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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민형수(閔亨洙)를 해남(海南)에 귀양 보내고 도승지를 보내어 이광좌(李光佐)에게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
“신이 근일 성덕(聖德)의 과실이 큰 것을 먼저 아뢰고 그 다음에 묘당의 일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이미 고사(古事)를 널리 아시므로 보상(輔相)이 진퇴할 즈음에 예우하셔야 할 것인데, 더구나 여러 재상들에 비하여 더욱이 중한 수상(首相)이겠습니까? 지금 수상은 기구(耆舊)인 신하로서 성상께서 기대하시는 바가 어떠하겠습니까마는, 강교(江郊)에서 석고(席藁)한 지 이미 석 달이 되었는데 한 자의 비교(批敎)가 없으므로 또한 감히 상소하여 스스로 밝히지 못합니다. 민형수로 말하면 지난번 신이 아뢴 바는 대개 처분이 혹 지나칠 것을 염려한 것이고 전혀 죄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이 고상(故相)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심하게 죄주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죄주고 죄주지 않는 사이에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경(卿)의 말이 아니라도 본디 처리하려 하였는데 내가 참고 말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각각 제 뜻을 아뢰라.” |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
“선후(先后)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법을 굽혔다면 성덕(聖德)에 있어서는 손상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
하고,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도 송인명의 말과 같았다. 좌참찬 조현명이 말하기를, |
“민형수가 상소한 것은 하나의 변서(變書)입니다. 그 말이 옳다면 영상(領相)이 역(逆)일 것이고, 영상이 역이 아니라면 그 말이 남을 악역으로 무함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민형수의 말이 아니라 그 아비의 말을 그대로 말한 것이니, 시비·득실은 그 아들에게 대하여 논할 것이 아닙니다.” |
하고, 이조 판서 윤혜교(尹惠敎)는 은혜와 법률을 참작하는 사이에 시비의 공정한 것을 해치는 것이 없게 하기를 청하였다. 수찬 오수채가 말하기를, |
“참으로 민형수의 말과 같다면 이는 대신(大臣)이 역일 것이므로 절로 왕법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죄는 절로 돌아갈 곳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극진히 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인데, 은혜와 법률이 반드시 중도에 맞게 하셔야 이것이 또한 천하의 공정한 것일 것입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내가 봉조하(奉朝賀)의 말을 슬퍼하고 아깝게 여기는 것은 어진 이에게 완전하기를 요구하는 뜻이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면 혹 그 시비를 논할 수도 있겠으나, 죽은 뒤에는 다시 제기하여 논하지 않으려는 것이 내 본의이다. 유신(儒臣)의 천리를 다한다는 말도 공정한 것이 아니다. 저것도 극진한 것이라 하고 이것도 극진한 것이라 하니, 극진한 것은 본디 하나인데 이제는 극진한 것이 둘이 되었다. 민형수가 상소한 말은 그가 평소에 익히 들은 것이다마는, 나는 다만 민형수를 그르게 여길 뿐이다. 어찌하여 반드시 그 아비 때문이라 해야 하겠는가?” |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
“세도(世道)가 날로 낮아지고 인심이 날로 투박해져서 서로 충(忠)을 말하고 역(逆)을 말하며 부끄러워하고 꺼리는 것이 없다. 임금이 음식을 물리친 뒤인데 지금의 신하로서는 어찌 감히 마음에 싹틔우고 입에서 낼 수 있겠는가? 조태언(趙泰彦)에게도 오히려 극률(極律)을 쓰려 하였는데, 더구나 민형수이겠는가? 임금이 잔약한 자에게만 법을 쓴다면 나라의 기강이 있다고 하겠는가? 아! 역이라는 것은 강상에 관계되는 것이니, 배척받은 자가 역이라면 절로 그 형률이 있을 것이고, 배척받은 자가 역이 아니라면 반좌(反坐)되어야 할 것이다. 아! 영상과 봉조하의 지난날의 일은 그때의 상황이 의구하고 막혀서 그렇게까지 된 것인데, 능히 진정시키고 양편을 화해시켰으므로 상직(相職)에 있을 때에 임금과 신하 사이에 다시는 막히는 것이 없었으니, 혹 그 뒤의 말이 있었더라도 그 아들은 감히 임금 앞에 다시 말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그 전에 있었던 일이겠는가?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는 하교에 슬퍼하고 애석히 여기는 것을 대략 보였으니, 아들의 도리로서는 이 하교를 가지고 그 아비의 영전에 울며 아뢰고 매우 스스로 칙려한다면 또한 마땅히 임금의 하교에 감동하고 아비의 충성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이다. 아! 영상의 심사는 내가 남김 없이 통촉하여 이미 충성으로 받아들였는데, 임금의 하교를 받은 지 3년이 되어도 고심하는 것을 본받지 못하고 슬퍼하고 애석히 여기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마음대로 말하여 위로 그 임금을 업신여기니, 이것은 불충이다. 강상에 관계되므로 남을 무함한 율로 처치한다면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말하였다 하여 대신 왕법에 빠졌다 할 것이니, 어찌 아들이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불효이다. 백발(白髮)이 당(堂)에 있으면 의지하는 것은 손자뿐인데 다반사로 법을 범하려 하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왕년을 추상하는 뜻으로 빨리 말감(末勘)9192) 에 따라 민형수를 해남현에 귀양 보내라.” |
하고, 또 이미 민형수를 죄주었으니 다시는 개의하지 말라고 하교하여 도승지를 보내어 이광좌에게 전유하게 하였다. 송인명이 민형수를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극률에 처하려다가 참작하였다.” |
하였다. 당초 민형수가 상소하여 이광좌를 논하였을 때에 임금이 매우 죄줄 뜻이 없었으므로, 송인명이 그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여 이미 죄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나서 또 반드시 죄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고, 이광좌가 외방에 나가게 되어서는 송인명이 수상의 일을 행하였다. 그래서 이광좌의 무리가 비방하는 의논이 시끄러우므로 송인명이 편안하지 않게 생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좌·민형수의 일을 아뢰었으나 오히려 다시 그 말을 머뭇거렸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
“유신에 대한 처분이 너무 지리하고 만연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기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너무 지나치십니다.” |
하니, 임금이 드디어 고쳐서 채응복(蔡膺福)을 해남 현감(海南縣監)으로 제수하고 이석표(李錫杓)를 율봉 찰방(栗峰察訪)으로 보임하였다. 이에 앞서 삼등현(三登縣)에서 도둑을 안치(按治)하였는데, 수인(囚人) 중에 이빈(李濱)이라는 자가 있었다. 국경을 넘은 일로 옥사(獄辭)에 관련되어 잡혔는데, 이빈이 말하기를, ‘백두산 아래에 1백여 마을이 있는데 그 괴수는 김거사(金居士)이다.’라고 하였다. 송인명이 이 때문에 건백하여 백두산의 정계(定界)를 살펴보기를 청하고 또 이형원(李馨遠)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는데, 이형원이 군사를 징발하고 배를 만들었기 때문에 죄주고 변방의 세 수신(守臣)도 체직시키고 도신(道臣)을 시켜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 문안을 올렸는데 그 말이 허황하였다. 임금이 보고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신하들이 모두 믿을 만하지 못하다 하여 버려 두기를 청하였다. 송인명이 또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파면하기를 청하였는데, 국경을 넘는 것을 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
“이상집(李尙)은 임인년9193) 의 옥사 때에 죽었는데 사람들이 다 억울하다 하니, 금오(金吾)9194) 를 시켜 옥안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소서.” |
하니,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42책 629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