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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4일 21세기문화연구회에서 강의한 유인물입니다. (PPT파일은 용량이 많아 일부만 추가로 올렸습니다. 그러나 클릭하면 화면상태가 불량합니다. 글자나 화면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움직임은 작동되지 않으므로 저의 블로그에서 생생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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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개벽의 횃불] 요약문
-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 : 병풍바위의 영웅들-
병풍바위 - 최초의 동학혁명 집결지 답사
지금부터 약 140년전 1871년4월29일(음력 3월10일)은 동학의 창시자 수운교조의 제삿날이었고, 이날 전국의 동학인들 600여명이 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2리 병풍바위 아래 집결하여 한반도에서 최초로 동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외세가 침략하기 전에 우리민족 스스로 한반도 최초로 시민혁명에 성공한 후에 91명이 붙잡히거나 교전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최초의 동학혁명 집결지인 병풍바위가 지금은 숲속에 내동댕이 쳐진 역사의 현장이 되어 박주잔이라도 올려 그날의 원혼을 달래려고 135년 만인 2006년 4월29일에 서울에서 천도교 동학학회 한광석 후원회장님, 동학학회 운영위원 임순화 선생님, 숭의여대 배영기 교수님을 모시고, '최초의 동학혁명' 저서의 필자가 안내하여 현장을 찾았습니다.
당시 역사문서에는 경상도 "영해부 서면 우정동 병암(寧海府 西面 雨井洞 屛巖)"이라는 순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행정구역은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2리 병풍바위"로서 현장은 변함이 없고 그 아래 집결지(병풍바위 아래 영웅들이 야영한 골짜기)는 숲으로 변해 있습니다.
병풍바위를 향하여 한강 이남의 각도별로 동학이 포교된 지역에서 동학인들이 머리에 유건을 쓰고 청포를 입고 모여들었고(동학인은 청색을 상징해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유래가 됐고 거사당시 암호로 청색은 동학인, 홍색은 평민을 상징했음), 야영장에는 가마솟 여섯 개를 걸어놓고 취사를 했으며 바로 몇 십미터 아래에는 당시 수운교조가 임명한 초대 영해접주 박하선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동학의 초대접주 박하선은 영해관아의 탄압으로 죽고, 삼년상 중인 상제 박영관(맏 아들)이 모임의 주인이었습니다.
당시 동학의 제2대 해월 최시형(개명하기 전에는 최경오)교주를 비롯하여 모여든 동학인들은 도록에 서명하고, 중군, 별무사, 집사 등 동학농군의 임무부여 첩지도 나누어 주어 이때부터 최초로 동학농군이 조직되었던 것이 당시 안핵사 박제관이 정부에 보고한 문초기록에서 명백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후 늦게까지 형제봉에 올라 소 두마리를 잡아 피를 손 끝에 뭍혀서 하늘에 고하는 엄숙한 천제[한얼삼신에 고축하고 손끝에 피를 뭍히는 “釁端(흔단)”의식]를 거행하고, 대표자 8명이 고축하고, 동학인이 바라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찾는 자존의 시대를 열어 누구나 능력에 따라 평등을 이룩하려는 無極大道의 後天開闢 이상 세계가 열리기를 축원하였습니다.
제천행사를 끝낸 동학인들은 죽창과 몽둥이, 횃불을 들고, 2,3시간을 단숨에 걸어 영해관아로 향했고, 당시 강원도 땅인 울진쪽 150여명은 바로 영해읍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탐관오리로 알려지고 동학탄압을 일삼던 영해부사(지금의 시장)의 죄를 물은 후 김낙균이 처단하고, 혁명대열에 포를 쏘아 살상케한 수석포교(지금 경찰서장)도 처단했으며, 관아를 장악하였습니다. 다음 날 영해읍내 5개동 빈곤한 두민들에게 공전을 나누어 주어 혁명에 성공한 후 영해부 속현인 일월산를 향하여 자진 철수했습니다.
이 때 외세에 영향받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근대적 시민혁명을 성공한 것은 불란서혁명과 비견한 자유 민주주의 이념과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동학정신의 이상을 실현한 후에 자진 철수한 것입니다.
이날 최초의 동학혁명에 참가한 영웅들은 지금의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일월산으로 철수하고 일부는 남쪽 영덕현으로 철수하던 중 교전으로 붙잡히기도 했고, 일부는 일월산에 합류하였으나 포위된 관군에 붙잡히어 효수형, 물고(옥사), 교전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은 대부분 동학인들로서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해월교주와 이필제 강사원 김낙균 등 혁명의 지도부는 일월산에서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지금의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울연전으로 탈출하여 호랑이굴에 은신하거나 비트를 파서 숨는 등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 때 영웅 이필제는 동학의 지도부 요인들을 구출하여 자신의 친구인 단양 정기현가로 찾아가 정석현의 집에 은신하여 동학을 재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영웅 이필제는 수운교조 재세시에 동학접주로서 수운교조를 가둔 수레가 과천에서 대구로 되돌아 가던 중 문경새제에서 도인 수백명을 인솔해서 수운을 구출하려 했으나 수운이 육신은 짧고 성령은 영원무궁하니 이번 행차는 천명이니 안심하고 돌아가라는 암상설법을 하여 이필제가 감복한 바가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문무를 겸비한 영웅인 것은 해월과의 대화내용에도 잘 나타나는데 단군과 민족의 역사인식이 투철했습니다.
이필제장군은 그 해 8월 문경의 유생들 모임에 뛰어나가 허술하게 붙잡힌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역적의 죄를 짊어지고 간 희생적이고 참다운 동학인으로서 1871년 12월24일 지금의 서울시청뒤 프레스쎈타가 있는 군기시 터에서 능지처사를 당했습니다. (왕조실록, 고종의 승정월일기 참조)
최초의 동학혁명을 지휘했던 제2대 해월(최시형)교주는 23년이 지난 1894년(갑오년) 4월2일에도 갑오동학혁명에 기포령을 발하였습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고부의 영웅 전봉준 접주의 탄생이 있었고, 그 후 기미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의 영웅 제3대교주 손병희선생과 황해도접주 김구주석의 상해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생존을 지켜 오늘의 조국을 보존할 수 있게 한 큰 별을 탄생시켰습니다.
1871년 최초의 동학혁명에 희생된 동학인들은 100년 안에 이들이 갈망한 세상이 되었기에 선각자들이고 영웅들이지요. 역사문서에 기록된 우정동 병풍바위는 우리 민족이 근대 불평등시대를 더 빨리 마감하고, 현대 평등사회를 성취하였던 혁명의 성지입니다.
순한문으로 기록된 역사문서를 처음으로 한글로 풀이한 영웅들이 남긴 이야기는 문초에 진술한 관변기록으로서 "최초의 동학혁명- 병풍바위의 영웅들"이라는 책과 최근에 발간된 "후천개벽의 횃불"이라는 저서입니다.
1871년 동학혁명은 한반도 최초의 시민혁명
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은 해월 교주가 직접 진두지휘
동학인 91명이 몸바쳐 희생된 1871년 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은 당시 제2대 해월 최시형교주가 직접 진두에서 지휘하여 영해관아에 입성하였음이 안핵사로 임명되었던 안동부사 박제관이 정부에 보고한 죄인문초기록과 처벌을 승인받은 역사문서인 교남공적에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데 확인해 보세요.(순한문 문서 영인본 140쪽짜리)
왜곡된 최초의 동학혁명 - 역사 바로 세우기해야
한반도 최초의 동학혁명은 우리 민족이 스스로 수립한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60년이 지나도록 엉터리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혀지지 않았다는 산 증거의 하나입니다.
1871년 4월29일(음력 3월10일) 전국의 600여명의 동학인들이 몇 백리 밖에서도 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2리 병풍바위 아래로 모여들어 소를 잡아 천제를 지내고 하늘에 고하는 고축문을 낭독하고 동학탄압과 탐학을 일삼은 부사와 수석포교를 처단하고 관청을 접수하여 주민들을 모아 공전을 나누어 주고, 자치적인 통치를 해서 한반도에 최초로 시민혁명에 성공하고 자진철수했던 것으로 불란서혁명에 비추어 손색이 없습니다.
나중에 잡히어 죽임을 당했거나 교전으로 사망한 91명에 대한 진술은 역사문서인 승정원일기나 당시 정부가 작성 보관되어 있는 문서인 "교남공적"에 실명으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고, 그 당시 작전일지인 “영해부적변문축”이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중입니다.
이를 모르시는 분은 "최초의 동학혁명" 및 “후천개벽의 횃불”이라는 저서에 이를 해독해서 사건진상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알고자 하시는 분들은 이를 읽어보시면 왜곡된 엉터리 역사교과서에서 주모자로 능지처사된 사람의 이름을 붙여 "이필제의 난"이라고 폄하한 것이 더러 있는데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민족의 역사를 바로 볼줄 아는 역사학자의 도리이겠지요.
[해륙의 꿈을 가진 동학인은 민족의 영웅]
“이필제 장군”은 당시 고래 잡는 일본 포경선이 동해안에 자주 출몰하여 이를 대비하고 아편전쟁으로 망해가는 중국대륙을 창업하겠다는 해륙의 웅대한 뜻을 가진 영웅이었고 “유학자 남두병”의 문서에는 임진왜란과 같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의병을 모이라는 소모문으로 동학인을 집결시켰습니다.
“최시형 교주”도 개명과 동시 호를 海月이라고 하여 동학인들을 광활한 대륙과 넓은 해양으로 웅비할 민족임을 후대인들에게 전하고 있어 오늘날 후대인들에게 세계화의 꿈을 이룩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문서 기록 - 왕조실록인 고종의 승정원일기(1871년 6월23일 32명 효수형, 12월23일 능지처사 1명)
안핵사 박재관의 사건 보고문서인 교남공적, 1879년도에 동학측이 기록으로 남긴 도원기서, 1915년에 간행된 시천교종역사 (구 정신문화연구원 영인본 간행) 당시 작전일지인 영해부적변문축(연세대학도서관 소장) 등
후천개벽의 횃불 목차
제1편 선천개벽(先天開闢)은 언제인가?
가. 인류의 조상 나반(那般)과 아만(阿曼)
나. 선천개벽 이래 우리의 조상
1. 환국(桓國)의 건국(建國), 2. 조대기(朝代記) 기록
다. 배달국 신시환웅(神市桓雄) 시대
1. 태백일사(太白逸史)와 고기(古記), 2. 신시본기의 진실한 역사
3. 삼성기(하편)의 신시역대기
라.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대한 기록
1. 단군세기, 2.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記)
[符都誌 : 麻姑城(지상 최고성), 천인 麻姑 - 穹姬 - 黃穹( --2,000년) - 有因(1,000년) - 桓仁,
三聖紀 : 桓仁(63,182년) - 桓雄(1,565년) - 檀君 이후(4,344년) = 총72,091년
正史 : 三國遺事 “昔有桓國...庶子桓雄...乃授天符印 三箇 雄率徒三千 降於 太白山頂 神檀樹下 謂之神市 是謂 桓雄天王也” 즉 개천절은 올해 2,011년 기준으로 5,909주년이다. 만약 박제상(363~419)의 부도지 원본이 발견되면 우리 역사가 7만년으로 공인받을 수 있다. 부도지 근거 : 김시습의 금오신화]
마. 조선왕조 때 역사서 회수
바. 선천개벽의 주요경전
1. 인류최고의 경전 천부경(天符經), 2. 삼일신고(三一神誥) 내용
사. 비결서(秘訣書)와 참서(讖書)
1. 도선비결(道詵秘訣), 2. 격암유록(格庵遺錄) 발췌(拔萃)
제2편 후천개벽(後天開闢)이란?
[특기사항 : 후천개벽(後天開闢) 5만년(五萬年)은 자존(自尊)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누구나 스스로 깨우쳐 살아가고 인간사회 이익에 보탬이 되도록 존중하는 것으로서 사람은 하늘의 본성을 갖도록 노력하고, 하늘상제와 같이 섬기고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이 동학사상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새로운 후천개벽의 세상은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존귀함을 자각하여 인간사회의 보탬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귀하다는 것은 만인이 모두 존귀할 수 있도록 인간사회에 해악을 끼쳐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고, 사람은 모체에 잉태할 때부터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는 자각의 시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되기 전 계해(1863)년 10월 28일 마지막 생일잔치에 모인 동학인(東學人)에게 수저를 놓은 뒤에도 말하였다.
“이번에 세상을 구하고자 창립하는 무극대도인 나의 가르침은 후천 오만년 미래에 도래할 운으로서 자존(自尊)이라는 것인데 이는 선천개벽에 한마디도 없었다.(실비자존지사 實非自尊之辭)
모든 사람이 스스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금차제세주 창립무극대도 今此濟世主 創立無極大道, 계아후천오만년지운 啓我後天五萬年之運 ... 즉미래지운회이언지이 則未來之運會而言之耳 - 시천교종역사 참조)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기고 5개월도 안되어 목이 잘려 처형되었다. 동학이 포교되기 이전에 백성들의 자각을 막기 위하여 조선왕조와 그 위정자들이 금기시 하였던 서책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데, 천문, 역서, 참서, 등의 서적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제정일치시대 우리 조상들의 역사기록이라는 점이 분명하다고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통치이념인 유학사상과 배치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배척당해 왔으나 그 도리는 동학사상으로 유유히 이어져 왔다. 또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경전과 역서 예언서는 천부경과 삼일신고, 참전계경, 삼성기, 조대기, 태백일사, 도선비기, 격암유록 등이 있는데 이들도 동학사상에 직결되고 있다.]
가. 동학(東學)의 포교
1. 수운(水雲)의 출생과 을묘신서, 2. 신유(1861)년 포덕문을 짓다.
3.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東經大典)
나. 해월(海月)에게 동학의 도통전수
1. 수운과 해월의 만남, 2. 접주제(接主制)의 실시, 3. 도통전수 과정
다. 수운 대신사의 순도(殉道)
1. 박해에 대한 대처, 2.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3. 암상설법(岩上說法)
4. 순도(殉道)의 길, 5. 승정원일기의 기록, 6. 후세에 전하는 유시(遺詩)
[유시 : “燈明水上無嫌隙 (등명수상무혐극), 柱似枯形力有餘 (주사고형력유여), 吾順受天命(오순수천명), 汝高飛遠走(여고비원주)”
뜻은 “등불이 물위에 밝으니 싫어서 생기는 틈이 없고, 기둥은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우리들은 거스르지 않고 천명을 받으니 너희는 높이 날아 멀리 달리라.”
내용은 이미 백년 안에 일어날 우리 민족의 후손들이 나아갈 방향이 무극대도(無極大道) 후천개벽(後天開闢) 오만년(五萬年)의 새로운 세상이 전개될 것을 예견하여 인류 보편적인 진리인 모든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하느님을 모시고 있어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라는 높은 뜻을 가지고 너희는 멀리 달려서 새로운 후천개벽을 맞이하도록 세상에 전하라는 유시(遺詩)]
제3편 후천개벽의 여명(黎明)
가. 해월선생의 동학 재건
나. 국내정세의 세계화 실패
1. 병인양요와 대불전쟁, 2. 대원군의 쇄국정책, 3. 천주교 박해와 동학탄압
다. 이필제(李弼濟) 접주(接主)
1. 이필제의 등장, 2. 진주 민권운동에 관한 왕조실록
3. 영해부와 이필제의 이주, 4. 문무를 겸비한 이필제의 꿈
라. 영해지방의 동학인들
1. 초대 영해접주 박하선(朴夏善), 2. 영덕 직천 강시원(姜時元)의 활약
3. 영해향교 유생들의 이상(理想), 4. 평해 장교 전인철(全仁哲)
5. 울진 남두병(南斗柄)과 소모문
[동학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문 : 임진왜란 때 만약 동고,중봉,서애 세분의 충신들과 같이 우리 의병들은 기뻐함을 감추고 악인과 같이 추한 짓은 않기로 한다는 동학 의병을 모집하는 글(적변문축에 기록되어 있음)]
마. 병풍바위(屛巖)에 집결한 동학인들
1. 해월교주의 결단, 2. 전야제(前夜祭)의 골짜기, 3. 전국에서 모인 동학인
제4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횃불
가. 용두산(龍頭山)의 천제(天祭)
1. 제단(祭壇)의 설치, 2. 천제(天祭)의 집전(執典)
나. 횃불 [火炬] 행렬 20리
다. 자존(自尊)을 밝힌 횃불
1. 영해부 성문에서 일어난 일, 2. 인부를 뺏은 이유,
3. 한반도 자존의 횃불
라. 민권통치
마. 퇴각과 접경지역 교전
제5편 일월산(日月山)과 울연전(蔚蓮田)
가. 일월산 천제단
1. 일월산으로 집결, 2. 일자봉의 제단
나. 개곡동(開谷洞)의 포성
다. 붙잡힌 사람들
라. 여인(女人)들의 한(恨)
마. 울연전의 각오
제6편 영웅들이 남긴 신화(神話)
가. 군사작전 기록(적변문축)
나. 영웅들의 이야기
다. 대구 관덕정의 신화
1. 신미사변(辛未事變), 2. 대구감영에서 32명 처형
라. 이필제의 의리(義理)
1. 동학지도부 요인구출, 2. 유생들 규합 실패, 3. 군기시(軍器寺)에서 최후
마. 해월의 여정(旅程)
1. 동경대전(東經大典)의 발간, 2. 강시원(姜時元)의 조난
바. 꺼지지 않는 횃불
1. 갑오년 기포령과 해월의 순도(殉道), 2. 기미년 횃불과 임시정부
3. 근대화․세계화의 횃불
[특기사항 : 동학 천도교는 20세기 끝자락에 창도되었으나 인간, 신, 자연을 동일시하여 신을 모시고 있는 인간존중이 최대의 선이다. 인간을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라는 종교나 인간을 미미한 존재로 무시하는 종교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중생이 희생되어 왔는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21세기는 인간과 신, 또 인간과 자연이 일체가 되어야 인류와 후손이 번영할 것임을 가르침.]
몸바친 불멸의 영웅들 91명
(도원기서, 교남공적, 적변문축의 기록)
지금의 영덕군 33명 - 영해부 26명
효수형 10명 : 권두석(權斗石 박영관의 사위), 권석중(權錫重), 권영화[權永和 나이 22세 - 서면(西面) 가산(佳山)출신], 박기준(朴箕俊), 박영각(朴永珏, 박영관의 동생), 박영수(朴永壽, 박영관의 동생), 박한용(朴漢龍), 박한태(朴漢太), 신화범(申和範), 한상엽(韓相燁),
물고자 9명 : 권재일(權在一), 권재화(權在華 - 4.11 적변문축의 기록) 김덕만(金德萬 북면 출신) 김명학(金明學 보림리 출신) 김억록(金億?, 4.11 적변문축 기록), 박영관(朴永琯 도원기서에는 박사헌 - 朴士憲), 박종대(朴宗大), 신택순(申宅淳 영해 이방), 장선이(張先伊 장성진의 형),
교전사망 7명 : 권일원(權一元) 부자, 박양언(朴良彦), 박지동(朴知東), 권덕일(權德一), 김씨(이름 미상), 박종필(朴宗必 각리 출신, 3. 26 적변문축)
영덕현 7명 효수형 1명 : 임영조(林永祚), 교형 1명 : 강사원(姜士元, 姜守, 姜時元 1885년 8월 충청감영에서 교형), 교전사망 5명 : 임만조(林蔓祚), 구일선(具日善), 강문(姜汶 - 강사원의 동생), 김기호(金基浩), 임영록(林永祿 4.11 적변문축)
지금의 영양군 - 영양현 9명
효수형 4명 : 이군협(李?協), 이재관(李在寬), 최기호(崔基浩), 최준이(崔俊伊) 물고자 4명 : 신성득(申性得), 우대교(禹大敎), 이정학(李正學), 백씨(白哥 이름 모름 - 적변문축) 교형1명 : 최시형(崔時亨, 崔景五, 제2대 교주, 1898. 6. 2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 단성사 앞 당시 좌포청에서 교형)
지금의 청송군 - 진보현 1명, 효수형 : 정창학(鄭昌鶴)
지금의 울진군 - 당시 강원도 울진현 및 평해군 11명
효수형 6명 : 남기환(南基煥 덕구리 26세), 손경석(孫敬錫 관곡 출신 23세), 전인철(全仁哲), 전정환(全正煥 월야동 39세), 전동규(全東奎 - 도원기서에 기록된 이름, 울진군 기성면 방률리 입구에 세워진 全義哲의 추모비에 본명이 ‘東圭’임, 처형된 후 의관만 돌려받아 의관장을 지냈다함)의 당내 3,4명, 황억대(黃億大), 물고자 2명 : 김귀철(金貴哲 44세), 남두병(南斗柄 43세, 소모문 지음), 자진1명 : 전영규(全永奎), 교전사망 2명 : 남기상(南基祥), 김씨(이름 모름)
지금의 경주시 - 경주부 21명
효수형 7명 : 김덕창(金德昌), 김창복(金昌福), 박명관(朴命觀), 이기수(李基秀), 이병권(李秉權), 임욱이(林郁伊), 허성언(許性彦),
교전사망 12명 : 박동혁(朴東赫 - 북면 사동 출신 입성 시 성문에서 피살) 이기섭(李基燮), 이사인(李士仁 - 경주 북산 출신 사람임), 김만춘(金萬春), 정치선(鄭致善), 김씨(이름 모름)의 숙질, 김용운(金龍雲) 형제, 김씨(이름 모름) 숙질, 김경화(金慶和)의 백형, 물고 2명 : 김용우(金用右 영덕 접경에서 잡혀 피살, 영해 인천리 와 경주로 출신 기록이 두 곳, 경주가 맞는 듯 - 적변문축), 김흥이(金興伊 적변문축),
지금의 안동시 - 2명,
안동부 효수형 2명 : 김천석(金千石 장성진의 이붓 아들), 장성진(張星進 또는 張成眞 - 도원기서는 영양으로 기록, 장선이의 동생)
지금의 포항시 - 8명
청하 3명, 교전사망 : 이국필(李國弼) 형제, 안씨(이름 모름)
흥해 2명, 교전사망 : 박황언(朴璜彦), 백씨(白氏 이름 모름)
연일 2명, 교전사망 : 박씨, 천씨 (2명 모두 이름 모름),
장기 1명, 입성 시 사망 : 성씨(成氏 이름 모름)
지금의 경남 2명 - 영산 1명, 물고자 : 송지(宋志), 밀양 1명, 효수형 : 김일언(金一彦),
지금의 충남북 2명 - 노성 1명, 효수형 : 박춘집(朴春執), 홍주 1명, 능지처사 : 이제발(李濟發, 李弼濟 8월 문경에서 잡혀 12. 24 서울시청 뒤 군기시에서 능지처사됨)
지금의 전라 1명 - 남원 물고자 : 하만석(河萬石),
지금의 서울 경기 1명 - 교형 : 김낙균(金洛均, 金震均, 일자미상),
정배형(귀양)을 받은 영웅들 21명
영해부 6명 : 권기상, 권양일, 김만근, 박순종, 박유태, 박응춘,
영양현 7명 : 곽진봉, 김명북, 안대제, 안소득, 안평해, 이도천, 이성중,
평해현 3명 : 전세규, 전제옥, 전종이,
칠원(경남) 2명 : 설영구, 윤준식,
안동 1명 : 정계문, 상주 1명 : 김천일, 울산 1명 : 서군직,
600여명 참가자중 피신확인 영웅들 66명
영해23명 : 박춘서, 이수용, 백갑이, 김소천, 김여수, 박군행, 박군서, 권일언, 권공필, 권이목, 이인언, 전윤오, 김경화(金慶和), 전덕원, 김계익, 김양언, 임근조, 임인조, 유성원, 전성문, 김용여, 박영목, 김성길,
영덕3명 : 구계원, 김씨성을 가진 두명,
영양11명 : 정치겸, 정학이, 최갑대, 초대접주 황재민(黃在民), 김대복, 김치국, 김윤백, 백현원, 김성진, 신성화, 배감천,
경주3명 : 최보관, 이원대, 김경화(金景和),
안동5명 : 김화춘, 김문옥, 김진경, 황재명, 김영순,
청하1명 : 이직보(李直甫 본명 이도한,李道漢), 흥해2명 : 김경철, 손흥준, 영일1명 : 이춘대(李春大), 울산2명 : 초대접주 서군효(徐君孝), 전윤경,
평해5명 : 전윤환, 황윤구, 전윤조, 전한규, 전서규,
상주7명 : 김경화(金敬和), 김형노, 김오실, 김순측, 이군강, 임익서, 권성옥, 대구3명 : 김성백, 강기, 정용서,
붙잡힌 여인들 30명
영양(英陽) 2명 : 석보면(石保面) 양구리(羊邱里) 신화구(申和九)의 처 최소사(崔召史)- 자택에서 안동진 교졸에게 붙잡힘, 동학(東學)의 무리(之類)라고 진술
김소사(金召史) - 남편(夫) 서인세(徐仁世) 아들(子) 험중(險重) 혁명 참가자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었음.
영해(寧海) 27명 : 오서면(烏西面) 보림동(寶林洞) 남소사(南召史) - 경주 교졸이 잡아서 신기동(新基洞)으로 압송해 갔음.
인천리(仁川里) 김소사(金召史) - 아들이 지평(支平)이라는 이유로 붙잡힘, 유소사(柳召史) - 그의 남편이 지평(支平)이라는 이유로 붙잡힘. 김소사(金召史) - 손자(孫子)가 박찬조(朴燦祚)로 며느리(婦) 유소사(柳召史)도 붙잡힘
삼계리(三溪里) 권소사(權召史) - 겸관의 지시로 발부해서 영해 장교가 붙잡아 갔음.
오촌리(梧村里) 금소사(琴召史) 황소사(黃召史) - 대구진(大丘鎭) 교졸이 붙잡았음. 황소사(黃召史) 남소사(南召史) - 황소사의 남편(夫) 박종문(朴宗文) 고부간이고 먼 친척 박가촌(朴佳村)이 있고 혁명 참가자를 숨겨주고 밥을 해 주었음. 남소사(南召史) 신소사(申召史) - 대구진 교졸에 붙잡힘.
하보림(下寶林) 남소사(南召史) - 남편(夫) 박덕언(朴德彦) 가족 친척 없음.
서면(西面) 창수원(蒼水院) 김소사(金召史) - 장물(증거물)로 옷섶을 잡아 누르는 결자와 남색요대 군직첩이 나와서 안동진 교졸이 붙잡았음.
신기리(新基里) 정소사(鄭召史) 이소사(李召史) 이소사(李召史) - 경주진 교졸이 붙잡아서 해당 동으로 보내왔음. 박소사(朴召史) - 남편(夫) 권달술(權達述)이라는 이유로 붙잡힘, 가족 친척은 없음.
후서면(後西面) 십항점(十項店) 노소사(盧召史) - 남편(夫) 장운구(張雲九).
내병곡(內屛谷) 권소사(權召史) - 혁명 참가자 백중호(白重昊)의 형수(兄嫂)이고, 그 시숙(媤叔)은 백교운(白敎運)으로 이들을 숨겨줌.
국골(國谷) 김소사(金召史) 유소사(柳召史) 김소사(金召史),
저곡(楮谷) 정소사(鄭召史) - 아들(子)은 권우선(權祐先)임, 역시 붙잡힌 며느리(婦) 조소사(趙召史)이고 숨겨주고 밥을 해 주었음.
황장골(黃腸谷) 백소사(白召史) - 남편(夫) 박강아(朴江牙)는 오래전에 출타했고, 친정(親庭) 동생(弟) 백천이(白千伊)를 숨겨주고 밥을 해 줌. 사동(蛇洞) 권소사(權召史),
청송(靑松) 1명 : 동로동(東魯洞) 이소사(李召史),
Copyright 만든사람 : 김 기 현 [마지막 고친날짜 : 201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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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 후천개벽의 횃불 1만8천원,최초의 동학혁명 2만원(교보문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