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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청바지 백서
고동현
Y가 실종된 것은 12월 말, 해가 바뀌기 사흘 전이었다. 작업실에 있어야 할 그가 오후 네 시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의 한 쪽 귀퉁이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투명 유리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그가 사라진 것을 의식한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관리하는 전산부장은 하루 종일 이어진 마라톤 회의에 진이 빠진 나머지 그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타 부서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Y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가 수리해야 할 컴퓨터는 밀려 있었다. 전산 부장은 Y를 파견한 외주 업체에 따졌다.
Y가 소속된 외주 업체는 부랴부랴 대체 직원을 보냈다. 작업실에는 컴퓨터 두 대가 분해 된 채 바닥에 널려 있었고, 프로그램을 설치하다 만 노트북이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전산부장은 몹시 화를 냈다. 임시로 갈음된 직원은 밤늦도록 일해야 했다.
외주 업체는 Y와 연락할 길이 없었다. Y의 인사기록부에는 가족 사항이 공란이었고 관계자의 연락처는 단 하나만 적혀 있었다. 그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전화 번호’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평소 그와 가깝게 지내는 직원들도 없었기에 그의 행방을 찾기란 묘연했다. 그 업체에서는 이틀을 넘기지 않고 Y와 연락하기를 포기했다. 언제나 임시직으로만 인원을 뽑아 왔기에 인사 처리는 간단했다. 새 직원을 뽑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Y의 부재가 가져다 준 혼란은 잠시였다. 그 뒤로 Y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Y 대신 작업실을 차지하게 된 새 직원은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몰랐다. 실내는 몹시 어질러져 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온갖 전선과 키보드, 마우스 따위를 상자에 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구를 모아 서랍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서랍 속에는 노란색 표지의 노트가 한 권 있었다. 작업일지나 매뉴얼일거라 생각하며 무심코 펴보았는데, 의외로 그것은 Y의 개인 노트였다. 그는 노트를 덮고 표지를 보았다. 작은 글씨로‘청바지 백서’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용을 훑어보았다. 수많은 도표와 차트, 그리고 상표별 청바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간간이 청바지 사진을 프린트해서 붙여 놓은 데도 있었다. 무슨 마케팅 보고서를 연상시키는 노트였다. 그것은 불과 서너 장을 남기고 끝맺어져 있었는데, 마지막 페이지에는 멋을 내듯 쓴 붉은 문구가 한 가운데 적혀 있었다.
「무한한 선택의 자유는 최고의 구속이다.」
Y의 불행은 넉 달 전에 선물로 받은 셔츠 한 벌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전산부 직원들이 마련한 Y의 생일 선물이었다. 그 회사 직원들은 생일을 맞으면 케이크와 상품권을 받았다. 그 회사 소속이 아닌 Y에게는 그런 혜택이 돌아오지 않았다. 선물은 그의 처지를 감안한 배려였다.
Y는 당황하며 선물을 받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선물 상자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상자 뚜껑에는 금빛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물을 받아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친척도 없이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아 왔던 그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을 처지가 못 되었다. 생일 선물이래야 어머니가 요리해준 도미찜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는 아예 생일이라는 날을 달력에서 지워버렸다. 그를 축하해 줄 친구도 없었다. 온갖 간섭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엮이기 싫었던 그는 혼자 지내는 게 편했다.
그는 상자를 열고 안에 담긴 셔츠를 펼쳤다. 회사에서 언뜻 보았을 때와 달리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원단은 푸른빛이 어린 쥐색 니트였다. 두 팔에는 흰색으로 줄무늬가 새겨져 있고, 가슴은 명치까지 지퍼가 내려오는 스포티한 디자인이었다.
청바지에 잘 어울릴 거예요. 이번 야유회 때 입고 오실 거죠?
선물을 건네던 여직원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마음이 불편했다. 선물이란 언제나 그것에 상응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법이었다. 여직원의 말은 야유회에 너저분한 모습으로 오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청바지라…….
그는 비키니 옷장의 지퍼를 열고 속을 들여다봤다. 한 가운데에는 검은 양복 두 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벌 다 낡은 정장이었다. 바지의 엉덩이 부분은 닳을 대로 닳아서 반질거렸다. 허름한 베이지색 남방이 두어 벌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그 안으로는 비슷한 색상의 면바지가 있었다. 그는 겨울옷을 넣어둔 비닐 봉투를 풀어 속을 뒤졌다. 두툼한 겨울옷가지를 모두 끄집어내자 그가 찾던 청바지가 보였다. 그것은 무릎 부근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표백제로 빤 것처럼 색이 바랬다. 그는 청바지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원치 않은 선물 때문에 청바지를 사야 한다는 사실이 성가셨다. 그는 생각을 접기로 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궁상떤다는 말을 들어 온 터라, 그런 이미지를 벗어버릴 기회라고 여겼다.
그주 일요일, 그는 청바지를 사러 갔다. 그가 들른 곳은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상설 할인 매장이었다. 그는 옷을 거의 사지 않는 편이었고 한 번 산 옷은 너덜거릴 때까지 입었다. 매장에 들어선 그는 한 번도 청바지를 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바지는 학창시절에나 입어보았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어머니가 옷을 사다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여덟이 될 동안 그에게 필요한 옷이라고는 많지 않았다. 양복과 와이셔츠가 각각 두 벌씩, 면바지와 남방 한두 벌 정도로 충분했다.
그는 청바지 코너로 가서 상품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사이즈가 작고 굴곡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전부 여성 청바지였다. 그는 점원에게 남성 청바지는 없는지 물었다. 점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밖으로 나오면서 조금 짜증이 났다. 필요한 옷은 언제나 그 매장에서 구할 수 있었다. 옷을 사러 다른 곳까지 가자니 귀찮았다. 그는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할인 마트에 가기로 했다.
마트에 도착한 그는 사 층에 있는 의류매장에 발을 들여 놓았다. 벽을 따라 이어진 가게는 대부분 여성복을 파는 곳이었다. 매장 가운데에는 낮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는 그곳에 다가가 둘러보았다. 모두 캐주얼 의류를 파는 곳이었다. 언뜻 훑어보기에는 가게마다 옷이 그게 그거인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한 가게에서 나온 여점원이 다가왔다.
- 어떤 옷을 찾으세요?
Y는 단발에 눈 화장이 짙은 여점원의 눈을 들여다봤다. 여점원은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그는 청바지를 찾는다고 대답했다.
- 둘러보시겠어요? 어떤 스타일을 원하시죠?
여점원이 묻자, Y는 순간 당황했다. 스타일이라니?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둔 적은 없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평범한 것을 찾는다고 했다. 여점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를 떠올리며 진열대에서 청바지 한 벌을 꺼냈다.
- 어때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부츠컷이에요. 다리가 길어 보이거든요.
Y는 여직원이 가져 온 청바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무릎 부분이 약간 좁고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나팔바지 같은 형태였다. 그는 집에 있는 청바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것은 선이 밋밋하고 특색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보다 평범한 것은 없냐고 물었다. 여직원은 다른 청바지를 꺼냈다. 이번 것은 선이 곧게 빠졌으나 군데군데 물을 뺀 것 같은, 어떻게 보면 얼룩이 진 것처럼 보이는 색상을 띠고 있었다. 여직원은 한 번 입어보라며 청바지를 넘겨주었다. Y는 탈의실에 들어가 자신의 허름한 면바지를 벗고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헐렁한 느낌이었다. 밖으로 나와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허리 사이즈는 맞았지만 통이 너무 넓었다.
- 기장은 줄이지 말고 그냥 힙합 스타일로 입으셔도 돼요.
힙합이라는 말을 듣자, Y는 얼굴을 찌푸렸다. 왠지 학생들, 그것도 자유분방한 학생들과 어울리는 말일 것 같았다. 그는 청바지 진열대로 가서 직접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가 예전에 입었던 청바지와 같은 디자인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같이 선물 받은 셔츠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가게에서 나왔다. 복도의 자판기에서 청량음료를 뽑아 들고 벤치에 앉았다. 캔을 따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모든 가게에 들러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자신이 좋아 하는 TV 프로그램을 포기해야 했다. 그것은 신작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고작 청바지 한 벌을 사느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음료수를 비우고 일어나 매장을 둘러보았다. 캐주얼 의류를 파는 가게는 모두 일곱 개였다. 그는 일찍 집에 돌아갈 생각으로 서둘렀다. 하지만 가게에 들를 때마다 첫 번째 가게에서 겪었던 경험을 되풀이해야 했다. 두 군데는 청바지를 팔지도 않았다. 그의 겨드랑이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지막 가게에 들어 설 때는 신에게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그럭저럭 무난한 청바지가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그 청바지를 입어 보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탈의실에서 나와 거울에 서기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마음에 드세요?
점원은 Y 옆에 서서 이를 드러내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Y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왜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원인을 알아내었다. 바지의 허리가 배꼽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바지를 걸치다 만 기분이었다.
- 이 허리부분이…….
Y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점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골반 바지에요. 요즘은 거의 이런 디자인으로 나와요.
Y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정장이건 캐주얼이건 배꼽 부분에 허리가 있는 바지만 입어 왔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마지막 가게에서도 청바지를 고르지 못했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뒤돌아서는 그에게 점원이 말했다.
- 배바지를 찾으시나보죠? 길 건너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청바지 전문 매장이 있거든요. 거기에 한 번 가보세요.
Y는 기분이 복잡했다. 전문 매장이라면 확실히 다양한 종류의 청바지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청바지 하나를 사기 위해 또 다른 매장에 들러야 하다니 무척 짜증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의식처럼 행해온 영화 관람은 포기해야 했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그는 낮잠을 자다가 영화관을 향했다. 영화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영화관에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스크린을 향해 바라보지만 아무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묵은 피로를 씻어 낼 수 있었다.
그는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창가에 쏟아지고 있는 햇볕이었다. 그것은 흐릿하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었다. 탁한 햇볕.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먼지투성이 같은 공간 속에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용해되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같이 참석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내밀었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 의미 있게 쓰라고 했다. 적지 않은 액수였다. 그는 그런 큰돈을 처음 만져보았다. 졸업식을 마친 뒤, 그는 번화가로 갔다. 몇몇 친구들이 신고 있는 운동화를 생각했다. Y가 가진 돈이면 그런 운동화를 사기에 충분했다. 신발 가게에는 생각보다 많은 운동화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차례로 신어 보다가 가게를 빠져 나왔다. 자신이 입고 있는 남루한 옷과 어울린 만한 운동화는 없었다. 그는 장난감 가게에서 멋진 모형들을 보면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막상 사려고 하면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옷가게에도 들러보았고 가방을 파는 곳도 거쳤다. 그럴 때마다 시계, 음반, 장식물, 축구공이나 어머니를 위한 선물 같은 대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번화가를 다 둘러보았지만 한 푼도 쓰지 못했다. 어머니가 차라리 무엇을 사라고 꼬집어 주지 않은 게 원망스러웠다. 그 날, 늦겨울의 햇살은 무척 탁해 보였다.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졸업식에 오지 않은 한 친구를 만났다. 수업을 빈번하게 빼먹던 친구였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Y는 별 생각 없이 친구를 따라 갔다. 친구가 이끈 곳은 전자오락실이었다. Y는 친구와 함께 신나게 버튼을 눌러대었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그곳에서 나왔고, 남은 돈은 친구가 빌려갔다. 그제야 그는 전기가 만들어 낸 영상의 흐름 속에 자신의 돈을 탕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밤중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절도범으로 잡혀 있는 친구를 경찰서에서 보아야 했다. 친구는 Y가 빌려준 돈으로 절단기 따위를 구입해 그 오락실을 털은 모양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Y는 물건을 고르는 일이 피곤했고 가능하면 돈을 쓰지 않았다.
- 어머, 미안해요.
Y의 엉덩이에 묵직한 느낌이 와 닿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중년 여자가 쇼핑 카트를 밀며 지나가고 있었다. 카트는 넘칠 듯이 가득 차 있었다. Y의 기준으로는 한 달 내내 먹어도 남을 만큼의 식료품이었다. 그는 그 여자가 저 많은 상품을 사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들였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는 창가에 바싹 붙어 길 건너편을 응시했다.
청바지를 지금 사지 않으면 언제 사야 한담? 평일에는 안 돼. 평일에 무리해서 돌아다니면 다음 날 힘들어질 거야. 무엇보다 여기까지 나오는 게 부담이잖아. 여기 나온 김에 끝장을 봐야 해. 그러지 않으면 오늘 써버린 세 시간이 아깝잖아? 영화는 어쩐담? 그래. 포기하자. 세탁소에 마름질을 맡기려면 오늘 사는 게 좋아. 야유회는 다음 주잖아.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건너편 매장을 향했다. 내리쬐는 초가을의 햇볕은 묵직했다. 매장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입구 위에 ‘진 마니아’라는 글자가 네온사인으로 밝혀져 있었다. 제법 큰 이 층 건물이었다. 유리벽 안으로 온갖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네킹이 보였다. 그는 이 피곤한 싸움이 곧 끝날 거라고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다가오는 남자 점원에게 청바지를 골라 줄 수 있겠냐고 말했다. 점원은 마치 녹음테이프를 틀어 놓은 듯이 물었다.
-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부츠컷? 일자? 스키니? 힙합? 아니면…….
Y는 점원의 말을 자르며 일자바지를 원한다고 말했다.
- 색상은요? 인디고? 연청? 블랙? 그레이? 와싱된 것으로 원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단색으로?
Y는 잠시 망설였다. 청바지는 말 그대로 청색 바지 아닌가. 청바지의 색상을 고른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예기치 못한 생각들이 가지를 쳤다. 그가 찾고 있는 청바지라고 해봐야 이십 년 전의 스타일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식 셔츠에 복고풍 청바지를 받쳐 입는 꼴은 아닐까? 스포티한 셔츠가 평범한 청바지와 잘 어울릴까?
그는 점원에게 쭉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이제 자신이 어떤 청바지를 원하고 있는지도 헷갈렸다. 점원은 이 층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 원하시는 브랜드는 있나요?
브랜드. Y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청바지의 브랜드를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젓자 점원은 천천히 둘러보라며 물러갔다.
이 층에 오르자 청바지가 벽을 두르며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Y는 숨이 막혔다. 이 많은 청바지를 모두 둘러봐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진저리가 났다. 그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진열대에 다가갔다.
두세 벌의 청바지를 살펴보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청바지 한 벌의 가격이 그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어떤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싸구려 정장보다 비쌌다. 청바지를 입을 일이 거의 없는 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새로 등장한 이 가격 문제까지 따지려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다행히 브랜드별로 가격 차이가 컸다. 그는 가격이 낮은 브랜드일수록 꼼꼼히 살폈다.
매장 한 쪽 벽에 걸린 시계는 두 시 사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초조했다. 잔인한 휴일의 오후가 그를 짓밟는 기분이었다. 그는 구석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매장에서 옷을 고르는 사람들은 저마다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젊은 여자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재잘거리며 옷을 골랐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거울에 비추어 보기를 반복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잘 어울린다며 한마디씩 던졌는데, 그녀는 매번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인다든지, 디자인이 튄다든지, 쉽게 싫증날 거라든지 하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썼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갔다. 그 여자는 그렇다 쳐도 같이 따라온 두 친구는 불필요하게 시간을 허비한 셈이었다. Y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뒤이어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몰려왔다. 그 중 한 명은 처음부터 생각해 둔 청바지가 있었는지 곧장 한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청바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통이 넓고 뒷주머니가 엉덩이보다 훨씬 밑에 달려 있는 청바지였다. 그 학생은 가격표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그 학생더러 과감하게 지르라며 부추겼다. 그 학생은 결국 청바지를 손에 쥐고 내려갔다. 들어올 때보다는 표정이 어두웠다. 맞은편에는 젊은 부부가 옷을 고르고 있었다. 여자가 이것저것을 꺼내들어 남자의 몸에 대어 보았는데, 남자 쪽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건 어때? 하고 여자가 물으면 남자는 그저 괜찮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둘은 가끔 낄낄거리곤 했다. 여자는 열 벌이 넘는 청바지를 남자더러 입어보라고 했다. 남자가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마다 여자는 남자의 의견을 물었다. 남자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남자가 제일 처음에 입어 보았던 청바지를 들고 아래층을 향했다. Y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남자 쪽의 취향이 아닌, 여자의 취향에 맞는 옷을 고른 것 같았다. 그럴 거면 남자에게 왜 의견을 물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 남자는 별 고민 없이 청바지를 고른 셈이었다. 뒤이어 Y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남자가 미소를 띠며 걸어왔다. 남자는 진열대를 한 번 훑어보는가 싶더니 두 벌의 청바지를 꺼내 번갈아 입어보고는 그 중 하나를 들고 돌아갔다. Y는 그 남자가 부러웠다.
그는 이제 무언가를 계산하고 따지는 일에 지쳤다. 점찍어 놓은 일곱 벌의 청바지 중 하나를 선택해 이곳에서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슴에 꼭꼭 누르며 일곱 벌을 차례로 입어 보았다.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나를 입어보면 그 전 것이 더 나은 것 같았고, 그 전 것을 다시 입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였다. 좀처럼 딱 이거다, 하고 마음을 끄는 청바지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선물 받은 셔츠와 어울리는 청바지란 어떤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탈의실에서 나올 때마다 땀이 뻘뻘 흘렀다. 시야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봐도 입고 있는 청바지만 눈에 들어올 뿐, 자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눈이 침침했다. 바지의 색상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짧은 현기증이 일기도 했다. 허기를 잊은 위장은 그대로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이마를 유리에 대고 숨을 가다듬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휴일의 오후는 부풀렸던 열정을 식혀가고 있었다.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마네킹이 입술을 실룩이는 것 같았다.
거리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점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온 그는 빈손이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은 땀투성이였다. 도대체 저렇게 많은 청바지 중에 사람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지 알 수 없었다. 거리를 걸으며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휴일의 소중한 한나절을 몽땅 날려버려 속상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애써 자위했다. 금전적으로는 크게 손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어쨌거나 셔츠에 어울리는 청바지를 찾아내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냉장고를 열고 반쯤 남아 있는 소주병을 꺼내들었다. 생수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매트리스에 몸을 던졌다. 온몸에 쌓여 있던 피로가 혈관을 타고 심장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잠이 드는가 싶었지만 옅은 잠이라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인터넷, 인터넷이 있었지.
어쩌면 인터넷 쇼핑몰에서 맘에 쏙 드는 청바지를 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해 본 적은 없었다. 회원으로 가입하고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등 개인 정보를 노출시키는 일은 꺼림칙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컴퓨터를 켜고 웹 브라우저를 띄운 뒤, 포털 사이트에 ‘청바지’라고 입력했다. 검색 결과를 본 그는 좌절하고 말았다. 수십 개의 청바지 판매 사이트가 앞 다퉈 광고를 하고 있었고, 청바지와 관련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질리게 한 것은 이십만 건이 넘는 비교 쇼핑 리스트였다. 남성 의류로 카테고리를 좁히자 육만 건 정도로 줄었으나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숫자였다. 카테고리를 좁혀가자 리스트는 점점 줄어들었다. 남성 의류도 ‘남성 일반 의류’와 ‘캐주얼 브랜드 의류’로 나뉘었다. 그런데 문득 캐주얼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셔츠와 어울리는 스타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캐주얼의 정확한 뜻을 알아야 했다. 그는 인터넷으로 캐주얼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사실과 마주쳤다. 그것은 ‘뉴요커’라는 잡지에서 다룬 기사였는데, 캐주얼에는 적어도 여섯 가지 이상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활동적 캐주얼, 남루한 캐주얼, 스포티한 캐주얼, 정장식의 캐주얼, 깔끔한 캐주얼, 비즈니스적 캐주얼 등이었다. 그렇다면 Y가 추구하는 캐주얼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야유회라면 분명 스포티한 캐주얼이 어울릴 터였다. 그런데 스포티하다는 것과 활동적이라는 것의 차이는 무얼까?
Y는 인터넷에 매달려 수없이 이어지는 의문을 풀며 노트에 정리했다. 곧 끝날 것 같았던 의문은 자정이 지나도록 더 많은 가지를 뻗어 내렸다. 언제나 자정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던 그는 애가 탔다. 새벽 두시를 넘겨서야 겨우 컴퓨터를 끌 수 있었다. 노트는 스무 장 정도가 메워져 있었다.
새벽 여섯 시가 되기까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무척 긴 밤이었다. 잠시 잠이 들면 긴 꿈을 꾸었고 깨어나 시간을 확인하면 겨우 십여 분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 토막난 잠을 이어갔다.
꿈속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어머니는 Y에게 규칙적이고 성실한 생활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강요했었다. 그는 엄격한 어머니에게 불만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이어진 가난은 그럴 수밖에 없는 틀로 그의 삶을 얽매었다. 그는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국비로 운영되는 전문대학에 입학해야 했다. 대학 시절에는 수업과 아르바이트로 이어지는 삶 외에는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다. 그는 삶이란 주어진 환경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을 골라야 하는 일은 어려웠다.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첫 직장은 적성을 떠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명확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입사했는데, 영세한 곳이라 디자인도 맡아야 했다. 그 디자인이라는 것이 무척 까다로웠다. 팀장은 활기찬 느낌이나 고급스러운 느낌을 요구하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안정감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색상을 써야 하는지, 어떤 크기의 이미지들을 사용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주어진 매뉴얼대로 일하는 생산직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기계 밥 먹을 생각밖에 못하냐며 울먹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무직 쪽의 일자리를 알아보아야 했다. 그것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었다. 컴퓨터를 수리하는 일은 사무실에서 일하기는 하나 사실상 생산직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 금전이 쌓여갔지만 그는 필요한 액수를 제하고는 고스란히 적금통장으로 옮겼다. 여행, 취미생활, 쇼핑, 연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저 톱니바퀴처럼 잘 짜여 굴러가기를 바랐다.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 그는 완전히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스스로 가정을 꾸리지 않는 한 가족도 친척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잠시 묘한 해방감에 빠졌다. 그러나 곧 현실적인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신경 써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널려 있었다. 식사 때마다 무슨 반찬을 해야 하며 요리 재료는 어디에서 어떤 요령으로 구해야 하는지, 세제는 어떤 것을 써야 하는지, 속옷 따위는 어디서 사는지 등의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어머니의 습관을 떠올려 그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런데 청바지 하나 구입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그는 차라리 그에게 옷을 골라줄 애인이나 아내, 또는 억지로라도 그의 등을 떠밀어 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람시계가 요란히 울려대며 그를 어수선한 잠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는 개운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세면대 앞에 섰다. 솔이 양옆으로 누워 납작해진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양치질을 했다. 세숫비누로 거품을 내어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은 뒤 토스터기에 식빵 두 개를 넣었다. 평일 아침마다 기계적으로 밟았던 순서였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낱말이 그 리듬을 깨뜨렸다.
회귀분석.
그래. 내가 선택하기 어렵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분석하면 되는 거야.
그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몇 안 되는 책들 가운데서 ‘회귀분석론’이라는 책을 뽑아들고 집을 나섰다. 대학교재로 쓰였던 책인데,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데이터나 영향 등을 통계적으로 예측하는 이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전철을 타고 회사에 가는 동안 자신의 성향에 대한 데이터를 떠올렸다. 그 모든 데이터로 분석하면 자신이 선택하게 될 청바지가 가려질 것 같았다.
그는 회사에서 짬짬이 분석에 몰두했고, 점심까지 거르며 시간을 썼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청바지의 종류와 브랜드별 특성에 대한 정보, 그리고 구매자의 평도 인터넷으로 수집했다. 분석 작업은 수요일 오전까지 이어졌다.
수요일 오후, 직원들이 점심을 마치고 되돌아 올 때였다. Y의 작업실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그것은 비명이라고 하기엔 소리가 짧았다. 차라리 순간적인 신음 또는 감탄에 겨워 내뱉는 소리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났던가? 하고 지나쳐 갈 뿐이었다. Y는 작업실에서 손가락으로 볼펜을 굴리며 입을 헤벌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앞 컴퓨터 모니터에는 한 청바지 업체의 사이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를 나흘 동안 옥죄던 갈등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잃었다. 그 업체는 청바지를 온라인으로는 판매하지 않았다. 그는 조바심을 달래며 업체에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동대문과 강남에 납품하고 있다며 두 군데의 가게를 알려주었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은 동대문이었다. 그는 전산부장에게 사정해 잠시 외출할 것을 허락받았다.
동대문에 도착한 그는 상인들에게 여러 번 물어 가게를 찾았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를 어린 여점원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다짜고짜 청바지의 모델명을 말했다. 여점원은 청바지가 진열된 곳을 뒤적거리더니 사이즈를 물었다.
- 28입니다. 아니, 28이나 30이면 됩니다.
Y가 대답하자 여점원은 32 사이즈 이상만 남아 있다고 했다. Y는 여점원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며 서 있었다.
- 이, 이것 봐요. 저는 그 청바지를 사야 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저는 그 청바지가 꼭 필요합니다.
여점원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어디인가로 전화를 걸어 사무적인 어투로 통화한 뒤 Y를 바라봤다.
- 강남 매장에도 사이즈가 없네요. 수입하는 거라 물량이 수시로 있지는 않거든요.
Y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낡은 구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 제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저는 그 청바지가 없으면 안 됩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에요. 청바지를 내 놓으란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여점원은 어이없다는 듯 Y를 바라보았다. Y는 굽히지 않고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점원의 눈은 이제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Y의 시선을 피해 맞은편 가게의 청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Y는 떨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깨달았다. 그는 뒤돌아 고개 숙인 채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금요일까지 그는 평소처럼 일했다. 가끔 노트를 펼쳐 자신의 분석이 틀린 곳은 없는지 되짚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청바지를 포기하고 있었다. 비슷한 가격과 디자인의 청바지도 있었지만 성에 차지는 않았다.
토요일, 회사는 예정대로 야유회를 가졌다. 그는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사십 분 늦게 나타났다. 하의는 낡고 색 바랜 그의 유일한 청바지였다. 선물 받은 셔츠를 입기는 했지만 검은 점퍼를 걸쳐 보이지 않았다.
전산부장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다른 직원들도 흥에 겨워 담소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초가을의 햇살은 따뜻했고, 하늘은 깊었다. 직원들은 Y에게 한마디씩 던지기는 했지만 건성이었다. 셔츠를 건네준 여직원도 Y에게 다가와 밝게 인사했을 뿐, 주로 젊은 남자 직원들과 어울렸다. 한 번도 웃음을 띠지 않은 사람은 Y뿐이었다. 여직원은 기억을 못하는지 그에게 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다. Y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술을 많이 마셨다. 지금까지 누구와 인연을 맺는 것은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가족이 있고,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고, 소속된 조직이 있는 그들은 무척 편하게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옷 하나하나를 둘러보았다. 하나씩 따져보면 모두가 개성 있거나 평범해 보이는 옷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평범하거나 점잖은 옷이 밝고 활동적인 옷을 잘 견제하고 있었다. Y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사람은 Y 자신이어야 하지 않은가. 가족과 조직과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간섭하고 간섭받는 저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때였다. 그의 눈앞에서 사람들의 옷이 잿빛으로 변해 갔다. 그 위로는 수많은 곡선이 그려졌다. 그의 노트에 통계를 내기 위해 그렸던 그래프와 흡사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뻗어 가며 다양한 수식과 기호들을 뿜어냈다. 그가 노트에 정리했던 모든 작업들이 옷가지 하나하나마다 되풀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옷은 바래졌다. 그와 동시에 그들을 등지고 있는 나무들과 잔디밭과 하늘은 점점 뚜렷하고 맑은 색을 띠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차츰 작아지더니 귓속에서 한 점으로 뭉쳐버렸다. 곡선들이 다가와 그의 머리를 칭칭 감는 것 같았다.
야유회 이후로 Y는 가능한 모든 걸 잊고 업무에 열중하려 했다. 물론 일주일 동안 쏟아 부었던 헛된 노력이 떠올라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뜸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청바지 사건은 잊히는가 싶었다.
마침 추석 연휴가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는 여유를 되찾을 기회로 여겼다. 명절이라고 해도 혼자 지내야 하는 그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다만 그토록 혹사시킨 자신을 위로라도 해주었으면 했다. 여행을 떠나볼까 생각하다가 그만 접고 말았다. 어디로 떠나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자니 머리가 아팠다. 고민 끝에 그는 음식이라도 배불리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연휴 첫날, 그는 거의 정오까지 잠을 자다가 일어났다. 마음은 가벼운 흥분 속에 싸여 있었다. 양치질도 하지 않은 채 얼굴만 대충 씻고 모자를 눌러썼다. 자전거를 끌고 거리에 나선 그는 한산한 거리를 기분 좋게 달렸다. 날씨는 조금 흐렸으나 바람은 부드러웠다. 이십여 분을 달려 대형 할인 마트에 도착한 그는 일 층 식품 매장을 향했다. 거리와 달리매장 안은 북적거렸다. 그가 물건을 사러 마트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백 원짜리 동전을 넣고 카트를 뽑아 느긋하게 매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 놓은 리스트는 잡채, 아귀찜, 돼지갈비, 그리고 정종이었다. 잡채에 들어갈 재료는 손쉽게 구했다. 시금치와 양파, 느타리버섯과 당근이면 충분했다. 그는 아귀찜에 쓸 미나리와 콩나물, 그리고 대파 한 단을 카트에 넣고 수산물 코너로 갔다.
미더덕 한 팩과 큼지막한 아귀 한 마리를 사고 육류 코너를 향할 때였다. 서너 명의 판촉점원이 서로 자기 상품을 홍보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어떤 점원은 할인을 강조했고, 어떤 점원은 맛과 신뢰성, 신선도 등을 강조했다. 순간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같은 국내산 고기가 서로 다른 브랜드로 팔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동네 정육점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돼지고기는 그냥 돼지고기였다.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눌러두고 싶었던 노트가 펼쳐지고 있었다. 야유회에서 경험했던 이상한 그림들이 또다시 그려질 것 같았다. 그는 그 덫에서 벗어나고자 뒤돌아섰다. 그런데 빠져 나오는 길에 이어진 쌀 코너를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수많은 브랜드의 쌀과 마주했다. 가격과 기능과 지역과 작농 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포대에 나뉜 쌀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쌀 한 톨 한 톨마다 싹을 틔워 곡선을 뿜어낼 것 같았다.
그는 카트를 내팽개치고 마트에서 나왔다. 앞으로 쇼핑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연휴 내내 즐겁지 않았다. 식사는 대부분 라면으로 때웠고, 남아도는 시간은 지루했다
그의 비극에 정점을 찍은 것은 집 문제였다. 갑작스럽게 쌀쌀해진 늦가을, 그는 자신의 집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집은 그냥 집이었다. 이사를 해 본 적도, 계획해 본 적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살아 온 지금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집 문제는 그에게 가혹한 판단을 요구했다. 크기와 가격, 위치와 교통편, 주변 환경과 소음 등 따져야 할 점이 너무 많았다. 이 문제에 비하면 청바지를 구입하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맘에 들지 않는 청바지는 입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집은 옷 갈아입듯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그는 또다시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청바지 백서’의 몇 갑절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그는 휴일마다 집을 알아보느라 발이 퉁퉁 붇도록 걸어야 했다. 휴식을 취해야 할 휴일은 직장에서 일하는 평일보다 피곤했다. 차츰 그는 식사 시간에 메뉴를 고르거나 간단한 생필품을 사는 데에도 떠오르는 곡선들을 보았고, 그것과 싸우느라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그는 가끔 먼 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선택할 필요가 없는 동물들의 삶이 부러웠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만 할 뿐인 그것들이 자신보다 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숲을, 그 속에서 동물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떠올렸다.
그가 실종되었을 때, 그의 집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현관 앞에는 여러 권의 노트를 불태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소감] "좌절의 수렁 속에서 글로써 희망 찾아"
7년 전, 젊음을 바쳤던 직장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 왔을 때였습니다. 창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창가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바람에 출렁거리는 블라인드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며 그 리듬에 맞춰 제 삶을 회고했습니다. 그러다 잠이 들었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무척 생생했습니다. 배경은 미국이었고 두 남자가 조직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속이고 배신을 거듭하다가 마지막 반전을 일으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꿈은 아직도 진행형일지 모릅니다. 그때 잠든 뒤로 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처럼 글쓰기를 시작한 시점부터 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습니다.
처음에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 모든 것이 막막하고 무모해보였습니다. 문학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며 읽은 책도 미천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일은 흉내 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꾸었던 꿈을 복기하며 의문을 떠올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긴 내용이, 그것도 제가 접해보지 않았던 경험이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며 꿈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제가 글을 전혀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십여 년간 꿈을 기록해왔습니다. 꿈의 내용은 일반적인 논리로 재구성하기 힘든, 언어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제가 해왔던 작업은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꿰맞춰 글로 재탄생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놀라운 용기가 솟았습니다. ‘나는 쓸 수 있다. 내 내면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풍부한 글감도 가지고 있다.’
지난 7년 간, 숱한 좌절의 수렁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오늘로서 내면의 열정은 끝이겠구나 하고 포기하려는 마음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음 날이 되면 작은 희망이 샘솟았고 그것을 붙잡고 써야하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
제 글에서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그간 여러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는데, 가장 긴 시간 동안 인내하면서 이정표를 제시해 주신 김기우 교수님께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쫓기보다는 먼 길을 내다보게 하신 그의 지도는 탁월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발한 문집 활동을 하고 있는 ‘소설탄생’의 모든 선생님들과 함께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 "현대사회 개인 소외 치밀하게 다뤄"
신춘문예는 문학인의 추억을 불러오고, 문학 지망생들이 꿈을 꾸게 한다. 등단 작가 치고 신춘문예 때문에 가슴 설레지 않았던 이가 누가 있겠는가.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꿈을 꾸게 마련이다. 우리 심사위원은 응모작을 추억보다는 꿈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김경락, 서귀옥, 고동현, 김만성, 황지호, 성보경 등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일상사를 평상적으로 다룬 작품들은 문학을 지망하는 이들의 꿈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제쳐놓았다. 그 결과 김경락의 〈폭설 내린 날〉, 서귀옥의 〈낙화(烙畵)〉, 고동현의 〈청바지 백서〉 세 편을 놓고 검토했다.
김경락의 〈폭설 내린 날〉은 개척교회 목사가 겪는 현실의 문제와 목회자로서 성찰과 내면의 갈등을 무난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착한소설’로 평가할 수 있는 안정성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치열한 내면의 고뇌는 스쳐갔다는 허전함이 남는 작품이다. 일상에 매몰된 작품은 의식의 지평을 열기 어렵다.
폭력과 마모되는 육체와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인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그리고 있는 〈낙화〉는 응축된 플롯 속에 사태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심리묘사가 치밀하고 플롯 구성이 탄탄하다. 그러나 ‘소설적 자유’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자기해체나 자기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았다. 소설적 근성이라는 것을 살려 보기 바란다.
〈청바지 백서〉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소외되는 메커니즘과, 결국은 실종에 이르고 마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억압을 치밀하게 그린 작품이다. 외주업체에서 어느 회사 전산실로 파견된 주인공이 생일선물로 받은 ‘셔츠 한 벌’이 계기가 되어, 그 셔츠에 맞는 청바지를 구입하러 돌아다니다 끝내 실패한다. 선물로 받은 티셔츠에 맞는 청바지를 끝내 찾지 못하고, 상표로 헝클어져 존재하는 현실의 톱니바퀴에 물려 실종하고 만다. 그것이 단편양식이란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소설은 개인 이야기를 넘어 사회적 관심으로 확장되는 이야기값을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미학의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아도 좋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소설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장치에 대해서는 새로운 감각을 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소설로 다루어 나가는 진지한 추구를 기대한다.
응모한 분들이 문학적 열정을 부단히 지펴올리고 소설작업에 정진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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