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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빌리 와일더
출연: 마릴린 몬로, 톰 이웰
1955년 빌리 와일더와 마릴린 먼로가 만난 첫 번째 영화 [7년만의 외출]은 의심할 바 없이 마릴린 먼로에 의한
마릴린 먼로의 영화이다.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빌리 와일더보다 마릴린 먼로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셔먼의 공동주택 유리문에 그림자로 등장하는 첫 번째 장면으로부터 피서지를 떠나는 그를 창문에서
배웅할 때 까지 영화에는 온통 먼로의 향취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위력은 셔먼에게 Dazzle-Dent치약
CF를 시연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던가) 또한 이전 와일더의 작품들이 미국적 가치관과 할리우드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견지해온 데 반해 [7년만의 외출]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비록 코미디 장르 안에서 미국 중산층 남성의 욕망을 탁월하게 풀어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달리
보자면, 영화에서 1950년대 미국이 전 세계에 전파한 행복의 척도(미국식 삶의 방식이 곧 행복한 삶이라는)에
대한 고민 없는 동조로 읽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당대 미국의 중산층의 생활양식과
소비패턴의 탐구라는 또 다른 텍스트를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할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제부터,
무의식으로 용솟음치는 기혼남성의 일탈욕망을 통해 세계대전 이후 풍요와 안정화에 안착한 미국사회를 풍자하며
전경화를 시도한 와일더의 세계를 읽어본다.
리처드 셔먼(톰 이웰 분)이 아내 헬렌과 아들 리키를 휴가지로 보내는 기차역 신으로 시작된다. 여름이면 미국의
모든 남편들은 가족을 휴가지로 보내고는 자신들은 찌는 사무실에서 돈을 벌고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당연히 보다 행복한 가정을 위한 안락한 여건을 채워 넣기 위해서이다. 아들이 빼놓고 간 ‘노’를 들고 집에 돌아와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보내려는 셔먼에게 (2층에서 떨어진 토마토 화분처럼)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되면서
결혼 7년차 남자의 억압된 욕망은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게 된다.
주인공인 리처드 셔먼은 스스로 성실한 가장이라 여기는 인물이지만, 2층에 잠시 머물게 된 그녀(마릴린 먼로 분)를
보자마자 단숨에 빠져들더니 갖은 상상으로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시키며 일탈을 꿈꾸는 인물인데, 밤 10시에 전화
하겠다는 아내의 말이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더니 결국 자신의 남성적 매력에 여성들이 빠질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과대망상을 펼쳐내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자신의 비서인 모리스와 간호사 핀치, 아내의 친구
일레인까지 모두 자신에게 대시를 했다는 식의 비약적 논리로 남성성의 건재를 확인하려는 행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초라하게도 더 완벽하게 나르시즘에 빠진 그녀에게 압도당하고 굴복당하며 헤어 나오질 못하는 신세가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셔먼의 직장과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빌리 와일더의 영화가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는 특정한 상황 속에 사물들과 인간들을 배치해왔다. 그리고 그 속에
어떤 강력한 운동에너지를 가지는 사건을 개입시킨다. 비뚤어진 애정으로 인한 청부살인, 포로수용소에서의
동료포로착취, 승진을 위한 아파트 대여, 동생의 여자를 뺏기 위한 작전들은 알고 보면 질적으로 나쁜 사건들
(범죄를 저지르고 동료의 믿음을 이용하거나, 동료들을 착취할 만큼 하고 탈옥하거나 바람을 피려고 한다.
또는 사랑하는 핑계로 집안의 부를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이지만 결국 빌리 와일더는 그 곳에서 자신만의
고유함을 뽑아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와일더가 50년대 미국관객의 구미를 맞출 수 있었던
요인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즉, 당대 미국 중산층의 생활상을 보여줌으로써 물질적 풍경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목적과 자기만족에 의해 가려진 문제점(빈곤과 소수자)을 은폐하려는 미국의
중산층의 기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전후 시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회발전 중의 하나는 중간 계급적 생활양식과 견해가 인구의 많은 부분에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중간계급은 이전 어느 때 보다도 더 커지고 강력해졌으며, 더 자아의식이 강해졌다.
1950년대 중간계급 문화의 중심에는 증가일로에 있던 소비재에 대한 몰입이 존재했다. 그것은 번영의 증대,
증가하던 상품의 다양성과 이용 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던 광고의 결과였다. 그것은
또한 소비자 신용의 증가의 결과이기도 했는데, 소비자 신용은 외상게정을 회전시키던 신용카드의 발달과
할부금 계획을 통하여 1945년과 57년 사이에 800%나 증가했다. 이 같은 번영은 자동차 같은 오랜 소비자의
열망에 기름을 부었으며, 디트로이트는 끊임없이 번쩍이는 스타일과 장식으로 호경기에 대응했다. 소비자들도
식기건조기, 일회용 쓰레기주머니, 텔레비전, 고성능 스테레오레코드 플레이어 따위의 새로운 제품들의 발달에
기꺼이 응했다.
또한 1950년대를 기점으로 불어 닥친 도회지 개발 붐은 1960년에 이르러 전인구의 3분의 1을 교외 지역에
살도록 만들었다. 왜 그렇게 많은 미국인들이 교외로 이동하기를 원했을까? 가족들이 종종 결별하게 되거나
파괴되었던 전쟁(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5년이 지난 후, 전후 미국인들은 가족생활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교외지역은 가족들에게 그들이 도시에서 발견할 혹은 유지할 수 있던 것보다
더 큰 주택을 제공하여 더 많은 자녀를 키우는 것을 다 쉽게 만들었다. 교외지역은 사생활을 제공했으며,
그것은 미국의 중간계급이 열망하던 새로운 소비재들, 즉 가구들, 자동차, 배, 옥외가구, 기타 제품들을 위한
공간도 제공했다. 훗날 교외 지역은 순응성(conformity), 획일성, 고립감을 불러왔다고 공격 받았지만, 5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로 비슷한 연령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 산다는 생각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정과 사교모임을 더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여성들은 풍족한 삶을 공유하는 대도시 근교의
직장 없는 엄마들의 존재를 종종 높이 쳐주었다. (<스텝포드 와이프>의 배경인 코네티컷 외곽 주거단지
스텝포드의 아내들 모습을 기억해보라.)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셔먼의 자랑대로 그의 집은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고, 피아노와 간이 홈 바와
레코드플레이어와 뒷마당의 공간까지 갖추고 있는 현대식 공간이다. 셔먼과 그녀 사이에 사건의 단초가 되는
것이나 그녀를 유혹하는 동안 각종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 것 모두가 현대식 소비재들과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도착을 기다릴 때 레코드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과 그녀와
첫 키스를 위해 젓가락행진곡을 치는 피아노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들뜨고 신나게 만든 것은 열대야에
잠을 못 이루고 속옷을 냉장고에 넣었다 입어야 하는 자신의 방과는 달리 셔먼의 집에는 에어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각 방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그러니 친절하고 지적이며 사려 깊은, 게다가 유부남이어서
부담도 없는 셔먼에게 그녀가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이다. 이제 마음만 먹으로 그녀를 안을 수도
키스할 수도 또 그 이상의 관계를 맺을 수 도 있는 지점에 셔먼은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일탈 욕망이
쉽사리 결행될 리가 만무하다. 7년간 충실한 가장으로 자리를 지켜오지 않았던가!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그 유혹에 항복하는 길 뿐이지.
가장 추악한 죄는 현실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저질러지는 거라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어 그레이의 초상》
셔먼이 자신의 욕망을 끄집어내고 상상과 실현을 오가는 동안 영화는 두 개의 관점을 유지하는데, 이를테면
그의 불안과 다가올 파국에 대한 강박증을 아내인 헬렌에게 투사시킴으로써 아내의 불륜을 기정사실화고
이를 빌미로 남성의 충동에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브루베커 박사의 초고를 읽던 셔먼이 “7년차
남성이 위기감을 느낀 사례가 84.6%이며 여름에는 91.4%로 증가한다”는 대목에서 보여주는 행위는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합리화하고 죄책감을 완화시키려는 목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가 검토하는 원고가 ‘인간의
억압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고 사장이 가을에 재출간을 지시하는 책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렇듯 와일더는 주인공인 셔먼의 직업에 걸맞게 두 권의 책을 통해서 그의 욕망을
일깨우다가 부숴버리는 반복적 행동을 통해 실재와 관념의 간극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누구나 또 다른 마릴린 먼로를 만들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마릴린 먼로는
오직 하나이며 이 세상에 넘치는 것은 모조품(imitation)뿐”이라는 와일더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또한
의심할 바 없이 <7년만의 외출>은 마릴린 먼로를 빼고는, 그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영화이다.
설사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지라도 이 유명한 장면을 모르는 영화팬이 있을까? 지하철 환기구로 불어온 바람에
먼로의 치마가 올라간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사상 최고의 섹시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히지만,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가운데 야외에서 촬영한 그 날 이후로 남편인 조 디마지오와 먼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먼로는 그와 이혼했고 극작가인 아서 밀러와 재혼했다. 1950년대 뭇 남성들의 마음을 헤집었던 섹스 심벌이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이 이 거추장한 딱지를 떼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7년 만에 맞은 해방감에 들떠
부적합한 상대인 그녀와의 일탈을 꿈꾸는 셔먼과 마찬가지로,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지만 지적 갈증에서
비롯된 아서 밀러와의 7년간 결혼생활은 오히려 그녀의 불행을 자초했다는 점에서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 비평가인 다이애나 트릴링(Diana Trilling)은 “마릴린 먼로를 죽인 것은 결국 미국 대중문화와 할리우드”라고
했는데, 대중문화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자기편으로 만들어간 90년대의 문화아이콘인 마돈나와는 달리,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사회적 관습과 이분법적 경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렇게 쓰러져갔다. 그녀 자신이
속했던 대중문화와 그토록 희구했던 고급문화 사이에 놓인 세찬 강물에 휩쓸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7년만의 외출>에서 마릴린 먼로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없다. 즉 ‘The Girl’로 표기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극중 이름이 중요하지 않음을 뜻하거니와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만으로도 영화의 완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을 지닌 각본가 출신의 와일더가 취한 태도라고는 믿기지 않지만,
영화를 감상하다보면 정말로! 그녀의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조차 지각하지 못할 정도이다. 즉,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기만 해도, 풍만한 가슴 선을 드러내어 고개를 숙이거나 특유의 눈웃음으로 친근감을 표시하기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그녀는 셔먼의 선창에 메아리로 화답하면 그만이었다는 말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술과 담배를 끊고 제 아무리 가족 사랑과 자신의 성실함을 외쳐댄다 한들 꽃처럼 향기롭고 요부처럼 농염한
그녀의 몸짓을 이겨낼 방법이 있었겠는가. 그러니 셔먼이 거울 앞에서 추하게 변한 상상 속 자신을 바라보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떠올리는 것도,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16살이나 어린 숙녀 앞에 선 유부남의
초라함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금발미녀라면 마릴린 먼로라도 되느냐”는 온전한
찬사를 영화 속 대사로 동원했을까.
영화에서 셔먼이 갈등선상에 놓일 때 마다 보여 지는 아들의 ‘노’는 수호자의 홀(笏)처럼 그의 곁에서
멀어지는 법이 없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걸려온 전화에서 아내의 언급을 통해, 결정적 순간을 앞둔 셔먼의
눈에 띔으로써, 그녀가 토스트를 만드는 동안 방문한 맥킨지의 용건을 빌어서) 영화가 종반으로 갈수록 와일더의
영리함은 빛을 발하는데, ‘일탈에 몸을 던져 유혹 앞에 투항하느냐, 아니면 가정을 지키느냐’라는 명제를 던져놓고는
셔먼의 선택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셔먼으로 하여금 유혹과 타협할지언정 항복은 하지 않도록
만듦으로써 외도를 꿈꾸는 평범한 가장에서 미국적 가치관의 수호자적 위치로 격상시켜버리는 과정에서의 이중적
태도가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와일더는 노를 들고 휴가지로 떠나는 셔먼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간명하고
명백하게 드러낸다. 즉, 일탈의 짜릿함도 성취하고 가정도 지킨다는 이중적 해피엔딩을 위한 선택(필자 註)이
그것이며 이마저도 지극히 와일더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7년만의 외출>을 통해 당대 미국사회가 읽고 싶었던 텍스트는 중산층 가장의 일탈적 욕망을 통해
시각적 충족과 더불어 (와일더의 의도가 어떠했던 간에)가정의 소중함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객이
원하는 만큼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와일더의 능력이 입증되는 순간이지만, 어쩌면 와일더는 ‘아는 만큼만
보려한다’는 또 다른 역설을 언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註 : 이러한 와일더의 선택에 대하여 필자는 마이클 커티스의 <밀드레드 피어스 (1945)>에서 경찰서에
딸을 남겨놓고 남편과 재결합 하는 밀드레드의 모습을 통해 남성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가부장적 시선에
비판을 가했던 페미니즘비평가들에 대한 역설적 대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밀드레드가
딸을 철장에 가둬놓고 남편에게 돌아간 반면, 셔먼은 그녀를 2층 창안에 방치한 채 가족에게 돌아간다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