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기록은 대구 대도사에서2001년 이전에 봉화문화원에서 발간한 서책임
제목 항일의병 독립운동사 1997년 발간
니글의 의미는 송준필의 실기발간이 2001년임을 감안할 때 다른자료를 활용하여 쎠졋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임
(말하자면 2군데서 동일한 얘기가 나온셈임)
먼저 곽종석을 소개하는 글에서
경남산청에서 출생하여 일본 경찰을 피해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의 조목에 은거 안동사림의 대표였던 권세연
김도화 김흥락 권상익과 밀회하여 안동통문과 파리장서 제출 소임을 완수라는 부분이 나오며
(이것은 과외 만산과는 망미대에서 함께 울분을 달래)
곽면우 선생의 봉화와의 인연 닭실과의 교류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음
서적을 70권 이상을 읽고 있는데 오늘은 봉화문화원에서 발간한 봉화의 의병운동 활동사를
읽고있는데 파리장서의 초본을 곽면우가 직접 초안한 것은 아닌 것은 명확합니다
김황은 확실하고 권상익은 조사해야할부분인데
책자175페이지에서 (1997년12월30일 발간)(이부분은 대도사에서 발행된 송준길의 실기 이전 발행된 것임 대도사의 실기는2001년 발행된것임)
권상익(창수시회 참여)권상원장 권명섭 마찬가지 권상익과 권명섭은 곽면우의 제자이며
서신교류로 보아 김황도 명월루를 방문한 적은 있어
서책에서는 파리장서는 곽면우의 문인인 김황과 권상익을 시켜 초한 것을 면우선생이 교정한 것이다라고 나와
장소는 해저리 만회고택
또 한가지 면우 곽종석은 춘양 만산과 함께 망미대를 쌓아 놓고 함께 울분을 달래던 분인데
물론 닭실과도 인연이 깊어
의병 논의시에도 진림(홍기 삼촌)은 내방장 유연박(홍기 장인)은 참모로 참여하는데 곽면우 또한 이런 논의과정에
있었음(관군과의 전투란 명분 때문에 부대장은 사양함)
누구보다 모든 정황을 알고 있었을 송준길의 일기가 그 진원지이니 원본을 보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역사란 것은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명월루는 또한가지 심산 생가 큰 집격이란 점은 있습니다
홍기는 문중 대표로 나섰고 심산과의 연결 통로 또한 대부분이 맡아함
또한 제문과 조상의 이력 또한 대부분 맡아서 하면서 심산 생가 큰집 역활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위의 관계를 본다면 정조16년 만인소(위정만인소 바래미 주도)와 척사만인소(척사만인소대부분은 바래미 유관인물 주도) 정재 봉화 삼계서원 호림(의병격문과 활동 독려) 바래미의 의병3분의 간부탄생(이부분도 바래미 역활이 빠진부분)
이흐름이 심산의 탄생 배경이지 않을가합니다
**** 바래미와 닭실은 특히나 심산의 생가고향이며 닭실 또한 마찬가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
****심산의 봉화관련 바래미관련 주통로는 바로 심산 생가 큰집격인 만회고택은 분명함(비건한 예로 닭실 유관제문도 홍기를 통해서 전달됩니다)
파리장서의 초안을 작성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나도 아베정진도 모른다 할배 홍자기자가 어디 드려내 놓는 분도 아니니
다만 아무런 근거없이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보고 조사중
위에나오는 성주출신 송준필을 보면 곽종석 심산 장영석 권상익등과도 교류한 분이고 또한 파리장서의 핵심 주동인물인데
그의 일기를 번역해서 실기편찬위원회에서 책을 발간한 것에서 그의 일기에서
송준필에 대해서 홍기가 교류한 것은 현재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날로 들어오는 제자들 중에 지결을 받들어 당을 책임질
쓸만한 동량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점 몇가지
1)전혀 홍기의 존재를 몰랐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명월루가 초안을 작성한 곳이라한 점 또한 누구보다 파리장서에 대해서 잘알고 있었을 것이란점(아베 정진도 모르는 사실임) 이번기회에 밝혀야할 사실 아닌가?
2)권상익이 명월루에서 작성한 것이란점( 해저 명월루는 심산생가의 큰집격으로 심산을 대표한점 그당시의 사실 동강종가는 상당히 허술하였음)
이중업이 바로 이차장서를 권상익에게 부탁한점(이중업은 홍기의 사돈인 이고 이동흠의 아버지)
3)당시 송준필은 심산과 파리장서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란점(곽종석 장영석등과도 교류한 인물이란점)
4)당시 파리장서 초안들이 몇군데서 쓰여진점
5)삼일운동직후 해사 김정호가 대안을 묻는 말에 심산은 바로 파리장서를 대안으로 제시한점(이미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사례 아닌가함)
6)기려수필집의 저자 송상도가 유언을해가면서 가지 발문을 받아간점(마찬가지로 곽종석 장영석 권상익등과도 교류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구 경북 항일독립운동사 광복회 발행 182
곽면우가 안것은 1919년2월19일 곽연과 문하인 김황을 서울로 보내
김창숙 서울도착 2월25일
3월1일직후 해사와의 대화 이미 파리장서를 대안으로 바로 제시한점(이미 어느정도 준비함을 보인듯)
곽연 김황 윤하충 김정호와 김건등과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하고
영남의 곽종석과 호남의 간재 전우를 대표로 할것
청원서는 곽종석에게 일임할것
필요한 자금마련을 할것
3월20일 다시 서울서 만나기로하고 곽종석은 장영석에게 청원서 작성부탁
문하의 선비 김황과 권명섭? 김수에게도 청원서를 짓게했다
김황만이 지었다
국권회복단의 조극섭도 단의 통령 윤상태의 부탁으로 독립진정서를 지어 장영석에게 보임
성주의 송준필은 다른사람에게서 듣고 국민에게 깨우침을 주는 글을 지었다
경상도를 담당한 김창숙은 동지를 규합하고 장영석 송준필도 만나 청원서 초안을 준비하였다
대표자 곽종석은 장영석과 김황의 글중 김황의 글을 취하여 야간수정 파리로 보낸 정식장서 확정
***송준필도 청원서를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데 권상익이 명월루에서 작성했다고 한다
***파리장서 초안을 곽 면우가 초안한 것은 명확하게 아니며 대체로 김황을 시켜서 초안한 것으로 나오는데 권명섭은 사양한 것으로 나오며 권상익은 나오지 않으나 여기서는 권상익과 김황이 함께 초안한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김황도 편지 쓰기10년전에 명월루를 들린적은 있는데
그러면 파리장서의 초안이 스여진 곳은 어디인가?
김황의 집이라면 만드시 김황의 집이라했을 것인데
또한가지는 향산가와의 인연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중업은 바로 이차장서를 권상익에게 부탁한점
(이미 작성해본 경험이 있지 않을까하는 점도 ?)
송준필의 일기 원본을 보는 것이 답인 듯합니다
기려수필에 대한 이야기 (상)
![]() ![]() 2011/03/17 00:30
기려수필 (騎驢隨筆) 얼마 전 조동일 선생님의 「한국문학통사」 를 읽다가 '기려수필' 이란 책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일제 시대에 활약했던 독립 투사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서, 대단한 점은 글쓴이가 이름 있는 사회운동가나 문필가가 아닌 평범한 선비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관심이 생겨 그 길로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검색대에서 책을 검색했는데 무려 '보존 서고(오래된 책을 보관해 놓은 특별 열람실(?)이라고 해야할까요.)' 에 있다는군요. 사서에게 부탁해 10분을 기다리고서야 드디어 책을 넘겨 받았습니다. 검정색 양장본에 얼핏 보기에도 상당한 고서(古書) 같아 보였습니다. 얼른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책일까!' 라는 부푼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말이죠.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책을 폄과 동시에 눈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책이 한자로 표기 되어 있을 줄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내용의 99%가 그럴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죠. 제 한자 실력과 한문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책이었습니다. '그림의 떡' 이란 말이 이렇게도 잘 어울릴 줄이야! 그래도 조금 아는 부분이 있을까 싶어서(사실은 미련이 남아서...) 하릴없이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포기를 하려던 찰나, 드디어 한글을 발견했습니다. 알고보니 이 부분은 원래 책이 완성되었을 때(일제시대)에 쓰인 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광복 후 몇 십년이 지나고서야 '국사편찬위원회' 에서 정식으로 출간되었을 때, 담당 위원이 쓴 해설이었습니다. 어쨌든 한글을 발견한 저는 즉시 해독에 들어갔습니다. 원문인즉 이렇습니다.
解說 一 本書(본서)는 大韓帝國(대한제국) 말기(末期)부터 해방 당시까지의 애국자의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서, 기려자 송상도선생이 일생의 필혈을 傾注(경주)하여 蒐集(수집) 編纂(편찬)한 것이며, 경상북도 영주군 영주읍 休川里(휴천리) 송인爀氏(송인혁씨)가 간직하고 있는 상상도 수필 원본에 의하여 출판한 것이다. 송상도 자는 성소(聖召), 호는 기려자, 또는 眉幹(미간), 或(혹)은 蓮坡(연파)라 한다. 冶城(야성) 송씨로서 선대 이래영주에 세거하였으며, 고종 팔년(서기천팔칠일)사월십이일에 빈한한 농가에서 출생하셨다. (중략) 일구일영년庚戌(일구일영년경술)에 우리 나라가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되자, 그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중국을 支配(지배)한 뒤, 기려도사가 자기의 성명을 숨기고 나귀를 타고 천하에 돌아다니면서, 명말 충신의 사적을 수집한 예에 의하여, 우리 나라 애국자의 사적을 편찬할 결심을 하고, 미래 수십년간 악독한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하여, 죽장망혜(竹杖芒鞋)에 괴나리 봇짐을 걸머지고, 도보로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면서, 애국자의 유가족 또는 친지를 歷訪(역방)하여, 하나 하나 그 사적을 기록하고, 사건 당시의 신문과 기지 材科(재과)하여 편찬한 것이 곧 본서이다. 중국의 기자도사는 나귀나 타고 다녔지 마는 우리 나라 기려자는 나귀도 타지 못하고 괴나리 봇짐을 걸머지고 도보로 과객 노릇을 하여 가면서 이와 같은 과적을 남겼으니, 그의 영고와 성력에 대하여 실로 感歎(감탄)하여 마지아니하는 바이다. 해방후 해외로부터 독립투사들이 많이 돌아오게 되자, 저자는 해외에서 활동한 애국투사의 전기를 추가하여 출판하려고 하였으나, 불행히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단기사이칠구년(서기일구사육년)십이월이십육일에 칠십육세로 세상을 떠났다. 금년일월에 본회에서 이책을 발견하고, 한국사과업서제이로서 출판하게 된 것이다. 解說 二 본서는 저자가 整理(정리)한 원본 오책에 未整稿(미정고)의 수지 한 뭉치로 成立(성립)하였는데, 각책에 실힌 애국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第一冊 崔益鉉 ~ 白成欽 (최익현 ~ 백성흠) 第二冊 洪思九 ~ 宋秉珣 (홍사구 ~ 송병순) 第三冊 柳麟鍚 ~ 李喆榮 (유인양 ~ 이철영) 第四冊 李承熙 ~ 李東吉 (이승희 ~ 이동길) 第五冊 金百先 ~ 尹泰吉 (김백선 ~ 윤태길) 己巳萬歲 (光州學生事件) 未整稿 李來修 ~ 尹公欽 (이래수 ~ 윤공흠) 이상 표시한 바와 같이 본서 원본은 연대순 또는 사건별로 배열되어 있지 아니하고, 안중근, 이경직과 같이 두 번 혹은 세 번 사람도 많이 있어, 완전히 정리되어 있지 아니하다. 이것은 저자가 재과를 수집하는대로 기록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금번 이를 출판함에 있어서 연대순 사건별로 정리하고 거즙 나오는 사람은 가장 適當(적당)한 것을 擇(택)하고, 인명 밑에 일,이,삼,사,오,미 等六號活字로(등육호활자) 原本所屬(원본소속)의 冊次(책차)를 표시하였다. 그리고 본서 원본은 權相翊(권상익)이 일부분 校正(교정)하였는데, 그 부분은 「 」로써 표시하였다. 解說 三 (후략)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 申奭鎬(신석호)
해설의 내용은 기려수필의 저자에 대한 소개, 집필 동기와 과정, 책의 구성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
***송준필의 일기 원본을 봐야 될 듯
아래는 인터넷에서 올라온 글인데 이만도가 위정척사로 무장함이 나온다
위정이란 것은 바로 정의 논리로 정을 위해서 일어난 명남만인소가 그 근원임은 분명하며
여기에 척사가 붙었을 뿐이다
물론 퇴계학통의 정맥임은 틀림없으나 여기에서 정조16년의 영남만인소 가문의 결집
10000명의 유생 단합된힘 정을 위한 상소 (유회문 정재 부친 적극참여) 정재의 추존상소
정재 위상강화 김흥락(정재문인 이진상 정재문인) 대부분이 정재와 만인소와 연결된다는 점일 것입니다
위정에서 단지 척사가 붙었을 뿐이다는 것입니다
바래미를 보면 만인소와 정재 무실유관된 의병과독립운동이 명확히 나타남
http://cafe.daum.net/jinsunglee/NONB/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