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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5.18 구속부상자회 光州市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오월
부산양서협동조합
- 창립에서 해산 이후까지 -
발제자 : 김ㆍ희ㆍ욱(부산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당시, 부산양서협동조합 전무)
발제자 본인은 당시 양서조합을 책임지고 운영했지만 그동안(32년) 한 번도 양서조합 운영에 대한 내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운동적 차원에서만 요구되었을 뿐 운영적ㆍ역사적 차원에서는 한 번도 요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영 및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발표 내용은 발제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운영 및 사실적 경험을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에서 처음 밝히는 내용들이 많다. 그러나 미진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자료가 별로 없고 기억도 희미하기 때문이다. 비록 불충분한 발제 내용이지만 이후 보완되어 보다 충실한 기록으로 역사에 남기를 바란다.
1. 창립하기까지
발제자 본인은 서울에서 부산에 내려와 75년부터 부민동 소재 부산영락교회에서 다시 교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후 77년 2월 경 토박이 교인이란 프리미엄 때문인지 빠르게 청년회 회장이 되었다. 이 당시는 유신체제하였기 때문에 부산의 사회단체는 물론 기독청년회도 전반적으로 대외 활동이 침체되어 있었다.
그래서 신앙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부산영락교회 청년회에서는 6월에 <청년신앙강연회>를 여는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 그러면서 예장의 서남동 목사, 기장의 안병무 목사, 감리교의 변선환 목사 같은 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신앙심을 배워온 본인은 그 같은 출중한 강사가 그리웠지만 모시기가 여건상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부산의 인물 중에서 최선의 강사를, 특히 평신도 중에서 알아보기로 하였다.
최선의 강사를 물색하던 중 교회 주위의 믿을만한 어른들이 김광일 변호사, 정권섭 부산대 법대 교수, 조운복 부산대 의대 교수 등을 추천하여 섭외하러 다녔다.
당시 김광일 변호사는 동아일보에 백지광고를 내어 반정부 인사로 새롭게 알려졌고, 현대 교인들이 가롯유다보다 못한 신앙이라는 취지의 ‘가롯유다 예찬론’을 일간 신문에 기고하여 교계에 파문을 일으키면서 오늘날 기독교인 상(像)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제기하고 있었다.
김광일 변호사에게 찾아가 <청년신앙강연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강사를 부탁하니 쾌히 응낙해 주었다. 그 인연으로 자주 변호사 사무실에 가게 되었는데, 특히 당시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던 (지금은 경주 팔복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는) 김형기씨와 말이 통하게 되면서부터는 변호사보다는 김형기씨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친분이 쌓이고 인격을 믿게 되면서 의기투합하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 후 어느날, 김형기씨는 나에게 협동조합에 대한 얘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되는데, 그는 나에게『앤티고니쉬 운동의 철학과 전략』이라는 두께가 얼마 안되는 하얀 색 표지에 무지개가 산뜻하게 그려진 문고판보다 약간 큰 책을 보여주었다. 이 내용은 캐나다 동부지역의 노바스코시아 주(州) 앤티고니쉬 지역에서 협동조합 운동으로 인해 일어난 사회의 변화를 코디 신부가 알기 쉽게 적은 내용으로, 번역은 송보경씨가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책을 계기로 며칠 후, 부산에서도 이같은 운동을 해보자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무엇을 매개로 할것이냐 서로 고민하다 ‘책’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그의 아이디어에 함께 동감하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진리를 알리고, 불의를 밝히고,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양서>라는 책과 경제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1/10이상 출자 제한) <협동조합> 정신과는 환상의 콤비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환상의 콤비가 조합원을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에 혁신적인 아니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시 부산의 지적문화 풍토에 대해 발기위원장이었던 본 발제자는 <양서조합소식>지 창간호 1면에다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을 창립하면서>라는 제목의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쓴 글이 남아있다.
우리 고장 부산은 다른 어느 국내 도시보다 늦게 형성되었으나 반면, 그 어느 도시보다 큰 도시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런데 그 발전은 …(생략)… 구한 말의 역사적 오류 속에서 일제의 침략적 야심의 수탈적 경제를 발판으로 급속히 성장한 데에다 6ㆍ25 전쟁이란 타율이 기폭제가 되어 역동적으로 발전하였기에 인간애ㆍ민족애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적 전통을 지닌 도시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경제적 상혼과 사회적 모순이 만연하여 그 문화적 풍토는 불모지일 수밖에 없고, 그 불모지에서 자라는 문화는 척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우리 고장의 문화적 병폐를 통감하는 청년들이 부산 문화의 후진성과 시대의 아픔을 위해 작은 힘을 모우면 큰 힘이 된다는 상식적인 진리를 토대로 하여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에 다같이 모였다. 앞으로 우리 양서협동조합은 좋은 책을 통해서 지적ㆍ문화적 수준을 높이고, 인재를 발굴하고 협동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귀면서 사회의 어둡고 병든 곳을 개혁하여 참다운 인간애가 넘치는 복지 부산을 건설하는데 기여하는 문화적 센타의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같은 소식지에서 <협동조합운동의 시대적 의의>라는 김형기씨의 ‘논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현실은 개혁되어야 한다’ 이러한 요청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어느 사회에서나 있어 왔으나 현대에는 그 요청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광범위하다. …(생략)… 고도의 산업사회에 돌입해 감에 따라 물질생활은 전보다 풍요해져 가지마는 지식ㆍ재화ㆍ권력의 소유는 양극화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부의 생산 수단 및 유통 구조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행정 권력의 형성과 그 집행과정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생략)… 우리는 입신출세와 부귀영화를 삶의 최대 가치로 삼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살아가려 한다. 강자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약자에 대해서는 짓밟는 저열한 권위주의에 젖어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은 있으나 민주적 생활은 없다.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익히지 못하니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올바른 견해도 가질 수 없는 실정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현대는 민주주의 시대다. …(생략)… 협동조합 운동은 민주주의를 역사와 사회 속에서 굳건히 정착시켜가는 운동이다. 그것은 신뢰와 협동의 인간 관계를 기초로 하여 현실에 주어진 인적ㆍ물적ㆍ문화적 자원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민주주의의 내실을 충족시켜가는 운동이다. 그것은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 다수에게 주인으로서의 실력과 역량을 갖게 함으로써 진정한 자주ㆍ자립의 기반을 다져가는 운동이다. 우리가 지금 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을 시작하는 의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위의 두 글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부산’에서 양서협동조합을 하는 그 하드웨어적인 의미와 그 ‘시대 상황’의 소프트웨어적인 의의를 잘 나타내고 있다.
<양서>로 <협동조합>을 하기로 결정한 후, 그는 기장 교파인 중부교회에 나갔으므로 기장 교회 청년들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나는 당시 예장 통합측으로 부산에서 가장 큰 영락교회의 청년회 회장이었으므로 예장교회 청년들에게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당시 부산에서 여성운동에 앞장서면서 크리스챤아카데미 여성과 사회모임에서 활동하던 정동진ㆍ오흥숙ㆍ박재금ㆍ오지순 및 신선명 등이 협조하였다. 그 외에 종교와는 관계없는 인맥가운데서도 좋은 분들에게 알렸다.
그 후 본인 외에 김형기, 최준영, 박현삼, 정동진, 오흥숙, 서연자, 구성애, 고호석 등 20여명이 모이게 되면서 양서조합 창립을 위한 발기위원회가 구성되고, 점점 창립의 분위기에 동력이 붙으면서 조직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본인이 추천되어 창립을 위한 발기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준비모임은 그해(77년) 가을부터 수요일마다 주로 중부교회 친교실에서, 그리고 몇몇 장소에서 모여 양서조합 창립을 위한 공부를 해나갔다. 돌아가면서 발제자를 정하고 발제 내용에 따른 토론도 하면서 이론을 터득해 나갔고 친목을 통해 팀웍을 형성해 나갔다. 그 내용은 <양서조합소식>지 ‘창간호’(78.4.1)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1977년 10월 12일 : 협동조합의 원리
10월 19일 : 협동조합의 역사
10월 26일 : 한국의 협동조합 운동과 현황
11월 9일 : 전통사회에서의 협동 조직
11월 23일 : 조합 정관 초안 작성
11월 25일 : 출자 증권 제작
11월 26일 : 협동조합 발기문 및 안내서 작성
12월 14일 : 앤티고니쉬 운동
12월 21일 : 협동조합과 지역사회 개발
1978년 1월 14일 : 자본주의의 경제적 본질과 협동조합
1월 21일 : 정관 해설
1월 28일 : 협동조합의 효과적인 운영방안
2월 4일 : 협동조합 정신과 신학적 정신
그 외에도 2부 순서에서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전반적인 현실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과 대안들이 신변 잡담과 함께 오고 갔다. 이렇게 5개월 이상 조용히 그러나 신나게 진행하는 가운데 의식과 팀웍을 다지고 공유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 나갔다.
78년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출자 및 홍보활동을 적극적으로 시작하는 한편, 창립을 위해 조직을 다듬기 시작하였다. 정식 명칭은 <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으로 정하고, 조직은 청년중심으로 하되 대외적인 공신력을 위해 사회 저명 인사들을 위촉 발기인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김광일 변호사, 이흥록 변호사, 최성묵 목사, 김동수 부산의대 교수, 신일기업 부산대표였던 이광혁 영락교회 장로, 이사벨 여고 김기열 교장, 구경수 결핵과 전문의사, 오수영 신부, 소설가 윤정규, 부광약품 부산소장 이길웅 등을 위촉발기인으로 모셨다.
그리고 청년들은 주로 기독청년들 중심이었고, 가톨릭은 소수의 가토릭 농민회(=줄여서 ‘카농’이라 불렀음)와 관련된 청년들이었다. 불교 쪽은 아직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당시는 유신체제였으므로 일반 청년들은 사회참여 같은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활동하기가 자유스러웠기 때문에 종교인 중심의 청년들이 먼저 앞장 서게 되었다.
이렇게 모여진 조합원 중 먼저 54명이 참석한 가운데 2월 20~21일(양일간)에 걸쳐 제 1회 조합원 종합 교육을 YMCA 친교실에서 실시하였다.
20일 저녁 7시 : 협동조합의 원리. 8시 : 협동조합의 역사.
다음 날인 22일 부터는 YMCA회관 5층에서 임시 사무를 보면서 조합원으로부터 출자금을 받고, 출자증권을 창립발기위원장의 이름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제 2회 조합원 교육은 3월 9일(목)~10(금), 양일 간에 중부교회에서 실시하였고[도판 2], 그 교육내용은 제 1회와 동일하였다.
이사장에는 드러난 인물보다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인물을 앞장서게 하는게 좋겠다고 결정하여 김광일 변호사의 고등학교 및 대학교 동창으로서 신뢰할만한 이흥록 변호사를 이사장에 모시기로 내정하였다. 그리고 그 실무 운영의 책임자는 전무라는 직책을 정해, 그것을 당시 부산여자전문대학에 강사로 있던 창립발기위원장인 김희욱이 맡기로 하고, 간사로는 서울 농대 휴학중이던 소진열군이 수고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9명의 이사진을 구성하여 모든 중요 결정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78년 4월 2일 3시에 YMCA 옛 회관 1층, 당시 예식장으로 사용하던 강당에서 7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성황리에 마쳤다[도판 3. 4]. 이사진은 투표에 의해 김동수ㆍ김형기ㆍ윤정규ㆍ이흥록 이상 4인을 2년제 이사로, 신선명ㆍ박현삼ㆍ김명준ㆍ정동진ㆍ정영운 이상 5인을 1년제 이사로, 감사로는 박노춘ㆍ박상도ㆍ임동규 이상 3명을 선출하였다.
4월 5일, 1차 이사회를 열어 조합장에 이흥록ㆍ부조합장에 박현삼ㆍ서기 이사에 정영운ㆍ교육 이사에 김형기ㆍ홍보 이사에 신선명ㆍ도서선정 이사에 정동진을 선출하고, 실무 책임자인 전무에는 김희욱을ㆍ간사에는 김점란을 임명하였다. 4월 15일 2차 이사회의에서는 교육위원회, 홍보위원회, 도서선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협동서점 운영의 원칙은,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다(=문호 개방의 원칙). 양서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이용고 비례 배당의 원칙). 민주적 관리를 통하여 민주적 관리 능력을 배양한다(=민주적 관리의 원칙). 출자액에 관계없이 1인 1표를 가진다(=경제적 민주주의의 원칙). 일체의 정치적 종교적 중립을 지킨다(=중립의 원칙). 조합원의 재교육을 통하여 조합의 발전을 이룩하고 지역 사회에 공헌한다(=교육의 원칙)”는 원칙과 함께 이자 제한의 원칙, 시가 판매의 원칙, 현금 거래의 원칙을 지켜 나갔다.
그리고 당시 세련된 협동조합의 로고와 협동서점의 로고는 (주)샤니(?) 식품의 디자인실에서 근무하던 박재훈이 해주었다.
2. 창립 이후
당시 협조를 얻은 곳은 한길사. 돌베개 등 갓 만들어진 사회과학 출판사들이었는데,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협조를 해주었다. 이같은 출판사를 세운 사람들은 당시 언론계(주로 동아일보)ㆍ학계(서울대ㆍ연대ㆍ고대 등)에서 정론을 주장하거나 체제를 비판하다 해직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출판사가 발간하는 진보적 성향의 신간들은 서울에서 공급받고 나머지 책들은 부산의 도매 서적에서 구입하면서 책꽂이를 채워나갔다. 이후 광민사 등 서울의 출판사와 점차 거래가 확대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부산에 출장 오면 결재와 함께 도서 출판 경향과 독서 수준, 그리고 시국에 대한 논의도 하였다.
조합원이 되면 출자금은 은행이자보다 높은 수익률(30%)이 돌아가고, 구매에 대한 비례 배당을 통해 기타 서점보다 싸게 사게 되는 것은 물론, 덤으로 부산 문화발전에 든든한 디딤돌이 되고, 그 주인공이 된다고 설명하여 나간 것이다.
조합원으로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합원 2인 이상의 추천과 당시 가입금(2,000원) 및 출자금(매월 1구좌 1,000원 이상)[도판 5. 6]을 받고 가입신청서를 받았다. 매월 그 달에 가입한 조합원 전체 교육은 부평동 소재 새생활수련장, 또는 중부교회에서 실시하였다. 그 내용은 대체로 협동조합 운동의 원리와 역사, 정관해설, 양서란 무엇인가, 대화 및 친교 등 조합원으로서의 자격과 역할 그리고 주체적인 삶의 자세를 일깨우는 교육이었다.
책방에서는 책을 팔되, 없는 것은 주문 받고, 무슨 책을 읽을까 주저하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한 책을 추천해 주었다. 2층 방에서는 여유분의 책을 보관하면서 조합원들의 조직 활성화와 조합원으로서의 보람을 느끼게 하기 위해 소모임을 만들어 활동공간으로 키워 나갔다.
당시 소모임으로는 어학 연구모임(국어ㆍ영어ㆍ일본어ㆍ중국어ㆍ독어ㆍ불어ㆍ한문 등). 지역사회개발 연구모임(사회ㆍ여성ㆍ청소년ㆍ아동ㆍ공해ㆍ농촌ㆍ도시문제). 전문학술 연구모임(일본ㆍ미국ㆍ한국ㆍ중국ㆍ제3세계). 종교 연구모임(기독교ㆍ불교ㆍ천주교ㆍ천도교ㆍ유교ㆍ원시종교). 예술 연구모임(꽃꽂이ㆍ서예ㆍ그림ㆍ문학ㆍ연극ㆍ음악ㆍ사진ㆍ탈춤ㆍ합창ㆍ우표ㆍ등산) 등 의식화 스타디 모임과 취미 모임을 소그룹 별로 만들어 적성에 맞는 곳에서 조합원으로서의 긍지와 보람을 갖게 하였다.
그러던 중 78년 4ㆍ19기념일을 즈음하여 부산대학교에서 시국사건, 소위 건물 벽에 스프레이로 “박정희 물러가라”고 뿌린 페인팅 및 유인물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주인공들이 수사과정에서 중부교회 및 협동서점과 관련된 인맥으로 밝혀지면서 협동서점이 경찰서 정보과에 요주의 책방으로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모이는 대학생들의 그 열정과 분위기가 정보과에 감지되면서 책방을 떠나 장소를 대학가와 그들이 원하는 비밀 장소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면서 각 대학교에 언더 스타디 그룹들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협동서점에서 조합원 중 송세경 설동일 등이 스타디 모임을 이끌어나갔으나 점차 협동서점과는 관계없이 모이게 되고, 그 모임이 누룩처럼 스스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발전해 나갔다. 그러면서 부산대학과 동아대학 등 대학가에서 언더스타디가 자가발전으로 확대되어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이런 흐름을 통해 양서조합에 가입했거나 출입했던 청년들이 뒷날 민주화를 이루는 청년 세력의 모태가 된 것이다. 양서조합이 소위 의식화의 복덕방 역할을 한 것이다.
다음 해(79년)에는 부산양서협동조합은 이렇게 운영되고, 조합원이 되면 이런 혜택을 받는다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이 소책자의 디자인 및 인쇄는 석천문화사에서 했다.
독서주간을 맞이해서는 양서 100권을 철학ㆍ문학ㆍ예술(시ㆍ소설ㆍ수필)ㆍ정치ㆍ경제ㆍ역사ㆍ교육ㆍ아동ㆍ종교ㆍ기타 등 분야 별로 구분하고 선정해, 그 책 제목을 당시 최신 옵셋 부로슈어로 만들어 알렸다. 이 인쇄물 외 조합과 관련된 인쇄물은 당시 인쇄소를 운영하던 박현삼 부조합장이 실비로 때로는 무가로 해주었다.
독서주간을 맞이하여, 그 기간 중 9월 25일에는 제 2차 초청강연회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저자인 소설가 조세희씨를 초청하여 노동자의 관점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 강연도 하였다.
이같은 양서조합의 소문이 전국으로 번지면서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도 내려와 우리들의 그간의 창립과정과 운영방식을 배우고 올라가 양서협동조합을 만들었고, 마산, 대구, 울산, 수원, 그리고 광주와 원주에서도 그리고 기타 지역에서도 만든다는 소문이 들렸다.
책방도 커지면서 보수동 책방의 4평 건물 규모로는 부족하여, 79년 3월 5일에는 좀 더 큰 건물로, 좀 더 큰 거리로(대청동 1가 38번지. 서라벌호텔 입구) 나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합원들도 증가하고 책도 그런대로 팔리면서 책방 운영에 큰 도움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손익 분기점에는 이르지 못했다.
책을 보다 다양하게 소개하고 읽히게 하기 위해 조합원들 중에서 자기 집에 소장하고 있는 추천할만한 양서 5권 이상을 서점에 내놓게 하여 유료 도서관 형태의 운영도 하였다. 즉 조합원이면 대여기간 일주일에 정가의 1/10을 내고 빌려가는 책꽂이 공간도 마련한 것이다.
책방 내에는 <알림판>을 마련하고 그곳에 조합 소식, 신규도서 소개, 그달의 책방운영 실태, 정관 비치 등을 하였다. 특히, 매월 1좌(1,000원) 이상의 출자와 1권 이상의 책을 이용해야 한다는 의무조항과 임원에 대한 선거 및 피선거권과 출자액 및 이용에 대한 이익배당, 그리고 조합 운영에 대한 제안과 이사회의 모든 결의 사항을 통보받는다는 안내와 기타 조합이 베푸는 제반 혜택을 받는다는 권리도 강조하여 조합원으로서의 긍지를 상기시켰다.
또한 조합원이 서점에 오면 매스컴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꼭 알아야 할 시대의 진실과 세상 돌아가는 변화를 ‘~카더라 통신’을 통해서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조합 발전을 위한 그들의 좋은 의견도 받아들였다.
모여진 기금으로는 7월 16일부터 25일 사이에 경남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율림부락(진영우씨 고향)에 농촌 현장 활동 봉사단을 파견하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농촌운동이었다. 며칠 후 시경에서는 이 자료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압수하고 나와 송세경은 연행을 당하여 조사받기도 하였다.
78년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즐거운 추억에 따라, 79년 여름(7~8월)에는 시에 탈의장 운영 신청을 하여 아예 송정 해수욕장에 탈의장을 운영하였다. 협동조합의 상징인 ‘무지개’란 이름을 붙이고 운영하면서 조합원들에게는 실비로 친목과 여가를 선용하게 하였다[도판 11].
포부도 크게 가졌다. 앞으로 양서협동조합은 직영 협동서점(양서보급)을 출발점으로 하여, 직영 출판사(양서출판) 운영, 직영 도서관 건립, 직영 연구소(참문화 창조) 설립, 직영 대학도 세워 우리가 꿈꾸는 참문화를 창달하여 범시민들에게까지 확산시켜 나가자는 장기 마스터플랜도 구상하였다.
그러나 시국은 점차 어두워지면서 정보과 형사들의 서점 방문이 아침에서 아침ㆍ저녁으로, 나아가 불시에 자주 방문하곤 하였다. 책도 독재 정치와 잘못된 역사와 사회 비리를 밝히거나 천민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 책들, 그리고 노동운동과 관련된 책들이 판매 금지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 책들을 몰래 뒤로 팔았다. 우리 책방의 입장에서는 그 같은 책이 진정한 <양서>였고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이다.
11월 16일 강제 해산당하기 직전의 마지막 공식 통계인 9월 30일, 『부마민주항쟁 10주년 자료집』에 의하면 조합원 수는 501명, 출자금은 5,002,000원, 도서 판매액 누계는 12,766,289원으로 나타나 있다. 그 자료집의 자료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아주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어떤 근거에 의하여 발표했을 것이다. 본인의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없어 본인도 이 자료를 참고한 차성환의 『기억과 전망』(2004,가을)에 게재된 논문 내용을 인용했다.
10월에 들어서면서 대학가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협동조합에서는 10월 9일 한글날을 맞이하여 전 조합원 축제를 금정산 산성에서 실시하였다. 이 때의 분위기는 대단한 열기였다. 양서조합원의 의지와 힘과 열정을 축제로 모아 호연지기를 기르면서 시너지로 모인 기를 마음껏 발산하였다. 이 당시 MBC에 근무하던 하수근 조합원의 역할이 컸다고 기억된다. (이 때에 형사들도 우리 몰래 산성 막걸리를 배달하는 사람으로 변장하여 축제 분위기를 정탐하였다는 후문도 들었다.)
이상에서처럼 우리 부산양서조합은 창립이후 꾸준히 양적ㆍ질적으로 성장하면서 당국의 감시와 간섭 속에서도 부산 지역의 양심적 지식인과 민주적 청년 학생들을 결집하여 왔다. 그러다가 1979년 10월 16일, 그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에서 10시경 시작된 교내 시위가 민주항쟁의 불길이 되었다. 순식간에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면서 4,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그 이후 당시 부산대학과 운동장을 운행하던 18, 19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오후에는 애초에 부산역에서 모이기로 했으나 경찰에서 제지하자 당시의 중심가인 중구의 광복동ㆍ남포동ㆍ국제시장ㆍ대청동으로 진출하였고, 동아대도 나중에 합세하였다.
오후 늦게는 회사원ㆍ노동자ㆍ상인ㆍ종업원ㆍ재수생 심지어는 교복 입은 고등학생까지 합세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새벽녘까지 계속되면서 파출소가 파괴되는 등 과격화 양상으로 번졌다. 남포동ㆍ광복동ㆍ국제시장의 상인들은 이들 시위대에게 박수치며 먹을 것을 주기도하고 숨겨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모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가 각본 없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책방에 찾아온 조합원 시위대 학생에게 우리의 목적은 민주화 요구이니 무리하지 말고 몸조심하면서 하라는 정도의 조언을 하였다. 이같은 민중들의 시위 항쟁은 4월 혁명이후 처음이었다.
17일에는 더 많은 파출소와 경남도청, 세무서, KBS, MBC, 부산일보, 심지어 동사무소까지 타격을 입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당시만 해도 시위가 자연발생적이었고 지도부는 없었다. 자연발생적으로 번지고 퍼져나가는 것을 신나는 마음으로 응원하였다. 부마항쟁의 이같은 자연발생적인 시위이후 부터는 지도부가 생기면서 시위도 전술적ㆍ전략적ㆍ조직적ㆍ체계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18일에는 예상했던 대로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군이 진주했지만, 오히려 민주화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면서 마산에서도 검찰청, 법원, 공화당사, 마산 MBC, 파출소 등이 파괴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밤늦게 까지 통행금지 연장이 발표되면서 시위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부마항쟁’이란 역사가 된 것이다. 이 항쟁은 국민들에게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궤변으로 박정희 종신 독재체제를 일방적으로 공개적으로 공식화하려는 유신 통치 체제에 대한 거부를 몸으로 나타낸 민중들의 거대한 함성이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힘찬 축제였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1980년 1월 28일 항소이유보충서를 통해 부마항쟁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한겨레21』52면(제782호, 2009.10.26)].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봉기로서, (중략)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 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당시 국가의 정보를 책임진 자가 부마항쟁이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 없는 순수한 일반시민에 의한 민주항쟁이라고 가장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는 <항소이유보충서>에다 고백했다.
이같은 중앙정보부장의 보고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역정을 내며, “앞으로 부산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하자마자 차지철 비서실장이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정도 죽인다고 까딱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같은 <항소이유보충서>에 쓰여져 있다.
불안한 사회적 상황이 지속되는 소강상태에서 10월 26일 밤, 이같은 권력 내부의 갈등이 드러나면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부산ㆍ마산에서 다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같은 비상계엄하에서 계엄 당국은 11월 19일 협동서점의 이사회의를 강제로 열도록 이사장에게 압력을 가한 후, 그 회의에 정보부 파견자를 배석시켰다. 회의 중에 해산 결의를 발제자가 반대하자 배석자는 신상에 좋지 않다는 언질까지 하였다. 그런 공포분위기 속에서 해산 결의를 결정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본인은 국세청에서 파견된 조사관으로부터 협동서점 운영에서 회계상의 비리 여부 확인을 위한 장부까지 꼼꼼하게 조사받았다.
해산이 결정된 후 전후 사정을 설명한 편지와 함께 반품할 책을 각 출판사와 도매상에 보냈다. 몇몇 곳은 결제도 해 주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 출판사에 대해서는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다.
양협의 조합원은 기독교와 가톨릭 중심의 한계를 넘어 교사ㆍ회사원ㆍ주부ㆍ일반시민 등 폭넓은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현재의 조합원은 (내 기억으로는 600명이 넘는 것으로 생각됨) 572명에 이르렀고, 그 출자금이 700만원이 넘고, 운영도 손익 분깃점에 도달하는 희망의 시기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3. 해산 이후
부마항쟁과 직ㆍ간접적으로 관련되었다고 그들이 눈도장 찍은 민주인사들을 계엄을 선포한 18일 이후 대공분실에 데려가 강도 높은 수사를 하였다. 그러던 중,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지면서 “산 박정희에 의해 잡혀간 인물들이 죽은 박정희 덕택에 살아나오게 되었다.”
이후 신군부인 전두환 5공 세력은 1980년 5ㆍ18 광주 민주항쟁을 학살로 정권을 탈취한 뒤 불안한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적인 수사를 준비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같은 살벌한 시대에 무직으로 있는 것보다는 공신력있는 안정된 직장에 취직해 있는 것이 신변상 그래도 안전하다는 주위의 권고와 판단에 따라 대연여중(현, 해연중)의 선생이 되었다.
예상대로 전두환 정권은 부마항쟁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생각한 양서협동조합의 주요 인물들과 부마항쟁 당시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 인물들을 뿌리 뽑기 위해 1981년 6월부터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그것이 이후 시나리오로 조작하여 강제로 만든《부림사건》이었다. 아무런 사건도 일으킨 일이 없는 민주화 세력을 반국가 조직인양 좌파로 몰아 운동권으로의 형성을 미리 차단한 싹쓸이였다.
그것은 당시 우리 사건 외에도 광주의 횃불회 사건, 공주의 금강회 사건, 대전의 아람회 사건 등이 같은 시기에 전국에서 만들어진 사실, 그리고 동일한 수사 방식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조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대법원의 재심판결 결정에서 알 수 있다.
(어쨌든 본인은 81년 8월 1일 잠간만 조사받으면 된다는 감언이설에 영장없이 임의동행되었다가 부림사건으로 1심에서 7년 구형에 3년 6월 언도를, 2심에서는 2년 6월 언도를 받고 상고했지만 대법원에서는 기각되었다. 그래서 2년을 복역한 후 1983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8월 13일 출소하였다. 최근 다른 유사한 사건들은 국가보안법까지 재심판결을 받았는데, 우리 사건은 국가보안법은 제외된 채 재심을 받게 되어 형이 2년 6월에서 1년으로 감형된 상태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지금은 기한이 없어졌지만- 대학원 논문 쓰는 기한도 감옥에서 넘기게 되었다.)
이후 변호인단이 꾸려지면서 새로운 분위기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노무현 변호사같은 새로운 인물들이 보강되었고,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이 터지면서 반정부 운동은 파쇼군사독재에 대해 공개적으로 더욱 치열하게 저항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민주화 투쟁은 점점 고양되고 전국화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1차와 2차로 모두 16명이 연행되었다가 통닭구이 등 갖은 고문으로 조작되어 부림사건이란 이름으로 재판을 받게 되자, 이를 계기로 서로 몰랐던 가족들이 만나게 되고 구명운동을 함께 하게 되면서 관계가 친척처럼 가족처럼 변해갔다. 그러면서 “구속자 석방하라”는 호소문과 경찰서 앞에서의 시위, 법정 마당에서 현수막 항의,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 등을 하면서 민주화실천가족 모임이 되었다. 이 모임을 앞장서서 이끌고 활동한 사람은 ‘아우성’으로 유명해진 송세경의 부인인 구성애와 최준영의 부인인 홍젬마였다. 그 후 이 모임은 <전국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와 연대도 이루어졌다.
또한 모든 운동을 내재했던 부산양서협동조합이 강제 해산당하면서 부산에서는 각기 노동, 빈민, 공해 등, 전문 운동권 단체로 분화되면서 발전해 나갔다. 예로 공해문제연구소에서 시작된 부산환경운동연합도 그 운동선상을 이으면서 나타났다. 이처럼 양서협동조합은 민주화 운동이 각각의 운동권으로 커 나가는데 자궁 역할을, 못자리 역할을, 중개소 역할을 한 것이다.
양서협동조합은 비록 강제로 해산 당했지만 그 정신은 길게 이어지고 있다. 해산이후 양서조합을 아끼고 사랑하던 조합원들이 보수동에 있던 애린유스호스텔에서 금요일마다 모여 스타디를 하면서 재기를 위한 기회를 기다렸다. 하지만 여의치 않아 개인적인 만남으로 지금까지 지속하면서 진보 성향의 각 사회 단체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대학가에는 사회과학 서점의 번창으로, 88년부터 각 지역에서는 양서조합의 변형인 지역사회 개발을 목적으로 한 도서원 운동으로 번져가기도 하였다.
같은 부림사건의 담당자인 전중근이 처음으로 만든 아롬도서원은 서면 부전동 시장 입구에 있었고, 이어 햇살ㆍ광장ㆍ늘푸른 도서원 등이 생겨났다. 이들 도서원은 주로 지역 주민 및 대학생, 특히 노동자들을 위한 의식화에 나름대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환경과 참교육 등의 운동에 주부들이 앞장 서게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얼마 가지 못하고 말았다. 시스템에 자가발전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4. 평가 및 제언
동양권 대부분의 나라가 세계 역사의 이정표 중에서 유럽의 역사에 가장 부러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신(神) 중심의 문화를 인간(人間) 중심의 문화로 새로운 문화의 신기원을 일으킨 르네상스다.
197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유신독재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서슬퍼런 “긴급조치 9호”라는 법아닌 법으로 인권을 탄압하던 시대여서 민주화 요구는 입에 담을 수도 없었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래서 양서협동조합도 책을 매개로 한 문화운동으로 출발하였다. 우리식의 르네상스를 꿈꾸면서…
그러나 시대가 암울한 독재시대이다 보니, 사막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신기루가 더 아름답게 보이고 오아시스가 더 그리워지듯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심전심은 지하의 물처럼 교회 청년회에서 시민 사회단체에서 대학가에서 서로를 부르고, 찾고, 만나고자하는 분위기가 긴 잠에서 깨어나면서 스스로 형성되었다.
그 즈음에 몇몇 기독청년을 중심으로 이같은 만남의 장을 종합적으로 이룬 곳이 지금까지 설명한, 세계 최초(?)의《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이었다. 이《양서협동조합》에서 ‘협동서점’을 설립하자마자 좋은 책을 사랑하는 부산 시민들이 조합원으로 모이게 되었고 진리를 추구하게 되면서 시대의 모순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일반 시민들의 지적 호기심에 가장 알맞은 <양서(良書)>라는 책과 경제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새로운 사회 창출의 힘을 시스템으로 내재한 <협동조합>이라는 조직이 환상의 콤비로 결합되면서, 시대적으로는 가장 비민주적인 유신 독재체제와 적대적으로 타이밍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양서조합은 유신체제하에서 거미줄같은 감시망과 독재 권력이 심어준 공포감으로 인해 민주화 운동과 단절돼 있던 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이 만나는 합법적인 공간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시행한 조합원 교육, 조합원 내부의 소모임, 외적인 공개 강연 등은 성격상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시켰고, 나아가 내부로 퍼진 의식화 교육을 통해서 민주화 운동을 일으키는 발화점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 깨우침은 협동조합 정신을 통해 소모임으로 서로의 생각을 소통ㆍ순환ㆍ공유하게 되면서 분산된 의식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진리를 향한 쓰나미 기운이 양서조합을 통해 대학가와 기독청년회에 조성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쓰나미는 어느 날 성경에 “믿음ㆍ소망ㆍ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처럼, 당대의 시대정신에서는 ‘경제성장ㆍ문화창달ㆍ민주화, 그 중에 제일은 민주화’라는 분위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이 부마항쟁이었다. 애초에 목표삼은 르네상스적 성격의 민족 문화 창달은 정치적 민주화라는 시대적 당면 과제를 긴급하게 맞게 되면서 우선 순위에서 역사적으로 뒤로 밀린 것이다.
부마항쟁이 촉발된 외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8월 11일의 YH사건과 10월 4일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결의안이 기폭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이 같은 분위기를 타고 항쟁으로 추동해 낸 그 내재적인 힘은 직ㆍ간접적으로 양서협동조합의 영향이 컸다.
4ㆍ19의 정신을 이은 이 자유ㆍ평등ㆍ정의의 정신을 내포한 부산ㆍ마산 항쟁은 이후 민주주의 역사에서 핵분열처럼 퍼지고 번지면서 5ㆍ18 광주항쟁(1980) → 6ㆍ10 전국 항쟁(1987) → 군정 종식(1993) → 국민의 정부(1998) → 참여 정부(2003)로 확대되고 업그레이드되면서 미완의 벽을 넘어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뿌리내린 오늘의 <정치적> 민주주의의 성과를 이루어 냈다. 양서조합은 비록 강제 해산 당했지만, 민주주의 씨앗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 한 것이다.
군정 종식이후 사회는 형식적 민주화에서 보다 내용적인 민주화를 담아내기 위해 진보성향의 시민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체제 중심의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내용 중심의 <사회적> 민주주의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노력이 정치(참여자치 등), 경제(경실련 등), 환경(환경운동연합 등), 여성(여성유권자연맹 등) 등 사회의 각 분야에서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는데, 부산에서는 그 중요 인맥들이 양서조합과 직ㆍ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었다.
• 그러나 아쉬운 점은 <경제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협동조합정신은 협동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민주주의를 담고 있다. 성장과 더불어 분배를 강조하고, 사치보다는 절제를 우선시하고, 자유보다는 자율을 선택하고 풍요보다는 청빈을 사랑하는 정신이다. 이 정신이 토착화될 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이루는 진정한 선진 사회가 될 것이다.
특히 아쉬운 것은 협동조합 정신의 기저인,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10ㆍ26 계엄하에 강제 해산 당하면서《양서협동조합》의 우리식 문화 창달 정신은 싹 트다가 무지막지한 불도저에 의해 파헤쳐지면서 거덜나고 말았다. 미완의 르네상스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다면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족문화의 꽃을 활짝 피워 냈을 것이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이룬 지금에 와서 그 시대정신은 자연스럽게 또한 당연히 지속가능한 환경과 문화창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30년 전 부산에서 시작되어 새로운 문화의 신기원을 꿈으로 품으며 서울ㆍ마산ㆍ대구ㆍ울산ㆍ원주ㆍ광주 등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가던 그 한국판 르네상스의 아름다운 싹이 아쉬워진다. 오늘의 시대에 맞게 어떻게 재기할 것인가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양서협동조합>은 유신체제 말기의 짧은 기간에 존속해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잔혹하게 진압된 광주 민주 항쟁의 그늘에 가려서인지, 아니면 YS의 삼당 야합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동안 민주화 운동사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관련 자료도 당국의 탄압으로 압수되어 희미한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다.
87년 6월 항쟁이 없었더라면 노태우 전 대통령의 6ㆍ29선언이 나올 수 없었듯이, 부마항쟁 없이 10ㆍ26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마항쟁은 지금까지 평가절하되고 있고, 그에 따라 양서조합의 역할도 묻혀있다. 이번 부마항쟁 30주년을 맞이하면서 역사적으로 새롭게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지금 생각해도 수많은 단체에서의 활동 중 이보다 아름다운 인간관계, 의미있는 활동, 보람있었던 경험은 지금까지 없었다. 생떽쥐베리의 말대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그러나 얼마나 더 많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짝이고 있을까?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별들을 찾아야 한다”라고 얘기했듯이, 우리는 민주주의를 찾았으니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진리의 역사를 자유ㆍ평등ㆍ복지, 나아가 환경과 생태 속에서 새롭게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기(氣)를 넣어주고, 잠재능력을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나아가 인류의 염원이 담긴 객관적이고도 주체적인 세계문화를 창달하는 인재들을 오늘의 시대에 맞는 신(新) 양서조합운동으로 형성해 내는 일이다. 이번의 재조명을 통해 탄력을 받아 600 여년 전 유럽에서 있었던 휴머니즘을 ‘생태-휴머니즘’으로 넘어서는 신르네상스 운동이《신양서협동조합》을 통해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더 나아가 세계 100만 이상이 넘는 도시마다 생겨나 생태-휴머니즘을 위한 월드훼스티벌도 동시에 함께 해보는 꿈도 꾸어 본다.
그런데 부마항쟁 30주년을 맞이하여 <(사단법인)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서 양서협동조합의 정신을 싹으로 다시 키우기 위해 (가칭) <민주시민교육센터>를 설립한다고 한다. 매우 뜻깊은 사업이다. 그러나 이 명칭에 대해 2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민주’라는 단어이다. 그 이름이 이제는 시대적으로 한물 간 구태의연한 이름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에는 미래지향적인 비전이 약하다. 앞으로의 민주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생태-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적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명칭에는 문화적인 관점에서 시민의 정서와 눈높이에 일치하는 희망이 반짝이는 이름이어야 한다.
둘째로는 그 이름에 궁극적인 호기심을 일깨워주는 목표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는 신명나는 행동으로, 역동적인 삶으로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주는 시스템이 그 명칭 속에 내재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파리 날리는 건물로 박제화될 것이다.
시작할 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어쨌든 양서협동조합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번 기회를 통해 ‘생태-휴머니즘’을 염원하는 모든 단체와 시민들이 다시 뭉쳤으면 좋겠다. 아직도 할 일 많은 나라 할 일 많은 시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