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 온 친구의 의문”
김유훈(밴문협)
나의 카나다 생활, 벌써 2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언제나 젊음이라 생각했던 내 나이 내년이면 정부에서 노인연금을 준다고하니 실감이 안간다. 그동안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빠르고 특별히 이룬 것이 없어 좀 후회가 든다. 유학과 목회는 미완성 그리고 커피가게와 지금의 트럭커 일까지 나의 발자취가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함께 지내온 많은 분들에게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과거 한국에서의 나의 삶은 극히 적은 분들만이 알고 계신다.
지금은 원로가 되신 조영택 목사님은 30년전의 나의 전도사 시절부터 잘 알고 계신 분이시다. 당시 그분은 한창 잘 나가던 대형교회의 담임이셨지만 우리 담임 목사의 절친으로 우리 교회에 자주 오셨고 수양회, 야유회등을 함께 하였던 분이시다. 그 당시 나는 허허벌판 잠실에 상가건물 3층에 있는 교회 에서 교육전도사를 하였다. 그 후 사택에 와서 살라는 말에 무작정 순종하여 그 3층사택에서 생활하였다. 말이 사택이지 베니다로 벽을 만들고 바닥에는 스치로폴을 깔고 그 위에 장판을 한 사택이였다. 그러나 그 때는 신학생은 그렇게 시작하는 줄 알았다. 전도사 월급은 달랑 5만원, 나는 도저히 생활이 안되어 1년만에 그만두었다.
그즈음 ,친하게 지냈던 “Mr.우” 라는 청년집사 친구가 있었다. 미국에서 살다온 부잣집 아들인데 결혼하고 싶어 한국에 왔다가 나를 알게 되었다. 나는 창신동 골목길가에 어느집 문칸방에 세들어 살았다. 부억조차 없는 한평짜리 월셋방인데 나와 아내 그리고 어린 아들은 행복하게 지냈다. 그리고 이 청년 집사까지 같은 방에서 딩굴며 지냈다. 정이 그리워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여 우리집에서 이불하나에 발을 맞대고 밤이 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며 지냈다. 그친구는 당시 자가용이 있어 우리식구를 태우고 여러 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그에게 짝을 찿주기 위해 교회 청년들을 소개해 주기도하였다.
우여곡절끝에 친구는 배필을 만나 미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그는 떠나면서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하였다. 그리고 “전도사님 건강하시고 언제 또 만날 수 있겠지요?”하며 우리는 공항에서 헤어졌다.
세월이 흘러 내가 카나다에 온 후 그 친구가 생각이 나서 지인을 통해 그의 연락처를 찿은 후 전화로 연락하니 너무 반가워 언젠가 밴쿠버에 꼭 오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0여년 전 그는 가족들과 함께 밴쿠버에 오게 되었다. 아내와 세 아이들과 함께 차를 몰고 이곳까지 나들이를 왔다. 나는 그를 만나 반갑게 대하고 우리가족과도 상봉하였다. 그리고 그와 가족들을 데리고 우리집에 왔다. 집앞에 다다르니 그 친구는 발을 움직이지 않고 집을 한참 쳐다 보았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 하니 집안에 들어온 후 얼굴은 천정을 보고 눈은 커다랗게 뜨고 입은 벌어진 채로 멍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그가 하는 첫 마디가 “김목사님, 이집 우리가 온다고 빌린 것 입니까?” 나는 “아니 빌리다뇨, 나와 우리 가족이 사는 우리집 입니다” 그러자 그는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그리고 다시한번 “네, 이집이 목사님 집이라고요?”하여 나는 “네”하며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아침 준비를 부지런히 하고 함게 식사를 하였다.
사실 친구가 놀랄만도하였다. 우리가 한국에서 헤어질 때, 부억조차 없는 단칸방에 살 때를 생각해보면 지금은 방이 다섯에 큰 2층집에 내가 살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북한에서 온 탈북자도아니고 미국 L.A.에서 온 사람이 한다는 말이 “이집 우리 온다고 빌린 집입니까?”를 듣고 나는 더욱 놀랐다. 아마 친구는 놀랐다기 보다 충격을 받은 듯 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했던 그가 한동안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친구가 나에 대하여 궁굼한 것을 물어 보았다면 나는 대답을 해 줄 생각이였다. 2년간 사업을 잘 하여 중대형 아파트 두 채를 만들어 놓고 다시 목회로 돌아 올 수 있었노라고 그러나 친구는 나에 대한 궁굼증을 묻지도 않은 채 의문을 품고 미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