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효의 선비정신,
일본은 충의 사무라이 정신.
도쿠가와는 정권을 잡은 후 봉건적인 지배체제를 튼튼히 하기 위해 무가정권의 통치이념과 부합하는 주자학을 도입했다.
주자학은 신분차별을 인정하고 대의명분을 내세워 군신관계와 충군애국을 중시하기 때문이었다.
일본 주자학파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는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의 퇴계학파 유학자인 강항으로부터 주자학을 배웠다.
당시 조선이나 일본은 똑같이 주자학의 [ 충효사상 ]을 통치이념으로 도입했으나, 그 과정에서 각각의 정치적 풍토와 사회적 관습에 따라 도입의 방향을 달리했다.
즉 충효사상 중에서도 조선은 효(孝)를 중시한 반면에, 일본은 충(忠)을 중시했다. 그 결과 조선의 지배계층과 지식인 사회에서는 효와 문(文)을 숭배해 [선비사상]이 강조되었으나, 일본의 경우에는 무(武)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무사도로 포장된 [ 사무라이 정신 ]이 무가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다.
따라서 조선의 선비사상은 도덕적 방어적인 데 비해,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은 호전적 공격적인 성향으로 흘렀다.
바꾸어 말하면 같은 [ 사(士) ] 자에 대해서도 조선에서는 [ 선비 사 ], 일본에서는 [ 사무라이 사 ]로 그 뜻을 달리했다.
그래서 일본의 무사는 붓 대신에 칼을 소중히 하고 평상시에도 칼을 차고 다녔기 때문에 칼을 찬 모습은 무사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졌다.
일본의 호전적인 사무라이 정신은 대외적으로는 많은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아는 바와 같이 [ 조선 침략 ], [ 대만 침공 ], [청. 일 전쟁], [ 러. 일 전쟁 ], [ 중. 일 전쟁 ], [태평양 전쟁 ],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다른 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암살, 테러, 습격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문을 주시한 한국과 무를 중시한 일본의 풍토는 오늘날에도 개인끼리 심하게 다툴 경우 그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인은 [ 염병할 ], [ 육시랄 ], [ 벼락맞을 ], [ 급살맞을 ]등으로 죽음을 뜻하거나 남녀의 성기를 소재로 한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 붓으면서 언성을 높이고 싸우는 데 비해, 일본인들은 이 정도까지 이르게 되면 말이 필요없이 흉기나 주먹 등 폭력으로 해결한다.
한국어에는 무지막지한 욕설의 종류나 그 숫자가 많은 반면, 일본어에는 그런 어휘가 한국어에 비해 10분의 1도 되지 않고, 내용도 욕이라 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예를 들면 심한 욕설이라고 해봤자 ばかやろう(바보 녀석), ちくしょう(멍청한 놈)등으로 종류가 단순하고 뜻도 약해 일견 점잖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한번 싸우고 나면 상대방과 다시는 상종을 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심하게 욕을 퍼붓고 싸우고서도 다음날 만나서는 언제 싸웠는가 싶을 정도로 다정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인은 말로 분을 삭이고, 일본인은 행동으로 분을 삭이는 풍토가 조성된 것이다.
한 곳에서 일생 동안 목숨을 건
いっしょうけんめい( 열심히 ) 정신
지배계급인 [무사]와 피 지배계급인[농민]과 [상. 공인]으로 차별화된 엄격한 사회적 틀 속에서 다른 신분으로 이동하는 것이 금지 되었다. 신분이 대대로 세습되었던 애도 시대는 서열과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는 생활형태가 몸에 배이게 되었고 주어진 신분을 천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였다.
.........첨부파일 로~~
......자료제공:광주경신여자고등학교 일본어교사 최영탁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