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을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코흘리개로 부터 반백이 넘는 촌노에 이르기까지 온 군민이 민족의 노래로 애창하고 있다. 그것은 망국의 슬픔을 안은 애절한 가사로 이루어졌기에 지금까지 슬플때나 기쁠때나 아득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를 작사한 왕 평(王平)이란 사람을 아는이는 별로 없다. 작사를 했는가 하면 작곡을 했고, 극본을 만들었는가 하면 연극 영화에 출연한 다재다능한 그가 영천 출신이란 사실은 더더욱 생소하다.
왕평의 본명은 이 응호(應鎬) 또는 두희(斗熙)다. 그는 1908년 영천군 영천읍 성내동에서 토호로 이름난 천석군 이권조(李權祚)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태어난 지 7년만에 생모를 잃고, 연달아 둘째 어머니, 세째어머니도 사별하였다. 이처럼 불운한 환경속에서도 어린 왕평은 남달리 천재적인 소질을 보이면서 티없이 자랐다.
영천보통학교를 다닐 때 그의 예술적 재질에 놀란 어른들은 신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보통학교의 신학문을 배우면서 부친으로부터 한학까지 배워 졸업후 곧 서울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천재적인 재질의 일화로는 중학교를 졸업한 16살 때 그의 조부 산소 묘비를 자기 손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소년왕 평에겐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구문명과 유학 사상을 바탕으로 한 집안과의 와중에서 반항이 싹트고 불행한 가정 환경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여 결국 어릿광대라는 조소를 받으며 무대위에서 울고 웃으며 정열을 불태운 것이다.
그가 처음 발을 들여 놓은곳은 순회악극단 연극사였다. 이러한 그를 집안에서는 완전히 버린 자식으로 취급했다. 1927년의 일이다. 어느 여름날 황해도 백천여인숙에는 악극단들이 장마속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평양, 신의주, 진남포를 거쳐 내려온 이들은 공연을 포기한 상태로써 여관비마저 바닥이 나고 있었다. 당시 일행은 바이올린 연주에 전수린, 작곡에 이교성, 가수겸 배우 이애리수, 무대 감독겸 각본에 왕 평등 20명이었다. 이들은 연일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문득 허물어진 옛 궁터에 개성 만월대를 생각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빈 터, 깨어진 기왓조각만이 그 옛날 영화를 추억하듯 산만하게 흩어지고 잡초는 무성해 지금도 날을 듯 궁녀들이 오갈 것 같은 전수린은 바이올린으로 은빛같은 영감을 불러 일으키고 왕 평은 신들린 사람처럼 가사를 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국민을 열광케한 조선의 세레나데로 지칭 받았던 “황성옛터”였다.
그해 가을 이들은 서울 공연에서 청순한 가수 이애리수를 통해 발표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거의 광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옷소매로 눈시울을 닦으며 한 두사람따라 부르다가 나중에는 합창으로 변해지더니 다시 흥분하여 발을 구르며 의자를 던지는 등 대소동까지 벌어졌다.
결국 전수린과 왕평은 일경에 불려 다니면서 모진 고초를 당하였고, 황성옛터는 공연금지곡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 후로도 계속 불리어졌고 대구의 모 보통학교에서는 음악시간에 이 노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파면까지 당했다. 이것으로 왕평, 전수린, 이애리수가 일약 대스타로 갈채를 받게 된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더우기 당시 사회에서는 연예계가 지식인들의 집합소처럼 생각되었기에 그 인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영문학자 하이윤이 콜롬비아에, 극작가 이서구가 시에론에, 왕 평이 포리돌에 문예부장으로 있었고 국회의원 서 민호가 빅타 레코드의 전속 악극단 단장으로 지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들이 연예계에 몸담은 연유는 생활상의 방편이기도 했지만 일경의 눈을 피한 일종의 신변 보호책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 나팔부는 딴따라에 끼었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당시 연예계에 민족주의자의 온상구실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시설이나 재정이 부족하여 지방으로 유랑하며 남의 집창고나 여관집 마당같은 곳에서 멍석을 깔고 평상을 무대삼아 공연을 할정도이다.
게다가 흥행이 안되면 여관비도 못줘 인질로 배우를 잡혀 두기도 했고 아니면 여관집 아들이 극단을 따라 다니며 흥행이 잘된곳에서 돈을 받아 가기도 했다. 1928년 왕 평이 포리돌에 문예부장으로 있으면서 유명한 기생 가수 선우일선을 픽업시켜 민요풍의 “대한팔경”이란 노래를 취입시켜 또 공전의 선풍을 일으켰다.
때는 일제의 횡포가 극을 이룰때였다. 땅을 뺏기고, 양식을 빼앗긴 농민들은 저마다 서러운 모습으로 북만주둥지로 떠나고 있었다. 연일 조국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갔다. 이럴때 나온것이 대한팔경이었다. 무턱대고 못살겠다며 이 나라를 떠나 버리다면 참으로 누가 남아 주인이 될것인가, 일본과 싸우더라도 이 땅에서 우리의 조국에서 싸워야 할게 아닌가. 일종의 조국애 운동이요, 또한 떠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귀환운동이었다.
이렇게 왕평은 민요적이면서도 흙냄새 풍기는것, 조국애가 넘치는 가사를 썼다. 왕평이 작곡과 작사를 한 “조선행진곡”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끝내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만해도 레코드 제작은 일본서 했던만큼 가사만이 국내에서 인쇄해 총독부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것이었다.
레코드 제작이 완료되어도 내용이 불순하다고 판매 금지되면 회사의 손해는 이만저만 한것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심한 재정난으로 포리돌이 설립한지 1년 남짓 지나서 해산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심한 재정난에 외국인 경영이었기 때문에 가수나 작곡가는 거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오케이(o,k) 레코드로 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평은 굽히지 않고 많은 민요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레코드 드라마인 “항구의 일야”가 있다. 왕 평 자신이 작사.작곡한것을 눈물의 여왕 전옥과 함께 취입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라디오 드라마의 효시가 된 것이다. 이렇듯 재능과 애국으로 당대를 풍미한 왕 평도 죽음은 저버릴 수 없었다.
1943년 북평 강계에서 “돌아온 아버지”란 연극 공연중 무대위에서 40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참고문헌] 韓國레코드歌謠史, 新聞스크랩

왕평선생 (1908~1941)
본 명 : 이응호(또는 이두희) 출생지 : 영천시 성내동
부친인 이권조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영천보통학교를 나와 배재중학교를 다녔다. 필명은 왕평, 편월, 추야월이며 대표작은 ‘황성옛터’‘조선팔경’‘능수버들’등이 있다.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과 ‘황성옛터’는 동일 함 】
폴리돌 레코드사의 문예부장 시절에 우리나라 대표격인 민요가수‘선우일선, 왕수복, 왕초선’ 등과 작곡가 ‘김용환’을 배출시켰다. 선우일선의 대표곡으로 ‘능수버들’, ‘대한팔경(조선팔경가)’을 들 수 있고 왕수복은 ‘고도의 정한’, ‘부두의 연가’로 유명하다.
연극 극본창작에도 조예가 깊어 ‘경성야화’‘코스모스 호텔’ 등 조선연극사와 연극사에서 극본을 썼으며, 특히 당시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우던 전옥과 출연한 ‘항구의 일야’는 인기가 좋았다.
대표곡인 ‘황성옛터’는 왕평이 지은 시에 전수린이 곡을 붙였으며 가수인 이애리수가 불러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노래다. 그후 빅터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된 이애리수는 민중의 노래인 황성옛터를 1932년에 취입하여 5만장이나 팔렸다. 당시 축음기 1대를 보유하면 부자집이라 했으니 5만장의 SP판이 팔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황성옛터가 실린 빅터 레코드판(1932년)을 보면 ‘고요한 장안’, ‘황성의 적’으로 두곡을 취입했다.
1941년 4월경 ‘포리돌 실연단’을 조직하여 조선 북부 지방 순례의 길에 올랐으나 7월 31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신카나리아와 ‘남매’라는 극에 출연하다가 무대 위에서 쓰러졌다. 오케 레코드사에서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1943년 김해송 작곡, 조명암 작사, 남인수 노래인 ‘오호라 왕평’을 발매하였다.
1996년 왕평선생을 기념하여 제1회 왕평가요제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올해로 11회째를 맞게 된다. 왕평가요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가요제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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