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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도올10강은 어버이날 특집으로 시작합니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라난다.
일일 게스트로 박 수현(학생, 국제문화, 차 문화 전공)양이 나왔고 중국의 술 문화에 대해
이놈 저놈 준비해온 썰을 풀어댑니다. “육포는 알 콜의 친구”, 중국에서 나오는 술
종류만 4500가지가 된다는데 그중 “마오따이”주는 중국의 대표적인 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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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담을 뛰어넘을 정도로 향이 좋다는 마오따이 술은 장정으로 지친 모택동의 홍군을
맞이하기 위해 마오따이 시에서 술을 담그면서 유명해졌고 그 후로 닉슨과 주은래가 만났을
때(1972) 선물을 준 후 오바마도 가져간 모양입니다. 일일게스트가 “차곡차곡“의
유래에 대해 말해줬는데 차-술-차-술을 교대로 마시기 시작하면서 “차곡차곡“이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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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겼다나 봐요. 지난주와 같은 복장으로 나온 도올 샘이 오늘은 기필코 장 학령의 일대기를
끝마치고야 말겠답니다. 탁월한 전술과 전략으로 동북 평정에 나선 장 학령은 근대 중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서안사변‘을 주도하기까지 파란만장한 롤러코스터 인생사가 공개됩니다.
장 학량을 보면서 국민과 더불어 소통하는 통 큰 리더십이 왜 우리나라는 없을까 심이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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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젊은이들이여, 나를 밟고 가거라!
아버지 장 작림의 나와바리이었던 동북삼성은 20세기 가장 풍요로운 도시입니다.
동북삼성의 총 사령관이 된 장학량이 총사령관인 장개석의 명령으로 퇴각할 때 “정주”에
비축해 놓은 엄청난 군수품을 불태우지 않고 퇴각하였습니다. 그대로 남아있던 군량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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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며 적진의 백숭희가 쾌재를 부르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답니다.
“내가 다리를 폭파하지 않은 것은 전 인민과 국가의 자산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전리품이라 생각하지 말고 빈민들의 구호품으로 사용해 달라. 우리는 형제며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통 큰 지도자 장 학령은 나이도 어린놈이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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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짝. 짝. 나도 이 친구의 호연지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오늘의 포커스 강의인 송미령과
장학령의 핑크빛 러브스토리는 1925년 5.30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본부(상해)에서
진압 조정을 위해 동북 군을 요청하자 장학량이 파티에 참석합니다. 이 파티에서 장학량을
처음 본 송미령이 장 학령을 마음속으로 점찍어 놓았는데 이심전심으로 장학량도 송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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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기자회견 통역을 부탁합니다. 그렇잖아도 호감이 갔던 장 학령의 연설은 송미령의
눈에 볼 매가 아닙니까? “나는 이들을 진압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조적 부패를 개선해야
한다.” 통역하다가Fall in love 되어버린 케이스입니다. 이들의 케미가 어디까지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송미령의 마음속에 정인으로 각인 시킨 것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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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결혼은 장 개석과 했지만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학령이 삐라 작전으로 (“장가인은
절대 장가 인을 죽이지 않는다.”) 곽 송령의 도가를 진압하고 개선장군이 된 학령은
변사체로 돌아다니던 스승의 시신을 애통하면서 “우리 스승의 실수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했으며 통 큰 지도자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스승의 도가를 아버지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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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하고 곽 송령의 유지를 받들어 동북으로 돌아가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간 것입니다.
동북으로 가는 도중에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여 아버지 장작림이 열차사고로 죽습니다.
1928년 6.4. 만주로 장쭤린(장작림)을 태운 특별열차가 오전 5시 23분에 봉천근교 황고둔의
경봉선(북경-봉천노선)의 교차점 부근을 통과할 때 철로에 끼워져 있던 황색화약이 폭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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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9호 귀빈차를 포함한 4량이 대파되고 2량이 불탐). 이때 장작림은 중상을 입고
수 시간에 걸쳐 봉천시내에 있는 병원에 당도했으나 곧 숨지고 말았는데 이 때 경비를
포함한 예하 17명이 같이 사망했습니다. 이것이 친일 친미로 양다리를 걸쳤던 아버지 장
작림의 최후입니다.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지 14일 만에 거지차림으로 나타난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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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학령은 철저한 항일의식을 곱씹습니다. 저는 장 학령이 서안사변을 작심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바야흐로 역치의 물결을 타고 100만 대군의 전쟁인
중원대전이 일어나면서 몸값이 높았던 장 학령(공군기270대, 30만 정예군, 민병대15만,
all사관학교 출신)은 모든 군벌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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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 끝에 장 학령은 군벌 종식을 위하여 장 개석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로컬사령관이 아닌 전군의 총부사령관이 된 장 학령이 남경 환송식을 하였는데 환영식
장에 나온 송미령과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롱타임노씨!” 이들의 눈빛교환에 질투를
느낀 장 개석은 맨-붕이 왔는데 이후 죽을 때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거 참 기분 더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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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나와바리 북경은 최고입니다. 인기. 가오, 연인, 없는 것 빼고 다 있습니다.
“이것이 뭐다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장 개석의 의도적으로 연출한 고도의 견제 술입니다.
그리고 1931.9.18.장 학령을 수렁으로 떨어뜨리는 역사적 수치의 사이렌 소리를 듣게 됩니다.
“9.18사변”이 발생된 저녁에 장 학량은 남경의 국민당정부에 지시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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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에서 동북 군에 부저항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 동안에 장학량은 의연히
부저항주의를 견지했습니다. 이에 대해 장학량은 여러 장소에서 모두 사실대로 경과를 설명
했으며 개인의 책임을 담당했습니다. 나중에 1945년 8월에 항전이 승리한 후 장학량은
동북의 백성들이 자신을 열정적으로 대하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되어 다음과 같은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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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에 씁니다. “1946년 1월 3일. 오늘 아침에는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고 이런저런
잡생각을 했다. 동북인민들이 나를 열정적으로 맞아주는 것을 보고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었다. 항전에 대해 말하면 나는 아무런 공헌도 없었다. 동북에 있을 때 나는 지방을
위해 좋은 일을 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한뜻으로 중앙을 옹호하고 중앙에 의뢰하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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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로 문제가 생기게 되였고 로씨야와 맹목적으로 싸웠다. ‘9.18사변’에 대해서도 잘못
판단하고 잘못 대응했기에 부저항을 선택하게 되였으며 동북 동포들이 14년 동안이나
도탄 속에 허덕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였다. 오늘 그런 나를 열정적으로 환영하는 그들을
보고 나는 매우 고통스러웠다.”장학량은 이 일기에서 “잘못 판단하고 잘못 대처했기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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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선택을 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밀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장 개석의 부저항 명령으로 장학령의 동북 군30만이 일본군에게 점령을 당합니다.
당덕강이 “우리는 50여차래 부저항명령은 모두 장 개석이 당신에게 내린 명령한 것이라고
들어왔습니다.”라고 언급했을 때도 장 학량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는 중앙의 일이
아니고 장 개석이 내린 명령도 아닙니다. 다 내가 내린 명령이었습니다. 부저항은 장 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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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는 관계가 없습니다.”라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밀지 않았습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장 개석의 입장은 장 학량을 견제하기 위해 동북을 일본에게 넘겨줄
심산이었습니다. 장학량의 오판 배경가운데 하나는 당시 장학량이 아편 중독이었다고 합니다.
장학량의 여자들은 송미령 외에도 뭇솔리니의 딸 에다 같은 거물급들이었기 때문에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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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들이면 국제 분쟁을 촉발할 만한 위험한 일이었는데 통 큰 장학량은 에다를 사귑니다.
그리고 그들의 데이트를 송미령이 알게 됩니다. 이 일로 장 개석은 눈에 가시인 장학량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벼랑 끝으로 추락하는 장 학량이 미국의사를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이 일로 온 몸의 살갗이 없는 것 같은 혹독한 고통을 참으면서 와신상담하던 학령이 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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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까지 아편을 하지 않았답니다(실제로 학령은101세까지 장수).
치료에 성공한 장학량은 부인 에다와 함께 처가살이를 하면서 유럽의 민족주의를 배웁니다.
모세가 게르솜에서 40년을 처가살이한 후에 출애굽을 결심한 것과 비슷합니다.
한편 국민당의 위초 작전은 국민당 내부의 반발을 초래했는데 궁지에 몰린 장 개석이 유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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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령을 호출하고 섬서 성이 있는 서안의 서북 초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장정사건이
일어난 것이지요. 항일의식으로 와신상담하던 학령은 발톱을 숨기고 서북토비 사령관을 수락
하면서 공산당이었던 주 은래 모택동에게서 중국의 비천을 걸게 됩니다.
장 개석 입장에서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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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령의 동선을 관찰하던 장 개석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기차는 이미 떠난 상태입니다.
“공산당 박멸이 내소신이다“며 무력으로 학생을 진압하던 장 개석의 만행은 급기야 서안사변
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광주 항쟁 때 애국가를 신호로 m16을 발사했던 전 두환처럼 ‘까불면
기관총으로 갈겨버리라“는 장 개석은 반드시 역사가 재평가해야 한다는 도올 샘에 말에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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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보스의 악행을 벼르던 학령이 기회가 오자 장 개석을 납치 구금하여 강제로
국공합작(국민당과 공산당 힘을 합치는)을 성립시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한 것입니다.
범 새끼를 데려와 잡혀 먹힌 장개석은 자업자득입니다. 학령이 장 개석을 죽이지 않고 감금
시킨 이유는 장 개석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인데 군벌시대가 컴백할 것을 염려하여 국공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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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중국 전역의 언론들이 집중 된 가운데 국공합작을 하였는데 협상 테이
블에 주 은래(공산당)와 송미령(국민당)이 참석합니다. 학령이 국공합작 전에 옛 연인이었던
송미령에게 편지를 보내 절대 당신 부군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 나 봐요. 하여간 이렇게
국공합작을 만들어낸 장 학량의 병법은 중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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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중국 공산당은 개인의 안위보다 대의를 위해 싸운 위대한 스토리들이 중국 곳곳에
박혀 있으니 이젠 한국에도 장 학량 이상의 리더 급들이 나와야한다는 도올 샘의 주장입니다.
오늘이 “어머니 날“이라고 노래를 부르자고 합니다. 어머니 은혜는 자칭 천재 양 주동 박사가
지은 가사입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하늘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어머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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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은 가히 없어라./“ 언제 들어도 부를 때마다 가슴이 저리는 것은 나도 모를 한이 서려
있는 것이지요. 도올 샘이 말하는 효란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마음”이랍니다.
부모는 무엇보다 자식이 아프지 않는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세월 호 사건으로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어머니들의 아픈 기억이 봄이면 떠오릅니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사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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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샅샅이 밝히는 것만이 새로운 시대의사명입니다. 고구려의 호연지기를 위해 푸시 업을
한번 하고 다시 어머니 마음 2절을 부릅니다. “어려선 안고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선 문기대어 기다리는 맘/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생각에/고우시던 이마위에 주름이 가득/땅위에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어머님의 정성은 그지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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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부르면서 오늘 배운 중국 역사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중국역사는 중요한 세 가지 흐름 장 개석, 장 학량, 모택동이 함께 만드는 현대판 삼국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안사변 이전의 동아시아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을 개시하고 있었고 중국은 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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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국공내전이라 불리는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치열한 내전이 전개되고 있었지요.
또한 한국은 1910년 일본에게 강제 합병된 이후 항일 독립 세력이 중국 도처에서 항일투쟁을
하면서 노선갈등으로 분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중국 국민당은 선초공후항일 이라는
정책(먼저 공산당을 섬멸한 후 뒤에 일본에 대항을 하겠다는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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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정부는 1930년부터 33년까지 5차에 걸쳐 90만의 병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공산당
섬멸 작전으로 서금을 근거로 하는 강서성 호남성 광동성 지역의 중국 공산군을 불모의 서북
변경 연안까지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장 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전 병력의 50%를
동원해 공산당을 공격하는 동안 일본은 만주를 점령해 버렸고(1931년) 연안에 웅거한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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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소탕하기 위해 6000마일이나 되는 전선을 구축하는 동안 화북과 황하이북 지방을 중국군
의 저항다운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장 개석과 국민당 정부는
점점 민중의 반발을 받게 되었고 만주와 황하이북의 영토를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내 맡기고
공산당과의 내란에만 몰두하는 정부에 대한 즉각적인 항일전에서의 일치단결을 요구받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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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습니다. 1935년 12월 9일 중국 천안문 광장에 모인 중국 청년과 학생들은 내전중단과
항일항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이듬해 2월에는 장 학량이 교장으로 있던 동북대학의
학생들이 북평에서 같은 주장을 하면서 시위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 개석은 이러한
민중들의 염원을 묵살하고 오직 공산당의 섬멸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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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학량의 동북군은 일본에 의해 그 근거지인 만주지방에서 쫓겨나 서북지방에 이동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35년 10월 장 개석에 의해 서안에 배치가 되었지요. 물론 이는 모택동
의 중국 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동북군의 병사들은 대부분 만주태생으로
일본에 의해 고향을 빼앗긴데 대해 강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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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항일공동전선 주장에 동감하고 공산당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장학량 자신도 그의 선친이었던 장 작림이 일본군에게 폭사당한 뒤 강한 반일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서안 사변은 통 큰 2 인자의 목숨을 건 한판이었지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이다“
2016.5.10.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