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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6월 9일 주일
[(녹) 연중 제10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0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를 보내시어 우리를 악령의 지배에서 구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음의 무기로 우리를 도와주시어, 우리가 날마다 악의 세력을 이기고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파스카 승리에 참여하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주 하느님께서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15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4,13─5,1
형제 여러분,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5,1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3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율법 학자들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완고함을 비난하시며 다음과 같이 이르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심지어 신성을 모독하는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의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서(1,10 참조)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성령으로 병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데, 그 행위의 근본적 의미는 죄의 용서입니다. 곧 성령의 행위는 죄의 용서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죄를 용서하는 성령의 행위를 거부합니다.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자비를 청하며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 용서하시는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의 행위를 거부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성령의 행위는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행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의 용서와 구원을 믿지도 받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모독한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용서를 거부하고 우리를 죄의 상태에 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비를 청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죄든 모두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미사 때마다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하는 예방주사 같은 한 마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령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성령을 모독할까요? 성령에 자신 안에서 행하려고 하는 일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방은 100% 가능하지만, 일단 걸리면 100% 죽는 병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광견병입니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특이하게도 우리 몸의 면역세포를 다 피해 다닙니다. 뇌까지 도달하기 전까지는 세포도, 신경도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뇌에 도달하면 100% 사망입니다. 아직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지만, 광견병은 예방주사만 맞으면 100% 예방됩니다. 그런데도 한 해에 지구상에서 6만 명 정도가 광견병으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자기 몸 안에 광견병 예방주사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 광견병 바이러스는 무엇이겠고 또 그 광견병을 무력화시키는 예방주사는 무엇일까요? 광견병은 ‘공수병’이라고도 하는데, 물을 무서워해서 목이 말라서도 죽습니다. 사실 물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을 거부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성령은 마치 성모 마리아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십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긍정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잉태시키지 못합니다. 사람 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무라이가 된 천민 아이는 기둥에 들어가 죽은 어머니의 피로 도망치고 싶은 이기적인 자아가 죽었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의 자아, 곧 뱀을 죽이러 오시는데 그것을 긍정하고 있다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게 됩니다.
2002년 4월 29일, 독일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총기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에르푸르트라는 도시의 구텐베르크 김나지움(10~19세 학생들이 다니는 인문계 학교)에서 퇴학당해 앙심을 품은 한 학생이 교사 열두 명과 여학생 두 명 등 총 열여섯 명을 죽인 사건입니다.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떨어진 로베르트(19세)는 기말시험을 치르지 않기 위해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각되어 퇴학 처리되었고, 복수심에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한 교사가 나섰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총은 난사하는 그 앞에 60세의 라이너 하이제 교사는 복면을 쓴 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복면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가르친 학생 로베르트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이제 교사는 자기 가슴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총을 쏘고 싶으면 쏴라. 내 눈을 보고 방아쇠를 당겨보란 말이다.”
로베르트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오늘은 실컷 쐈습니다. 이제 재미가 없네요.”
로베르트는 순순히 총을 내려놓았고 하이제 교사는 그를 빈 교실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습니다. 잠시 후 로베르트는 교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 아래]
하이제 교사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임을 인정할 때 영향을 줍니다. 사실 퇴학 당한 것은 로베르트 자기 탓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마다 하는 “내 탓이요!”는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만들고 말씀과 성체로 오는 성령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기도입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원수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힘들고 암에 걸려 죽어가는데 그것이 어떻게 나의 탓입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수 같은 인간도 용서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고정원 씨 같은 경우입니다. 그는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탓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새워 기도했고 성령께서 용서할 힘을 주셔서 그를 양자로 삼게 하셨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분 앞에서 부족한 게 다른 사람 탓이라고 하면 그 선물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 15일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댈러스 인근에 ‘보현사’엘 다녀왔습니다. 스님도 성탄 때는 성당으로 왔다고 합니다. 보현사에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절의 주지 스님이 ‘여자 스님’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남자 스님인 줄 알았는데 여자 스님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아직 예불 중이라서 법당에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암송했습니다. 그렇게 10분 남짓 기다리면서 성당과는 사뭇 다른 사찰의 예불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끊임없이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웠고, 불자들도 따라 하였습니다. 성당의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찰의 예불은 목탁과 염불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당은 제대와 신자 석이 있고, 신자 석은 대부분 의자로 되어 있는데 사찰은 아직 의자가 아닌 방석이 깔린 바닥에 앉는 것 같았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과 차를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스님은 공양하고 가라고 했는데 차만 마시고 왔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천주교회가 동양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종교인 불교가 서양에 전해지는데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미국에서는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주일로 옮겨서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드리면서 언젠가 미국에서도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비슷한 질문을 아담의 아들 카인에게도 하십니다.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카인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아담은 어디에 있다고 대답하기 전에 알몸이라서 숨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스스로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카인도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카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이 스스로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보현사의 지암 스님이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나 어디에 있느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스님이 되라고 하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사제로 33년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찰의 분위기와 사찰의 문화가 제게는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보현사에서 17년을 주지 스님으로 지내고 있는 지암 스님은 전임 신부님들과도 인사했다고 합니다. 스님 또한 성당의 사제가 되라고 하면 어려울 것입니다. 이미 출가해서 30년 넘게 불가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당의 분위기와 성당의 문화가 생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께서도 스님과 제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께서도 스님과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스님이 ‘탐, 진, 치’를 멸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자들에게 전하며 팔정도의 삶을 살아간다면 부처님의 물으심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복음삼덕과 향주삼덕’의 가르침을 교우들에게 전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면 저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함 없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먼저 묻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의 죄를 묻기 전에, 그들이 뉘우칠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에 대한 ‘틀’을 새롭게 하십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를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는 모두가 불자이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당신과 맺어집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작은 벗을 벗함으로써
작은 벗을 벗하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낮은 벗을 섬김으로써
낮은 벗을 섬기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외로운 벗을 안음으로써
외로운 벗을 안으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짓눌린 벗을 일으킴으로써
짓눌린 벗을 일으키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버려진 벗을 품음으로써
버려진 벗을 품으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슬퍼하는 벗을 위로함으로써
슬퍼하는 벗을 위로하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서러운 벗을 돌봄으로써
서러운 벗을 돌보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굶주린 벗을 먹임으로써
굶주린 벗을 먹이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죄지은 벗을 용서함으로써
죄지은 벗을 용서하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더러운 벗을 씻김으로써
더러운 벗을 씻기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어두운 벗을 비춤으로써
어두운 벗을 비추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죽어가는 벗을 살림으로써
죽어가는 벗을 살리신
당신과 맺어집니다
오늘의 성인
성 에프렘(Ephraem)
신분 : 부제, 교회학자, 성서학자
활동지역 : 에데사(Edessa)
활동연도 : 306?-373년
같은이름 : 애프램, 애프렘, 에프라임, 에프램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Nisibis) 태생인 성 에프라임(또는 에프렘)은 어느 이방인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양친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됨에 따라 18세 때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니시비스의 성 야고보(Jacobus, 7월 15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후일 이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325년의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성 야고보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시리아의 문헌에 의하면 350년의 페르시아 침입 때 그의 기도 덕분으로 니시비스가 해방되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나, 363년에 요비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니시비스가 재차 페르시아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는 로마 땅인 에데사 근교의 동굴에 거처를 정하고는 신자들에게 설교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제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곳에서 그의 저서 대부분을 저술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370년에 카이사레아(Caesarea)로 가서 성 바실리우스(Basilius)를 찾았으며, 돌아오는 길에 372년과 373년 겨울의 냉혹한 기근을 덜어주는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그는 에데사에서 운명하였다.
성 에프라임은 성서적 근원을 밝히는 비중 큰 저서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교의 및 수덕 생활에 관한 수많은 글을 시리아어로 남겼다. 또한 그는 이단을 반박하는, 특히 아리우스(Arius) 이단과 영지주의를 공격하는 중요한 논리를 서술하였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외에도 그는 복되신 동정녀에 대하여도 신심이 깊었는데, 그가 마리아의 원죄 없음을 단언하였기 때문에 흔히 ‘원죄 없으신 잉태’의 증인으로도 불린다. 또한 그는 공식 예절에 찬미가를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 교육에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전례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업적은 일찍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그리고 라틴어로 번역되어 자주 사용되었는데, 그의 니시비아어 찬미가와 절기에 따른 찬가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하여 그는 ‘성령의 하프’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황이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한 것은 시리아 교회 출신으로 서방 교회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 그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성 골룸바(Columba), Saint Columba, San Columba di Iona Abate
신분 : 신부, 수도원장, 선교사
활동지역 : 이오나(Iona)
활동연도 : 521-597년
같은이름 : 골롬바, 꼴롬바, 꼴룸바, 콜럼, 콜롬바, 콜룸바, 콜름실
콜(Colm), 콜럼(Colum) 그리고 콜름실(Colmcille)로도 알려진 골룸바는 아일랜드 도느갈의 가탠에서 왕가의 후예들인 페들리미드와 에트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마도 위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영세하였고, 모빌에서 교육받고, 여기서 부제가 되었다.
그런 후 그는 라인스터에서 수학하였으며, 클로나드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그곳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에는 성 모비의 지도아래 글라스네빈으로 갔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인하여 543년경에 이 도시가 소개되었을 때, 그는 울스터로 가서, 아일랜드의 거의 모든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성당에서 설교하고 수도원을 세우면서 약 15년을 지냈다.
그런 후 563년경에 이 지역을 떠났다. 여기에는 상당히 큰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아일랜드에 도착한 성 예로니모의 시편(핀니안 소유) 사본을 처음으로 복사하였는데, 이것이 성 핀니안과 논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핀니안이 이 사본을 요구하자, 국왕 디아르메이드는 골룸바의 사본은 핀니안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글자 그대로 골룸바는 디아르메이드에게 칼을 뽑게 되었는데, 이것은 골룸바와 함께 성소를 찾아온 콘노트의 쿠난이 디아르메이드의 부하에 의하여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양가의 사람들은 끝없는 혈전이 벌어졌는데, 큘 드렘느 전투에서는 약 3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
텔타운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골룸바에게 책임을 물어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 결과, 골룸바는 아일랜드를 떠나기로 결정하였으며, 수많은 외인들을 개종시킴으로써 죽을 때까지 보속하기로 단단히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563년에 그는 12명의 친척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연안에 있는 이오나로 갔으며, 여기서 수도원을 세웠는데, 아일랜드의 교회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픽트족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전념하였으며, 브루드 국왕을 개종시켰고, 마침내 픽트랜드 전역을 복음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큰 성과가 나온 이면에는 큰 기적이 하나 있었다.
네스 강에는 큰 괴물이 살고 있었는데, 골룸바가 성호를 긋고 기도함으로써 이를 퇴치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졌고, 기적에 대한 명성으로 인하여 수도원의 방문자들이 줄을 섰다.
골룸바가 서방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오나 출신 수도자들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회칙은 성 베네딕토의 회칙이 정착되기 전까지 전 유럽에서 통용되었다.
그는 성령의 기쁨을 가슴에 안고 살은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성 골롬바는 겔의 마리아라고도 부르는 성녀 브리지다와 성 바트리시오와 함께 다운패트릭에 묻혔으며, 그분들과 함께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이다
ㅓ
성 펠리치아노 (Felician)
활동년도 : +297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뻴리치아노, 뻴리치아누스, 펠리치아누스, 펠리키아노, 펠리키아누스
성 프리모 (Primus)
활동년도 : +297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쁘리모, 쁘리무스, 프리무스
80세의 성 프리무스(Primus)와 성 펠리키아누스(Felicianus, 또는 펠리치아노)는 형제지간으로 로마의 귀족이었으나 그리스도인이 되어 자선활동을 하는 등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특히 감옥을 즐겨 방문하여 죄수들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란 신분이 드러나게 되자 오랜 동안 피신해 있다가 결국은 체포되었다. 그들이 이교도의 신에게 희생 제사 드리기를 거부하자 즉시 투옥되어 매를 맞았으며, 관리들은 그들을 아주 천천히 죽이기 위하여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참수하였다고 한다. 640년 교황 테오도루스(Theodorus)가 그들의 유해를 산 스테파노 로톤도(San Stefano Rotondo)에 안장하였다.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Anne Mary Taigi)
활동년도 : 1769-1837년
신분 : 증거자
지역 :
같은 이름 : 낸시, 니나, 메리, 미리암, 애나, 애니, 앤, 타이기
안나 마리아 타이지(Anna Maria Taigi)는 1769년 5월 29일 이탈리아의 시에나(Siena)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약종상이었는데 사업이 망하여 가난에 찌들게 되자 로마(Roma)로 이주하였다. 안나의 부모는 가정부로 들어갔고 안나 자신은 가난한 어린이를 교육하는 단체에 보내졌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그녀는 소녀 가장이 되었다. 면사 공장에서도 일했고 귀족 집의 하녀로도 일해야 했다. 어느덧 처녀로 성장한 그녀는 1790년에 도미니쿠스 타이지(Dominicus Taigi)라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런데 그 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사제에게 총고백을 하고나서 마음을 일신하였다. 그녀는 수년 동안 천주의 종 수도회의 안젤루스(Angelus) 신부에게 고해를 보고 또 영적 지도를 받았는데, 늘 갓 회개한 사람처럼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헛된 것을 끊어버리고 세속적인 모든 쾌락을 추호도 탐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나는 바느질 품삯으로 남편의 적은 수입을 도왔고 가정에 충실하였다. 한편 영신적으로는 굉장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놀라운 기적까지 허락하셨고, 탈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예언하는 힘을 주셨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탄의 간교와 영적인 무미건조함으로 큰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1837년 6월 9일 68세의 일기로 운명하였고, 1920년 5월 30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