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嶺樓記
榮州는 山水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鄒魯之鄕이요 선비의 고장이다. 小白山은 嶺南의 鎭山으로 北에서 내려오다 서쪽에서 솟구쳐 그 凝結된 것이 매우 雄大하고 봉우리들 또한 秀麗하여 마치 푸른 물결이 다투는 듯하고 福을 凝縮한 것이 無窮하다. 竹嶺은 龍이 서려 있는 듯한 小白의 鞍部에 位置해 있는데 蓮花峯과 兜率峰이 이어지는 잘록한 곳에 호랑이가 걸터 앉은 듯 하늘을 半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竹嶺은 漢江과 洛東江 水系의 分水嶺으로 아름다운 景觀을 形成하고 柔順하면서도 莊重하고 端雅한 선비의 氣品과 風貌를 갖추고 있다. 嶺南과 湖西를 연결하는 689m의 竹嶺은 東南으로는 1千 300里 嶺南의 젖줄인 洛東江을 열고, 儒彿文化와 忠節의 歷史를 펼쳐 놓았으며 西北으로 南漢江을 열어 漢江文化를 꽃피웠다. 일찍이 李重煥은『擇里志』에서 竹嶺을 ‘大嶺’이라 했는데, 옛부터 竹嶺은 聞慶새재와 秋風嶺과 함께 嶺南의 3關門중 으뜸으로 손꼽혀 왔다. 竹嶺은『三國史記』에 阿達羅王 5年(158年)인 戊戌年 3月에 竹竹에 의해 開通되었는데 竹竹은 고개를 開拓하고 지쳐 殉死하였는데 이로 因하여 고개 이름을 竹嶺이라 했다. 그 후 高句麗와 新羅의 激戰地로 溫達 將軍의 자취가 서린 곳으로 高句麗 군사들이 넘어다녔고, 잃었던 땅을 되찾은 新羅軍과 甄萱을 물리친 高麗의 王建, 亡國의 恨을 품은 麻衣太子가 눈물로 넘던 歷史의 現場이었다. 朝鮮初 世宗·成宗 年間에는 倭의 使臣들의 行路로, 壬辰倭亂때는 關防으로 役割을 하였으며, 1907年 高宗의 强制退位와 大韓帝國 軍隊의 解散으로 閔肯鎬와 李康秊 義陣이 8日間 戰鬪를 한 義兵戰爭과 韓國戰爭時 ‘竹嶺戰鬪’의 激戰地이기도 했다. 또한 花郞 竹旨郞과 上元寺 銅鐘의 傳說이 서려있고, 退溪 先生이 仲兄인 溫溪 先生을 배웅하던 곳이었으며, 豊基 郡守 周世鵬과 聾巖 李賢輔가 懷抱를 풀던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耘谷 元天錫, 梅月堂 金時習, 孤山 尹善道, 眉叟 許穆, 茶山 丁若鏞 등 詩人墨客의 文學의 現場이기도 했다. 竹嶺은 1930年까지 慶尙道 東北地方 여러 고을 사람들이 서울 往來에 이용하던 길로 靑雲의 뜻을 품은 科擧 선비, 公務를 띤 官員들이며, 赴任·退任길의 고을 守令이며, 海陸의 온갖 物産을 流通하는 장사꾼들로 四時장철 煩雜했다. 이렇듯 竹嶺은 우리 歷史의 政治, 經濟, 軍事, 文化를 發展시켜온 중요한 分岐點으로 약 2千年 동안 그 役割을 해왔다. 悠久한 歲月에 걸쳐 嶺南 內陸을 잇는 動脈이었던 竹嶺에도 1934年경 新作路가 열리고, 1942年 竹嶺 아래로 4,500m의 터널이 뚫려 中央線鐵道가 開通되고, 1971년 國道 5號線이 開通되었다. 2001年 中央高速道路가 開通되고, 竹嶺옛길이 2007年 名勝 第30號로 指定되면서 이제는 호젓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 由緖 깊은 歷史의 現場 竹嶺에 榮州市는 2011年 12月에 樓를 建立하고 樓의 前面에 ‘竹嶺樓’, 後面에 ‘嶠南第一關’이라는 懸板을 걸었다. 樓가 建立되고 數年이 지났으나 樓에 記文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榮州地域 鄕校와 儒林에서 積極 發意하여 삼가 記文을 새겨 걸게되었다. 竹嶺樓의 아름다운 景致와 드넓고 탁 트인 모습은 嶺南의 으뜸이고, 푸른 물과 맑은 山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였으니 그 歷史를 역시 記錄할 만하다. 또한 오고 가는 길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땀을 씻고 잠시 쉬어 갈수 있는 空間으로 ‘竹嶺樓’가 永遠히 남겨지길 願하면서 이 樓에 오르는 모든 이들에게 늘 지극한 즐거움이 이어지기를 바라노라.
2017년 丁酉 孟夏節 김태환
첫댓글 죽령루기에는 죽령이름의 유래 죽령의역사 문회등 알찬자료가 게재되어있어 매우 유익한자료일 뿐만아니라 루각에서 읽기 힘든 자료를 안방에서도 읽을 수 있게해 주셔서 대단히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