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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섬
그녀 내외는 나란히 출근길에 올랐다.좀 멀지만 이왕이면 잉글리쉬 베이를 거쳐 스텐리 공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그들을 캐나다 밴쿠버로 뿌리를 옮기게 한 명소들이다.말갛게 씻은 아침햇살에 바다는 고향 섬진강에서 헤엄치던 은어의 비늘이 번뜩거리고 있었다.갯냄새 대신 길가에 심어놓은 칸나를 거쳐 오는 문명의 향취,짙붉은 열대의 야성은 그녀로 하여금 잠시동안이나마 생활의 무게를 부려 놓게 했다.쌍쌍이 롤러 블레이드를 타는 연인과 호수를 따라 바람을 가르는 은륜의 젊은이는 그림엽서의 장면일 뿐 왜 그들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하며 수평선에 눈길을 멈췄다.유유로이 떠가는 돛단배는 삶의 번민도 욕망도 다 내려 놓게 할 만큼 평화로웠다.그 배에 자신을 온통 내맡기고 싶었다.지난날 한 번도 삶을 즐겨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모처럼 여름휴가를 가면 철저한 계획 아래 완벽한 준비물로 국군의 날 사열식에 참여한 군인처럼 긴장한 채 보냈다.등산을 가도 과녁을 겨냥한 궁수처럼 자기와 싸우며 행진했다.능선을 건너다 볼 여유도 발 밑에 방긋 웃는 풀꽃의 미소에 답할 짬도 없이 앞만 보고 살아온 시간이었다.여가를 즐기는 연습이 안 돼 있는 그들에게 남는 시간은 부질없는 그리움과 외로움만 불러다 주었다.
스텐리 공원에 서 있는 등대를 보면 외롭다는 느낌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수많은 갈매기 들이 뿌려 놓은 오물에서, 아무데고 털썩 주저 앉아 껴안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유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이 건 안 돼,저것도 안 돼.”끊임없이 제재만 받고 살아 온 그녀가 늘 움츠러든 자라 목이라면 실수를 해도 “Good try.”하며 칭찬 받는 서양인들은 시원하게 뻗은 기린 목이었다.캐나다인들에게서는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도덕과 이상으로 옭아매지 않고, 거짓과 허세의 가면을 쓰지 않고 타고난 그대로 천연스럽게 살고 있었다.
공원의 명물은 역시 장승들이었다.색색의 연지곤지를 바르고 읍하고 서 있는 장승들을 배경으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그러나 키가 껑충한 장승의 눈길은 텅 비어 있었다.바람의 숨결과 숲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고향 하이다를 향해 온 귀가 열려 있었다.장승들만 광장에 빈 마음으로 서 있는 건 아니었다.그녀도 넓은 광장에 엉거주춤 방향을 잃은 채 서 있었다.가난하고 지루한 농촌을 탈출하여 번잡한 서울역 광장에 서 있는 어린애처럼.풍선을 보면 그것을 좇고 싶고,따라가다 보면 길을 놓쳐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망설이는 가출소녀.고향이란 무엇일까.꼭 돌아가야만 하는 곳일까.그녀에게 고향은 풍경이 아니었다.서정이 넘치는 시였고 추억이 담긴 앨범이었다.맨처음 상급학교 진학할 때 그녀는 고향을 떠났고, 친구들과 함께 학창시절의 풋풋한 이야기가 있는 중소도시가 그녀의 고향이 되었다.다음엔 직장생활하며 사랑을 속삭이던 소읍이,그리곤 결혼해 남편과 보금자리를 꾸민 공룡 같던 서울이 차츰 그녀의 고향이 되어 주었다.이제는 우람한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태평양을 가슴에 품은 이곳을 고향이라 불러도 되련만. 태산 같은 파도를 헤치며 항해하는 여객선을 탄 듯한 멀미는 그만 가셔도 좋으련만.묵은 잎새 다 털어내고 힘차게 뿌리 내리는 한 그루 참나무였으면 하고 그녀는 소망했다.
가게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국적을 짐작해 보는 게 취미인 남편은 빨래감을 가지고 온 아가씨와 스무고개 퀴즈를 했다.
“Are you from
독특한 억양과 강한 발음에서 짐작한 듯 주근깨 드문드문한 금발아가씨에게 물었다.
“No, But close enough. Guess.”(아니,그러나 아주 비슷해.추리해 봐.)
푸른 눈동자가 장난기를 머금고 반짝거렸다.참 신비롭기도 해라.어찌 사람의 눈이 저리도 다양한 빛깔을 띠누.감탄하며 유쾌해진 그녀도 끼어 들었다.
“Hmm,Scottish? Or Irish?”(스콧트인,아님 아일랜드인.)
“Yap.My great grand father came from Ireland.How about you?”(응,증조할아버지가 아일랜드에서 왔어.너흰?)
남편이 그녀의 재미있는 억양을 흉내내며 반문을 했다.
“Guess.”(짐작해 봐.)
“Japanese? Chinese? I really don’t know.”(일본인?중국인? 정말 모르겠는데)
얼굴이 빨개지며 어쩔 줄 몰라하는 여자를 보며 내외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Korean.Your country has very similar history to mine.”(한국인.네 나라와 우리나라는 아주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
그러나 지금 행복해 죽겠는 이 아가씨는 아픈 역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대부분의서양인은 과거뿐만이 아니라 내일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그저 오늘을 즐기며 행복하면 그만이었다.그녀처럼 과거에 집착하거나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잡히지는 않았다.삶의 애환을 모르는 그들이 맹물처럼 싱거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Nice talking to you.Don’t work too hard.Bye.”(즐거운 대화였어.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라.안녕.)
귀여운 아가씨는 마른 빨래를 가지고 사라졌다.밀린 일감을 손빠르게 처리하며 구김살 없이 쾌활한 금발아가씨와 수줍어 늘 치마꼬리 뒤에 숨어있던 국영이를 비교했다.”
“근데 당신 왜 출신을 묻는거예요?”
“궁금해서.이민자들 모두 캐나다인이라고 생각하는지.우리도 한두 세대 건너다 보면 그럴까?어쩜 우린 영원히 아닐지도 몰라.”
“글쎄,계속 순수 혈통을 지키면 한국인의 의식을 갖겠지만,혼혈이 되면 힘들지 않을까요?
지난 번 스포츠가게에서 일하던 일본애 기억나요?자신은 캐나다인이라고 주저없이 말하지 않던가요?할아버지는 일본인이기를 강요하지만 자기는 싫다고.”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만큼 뿌리의식이 강한 민족도 없나 봐.”
“유대인은 어떤고?죠셉에게 물어보고 싶어요.며느리도 유대인이라고 하더구만.”
“우리하고 다른 개념인 것 같던데.지금은 혈통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를 말하는 것 같애.그리고 얼마나 철저하게 관습과 계율을 지키느냐에 따라 구분하나 봐.”
죠셉은 그들에게 가게를 넘겨준 유대인 할아버지였다.가게 운영뿐만 아니라 이민생활 첫걸음마를 돌봐주었던 터라 그를 대디라고 부르곤 했다.
남편이 국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손님을 상대로 스무고개 퀴즈를 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집안의 대대종손으로서 능히 고민할 만한 문제라 싶었다.딸 하나 달랑 낳고 단산한 그녀를 못마땅히 여기던 시댁가족의 면면들이 스쳐 갔다.
“여보,여기 애들 정말 이쁘지?우리 저렇게 인형같은 애 하나 볼까?”
“아이고,밭도 다르고 씨도 다른데 무슨 수로.당신이 재주 부리면 몰라도.”
오랜만에 넉넉한 마음이 되어 농담을 던졌다.
“아니,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우리 국영이 말이야.요즘 만나는 서양애하고 잘 되면 저렇게 깜찍한 손녀 볼 수도 있쟎아.”
“꿈도 야무지우.그러다 검정머리 납작코에 버르장머리 없는 서양애면 어쩌려구?할배 보고’헤이,쌩’하고 부를 텐데,괜찮겠수?”
서양인들이 남편의 첫이름자 ‘상’을 발음 못해 ‘쌩쌩’거려 할 수 없이 남편은 서양이름을 가졌다.
“당신은 그런 생각 안 들어?이민 막 왔을 땐 국영이가 서양놈 데리고 와 막무가내로 결혼하겠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지금은 뭐 대수냐,정말 사랑하고 제가 행복해 하면 서양놈이든 중국놈이든 상관없다 싶어.근데 여기 애들 사랑할 땐 죽고 못 살다가 헤어질 땐 칼이더라고.그거 한 가지만 걱정돼.”
“그렇지 않아도 이민 오던 해에 국영이가 물읍디다.서양 남자친구 사귀면 어떠냐고.”
“그래 뭐라 그랬어? 좋다 그러지.”
“내가 당신이우.안 된다 그랬어.사위라고 처가에 와서 장모한테 뽀뽀나 하고 장인한테 ‘야,자’하면 어쩔 건데.”
“그러다 딸내미 처녀 귀신으로 늙히겠다.순종 원하면 국내에 있어야지,외국으로 데리고 나와서 한국사위만 찾으면 어쩌누?국영이는 당신 원하는 대로 된다 칩시다.그 애의 2,3 세는?그것도 당신이 눈 시퍼렇게 뜨고 된다 안 된다 할 건가?당장 내 생전엔 안 되고,사후엔 괜찮고?어차피 다음 세기엔 민족이며 국가며 다 헤쳐 모여 할 텐데.너무 근시안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절대로 안 돼요.당신도 그랬쟎우.얘네 결혼생활 길게 못 간다구.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엔 안 돼요.”
눈앞에 서양 사위감을 데려온 듯 그녀는 결연한 태도로 남편의 위험한 생각에 쐐기를 박았다.그리고 아들이어도 며느리감에 대해 저리 너그러울까 의아로웠다.남편은 완강한 그녀의 태도에 질린 듯 외면을 하고 오후내내 둘은 서먹서먹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딸을 맞기 위해 모처럼 집에 일찍 돌아왔다.그녀는 부엌 한구석에 쓰다가 둔 일기를 펼쳤다.뒤적거리다가 이민 오던 날 썼던 시가 눈에 띄었다.
남루한 기억일랑
두툼한 책갈피에
빛 바랜 흑백사진처럼 간직해 둔 채
무지개 꿈을 안고 창공을 날아갑니다.
체면의 탈도
치열한 살아남기 안간힘도
초라한 가슴 내미는 허세도
애벌레 허물처럼 다 벗어 던지고
흰 나래 팔랑이며 호수를 건너갑니다.
언뜻 비끼는 쏜살구름이 당신을 향한 기도이라면
산뜻 디미는 말간 햇살은 당신의 응답인가요.
펄럭 드리운 검은 구름이 미지를 향한 두려움이라면
활짝 퍼지는 황금햇살은 당신의 미소이군요.
손에 손 잡고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겯고
낯선 말 낯선 땅에 당당히 서라며
눈꽃을 천사 삼아 떨고 있는 어깨를 감싸줍니다.
-멀리 이사 오던 날에-
싸락눈이 반겨주던 그 날의 밴쿠버 공항이 떠올랐다.그때만 해도 새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부풀어 있었는데…… .곧이어 다음 대목이 그녀의 눈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날짜 변경선을 지났다. 스튜어디스의 안내 방송에 의해 서울 현재 시각에서 밴쿠버 현재 시각으로 맞췄다.-
‘바로 이거야. 날 멀미나게 하는 녀석이.’
이십여 년간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시간이었다.아침잠이 많은 그녀에게 자명종은 삶을 지탱해주는 지주였다.남편이 출장가 일 주일 집을 비워도 별 문제는 없었지만 자명종시계의 한 시간 불성실은 하루만큼의 손실을 가져 왔다.새벽 4 시에 일어나 아침식사 준비,도시락 세 개 챙기기,남편 와이셔츠 2 장 다리기,딸애 머리 땋기, 정작 그녀 출근 준비는 5 분만에 후다닥.그야말로 1 초의 허실도 없이 팽이처럼 몸을 부리다가 6 시 15 분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야 했다. 만약 딸애의 “엄마, 학교 끊어.”하는 잠꼬대에 1 초라도 감상에 빠졌다가는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거나 신호 위반을 해야 만회할 수 있었다.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경우 그대로 지각이었다.그리고 인생은 늘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이었다
하루 종일 시작과 끝을 알리는 소리에 따라 들락날락했다. 두부 종소리가 차임벨로 바뀔 즈
음엔 그녀가 수업 끝을 말하는 순간 벨이 동시에 울릴 정도로 시계와 리듬을 같이 타게 되었다.취미생활을 하면서도 시간대에 신경을 쓰고 남편의 출퇴근 시간까지도 감시를 하게 되었다.각종 공과금의 납입 기일을 놓치는 건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여기게 될 때쯤엔 이미 그녀는 시간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시간은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신이었다.
그런데 태평양을 용감하게 건너 오던 날,날짜 변경선을 넘으면서 이 절대 개념이 1 시간,2 시간 빗나가더니 급기야는 날짜까지 뒤뚱거리기에 이르렀다.어디를 가도 여러 개의 시계가 걸려 있고 시계바늘은 각기 다른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시간은 변동가능한 것이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물처럼 유동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인정해야 했다.명절과 가족 생일 때는 음력 날짜와 한국 시각을 따져서 안부전화를 했다.숫자놀음에 유난히 소질이 없는 그녀는 그것이 복리이자 계산처럼 복잡해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뿐만 아니라 다람쥐 쳇바퀴 같은 바쁜 일상에서 튕겨나와 회전목마를 탄 듯 한가로워진 변화도 한 몫을 했다.아직도 생활패턴의 변화를 감지못한 그녀의 몸은 묵은 습관대로 팽이처럼 돌고 싶어했다. 쉴 새 없이 시계를 읽고 새 사람을 만나 생활정보를 나누는 친목모임마저도 시간낭비라 하며 걸르고 싶어했다.
시간의 변심에 분해 할 때,뻐꾹이시계는 뻐꾹을 다섯 번 외쳤다.그녀는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 올 시간이 훨씬 지난 것을 알고 불안했다.며칠째 어둡던 아이의 눈망울이 마음에 걸려 학교로 향했다.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남기고 간 재잘거림이 주황빛놀을 끌고, 낮 동안 열기로 후끈했을 교실은 적막에 송두리째 몸을 내맡겨 두고 있었다.딸애의 흔적은 캐비넷에 적힌 영문 한글 섞인 긴 이름에만 남아 있었다.국적불명의 이름을 나직이 되뇌며 얼마나 오랫동안 아이를 어루만져 주지 못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늘상 무심히 지나치던 담장 밑에 요염하게 피어있는 꽃더미를 보았다.줄기에 송글송글 여린 가시를 달고 화사한 보라, 연분홍,연노랑의 종이꽃을 이고 있었다.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그러나 이름을 모르는 꽃이었다.그녀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친절과 예의의 교양있는 표정 뒤에 감추어진 철저한 개인주의.도덕과 인륜보다는 공공질서를, 법률보다는 프라이버시를 더 중요시하는 서양인들. 화사한 그 꽃은 바로 개인과 개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금을 긋는 누군가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언젠가 본 것 같은 얼굴,차갑게 거부하는 표정.아,바로 작은 성의 거만한 여주인.
이민 온 이듬해 어느날,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다음에 집을 살 때 분홍색 단층 랜치형을 살까,아님 초록색 이층 뾰족집을 살까 행복한 상상을 하며 한 골목에 이르렀을 때였다.콜드 섹 끝 밝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작은 성을 보았다.청회색에 흰 색 테두리를 두른,유리창이 많아 마치 디즈니랜드에 나오는 성같이 아름다운 3 층집이었다.강아지도 그 세련된 자태에 끌렸는지 사뭇 지쳐 들어갔다.가까이 갈수록 성은 미모를 뽐내며 그녀를 유혹했다.어쩜 저렇게 두 색깔이 서로 잘 어울릴까,아치형의 유리창이 집의 품위를 높여 주네.전망이 툭 트인 방은 우리 침실,벚꽃이 화사한 왼쪽방은 딸애를 주고…….공상에 잠긴 사이 성큼 들어선 곳은 현관 지척이었다.남의 안마당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라 커텐 저 편에서 지켜 보고 있었던지 한 여자가 나왔다.당황하여 어색한 웃음을 띠고 인사를 했다.
“Haven’t you seen a private sign? Please,Leave.”(개인소유지역이라는 팻말 못 보았니? 떠나 줘.)
‘I,m sorry. You have a very beautiful house.I’m leaving.”(미안해.참 아름다운 집을 가지고 있네.지금 나갈게.)
굽신거리며 그 팻말지역에서 나오려 하는데 강아지는 냉정한 영국 억양의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사람을 보면 좋아 길길이 뛰는 강아지의 천진함이 그 날만큼은 미웠다.부끄러워 뒤통수를 싸매고 싶은 심정으로 황급히 돌아섰다.마주한 해님은 괜찮다고 윙크를 했지만 무식한 동양여자라는 중얼거림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에이,바보같이.네 집이 너무 아름다워 나도 모른 새 들어 왔다고 그러지.근데 그걸 어떻게 영어로 말하지?갸우뚱거리며 강아지 따라 골목을 직잭으로
돌아 나오는데 붕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길을 내주느라 한 켠으로 비켜 선 곁에 차가 멈췄다.의아해 고개를 들어보니 예의 영국여자였다.
“Hey.”(야.)
영 싸가지 없이 부르네 하면서도 가까이 다가가니,
“There’s a park nereby.why don’t you bring your poppy with you?”(아주 가까운 곳에 공원이 있어.왜 강아지 데리고 거기 가지 않니?)
하며 깐죽거린다.애써 친절하고 교양있는 척 가장하였으나 입가에 걸린 조롱과 멸시는 그녀의 자존심을 긁고 말았다.
“I know.Is this alley private,too?”(나도 알아.근데 이 골목도 개인 소유냐?)
“No.But I don’t want see a stranger around my house.”(아니. 하지만 내 집 주변에서 낯선 사람 보고 싶지 않아.)
약이 올라 팔짝팔짝 뛸 노릇이었다.처음엔 남의 소유지를 침범했으니 미안하게 여겼지만 골목까지 나와 쫓아내는 건 아무래도 견딜 수 없는 인권침해이고 텃세였다.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이어도 그랬을까.절대로 못 하지.분명히 인종차별이야.아이구,왜 시원하게 욕 한 마디 못해 줬을까.저녁에 딸애한테 영어로 싸우는 법을 배워야겠어.씨근벌떡하다가 남의 나라,남의 땅에서 사는 더부살이의 서러움이 왈칵 솟구쳤다.그날부터 그녀는 생뚱없이 찾아오는 멀미에 시달렸다.그녀에게 네 나라가 아니니 꺼져 버리라며 조롱을 입가에 단 그 여자,온갖 단편적인 지난 시간들을 그녀의 꿈 속으로 불러 들이게 한 바로 그 여자의 뱅글거리는 미소였다.갑자기 한기가 찾아와 후두둑 떨었다.그 한기를 빨리 녹이려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과 후, 같은 시간에 어김없이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그녀는 걱정을 싣고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완벽한 서양식 주택에서 흘러 나오는 된장찌개 냄새는 기묘한 부조화를 불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치 한 달 가량 해외여행 다녀온 사람처럼 선 채로 김치를 집어먹는 남편을 보자 싸한 아픔이 가슴에서 목까지 올라왔다.
“국영이는?”
“응,친구네. 좀 늦는대.”
“그래,그 서양애래? 야,그 녀석.이제 캐나다놈 다 되었구만.”
뭐라 대꾸할 틈이 없이 국영이가 보여준 사진 속의 서양애를 남자친구라고 지레짐작하는 남편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어두운 표정을 행여 남편이 눈치챌세라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대니네서 차 한 잔 하러 오래던데,당신 피곤하지 않수?”
“술이면 술이지,무슨 차 한 잔이야.”
불퉁거리면서도 서둘러 식사를 마치는 남편이 꽤 들떠 보였다.6 시엔 모든 상가가 문을 닫아 도시가 온통 적막강산. 그저 알아듣지도 못하는 텔레비전을 건성으로 보다가 하루를 마감하기 일쑤인지라 저녁 외출은 별일 중의 하나였다.딸애의 이유모를 늦은 귀가도 감출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빈 손으로 갈 수 없어 냉동고 문을 열고 차곡이 쌓인 식품들을 들추는데 고향냄새가 물씬 풍겨왔다.고모님이 싸주신 무 말랭이,외숙모님의 진짜 참기름,어머님이 주신, 국영이 좋아하는 식혜 담글 엿기름,시누이가 준 전라도 고춧가루 등 훈훈한 인정과 사랑이 거기 그렇게 쌓여 있었다.코끝이 찡해오며 왈칵 그리움이 밀려 왔다.남편의 재촉에 돈까스덩이를 봉지에 주워 담았다.서양식 식사를 하는 대니네는 한국것 가져 가봐야 환영 못 받을 것이 뻔해 간식거리로 챙겼다.남편 몰래 딸애에게 메모 한 장을 남기고 대니네로 향했다.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지었어.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캐나다는 재미없는 천국.저녁에 도대체 갈 데가 있어야지.하다못해 친구네 집도 예약해야 갈 수 있으니.갑자기 술생각이 나도 불러낼 놈도 없고,갈 데도 없고.”
남편의 옆얼굴에 가로수의 그늘이 일렁였다.
현관에 들어서자 어느 한 구석 빈틈없이 놓인 화사한 조화가 겉웃음을 지으며 반겼다.철따라 바뀌는 식탁세팅에 감탄하며 들어선 그녀는 낯선 얼굴에 흠칠 놀랐다.파티라도 온 듯 귀걸이까지 달고 입체 메이크업을 한 부인과 텔레비전에서나 봄 직한 멋진 중년남자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낭패감이 들었다. 집에서 뒹굴던 차림 그대로 부스스한 자신, 일터의 먼지 다 붙인 남편의 몰골과 그들은 너무 대조적이었다. 다른 사람과 합석할 거라고 미리 일러주지 않은 대니엄마의 무신경에 화를 내며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이민 온 후 생긴 낯가림을 들키지 않고 여주인의 바쁜 손길을 돕는다는 명분이었다.그러나 말 그대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종류의 차-녹차와 커피-와 쿠키,과일 한 접시, 손님이 갖고 온 듯한 치즈 케잌이 다였다.준비를 도울 것도 없어 초라한 모습을 낯선 사람 앞에 드러내야만 했다.
“이 분들은 이민 온 지 한 달 되신 최사장님 내외분,그리고 이쪽은 세탁소 하시는, 이민 5 년차 이사장님 내외분.”
어김없이 관등성명을 앞세운 소개가 있었다. 훈장처럼 달고 다니던 대그룹의 이사직함을 떼어놓은 남편이 단 새 직함은 세탁소 사장님.그리고 나이보다도 더 중요한 이민 몇 년차.언제부턴가 남편과 그녀의 이름은 없어지고 이 두 가지가 대신했다.
“아이구,반갑습니다.5 년 되셨으면 영어도 잘하시겠네요.부럽습니다.”
그녀가 이민 갓 왔을 때 가졌던 착각을 그도 하고 있나 보다.세월이 흐른다고 영어가 저절로 되나?그러면서도 뾰족한 바늘로 찔린 듯 따끔했다.최씨는 남편의 입성을 훑어보며 빈 말로 인사치레를 했다.뚝배기 깨지는 목소리가 그다지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교양있는 미소를 띤 최의 아내는 잘 포장된 바니인형을 연상케 했다.저 여인은 체홉의 ‘귀여운 여인’이야.주체적인 자기 생각없이 성공한 남자의 꽃바구니 같은 악세사리,파티의 전시용 고가 크리스탈 디너셋트.그녀의 못된 버릇대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의 인금을 매기고 조금 어깨를 폈다.
“아,요즘 본국은 어떻습니까? 정치도 시끄럽고,경제도 IMF때보다 못하다고 하던데…… .”
최신 정보를 갖고있는 최가 포문을 열었다.
“개판이예요.북한에서는 핵무기로 공격한다고 야단이지요,정부는 대기업 때려잡는 데만 혈안이지요, 기업가들이 더이상 한국은 희망이 없다고 중국이나 월남으로 공장들을 옮기고 있어요.”
아니,이럴 수가.여기선 IMF를 단기간에 극복한 조국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데.충격을 받은 그녀는 한 달 전에 떠나온 조국을 3인칭으로 부르는 최를 응시하였다.최는 입에 제동이 풀려버렸는지 화제를 독점했다.
“정치 하면 또 할 말이 많지요.그 왜 요즘 새로 생긴 당 있죠?인기몰이를 하고 있는데 두고 봐야지요. 기존당은 창당 때 뭐 새바람 안 일으켰나요?”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순진한 대니아빠는 마치 정치개혁이 최의 말 한 마디에 달린 양 애걸을 했다.
“아이구,택도 없습니다.그 놈이 그 놈이라니까요.선거 한 번 치르려면 자금이 얼마 드는데.때는 이 때다 갖다 바치는 놈에,받는 놈에 언제 깨끗해집니까?될 사람 9 할. 안될 사람 혹시나 모르니 1 할.받아먹고 난 뒤엔 뒤가 구리니 싸고 돌아 대대손손 품위 유지할 재산 치부해야지요.보세요,대통령 임기 마치면 불거져 나오는 비자금 타령에 줄줄이 감옥행 아닙니까? 아예 선거를 말든지 해야지 민주주의가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니까요.”
대니아빠는 말문이 막혔는지 망연자실,그녀의 남편이 맞상대를 차고 나섰다.
“그러면 되나요.국민의 가장 큰 권리 행사인데요.부정부패한 정치가는 다음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지요.”
“그걸 누가 모른답니까? 이론은 그렇지만 현실이 그렇게 돌아가지를 않으니까 하는 말이지요.그리고 요즘 젊은 애들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 한심해요.그 뭡니까?네티즌? 정정당당하게 표면에 나서서 할 것이지 왜 조그만 상자 속에 숨어서 여론을 좌지우지합니까? 하루밤 자고 일어나면 1 세기를 뒤쳐진 것처럼 바뀐 인심에 어리둥절하게 된다니까요.꼭 귀신 장난에 놀아나는 것 같애요.이 번 대통령이 네티즌 대통령 아닙니까?”
한국 남자의 주된 화제는 평생 우려먹는 군대 이야기요,아무도 안 다치며 통쾌한 정치 씹기라더니 참 물리지도 않나 보다 생각할 즈음에 얌전히 조화처럼 앉아 있던 최의 아내가 남편의 팔꿈치를 툭 쳤다.
“여보,다른 분 지루하시겠어요.떠나 온 나라 얘기는 뭐하러 해요?”
우아함을 잃지않은 채 유연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아참, 하시는 사업들은 잘 되십니까?”
“예,겨우 먹고 살 만큼.어디 캐나다가 돈 벌게 해주는 나라인가요.”
대니아빠가 오늘 아침 딸애처럼 눈을 감추며 오그라붙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그러자 최는 말꼬리를 채며 흠흠거렸다.
“몇 푼이나 번다고 수퍼에 식당에 그리 힘든 일만 하는지.한국에서 뼈빠지게 일하다 왔으면 이제 좀 즐기며 살아야지. 아니 밴쿠버처럼 놀고 먹기 좋은 데가 어딨다고.참 이사장님은 한국에서 뭘 하셨어요?세탁소나 하실 분처럼은 안 보이는데……. .”
칭찬인지 힐난일지 모를 질문에 남편의 장비눈썹이 꿈틀 치켜 올라갔다.
“본국에서 뭘 했는지 잊었습니다.아니 잊기로 했어요.헛폼 재고 살던 과거 빨리 잊을수록 캐나다 적응이 빠르지요.목 졸라매던 넥타이 풀어제끼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요.화이트 칼라일 때보다 블루칼라인 지금이 스트레스 없어 좋습니다.왕년 노래 부르는 이치고 여기 와서 제대로 사는 사람 못 봤습니다.”
거듭되던 최사장의 연속잽에 남편은 통쾌한 어퍼컷을 날렸다.찔끔한 기색도 없이 최는 넉살을 떨며 달겨 든다.
“아이고, 이사장님은 캐나다사람 다 되셨네.그래 캐나다 뭐가 그리 좋습디까?”
“사람 대접 받아 좋습니다.돈이 있고 없고,학벌이 있고 없고 가리지 않고 다 같은 사람으로 대해 주지요.만약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세탁업을 한다면 서럽고 억울한 일 많이 당할 걸요.그런데 여기서는 무슨 일을 하든 천하게 보질 않아요.그야말로 직업에 귀천이 없지요.”
“에이,겉으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설마 하니 거렁뱅이도 인간 대접 해 줄까.그리고 얼굴 누런 동양인이나 시커먼 흑인, 차별 안 해요?우리 이사장님이 아예 눈도 감고 귀도 닫고 사시는구만.하기야 남의 나라 굴러 들어와 밥 벌어 먹자면 있던 자존심도 다 팽개쳐야겠지만.”
드디어 최의 악의가 발톱을 세우기 시작했다.그러자 이번에는 대니아빠가 응수에 나섰다.
“최사장님 모르시는 말씀,물론 일부는 자기네가 무거운 세금 내며 이루어 놓은 기반에 이민자가 뒤늦게 들어와 노력 없이 혜택 받는 걸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도 있지요.하지만 우리도 열심히 일해 세금 내고 당당하게 권리 주장할 수 있는 나라예요.캐나다처럼 사회보장제도 잘된 나라 드물어요.우선 의료보험 보세요.제 집사람이 얼마 전에 안과 수술을 했는데 돈 한 푼 안 냈어요.그냥 퇴원하려니 얼마나 뒤꼭지가 부끄럽던지.안 되겠어서 마다하는 담당의사와 간호사에게 고맙다며 쵸콜렛 하나씩 주고 돌아 온 걸요.의사는 얼마나 친절한지.공무원이나 경찰,심지어 판사,변호사까지 목에 기브스하고 거드름 피우는 모습 여기선 볼 수 없어요.”
“헌데 캐나다는 의료보험제도가 종교라면서 왜 한국 가서 수술 받는답니까?급한 환자는 수술 순서 기다리다가 숨 넘어간다던데…… .한국 가면 일류 대학병원 이름있는 박사들한테 진찰이든 수술이든 즉시 받는데 뭐하려고 여기서 순서 기다립니까?”
저리도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 어떻게 이민을 왔을까.빽과 수완이 활개치는 제 세상을 두고 어찌 답답한 이 곳으로 왔누? 입을 삐쭉거리는 그녀를 보며 남편은 눈을 깜빡거렸다.
“빈약한 의료재정으로 전국민 의료비를 커버하기 어려운 형편인가 봐요.의료시설이나 의사 숫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고.그런데 소득수준에 따라 내는 의료비 액수를 생각하면 과분하게 받고 있는 셈이지요.최근 돈 많은 이민자들이 해외에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선 소득없는 빈민자로 구분돼 세금환불을 받는 게 문제가 되고 있지요.웨스트밴쿠버에 밀리언 집과 수십만 달러짜리 벤츠 굴리는 이들이 말이지요.결국 해외자산 신고법 제정에, 탈세혐의자들 세무조사에.그런데 열심히 일하는 소규모 사업자들이 피해를 받는 사례가 있어서 탈이지만.”
“그래요?돈 몇 푼 집어주면 될 걸. 작은 것 아끼려다 큰 것 놓치지.좀 영리하게 살지.쯧쯧.”
이쯤 되면 남편의 호통이 터질 법하련만 싶어 건너다 보았다.그러나 그는 얼굴근육을 씰룩거리며 외면하고 있었다.불같은 성미에 견디려니 얼마나 힘들까.기 많이 죽었네.남편을 대신해 최를 향해 한껏 눈을 흘겨 주었다.
재미없는 화제에 부인네들은 자연스레 대화의 물줄기가 갈렸다.
“참, 국영엄마,최사장님 사모님이 골프 가자던데 필드 한 번 안 나갈래요?”
“시간이 있어야지요.골프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유,일류 코치한테 렛슨 받으면 안 되는 게 어딨어요.”
드디어 최의 아내 장기가 화제에 오른 듯 싶었다.볼이 상기된 채 골프얘기에 열 올리는 그녀의 나풀거리는 입술이 꽃뱀의 날름거리는 혀를 연상시켰다.뭐든지 원칙 무시하고 구불텅구불텅 담 넘어가듯 하는 구렁이 남편,알록달록 무늬에 속셈을 감추고 접근하는 꽃뱀 아내.아주 천생연분이라며 고소해 했다.문득 잘 닦인 창에 사악한 미소를 띤 제 모습을 보며 끔찍해서 얼른 못된 생각을 털어냈다.잘 사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밴댕이 속아지를 나무라며.
지루해진 그녀의 시선이 거실 벽에 기대선 괘종시계에 닿았다.축 늘어진 시침이 로마숫자 11을 가리키고 있었다.오늘도 무의미한 대화로 시간을 낭비했다며 지금쯤은 돌아 왔을 딸애 걱정에 닿았다.혹시 남자친구가 생겼나,아니면 애들한테 왕따를 당하나,담배를 피우나,설마 마약은 아니겠지?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귀신처럼 화제에 발붙이지지 못하는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요즘 잦은 늦은 귀가와 달라진 옷차림새,전에 없이 침울한 표정 등이 딸애의 변화임엔 틀림이 없지만 결코 탈선의 징조로 보고 싶지 않았다.여느 애보다도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 아프리카에 데려다 놓아도 꿋꿋하게 살아갈 애였다.유치원 시절 이름자를 거꾸로 부르던 애들 놀림에 접시꽃처럼 노랗게 시들어 가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또다시 같은 악몽을 꾸게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움이 일었다.생각이 방정이라며 머리를 털었다.어른들만 문화충격을 겪는 게 아니라 애들도 그 충격이 클 텐데 먹고 살기 급급해 애를 제대로 건사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갑자기 ‘국영’이라는 이름이 들려와 스멀거리고 퍼져가는 암운에서 그녀를 건져 올렸다.
“국영엄마,요즘 애들 새탈한대요.들어 봤어요?”
“새탈이요? 해탈은 들었어도 새탈은 금시초문인데요.”
“적응 못하는 애들이 새벽에 몰래 집나가 떼지어 돌아다닌대요.”
“어머,새벽에 뭐 할 게 있다구?”
캐나다에서 태어난 대니는 한국애 아닌 캐나다애고,호주로 조기유학시키고 캐나다로 이민 온 최씨네는 전혀 관련없는 말이었다.’적응 못하는 애’라는 말에 그녀의 가슴이 쿵 무너졌다.
“아침에 그리 돌아다니고 나서 학교엔들 충실할라구? 한국애들끼리 떼지어 다니면 영어는 언제 배우고. 사고나 안 치려나 몰라.”
속삭이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모국어가 문제였다.만약 영어로 했더라면 들리지 않으니 교양있게 대화가 끝날 때까지 앉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시간을 축내며 불안을 쌓고 있을 수는 없었다.그 동안 힘팔리는 대화에서 빠져 나와 구석에 우두망찰 앉아있던 남편은 갑자기 서두르는 그녀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일어섰다.
“에이, 오지 말 걸.괜히 스트레스 쌓고 가쟎아.”
평소에 좌중을 휘어잡는 언변의 남편이 졸부 앞에서 느꼈을 울분이 투덜거림 속에 묻어났다.
“오늘 세 부류의 이민자들이 다 모였더구만.”
“무슨 말이예요?”
“봐,대니네는 20 년 넘은 원주민,최사장네는 햇이민자,우리는 중간 얼치기.캐나다인도 아니고,한국인도 아니고.헛헛.”
대니네는 캐나다 예찬론자.아름다운 자연경관부터 사회복지제도,캐나다인의 친절과 정직을 찬미하고 숭배했다.반면에 본국을 그들이 이민 오던 80 년대초의 지저분하고 미개한 공중화장실로 기억하고 있었다.빌딩이 즐비하고 인터넷 초강국이어도 아직까지 공산주의와 대치한 유일한 분단국가요,주머니에 돈이 많아 흥청망청해도 삶을 즐길 줄 모르는 문화 빈곤사회라며 혹평을 했다.변명의 여지가 없는 엄정한 사실이었다.하지만 내 나라,내 겨레에게 덤도 안 주고 객관적으로 비평하는 게 야속했다.한편 최씨네는 한국 경제급성장의 수혜자,동시에 돈과 빽으로 안 되는 게 없는 특수계층,온갖 부정에 고리처럼 물려 있으면서 남의 작은 티끌은 기를 쓰고 비난하며 상대가 조금만 세면 설설 기고 약하면 철저하게 짓밟는 자.그런 부류 피해 떠나왔는데 어쩌자고 또 맞닥뜨렸단 말인가?
“최사장이 어지간히 어긋장 놓던데 당신 잘 참데요.”
“안 그러면 어쩌겠어.각기 이민 오던 때의 의식수준에 멈춰 있는 걸.대니네는 80 년대초,우린 90 년대 후반,그리고 최사장네는 새 천 년 벽두, 각기 합류할 수 없는 섬에 갇혀 있는데.”
“하기야 근래에 온 투자이민과 원주민이 서로 의사소통 안 될 때도 있지요.하지만 시간 흐르면 서로 융화되지 않겠어요?말 다르고 정서도 딴판인 서양사람하고도 어울려 사는데……. .”
남편의 말은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이민 온 시기에 따라 무척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70,80년대에는 가난과 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민을 떠났으나 90 년대에는 질 높은 삶을 찾아 조국을 떠났다.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세계화바람이 불었다.하지만 그것은 세계 속에 살아갈 시민으로서의 의식 개조나 문화 진작이 아니었다.누구나 하는 해외여행, 영어 사대주의가 부른 조기유학과 이민 열풍을 낳았을 뿐이었다.그녀도 그 열풍에 휘말려 지구의 반대쪽으로 생나무의 뿌리를 옮겨 왔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왜 얼치기라는 거예요?”
“당신은 그럼 우리가 캐나다인인 것 같애? 언어나 문화면에서 얘네들 것 이해하느냐구?”
“100%는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하쟎아요.”
“그럼,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 살 생각이 있어?”
“혹 모르죠. 늙어서 정말 그리워 견딜 수 없으면 갈지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예요.”
당황스레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남편은 한숨을 쉬었다.
“것 봐.그러니까 얼치기라는 거야.”
그녀는 아직도 물건값을 꼭 한국화폐 원으로 환산해 보고 물가가 비싸다 싸다 가늠하곤 했다.물건의 품질도 그녀가 기억하는 한국산과 견주어 보아야만 직성이 풀렸다.딱이 비교해서 어쩌자는 게 아니라 그녀의 의지를 벗어난 두뇌의 자동정보처리 방식이었다.으레 옷가지나 생활용품을 살 때는 한국산이 싸고 예쁜데라는 말을 양념처럼 치곤 했다.
“당신은 나중에 기회되면 돌아갈 거유?”
그녀는 평소에 궁금했던 남편의 속셈을 넌지시 떠보았다.
“아니, 지난 5 년 동안 우리가 얼마나 뒤졌는지 알아? 오랜만에 서울 가면 눈이 핑핑 돌쟎아.거리에 나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몸놀림과 두뇌회전속도도 느리지만 가치관이 달라져서 돌아가 살긴 어려울 거야.”
남편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범법자이니 본국 입국을 금지한다는 선고를 받은 듯. 판사의 판결 번복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남편의 굳게 닫친 입술을 쳐다 보았다.그러나 그는 그만의 상념에 잠겨 아내의 불안한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비행기 한 번이면 닿는 조국이건만 왜 그리 까마득히 느껴지는지. 마치 3 차원에서 4 차원으로 건너 뛰듯,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 가듯.결코 물리적 공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 거리감이었다.
밤하늘엔 쏟아질 것처럼 총총 보석별이 박혀 있었다.자정이 다 된 시각인데도 푸르스름한 박명이 남아서 차창에 남편의 실루엣을 비추었다.잘 나지는 않았지만 항상 든든해 보이던 그의 옆얼굴은 오늘 따라 굳어 보였다.남겨두고 온 것들이 너무도 그리워질 때면 끝 닿은 곳 없는 하늘을 보며 달랬듯이 그의 굳은 마음도 저 별들이 달래 주면 좋으련만.별 하나에 소망 하나씩 풍선처럼 매달아 보내며 그녀는 화살기도를 했다.동편 하늘에 유난히 큰 별이 나타나는 듯 싶더니 길게 꼬리를 늘이며 산 너머로 넘어 가는 모습을 본 건 바로 그때였다.유성이 마지막 자취를 감출 무렵 감성이 무딘 남편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유성의 꼬리에 매달린 탄성은 불쾌감과 불안감을 싣고 우주의 끝까지 달리겠지.그리고 붉은 빛을 내며 산화하겠지.그녀의 화살기도가 즉시 효험을 보는지 남편의 데드마스크처럼 굳었던 표정이 온화하게 풀려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딸애의 운동화를 찾느라 차고의 신발장을 들여다 보았다.오른쪽 뒤축이 더 닳은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마치 나란한 신발이 딸애의 정돈된 생활과 심리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오늘밤엔 아무리 궁금해도 잠든 딸애를 깨워 닥달하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2 층으로 올라갔다.딸애방을 소리나지 않게 들여다 보았다.창밖 여명에 비치는 애의 몸피를 짐작하며 고맙다 고마워 속엣말을 했다.초등학교 갓 입학한 학동처럼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침실로 향했다.
그녀는 화장대에 마름모꼴로 접힌 쪽지를 보았다.일껏 가라앉았던 불안이 불끈 솟으며 그녀의 심장에 방망이질을 해댔다.벌써 코를 골며 잠든 남편이 깰까 봐 화장실로 들어갔다.애써 궂은 생각을 누르며 쪽지를 펼쳤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로 시작하는 쪽지는 군데군데 눈물자욱이 번져 있었다.
“저 때문에 이민 와서 고생하는 엄마,아빠를 보면 마음이 아파요.그래서 영어공부 열심히 했어요.그리고 여기 애들 친구 삼으려고 무지 노력했어요. 얘네들처럼 옷 입고 파티에도 쫓아다니고.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친구가 될 수 없어요.한국애들과 어울리면 영어 안 된다고 해서 모른 척하고 지냈는데.
엄마, 저 너무 외로워요.한국애들은 서양애들만 쫓아다닌다고 따돌리고,서양애들은 끼워 주지도 않고.엄마,저 어떡해요?저는 누구예요?”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가슴을 쥐어짜는 듯 아팠다.설마가 현실로 나타나 그녀의 아니 딸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정말 우리는 누구지?남편 말마따나 얼치기.한국인도 아니고 캐나다인도 영영 될 수 없다면,우리가 설 땅은 어디일까?우리가 느끼는 소외감은 견디지만 이 땅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애는 어떻게 이겨내지?당장 애를 깨워 못난 소리 말라고 소리칠까?아니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제야 그녀는 주변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이웃들이 이해됐다.아파트시세가 10 배로 뻥튀기를 했대도,동료가 승진했다고 해도 이렇게 흔들리진 않았다.궂은 일 하는 그녀 내외나 순해빠진 딸애, 모두 사람 대접 받는 게 재산과 출세보다 훨씬 중했다.그런데 이제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지?발밑이 무너져내리고 있는데……. .수많은 물음표가 머리 속을 휘젓고 다녔다. 간밤의 그 뜬금없는 꿈은 바로 오늘의 이 혼란을 예고했던가.
오늘도 새로 늘린 별관의 방향을 놓쳤다. 분명히 긴 터널 같은 복도를 지나고, 두번째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빤히 보일텐데…… .그러나 복도는 동굴의 입구처럼 어둡고 컴컴하기만 했다. 그동안 별탈없던 촉수는 다시 전기장에 의해 교란당하는 레이다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복잡하지도 않은 지하철역에서 한 번도 원하는 출구로 나온 적이 없을 때부터 방향치의 징후는 있었다.그러나 ㄷ 자 모양의 단순한 5 층 건물에서 다이달로스의 미로같이 헤매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틀림없이 마술에 걸렸거나 진짜 같은 꿈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현실에서는 처음 가 본 곳인데도 항상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는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이런 느낌은 초등학교 6 학년때부터 시작됐다. 그 이후 처음 가는 곳 어디든 두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가물거리는 기억의 뒷편에서 일치점을 찾기 위해 숨바꼭질하는 스릴을 맛보곤 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텅빈 동굴에 퀑퀑 울렸다. 발걸음은 닻을 매달아 놓은 듯이 선 자리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오늘도 또 미아가 되었다는 단정에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마비된 듯 움직일 줄 모르는 다리보다 가야할 방향을 모른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러웠다. 검은 블랙홀 같은 깔때기 속으로 형체없는 그림자들이 수없이 빨려들어가는 한가운데 국영이가 홀로 서 있었다.손을 뻗어 잡으려 했으나 흐르는 사람의 물결에 번번이 놓쳤다.그녀의 존재를 알려 주려 아무리 소리쳐도 그애는 듣지 못했다.두리번거리다 어두운 동굴로 다가가는 국영을 향해 그녀는 몸을 던졌다.그애가 자신처럼 방향을 놓치지 않게 하려고.그러나 바윗덩이만한 방해물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불끈 근육을 부풀린 알라딘의 램프 거인이 그녀와 국영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길 비켜주기를 애원하는 그녀에게 거인은 고개를 저었다.목을 놓고 울었다.생전 처음으로 몸부림치며 통곡을 했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는, 어쩌면 우는 데 훈련이 되어 있지 않던 그녀가 참으로 대책없이 울었다.억센 손아귀가 그녀의 뒷목덜미를 나꿔 패대기를 치려는 찰나, 돼지 생목소리를 내며 공중잡이로 튕겨 일어났다.
침대시트는 눈물이라 생각했던 땀으로 흥건했고, 거인은 벌어진 손끝을 바셀린 발라 칭칭 동여 맨 그녀의 남편이었다.
“악몽을 꾸었어? 평소에 울지도 않던 사람이…… .”
“내가 진짜로 울었어요?”
머쓱해진 그녀는 아직도 볼에 남아 있는 눈물자욱을 훔치며 물었다.
“당신 또 내가 딴 여자 만나는 꿈 꾼거야?”
그녀의 가슴 속 깊은 동공을 모르는 남편은 빙글거렸다.
“그래요.왜 맨날 그 꿈만 꾸는지 몰라.”
토라진 척 남편을 등지고 누웠다.
그녀는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가 가장 힘들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3,4 년씩 묵은 것이련만 무척 눈에 설었다.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그래도 여전히 냉기를 뿜어 냈다.그녀는 단 한 번도 직장을 그만 둔 것도,새 세상으로 이사 온 것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왜 같은 꿈을 몇 번이고 만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결국 이십 년이 넘은 생활습관이 잔영으로 남아 있어서라고 대답하고 잊으려 했다.다시는 같은 꿈을 꾸지 않으려면 이런 식으로나마 해결을 봐야만 했다. 아니면 자칫 직장생활이 그리워서라고,이민 온 걸 후회하고 있어서라고 꽁꽁 묻어둔 진실이 튀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러나 그녀는 그 낯선 느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과 위축감,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두고 온 산,사람에 대한 그리움 등이 그녀의 무의식 속에 꼭꼭 숨어 있다가 불쑥 튀어 나오곤 한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꿈이 선명히 떠올랐다.매번 같은 꿈이 되풀이되었는데 간밤에 국영이까지 등장한 것은 그녀의 며칠째 계속되던 불안이 생생하게 재현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국영이 스스로 갈등을 풀 때까지 믿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평소 외동딸을 유약하게 기르지 않으려는 남편의 방침을 따라서.이 밤엔 누구나 감상주의자가 되기 쉽지.내일 아침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거야.찬란한 태양이.’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절망에 처한 스칼렛 오하라가 한 명대사를 중얼거리며 그녀는 마음을 다독거렸다.유성을 보며 품었던 소망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희미한 기대도 그녀의 불안감을 재우는 데 한결 도움이 되었다.
자는 둥 마는 둥 설잠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난 그녀는 집안 분위기를 밝게 하려 애를 썼다.마당에서 수국 한 송이 꺾어 꽃병에 꽂아 두고, 식탁보도 국영이가 좋아하는 초록 노랑 체크무늬로 바꾸어 깔았다.그녀는 오랜만에 딸애에게 쪽지를 썼다.
“엄마의 아기천사가 어느새 예쁜 천사아가씨가 되었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 엄마는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지.그리고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렸단다.네가 방긋 웃을 땐 천국에 온 듯,네가 슬퍼하면 지옥으로 떨어진 듯했지.
엄마 아빠 널 위해 이사 온 건 아니다.그러니 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고 자책하지 말아라.힘들 땐 소리내 울어도 괜찮아.엄마는 국영이가 스스로 떨치고 일어설 때까지 응원할게.
수호천사가 널 지켜주고 있다는 거 잊지 말고.국영이 화이팅!”
그리고 정성과 솜씨를 다 부린 샌드위치를 쪽지와 함께 봉투에 담았다.남편은 영문도 모른 채 봄기운 가득한 집안 분위기에 즐거워 했지만 딸애는 고개를 숙이고 눈 한 번 마주쳐 주지 않았다.그녀의 가슴은 통통배처럼 뛰기 시작했다.도시락을 들려 주며 아이의 눈을 응시하자 마지못해 딸애는 억지웃음을 지었다.그녀의 믿음과 사랑이 딸애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등을 감싸 주고 배웅을 했다.온종일 국영이의 어두운 눈빛과 미소가 검푸른 강물에 떠올랐다 가라앉곤 했다.어디 한 군데 상의할 사람도 없는 게 퍽 암담했다.남편은 사소한 일로 수선피우지 말라고 타박할 게 뻔하니 의논 상대가 아니었다.깊은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친구가 있으면 이민은 절반이 성공이라는데.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으며 애를 태울 뿐이었다.
저녁 어스름해서 돌아온 국영이가 초대장을 내민 건 일 주일이 지나서였다.그 사이 그녀는 십수 년을 독수공방으로 지낸 소박데기의 심정이었다.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살피지 않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손을 내밀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무표정한 얼굴을 만나는 건 더욱 혹독한 고문이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누군가에게 무관심하라는 건 또 얼마나 큰 형벌인가.살아있음은 뜨겁게 사랑하는 것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을.박제된 짐승처럼 심장을 도려내고,냉동인간처럼 심장을 차갑게 얼린 일 주일이었다.서둘러 뜯어본 초대장에는 ‘복합문화의 날’행사 안내와 초대권 2 매가 들어 있었다.그것이 빌미가 되어 국영이 말문을 열었다.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 듯이 상쾌했다.
그녀는 함께 나서지 못하고 가게로 향하는 남편이 못내 섭섭했지만 책임감 강한 가장이 할탓이라고 섭섭함을 달랬다.모처럼 화사한 연두색 바지 정장을 챙겨 입었다.마중 삼아 자주 가던 학교였건만 그 날따라 싱그러운 봄내음이 가득했다.알록달록 각 나라 고유의상을 입은 학생들과 오락가락 들썩이는 학부형들로 개교 이래 가장 분주한 날일 듯 싶었다.복작복작한 한국의 학교에 비해 1/5밖에 안 되는 학생수와 서너 배 크기의 규모는 평소에 한산한 느낌을 주었다.주행사가 진행 중인 큰 강당에 들어서니 조용해야 할 객석이 소란했다.제멋대로 출입하는 학생들과 공연 도중에 시도 때도 없이 치는 박수.질서정연에 길들어 있는 그녀에게 처음에는 산만한 느낌을 주었으나 곧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얽매임 없는 자유에 그녀도 차츰 적응되어 가는 것일까.무대에서는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 맨 선생님과 네 학생이 한 팀이 되어 일본 리듬북을 공연하고 있었다.절정 부분에서는 관객 모두가 숨을 죽일 만큼 빠르고 잦은 가락이 연주되었다.끝에 이르러서는 격정적인 리듬이 거센 파도가 되어 넘실거려 사무라이의 비장한 최후가 연상됐다.곧이어 한국의 부채춤 순서였다.누가 출연하려나 궁금해 유심히 살피는데 무대에는 남색 끝동에 꽃분홍 깨끼 치마저고리를 입은 처녀와 옥색 바지저고리에 남색 마고자를 입은 총각이 올라왔다.환해진 무대에 나붓이 절하는 선남선녀는 바로 국영이와 대니였다.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국영이의 손끝 발동작 하나마다 그녀의 마음을 실었다.초등학교 때 몇 달 익힌 고전무용 실력이 남아있나 보다.맵시있게 부채를 접었다 폈다 앞으로 내달았다 뒤로 물러섰다 하는 국영이를 맴돌며 기웃거리다가 흉내를 내보기도 하는 대니의 익살이 흥겨움을 돋우었다..어느새 관객은 익숙해진 우리 장단에 손뼉을 치며 하나가 되었다.서툴게 만든 부채의 붉은 깃털이 떨어질 땐 관객이 다 함께 ‘어어’를 연발했다.뱅글뱅글 돌아 치마가 항아리처럼 부풀고 부채가 쌍회오리바람이 될 땐 모두 서서 박수를 쳤다.그녀 곁에서 환호하는 그들은 더이상 타인이 아니었다.그녀 또한 이방인이 아니었다.가슴 속 깊숙이에서 발원한 샘물이 폭포수가 되어 솟구칠 때 그녀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그저 무대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만 훔칠 뿐.두 아이가 관객을 향해 큰 절 하는 걸 보고 그녀는 서둘러 일어났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사람 물결을 헤치며 무대 뒤를 찾아갔다.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페르시안 차림의 학생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에 다시 무대인사를 하고 내려오는 국영이를 발견했다.
“국영아.”
그녀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그저 딸애를 가슴에 안고 등을 쓰다듬고만 있었다.
“엄마,나 잘 했어? 열심히 연습했는데…… .”
“그럼, 우리 딸 장하다.정말 장해.”
“캐나다인 친구한테랑,한국 친구한테랑 보여 주고 싶었어.내가 누구인지.”
어느 결에 다가왔는지 대니는 그녀 앞에 엄지 손가락을 꼽아 보이며
“쿡영,쉬이스 채고.”
어눌한 한국말로 칭찬했다.먼발치서 보고 있던 ESL McDonald선생님이 다가왔다.
“How are you? Mrs.Lee.”(안녕? 미세스 리.)
얼룩진 얼굴을 걱정하며 그녀는 대답을 했다.선생님은 국영이를 감싸 안으며
“She is an exellant student .You must be proud of her.” (그애 훌륭한 학생이야.자랑스럽지?)
“But her english is not enough to study.Mine,too.”(하지만 영어로 공부하기엔 부족해.나도 그렇고.)
“Don’t worry.It’s improoving.Your English is better than my Korean.You should keep your own language and culture at home.You live in multicultural society.”(걱정마라.향상하고 있으니까.네 영어는 내 한국어보다 나은데.너희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집에서 지키는 게 좋아.넌 복합문화사회에서 살거든.)
영어를 못하는 게 흠이 되지 않는다니.놀라운 생각의 반전이었다.영어가 인격의 척도가 될 수 없고 성공의 열쇠도 아니야?그저 한국말과 같은 등급의 언어일 뿐인데.5 년 뒤에는 중국어가 그 자리를 차지할지,아니 한국어가 세계공용어가 될지도 모르는 걸.눈앞이 환해왔다.그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거운 맷돌을 들어낸 듯 홀가분해졌다.그리고 부족한 영어 때문에 늘 움츠러들던 어깨도 자연 펴지는 듯했다.과연 ESL 선생님답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딸애의 눈물자욱을 닦아 주고 다시 객석으로 돌아왔다.페르시안의 날으는 융탄자,우크라이나인의 민속춤,특별출연으로 인디안의 사냥춤 등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각 문화의 고유성을 느꼈다.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아니라 그저 다름이 있을 뿐.선진과 후진이 아니라 다양함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각기 색다른 아름다움으로 접근해 왔다.그녀는 편견없는 눈으로 세상을 공평하게 보는 균형감각을 얻게 되었다.잠자리의 겹눈처럼 하나마다 다른 초점을 맞추는 다중가치관을 터득하게 된 것이었다.스스로 세계의 중심에 서있음을 실감했다.그 동안 넓은 세상에 살면서 좁은 우물 속에 가둔 것도 자신이요,표류하는 고도에서 외로워 한 것도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다.
딸애와 함께하는 귀가길은 참 신났다.개선장군을 모시고 돌아오는 병사의 심정이었다.딸애는 어미닭 품안에 오돌거리고 떨던 병아리가 아니라 의젓하게 제 영역을 가진 장수닭이었다.온실의 여린 화초가 아니라 들녘에서 거친 바람 받으며 꽃 피우는 민들레였다.그녀의 키를 훌쩍 넘은 딸애를 대견스레 바라 보았다.
“엄마,이 꽃이 뭔지 알아?되게 예쁘지?”
하필이면 조롱을 입가에 달고 있던 영국여자를 연상케 했던 종이꽃을 가리키며 국영이가 물었다.
“이쁘기는,가짜꽃 같잖아.근데 뭐니? 많이 본 것 같은데.”
“양귀비래.원예용.중국에 그 왜 절세미인 양귀비 있잖아.이렇게 섹시했던가 봐.”
아하,맞다.양귀비다.너무 커서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꽃.그렇다면 서양여자가 아니라 동양여자일세.그 동안 혼란과 미몽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아 온 건 아닐까.그녀를 비웃었다고 생각한 영국여자 역시 그녀의 피해의식이 준 망상이 아닌가 생각했다.로마에 와서도 로마법을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통하지도 않은 사람의 도리나 인정 따위를 기대했다가 무너진 실망감에서.그럴지도 모르지.넓은 대양에 나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걸고 좁은 섬에 갇혀 있었으니까.자못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엄마,맥도날드 선생님이 자원봉사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던데.하까 마까?”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국영의 우리말 발음을 들으며 웃었다.우리말 발음이 어눌해지면 영어가 무르익어 가나?
“무슨 봉산데.”
“ESL반 막 들어온 학생들 도와주는 거.공부도 거들어 주고,생활도 안내하면서.선생님하고 말 안 통할 때 통역도 해 주는 거래.”
“당연히 해야지.덕분에 각국 친구 사귈 좋은 기회인데.우리 따님 영어실력이 그렇게 뛰어난거야?”
오랜만에 칭찬을 듬뿍 들은 국영이는 아기 때처럼 왼쪽 발을 흔들며 깡총거렸다.고운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던 국영이는 의젓한 규수였건만 깡총대는 그 애는 갈 데 없는 소녀였다.그저 그녀곁에 작은 천사로 영원히 남아줬으면 싶었다.
“엄마,걱정 많이 했지?미안해.나 이제 친구 생겼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축하해.엄마한테도 소개해 줄 수 있니?”
“응,대니야.그 애 굉장히 착해.이 번 행사 준비하면서 얘기 많이 했어.내가 걔한테 우리말 가르쳐 주고 걘 내 영어공부 도와 주기로 했어.잘 됐지?”
국영이는 정원에 핀 소담스런 수국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저렇게 환한 미소를 언제보았던가 참으로 아스라이 느껴졌다.
“엄마,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았어.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데 ‘난 한국인이다,한국인.’하고마구 소리치고 싶더라구.”
여전히 왼쪽발을 까딱거리며 외발로 깡총이는 국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고개를 제끼고 두 팔을 한껏 하늘로 뻗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부채를 손에 들려 주면 그대로 부채춤 회전동작이 될 듯 싶었다. 푸른 하늘과 국영이의 빨간 재킷은 태극무늬가 되어 청명한 허공에 펄럭였다.눈이 부셨다.여직 그녀를 짓눌렀던 두려움과 불안, 소외감과 그리움이 국영이의 비윈이 담긴 저 춤을 통해 하늘에까지 이르리라.이제 국영이는 외로운 섬과 섬을 잇는 무지개가 되려 한다.과거의 언어와 미래의 언어를 소통하는 메신저가 되려 한다.
국영아,날아라.훨훨 날아라.
하얀 뭉게 구름,까만 먹장 구름 헤치고
이 하늘 끝까지,저 우주 끝까지 힘차게 날아라.
첫댓글 여전한듯 그렇게 흘려 보내는 우리 사는얘기가 좋은 소설이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