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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언의 일대기를 보면
이에대하여 동해시청에 민원청구를 하였다 그내용은 아래와 같다.
정하언 삼척부사 9대손 정태식박사 입니다. 현존하는 아래필체에대하여 필체분석을 잘못하고 있는데 대하여 시정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분석내용은 더많이 제시할수 있는데 요번에는 일부만 제시합니다.
동해시에 있는 무릉계 입구의 반석에 암각된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두타동천(頭陀洞天)’이라는 초대형 암각화 필적은 우리나라 최고의 웅필(雄筆)로 경탄케 한다.
이 한문서체는‘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 주제이고 그 하단에‘玉壺居士, 辛未春’이 부제로 음각 되어 있고 무릉반석의 남동쪽이 되고 금란정의 북측에 쓰여져 있으며 행서체의 12자이다.
오늘날 이 웅장하고 천하명필인 이 글씨의 필자를 모르고 또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고증이 명확지 않다. 그러나 근간에 와서는 두가지 견해로 정립이 돼있다. 하나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옥호자(玉壺子) 정하언(鄭夏彦)이라는 설이다.
이 사람 사이에는 180년의 격차가 있다. 필자로서 이에 대한 몇가지 사실(史實)을 근거로 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필객은 ‘신미년춘’에 쓴 것은 분명하다. 신미년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 고장에 연고가 있으며 향토사인 진주지(眞珠誌)에 수록돼 있는 양사언을 주제로 고찰한다.
우선 양사언은 중종 12년(1517)~선조 17년(1584) 67세를 일기로 생몰한 인물이며 강릉부사로 재임한 기간은 5년으로 선조 4년(1571)~선조 9년(1576)이다. 그리고 그의 선임 강릉 부사인 낙전당(樂全堂) 정두형은 동해시 쇄운동의 출신이며 그의 묘소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동해시 광천(光川) 현 비천동에 있다. 따라서 반석 암각문의 연대인 ‘신미년 춘(辛未年 春)’과 일치한다.
또 동해시 광천촌 속지명 빛내의 주자곡(光川洞 鑄字谷)에 정충원공의 상소가 있고 그 지방 주민의 설화와 그의 직계손 정의철의 증언에 의하면 양사언 부사가 묘소를 조문 참배 하기 위하여 교자를 타고 오르다가 산악이 험준하여 묘소까지 오르지 못하고 산중턱에서 내려 보행으로 약 200미터를 올라서 묘소를 참배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 산골짜기에 부사가 왔고 부사의 행차기(行次旗)가 꽂혔다고 해서 그 산등성이를 지금도 “부사목”으로 부르고 있다.
이상의 각항을 참조해 볼때 삼화동 광천촌과 삼화동 무릉계는 인접한 곳이고 또 무릉계는 이 고장의 명승지였음으로 풍류를 좋아하는 양사언 부사는 내친김에 인접한 무릉계를 담방하였고 이 명소 반석에 일필휘지하여 본 글씨를 썼다고 추정이 된다. 또 그 글자를 석각하려면 상당한 권세나 재력이 없이는 400년전의 그 시대에는 불가능하였다고 단정 할 수 있다.
“옥호거사(玉壺居士)가 누구인가이다. 조선조에서는 옥호라는 호를 가지고 우리 동해시와 깊은 연고를 맺고 있는 묵객, 관원은 없고 다만 옥호자(玉壺子)가 있는데 이 실존인물은 삼척부사 정하언(鄭夏彦)이다.
정하언은 삼척부사로 3년간(영조 26~29. 1750~1753)이고 그 임기 중에는 신미년(신미년:1751)이 있다. 그러나 아호(雅號)에 있어 옥호와 옥호자는 분명히 다르다. 양사언 부사는 봉래(蓬萊)라는 자기 호를 쓸 수도 있었으나 인접부의 현역부사가 타관부(他官府)에 조문 와서 자신을 밝히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였고 술과 운치를 겸해서 옥호라 쓸 수도 있다고 보아진다.
무릉선원의 12자 서체는 행서(行書)이고 운필에 있어 둥글둥글하게 형상이 잡히고 있는 원필(圓筆)이고 자획이 무리없이 능통하게 미끌어져 힘있어 머물지 않고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평출과 낙필은 절묘하고 필체가 금강산 만폭동의‘蓬萊楓嶽 元化洞天’ 양사언부사의 글씨와 담고 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때 오늘까지 향민에게 설화되며 수백 년을 전래되고 있는 구전을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고 향토사 진주지(眞珠誌)에 수록되어 있는 기록을 고증으로 하여 무릉반석의 석각문은 조선의 명필 양사언(楊士彦)의 친필로 감정할 수 있다고 본다. 끝으로 지극히 아쉬운 것은 이 암각서가 풍마우세(風磨雨洗)되어 지금은 그 자획을 식별할 수 없는 지경이다.
필자가 주관하여 학계의 의견과 향토사가의 고견을 참작하고 향민들의 여론조사를 500명 실시하여 2003년 모춘에 자획의 음각복원을 단행하고자 한다.
홍 순 성 <동해문화원장>
위 분석에 대하여 9대손 정태식 박사는 부정확한 분석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 내용은 홍문성 동해문화원장 정확치 않다는 내용이다. “옥호거사(玉壺居士)가 누구인가이다. 조선조에서는 옥호라는 호를 가지고 동해시와 깊은 연고를 맺고 있는 묵객, 관원은 없고 다만 옥호자(玉壺子)가 있는데 이 실존인물은 삼척부사 정하언(鄭夏彦)이다.
정하언은 삼척부사로 3년간(영조 26~29. 1750~1753)이고 그 임기 중에는 신미년(신미년:1751)이 있다. 그러나 아호(雅號)에 있어 옥호와 옥호자는 분명히 다르다. 양사언부사는 봉래(蓬萊)라는 자기 호를 쓸 수도 있었으나 인접부의 현역부사가 타관부(他官府)에 조문 와서 자신을 밝히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였고 술과 운치를 겸해서 옥호라 쓸 수도 있다고 보아진다.(이는 홍 순 성 원장의 단독 해석이다.)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정하언의 지당집(19째줄)에 보면 옥호자의 호로 쓰게 된 것은 정하언 공이 20세(1721년, 경종원년)에 진사시험을 합격하고 조석명의 딸( 14세)과 결혼을 하고 장인 판서 조석명 집에 머무르다가 충청도 부여(현재 부여읍 규암면 수북정에서 100m 부근인 옥호동(玉壺洞 )에 내려와 초가와 청풍정을 짓고 과거 공부하며 옥호동(옛날 지명) 마을 이름을 따서 자칭 옥호자라는 호를 사용하였다(청풍정 시문 11줄째: 부여지). 옥호자는 부여의 옥호동(현 부여군 규암면 수북정옆)에서 열공하는 옥호아들이라는 뜻이다. 옥호거사는 옥호의 호를 쓰는 거사란 뜻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정공이 글공부를 8년간 옥호동에서 열공한 후 한양 조석명 장인집에 상경하여 1735년 (34세, 영조11년) 증광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다. 그러니 옥호동은 정공을 과거에 급제시킨 동네(고시촌)이므로 일평생 잊을 수 없는 명칭이다. 그러므로 옥호자나 옥호거사는 시주(詩酒)시 사용될 수 있는 호이다. 정공이 20세에 본인이 만든 애지중지한 호이다.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등은 정공이 삼척부사에 재임하면서 쓰였던 글이다. 정공의 일대기를 보면 시주(詩酒)정자인 청풍정(20대에, 부여)과 수옥정(52세 서울 현 도봉구 명덕동)을 직접지었다. 기타 공복루에 중수기원문과 홍화문의 액을 남기었다. 정하언 삼척부사 재임 (영조 26~29. 1750~1753)시 동 글씨가 신미년(신미년:1751)에 쓰어졌다. 그런데 양사언은 중종 12년(1517)~선조 17년(1584) 67세를 일기하였는데. 정하언부사보다 170년 먼저 태어난 양사언이 170년 후 삼척부사에 부임한 정하언 호 를 어떻게 알아 옥호거사를 사용했을까? 즉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 주제이고 그 하단에‘玉壺居士, 辛未春’이 부제로 음각 되어 있고 무릉반석의 남동쪽이 되고 금란정의 북측에 쓰여져 있으며 행서체의 12자이다. 그리고 170년 전에도 양사언 강릉부사가 자기지역도 아닌 삼척부사 관할인 지역에 이런 글자를 석각하려면 상당한 권세나 재력이 없이는 400년 전의 그 시대에는 불가능하였다고 단정 할 수 있는데. 양사언은 강릉부사 체면에 삼척부사의 보고 승인도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시 승인없이 그런 일을 했다면 당시 삼척부사(현 동해시장)는 타지역 수령이 남의 관할지역을 침법하고 고을 수령으로 대단히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여 바로 상급자인 임금(현 감사원)한테 보고서를 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동해문화원장의 분석보고서는 정확한 분석이 될 수 없으며 조선시대 명필대가 정하언 공을 잘모르고 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정공에 대한 기록으로 이조왕조실록, 부여지와 대사간 지당공 사적 습유(大司諫 止堂公 事蹟 拾遺)의 자료집을 보면 정공은 글씨를 매우 잘썼으며 창경궁의 정문인 중추루문의 편제 홍화문(弘化門)은 정공이 쓴글이 있다.(근역서 화징)
그리고 속대전 봉교편차(왕명을 받들어 편집한 사람) 16인중 한사람으로서 어제의 편제와 속대전을 편찬하였다. 속대전에 공의 직함은“어모장군행용양위부사과신정하언(禦) 그러므로 삼척부사시절 정하언공이 시주(詩酒)를 즐기며 글을 남긴 것을 양사언이라는 판단은 잘못된 해석으로 판단된다. 이는 지당집에서 삼척부사시절 선민정치와 백성을 교화하며 풍류를 즐기며 체제공과도 즐긴 흔적(체제공의 명덕기)이 많다(이종목 지음 ‘조선의 문화 공간“ 4책 조선후기 내가 좋아하는 삶( P143~144, 휴머니스트 발행).
조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무릉계곡에 보존된 서체>
창경궁에 있는 홍화문의 정하언 삼척부사의 서체와 같다
창경궁에 있는 홍화문의 정하언 삼척부사의 서체와 같다
창경궁에 있는 홍화문의 정하언 삼척부사의 서체와 같다
창경궁에 있는 홍화문의 정하언 삼척부사의 서체와 같다
창경궁에 있는 홍화문의 정하언 삼척부사의 서체와 같다
창경궁에 있는 홍화문의 정하언 삼척부사의 서체와 같다
창경궁에 있는 홍화문의 정하언 삼척부사의 서체와 같다
필체 역사를 모르는 비 전문가가 의 조언으로 양사언의 서체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