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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꿈
-열왕기상 3장 4-15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거짓과 위선-
이종록 교수(한일장신대 신학부)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 간 것은 열왕기상 3장에 나온다. 이것은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리고 왕위에 오른 직후에 기브온 산당으로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본문기자는 매우 어설프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는 분명히 5절에서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고 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15절)고 한다. 5절에서 꿈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현실로 생각했을 것이고, 15절은 반전(反轉) 역할을 함으로써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했을 것이다. 어쨌든 본문기자는 “꿈”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꿈 이야기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명확하게 보여준다. 본문기자가 이처럼 꿈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일천번제를 드리는 과정에서 신탁을 받은 것으로 처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역대기 기자처럼 그냥 밤이라고 얼버무리지 않고, 굳이 꿈이라는 것을 밝히고, 그것도 두 번이나 언급하는 것일까? 물론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계시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역대기 기자가 열왕기 기자와 달리 꿈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밤이라고 한 이유는 꿈이라고 하면 그만큼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본문기자가 굳이 꿈이라고 밝히는 강박증의 원인은 무엇일까?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 간 까닭은 무엇인가? 솔로몬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러 갔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묻는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절). 하나님도 솔로몬이 간절히 원하는 게 있어서 기브온 산당으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솔로몬이 무엇을 구하는지 하나님이 모른다는 것이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솔로몬이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실 것처럼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는 말은 솔로몬이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무조건 주겠다는 말로 들린다. 요즘처럼 상업적이고 성공지향적이며 물신주의에 충만한 한국교회, 예전과 달리 이 세상과 저 제상을 구분하지 않고 둘을 하나로 통합시켜 버린 한국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에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것은 인간들이 가장 듣기 바라는 말이지만, 한편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기도 하다. 인간이 무엇을 구할지도 모르고, 그리고 인간이 구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피어”라는 영화는 이것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학자들이 바다 깊은 곳에 큰 공처럼 생긴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해저에 연구소를 차린다. 그리고 공 같은 게 무엇인지를 연구하는데, 그 과정에서 별별 일들이 발생해서 사람들이 여럿 죽는다. 나중에 밝혀낸 사실은 그 공처럼 생긴 것이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어서, 그 능력에 감염된 사람이 무엇이든 상상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연구소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재난들은 실상은 그곳에 거주하는 과학자들이 마음속으로 상상한 것들이 실현된 결과이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공을 지구 밖으로 보내기로 한다. 인간들은 신이 주신 이 귀한 선물을 받을 준비가 아직 안되었다고 하면서.
이 영화가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것처럼,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꿈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발터 벤야민이 말하듯, 자본주의의 풍경은 “꿈”이다. 우리는 꿈을 꾸며 산다. 그리고 깨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꿈은 꿈에서 깨어날 때에만 꿈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꿈이 의미를 갖는 곳은 꿈에서 깨어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어남 없는 꿈꾸기는 그게 더 이상 꿈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공포스럽다.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구하면서도 우리가 구하는 게 정말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꿈꾸는 상태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 우리는 이것을 신적 전능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원”(願)이다. 이것은 욕망에 다름 아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네가 욕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 가서 일천번제를 드렸는데, 이것은 일천번제를 드릴 정도로 그가 원하는 것이 엄청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일천번제는 욕망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일천번제는 일천욕망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솔로몬이 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 즉 실제로는 솔로몬이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구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결국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맞춰봐라”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마음에 드는 말을 해봐”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본문기자나 독자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들이 깨닫는 한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는 게 하나님이 원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 마음에 든다는 게 결국은 사람들 마음에 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원과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원과 뜻을 신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억지를 부린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려 해도 맞출 수 없는 것이다. 실상은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게 부재하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의 기준을 폐기해버리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 가서 일천번제를 드린다. 그런데 제사 드리는 주체는 누구였을까? 제사장일까? 그러나 본문에는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다. 이것은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 사울은 제사장 없이 제사를 드렸다는 이유로 사무엘로부터 심한 말을 듣는데, 기브온 제사 이야기에는 제사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레위인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모든 것을 솔로몬이 주관한다. 솔로몬은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뜻을 다윗에게 알리신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직접 말씀하실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단을 매개로 다윗과 말씀하신다. 그런데 기브온 제사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솔로몬이 꿈속에서 나누는 대화는 과연 무엇인가? 꿈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무의식의 발현일 가능성이 크다. 솔로몬은 꿈속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일인이역(一人二役)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솔로몬은 자신이 구하는 것을 길게 말한다. 이런 장황한 설명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솔로몬도 그렇고 본문 기자도 실제로는 무엇인가를 의식하기 때문에 다소 불필요해 보이는 말을 하는 것이다. 본문 기자는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들이 응시하는 눈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그들에게 하려는 말을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매우 정치적인 행위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무엇을 구하는지 들은 다음, 판단을 하신다.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게 윤리적인 기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로몬이 윤리적인 차원에서 간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솔로몬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면? 이 이야기를 하나님만 모르고 있다면? 아니, 사람들은 다 알아도 하나님은 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솔로몬이 실제로는 부귀와 영광을 원했지만, “텅 빈 제스처”처럼 예의상 지혜를 구했다면? 아니면, 부귀와 영광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마스터키가 지혜라고 생각했다면?
이 시대 솔로몬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감동하듯이 여전히 그들에게도 감동(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혜로워졌지만, 하나님은 아직도 순진해서 그런 기도에 감동할(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믿음이라는 게 이런 식이다.
그러나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봐. 그러면 내가 다 들어줄게.”가 바르게 성립하려면, 일단 이 말을 하는 주체가 전능해야 하고, 상대방은 윤리적이어야 한다.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그 손이 어떤 손이냐에 대한 믿음에 의존한다. 그 손은 검은 손이 아니다. 그 손은 윤리적인 손이다. 탐욕을 억제할 줄 아는 손이다. 절제라는 덕을 아는 손이다. 그런 손일 때, 시장 경제는 과도한 이득을 탐하려는 자들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데 무한탐욕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손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신마저도 탐욕을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주체적인 전능성을 상실하고, 그래서 신의 전능성은 오히려 인간들이 구하는 것들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마술적인 능력으로 전락한다.
솔로몬이 꿈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다. 솔로몬이 보여주는 “텅빈 제스처”에 감동하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덤으로 듬뿍 안겨주셨다. 그러면서 솔로몬 같은 왕이 없을 거라고 극찬 하신다. 하나님은 촌스럽다. 솔로몬의 꿈속에 등장하신 하나님은 이처럼 단순하다. 그리고 무지하다.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솔로몬의 윤리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보너스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솔로몬 이후 사람들은 모두 다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 이야기가 전혀 새롭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언제나 당하는 쪽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런 명확한 사실을 오직 하나님만 모르신다.
이 이야기에서 온전한 전능성을 상실하고 마술적인 능력만을 가진 우리 하나님은 더 이상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자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자기 뜻을 알리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의 뜻을 묻는다. 그리고 “내가 네 말대로 하여”(12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의미작용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이 순진하게 하시는 이 말씀이 탐욕스런 이 시대의 경건한 자들에게 “나의 전능하신 종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성서를 읽을 때, 띄엄띄엄 읽는다. 인간의 눈은 선별적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14절을 잘 읽지 않거니와 읽는다고 해도 그것을 건성으로 읽고 괄호를 치거나 공백으로 만들면서 본문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본문을 자신들이 읽기에 편리하게 만든다. 독자들은 솔로몬의 꿈 이야기를 자신들의 꿈 이야기로 편집한다.
우리는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욕망의 실현을 간구한다. 우리는 솔로몬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면서 욕망을 실현하는 매우 영리한 길을 택한다. 우리는 한 번도 일천번제를 드린 적이 없지만,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것처럼 우리도 그런 제사를 이미 드렸다고 믿는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솔로몬이 아닌 우리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듣는다. 놀라운 환청 현상이다. 일천번제는 솔로몬이 드렸고,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순간,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은 솔로몬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듣는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교묘한 속임수인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삭 앞에서 마치 자신이 에서인 양 속이고 장자권을 획득한 야곱이다.
“솔로몬으로 하여금 간구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우리가 받는다.” 대단히 간교한 전략이다. 우리는 솔로몬이 아니기에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럴 마음도 없다. 우리가 아무리 솔로몬과 동일시한다고 해도, 우리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아야할 의무를 가진 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변용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마음은 아예 없다. 그래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 실제 솔로몬이 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면서 우리는 간접적인 만족을 얻는다. 우리가 직접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에 대한 의무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그러면서도 그런 고상한 말을 내가 직접 하는 것 같은 대리만족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게 살 마음이 없으면서도 법정 스님이 쓰신 <무소유>라는 책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결코 무소유를 원치 않는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소유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무소유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싶은 고상한 말을 법정 스님이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분과 동일시하면서 마치 내가 그 말을 하는 것처럼 대리만족을 누린다. 우리는 결코 무소유를 원치 않지만, 최소한 그럴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소유를 소유한다. 결코 읽지도 않을 “목민심서”를 손님제압용으로 두는 예전 독재자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손때 자국이 없는, 그래서 다시 반환해도 제 값을 받을 것 같은 주석전집으로 반짝거리는 어느 목회자의 서재와 다를 게 무엇인가?
다른 전략은 “욕망 감추기를 통해서 욕망 드러내기”이다. 우리는 약해지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는 논리를 사랑한다. 이웃을 섬기는 약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강해져야 한다. 그래서 “섬기는 리더”라는 어불성설을 성설로 믿는다. 이런 억지를 다시 억지를 부려서 유포하고 그것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큰 억지를 부린다. 기독교가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는 대형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아무런 욕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저 세상을 섬기려는 마음뿐이라고. 총회장이 되기 위해 수십 년 간을 노심초사하면서 ‘수고’하면서도, 그저 겸손한 종으로서 총회를 섬기고 교단 성도들을 섬기려는 일념뿐이라고, 이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라고 하면서, 그 해괴한 논리가 어색스럽지도 않은지, 나중에는 네로처럼 자신이 만든 논리에 자신이 감동하는, 즉 자신을 자신이 숭배하는 놀라운 지경에 이른다.
솔로몬이 하는 기도를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솔로몬이 하는 기도가 솔로몬 자신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솔로몬이 이런 기도를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솔로몬이 그렇게 백성들을 사랑한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솔로몬이 생각하는 “백성”이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우리는 솔로몬이 수 십 년간, 그가 다스리는 기간 동안 전국에 걸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했다는 것을 안다. 그 공사들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동원해서 노역을 시켰다는 것도 안다. 성서가 우리에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바벨 건설을 떠오르게 하고, 히브리인들이 세운 비돔과 라암셋 건설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솔로몬은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하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자기 뜻을 고집하는 지도자들의 전형이다. 말로는 백성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백성들을 위해서 백성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백성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편다. 그리고 스스로 감동한다. 그는 자신이 하는 그 고상한 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백성은 실제 백성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백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들이다. 그 환상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는 실재하는 백성들을 억압한다. 실제 백성들에 의해서 지도자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제로 위하려는 백성들은 그가 설정한 환영의 백성들인 것이다. 그 환영의 백성들은 실제 백성들보다 더 실재적인 백성이다. 자식들을 위해서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부모와 다를 바 없다. 모세와 아론이 히브리인들의 출애굽을 요청했을 때, 애굽 왕 바로가 그들을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일본이 내선일체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조선 사람을 착취한 것도 그 선상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무소유를 말하면서,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소유라는 책을 선물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무소유를 선물하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재산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사람과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는 잠시 무소유를 구입해서 선물하는 일을 중지하고, 더 많은 책을 사기 위해서, 갖가지 사업을 벌여서 재산을 모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부-원래는 모든 재산을 책사는 데 쓰려고 돈을 벌었지만-를 책 사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자기 향락을 위해서 둔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전 재산을 무소유를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착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현대판 아나니아와 삽비라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잘못한 것은 그들이 전 재산을 바치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그들이 전 재산을 바치지 않았으면서도, 전 재산을 바친 것으로 믿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마치 군중들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기 둘만 눈을 감으면 아무도 못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키스하는 두 연인과 같다. 그저 머리만 수풀에 박으면 아무도 못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꿩과 같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당한 일이 약간은 억지스럽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들이 가진 사고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당한 일을 그들과 같은 사람들, 아니 그들보다 더 심각한 사람들이 당하지 않는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이해하기 쉽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솔로몬이고 우리 자신이다. 그들은 무소유를 사랑한다. 무소유를 꿈꾼다. 그러나 그것을 그냥 꿈꿀 뿐이다. 그들은 그 꿈에서 깨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비용을 지불한다. 그들이 지불한 비용은 적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무소유로 만들기에는 턱도 없는 것이다. 그 비용을 지불하고도 그들은 가진 게 많다. 오히려 그들은 이제부터 자신들이 진정한 무소유를 실천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실제로 가진 재산, 즉 헛 무소유를 통해서 포장하고 은닉한 그 재산을 향유하는 기쁨을 배가한다. 이게 문제다. 사회에 약간 기여하면서, 조금씩 이웃을 돕기 위한 일에 참여하고 돈도 조금씩 내면서, 자신들이 사회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인정을 얻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이다. 그들이 재산을 어떻게 소유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돈독이 오르지 않으면 재산을 모으기 어렵다. 어쨌든 그렇게 저렇게 소유한 재산 가운데 아주 일부를 내놓으면서도, 그들은 살을 베어내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으로 느낄 것이다. 여전히 많은 재산을 소유하면서도 그들은 무소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분위기를 만든다. 부자들이 돈을 내놓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자들은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기 때문에 부자이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이든 돈을 내놓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액수가 얼마이든 그들이 돈을 내놓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이다.
솔로몬은 꿈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을 꾼다. 그저 꿈속에서 꿈에서 깨어났을 뿐이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꿈속에서 꿈을 꾸고 깨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거짓과 위선을 포장하는 꿈속에서 이 시대 솔로몬인 우리들도 솔로몬과 함께 꿈꾸기를 감행한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