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시 중마동 불로에 세동(細洞) 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다.
이 세동은 원래 세이동이었던 것을 세(洗)자가 세(細)자로 바뀌면서 세동이리는 이름으로 불러지게 되었단다.
원래 이 마을이 세이동으로 불러지게된 동기는 1637년에 이영(李永1592-1654)이 은거하는데서 유래하였다 한다.
이영은 일찌기 무과에 급제하여 승승장구 승차하여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이 되었단다.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에 인조대왕이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적인 사건을 보고 왕과 열성조에 대한 자책간을 한 몸에 앉고 대성통곡한 후 벼슬을 버리고 광양 중마동으로 귀향하였다 한다.
공은 이곳에 은거하시며 명리(明利)와 세상사에 귀를 막고 여생을 보내셨다고 한다. 이러한 공의와 절개가 세상의 명리를 멀리 한다는데서 생겨났단다. 그리고 기산영수에서 귀를 씻은 소부 허유의 고사와 같다하여 영이 은거한 곳을 세이동이라 하였다고 전 한다. 이곳에 세워진 모청재(慕淸齋)는 공을 제향하는 곳이다.
이후 모청재는 도시개발로 인하여 이영의 후손이 많이 살고있는 옥곡면 죽치(대티마을)로 이전하게 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