자 슬퍼하여 몸을 축냄이 예절보다 지나쳤고, 여막에서 3년을 거처하였다. 정상인(鄭尙仁)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조부모를 위하여 묘 옆의 여막에서 3년을 거처했으며, 모든 장례며 제례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고, 또 그의 스승 길재(吉再)를 위하여 심상(心喪)으로 3년을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경복하였다.
【열녀】 본조 정씨(鄭氏) 신령현(新寧縣)의 감무(監務) 유혜지(柳惠至)의 아내로서, 혜지가 죽자 3년을 여막에서 거처하였으므로 태종(太宗) 조에 마을에 정려하였다.
【제영】 산수반회작일향(山水盤廻作一鄕)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소나무 대나무가 가리고 비쳐서 천 집을 숨겨 주고, 산과 물이 서리고 돌아서 한 시골을 만들었다.” 하였다. 근곽산고다모애(近郭山高多暮靄) 이지명(李知命)의 시에, “성에 가까이 산이 높으니 저녁 노을이 많고, 처마에 이웃하여 나무가 빽빽하니 가을 맛이 나네.” 하였다. 대우신하첩수량(帶雨新荷疊水凉)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바람 머금은 붉은 작약은 뜰에 번득여 연약하고, 비에 젖은 새 연잎 물 위에 포개있어 서늘하다.” 하였다. 산형북공라도거(山形北拱羅都去)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산 형세는 북으로 신라 서울 끼고 뻗어 있고, 물 형세는 동으로 울산(蔚山) 바다에 기울어져 흘러가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 32년에 울산에 합하였다 왜구의 소탕으로 잔피하여서였다. 광해주 4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방면】 상북(上北) 동북쪽으로 끝이 20리이다. 중북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33리이다. 상남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중남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하남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삼동(三同)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성지】 취서산고성(鷲棲山古城) 산 위에 있었는데 단조성(丹鳥城)이라 일컬었다. 둘레가 4천 50척, 읍 성문이 4척이고 못이 하나 있다.
【토산】 석류.
* 봉화(奉化) 左道. 5일 반.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0리이다.
異名: 봉성(鳳城). 옥마(玉馬). 고사마(古斯馬).
* 봉화현감겸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 문음 6품
* 봉화훈도. 종9품.
* 태백산 사고참봉(史庫參奉) 종9품 2人
군관 14인. 인리 19인. 지인 11인. 사령 16명.
관노 15명. 관비 14구
* 류향소(留鄕所)
좌수(座首) 1人, 별감(別 監) 1人,
0 호구 己卯式元戶 1735년 영조11
호수: 1,106호. 인구: 5,798명. 남자: 2,435명. 여자: 3,363명.
동쪽으로 安東府 재산현(才山縣) 지경까지 31里,
동쪽으로 春陽縣 풍정(楓井) 지경까지 5里,
서쪽으로 奈城縣 荒村(황촌) 지경까지 12里,
넘쪽으로 禮安縣 眞木亭 지경까지 25里,
북쪽으로 江原道 三陟府 道深 지경까지 74里 거리이다
남쪽으로 대구감영까지 3백리 3일정.
남쪽으로 울산병영까지 4백80리 5일정.
남쪽으로 동래수영까지 6백리 6일정.
남쪽으로 고성통제영까지 7백25리 7일반정.
0【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고사마현(古斯馬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옥마(玉馬)로 고치고 나령군(奈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은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임금 때,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세조(世祖) 3년에 순흥(順興) 문수산(文殊山)의 물 동쪽의 땅을 떼어서 예속시켰다
0 관청건물(公廨)
객사(客舍)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장관청(將官廳) 인리청(人吏廳)
0 성씨
본현 정(鄭)ㆍ금(琴)ㆍ석(石)ㆍ몽(蒙), 권(權) 안동(安東). 매토(買吐) 윤(尹) 물야부곡(勿也部曲)도 같다.
0 풍속
절약ㆍ검소를 숭상하며, 누에치기ㆍ뽕나무 가꾸기에 힘쓴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0【토산】
잣[海松子]ㆍ석이버섯[石蕈]ㆍ인삼(人蔘)ㆍ수달(水獺)ㆍ산무애뱀[白花蛇]ㆍ석청[石淸蜜]ㆍ송이[松蕈]ㆍ은어[銀口魚]
0【봉수】
용점산(龍岾山) 봉수 남쪽으로는 예안현(禮安縣)의 녹전산(祿轉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안동부(安東府) 내성현(奈城縣)의 당북산(堂北山) 봉수에 응한다.
『신증』
0【누정】
영풍루(迎風樓) 객관(客館)의 문루(門樓)이다.
0【학교】
향교(鄕校) 현 북쪽 1리에 있다.
0【역원】
*도심역(道深驛) 현 남쪽 5리에 있다. 전에는 현 북쪽 30리에 있었는데, 태백산제(太白山祭)를 폐지한 뒤로 이곳에 옮겼다. 혹은 말둔(末屯)이라고도 부른다.
*장불원(長佛院) 현 북쪽 45리에 있다.
*마장리원(馬場里院) 현 남쪽 15리에 있다.
*태자산원(太子山院) 현 남쪽 25리에 있다.
0 사찰
*태자사(太子寺) 태자산(太子山)에 있다. 신라 병부 시랑(兵部侍郞) 최인곤(崔仁滾)이 지은 승랑공탑명(僧朗空塔銘)과 고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심언(金審言)이 지은 승통지납명(僧通眞塔銘)이 있다.
*지림사(智林寺)ㆍ금정암(金鼎菴) 모두 문수산(文殊山)에 있다.
*남화사(覽華寺) 태백산에 있다.
0【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0【고적】
물야부곡(勿也部曲) 별호는 모산(冒山)이다. 현 북쪽 10리에 있다. 양곡부곡(良谷部曲) 현 서북쪽 7리에 있다. 매토부곡(買吐部曲) 별호는 청둔(靑芚)이다. 본래 안동부(安東府)에 속해 있었는데, 고려 공양왕(恭讓王) 3년에 여기로 귀속되었다. 현 동쪽 14리에 있다.
0【인물】
고려 금의(琴儀) 체격이 기걸하고 도량이 컸다. 젊어서 공부에 힘을 기울여 글을 잘 지었다. 명종(明宗) 임금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많은 요직을 지냈다. 희종(熙宗) 때 지주사(知奏事)로 옮겨서 오랫동안 기요(機要)를 맡아 주대(奏對)ㆍ칭지(稱旨)하였으니, 임금이 크게 의지하였다. 강종(康宗)이 즉위할 때 금(金)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책명(冊命)하게 되었다. 금 나라의 사신이 정문(正門)으로 들어오려 했는데, 조정의 의론이 이를 옳게 여기지 않아, 왕복하면서 서로 따지게 되었다. 임금이 의(儀)에게 가서 잘 타이르도록 하명하였다. 의가 묻기를, “천자(天子)가 사방의 산악을 순수(巡狩)하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오. 대국(大國)에서 소국(小國)에 왕필(枉蹕)하면 어느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마땅하오.” 하니, 금 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천자가 출입하는 데 있어, 중문(中門)을 젖혀 놓고 어디로 할 것이오.” 하여 “그렇다면 신하가 임금의 정문으로 들어오게 하려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하자, 금 나라 사신은 감복하고 서문(西門)으로 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기쁘게 여겨,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使)로 승진시켰다. 고종(高宗) 때 수 태보 동중서문하시랑 평장사(守太保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여러 차례 공거(貢擧 주군(州郡)에서 준수한 자제를 선발하여 추천하는 일)를 맡아, 그 가운데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으니,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고 하였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정운경(鄭云敬)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 상주 사록(尙州司錄)에 보임되고,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옮기어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를 존무(存撫)하였으며, 들어가서는 지형부사(知刑部事)가 되고 얼마 안 있어 형부 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뒤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으로 병(病)을 이유로 영천(榮川)에 귀향했다가 졸(卒)하였다. 운경이 충목왕(忠穆王) 때, 서운부정(書雲副正)으로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하정(賀正)하러 원 나라에 갔는데, 당시 기황후(奇皇后)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였으므로 중귀(中貴)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음식을 베풀면서 몹씨 거만하게 굴었다. 운경은 정색하고 말하기를, “오늘 음식을 베푸는 것은 옛주인을 위한 것이오.” 하니 중귀들은 놀라서 말하기를, “수재(秀才)가 우리를 가르쳐 주었다.”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한 뒤, 운경이 법을 지키면서 권세가들에게 굽히지 않았다 해서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술을 내렸다. 아들은 도전(道傳)ㆍ도존(道尊)ㆍ도복(道復)이 있다. 정송수(鄭松壽) 공민왕(恭愍王) 때, 호종(扈從)하여 1등공신이 되고, 봉화부원군(奉化府院君)으로 봉(封) 받았다. 본조 정도전(鄭道傳) 자(字)는 종지(宗之)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주사록(忠州司錄)에 뽑혔고,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다.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신우(辛隅 폐왕(廢王) 우(隅)) 초에 언사(言事)로 인하여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가 곧 용서되어 편히 살았다. 삼각산(三角山) 아래 오두막집을 지었는데, 글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따랐다. 후생들에게 이단(異端)을 없애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라고 늘 훈계했다.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승진되었다가 군(郡)으로 나갈 것을 빌어 남양부(南陽府)의 원이 되었다. 태조(太祖)를 따라 공양(恭讓)을 세웠으므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하사되었다. 곧이어 정당문학 동판도평의사사사(政堂文學同判都評議使司事)를 배수하였다. 병(病) 때문에 물려줄 것을 빌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공양왕(恭讓王) 때 대간(臺諫)을 비훼(非毁)한 것으로 인해서 봉화현(奉化縣)에 방귀(放歸)되었다. 뒤에 소환되어 충의군(忠義君)에 다시 봉(封)해지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본조에서 봉화백(奉化伯)에 봉하였는데 뒤에 죄를 지어 주살되고 훈봉(勳封)이 삭탈되었다. 정진(鄭津) 도전(道傳)의 아들이다.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신증』 정문형(鄭文炯) 진(津)의 손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영중추(領中樞)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제영】 금륜봉올약지천(金輪峯兀若支天) 강윤(姜允)의 시에, “금륜봉의 우뚝함은 하늘을 받친 듯하고, 도미천(道美川)의 흐름은 바닷가에 닿았다.” 하였다. 창등찬공수목교(蒼磴攢空樹木交)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푸른 돌길은 하늘 뚫고 나무를 엇갈리는데, 두세 농가는 노란 띠풀을 덮고 있다. 주민들이야 어찌 알리 강호(江湖)의 맛을, 산나물 조금 캐어 술 안주를 마련한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 중동(中東)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상동(上東) 안동 북쪽 경계 너머 있으며, 동쪽은 소천(小川)이라 하고, 남쪽은 재산(才山)이라 하며, 서쪽은 춘양(春陽)이라 한다. 북쪽은 영월(寧越)의 상동(上東)과 삼척(三陟)의 상장성(上長省) 경계에 접해 있으며, 처음 경계는 40리이고, 끝 경계는 80리이다. 남면(南面) 끝은 40리. 서면(西面) 처음은 5리, 끝은 15리. 북면(北面)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물야(勿野) 북쪽으로 끝은 15리인데, 본래는 물야부곡이다. ○ 미량곡부곡(彌良谷部曲)은 서북쪽으로 7리이다. 매토부곡(買吐部曲)의 별호는 청둔(靑屯)이며 본래 안동 땅인데, 공양왕(恭讓王) 2년에 여기에 예속되었고, 상동면(上東面) 남쪽 경계에 있다.
【궁실】 선원각(璿源閣)ㆍ실록각(實錄閣)ㆍ사고(史庫) 모두 각화사(覺華寺)에 있으며 곁에는 참봉(參奉)2명 및 수직군(守直軍)25명이 있다.
史閣
璿源閣 實錄閣 在縣東北五十里嘉靖丙午建參奉二人守護軍二十五名
【사원】 문암서원(文巖書院) 광해주(光海主) 병진년(丙辰年)에 건립하 고 숙종(肅宗) 갑술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이황(李滉) 조목(趙穆)
0 旱田
元帳付八百七十結六十八負八束內各樣免稅陳雜頉幷二百五十八結九十七頁四束己卯時起六百十一結七十一頁四束
0 水田
元帳付四百五十四結九十九負六束內各樣免稅陳雜頉幷二百四結三十三負己卯時起二百四十八結六十六負六己
0 進貢
人參 白芍藥 紫草茸 白淸 栢子仁 川芎 白茯苓 甘菊 柴胡 連翹 茅香 赤茯苓 瓜蔞仁 當歸 乾葛 細辛 生雉 生兔 乾雉
0 糶糴
元會大小米三十石七斗七刀九合四夕雜穀一百九十九石十二斗三刀三合二刀賑色大小米一千四百八十石十四斗三刀三合五夕雜穀七千八百九十九石八斗一刀四合六夕常平廳大小米一千三百八十三石八斗四合一夕雜穀四百八十一石十二斗五刀九夕私賑雜穀七百九十九石八斗七刀七合四夕別會大小米十九石七斗五刀一合二夕雜穀一百八十三石二斗二刀四合八夕十月開倉十二月封庫己卯條爲準
0 田稅
米一百三十八石五斗五刀九合太一百四十三石十斗一刀三合六夕三月依定式作錢四月以陸路五日達于京納于戶曹己卯條爲準
0 大同
作木十七同錢木參半田稅一時上納惠廳米二百二十石九斗七合二夕儲置本縣一從惠廳區劃多寡無常己卯條爲準
0 均稅
結錢四百九十一兩八錢九分田稅一時收捧上納選武木三十三疋十月收捧以陸路五日達于京納于惠廳己卯條爲準
0 俸廩
衙祿位四十結米七石十一斗太八石二斗公須位十五結米三石八斗一刀四合八夕太一石九斗八刀五合二夕民結所出每夫雉一首鷄一首柴七十一丹炭四斗生草六朿藁草二東式捧用
0 軍兵
訓鍊都監砲保五十五名御營正軍十三名資保十四名官保二十六名別破陣保十五名禁衛正軍十五名資保十六名官保四十四名兵曹騎兵一百十名步兵六十九名禁軍保三十七名袱直十一名京役保一名補充隊保一名樂生保一名樂工保六名尙衣院諸員二十二名束伍馬軍七名保十四名步軍隨率幷一百三十六名保一百三十六名烽燧軍一百名
0 山
○태백산(太白山)
신라의 북악(北岳)이며 정상에는 태백산사(太白山寺)가 있는데 세간에서는 天王堂이라고 부른다.
○청량산(淸凉山)
명호면 북곡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재산면 남면리, 남쪽은 안동시 도산면과 접경하고 있다. 높이는 870미터이다.
산 속에는 27개의 절과 암자(唵子)터가 있고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嚴)과 오산당(吾山堂), 치원대(致遠臺), 김생굴(金生窟), 공민왕당(恭愍王堂),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피하여 행행(幸行)했던 산성(山城)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청량산에는 큰 봉우리가 12봉이 있으니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명명(命名)했다.
* 장인봉(丈人峯)은 청량산(淸凉山)의 외봉(外峯)에서 가장 높은 봉우 리요,
* 선학봉(仙鶴峯)은 장인봉(丈人峯)의 서쪽에 있으며,
* 자란봉(紫鸞峯)은 장인봉(丈人峯)의 동쪽이 있고,
* 자소봉(紫宵峯)은 청량 내봉의 종자(宗者)이다.
* 경일봉(擎日峯)은 자소봉(紫宵峯)의 동쪽에 있으며,
* 축융봉(祝融峯)은 자소봉의 남쪽에 있고,
* 탁필봉(卓筆峯)은 자소봉의 서쪽에 있는데,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다.
* 연적봉(硯滴峯)은 탁필봉(卓筆峯)의 서쪽에 있고,
* 연화봉(蓮花峯)은 연적봉(硯滴峯)의 서쪽에 있는데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부용(芙蓉)과 같아서 승가(僧家)에서 말하는 의상봉(義湘峯)이다. 봉의 동쪽에 연대사(蓮臺寺)가 있다.
* 향로봉(香爐峯)은 연화봉(蓮花峯)의 전봉(前峯)에 있는 것으로, 그 모양이 향로(香爐)와 비슷하다.
* 금탑봉(金塔峯)은 경일봉(擎日峯)의 아래에 있는데, 어떤 이는 치원봉(致遠峯)이라 한다. 최치원(崔致遠)의 독서처가 치원대의 아래에 있다.
* 탁립봉(卓立峯)은 경일봉(擎日峯)의 밖에 있다.
주세붕(周世鵬)의 기문(記文)에, “청량산은 안동부 재산현에 있으나, 실은 태백산의 한 지맥(支脈)이 내려와서 정기(精氣)가 모인 것이다. 그것의 방박(磅磗) 기운(氣運)이 결속하여 높은 봉우리가 되어 다투어 솟아났고, 한색(寒色)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푸른 죽순이 난추(亂抽)함과 같고, 늠연(凜然)하여 공경할 만하다. 대천(大川)이 그 산 자 락을 휘감은 것은 곧 황지(潢池)로부터 흘러온 것이다. 석벽은 높고 물은 세차게 흘러 배를 띄우지 못한다. 혹 창벽(蒼壁)이 긴 못을 끼 고, 거울같이 푸른 물은 약수(弱水)가 청천(淸淺)함과 같으며, 진세(塵 世)에서 함부로 이 산을 찾아오지 못하게 하여 흐르는 물이 준 연후에 겨우 외부의 사람이 다닐 수 있으며, 산과 물로 인하여 경치는 더욱 그윽하다. 대개 이 산은 그 주위(周圍)가 백리(百里)도 못되나 산봉우리가 층층이 쌓여서 깍아지른 절벽이 절벽을 이고 있고, 연애 (煙 崖)와 수목(樹木)이 그림같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뛰어난 솜씨이다. 내가 옛날에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고. 서쪽으로 천마산(天魔山)과 성거산(聖居山)을 답사(踏査)했으며, 남으로 가야(伽倻)와 금산(錦山)의 정상에 올라 두류산(頭流山)의 왼쪽 기슭을 굽어보았으며, 기타의 작은 산들도 수없이 유람하였다. 비록 감히 망녕되게 자장(子長)에게 비기지는 못하나, 운산(雲山)의 아담한 경치는 이미 말함이 오래다. 내가 생각컨데, 해동(海東) 여러 산의 웅장함은 두류(頭流)의 맑고 빼어남만 못하고, 금강(金剛)의 기이한 경치만 못하여. 박연폭포(朴淵瀑布)와 가야(伽倻)의 동학(洞壑)만 같은 것이 없으나, 단엄(端嚴)하고 상개(爽介)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작으나 업신여기지 못할 것은 오직 청량산(淸凉山)이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중국의 명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먼저 오악(五岳)을 일컬을 것이니, 북은 항악(恒岳)이요, 서는 화악(華岳)이며, 남은 형악(衡岳)이요, 중은 숭악(崇岳)이나, 그 최대의 것은 대악(垈岳)이다. 그러나 그 작으면서 선경(仙境)인 것은 반드시 천태(天台)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 동국(東國)의 명산(名山)을 묻는다면, 반드시 먼저 오악(五岳)을 일컬을 것이니 북은 묘향(妙香)이요.서는 월(九月)이며, 동은 금강(金剛)이요, 중은 삼각(三角)이나, 그 최대이면서 남쪽에 있는 것은 두류(頭流)라 한다. 그러나 그 소산(小山)이면서 선경(仙境)인 것은 반드시 청량산(淸凉山)이다. 내 10세 때에 이미 청량산이 있다는 것을 듣고, 한번 오르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지가 어언 37년이나 되었다.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뒤로는 꼭 가서 볼까 하여서 청량산의 동서쪽으로 가서 멀리 그 모습을 바라보고 번번히 다리를 수고롭게 하면서 문득 속세의 팔을 뻗어 그 산아래에 묵고서 돌아오게 되어, 안타깝고 슬퍼하며 목마른 듯 한 지가 또 사 년이나 되었다. 이제 50세의 노쇠하고 창백한 늙은이인 내가 비로소 지팡이에 의지하여 연적봉두(硯滴峯頭)에 오르니 다행이다. 그 내외에 있는 여러 봉우리가 옛날에는 그 이름이 없었으나 중(僧)들이 전해서 내려오는 것으로, 오직 보살봉(菩薩峯), 의상봉(義湘峯), 금탑봉(金塔峯), 연적봉(硯滴峯)만이 있으며, 외봉(外峯)으로는 오직 큰 봉우리는 금탑과 같은데, 간혹 치원봉(致遠峯)이라고 부르는 것은 치원대 (致遠臺)가 그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의상봉 역시 의상굴(義湘窟)이 그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그 거칠음이 이와 같았다. 점필재(佔畢齋)가 두류산(頭流山)에 있어서, ‘증거가 없어 믿지 못하여 이름 붙일만 한 것에도 이름 짓지 못했다.’ 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망녕되게도 참람히 봉우리들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주문공이 여산에서 기절(寄絶)을 만나면 문득 이름하여 일찍이 증거가 없더라도 이름짓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 청량산의 제봉(諸峯)은 만세를 거쳐도 이름나지 않으니 진실로 산을 좋아하는 자의 수치스러운 바이다. 만약 반드시 주자의 현명(賢名)을 기다린다면, 그것이 이름을 얻는 것도 역시 어렵지 않겠는가? 짐짓 그 이름을 짓나니 장래의 철인(哲人)들을 기다려 고치게 할 것이니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드디어 그 외봉(外峯)의 긴 것을 장인봉(丈人峯)이라 하니. 태자(太字)의 의미를 풀이한 것인데 이는 멀리 태산이 장악(丈岳)이 됨을 본뜬 것이다. 그 서쪽을 선학봉(仙鶴峯)이라 하고, 동쪽을 자란(紫鸞)이라 한다. 그 밖의 산의 세 봉우리는 모두 가볼 겨를이 없어 멀리 그 내봉(內峯)의 종자(宗者)만 이름 지으니, 자소봉(紫宵峯)이라 하였는데, 창암(蒼巖)이 천척(千尺)으로 하늘 밖에 빼어났다.
동봉(東峯)을 경일봉(擎日峯)이라 하는데 빈욱봉(賓旭峯)의 뜻을 취한 것이다. 남봉(南峯)을 축융봉(祝融峯)이라 하는데 이는 형산(衡山)을 모방한 것이다. 자소봉에서 서쪽으로 50보(步) 미만에 가장 드러난 것이 탁필봉(卓筆峯)이라 하는데, 탁필봉에서 서로 10보(步) 미만쯤 가서 우뚝 솟은 것을 연적봉(硯適峯)이라 한다. 연적봉의 서쪽에 봉우리가 탁출(擢出)하여 부용과 같은 것을 연화봉(蓮花峯)이라 하니, 즉 연화사(蓮花寺)의 서봉이며, 승가(僧家)에서 이른바 의상봉(義湘峯)이다. 연화봉 앞에 봉우리가 향로를 닮은 것을 향로봉(香爐峯)이라 한다. 금탑봉(金塔峯)은 경일봉(驚日峯)의 아래 탁립한 봉이며, 경일봉 외에 내·외봉을 합하면 무릇 12봉(峯)이니, 대개 구명(舊名)을 가진 것이 둘이고, 구명을 고친 것이 셋이며, 이름이 없는데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 여섯이다. 그 하나는 곧 탁필봉(卓筆峯)이니 이 역시 여산(廬山)의 탁필봉을 본뜬 것이다. 그 참람하여 피하지 못함이 있을 것이다. 자소봉(紫宵峯)은 대략 9층으로 열 하나의 절이 그 곳에 있다. 그 중에 백운암이 가장 높고, 다음이 만월암이요, 다음이 원효암, 다음이 몽상암, 다음이 보현암, 다음이 문수암, 다음이 진불암, 다음이 연화사, 다음이 별실·중대·보문암이며, 경일봉(驚日峯)은 대략 3층에 3사(寺)가 있으니 김생암·상대승암·하대승암이 있다 금탑봉 역시 3충에 5사(寺)가 있는데, 산형(山形)이 탑과 같으며 다섯 절은 모두 시렁처럼 중층을 둘렀으니, 치원암, 국일암, 안중암, 상청량암, 하청량암이 그것이다. 모든 절이 절벽을 지고 있어 아래로부터 쳐다보면 다만 깍은 듯한 절벽만 보일 뿐 그 위에 절이 있는 줄 알지 못한다. 이 절로부터 뒤는 모두 절벽이며, 절 앞은 모두 절벽과 대(臺)인데 연대사에서 보면, 금탑봉은 2, 3층의 탑으로 되었으며, 치원암에서 보면 자하봉 역시 19층 탑인데, 이것은 모두 평생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이다. 모든 봉우리를 보면, 게으른자는 일어설 수 있게 하고, 폭포소리를 들으면, 탐욕한 자도 청렴하게 해주며, 총명수(聰明水)를 마시고 만월암(滿月庵)에 누으면 비록 신선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꼭 신선(神仙)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만 괴상하게도 지지(地誌)와 국사(國史)에 모두 최치원을 말했으나 청량사(淸凉寺)만은 곧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 월류봉(月留峯)보다 못하다 하였다. 이 산은 비록 지지(地誌)에는 실려있으나 한 글자도 최고운이나 김생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그것은 후인들이 이 산을 높이려 하여 거짓되게 고운과 김생이 이 산에 머물렀다고 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이런 사실이 있었음에도 그 역사를 실전(失傳)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치원(致遠)으로 대(臺)의 이름을 삼고 절(寺)의 이름을 지었으며, 김생(金生)으로 굴(窟)의 이름을 삼고 절(寺)의 이름을 지은 천년의 발자취가 어떻게 그처럼 아침 나절의 일인 듯 명백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모든 것들을 기록하여 사실을 아는 사람을 기다리려 한다. 아아! 이 산이 중국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의 음롱(吟弄)하는 바가 되고, 한유(韓愈)와 유종원(補宗元)의 기술하는 바가 되고, 주자(朱子)와 장횡거(張橫渠)의 등상(登賞)하는 바가 되어 온 천하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쓸쓸히 천년동안 고운과 김생 두 사람을 빙자하여 한 나라에 드러났겠는가. 진실로 탄식할 만하다. 이 청량산이 비록 이름은 안동에 속했으나 그 아래는 모두 예안땅으로 송재, 농암으로부터 이후에 홍유석사(鴻儒碩士)가 잇달아 배출되었으니 세상에서 말하기를,‘청량산은 안동의 산이나, 실은 예안 인물의 지령(地靈)이 배출되었다’는 설(說)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이번 걸음에 잡영(雜詠) 팔십오수(八十五首)는 전후의 일들을 모두 기록하여 청량산산음(淸凉山散吟)이라 하니 거의 백여 편이나 되었다. 돌아와 바닷가에 누워서 아이놈들과 함께 펼쳐보면 대략 이번 청량산 유람이 좋았음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시(詩)에서 말하기를
하늘에 자하봉이 솟았으니 ,
봉우리 앞에 푸른 절벽이 조밀하도다
절이 높으니 달에 가까워지고,
소나무가 늙으니 가을인줄 모르겠네.
문득, 바람을 타고 떠나고 싶으니,
도리어 학을 타고 노는가 의심나네.
어찌 꼭 대산(垈山)이 절정에 올라야 하리 ,
한번 봄에도 많은 시름 흩어지네.
空外紫宵出峰前 碧峭稠寺高能近
月松老不知秋便 欲乘風去還疑駕
鶴遊何須登垈項 一覽散遐愁
자소봉(紫宵峯)
김생굴을 찾으려고,
먼저 경일봉에 올랐네 ,
하늘에 솟은 봉 우뚝이 높았고,
햇빛을 공경함에 정성이 깊었다.
한번 피리 부니 삼천(三天) 위이고,
고독한 지팡이는 만 리를 가는 마음
다른 해에 완부(阮孚)의 신으로,
다시 찾아 올 것을 기약한다
경일봉(驚日峯)
연적봉 머리에서 한 지팡이 의지하고,
탁필을 휘둘러 누워서 하늘에 글씨 쓰고 싶네 .
나부끼는 양손에 천풍이 가득하니,
문득 삼매를 생각하며 축융봉을 내려오내,
연적봉(硯滴峯)
세상 밖 연하가 별유천(別有天)인데
산중의 초목이 모두 신선인 듯 하여라,
삼층의 금탑봉이 그림 같은데,
유독 중충에 다섯 절 걸려 있네,
금탑봉 앞 치원대,
멀리 바라보니 열두 절문 열렸네,
높고 낮은 푸른 절벽 석양 아래,
그 누가 화공을 빌려 그림에 옮길꼬.
금탑봉(金塔峯)
석봉이 천길이나 허공에 솟아,
탁립하여 당당하기 정사(正士)와 같네,
뭇 봉우리 진한에도 비길 곳 없어,
의연히 일찍이 화도 중에 보겠네.
탁립봉(卓立峯)
못 봉우리 다투어 김생굴 위에 드러나,
고월(孤月)이 야직도 걸렸으니 치원의 마음이라.
깊은 산중에 사람 보이지 않고.
천추의 대위에 홀로 옷깃을 여미내 .
치원대(致遠臺)
퇴계 이선생의 발문에 이르기를,
안동부의 청량산은 예안현 동북쪽 수 십리에 있으며 황(滉)의 선려(失廬)는 그 길의 반 쯤에 있다. 새벽에 떠나서 산에 오르면 날은 한낮이 못된다. 그러나 이것은 비록 경계는 타군으로 갈리었으나 실은 오가(吾家)의 산이다. 황(滉)은 어려서부터 부형을 따라 이 산에서 몇 번이나 독서했는지 알지 못한다. 고요한 가운데 경서를 궁구함에 심히 득력(得力)하지 못하고서 경솔하게 세로(世路)에 나와 왕래할 즈음에 심경지(沈慶之), 공치규(孔稚圭) 배(輩)가 옆에서 따라 웃고 기롱 하는 듯하다. 선산(仙山)으로 고개를 돌리니 옥같이 연하(煙霞)의 밖에 우뚝 서고, 수 십 년래에 틈을 내어 산의 어구를 거닌 지가 겨우 한 두 번 뿐이었다. 기유년(1549) 봄에 내가 풍기 고을에 갔을 때 다행히 주선생 경유의 유산록(遊山錄)을 고을사람에게서 얻어 읽어보고 거듭 거듭 그 기이함에 탄복하였다. 얼마 안가서 고을을 떠나 청량산 아래에 귀전(歸田)하고 병와(病臥)한 지 사년이나 되었어도 한번도 동문(洞門)을 두드리지 못했다. 참으로 뜻밖에도 지금 서울(京師)에 와서 선생을 하료(下僚)로서 함께 즐겼다. 선생이 하루는 혜연(惠然)히 내방(來訪)하여 책 한권을 보이는데. 그것은 유록(遊錄)이었다. 전에 비하여 십중(十中) 사오(四·五)는 더해졌다. 이에 더욱 보지 못했던 내용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이에 탄복하고 말하기를, ‘거룩하도다! 선생이 이 산(山)에서 얻음이여!’라고 했다. 홍몽(鴻濛)이 부판(剖判)하고 융결(融結)하여 고심(高心)한 경치가 몇 천만년인지 알지 못하고, 하늘이 그 경치를 갈무리고, 땅이 그 기이(奇異)함을 감춘 것은 곧 선생의 글을 기다려서 그것이 발천(發闡)된 것이니 어찌 이 청량산(淸凉山)이 큰 다행이 아니랴. 하물며 산의 제봉이 모두 불서(佛書)의 황망(儒忙)한 말과 불가(佛家)의 음혼(淫昏)한 이름을 무릅쓰고 지어졌으니 이것을 참으로 선구(仙區)의 욕(辱)이 되며, 오배(吾輩)의 수치(羞恥)이다. 이제 선생이 모두 고치고 절실하게 그 오욕을 씻었으니 산령(山靈)에 위로되고 정채(精采)가 빛남이 어떠하였겠는가. 후에 돌아가서 내 손으로 한 통 써서 석실(石室)에 갈무리하여 반드시 잘 간직하리니 천년이 가도 썩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끝에다 이름을 쓴 것도 큰 다행(多幸)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주경유(周景遊)의 유산운(游山韻)을 차운(次韻)하니 무릉유록(武陵游錄)은 그 필치가 훌륭하여 이는 장주(蔣周)의 바다 붕새의 말을 배운 것이다. 도리어 옛 남악(南嶽)을 읊기를 즐겨 호기로 인하여 방자함이 심하다.
주경유(주세붕)의 유청량산록의 뒤에 쓴시에,
반평생 심장이 쇠끝같지 아니하여 .
선산(仙山)의 묵은 빚을 오래 갚기 어렵다.
몽혼(夢魂)은 때로 다시 맑은 절벽을 능가하는데
몸은 지금도 오히려 진세(塵世)에 떨어져 있다.
백낙천(白樂天)은 여산(廬山)에 들어가 햇빛을 읊고,
한퇴지(韓退之)는 화악(華岳)에 올라 하늘빛을 흔들었네
큰 문장을 다행히 얻어다 읽어보나.
천길 산에 도리어 같이 노니는가 의심된다.
라고 하였다.
여러 벗들과 청량산에서 놀기를 약속하고 말(馬) 위에서 지은 시(約與諸遊淸凉山馬上作)에,
메 속의 산이 오히려 덜 깊음이 한이로다,
새벽 밥 먹고 다시 가서 찾으려내.
뭇 봉우리 눈 가득 나를 맞아 기뻐하니 ,
구름 속에 얼굴 지어 청음(淸吟)을 북돋우네 .
십일월에 청량산에 들어가며(十日月入淸凉)라는 시(詩)에,
벼슬을 쉬고 향리에 있노라니 ,
양병(養病)에 자못 방해되는구나.
선산(仙山)이 멀리 있지 아니하여
목을 늘려 바라보며 이 마음 간절했네.
밤엔 고산암(孤山庵)에서 자고,
새벽에 두 재를 넘어갈 제
층층이 쌓인 얼음을 굽어보고,
첩첩이 가린 메를 우러러 보았도다.
나무다리 밟으며 세찬 개울 건널 때는,
각별히 조심하여 깨우친 바 많았노라
깊은 숲에 태고(太古)의 눈(雪)이 쌓였고,
밝은 태양은 미세한 그림자도 없구나,
비스듬한 지름길은 낭떨어지 미끄럽고,
그 아래 굽어보니 함정과 다름없네 ,
가고 또 가니 힘은 이미 다했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마음 더욱 굳어지네 .
산승(山僧) 웃으며 수고했다 말하면서,
나를 서쪽 집 고요한 곳으로 영접 한다.
팔구일 동안 심신을 안정시키고,
문닫고 머리 내지 않았도다.
등륙(謄六)의 성냄도 보지 못했거니,
하물며 바람소리 어찌 알았으리.
오늘 아침 비로소 햇빛이 고움을 아껴,
지팡이 짚고 바윗길이 펼쳐진 곳으로 갔다.
저 높은 재에 올라서는,
우주(宇宙)를 두 눈으로 바라본다.
쇠한 근력(筋力) 높은 산이 두려워,
이 소원대로 이루지 못한다네
더위잡고 올라가서 좀 시험하려 하나,
돌아보니 구름이 몇 길이 펼쳐졌네.
묘(妙)한 뜻 말하기 어려우나,
아름다운 그 경치 매양 홀로 간직했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니,
이내 몸 깊이 숨어도 한하지 않으리라.
평생 친구 생각이 간절하여,
내 마음에 맴돌아 잊혀지지 않는구나.
고귀한 그 언약 실천하지 못했으니,
멀리 있는 사람 청하기도 어려워라.
이제 어이하면 이곳에 함께 와서,
힘써 절경(絶境)에 이르를꼬.
바위마다 눈내려 봉긋봉긋 솟았는데,
그 위에 달 비치니 더욱 말끔하여라.
유인(幽人)은 앉아서 잠자지 아니하고,
차가운 연못 빛이 암자에 비춰 주네.
밤이 이윽하여 향내마저 사라지니,
그윽히 조용함을 진실로 얻었노라
만길 높은 벼랑 위에 옮겨서 깃드니,
발 아래 굽어보면 측량치 못할 레라.
병든 이네 몸 험한 곳이 두려워서,
자못 쇠한 나이에 거처하기 불안하네.
소연히 산 아래 내려가니,
구름 숲이 멀리 몇 리나 되는가.
청량산 12대(淸凉山 十二臺)
• 어풍대(御風臺) : 금탑봉 중층(中層)에 있다. 하청량암(應眞殿)으로 가는 요로(要路)로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 옛부터 이곳을 찾는 명현달사(名賢達士)들이 이 길을 거닐면서 자연을 음미하고 풍월을 구가 하였으므로 어풍대라 이름지었다.
• 만월대(滿月臺) : 자소봉 아래 만월암 우측에 있다
• 청풍대(淸風臺) : 자소봉 아래 원효암 동쪽에 있다. 석대(石臺)가 평평하여 4-5인 이 앉을 만하다.
• 원효대(元曉臺) : 원효암 앞에 있다. 유리보전 앞의 대(臺)이다.
• 치원대(致遠臺) : 치원암 왼편. 극일암 앞에 있다. 금탑봉 중층이요. 어풍대 쪽이다.
주세붕 선생의 詩가 있다.
“못 봉우리 다투어 김생굴 위에 드러나
달이 외롭게 아직도 걸렀으니 치원의 마음이라.
깊은 산중에 사람 보이지 않고
천추의 대 위에서 홀로 옷깃 여미네”
象峰爭露金生後 孤月猶懸致遠心
三宿山中人不見 千秋臺上獨添襟
• 반야대(般若臺) : 치원대 곁이다. 경치가 고절(孤絶)하다.
• 경유대(景遊臺) : 청량암 앞에 있다.
• 화암대(華巖臺) : 대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 풍혈대(風穴臺) : 극일암 뒤에 있다. 내산(內山)의 모든 봉우리가 보인다. 더운 여름철에도 찬바람이 나온다. 최고운(崔孤雲)이 독서하고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 학소대(鶴巢臺) : 축융봉 서쪽 낙동강변에 있다. 높이가 천장(千丈)이 요대(臺) 아래에는 깊은 물이 맑으니 청량동구(淸凉洞口) 제일절경이다. 현학(玄鶴. 먹황 새) 날아와 알(卵)을 낳고 새끼를 쳤으나 지금 은 오지 않는다.
• 금강대(金剛臺) : 장인봉 서쪽 금강굴 앞에 있다. 청량동구 계곡을 사이에 두고 학소대와 좌우로 갈라져 있다.
• 요초대(瑤草臺) : 총명수(聰明水) 앞에 있다.
• 채하대(彩霞臺) : 안중사(安中寺. 최치원을 위하여 밥을 지어주던 노파의 소상을 모신 절) 앞이다.
청량산(淸凉山) 8굴(八窟)
• 김생굴(金生窟) : 경일 금탑 양봉(兩峰) 중간에 있다.
• 원효굴(元曉窟) : 원효암 뒤에 있다. 경치가 그윽하고 한가하다.
• 의상굴(義湘窟) : 장인봉 의상암 뒤에 있다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비조(鼻祖)인 의상대사가 입산수도 할시 기거한 곳이다.
• 반야굴(般若窟) : 반야암 부근에 있다.
• 고운굴(孤雲窟) : 치원대 뒤에 있다. 고운이 이곳에서 독서를 하였다 하여 독서굴(讀書窟) 이라고도 한다.
• 금강굴(金剛窟) 장인봉 서쪽에 있다. 금강대 후면(後商)이다. 가히 수십인(數十人)이 비바람을 면할 수 있다. 밖에서는 가히 알지 못한다.
• 한생굴(邯生窟) : 산성(山城) 건너편에 있다. 가히 수인(數人)이 앉을수 있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한씨(邯氏)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서 수련(修練)했다 한다. 어느 때 사람인지 모른다.
• 방장굴(方丈窟) : 어느 곳인지 모른다.
○문수산(文殊山) : 물야면 개딘리, 춘양면 서벽리, 봉성면 우곡리에 연(蓮)해 있는 산으로 높이는 1,206미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봉화의 진산(鎭山)이라 하였다. 산중에는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의 상조사가 창건한 축서사(鷲棲寺)가 현존하며, 중대사(中臺寺), 서벽사(棲碧寺) , 공벽암(控碧庵) 등 많은 사지(寺址)가 있다.
○비파산(琵琶山) : 소천면 서천리에 있다. 개내산(介乃山) 또는 장군봉(將軍峰)이라고도 한다. 이산에는 개내사(介乃寺)터가 있다. 산위에 삼층석실과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그 크기가 기둥과 같으면 결실(結實)하면 그 크기가 되(升)만하고 빛은 푸르며 단단하기가 돌과 같아서 먹을 수 없다. 또 장군석(將軍石)이 있는데, 쌍으로 솟아 있고 눈(雪)처럼 희다.
○봉래산(蓬萊山) : 소천면에 있다. 절벽(絶壁)이 천 길 이며, 깊은 못이 가로 펼쳐서 푸른 새가 매양 사월이면 둥지를 찾아와서 절벽 위에 새끼를 친다. 큰 것은 까치만하며 날아오르면 창공을 솟아오르니 사람들이 그것을 청학(靑鶴)이라 한다.
○백병산(白諦山) : 석포면 승부리에 있다.
태백산에서 와서 바위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절벽이 깎아 질렀다. 영가지에는 개단부곡(皆丹部曲) 서북쪽 10리에 있는데, 산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돌아서 예부현(禮夫峴)이 되었다 했다.
○호애산(虎崖山) : 봉화읍 포저리에 있다. 호골산(虎骨山)이라고 부른다.
○당북산(堂北山) : 봉화읍 포저리에 있다. 당북산 봉수지가 있다.
○풍락산(豊樂山) : 명호면 풍호리에 있다. 초방산(草芳山)과 더불어 옛날부터 선약(仙藥)이 난다고 전해온다. 풍락산성이 있었고 기인(奇人) 임(林)장군이 가래로 비진에서 풍락산까지 길을 닦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절터가 있으며 불상이 남아 있었다.
○연화봉(蓮花峰) : 석포면 대현리에 있다. 산의 경치가 기암절벽으로 수려하다. 산록(山麓)에는 평천동굴이 있으며 국내 최대 아연 생산지였다.
○각화산(覺華山) : 춘양면 석현리에 있다. 높이는 1,176미터이다. 산중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태백산 사고지가 있으며 신라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각화사가 있다.
○화장산(華獐山) : 법전면 어지리에 있다. 높이는 859미터이다. 임진왜란시 의병장 류종개가 의병 백여 명을 모아 왜병 3,000여 명과 격전 중 전사한 곳이다. 화장사가 있다
○용각산(龍角山) : 명호의 진산으로 옛 기록에 산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용이 살고 있는데 산 중턱에는 용의 입과 같은 굴이 있다고 한다.
○구룡산(九龍山) : 춘양면 서벽리에 있다. 높이는 1,346미터이다.
○월암봉(月巖峰) : 석포면 대현리에 있다. 높이는 608미터이다. 달바위봉이라고도 부른다.
○청옥산(靑玉山) : 석포면 대현리에 있다. 높이는 1,227미터이다. 태백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고 청옥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진암봉(辰巖峰) : 석포면 대현리에 있다.
○면산(綿山) : 석포면 석포리에 있다. 높이는 1,245미터이다.
○묘봉(猫峰) : 석포면 석포리에 있다. 높이는 1,168미터이다.
산아래에 반야천이 흐른다.
○삼방산(三芳山) : 석포면 석포리에 있다. 높이는 1,175미터이다.
○오미산(悟味山) : 석포에 있다. 높이는 1,071미터이다.
○비룡산(飛龍山) : 소천면 분천리에 있다. 높이는 1,129미터이다.
○배바위산 : 석포면 승부리에 있다. 높이는 968미터이다.
○횡악산(橫岳山) : 소천면 분천리에 있다. 높이는 820미터이다.
○죽미산(竹美山) : 소천면 임기리에 있다. 높이는 907미터이다.
○장군봉(將軍峰) : 소천면 서천리에 있다. 높이는 1,042미터이다. 풍수지리설에 장군혈이 있다고 한다.
○제비산 : 소천면 서천리에 있다. 높이는 768미터이다.
○형제봉(兄弟峰) : 춘양면 소로리에 있다. 높이는 833미터이다.
○왕두산(王頭山) : 춘양면 석현리에 있다. 높이는 1,044미터이다.
○옥석산(玉石山) : 춘양면 서벽리에 있다. 높이는 1,076미터이다. 옥돌봉이라고도 한다.
○삼동산(三洞山) : 춘양면 우구치리에 있다. 높이는 1,180미터이다.
○만석산(萬石山) : 봉황산에서 와서 가평 북쪽, 산운(山雲) 남쪽에 있다. 그 동쪽은 옛날 안동땅이었다.
○선달산(先達山) : 물야면 오전리에 있다. 높이는 1,234미터이다.
○만석봉(萬石峰) : 춘양면 의양리에 있다, 만석봉 때문에 춘양에 만석거부가 난다는 풍수설이 있다.
○황우산(黃牛山) : 명호면 고개리에 있다. 높이는 622미터이다. 산 위에는 큰 집터가 있다.
○문명산(文明山) : 명호면 북곡리에 있다. 높이는 893미터이다.
○덕산봉(德山峰) : 재산면 남면리에 있다. 높이는 745미터이다
○공 산(功山) : 재산면 갈산리에 있다. 높이는 618미터이다
○만리산(萬里山) : 명호면 관창리에 있다. 높이는 791미터이다.
늘못에는 분화구 같이 생긴 큰 못이 있다.
이 못에 이무기가 살았는데 못 둑에 소를 메어두면 이무기가 잡아먹어 고삐만 남 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파리봉 : 상운면 토일리에 있다. 높이는 496미터이다.
○옥녀봉(玉女峰) : 상운면 설매리에 있다. 높이는 357미터이다.
○송관산(松官山) : 봉화읍 황전에 있다. 안양사지(安養寺逃)가 있다.
이 절터에 용연(龍淵)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기우(祈雨)의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노인봉(老人峰) : 봉화읍 화천리에 있다.
○구봉산(九峰山) : 봉화읍 황전에 있다. 성거사(成居士)가 예언한 명당이 있다고 한다.
○매봉산(鷹坊山) : 봉화읍 해저리와 물양면 수식리의 경계에 있다.
매봉사(鷹坊寺)가 있다.
○갈방산(葛坊山) : 법전면 풍정리에 있다. 곧 우곡의 동쪽이다.
산마루에 철마(鐵馬)가 있다. 높이는 592미터이다.
○감의산(感依山) : 법전면 소천리에 있다. 높이는 593미터이다.
○옥적봉(玉笛峰) : 봉화읍 유곡리에 있다.
옥적봉의 영향으로 닭실에 대대로 문인이 배출된다고 한다.
옛사람이 달밤에 이 봉우리에서 피리를 불었다하여 옥적봉 이라고 한다.
○용두산(龍頭山) : 봉성면 동양리에 있다. 인근에 마두산(馬頭山)과 철태산(鐵笞山)이 있는데 용두산에는 장수가 나고 마두산에는 명마가 고 철태산에는 철태가 난다는 전설이 있어 이여송이 맥을 질렀다고 한다.
○왕자봉(王字峰) : 군(郡)남쪽 40리 임당(林塘)경계에 있다.
봉우리 3개가 연이어 있어 왕자(王字) 같아서 이름지었다. (영가지)
○상제봉(上帝峰) : 군(郡) 동쪽 80리에 있다.
(在郡東八十里 南厓하니 雄蹲 可威) -영가지
○봉황산(鳳凰山) : 혹 당산(唐山)이라고도 한다. 골내(花川)남쪽,
도촌 북쪽에 있다. 산허리에 우물이 있는데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기도 하며 가뭄에 빌면 영험이 있었다고 전한다.
○옥봉(玉峰) : 곧, 당산(唐山) 동쪽 기슭으로 구만서원(龜滿書院)의 진산이다.
○태봉(台峰) : 도촌(桃村)남쪽에 있다.
○관식산(觀式山) : 관식촌(觀式村) 뒤에 있다.
(현재 춘양면과 소천면 경계로 추정) 와란의 시냇물은 봉화의 양정(陽井)으로 들어가고, 우곡의 시냇물은 봉화의 창해(昌海), 사동(沙洞)으로 들어가고, 법전(法田)의 시냇물은 봉화의 갈천(葛川)으로 들어가고 춘양 관식(觀式)의 냇물은 소천으로 들어간다.(순흥지)
○단산(丹山) : 봉화읍 문단리에 있다. 단계서원의 주산(主山)이다
○탑성봉(塔星峰) : 봉화읍 문단리에 있다.
빈동(賓洞) 수구(水口)에 있다. 평지에 우뚝 솟아 안계(眼界)가 시원 스럽다.
0 河 川
本郡의 水系(河川)는 太白山과 그 群小嶺峰을 分水嶺으로 하여 3系統으로 區分된다.
本郡의 東北部에 洛東江 水系가, 西南部에 乃城川, 中北部에 南漢江 등 3大水系로 區分한다.
이와 같이 形成된 河川의 數는 2大本流(洛東江, 南漢江)에서 第1支流의 河川이 13個 河川이며 第2支流가 5個 河川, 第3支流가 39個 河川으로 모두 59個 河川으로 流域面積은 2,037,76㎢이며 延長은 396.5km에 達한다
本郡의 平均 降水量이 900~l,200mm로서 山川景色이 秀麗하고 山株이 蠻蒼하다. 이와 같이 自然環境의 影響을 받아 郡內에 小水力發電所가 3個所 建設되어 있으며 安東 多目的댐의 用水豊 80%~90%가 本郡에서 淵源된다.
○내성천(乃城川)
乃城川은 文殊山과 小白山脈을 分水嶺으로 하여 15個의 河川(第3支流)으로 形成된 大河川이다. 乃城川의 本流는 奉化邑 三溪里에서 始發하여 榮州市 平恩面을 거쳐 멀리 醴泉郡 豊壤面에서 洛東江과 合流한다.
乃城川은 本郡의 西南地域 뿐만 아니라 榮州·醴泉郡과 安東地方의 一部河川이 모두 乃城川支流이다.
特히 乃城川은 거의 河川의 地盤이 農地보다 높은 地帶에 位置한 天井川으로 形成하여 灌漑水利惠澤을 賦與하고 있어 이 流域이 豊饒한 穀倉地勞를 이루어 주고 있다.
郡內의 乃城川 流域面積은 454.18㎢이며 延長은 136.10km에 達한다.
○낙화암천(落花岩川)
本河川은 乃城川의 第1支流로서 小白山脈을 分水嶺으로 榮州市 丹山面 馬落洞에서 淵源하여 榮州市의 浮石面과 物野面의 水息을 經由하여 奉化邑의 花川都材을 거쳐 奉化邑 赤德里에서 乃城川과 合流한다. 郡內의 落花岩川 流域面積은 94.88㎢에 延長은 29.00km에 達한다.
순흥지에는 화천(花川)이라 하고 곧 감계(鑑溪)하류로 동애(東崖), 모정(芽亭)을 지나고 수민단(壽民丹)의 요산(腰山)에서 내성천으로 흘러든다. 물줄기가 이리굽고 저리 감돌아 사리고 꿰어지냄으로 옛 이름이 관천(率川)이다.
※관천은 곧 “꽃내”가 변해서 “골내(流川)”로 되었다
○가계천(駕溪川)
乃城川의 第1支流로 文殊山과 朴達嶺을 分水嶺으로 하여 物野面 梧田里와 皆丹里에서 始作하여 奉化邑 三溪里에서 乃城川과 合流한다. 流域面積은 68.28㎢에 河長은 15.4km이다.
순흥지에는 가구계(可丘溪)라 하고 그 근원은 두 갈래다. 하나는 만석산 주륵동(注勤洞)에서 하나는 응방산 청운동(靑雲洞)에서 나온다. 가구촌(可丘村), 경암정(耕老亭)을 지나 봉화의 물야천(勿野川)에 합친다.
○창평천(昌坪川)
乃城川의 第1支流로 文殊山과 葛坊山을 分水嶺으로 鳳城面 愚谷里에서 始發하여 奉化邑 三溪里에 와서 鴐溪川과 같이 乃城川에 合流한다. 流域面積은 21.5㎢이며 길이는 16km에 이른다.
○토일천(吐日川)
乃城川의 第1支流로 鳳城面 鳳城里에서 始作하여 祥雲面 文村, 吐日을 거쳐 榮州市 伊山面 新川里에서 乃城川과 合流한다. 流域面積은 125.30㎢에 河長은 23.40km이다.
○구천천(九川川)
九川川은 祥雲面 下訥里에서 始發하여 祥雲面 九川里를 거쳐 伊山面 新川里에서 乃城川과 合流하는데 流域面積은 31.90㎢에 河長은 14.4km이다.
○운곡천(雲谷川)
雲谷川은 文殊山, 玉石山, 覺華山 등 太白山 支嶺을 分水嶺으로 春陽面 西碧 艾堂里에서 淵源하여 法田面 召川里를 거쳐 明湖面 刀川里에서 洛東江과 合流한다. 流域面積은 232.53㎢에 河川의 길이는 36.6km에 이른다.
○우구치천
本郡의 河川은 거의 洛東江에 合流하는데 이 河川은 太白山과 玉石山을 分水嶺으로春陽面 牛口峙里에서 測源되어 江原道 寧越郡을 거쳐 멀리 京畿道 驪州에 가서 漢江原流에 合流한다 本郡內의 流域面積은 22.70㎢에 河川의 길이는 35.2km에 이른다.
○재산천(才山川)
才山川은 日月山을 分水嶺으로 才山面 東面里와 南面에서 發生하여 才山面의 縣洞, 葛山里를 거쳐 明湖面 三洞里의 合江 나루에서 洛東江에 合流한다. 特異한 것은 本郡의 河川이 거의 南流하는데 南漢江과 才山川은 北流(逆流)하고 있다. 流域面積은 86.95㎢에 河長은 21.40km에 이른다.
○송정리천(松亭里川)
이 江은 太白山과 蓮花峰이 分水嶺이 되어 小川面 大峴里에서 始原하여 小川面 石浦里 六松亭에서 洛東江에 合流한다. 특히 松亭里川의 水溫은 夏節期에도 20度 內外로낮아 天然記念物인 熱目魚의 棲息地로 特別 保護 管理하고 있다. 流域面積은 49.85㎢에 河長은 15.60km이다.
○석포리천(石浦里(半夜)川)
石浦里川을 半夜川이라고도 하는데 描峰과 綿山을 分水嶺으로 東은 江原道에 흘러 五十川을 이루고 西로 흐르는 江이 石浦里川이다. 小川面 石浦里에서 始發하여 石浦里에 洛東江과 合流한다. 流域面積은 62.25㎢ 河長은 13.60km이며 여기에도 水溫이 낮아 奧地에 熱目魚가 棲息하고 있다.
○회룡천(回龍川)
이 江은 日月山이 分水嶺이 되어 小川面 南回龍里에서 始發하여 才山面 葛山里와 小川面 西川里를 거쳐서 洛東江에 合流한다. 流域面積은 71.98㎢이며 河長은 26.20km이다.
○현동천(縣洞川)
縣洞川은 太白山과 月岩山이 分水嶺이 되어 小川面 古善里 九馬洞에서 始原하여 小川面 順洞里에서 洛東江에 合流한다. 流域面積은 105.25㎢이며 流路延長은 24.00km이다. 이 河川도 水溫이 낮아 熱目魚 捿息場을 九馬洞溪谷에 設置하여 保護管理 했으나 지금은 없다.
○낙동강(洛東江)
洛東江 七百里는 太白山을 分水嶺으로, 江原道 太白市 黃地에서 發源하여 銅店 ‘구모쏘’를 거쳐 本郡에서 여러 群小河川과 合流하여 安東으로 흘러 내려간다. 特히 洛東江의 河床은 本郡에서 農耕地보다 낮은 地勞에 있어 灌漑利用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沿東江沿邊에는 淸凉山을 비롯한 觀光地와 奇崙絶景의 아름다운 자랑하고 있다.
o쑥밭물(艾田水) : 우구현(牛口峴)에서 근원하여 남으로 흘러, 뒷뜰(後坪)에 이르러 옻밭(漆田)물과 합치고, 榮州의 신담(薪潭)으로 들어간다.
o압동(鴨河)물 : 봉황산 동쪽기슭에서 나와서 압동·사동(沙洞)을 지나, 산운(山雲) 동쪽에 이르러 榮州 오계(梧溪)로 들어간다.
o수식계(水息溪) : 근원이 세 갈래로, 하나는 천곡(泉谷)에서, 하나는 조동(槽洞)에서, 하나는 조양(朝陽)에서 나와, 두문(斗文) 앞에서 합치고, 남쪽으로 흘러 거래암(去來岩)을 지나, 동편으로 지림간(智林澗)을 받고, 서편으로 화부간(花釜澗 : 부석 화가메 냇물)을 받아, 수식현(水息順)을 지나, 또 동편으로 도점동(陶店洞) 물을 받아 큰 시냇물이 되고, 남쪽으로 이부석(二浮石)의 감계(鑑溪 : 浮石川)와 합친다.
o단계(丹溪) : 빈동(賓滴)에서 근원한다. 동남으로 흘러 단계서원을 지나 사암(蛇岩) 동쪽에서 榮州의 신천(新川)으로 들어간다.(新川은 지금 伊山面 新岩里 냇물. 곧 乃城川이다.)
0 고개
○ 봉화읍(奉化邑)
* 봉우재 : 포저3리 가래골 동쪽에 있다. 봉수대로 올라가는 재라하여 봉우재라 하 였다.
거촌, 산정, 개밑으로 연결된다.
* 비티재 : 유곡과 삼계 사이에 있다.
충재 선생이 삼척부사로 부임할 때 통행이 불편하여 울창한 나무를 베어내고 길 을 만들었다고 한다.
* 송화목재 : 유곡에 있다. “수천”에서 북쪽 “송새이”로 가는 재로서 소의 목처럼 생 긴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물야면(物野面)
* 덕고개 : 물야에서 오전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 범고개 : 오록리에 있다. 조선시대에 순흥도호부와 부석을 왕래하던 개인데, 오록 4리에서 압동리 사골로 통한다. 당시 호랑이가 넘나 들던 곳이라 하여 범고개라 한다.
* 예부령(禮夫嶺) : 개단리 문수산에 있다. 예비령, 예비재, 예배령(禮拜嶺)이라고 도 한다.
오록, 봉화장을 보기 위해 춘양, 영월, 상동 등지의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
이 재를 넘기 위하여 하룻밤을 묵고 넘어야 되기에 예비재라 부른다. 지금은 왕 래하지 않는다.
* 석현(石峴·돌고개) : 개단3리 은봉에서 마장으로 통하는 고개이다. 주변에 돌이 많아 돌고개라 한다.
* 주실령 : 물야면 오전과 춘양면 사이에 있다.
높은 재로서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이곳까지 물이 차있어 배가 다니는 고개라 하 여 배주(舟)를 써서 주실령이라고 부른다. 재 정상에서 문수산과 옥석산을 갈 수 있다.
* 박달령(朴達嶺) : 오전리에 있다. 이 재를 넘어서 영월로 간다.
보부상들이 이 재를 통해 한양으로 왕래했다고 하여 고개 마루에 성황당이 있어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에 고사를 지내며, 현재 성황당은 1994년 8월에 지었다. 선 달산과 옥석산으로 갈 수 있다.
* 곰티재(熊皓) : 오전리 곰직이골(웅동熊洞)에서 영월로 내왕하던 재이다. 풍수지 리설에 의하면 곰의 혈이 있다하여 명당을 찾기 위해 많은 풍수들의 왕래가 있었 다. 단군신화와 관련지어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이 없고 흔적만 남아있는 험준한 재이다
* 늑고개·륵고개 : 압동2리 재기에 있다. 들이 넓어 곡식이 많이 생산 된다고 고방 廩 자를 써서 름고개로 부르다가 륵고개로 변했다.
* 지사고개 : 압동2리에 있다. 옛날에 이 고개로 관청의 관리들이 다녔다하여 갈지 (之) 字 선비 사(士) 字를 붙여 지사고개라 했다.
고개에 모래가 많고 구불구불 넘어 다닌다고 하여 어름이라고도 한다.
* 황토고개 : 압동에 있다. 옛날에 집을 짓기 위하여 황토 흙을 파서 싣고 넘던 고 개라 하여 황토고개라 한다.
* 이야재(伊也峴) : 두문1리에 있다. 경사가 완만하고 1km정도 된다. 미에서 샘실 을 거쳐 가평과 연결된다. 베틀의 이애 형상으로 생겨 이애재라고 한다.
* 당재 : 두문2리에 있다. 구이골에서 사곡으로 넘어가던 고개에 매년 정월달에 재 를 올리던 사당이 있어 당재라 했으나 지금은 없다.
* 서고개 : 수식에 있다. 부석 용암으로 가는 길목이다. 해가 서쪽으로 진다하여 서 고개라 한다.
* 목고개 : 수식에 있다. 부석 용암으로 가는 길목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고산재(무래고개재) :수식에 있다. 부석 고산리를 넘어가는 재라고 해서 고산재라 한다.
* 동막재 : 북지3리에 동막에 있다.
* 솔고개 : 북지4리에 있다. 고개 양편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솔고개라 한다.
* 만항현(晩項峴) : 오전에서 단양군 영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사기점 북쪽에 있다.
○ 봉성면(鳳城面)
* 빙재 : 봉성 면사무소 뒷길로 옛날에 석빙고가 있어 빙재라 하였다.
예전에는 높았으나 지금은 평탄하다.
* 가붓재 : 우곡에서 도심으로 통하는 재이다. 및 고갯길 흔적이 남아 있고 꽃뱅이 뒤쪽 고개마루에는 수백 년 수령의 소나무가 울창하다. 이 고개길을 따라 林道가 개설되어 서벽 두내로 이어진다.
* 작곡재 : 봉성2리에 있다.
현감이 부임할 때 고을이 작고 산골이라 슬퍼하고, 떠날때는 정이든 곳을 떠나기 가 싫어 뒤돌아보며 작별하던 고개라 하여 작곡재라 한다.
* 영말무덤재 : 봉양리에 있다.
옛날 관아에서 기르던 말이 죽으면 이 재에 묻었다하여 영말무덤재라 한다. 지금 은 재 아래로 도로가 개설되어 이용하지 않는다.
* 괴암(갱바우재) : 봉양에 있다.
새마에서 봉양으로 넘어가는 재로서 예전에 이곳에 괴상하게 생긴바위가 있어 괴 암재라하였으나 부르기 쉽게 갱바우재라고도 한다.
* 다덕재(多德峴) : 다덕약수탕에서 갈방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계지재(桂枝) : 봉양에 있다.
옛날에 이 재에 계수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재의 형상이 계수나무 가지가 뻗은 것처럼 보여서 계지재라 하였다 하는데 이름을 알수 없는 승(僧)이 재를 지 나가다가 부모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좋은 묘터를 알려 주었는데 스님이 떠 나고 그 묘터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찾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 성불등(成佛登) : 우곡에 있다 노승(老僧)이 성불(成佛)할 수 있는 명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사마재 : 봉양리에 있다.
○ 법전면(法田面)
* 바우재 : 법전1리 용동에서 풍정으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고개에 큰 바위가 있어 바우재라고 한다.
* 늘고개 : 풍정1리에 있다.
고개가 완만하게 생겼다하여 늘고개라 한 다.
* 조고개 : 풍정1리에 있다.
철새들이 남쪽으로 왔다가 북쪽으로 돌아갈 때에 잠시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조고개라 한다.
* 가마고개(釜峴) : 풍정2리 심새에 있다.
옛날에는 부고개촌(父古介材)이라 했다.
* 노룻재(獐峴) : 법전 어지리 녹동에서 소천 현동리 사이다.
임진왜란 때 봉화의병장 류종개를 위시하여 100여 명의 의병이 왜 적과 싸웠다.
* 방고개 : 눌산에 있다.
○ 춘양면(春陽面)
* 돌고개(石峴) : 석현2리에 있다
* 배고개 : 애당 대티 남쪽에 있다.
커다란 돌배나무가 있어 나그네들이 쉬어 넘었다.
* 당재 : 도심1리 새터에 있다.
옛날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밑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여서 며느리가 독에 물을 채우다 기진하여 죽자 동네 사람들이 며느리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당재를 넘을 때마다 작은 돌을 쌓아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 성재(장고개) : 도심리 황터 남쪽에 있다.
부족국가 시대에 구령국왕이 쌓은 성(城) 터가 약 60m정도 남아 있다. 장수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일명 장고개라고도 하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 뱀재 : 서벽리 꽃마에 있다. 손골에서 뱀재들로 넘어가는 고개로 산 의 능선이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뱀머리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하여 많은 묘지가 있다.
* 갈마골 목재 : 서벽골마 서쪽에 있다.
옛날 서속(조) 1천석을 하는 손북술(孫北述)이라는 부자가 꽃마에 와서 마을을 개척하고 살았는데 손님이 많이 찾아와서 매일 쌀을 씻는 쌀뜨물이 골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그러나 손북술의 아내는 손님 치기에 힘이 들어 시주 온 스님에게 말하기를 “우리집에 손님이 오지 않게 하여준다면 많은 시주를 하겠다.” 하나, 스님이 말하기를 “집 뒤로 뻗어있는 갈마등 중간을 끓어 길을 내면 손님이 적게 올 것이다.” 라고 했다. 손씨 아내는 스님에게 후하게 시주하고 갈마등을 잘라 길을 내게 하였는데 그 곳에서 피가 흘렀다고 한다. 그 후 차츰 찾아오는 손님도 줄고 가세도 기울어져 망했다는 전설이 있다. 갈마등은 산등이 말머리 같이 생긴 곳으로 갈증이 난 말이 물을 마시러 가는 형상이라고 한다.
* 신재 : 서벽2리 서쪽 2km정도 떨어진 나지막한 고개이다.
옛날부터 신부가 신행길에 가마꾼의 부주의로 떨어져 죽었다하여 신재, 신재물로 부른다. 지금도 그 신부의 무덤이 있다.
* 도래기재·도력령(道驛嶺) : 서벽 북쪽에 있다. 경상도와 강원도의 교류가 많았고 일본인이 개설한 터널(I50m정도)이 있다.
* 비행기재(우구현) : 우구치에 있다. 영월로 통한다.
* 고직령(高直嶺) : 서벽에서 태백산과 영월, 정선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적현(高適峴)이라고도 한다.
○ 소천면(小川面)
* 전피현(締皮峴) : 소천 현동에서 법전 어지로 가는 큰길에 있다.
임진왜란 때 적병이 강원도에서 먼저 소천으로 들어와서 춘양으로 전향(轉向)하는데 의병장 정자(正字) 류종개(柳宗介)가 사인(舍人) 김 인상, 윤흠신, 윤흠도를 거느리고 이 고개에서 역전(力戰)하다가 모 두 흉봉(凶鋒)에 죽었다. 현인(縣人)이 그들을 가련하게 여겨 마치 친척이 슬퍼하는 것 같았다. 그후 조정에서 류종개에게 예조참의를 증직 했으며 후에 물암(勿巖) 김융(金隆)이 이곳을 지나다가 느낌이 있어 만사 한수를 지었다.
張卷從峙膽崢嶸. 風雨鴻毛一人輕. 壯氣不隨忠魄蔡. 百峰千仞怒濤鳴.
주먹을 불끈쥐며 튼튼한 배장을 믿었노라.
비바람 속에 칼끝은 실털같이 가벼운데
사나이 기개가 충혼장사에 닿지 않을건가
천길 깊은골에 성난 물결소리 울렸어라.
* 막지고개 : 현동리(시내)에서 현동역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옛날 울진에서 각종 어물을 지고 하루에 100여 명씩 이 고개를 넘어와 팔았는데 이곳이 마지막 11번째 고개라 하여 막지고개라 한다.
* 잣두들재 : 분천리 황목에 있다. 척구(잣두들)로 가는 재이다.
* 고치비재(高峙嶺) : 분천에 있다. 울진과 통한다.
* 넛재(晩嶺) : 고선과 대현 사이에 있다.
○ 석포면(石浦面)
* 노루목재 : 석포리 반야골 서쪽에 있다.
해방 후 벌목작업을 하기 위하여 노루목 형상의 노루목재를 잘라 길을 낼 때에 피가 흘러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 넛재(晩嶺) : 고선리와 대현리 사이에 있다 해발 889m이다.
* 고개마루에 당집이 있어 매년 4월 초8일날 제사를 지낸다.
* 파탄암현(破呑巖峴) : 석포에서 강원도 동점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지금은 국도 35호선이 통과하는 큰 길이 되었다. 경북과 강원도의 경계이다.
* 솔밭재 : 승부리 남쪽에 있다. 소천 고선리로 통한다.
○ 재산면(才山面)
* 단월재 : 남면1리 천애수에 있다.
* 섬밧재 : 남면1리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 소개재 : 서내재라고도 한다. 동면1리에서 갈산3리, 서천으로 갈 수
있다.
* 쉰등재 : 갈산 2리에 있다. 옛날 춘양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개가 높아 이곳을 지날 때는 반드시 쉬어 넘었다하여 쉰등라 한다. 지금은 내왕이 없다.
* 동솥재 : 갈산2리 미잠에 있다 지형이 작은 솥같이 생겼다.
* 계전현(階田峴) : 남면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지금은 섬밭재라고 한다.
○ 명호면(明湖面)
* 고틔재 : 재산과 명호의 경계를 이룬다.
재가 높아 넘어가려면 틔가 난다(“힘들다”의 사투리)고 하여 고틔재라 한다.
* 덫재 : 삼동1리와 2리의 경계에 있다.
옛날에 범, 산돼지를 잡기 위해 덫을 많이 놓았다고 한다.
* 쌍현 : 명호와 양곡 1리에 있다.
마을뒤쪽에 재가 두개가 있어 쌍현이라 한다.
* 옷갓재 : 풍호 동쪽에 있다.
기인 임장군의 옷과 갓을 묻은 무덤이 있다하여 옷갓재라고 한다는 임장군에 얽 힌 전설이있다.
* 꺼꿀재 : 풍호1리와 2리를 연결하는 재로서 옛날 봉성이나 봉화로 갈 때 이용했 다.
재가 매우 꾸불꾸불하여 꺼꿀재라고 한다.
* 물티재 : 청량골에서 재산 남면 이름실로 가는 고개이다.
고개가 높고 가파르게 생겨서 넘는데 힘이 많이 들어 재를 넘지 못하고 물러선다 고 하여 물티재라고 한다.
일설에는 이곳을 침입한 적을 물리친 곳이라 하여 물티재라고 부른다.
* 진등재 : 관창2리에 있다. 도산면 가송마을에서 올라오는 재가 길어 서 진등재라 고 하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 왜목이 : 명호 북곡리 갈평지에 있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왜병이 오는 것을 망보았다고 하여 왜목이라 고 한다.
재위에는 청량사의 기와를 굽던 가마터가 있다.
○ 상운면(祥雲面)
* 미수고개 : 가곡2리 제궁마을에 있다.
* 신라현(新羅峴) : 문촌에서 신라를 거쳐 태자로 통한다.
신라왕자와 내령군관리 딸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한다.
피부병과 위장병에 특효한 약수가 정상 부근에 있다.
* 사실고개 : 문촌리 갈골 입구에서 깊으실(심곡)까지 약 1.5km의 고개이다.
* 괴별재 : 깊으실과 괴별 사이에 있다.
* 말무덤재 : 문촌리 동쪽에 있다. 큰 마을과 달기리 사이다.
* 긴송이재(長松) : 상운면 신라리 숫돌목에서 문촌리 가시골을 거쳐 호면 골안 앞 으로 연결된다. 회산(晦山) 琴丙烈公의 八景詩가 있다.
* 구름재 : 상운면 문촌리 무진장에서 하늘리 추원재와 봉성면 늪실로 통한다.
용점산 봉수대가 있다.
* 말고개재 : 문촌리 검성골과 덕골에서 운계리 봉우골과 밤골로 통한다.
용점산 봉화대 남서쪽에 있다 지형이 말과 같은 형상이며 옛날에는 낮에도 큰 짐승이 나 타나 사람들이 내왕하기를 무서워 했다 한다.
* 뱀재 : 상운 시내에서 덕골을 거쳐 반송에 이른다.
지형이 뱀의 형태이기 때문에 뱀재라고 하고 남사고의 전설이 있다.
* 수티재 : 상운면과 봉화읍의 경계이다
고개 꼭대기에도 샘물이 솟아나므로 수티재라고 한다.
* 도기재 : 중토에서 구천리 도기로 넘어가는 재이다.
재 마루에 삿갓모양의 큰 소나무가 있어 삿갓재라고도 한다.
지금은 소나무가 없다.
* 청고개 : 상운에서 구천을 넘어가는 고개이다.
* 여우목재 : 중토일에 있다. 상운과 통하는 재이다.
일명 여수목재라고도 하며, 옛날에 여우가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
* 월오현(月午峴) : 신라리에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밤에 이 고개를 넘을 때 달빛이 밝아 낮과 같다하여 월오현이라 했다고 전한다.
* 도마령(道馬嶺) : 신토일에 있다.
구천리에서 신토마을을 지나 매정리로 통한다.
옛날에는 안동 도산에서 영주, 순홍으로 통하는 大路였다.
고개가 높고 물이 귀하여 도마령에 모를 심으로 온 나라가 모심기를 마친다는 이 야기가 있다.
* 솔고개 : 하토에서 구천리로 통하는 고개이다.
소나무가 많아서 솔고개 한다.
* 막지고개 : 토일리에 있다.
하토에서 안동 녹전으로 통하는 고개로서 봉성현에서 안동으로 가는 마지막 고개 라고 하여 막지고개라고 한다.
또 마지막 간다고 하여 가마나 상여가 넘지 않는 고개라고 한다.
* 매방재 : 창팔 북골 마을에 있으며 옛날에 이곳에서 매를 날려 묘터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 돌고개 : 설매리 남쪽에 있다. 돌이 많은 고개이다.
* 널미재 : 설매리에 있다. 달개재라고도 한다.
* 다리재 : 신라 동쪽에 있다. 태자동으로 통한다.
0 形 勝
o 회로대(會老臺) : 물야면 개단리에 있다.
문수산에서 홀러내리는 맑은 물가에 큰바위 (巨巖)가 우뚝 솟아 부용당(芙蓉堂) 성안의가 늘 여기서 소요했기에 그 후손이 대를 지었다. 옛날에는 이름이 없었는데 景宗3년(1723) 부근 노인들이 여기서 모임을 베풀어 인하여 회로대라 했다.
창설 권두경(蒼雪 權斗經)의 기문이 있다. 단애 성대하(丹厓 成大夏)의 시(詩)가 있다.
o 강선암(降仙巖) : 물야면 북지리 호골산(虎骨山)아래 물야계(勿野溪)에 있다.
기암(奇巖)이 평평하고 못이 깊고 밝아 죽창 금오(竹窓 琴梧)가 낚시를 하며 놀았다. 옆에서 사람이 바라보면 마치 신선이 노는 모습과 같아서 강선암이라 하였다.
노봉 김정(蘆峰 金)의 詩가 있다.
o 거래암(去來巖) : 물야면 수식에 있다. 횐반석이 두 산 사이에 서로 깔리고 물이 그 가운데로 흘러 고이고, 물가에는 양편으로 넓다란 반석이 물을 따라 길게 뻗어 깔렸다. 옹기종기 서로 엎드리고 한 바위에 부서지는 여울소리도 시원하며 한마당 수구(水口)의 기승(奇勝)을 이룬다. 바위에 “去來巖” 3자가 새겨져 있다.
察訪 裵幼章 이 시거(始居)했다 영천(영주의 옛지명)으로 가는 길가에 있어 매양 오고가는 길에 늘 여기서 쉬었다 하여 거래암이라 했다.
o 행단(杏壇) : 물야면 수식리 행계서원 뒤에 있다. 단(壇)앞에 큰 은행나무가 있고 우측편 계곡에 높이 너덧길쯤의 깎아지른 바위로 쏟아지는 냇물이 작은 폭포가 되고 조그마한 못을 이루는데 자못 유취(幽趣)가 있다.
o 화석담(花石潭) : 물야면 가평에 있다. 백은(白隱)정지목(鄭之穆)소착(所鑿)이다. 지금은 없다. 정지목의 詩가 있다.
o 진의대(振衣臺) : 산운(山雲)동쪽 기슭에 있다. 절벽이 냇물에 드리워 절로 층대(層臺)를 이루었다. 훈도(訓導) 안응규(安應奎)가 산운에 살 때 명사들이 여기서 놀았다.
o 유암(楡岩) : 천곡(泉谷)뒤에 있다. 동쪽기슭 바윗가에 느릅나무를 심었다 처사(處士)배유장(裵幼章)이 여기 집을 짓고 유암이라고 했다.
o 금강대(金剛臺) : 물야면 사곡에 있다. 안촌 배응경 (安村 裵應褧) 소축(所築)이다.
o 사우대(四友臺) : 물야.황해의 좌청룡안(左靑龍岸)으로 정지목(鄭之穆)이 놀던 곳이다. 대(臺) 아래에는 鄭之穆이 심은 늙은 버들이 1주가 있다.
o 학소대(鶴巢臺) : 청량산 동구 낙동강 변(邊)에 있다.
o 강림대(江臨臺) : 매토천 하류(명호)에 있다. 한감 이명필(李明弼)이 “山高月小水落石出” 8자를 새겼다.
o 구암(龜巖) : 봉화읍 해저리 솔안 앞에 있다. 그 모양이 자라(鰲) 같고 바위가 평평하여 가히 백여명이 앉을 수 있다. 10리를 볼 수 있다.
o 송암대(松巖臺) : 봉화읍 유곡리 송암정 옛터이다.
o 풍영대(風詠臺) : 삼계별장 동쪽 담장 밖에 있다.
o 능허대(凌虛臺) : 상운면 문촌리에 있다. 농수 금원정(聾叟琴元貞)이 쌓았다.
o 요산동애(腰山東崖) : 요산촌(腰山村)앞에 있다. 허리는 낮고 머리는 높다. 냇가에 드리운 가파른 절벽위에 쌍계당(雙溪堂)이 있다.
o 고산(孤山) : 사암동(蛇岩洞)어귀에 있다. 일명 청운대(靑雲臺)라고 한다.
o 중구봉(重九峰) : 단계(丹溪)동쪽기슭에 있다. 봉우리에 상하대(上下臺)를 쌓았다.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9월9일에 모임을 가짐으로 이름이다.
o 제월대(霧月臺) : 삼계 합강 서쪽이다.
o 동애(東涯) : 화천(花川)동쪽에 있다. 100척이나 깎아드리운 절벽이 병풍처럼 두른 아래에 맑은 못이 있다. 선비 김성재(金聖齋)가 여기 거닐며 살았다. 그의 시(詩)가 있다.
o 광풍대(光風臺) : 제월대 동편이다.
o 어인대(魚鱗臺) : 상운면 문촌리에 있다. 농수 금원정(琴元貞)이 살던 곳이다.
o 비봉대(飛鳳臺) : 문촌리 비봉산 아래에 있다. “비봉대” 3자가 새겨져 있다.
o 천석암(天石岩) : 한수정 북쪽3리쯤에 있다. 수석(水石)이 기이하여 옛사람들이 놀던 자취가 있다.
o 쌍명담(雙明潭) : 춘양면 서벽리에 있다. 참판 이계로(參判 李啓魯)가 쌍명담을 파고 자연을 벗하였다고 하
나 지금은 없다.
o 곡담(曲潭) : 거연헌(居然軒)아래 1리쯤에 있다. 낭떠러지 절벽이 수십 길이나 솟고 그 아래 깊은 못이 있어 볼만하다.
o 모복암(暢幞巖) : 봉화읍 선돌에 있다. 동암 권이번(東巖 權以璠)이 소축(所築)하고 반석위에 큰 소나무가 있다.
o 하관대(遐觀臺) : 물야사곡(砂谷)에 있다. 배응경(裵應褧)소축이다.
o 동산대(東山臺) : 봉화읍 도촌리 사재마을에 있다. 들녘기슭에 층암절벽이 가파르게 드리우고 시냇물이 절벽을 감아 흐르는데 담심(潭心)에 어우러지는 소나무그림자가 운치를 더한다. 봄이면 두견화(杜鵑花)가 만발하고 바위틈에는 고죽(古竹)이 섭생하여 경승(景勝)이 기절(奇絶)하였다고 한다. 단종(端宗)의 절신(節臣) 이수형(李秀亨)이 그 곁에 살았다. 창석 이준(蒼石 李埈)과 소고 박승임(嘯皐 朴承任)의 詩가 있다.
o 모정(芽亭) : 도촌 동쪽에 있다. 시냇가에 우뚝 솟은 토봉(土峰)이 사천(沙川)에 굽어 드리워 동문(東門)에 절승을 이루었다.
o 석현징담(石峴澄潭) : 춘양면 석현동구(石峴洞口)에 있다. 수석(水石)이 맑고 아름답다. 강학사(姜學士) 某가 정자를 지었으나 지금은 없다.
o 도호석등(桃湖石磴) : 소천면 분천리 도호(桃湖)이다. 수석이 아름답고 많은 못이 맑다.
o 홍제산암(弘濟山庵) : 소천면 고선리에 있다. 지세가 두매 산골이며(幽僻) 경치가 절승이다.
o 유곡청암(酉谷靑巖) : 봉화읍 닭실에 있다. 충재(沖齋)선생이 거북바위(龜巖)위에 청암정을 지었다.
o 석천수석(石泉水石) : 봉화읍 유곡리에 있으며 “사적 및 명승3호” 로 지정되어있다. 경치가 아름답다.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가 지은 석천정사가 있다.
o 소라수석(召羅水石) : 법전면 소천리(召川) 사미정이다.
반석이 넓고 산천이 아름답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이 지은 사미정에 詩와 記가 있다.
o 문암수석(門巖水石) : 봉성면 우곡리 창평저수지 상류에 있다. 수석이 아름답다. 반석이 시내 바닥에 널따라니 깔리고 가운데로 우묵하게 길을 이루어, 냇물이 그 위로 흐른다. 층층이 대(臺)를 이루고 이따금 성낸 물결이 날아쏟혀 두 군데의 폭포가 되어 아래에 깊은 못을 이루었으며 좌우편에 푸른 절벽이 깎아지르고 횐돌이 옹기종기 수놓아 산중의 승경을 펼쳤다.
신선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한다. 바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인지 모른다. 4자(字)의 암각이 있으나 해독이 어렵다.
홍우정(洪宇定)이 즐겨 여기에 유상(遊賞)했다.
o 봉강동천(鳳岡洞天) : 춘양면 서동리(西洞里)거리실에 있다.
백은(白隱) 임돈(任惇)이 살곳을 점쳐보고 남쪽으로 내려와 “鳳岡洞天”을 써서 바위에 새겼다. 개운대(開雲臺)와 태고촌(太古村)이 있다.
o 청하동천(靑霞洞川) : 석천동구에 있다. 대졸재(大拙齋) 권두응(權斗應)이 바위에 글씨를 쓰고 새겼다.
o 용호동천(龍虎洞川) : 봉화읍 해저리 동구 푸른 석벽위에 남호(南湖)김뢰식(金賚植)이 글씨를 본떠서 석각(石刻)했다
o 오계구곡(梧溪九曲)
물야면 오록리에 있다. 노봉(蘆峰) 김정 (金 )이 자주 놀던 곳이다.
· 일곡 초심불웅선 一曲 初尋不用船 (愚山曲)
· 이곡 최암승구봉 二雌 蕞巖勝九峰 (古渡曲)
· 삼곡 등대파옥선 三曲 登臺把玉船 (振衣曲)
· 사곡 평교입예암 四曲 平郊立豫巖 (豫巖曲)
· 오곡 산회경전심 五曲 山回境轉深 (松亭曲)
· 육곡 지대침벽만 六曲 池臺枕碧灣 (汾浦曲)
· 칠곡 수론상벽탄 七曲 垂論上碧灘 (下潭曲)
· 팔곡 징흥수묘개 八曲 潑泓數畝開 (中潭曲)
· 구곡 임만경울연 九曲 林巒更蔚然 (上漂曲)
o 춘양구곡(春陽九曲) : 춘양천에 있다.
· 일곡 적연가이선. 一曲 笛淵可以船
· 이곡 옥천천상봉. 二曲 玉川川上峰
· 삼곡 풍대가약선. 三曲 風臺架若緖
· 사곡 연지인석암. 四曲 硯池印石巖
· 오곡 창애고차심. 五曲 滄崖高且深
· 육곡 쌍계요석만. 六曲 雙溪繞石灣
· 칠곡 서담주입탄. 七曲 書潭注入灘
· 팔곡 한정제야개. 八曲 寒亭際野開
· 구곡 도연경활연. 九曲 道淵更活然
o 광진구곡(光津九曲) : 물야계(勿野溪)에 있다.
· 일곡 병암객하선. 一曲 屛巖客下船
· 이곡 쟁영옥녀봉. 二曲 崢嶸玉女峰
· 삼곡 인유학해선. 三曲 人遊學海船
· 사곡 외뢰만첩암. 四曲 碨礌萬壘巖
· 오곡 신암강구심. 五曲 信巖講究深
· 육곡 풍암와벽만. 六曲 豊巖臥碧灣
· 칠곡 세심백석탄. 七峻 洗心白石灘
· 팔곡 노대석면개. 八曲 老臺石面開
· 구곡 석봉용울연. 九曲 石峰聳蔚然
0 藥 水
1. 산성약수(山城藥水)
명호면 북곡리 산성(山城) 입구에 있으며 상탕(上湯)과 하탕(下湯)이 있다.
2. 총명수(聰明水)
명호면 북곡리 청량산 어풍대(御風臺)위에 있으며 높은 절벽에서 솟아나는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신라의 석학 최치원(崔致遠)이 이 물을 마시고 청신이 맑아졌다하여 총명수라고 했다한다.
3. 감로수(甘露水)
청량산 응진전(應眞嚴. 上淸凉電) 옆 높이 솟은 절벽사이에 있다.
이 물을 마시면 오래 산다고 한다.
4. 우곡약수(愚谷藥水)
봉성면 우곡리에 있다. 옛날에는 다덕약수. 다대기약물이라고 했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5. 오전약수(梧田藥水)
물야면 오전리에 있다. 조선 제9대 성종(成宗)시에 보부상(褓負商)이 발견했다고 한다. 쑥밭약물 이라고도 한다.
6. 두내약수(斗內藥水)
춘양면 서벽1리 옥석봉 아래에 있다. 오전. 우곡약수와 물맛이 같다.
7. 주덕약수(朱德藥水)
봉화읍 포저3리 붉은모퉁이(붉은마댕이)에 있는데 도로확장과 개발사업으로 매몰되었다. 일명 옷물 이라 하여 피부병에 효험이 있었다.
8. 유다리약수(酉橋藥水)
봉화읍 황전마을 남쪽에 있다 신경통과 피부병환자는 여름철 삼복지간에 이곳을 찾아 폭포물을 맞고 약수를 마시면 특효 하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9. 석교약수(石橋藥水)
재삼면 현동3리에 있으며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하다.
10.나현약수(羅峴藥水)
신라약수이다. 상운면 문촌리 가시골 신라재에 있다.
이 약수는 위장병에 특효하며 삼복지간에는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 부정한 사람이 가면 붉은 뱀이 나와서 물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鄕·所·部曲
o 물야부곡(勿也部曲)-별호(別號)는 모산(冒山)이다.
在郡北30里 물야면 북지리를 중심으로 추정
o미량부곡(彌良部曲)-在東15里 명호면 양곡리 부근으로 추정
o매토부곡(買吐部曲)-별호(別號)는 청둔(靑屯)이다.
본래는 안동부에 속했으나 고려공양왕3년에 봉화에 속했다.
在郡東 44里하다, 명호면 관창지역으로 추정
o소라부곡(召羅部曲)-재춘양(在春陽). 소로리 부근으로 추정
o토곡부곡(吐谷部曲)-在柰城縣5里.유곡.금봉리 일대로 추정
o조라부곡(助羅部曲)-在春陽 今廢
o반이군(潘伊郡)-在 小川, 강원도 태백시 황지(黃池)일대이다.
o가야향(加也鄕)-在郡東50里.지금의 춘양이다.
고려충렬왕(忠烈王) 10년(1284)에 이 고장의 사람 호군(護軍) 김인궤(金仁軌)가 공이 있었으므로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시켰다.
· 현내(縣內)-넓고 평평하며 돌아 안으며 형세가 있다. 토지는 비옥하다.
· 맛질곡촌(馬叱谷村)-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 얼마비촌(於乙馬飛村)-현의 동쪽 8리에 있다.
· 장현촌(獐峴村)-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 마론촌(馬論村)-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 방고개촌(方古介村)-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 문고개촌(文古介村)-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 눌산촌(訥乙山村)-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 개유리고개촌(犬遊里古介材)-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 상조라촌(上助羅村).하조라촌(下助羅村) 모두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본디 부곡인데 지금은 촌리(村里)가 되었다.
· 막동촌(幕洞村)-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 상하사곡촌(上下沙谷村)-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 사물곡촌(沙勿谷村)-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 고산동촌(孤山洞村)-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 유전촌(鍮田村)-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 마곡촌(馬谷村)-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 달전촌(多乙田村)-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 무둔음곡촌(無屯音谷村)-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 성곡촌(城谷材)-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 보라촌(甫羅村)-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 마고곡촌(麻古谷村)-현의 남꼭 20리에 있다.
· 안성촌(鞍城村)-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 정동촌(鼎洞村)-현의 서쪽 5리에 있다.
· 별전촌(伐田村)-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 풍정촌(楓井村)-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현재 법전면 풍정리이다.
· 얼고개촌(於乙古Ë材)-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현재 풍정리 엉고개이다.
· 장리산촌(獐里山村)-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 부고개촌(釜古介村)-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 증혈촌(甑穴村)-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 도장동촌(道藏洞村)-현의 북쪽 5리에 있다.
· 조곡촌(烏谷村)-현의 북쪽 6리에 있다.
· 어비곡촌(於飛谷村)-현의 북쪽6리에 있다.
· 거리곡촌(巨里谷村)-현의 북쪽 7리에 있다.
· 죽현촌(竹峴村)-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 탑평촌(塔坪材)-현의 북쪽 5리에 있다.
· 나복죽촌(羅茯竹村)-현의 북쪽 5리에 있다.
o퇴관부곡(退串部曲)-安東府의 柰城.
고려 충혜왕(忠惠王)때 고을사람인 환자(宦者)강금강(姜金剛)이 원(元)나라에 들 어가 시위(侍衛)한 공로가 있었으므로 내성현(柰城縣)으로 승격시켰다.
· 현내(縣內)-일명은 아동(衙洞)이다. 아전들이 산다.
· 거차수개촌(巨次樹介村)-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사족들이 산다.
쌍벽당(雙壁堂)이 있다.
· 냉정촌(冷井村)-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상운면 하눌리 산정 서쪽이다.
· 가내곡촌(加內谷材)-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토지는 메마르고 풍속은 순박하며 사족(士族)이 산다.
· 서매동촌(鋤每洞村)-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어딘지 알지 못한다.
· 황전촌(黃田村)-현의 남쪽 6리에 있다. 봉화읍 황전이다.
도암정이 있다.
· 유교촌(流橋村)-현의 남쪽 7리에 있다.
황전과 선돌의 중간지점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 작은 폭포가 있다.
· 입석촌(立石村)-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선돌이다.
· 광평촌(廣坪村)-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진사(進士)남기수(南麒壽)가 처음 터를 잡았다.
관개(灌漑)있다 봉화읍 해저리 솔안과 바래미 중간지역이다.
백록이사(栢麓里社)가 있다.
· 포본촌(浦本村)-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사족(士族)들이 산다.
관개(灌漑)가 있다. 봉화읍 포저4리 보밑이다.
· 송내촌(松內村)-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사족(士族)들이 산다.
관개(灌漑)가 있다. 앞들에 거북바위(龜巖)가 있는데 그 모습이 자라 같다. 백여 사람이 앉을 수 있으며 10리를 통하여 바라본다.
솔안이다.
· 파라본촌(波羅本村)-해저(海底)라고도 이름한다 사족(士族)산다.
흙은 모래돌이 많다.
· 호평촌(虎坪村)-현의 서쪽 9리에 있다. 관개가 있다.
효자 재사(才士)가 많이 나왔다. 범들이라고도 한다.
· 인동촌(隣洞村)-현의 서쪽 5리에 있다. 토지가 척박하다.
사족들이 산다.
· 사현촌(沙峴村)-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서원이 있다.
형세가 뛰어난 경치이다. 토지는 메마르지 않으며 관개가 있다.
삼계리 생기마을이다.
· 유곡촌(酉谷村)-현의 북쪽 6리에 있다.
권벌(權橃)이 처음 터를 잡았다.
· 토곡촌(吐谷村)-현의 북쪽 7리에 있다. 토일마을이다. 서설당이 있다
· 합평촌(塔坪村)-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유곡3리 탑들이다.
대사간(大司諫)정유일(鄭惟一)이 살았다.
0 개단부곡(皆丹部曲)-在郡北25里. 安東府領. 내성(柰城)에 예속된다.
동.서는 30리요. 남북은 95리 이다.
동쪽으로는 봉화현의 경계인 하도심(下道心)과 25리 떨어진다.
남쪽으로는 내성현의 경계인 사현(沙峴)과 5리 떨어진다.
서쪽으로는 영천군의 경계인 서리(西里)와 5리 떨어진다.
서북쪽으로 영월군의 경계인 도력현(道力峴)과 20리 떨어진다.
북쪽으로 정선군의 경계인 굴리거(屈里居)와 90리 떨어진다.
토질은 돌이 많으며, 밭(田)사이에 논이 있고 콩. 조. 기장. 피. 메밀. 구맥(瞿麥).출(秫)을 재배하는 데 적합하다.
토산품은 송심. 오미자. 당귀. 주토. 산머루. 산개. 재목. 가목. 청밀. 웅담. 목적. 독활. 백지. 황백(黃栢) 오가피 . 세신. 문합. 천남생. 려로이다.
부내(府內)-산(山)사람들이 산다. 물야면 개단이다.
가구촌(可丘村)-부곡의 남쪽5리에 있다. 토지가 기름지지 못하여 다만 관가의 혜택을 입는다.풍속은 예스럽고 백성은 어리석다. 가평1리 가두둘이다 계서당이 있다.
서리촌(西里村)-부곡 서쪽5리에 있다. 토지는 돌이 많다.
다만 콩과 조에 적합하다. 가평2리 서리이다.
압구촌(鴨丘村)-부곡 북쪽3리에 있다. 대장간이 여기에 있다.
토지는 돌이 많고 메마르며 구맥(瞿麥)에 적합하다.
도심촌(道心村)-부곡의 북쪽15리에 있다. 춘양면 도심리이다.
백병산(白屛山)이 그 서쪽을 누르고 문수산(文殊山)이 그 남쪽에 있다. 한줄기 물은 도력현(道力峴)에서 발원하고 한줄기 불은 고적현(高適峴)에서 발원하는데 합류하여 이 마을을 지나 춘양으로 들어간다. 토지는 돌이 많고 메마르며 콩.조.구맥(瞿麥)에 적합하다.
천평촌(川坪村)-부곡의 북쪽 50리에 있다.
태백산이 그 동북쪽을 두르고 고적산(高適山)이 그 남쪽에 우뚝 솟 으며 석천(石川)이 이 고적산에서 나와 마을 앞을 흐른다.
토지는 구맥(瞿麥)에 적합하다. 백성들의 풍속은 어리석다.
· 신촌(新村)-부곡의 북쪽 60리에 있다.
영월(寧越)과 정선(旋善)의 사이에 끼어있다.
동북쪽으로 갈방현(葛方峴)이 우뚝 솟고 북으로는 구절산(九折山)을 누르며 거천 (巨川)이 태백(太白)에서 발원하여 마을 앞을 흘러 지나가는데 또한 낙동강의 근 원이다. 백성들은 모두 어리석다. 토지는 매밀에 적합하다.
· 굴거촌(屈居村)신촌의 북쪽 15리에 있다.
구절산이 그 북쪽에 우뚝 솟았다. 백성은 속(俗)되다.
토산품은 신촌과 같다.
o소천부곡(小川部曲)- 在郡東80里. 安東府領 춘양에 예속된다.
소천면. 석포면. 태백시 황지. 본적산(本寂山). 대박산(大朴山)까지 그 영역이었다. 동서는 50리요, 남북은 100리 이다.
동쪽으로는 울진현(蔚珍縣)의 경계인 분천(汾川)과 30리 떨어진다. 남쪽으로는 봉화현(奉化縣)의 경계인 상열위(上烈位)까지는 20리 떨어진다. 서쪽으로는 춘양현(春陽縣)의 경계인 접정(接井)과 20리 떨어진다. 북쪽으로는 삼척부(三陟府)의 경계인 반이(潘伊)와 80리 떨어진다.
토질은 비습(卑濕)하고 돌이 많고 콩. 조. 기장. 피. 메밀. 보리. 구맥(약초).출(秫)을 재배하는데 적합하다.
토산품으로는 당귀. 인삼. 황벽(黃壁 약제로 쓰임) 세신. 오미자. 남슬. 송심(松輩).석심 (石輦). 산개(山芥). 석청(石淸). 은구어. 눌어. 여항어(餘項魚). 황장판(黃腸板). 가목(椵木). 재목(梓木). 목적(木賊). 독활(獨活) 백지(白芷). 오가피. 문합(蚊蛤). 천남생 려로(黎蘆)가 난다.
· 부내(府內)-소천면소재지
· 막지고개(莫知古介)-부곡의 동쪽1리에 있다.
소천면 현동4리 막지고개, 현동역으로 가는 고개이다.
· 구현촌(騎峴村)-부곡의 동쪽 10리에 있다.
· 분천촌(粉川村)-부곡의 동쪽 20리에 있다.
소천면 분천이다. 분천역이 있다.
· 자마비촌(者馬飛材)-부곡의 동쪽 20리에 있다.
소천면 분천4리 자마리이다.
· 고차비촌(高差卑村)-부곡의 동쪽 25리에 있다.
소천면 분천4리 꼬치비재이다.
· 사천촌(沙川村)-부곡의 남쪽 1리에 있다.
· 가현촌(架縣村)-부곡의 남쪽 5리에 있다.
· 거천촌(居川村)-부곡의 남쪽 15리에 있다.
· 상열위촌(上烈湋村)-부곡의 남쪽20리에 있다.
산천이 밝고 아름다우며 경계가 그윽하고 깊다.
· 단월촌(丹月村)-부곡의 남쪽30리. 열위의 서남쪽 10리에 있다.
· 장배촌(長背村)-부곡의 남쪽 10리에 있다.
· 둔음현촌(屯音峴村)-부곡의 남쪽 30리에 있다.
소천면 두음(斗音)리이다.
· 임벌촌(林伐村)-부곡의 남쪽 20리. 둔음현 서쪽5리에 있다.
소천면 임기리이다.
· 전피현촌(箭皮峴村)-부곡의 동쪽20리에 있다.
· 접정촌(接井村)-부곡의 서쪽 20리 에 있다.
· 고선촌(古先村)-부곡의 북쪽 10리에 있다. 소천면 고선(古善)리이다.
· 눌질동촌(訥叱同材)-부곡의 북쪽 30리에 있다.
· 신성촌(新城村)-부곡의 북쪽 50리에 있다.
· 대현출(大峴材)-부곡의 북쪽 60리에 있다. 석포면 대현리이다.
· 서포촌(棲浦村)-부곡의 북쪽 70리에 있다
· 반이촌(潘伊材)-부곡의 북쪽 80리에 있다.
옛날 반이군(潘伊郡)이 있었다. 현재강원도 태백시 (황지)이다.
· 승보촌(升步村)-부곡의 북쪽 30리에 있다.
· 결둔촌(結屯村)-부곡의 북쪽45리에 있다.
· 황항촌(荒項村)-부곡의 북쪽 25리에 있다.
· 암돌촌(巖突村)-부곡의 북쪽 10리에 있다.
현 소천면 현동3리 암돌이다.
· 굴현촌(堀峴村)-부곡의 북쪽 60리에 있다.
0 덕산부곡(德山部曲) -재동남60리 안동부 속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경화옹주의 고향이라 하여 덕산현으로 숭격시킴
· 현내 (縣內)-아전과 백성이 산다.
· 이림곡촌(伊林谷村)-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남면리 이름실이다.
· 신리(新里)-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동면리이다.
상신촌. 중신촌이 있다.
· 오례촌(五禮村)-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 마근리촌(麻斤里村)-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 서천촌(西川村)-현의 북쪽40리에 있다. 소천면 서천리이다.
0 임지부곡(林只部曲) -在南20里. 내림. 두월. 구천. 토일. 설매지방으로 추정. 광무(光武)10년(1906)에 영천군으로부터 봉화군에 편입되었다.
땅이 협소하여 경지가 적고 서민이 살기 어렵다.
· 고감(高甘). 어리안(於里安). 퇴일(退逸). 창팔(昌八). 래황(來黃). 분토(墳土). 두월(斗月). 매곡(每 谷). 우안촌(遇安村) 장병곡(藏兵谷). 구수천(九水川). 호마곡(呼馬谷). 가자곡(加資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