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대산면 김해김씨 삼현파 시조묘(파시조는 누구인가, 시조묘의 역량은?) 1. 원시조와 종파시조 * 김해김씨는 450만명, 8개종파, 148개파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대의 대성(大姓)이다. 판도판서공파는 김해김씨의 8개 종파중 하나이자 김유신의 직계종파 3개(김령군파, 사군파, 삼현파)중 하나이고 흔히 삼현파(三賢派, 또는 삼현공파)라고 불리운다. * 김해김씨의 시조(원시조)는 김수로왕(42~199, 향년158세)이고 13세손 김유신을 거쳐 49세손 김관이 삼현파의 기세조(1世) 卽 파시조이다.
2. 의문점 이상은 일반인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파시조 묘를 답사하면서 삼현파는 판도판서공파와 동일한 종파인가? 大派시조묘는 으레히 대명혈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판도판서 김관의 묘가 너무 허술하므로 지금의 묘소는 진실된 김관의 묘일가? 시조묘의 發福기간과 역량은 어느 정도될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3. 청도 삼현(三賢)파의 상계(上系) * 김관(金管, 1250~1348)은 김해 병동리 어병마을(왕으로부터 병풍을 하사받았다 하여 어병마을이라 한다)에서 출생하였고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고려말 육조의 으뜸)를 역임하고 유학진흥에 공을 세웠다. 96세로 卒하여 김해 대산(현재 창원 대산면 유등리374-4) 저소산(지금의 저산)에 辛坐로 부인과 합장하였다.(김종직이 쓴 김극일 정려비 참조)
* 김관(1세)-김문숙(2세)-김항(3세)-김서(4세)-김극일(5세)의 順으로 내려오다가 6세때 김건(金健)등 6형제가 태어나 勢를 불리게 되어 6개 支派로 분파되었고 그 밖에 김극일의 방계인 군수공익(益)파와 동덕랑무(武)파가 있다. 3세손 김항은 판관, 4세손 김서는 의흥현감을 지냈다. 청도 출신인 5세손 극일, 7세손 일손, 8세손 대유가 정조(正祖)때 효성이 지극한 학자로서 청도삼현(三賢)으로 불리운 까닭에 그 후손들을 삼현파라고 통칭하게 된다.
* 5세손 극일(1382~1456, 청도 각북면 명대리 나축산에 영모재와 묘)은 시묘할 때 호랑이도 감동하여 지켜준 효자라고 한다. 조부(김항)와 서조모를 극진히 모셨고 1416년 조모를 풍각현 경계에 장사지내고 4년후 조부를 합장했다(김종직이 쓴 정려비 참조). 7세손 탁영 김일손(6세손 맹의 아들, 청도 화양읍 백곡1길1-5, 종택)은 무오사화때(1498년) 김종직의 제자로서 스승을 두둔하였다는 이유로 참형당하였고, 8세손 삼족당 김대유는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잠시 관직에 있은 뒤 청도에 제자를 가르치는 삼족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무오사화로 일가들이 분산되고 왜란때 문적이 소실되는 바람에 선조묘를 봉행치 못하다가 1518년 자계서원(紫溪書院, 청도 이서면 서원길62-2)을 창건하고 김극일을 봉행하다가 1661년 사액(賜額)을 받고 삼현을 봉안하였다.
4. 분파 윗 선조에대한 내력을 밝히기 어려운 상황에서 1685년 종손 김성율이 문정공 판도판서 김관을 派祖로 정하고 삼현파를 분파하고 숙종때 병인보를 발간하였다. 김관과 자손의 묘는 낙동강 저소산에 있다는 전설이 있으나 찾지 못하던중 1921년 지석을 찾아 묘소를 개축하고 묘소 인근에 1955년 저산서원(창원 대산면 유등리333-5)를 준공하고 대동보를 발간하였다.(족보와 묘비명 참조)
5. 누구를 파시조로 할 것인가? * 이상을 종합해보면 김관, 아들, 손자중 절가된 김저는 김해 병동리에 살았고 김해 대산 저산에 묻혔다. 4세손 김서는 청도로 이사하고 부모 김항(김관의 손자)을 모셔왔고 그의 아들 김극일은 조부와 庶조모를 극진히 모신 덕에 국가로부터 효자로 공인받았다. * 파시조가 될수 있는 요건은 특정 혈족무리에대하여 공통되는 직계선조 중에서 다른 계열의 후손이 없는 선조이다. 門中은 派人중에서 성년남자(지금은 성년여자를 포함한다. 즉 문중은 미성년자를 제외한 파인의 모임이다.)를 말한다. * 문제는 족보를 볼때 김극일에게 태일(군수공)이라는 형제와 경일(통덕랑)이 라는 사촌형제가 있다. 이들은 청도 삼현의 후손이 아니다. 그러므로 삼현파가 곧 판도공파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방계를 포함하는 공통선조는 김항, 김문숙, 김관이다. 파시조자격이 있는 선조가 상하로 여러분이 있다면 이런 경우 보통 제일 가까운 선조(삼현파의 경우 김극일)또는 세거지 입향조를 파조로 모신다. 실상은 김극일의 방계가 있기 때문에 1685년 삼현파의 종손이 파조 적격자중 最上位 선조(김관)까지 추급하여 파조를 모셨다고 추측된다. 꼭 삼현파를 내세운다면 파시조를 김극일로 좁게 잡아야 될 것이다.
* 요컨대 삼현파는 판도판서공파 아래의 지파(支派)로서 판도판서 김관을 기세조(파시조)로 하고 김극일을 중시조(또는 支派시조)로 한다고 보아야 맞다.
* 삼현파 상계도--- 6. 시조 묘 * 김관의 묘가 있다는 저소산은 현재 창원 대산면 유등리 333-5 저산서원 일원이다. 서원에 위패를 모셨고 유등리352-6에 묘가 있다. 시조 김관의 묘는 상석은 있으나 비석은 없고 그 아래 묘는 족보로 보아 아들 부부와 손자(김저) 묘인데 상석조차 없다. 일반 평민의 묘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다. 보통 종파시조 묘쯤 되면 명혈이고 엄청 치장을 하는데 여기 묘는 주먹만한 동산의 정상에 바람을 맞고 있고 누구의 묘인지 알기도 어렵다. 일행 5인이 모두 결혈처는 아니라 했다. 이 묘소는 경주 밀양손씨 시조묘와 생김새가 홉사하다. * 저소산 대국--- * 창원 저소산 김관 묘--- 7. 시조의 역량(力量)은 어느 정도일가? * 우리의 관습은 4대까지는 기제사를 지내고 그 윗대는 시제를 지낸다. 조상의 혼령은 4대까지 후손의 집에 머문다는 생각 때문이다. 墓이장업자들은 백년이 지나면 보통은 유골은 삭아 없어진다고 한다. 비결록을 보면 만대영화지지등등의 大名堂이라고 기재된 혈처가 있으나 발복이 과장된 것이다. 시조묘는 대명당인 경우가 많이 있으나 백골이 흙으로 돌아간 천년전의 묘가 후손의 길흉에 관여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보통의 묘처럼 3대 길어도 7대 정도까지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해야 된다. 그 이상은 후손의 하기나름이고 길흉화복의 요인은 음택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 후손의 숫자가 수천명에 이르러면 시조혼령이 후손개개인의 길흉화복에 관여할 수 있는 역량을 벗어난다고 보아야된다. * 시조는 건강한 유전자를 물러줄 수 있으면 되고 음양택은 몇 대에 걸친 번성에 보완적 요소가 될뿐이다. 그러므로 김관의 묘가 명혈이 아니라하더라도 종파의 시조가 될 수 있고 후손들이 뿌리를 찾아 경배(敬拜)하는 것은 당연하다. DNA를 분석하면 主人姓氏를 추측할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발전하고 있다. 뿌리를 찾는 것은 자기를 되돌아본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김극일은 지극한 효자이니 혼령의 음덕으로 또 다른 명당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2023.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