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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Steams of Living Water)
- 기독교 영성의 여섯 가지 위대한 전통 -
이 종 덕(M. Div. 3/4)
전체를 관조하면서
신학대학원 입학 시험 때 ‘카이로스(kairos)’에 대해 설명하라는 영어 문제가 출제되었다. 수평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는 닫혀진 시간이며, ‘카이로스’는 시계의 양적인 시간이 아니라 종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때(occasion)’라고 하는 질적인 시간이며, 적절한 시간(the right time)이다. 우리 모두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이 무엇인가를 하기에 바로 적절한 시간이며, 지금 우리가 충분히 성숙해 있고, 지금 우리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이것이 ‘카이로스’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생수의 강(Steams of Living Water)”을 통해 ‘카이로스’를 말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의 위대한 전통들은, 어느 것 하나도 그저 되어진 일없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연대기적 흐름의 한 영향이 있었음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전체를 종으로 꿰뚫는(통전하는) 카이로스의 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는 뜻에서 여섯 가지 영성 전통을 대별해서 말하고 있다.
포스터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크게 분류되어진 것으로만 국한할 수 없는 다양한 흐름이 하나의 전통 속에 혼재해있다. 각각의 전통은 서로 교류한다.
이 모든 영성 전통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원천에서 흘러내리는 “강들”이다. 포스터는 매 장에서 각 영성의 강줄기를 이루는 세 패러다임인 옛 신앙 인물, 성경상의 인물, 그리고 근현대 신앙 선배들의 경건한 삶을 조명하여 소개하는데, 이들은 우리가 몸을 담그거나 마실 수 있는 강물들이 여전히 원천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도록 해준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독자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이 아니고 거슬러 올라가 역시 원천에 닿아있음을 발견하도록 인도해 준다.
부록에서는 교회사의 중대한 전환점들을 먼저 소개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흐름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으며, 또한 본문에 소개된 인물들을 포함하여 교회사의 중요한 인물들과 운동들을 알파벳순으로 소개하여서 사전적 기능까지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는 가운데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여섯 가지의 영성 전통 중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각자가 처한 ‘삶의 자리’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생활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개개인 스스로는 여섯 가지의 영성 전통의 균형을 이룰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가진 영성 전통의 특징을 이해하고,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이 더 더욱 필요하다 할 것이다.
최근에 팀(Team)사역 혹은 팀 목회로 불리어지는 목회 방법이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데1), 각 사역자 - 목회자, 평신도 모두 - 들이 갖고 있는 영성을 인정하고 조화와 질서를 이룰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어지는 것을 목도할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이 책을 이러한 맥으로 이해하고, 모든 영성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되어지는 영성 전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런 다음에 각 전통의 흐름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간략히 돌아보고, 각 전통의 장점과 그에 반한 위험이나 단점들을 기술하고, 각기 다른 영성 전통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포스터의 제안을 요약하려 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는 영성 전통들
포스터는 “영적인 삶의 여러 차원들의 완벽한 본은 예수님밖에 없다. 이 삶의 강의 완벽한 형태를 보기 원한다면 예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의 삶은 모든 영성 전통들의 출발점이다. 이제 그 예수의 삶을 조목조목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교리의 요점들을 만들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을 해석하려 서두르게 되고, 이렇게 서두름으로 인해 예수님의 삶을 무시하게 된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에 주목할 때, 우리 삶의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구원”은 그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단지 멀리 있는 천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부서지고 슬픈 세상에서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신 동안 그의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다. 그 부르심은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고,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결과를 갖고 있었다. 현재 그의 백성 중에 살아 계시며 거하시는 예수님은 그 옛날 제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것은 예수 당시와 기본적으로 원리와 방식이 같지만 지난 2000년 동안 바로 그들의 삶의 자세에서 예수를 따라 살았던 이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단과 신실한 삶을 느낄 수 있다.
1. 묵상의 전통 - 기도로 충만한 생활
예수님의 삶에서 그와 아버지의 친밀함보다 더 인상적인 면은 없다. 누비이불의 반복되는 무늬처럼 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누비고 있다. 예수님의 가장 격한 노여움은 성전을 매매하는 장소로 바꾸어 놓은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신 성전을 사람들은 강도의 굴혈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마 21:13)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주기도문을 포함한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아바, 아버지”(막 14:36)라 부름으로 하나님께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나아가도록 예수님은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기도와 처절한 고독의 시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본인도 행동으로 옮기셨다. 예수님은 사역의 요구들로 인해 지쳐 있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막 6:31)고 말씀하셨다. 기록된 기도 중 가장 절박하고 친밀한 기도는 말할 것도 없이 다락방에서 드린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이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논할 때 그 절정은 겟세마네 동산의 거룩한 사역일 수밖에 없다. 종종 거친 광야로 가시고, 기도로 사시며 일하시고, 아버지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듣고 그대로 사시며 일하시고, 아버지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듣고 그대로 행하신 예수님은 묵상의 전통을 완전하고 극히 아름답게 보여 주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본받은 것을 묵상의 전통이라 한다. 모든 인간은 충만한 기도의 삶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갈망한다. 묵상의 전통의 강물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는 길을 보여 준다. 이 길을 따르는 이는 초기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였던 안토니우스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현장에서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던 사도 요한, 문맹 퇴치운동 일을 하면서 ‘일하며 기도하기(ora et labora)’라는 섬광 기도를 통해 끊임없는 기도 경험을 가졌던 프랭크 로바흐가 있다.
묵상적 생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한결같은 응시이다. 묵상적 전통은 “처음 사랑”(계2:4)의 불길에 계속 부채질을 하며, 단지 지성적으로 믿는 종교를 넘어서도록 인도해 준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중심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 삶의 고독을 강조한다.
이 전통은 몇 가지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과의 분리를 충동하거나, 탈사회화를 획책하기도 하고, 지나친 금욕주의자가 되게도 하며, 우리의 믿음을 명료화하려는 노력을 반감시키거나, 믿음의 공동체를 무시하는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터는 내 삶의 자리 주변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강구하거나, 성경말씀을 통한 기도, 몰입에 대한 유혹을 잠재우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나님을 위해)하는 방법 등을 실천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2. 성결의 전통 - 덕이 있는 생활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 당하신 예수님의 사건을 신중히 검토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신성과 뿌리깊은 고결함을 이해할 수 없다. 세 가지 사회 제도였던 경제, 종교, 정치 제도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유혹들이었다.
경제적 유혹은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었다.(마 4:14) 떡을 기적적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어 “경이로운 떡”을 모든 이에게 공급하라는 유혹이었다. 예수님은 이것이 순간적인 해결책이 될 뿐임을 아셨고, 떡으로만 사는 쪽을 선택하지 않으셨다.
종교적 유혹은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시면 천사들이 공중에서 그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에 하나님의 인정하는 도장이 찍힐 것이라는 유혹이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꿰뚫어 보시고 제도화된 종교에 바로 맞서셨다. 광야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믿는 사람들을 억압할 때마다 어느 곳에서든지 정면으로 맞서셨다.
정치적 유혹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의 약속과 예수님의 영혼을 바꾸는 것이었다(마 4:8-10). 이 산에서의 유혹은 세계 통치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꼭 위압적인 세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최고 정상에 앉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의 화려함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권세와 강압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님을 아셨다. 섬기시고,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형태의 능력이었다.
산상수훈의 중심은 사랑의 율법이다. 야고보는 이를 가리켜 “최고의 법”이라 했다. 사랑보다 성결의 삶을 완전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은 없다. 사랑은 간결하게 압축된 단어이기 때문에 풀어 주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바로 이 유명한 산상수훈을 통해 이 단어를 푸셨다. 예수님은 마음을 변화시키고 뿌리깊은 고결한 습관을 키우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내적인 삶을 지적하신다. 예수님의 성결함이 우리를 좀더 일관된 삶으로, 좀더 순종하는 삶으로, 좀더 열매맺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외치고 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본받은 것을 성결의 전통이라 한다. 묵상의 전통은 성결한 삶의 기초이다. 성결의 물줄기는 마음을 내적으로 새롭게 하고 새로운 습관을 개발하는 데 주력한다. 이 길을 따르는 이는 ‘제단 신학’을 통해 우리의 전 삶을 그리스도의 제단에 드리는 성결한 삶을 강조하였고 또 그렇게 살았던 피비 팔머와, 행함의 근원인 덕스러움에 대한 책 ‘야고보서’를 쓴 예수의 형제 사도 야고보,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에 지니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디트리히 본회퍼가 있다.
성결은 삶의 요구들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결은 규칙과 규정이 아니다. 현재의 삶에서 통합적이고 개요적이며 구체적으로 모든 것에서 성결을 보는 것이다. 성결은 하나님께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스러운 조화이다.
성결의 전통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제시해 주며, 의도적으로 행동의 근원이 되는 마음에 초점을 맞추게 해준다. 또한 인격변화의 진정한 진보에 대한 확신을 주며,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라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성결의 물줄기는 자칫 외면적인 것에 주목하게 하는 율법주의에 빠져들게 하거나, 우리의 행위를 통해 의로움을 얻는다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암초가 도사리고 있으며, 또 사람들을 완벽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히게 할 함정도 지니고 있다.
포스터는 성결의 물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훈련과, 다른 사람들과의 영적 교제를 통한 진실된 조언과, 언제나 그 분 안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담대함을 지닐 것을 조언하고 있다.
3. 카리스마의 전통 - 성령 충만으로 능력 받은 생활
“성령의 충만함”, “성령에게 이끌리어”, “성령의 권능으로” 이 세 가지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말들이다. 성령의 카리즘인 지혜는 지식과 정보와 진리조차도 뛰어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변화되게 하는 방식으로 마음과 생각에 적용되는 진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셨던 은사 중의 한 가지는 분별의 카리즘이다. 기적의 카리즘을 빼놓아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쓰신 또 하나의 영적 카리즘은 오늘날 우리가 거북해 하는 귀신 쫓는 일이다. 예수님의 사역 중 치료의 카리즘이 가장 두드러졌다.
예수님은 사역의 결정적인 순간에 칠십 인을 파송하셨다. 그들이 예수님보다 앞서 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치료하도록 하셨다. 다락방의 설교는 앞으로 올 약속 받은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명확한 가르침이다(요 13-17장). 이 말씀에서 성령이 변호자로, 보혜사로, 위로자로, 강하게 하는 자로 제자들 곁으로 오실 것을 배울 수 있다. 성령의 충만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을 기다려야 했다. 성령으로 능력 받는 삶의 위대한 유산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본받은 것을 카리스마의 전통이라고 한다. 성결의 전통은 존재의 능력에, 카르스마의 전통은 행동의 능력에 중점을 둔다. 카리스마의 물줄기는 성령의 카리즘과 성령의 열매에 초점을 둔다. 이 길을 따르는 이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와 사도 바울, 흑백의 차별이 없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월리엄 시모어가 있다.
카리스마의 전통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다른 현실과 협력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이 다른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의미상 성령 안에 있는 삶이고 그를 통한 삶이다. 카리스마의 전통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영적 성장과 발달을 향한 계속적인 도전을 주며, 증거하고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은사와 능력을 준다.
그러나 카리스마의 물줄기는 경험한 것을 쉽게 평범화시킨다거나, 이성적이고 지식적인 것을 거부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구분하는 오류에 빠지게도 하고, 환상이나 예언 등의 신비적인 현상들이 너무 쉽게 종말론 사상과 연결되어 진다는 함정을 안고 있다.
포스터는 이에 대해, 카리스마적 현상이나 경험 등을 나누며,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사용할 뿐 아니라 성령의 권능 안에서 더욱 진보되어 가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온갖 좋은 것에 대해 기뻐하되 더 많은 것 - 사랑, 능력, 은혜, 은사 -을 사모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성령 안에서의 지도력이나 경험들을 정기적으로 평가하기를 권하고 있다.
4. 사회정의의 전통 - 자비로운 생활
예수님은 말씀과 인격을 통해 성령 안에서 영속되는 희년을 전하셨다. 이 일의 사회적 결과는 뜻 깊다. 나라가 치료되고, 빚이 탕감되고, 노예 된 이들이 자유롭게 되고, 물질이 재분배되는 것이다. 영속되는 희년의 삶에 대해 예수님이 줄여서 표현하신 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하신 신비한 메시지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천국”이 이 세상 왕국에 끊임없이 대항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전은 사회의 비전의 또 다른 선택이다. 하나님의 눙력 안에서 모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받은 모든 이들이 포함된 비전이다. 이 비전은 사회적 구조와 경제적 구조로 인해 짓밟히고 낙담된 모든 이들을 위한 희년의 나눔, 희년의 돌봄, 희년의 자비의 비전이다.
희년의 삶은 희년의 구조를 요구한다. 팔복의 교훈을 통해 희년의 역설을 볼 수 있다. 세례요한이 제자 두 명을 보내 예수님께서 과연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구현하신 분인지 알아보고자 할 때, 영속되는 희년의 구세주의 나라가 오고 있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희년의 비전은 계시록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다”(계 21:4)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보신 영속되는 희년의 사회 비전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본받은 것을 사회정의의 전통이라고 한다. 사회정의의 강물은 모든 인간 관계와 사회 구조에 있는 정의와 평안에 초점을 둔다. 이는 자비의 생활이며 공평과 관대함을 위해 복음의 절대적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길을 따르는 이는 퀘이커 교도로서 노예제도 폐지를 이루어 내었던 존 울먼과, 지도자의 불의와 제도적이며 의례적인 종교 행위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였을 뿐 아니라 절망 가운데 절망을 뚫고 소망을 보여 주었던 아모스, 「천주교 노동자」로 대표되어지는 도로시 데이가 있다.
사회정의의 전통은 마태복음 22장 37-40절 말씀2)을 받침대로 삼고 있다. 하나님 사랑은 수직적 움직임이고 이웃 사랑은 수평적 움직임이다. 이 둘은 황금비율이라 할 수 있는 절묘한 지점에서 교점을 이루고 있다. 사랑의 수평적 움직임에 사랑의 수직적 움직임은 필수적이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을 가능케 한다.
사회정의의 전통은 히브리 단어로 된 세 가지 주제를 포함한다. 미스바와 헤세드 그리고 샬롬 이 세 단어이다.
‘미스바’의 의미는 ‘정의’이지만 사실 이 단어는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 광범위한 단어이다. 이 정의는 사람들 사이에 공평하고 화목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지혜를 수반한다. 경건의 의식이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 이것이 사회 정의이다.
‘헤세드’는 자비라는 주제를 다룬다. 그것은 이삭줍기 법에서 빌려줌과 갚음의 문제와 관련된 고대 히브리 법에서, 동물과 땅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인자함, 공손, 자비로움을 말하는데 이것이 ‘헤세드’이다. 성경은 ‘미스바’의 정의와 ‘헤세드’의 자비를 조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샬롬’으로 나타난다. ‘샬롬’은 조화롭고 모두가 포함된 사람들의 공동체의 비전을 구현한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샬롬’의 비전은 모든 이들을 향한 돌봄과 사려 깊음을 의미한다. 사회정의의 전통은 개인과 사회와 제도적인 조직의 영역에서 일한다. 이 전통은 이미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 개인이 관계하고 있는 모든 - 질서, 교회, 교리, 사회적 윤리, 생태학적 - 영역에서 올바른 것을 추구하고 실현하도록 우리를 강력히 초청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정의의 전통은 대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외면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거나, 특정한 정치적 사안들과 너무 밀접하게 관계해서 나타나게 되는 본말전도의 위험성들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포스터는 이에 대해, 우리의 귀를 열어 놓고 언제나 작은 신음 소리도 들을 수 있게 해야하고, 마음을 열어 놓아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품에 안는 일과, 몸을 던져서 할 수 있는 제반 일에 동참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의의 과업을 맡아야 하지만 모든 과업을 맞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기를 조언하고 있다.
5. 복음 전도의 전통 - 말씀 중심의 생활
과거와 현재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그가 선포하신 복음 그 자체로 계신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문이 활짝 열렸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올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는 모든 이에게 열려졌다.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나, 그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복음은, 당신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나라에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예수님 안에서 열렸다는 것이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과 그 복음을 모든 이가 가질 수 있음을 선포하며 다니셨다. 선포와 시범, 이 이중 행동을 통해 어떻게 복음적 전통이 카리스마의 전통과 통합될 수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물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전통들은 하나가 되어 기능한다. 예수님이 너무나 위대하고 좋은 소식을 갖고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문을 부수듯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보물을 발견했고,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보물을 구할 용의가 있었다.
삭개오, 막달라 마리아, 니고데모는 뛰어왔다. 이 외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뛰어왔다. 하지만 모든 이가 뛰어온 것은 아니었다. 부자 청년, 한 회당장, 유다는 주저했다. 어떤 이들은 되돌아갔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잔치로 초대했으나 그들은 사양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의 메시지이다. 이 초청의 말을 다른 이들과 나누도록 부르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본받은 것을 복음 전도의 전통이라고 한다. 복음 전도의 전통은 복음의 전통을 선포하는 것이다. 사회정의의 전통은 이 복음 전도의 전통과 함께 기능 할 때 최상의 상태가 된다. 이 길을 따르는 이는 밀라노의 정원에서 영혼의 거대한 폭풍을 체험하고 영혼에 대한 열정을 지닌 훌륭한 설교자로, 또 “하나님 없이 우리는 할 수 없고, 우리 없이 하나님은 하지 않으신다.”면서 그 자신이 설교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던 히포의 어거스틴과 처음 예수님의 부름을 입고 끝없이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삶을 살았던 전도의 모범 사도 베드로, 현존하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빌리 그레이엄 등을 들 수 있겠다.
복음 전도의 전통은 복음의 신실한 선포, 성경중심성, 초기기독교공동체의 신앙고백에 대한 증언이다. 복음, 곧 복음의 좋은 소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 안에서의 삶으로 지금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의 삶이 변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라고 권하는 믿음은 그들의 삶이 예수님을 향해 돌아서도록 그들을 부르는 것이다. 이 복음의 메시지는 성경 안에 잘 보존되어 있고, 초기 기독교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신앙고백적 확언과 신경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 전통은 우리가 감사해야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회심시키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증언을 듣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을 강조하는 것이며, 셋째는 성경의 사건들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넷째는 건전한 교리에 대한 증언을 그들이 하는 것으로 인해 감사하여야 한다.
그러나 복음 전도의 전통은 장점의 요소들이 왜곡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이 몇 가지 있을 수 있다. 첫째, 주변적이고 중요치 않는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경건한 확신이 교회의 중심으로 올라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분파적인 심리 상태로 치우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교회사에서 분리되어 가는 것에 있지 않고, 교회 전통 내의 진리와 오류를 성경에 비추어서 잘 분별하는 데 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매우 제한된 견해로 한정시키는 위험이 있을 수 있다. 넷째, 성경 숭배 경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두 번째 상징이다. “궁극적이고 최후의 권위는 성경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포스터는 이에 대해, 성경을 잘 알 것을 말하는데 그 제안으로, 특별한 수단이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성장을 위한 양식으로서 성경을 한번에 상당량씩 읽을 것을 권한다. 또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귀며 증언하여야 하는데, 호전적 - 전투, 승리, 정죄 등의 의미 - 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언하고, 우리가 변화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조언하고 있다.
6. 성육신의 전통 - 성례의 생활
성육신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의 중심이다. 위대한 하나님께서 역사의 정확한 한순간에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의 형체로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그 자체이다. 그 신비에 우리는 엎드러지게 된다. 그것은 신령한 역사상 되풀이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인간성’이 패러다임을 줄 수 있다.
예수님은 목수의 일을 하시며 배우셨고, 집에서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배우셨다. 예수님은 나무를 깍으시고, 의자들과 장롱을 만드시면서 그 가르침들이 진리임을 되풀이하여 증명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스테인드 글라스와 제단과 침묵의 수양으로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면 중보 기도 사역과 부흥회에 한정한다.
예수님의 삶과 우리 삶의 대부분은 우리 식구들과 가정, 우리의 직장과 여가 생활, 우리의 이웃들과 매일 접하는 주위 환경에서 보내고 있다. 이런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성육신적 삶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장소이다. 사랑, 희락, 평강 등 성령의 열매가 흘러 넘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 말고는 아무 곳도 없다. 예수님에게는 이것이 사실이었고 우리들에게도 사실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본받은 것을 성육신의 전통이라고 한다. 성육신의 물줄기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현재에 존재하고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일에 초점을 맞추며 우리의 일상 생활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길을 따르는 이는 8자녀의 어머니로서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히 헤쳐 나가며 믿음과 삶의 실천이 함께 하였던 수산나 웨슬리, 광야 길에 성막을 지을 자로 지명받고 그 일을 잘 수행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환상을 심어주었던 숙련된 기능공 브살렐, 유엔 사무총장 재임시 불의의 사고로 숨졌지만, 그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명’과 ‘천직’으로 알고, ‘하나님께, 운명에, 자신에게 “네”라고 대답’하며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오직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셨다”라는 믿음으로 살았던 다그 하마슐드 등을 들 수 있겠다.
성육신의 전통은 영과 물질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관심을 둔다. 물질적인 세상이 창조된 이유중의 하나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보이게 하고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는 종교적인 차원과 일상생활의 영역이 있다. 교회의 성례전은 영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현재 존재하고 보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물질을 사용하시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지 끝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적인 삶을 우리의 일상 생활들로 가져다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루 하루 보내주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곧 ‘소명’이고 ‘천직’이다.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 매 순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 것인가?”를 물으며 그 분의 가르침을 쫓아 일해야 한다.
성육신의 전통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무한히 확장시켜 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 사이에도, 일상 생활 속에서도, 우리 육체에 대한 생각에도, 하나님이 지으신 생태학적 관심 속에도 여전히 자리잡고 계신다. 또한 우리들이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보고 성(聖)과 속(俗)을 판단하는 일을 제어하도록 해준다. 무엇보다 이 전통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성육신의 전통은 창조하신 세상에 또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고백할 때, 자칫 하나님과 세상을 동등하게 연관시키려는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신성한 물건과 그것이 의미하는 영적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문제이다. 우상 숭배의 위험은 진정한 위험이다. 끊임없는 경계가 필요하다. 두 번째 위험은 외면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할 때 생긴다. 특정한 종교의식이나 제도, 조건과 규정을 준수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식의 논리로 하나님을 제한하려 할 때 생기는 위험이다. 예수님은 친히 당시 사회 종교적 법규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므로 이러한 위험을 피하셨다.
포스터는 이에 대해, 우리의 물질 세상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를 기도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경험에 들어오시도록 초청한다. 우리의 모든 일 가운데 그 분을 초청하고 그 분을 통해 ‘초청 받은 은혜’를 경험한다. 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기독교 영성을 회복하여야 하고, 결혼 생활과 가정 생활의 회복을 통해 성육신의 전통이 올 수 있다고 말한다. 일은 ‘소명’으로서 회복되어야 하고, 결혼은 포기가 전제된 ‘서약’이며, 가정 생활은 가정에서 충분히 표현되어야 한다고 조언하여 준다.(끝)
1) 예수촌교회(담임:손종태 목사, http://www.yesuchon.net)가 대표적인 모델이 되겠다. 이 교회는 손종태 목사(책임사역자, 설교), 정일호 집사(중보기도, 행정), 강명식 음악사(예배, 음악), 한철용 전도사(교인관리, 상담) 등으로 사역자들이 전담 사역을 하고 있다.
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