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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 빛의 고을
서울·부산·대구·인천·대전에 이어 국내 제6위를 차지하는 대도시이며, 호남지방(湖南地方) 최대의 도시이다. 산지지역과 평야지대의 접촉지에 자리함으로써 군사·행정·교역상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1914년에 개통된 호남선(湖南線)이 광주시를 피하여 영산강(榮山江) 서안을 따라 부설되자 한국의 경제중심권(經濟中心圈)과 떨어져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소비도시(消費都市)로 전락하였다.
광주 문화관광 http://utour.gwangju.go.kr/index.do?S=S01
광주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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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구 양림동 근대 역사문화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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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칠석고싸움놀이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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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광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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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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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無等山]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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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각사/증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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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 고택 남구 압촌동 101-1
현존 가옥은 1917년 소유자 고원희(高元熙)의 부 종석(琮錫)이 건축한 것으로 옛집은 무너져 없어졌다.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문과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이 남아 있다. 대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곳간채가 나란히 있으며,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 안채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
고경명 고택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
고씨삼강문에는 고경명을 비롯하여 진주성에서 전사한 효열공(孝烈公) 고종후(高從厚), 금산에서 전사한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高因厚) 등 두 아들과 정유재란 때 왜적에 항거하다 순절한 고경명의 딸인 열녀 장흥고씨(靈光儒生 盧尙龍의 처)와 조카며느리 광산정씨(高巨厚의 처), 손자인 선교랑(宣敎郞) 고부금(高傅金)과 절의를 지키다 죽은 동생 고경형(高敬兄) 등 일가 7명이 모셔져 있다.
광주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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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측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신축과 이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182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였으며, 행사기간 중 국내외에서 약 200만 명이 관람하였다.
본전시(국제현대미술전)는 '경계를 넘어서'라는 주제 아래 회화·조각 등 미술의 고전적 장르개념을 넘어 첨단 테크놀로지와 정보, 예술의 접목을 시도하는 설치작업들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여기에 세계 50개 국의 작품 88점이 전시되었다. 이 밖에 특별전은 '증인으로서의 예술전' '광주 5월정신전' 등 6개전, 기념전은 '한국근대회화명품전' 등 3개전이 열렸다.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광주디자인비엔날레는 미래 디자인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전시행사로 아시아문화중심도시•디자인도시를 표방하는 광주에서 개최하는 세계 최초의 종합디자인 전시 행사이다. 2년마다 열리는 이 행사는 전시행사 외에도 다양한 축제와 국제회의, 워크숍, 이벤트 등이 어우러진 격조 높은 축제의 장이다.
광주상무조각공원
상무지구 평화공원 광주 상무지구는 육군 상무부대가 외곽으로 이전함에 따라 신도시로 개발한 곳이다. 상무지구 평화공원은 1994년 상무 신도시 개발 당시 24,178㎡의 면적에 화강석으로 미관광장이 조성되었다.
광주 남구 양림동 근대 역사문화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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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구 양림동 이장우가옥(李章雨家屋. 사진) 1989년 3월 20일 광주광역시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대문간, 곳간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배치된 상류 주택양식의 기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광무삼년을해이월십일축시(光武三年乙亥二月十日丑時)’로 기록되어 1899년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09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광주 남구 양림동 최승효가옥(崔昇孝家屋) 1989년 3월 20일 광주광역시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양림산(楊林山) 동남쪽에 있으며 1920년대에 지어진 전통가옥이다. 정면 8칸, 측면 4칸의 일자형 팔작지붕 집으로 동향이다. 독립운동가 최상현(崔相鉉)의 집이었으며, 다락에 독립운동가들을 피신시켰다고 한다.
광주 남구 사직공원[社稷公園] 도심에 있는 공원으로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다. 이곳은 원래 나라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사직단이 있던 곳인데, 1894년 제사가 폐지되고 1960년대 말에 사직동물원이 들어서면서 사직단은 헐리고 말았다. 그 뒤 사직단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자 1991년 동물원을 우치공원으로 옮기고 사직단을 복원하여 1994년 4월 100년 만에 사직제가 부활했다.
광주 칠석고싸움놀이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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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싸움놀이는 남구 칠석동 옻돌마을에 정월대보름 세시풍속으로 전해 내려온 민속놀이로 어느 민속놀이보다도 격렬하고 남성적인 것이 특징이다. 고싸움놀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그 해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고싸움은 짚을 꼬아서 만든 커다란 고를 서로 맞부딪쳐서 상대 쪽의 고를 떨어뜨리는 싸움이다. 남자를 상징하는 동부와 여자를 상징하는 서부의 두 패로 갈라져서 싸움을 벌이는데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정월 14일 밤에는 마을사람들이 마을 뒤쪽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과 마을 앞쪽에 있는 할머니 당산에 당산제를 지내고 농악을 치고 당산과 마을 곳곳마다 돌며 마당밟이를 하고 나서 16일이 되면 마을 상촌 사람들은 동부로, 하촌 사람들은 서부로 편을 갈라서 고싸움놀이를 벌여 승부를 낸다.
광주학생운동 발상지 북구 누문동 144-45외 동구 장동 39-12번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여학생희롱사건이 발단이 되어 11월 3일의 항일시위를 전개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의 일부를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광주향교(光州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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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대성전을 보수 ·단청하였고, 1976년 동 ·서재와 1978년에 명륜당을, 1981년에 담장 등 외관을 수리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비각·동무(東廡) ·서무(西廡) ·동재 ·서재·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조성되어 있고, 5성(五聖), 송조 6현(宋朝六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현재는 봄,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분향만을 한다. 이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189종 306책의 경서와 문집류가 있다.
광주호 호수생태원[湖水生態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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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호 호수생태원 광주호(光州湖)의 호숫가에 있다. 2006년 3월에 개장한 후 아이들의 자연생태학습장이자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된다. 수생식물원, 생태연못, 야생화테마원(17여만 그루), 목재탐방로, 전망대, 수변관찰대 등이 있으며, 호수 안에는 버드나무군락지와 습지보전지역이 있다. 매자기·애기부들을 비롯한 수많은 수생식물과 다양한 종의 조류·파충류·양서류를 관찰할 수 있다. 입구에는 400년 수령의 왕버들나무가 있고, 공원 가까이에 식영정·환벽당·소쇄원 등의 문화유적들이 있다.
국립광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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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는 관장 아래 관리과와 학예연구실로 이분화되어 있다. 소장 및 전시 유물은 호남지방의 선사시대 유물, 백제·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걸친 불교미술품과 각종 도자기 등이 있고, 신안 앞바다의 해저유물 등이다. 2008년 6월 현재 총 7만 2293점의 유물을 소장하였으며 그중 1,480점을 전시하고 있다. 2007년에는 교육관을 신축하고 어린이 박물관을 신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국립5·18민주묘지
5·18 광주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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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묘역이라고도 하며,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산34번지 일원에 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더불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작업 및 5·18 희생자 묘역을 민주성지로 가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광주광역시가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성하였다. 1994년 11월 공사를 시작하여 4년만인 1997년 5월 16일 완공하였다.
묘역 안에는 5·18영령의 묘 333기(2002년 5월 현재)가 있으며, 건축물 7동(민주의 문, 유영봉안소, 역사의 문, 숭모루, 추념문, 관리동, 휴게실)과 역사공간, 민주광장, 참배광장, 전시공간, 상징조형물, 광주민주화운동추모탑, 7개 역사마당(의병, 동학, 3·1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통일마당), 헌수기념비, 준공기념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물
5.18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에 큰 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의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져 왔고, 그런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김대중컨벤션센터 서구 치평동(治平洞) 1159-2 상무지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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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향토음식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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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시설물로는 남도향토음식과 관련된 음식의 위탁 · 주문판매를 하는 뮤지엄샵, 향토음식 관련 기획전시 및 문화예술분야 각종 초대전이 열리는 기획전시실, 남도지방의 향토음식을 소개하는 남도향토음식상설전시실, 박물관의 시설문 안내 및 각종 홍보 영상물 등을 볼수 있는 뮤지엄스튜디오, 문향(文鄕) · 의향(義鄕) · 예향(藝鄕)의 호남문화를 한눈에 볼수 있는 호남문화자료전시관, 문화예술분야의 각종 전문강좌 및 회의 장소로 활용되는 세미나실 등이 있다.
박물관 건물은 떡모양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다식판의 길쭉한 사각형 모양과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 입석대의 모습으로 디자인 되었습니다.
또한 오방색(청색, 백색, 적색, 흑색, 황색)으로 건물 벽면을 장식하였으며, 오방색은 방위, 계절, 장기, 맛, 감정, 사상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방색을 오행의 개념으로 색과 맛으로 구분하면 노란색은 단맛, 푸른색은 신맛, 붉은색은 쓴맛, 흰색은 매운맛, 검은색은 짠맛을 상징한다
오방색과 다식판, 무등산 입석대의 조화로운 모습은 전통과 현대의 방식이 잘 조화된 건축물입니다
무등산[無等山 제2경]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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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돌길(무돌은 과거 무등산의 옛 지명으로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는 뜻이다. 무돌길은 무등산을 돌아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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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일대에서는 김덕령(金德齡) 장군을 비롯 많은 선열·지사(志士)·문인·예술가·정치인 등이 배출되었으며, 또 무등산의 정기는 광주학생운동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다.
광주에서 무등산에 오르는 주요 등산로는 증심사(證心寺)를 기점으로 하는 용추계곡(龍湫溪谷) 등산로와 원효사(元曉寺)를 기점으로 하는 원효(元曉)계곡 등산로가 있다.
입석대는 무등산의 대표적인 경승지로, 단석(壇石) 위에 20 m 가량의 입석(立石)이 마치 석공(石工)의 다듬질을 받은 것처럼 서 있다.
서석대는 수정병풍(水晶屛風)이라고도 하는 돌무더기이고, 지공 터널은 무수한 암괴(岩塊)가 깔려 있으나 서로 얽혀서 덜컥거리지 않는다. 입석대(해발 1017m)는 한 면이 1~2m이고 높이가 10~18m인 5각 또는 6각 기둥 30여 개가 동서로 40여m 늘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돌기둥 사이의 벌어진 틈에는 작은 관목이나 이끼가 자라고 있다. 같은 주상절리이지만 서석대(해발 1100m)는 입석대보다 침식이 덜 진행돼, 직경 1~1.5m인 돌기둥이 30m 높이로 촘촘하게 병풍처럼 서 있다. 동서방향으로 늘어선 서석대에 저녁노을이 비치면 수정처럼 반짝인다
주상절리는 화산활동의 산물인 마그마가 식을 때 사각형 내지 육각형의 형태를 갖추며 식어 풍화작용에 의해 드러나 보이는 것으로 대부분의 주상절리대는 그 암석이 현무암인데 비해 무등산의 서석대와 입석대 등은 안산암으로 국내에서는 특이한 것이다.
또한 다른 곳의 주상절리가 파도와 같은 물에 의한 침식의 결과인데 비해 무등산은 주빙하기후환경에서 물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오늘날 지형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광석대(廣石臺)라고도 하는 곳에 규봉(圭峰)이 있는데 부근에 규봉암이 있다. 규봉암 앞에는 여래존석(如來尊石) ·관음존석(觀音尊石) ·미륵존석(彌勒尊石) 등의 삼존석(三尊石)이 있다. 원효사를 기점으로 하는 원효계곡은, 곳곳에 급단폭류(急湍瀑流)와 심연(深淵)을 이루는 곳이 많아서 피서에도 알맞은 경승지이다.
원효사에 이르는 도중의 충효동(忠孝洞)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출생지이며, 그의 의복(중요민속자료 111)이 보관되어 있고, 또 충장공(忠壯公)으로 추증(追贈)된 공을 모시는 충장사(忠壯祠)와 공의 묘소가 있다.
무등산 수박 무등산 운림골을 본산지로 하는 높은 산기슭에서 재배되는 순재래종 수박이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수박을 ‘푸랭이(푸래기)’라고 부르는데, 암록색의 겉빛깔에서 유래된 듯하다.
병천사 서구 금호동 458
경내에는 사당·영당·동재·서재·강당·전사실·내삼문·원직사 등이 있는데 건물 가운데 가장 크고 보존을 요하는 강당 1동만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었고 앙쪽은 방을 들였다. 병천사는 서원과 비슷하다고 느낄 정도로 규모가 큰 사당건축이다
부용정[芙蓉亭]
김문발(1359∼1418)이 지은 정자로 연꽃을 꽃중의 군자라고 칭송하던 북송 주돈이의 애련설에 담긴 뜻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 김문발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광주기념물 10)와 부용정 석비가 주위에 있다.
김문발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격퇴한 공이 큰 무신으로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퇴임 후 낙향하여 이 정자를 짓고 이곳에서 여씨(呂氏)의 남전향약(藍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 등을 본받아 향약을 시행하여 풍속의 장려에 힘썼다.
예술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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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기념각 남구 양림동 67-1학교법인 광주기독병원교육재단
회색벽돌로 된 2층의 서양식 건물이며, 형태는 예배나 집회의 장소로 적합하지만 현재는 기독간호대학의 강당으로 쓰인다. 또한 기독교와 관련된 집회는 물론이고 각종 강연회·음악회·영화·무용·학예회 등 여러 행사를 할 수 있어 이 지역 문화공간으로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오웬 기념각은 건축사적으로나 개화초기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모습과 관련하여 의미있는 건물이다
우일선 선교사사택
원효사[元曉寺] 북구 금곡동 무등산에 있는 사찰이다.
월봉서원(빙월당 제5경) 광산구 광산동 452
원래 이곳은 기대승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박상·박순·김장생·김집 등 조선의 명신들을 함께 배향하고 있는 ‘월봉서원’의 강당이었다.
월봉서원은 그가 죽은 뒤 그를 추모하기 위해 큰아들인 기효승이 선조 11년(1578) 세운 것으로 정조가 ‘빙월당(氷月堂)’이라 이름을 지어 내렸다. 빙월당의 당호는 정조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빙월설월(氷月雪月)’의 뜻으로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중외공원(제7경)
1981년 8월에 준공하였으며, 정신개발시설·지능개발시설·위락시설 등이 있다. 정신개발시설로는 민속박물관·생활과학관·토산품전시실·역사관·문화관·승공관·도서실·미술실·무용실·음악연주실 등이 있으며, 지능개발시설로는 과학관·공작실·과학연구실·시청각자료실·야외전시장 등이 있으며, 위락시설로는 축구장·야구장·정구장·수영장·롤러스케이트장·놀이동산·휴게시설 등이 있다.
지산재[芝山齋] 남구 양과동 715-1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며 중앙 3칸은 마루바닥이고 양 툇간은 방을 놓아 민가와 같은 인상을 준다. 현판은 김규태가 썼다. 경내에는 내삼문, 외삼문과 영당이 있다. 해마다 9월 9일 유림들이 석채례(釋菜禮)를 올린다. 경주최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증심사[證心寺]
증심사 창건에 얽힌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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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각사/증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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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심사 창건에 얽힌 전설 신라시대 무주땅에 한만동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이 이야기는 한만동의 할아버지가 태수 벼슬을 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태수의 집에 득이라는 종이 있는데 심부름을 보내면 한나절이요, 툭하면 술에 취해 상전에게 대들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들어온 득이가 다음날 사라져 버리자 이에 노한 한태수는 득이의 처를 광에 가두고 만다.
득이의 처는 아이를 가진 몸이였으나 득이의 행실때문에 변을 당할 팔자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득이의 처는 한 여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달아날 수 있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갓 시집온 한만동의 어머니였다. 세월이 흘러 한만동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초상을 치르는데 스님 한분이 초상집에 뛰어들어 대성통곡을 하며 슬피 우는 것이었다. 한만동이 연유를 묻자 자신은 마님 생전에 은혜를 입었던 득이의 아들로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하였다.
그리고 은혜를 갚기 위해 풍수를 배웠다며 무등산 자락에 마님의 묘 자리를 잡아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만동은 승주고을의 원님이 되었고 집안에도 점점 부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리가 얼마나 좋은 명당인지 궁금했던 한만동은 지관을 데려와 그 자리를 살피게 하였는데 지관은 그리 좋은 자리가 아니라면 옮기라 하였다. 이를 믿어버린 한만동은 하인을 시켜 묏자리를 파기 시작했는데 그때 한 노승이 뛰어들어 이를 말렸다. 알고 보니 그 노승은 오래전 어머니의 묏자리를 잡아준 득이의 아들이었다
지관에게 속은걸 알게 된 한만동은 다시 묏자리를 메우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자 노승은 절터를 잡아 드릴 테니 절을 세우고 불공을 드리라 일렀다. 그때 한만동이 액땜하기 위해 노승이 잡아준 터에 세운 절이 지금의 증심사라 한다
증심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
손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보이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충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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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의 대표적인 도심 거리축제로, 해마다 10월에 동구(東區)의 중심거리인 충장로를 비롯하여 황금로·금남로·예술의거리 일원에서 5~6일 동안 열린다.
충장사[忠壯祠] 북구 금곡동에 있는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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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왜군과의 전투에서 민첩하고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596년(선조 28) 적장과 내통한다는 무고로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옥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영조 때 무죄가 밝혀져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제8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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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에서 특히 이채로운 것은 옛 사당의 입구 홍살문 옆에 있는 자연석에 새겨져 있는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의 비문이다. 이들은 고경명의 충직스러운 노비로, 주인과 함께 의병에 참가하였고, 금산싸움에서 고경명과 고인후 부자가 전사하자 그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지냈다. 이듬해에는 다시 살아 남아 있던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충의의 인물들이다. 3부자 모두 불천위를 받았다. 역사상 최초이다. 월드컵경기장 북문 옆 잔디밭에서 충렬공 고경명 선생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허백련 춘설헌[許百鍊春雪軒] 동구 운림동 산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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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은 조선 후기 한국 남종화를 완성했던 허련의 후손으로, 허련의 아들 허형에게서 그림의 기본을 익히고, 일본과 서울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1938년 전라도 광주에 정착하여 활동하면서 연진회를 발족하여, 전통서화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고,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농촌지도자를 육성하였다. 또 일본인이 버리고 떠난 무등산의 차밭을 인수해 춘설다원을 경영하면서, 전통차의 재배와 보급에 힘썼다.
춘설헌은 1950년에 종래의 낡은 집을 헐고 벽돌로 새로 지은 건물로 마루에는 춘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마루 왼쪽으로는 작품활동을 하던 2개의 방이 있는데, 하나는 온돌방이고 하나는 일본식 다다미방이다.
환벽당[環碧堂] 북구 충효동 387
송강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머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환벽당 아래로는 조대와 용소가 있는데, 여기에는 김윤제와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에 내려가보니 용소에서 한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데려다가 제자로 삼고 외손녀와 결혼시켰는데, 그가 훗날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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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맛집
광주오미(光州五味) 무등산 보리밥과 광주한정식, 오리탕, 광주김치, 송정 떡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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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맛집 대광식당 육전 1박2일에 나온 이수근씨가 광주지역을 방문하여 이종범선수가 모시고 간 식당은 광주 시청 근처의 대광식당인데요- 광주에서 대광식당과 광주 상무지구에 위치한 육전명가가 쌍벽을 이루더군요. 광주 육전으로 유명한 또 다른 곳인 조선대 근처 미미원
광주 맛집 명선헌 명선헌(동구 지산동)은 남도 최고의 김치 명인으로 인정받는 최인순 대표의 보쌈김치를 맛볼 수 있는 한정식 집이다. 궁중요리 연구가 최인순(명선헌 대표) 김치명인이 2001년 광주김치축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MBC 다큐멘터리 ‘김치’ SBS ‘결전 맛대맛’등 각종 방송에 출연한 바 있는 그야말로 자타공인‘남도최고’로 인정받는 김치의 달인.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 100선 선정의 집
광주 맛집 무진주 부드럽고 맛있는 보쌈. 불로동 ‘무진주’(224-8074)는 갓 담근 김치와 감자국수, 돼지고기 수육 등 6가지가 들어가는 모듬보쌈(4인분 3만 원)으로 젊은 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 100선 선정의 집
광주 맛집 송정 떡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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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송정리에는 20여 개의 떡갈비 전문점이 '떡갈비 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떡갈비는 옛날, 임금이 먹기 편하도록 상궁이 개발한 음식이라고 한다. 뼈를 발라낸 갈빗살을 먹기 좋게 다져 다시 뼈에 붙여 성형한 뒤 구워 만든다. 광주광역시에서 5대 맛집으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유명세가 있는 곳입니다. 역대 대통령들도 꽤 방문한 곳이라고 한다
광주 맛집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고깃집을 겸한 한정식집이다. 한정식에는 당일 들어온 싱싱한 생고기를 비롯 굴비 제조옥돔 신선로 수육 더덕구이 산낙지 홍어삼합 등 12~20여 가지가 올라온다. 20년 경력의 주방장이 만들어 낸 음식의 맛이 깔끔하다. 특히 간장게장과 3년 된 묵은 김치는 인기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 100선 선정의 집
구 도청 앞 5·18광장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80년 민중항쟁 당시 시민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광주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충장로는 쇼핑과 패션의 중심지로 밤이 면 형형색색의 조명이 어우러진 거리로 항상 청춘 남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활기 넘치는 곳이다.
대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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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시장은 1959년 5월 공설시장으로 출발했다. 현재 동부소방서 부지에 있던 옛 광주역(1922년~1969년)과 롯데백화점 부지에 위치했던 터미널(1975년~1992년) 덕에 대인시장은 항상 인파로 붐볐다.
봄이면 공원입구에 벚꽃이 만발하여 터널을 이루고, 여름에는 아카시아 녹음, 가을의 단풍과 낙엽 등이 한껏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산책하는 묘미도 괜찮은 곳이다. 사직공원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해돋이는 특히 장관이다
승촌보(영산강 제6경)
보 연장은 540m(가동보 180m, 고정보 360m)이며 가동보는 트러스 타입 리프트 게이트 형식으로 경관연출이 가능하고 구조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개방형 구조로써 유지관리가 용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에 설치되는 소수력발전소는 부력 및 기계진동에 안전한 단면계획 및 공도교와 연결을 통한 유지관리가 용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어도는 국내 최초 첨단기법인 풀형 아이스하버식 어도를 적용했다.
환경친화적인 경기장으로 설계되어 국제축구연맹(FIFA)실사단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구장' 이라는 평가와 월드컵 4강 신화의 현장인 월드컵경기장은 이 지역 전통민속놀이 '고'를 형상화해 이색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밤에 바라보는 달맞이는 현대인의 가슴에 찡한 감동을 불러주기에 손색이 없다.
무등산장으로 가는 길에 꼴깍 고개를 넘어가는 잣고개에서 내려다본 광주의 야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잣고개를 에둘러 친 무진 고성의 성터는 장원봉을 중심으로 제4수원지 안쪽의 산능성을 따라 둘레 3,500m의 타원형으로 축조돼 있다.
풍영정[風詠亭 영산강 제7경]
풍영정은 1560년(명종 15) 승문원(承文院) 판교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김언거(金彦据)가 지은 정자이다. 여기서 그는 72세로 죽을 때까지 10여년 간을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등 많은 이름난 문인들과 교우하며 지냈다. 풍영정에 남아 있는 이들의 제영현판(題詠懸板)은 이때의 흔적이다. 또한, 여기에는 명필 한석봉(韓石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扁額)도 걸려 있다.
풍영정 아래 극락강 하중도(영산강 제7경). 하중도(河中島)란 하천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흐르는 방향이 바뀌어 퇴적물이 쌓이면 생기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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