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로 된 안채와 초가로 된 사랑채와 새사랑채의 모습입니다. 저희들이 어릴 적, 방학 때 놀러갈 때는 세 채 모두 기와였는데 문화재로 지정되어 복원하면서 원래 초가였으므로 초가로 복원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복원의 기본 원칙이라고 하네요. 알고보니 원래 초가인 것을 저희 종증조부님께서 일제시대 때 기와를 얹어서 사용하셨다더군요. 저 초가는 매년 성주군청에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다시 초가를 이어줍니다. 지금 다시 이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퇴색된 색으로 보여주고 있네요. 건물마다 보이는 저 소화기는 한옥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군에서 거의 해마다 지급하여 집집마다 건물마다 몇 개씩 놓여져있습니다. 특히 남대문 화재 이후는 집안에 화재경보기까지 모두 설치되어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원래 행랑채가 있었다던 자리인데 지금은 건물은 없습니다. 보이는 건물은 사랑채 전경입니다. 까치밥 감이 이 사진에는 달려있는데 제가 지난 주 가서 저 나무의 감은 다 따고 지금은 없답니다.^^ 지난 주에 가서 은행을 털고 너무 위로 자라서 은행따기에 힘들어서 나무를 3분의 2를 자르느라 이런 일을 안 해본 저희 신랑은 몇일동안 몸살을 했지요.
한개마을은 다른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집집마다 소나무를 키우는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감댁(북비고택) 안채 뜰에서 열심히 설명을 듣는 관광객입니다. 원래 설명을 제대로 하시는 문화해설사가 한개마을에는 두 분이 상주해 계시나 이 날따라 공교롭게도 모두 안 계셔서 마을의 사무국장인 저희 집안 아저씨(학렬로는 아저씨지만 사실은 오빠나이입니다.)께서 설명을 해 주셨는데 아무래도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좀 부족하게 느껴지더군요.
유명한 북비입니다. 옛날부터 북쪽으로는 문을 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사도세자의 죽음에 휘말려 그의 죽음에 유일하게 대항하다가 영조에게 찍혀서 벼슬을 관두고 내려온 이석문(북비공. 임금이 내리신 칭호라고 들었습니다.)이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문을 내어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고 하여 유명하며 후일 왕위를 이은 정조대왕께서 북비공의 후손이 벼슬에 오르자 친히 부르시어 '너희집에 아직도 북비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대감댁의 사랑채 일부분이고 정면에 보이는 문이 바로 솟을대문입니다. 솟을대문은 돈이 있다고 아무나 세울 수 없었고 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해야 세울 수 있었으며 특징은 말을 타고 드나들 수 있도록 가로지르는 문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문이 더 위로 솟아있기도 합니다. 대감댁은 퇴계나 서애처럼 불천위제사를 모시고 있는 집입니다. 불천위제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명실공히 국가가 인정한 명문집안이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하네요.
대감댁 안채에 있는 장독대의 모습입니다. 훼밀리가 떴다에서 김원희의 구박을 받으며 이효리가 저 장독대옆 수돗가에서 나물을 씼었고 훼밀리 식구들이 이 집에서 잠을 잤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문이 바로 안채에 붙어있는 부엌문입니다. 장독대와 소나무가 제법 잘 어울리네요. 봄에 가면 저 소나무 아래의 관목들은 바로 철쭉으로 갖가지 색으로 예쁘게 피어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연출합니다.
북비고택안에서 찍은 사진인데 대감댁 사랑채의 난간이 조금 보입니다. 기와와 돌담과 나무대문. 이 3박자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듯합니다. 고색창연하면서 위풍당당한 한 옛모습아래에 퇴락한 가을꽃이 마지막 서러운 가을을 보여주네요.
월곡댁 집안의 모습입니다. 마치 골목을 사이에 둔 세 개의 집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한 집입니다. 왼쪽 모습이 사랑채이고 중간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의 모습이며 오른쪽이 별당입니다. 저 별당에는 주로 첩이 기거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집은 만석을 한 집으로 대대손손 막강한 부를 자랑했지만 후손이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재산을 모두 다 가지기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언덕인 지형을 이용하여 집안에 높은 축대를 쌓은 것이 특색으로 안채도 이중으로된 높은 축대가 쌓여있습니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색은 바로 이 축대입니다.
월곡댁의 사랑채모습입니다. 사람이 살지않는 표시가 확연히 드러나네요. 안채에는 사람이 기거합니다만 사랑채는 오래전부터 비어있습니다. 고가인데도 불구하고 나무들이 검은색이 아닌 이유는 지은지 얼마 안 되어서가 아니고 오랜세월 불에 그을려서 검게된 것을 최근에 복원하면서 목수가 나무를 깎았기 때문입니다. 한개마을은 대부분 민가에서는 보기 어려운 둥근기둥(원주)을 사용하였다는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사각으로 된 기둥을 가진 집들도 몇 있습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에는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르신 동곽할아버지가 사랑채를 지키고 계셔서 마을에서는 동곽댁이라고 불리웠던, 그러나 보편적인 칭호는 한주종택이라 불리우는 종갓집의 후원에 있는 정자입니다. 휘어진 소나무가 일품인 곳으로 관광객들이 오시면 자연과 인공의 멋진 조화에 가장 탄성을 지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김희선이 주연한 춘향전을 찍은 장소이기도 한데 월매집으로 사용되어 당시 한개마을의 깐깐한 할아버지들(지금은 거의 다 돌아가셨지만...)께서 분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현판만 보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을 기생집인 월매집으로 사용했으니...그럴만도 했지요?
정자 왼쪽의 연못입니다. 지금은 돌보는 이가 없어서 연못의 물이 자꾸만 썪어서 물을 뺐는데 바로 몇 년 전만해도 물이 차 있었던 곳인데 물이 있을 때가 당연히 훨씬 더 보기 좋았답니다. 종택답게 가장 산아래에 위치합니다. 예로부터 종가 위로는 아랫집들이 오르지 못한다고 하지요. 휘어진 여러 그루의 소나무들이 멋진 자태를 뽐내는 곳입니다.
아래사진은 이 후원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휘어진 소나무가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은 나오네요. 역시 소나무는 우리나라의 집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극와고택의 사랑채입니다. 이 곳 역시 저희집과 마찬가지로 당시 세도를 누리던 반가로는 보기 힘든 초가로 된 사랑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로 서민들이 살던 아랫마을과의 조화를 위해서 몇 채 정도는 일부러 초가를 얹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집에 가시면 사랑채 앞의 작은 연못(지금은 물은 없어요.)과 그 연못 옆의 돌로 된 도랑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교리댁의 멋진 사당앞입니다. 사당 앞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여름엔 배롱나무와 나리꽃이 예쁘게 피어있어서 어린 시절 제 어린 눈에도 멋지게 보였던 곳입니다. 가을이 되니 보라색 구절초가 처연하게 피어있네요.
교리댁(홍문관 교리)의 행랑채앞에 있는 하마석(말에서 내리는 돌)앞입니다. 설명을 듣지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돌입니다. 하얀옷을 멋있게 차려입고 오신 관광객 한 분이 하마석을 열심히 살펴보고 계시네요.
교리댁의 유명한 탱자나무입니다. 제주목사를 지내신 분(제가 성함을 찾아봐야해서...죄송. 저희 아버지께 혼날라.)이 제주도에서 오렌지나무를 가져와 심었는데 기후가 맞지않아 탱자가 된 나무(이러한 고사성어가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네요. 혹시 아시는 분?)이기도 한데 저렇게 큰 탱자나무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왼쪽에 조금 보이는 건물이 교리댁의 사랑채이고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입니다. 한개마을에서 건물의 규모와 집터(2700평)가 가장 큰집이기도 합니다.
패밀리가 떴다에 소개되었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담이 교리댁담이고 오른쪽 고목 아래가 대감댁이며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월곡댁대문입니다.
북비공 이석문 비석입니다.
비석앞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는 관광객들입니다.
한개마을은 우리나라에서 7번째로 지정된 민속마을입니다.
영취산이라는 산아래에 위치하며 마을앞에 큰 내를 가지고 있어서 한개(큰나루라는 뜻입니다.)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나루가 아주 컸다고 합니다. 영취산이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마을을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며 영남 최고의 배산임수의 길지라고 평해지는 곳입니다.
충청도 황간에서 머~~언 한개로 시집오신 것에 평생 자부심(당시에는 한개로 시집오거나 한개출신 며느리를 맞은 집들은 자랑거리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한개로 시집온 며느리들은 그 법도가 너무 엄하여 평생 고생을 하고 살고 한개서 시집간 딸들은 평생 대우받으면서 잘 산다는 말이 비공식적으로 전해집니다. 바로 제가 잘 산다는그 한개딸네입니다.^^)을 가지고 사신 저희 할머니(남효온의 자손이라고 늘 강조하셨답니다.)께서 살아계실 때 늘 하시던 말씀이 '영남에 유명한 양반고을이 셋 있는데 그 첫 째는 하회이고 그 둘 째는 한개이고 셋 째는 양동이다.'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할머니의 입장에서 당연 한개를 더 우위에 두었는가 싶었는데 오래 전 인터넷을 뒤져보니 '첫 째는 요지부동의 하회인 것은 확실하고 둘 째는 혹자는 양동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한개라고도 한다'라고 하는 말이 있긴 하더군요. 할머니의 말씀을 들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조금 철이 들면서 아무래도 마을의 규모로 볼 때는 한개보다는 양동이 더 우위지...라고 생각했는데...마을의 규모로만 볼 때는 양동이 한개보다 더 크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양동은 손씨와 이씨의 두 개 성씨가 이루어낸 마을이니 그렇게 평하는 것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여하튼 한개마을은 영남의 세 번 째안에 드는 양반마을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네요.^^
그리고 할머니 말씀대로 그 세 개의 마을이 모두 민속마을(경상도에 세 곳, 강원도에 한 곳, 충청도에 한 곳, 제주도에 한 곳, 전라도에 한 곳이 지정됨)로 지정이 되었으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아산 외암, 안동 하회, 월성 양동, 제주 성읍, 낙안 읍성, 고성 왕곡, 성주 한개가 바로 7개의 우리나라 민속마을인데 제가 알기론 아마 지정된 순서대로 일 겁니다.
그리고 유홍준 문화재청장 재직시 돌담이 아름다운 곳을 10곳을 지정하였는데 그 곳에도 한개마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개마을 돌담의 특징은 가장 아랫부분은 큰돌로만 쌓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과 흙은 반반 이용하여 쌓았으며 비교적 낮은 담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천천히 돌아보시면서 이런 것들도 유심이 보아주시면 되겠네요. 안내받은 집 외에도 한개는 5개의 재실도 있으며 윗마을과 아랫마을에도 반반한 기와집이 여러 채 더 있었는데 오랜세월 지나면서 주인이 제대로 가꾸지않아 허물어지거나 새마을 운동으로 기와의 모습이 이상하게 바뀌었습니다. 한개는 성산이가의 집성촌으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확실히 나뉘어져 있는데 윗마을은 주로 세도가들이, 아랫마을은 그 윗마을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기거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민속마을로 지정이 되면서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 허물어진 기왓집들과 아랫마을은 초가집으로 모두 복원할 계획이라고 하네요. 향후 5년간 450억원이라는 예산이 한개마을의 복원에 투입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모쪼록 좀 더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제대로 복원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참고로 한 10년 전 군에서 한개마을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관광객이 주로 다니는 곳에 돌담을 조성한 적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졸속으로, 돌담을 엉터리로 쌓아서 한개마을 돌담의 특색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으며 벌써부터 무너진 담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에도 한개마을 양반들의 세도는 대단하여 원래 김천-성주-대구로 이어질 예정이었던 경부선 철도가 한개마을앞을 통과해야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서 왜관으로 돌아갔다는 얘기가 성주에서는 오래 전부터 전해집니다. 우리나라 지도를 펴 놓고 보면 왜관으로 가나 성주로 가나 거리는 비슷해보이는데 아무래도 당시에 왜관보다는 컸던 성주로 이어질 계획이었다던 말이 틀린말은 아닐듯합니다. 그 덕분에 성주가 왜관(읍)보다 더 작은 군으로 머물러서 성주군민들의 오랜원망을 들어야했습니다. 하지만 성주군은 군을 통과하는 경부선 철도를 가지진 못해서 발전은 못했지만 그 개발에서 멀어진 덕분에 옛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어서 한개마을이 민속마을로 지정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한개마을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이 성주로 몰려드니 이젠 한개마을때문에 성주가 덕을 본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니니...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성주는 전기가 우리나라의 군치곤 상당히 일찍 들어왔는데 성주에선 읍보다도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곳이 바로 한개마을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시 한개마을의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개마을은 사람들이 문화재에 관심을 갖기 전 먼저 관심을 가진 도선생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많은 문화재를 도둑맞기도 했습니다. 저희집도 이층장과 뒤주, 청동화로, 멧돌...등을 도둑 맞았으며 저희집은 아랫집이므로 그다지 문화적인 가치가 높지않은 잡다한 것들만 도둑 맞았지만 훨씬 가치가 있는 고문서 같은 것들을 도둑맞은 윗집들도 많습니다. 대부분 생계와 교육을 위해서 집을 비워놓고 대도시로 나가는 바람에....그리고 사람이 사는 집에도 비어있는 사랑채 같은 곳을 대범하게 털어가기도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수 차례의 크고 작은 도둑질을 당하면서 지금은 대부분의 집들이 간수하기 어려운 것들은 가까운 대학에 모두 기증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상 한개마을의 간단한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좀 부족해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9개의 집 중에서 사진이 빠진 집이 하회댁과 도동댁 그리고 재실인 첨경재가 빠졌습니다. 모두 제가 사진을 찍을 당시 문이 잠겨져있었던 곳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찍어서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세종대왕자태실 사진입니다.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한 눈에 명당 같아보이는 곳이더군요. 뒤에는 산으로 둘러쌓이고 앞은 확 트인 곳인데 이 곳만이 태실공간만큼만 솟아있습니다. 귀부와 이수의 형태를 갖춘 곳이 바로 세조의 태실입니다. 원래 왕이 되면 다른 더 좋은 길지에 태를 옮긴다고 하는데 세조가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청하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이미 왕이 되었는데 더 이상 좋은 길지가 어디 있단말인가? 그냥 두어도 좋지아니한가?' 라고 하였다고 전해지며 성주에는 이 곳 말고도 두 개의 왕들의 태실이 더 있다고 합니다. 이 태실들이 옴으로써 성주는 명실공히 '주'자를 받을만큼 당시 큰 곳(요즘으로 치면 대도시와 같은 큰 규모. 진주, 전주, 광주....)으로 컸다고 합니다.
세조를 포함한 세종대왕의 18명의 아들들(18남4녀였다고 합니다.)의 태가 묻힌 곳이고 태실(항아리 형태의 돌)이 비어있는 곳은 세조에게 밑보인 왕자들의 것인데 당시에 인위적으로 파기되었다고 하네요. 윗줄 제일 왼쪽에 가장 멀리 보이는 태실이 바로 단종의 태실인데 당시에 파기되어 묻힌 것을 최근에 복원하면서 다시 세상의 빛을 보는 바람에 다른 것들보다 더 흰색이라고 합니다. 세월의 때가 덜 묻어서...
태실 바로 옆에 위치하여 태실을 지키는 수호사찰인 선석사 전경입니다. 당시에 태실을 지키도록 명하면서 많은 재산을 나라에서 주었다고 합니다.
가을단풍이 절정인 사찰 앞 전경입니다. 바로 저 오른쪽 위가 태실이 위치한 곳이랍니다.
이상 성주군 월항면에 위치한 한개마을과 세종대왕자태실과 선석사에 대한 간단한 사진과 설명이었습니다. 설명이 부족하여 죄송합니다.
한개마을을 오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부고속도로에서 왜관나들목(ic)으로 나오자마자 대구방면으로 가는 직진을 하지말고 오른쪽 왜관으로 빠져서 김천, 성주방면 4번국도로 좌회전하여 한 5분? 정도 타다가 33번 국도를 또 5분? 정도 타셔야합니다. 33번 국도에서 월항나들목으로 나오셔서 표지판을 따라 2km정도 오시면 됩니다. 참고로 한개마을을 찾아오는 가장 좋은 시기는 아무래도 꽃이 지천으로 피어 고가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봄과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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