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영화제 프로그램의 특징은 독립영화의 비약과 중견감독의 건재로 요약될 수 있다.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그리고 미국과 유럽에 이르기까지 주류 영화 산업 바깥에서 작업해온 감독들이 수작을 내놓았다. 각국의 영화제에서는 익숙한 거장 대신 낯선 신인들이 눈길을 끌었고, 기존 영화계의 매너리즘에 자극이 될 만한 작품들이 박수갈채를 받았다. 영화의 거장들에 비하면 그다지 명성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기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조금씩 전진하는 중견감독들의 발걸음은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이번 부산영화제에 상영되는 총 244편의 작품 가운데 각 부문 별로 주목할 만한 영화를 소개한다.
개 폐막작
개막작인 <도플갱어>는 현재 일본에서만 개봉된 상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번 영화에서도 일상에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적인 그 무엇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장애인용 로봇 의자를 개발중인 하야사키(야쿠쇼 코지)가 갑자기 자신의 분신을 만나게 되는데, 이 분신이 저지르는 엉뚱한 일을 목격하면서 이전에 몰랐던 자아의 이면을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스릴러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것이 프로그래머의 설명이다. 이 영화는 현재 국내 수입된 상태이며, 영화제 끝무렵인 10월 10일 전국의 극장에 개봉된다. 폐막작인 <아카시아>는 안정된 삶을 누리는 결혼 10년차 부부가 고아 소년을 입양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심혜진이 오랜만에 영화계에 컴백해 열연했으며, 원로배우 고 김진규의 아들 김진근이 그의 남편으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벌써부터 호러 장르를 빌어 중산층 가정의 양면성을 파헤치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기형 감독은 2일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여우계단>을 제외하고 지난 여름에 개봉된 한국 공포영화를 모두 보았으며, 이야기나 주제 면에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아카시아>에서는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아시아 영화의 창
앞서 말했듯 이번 부산영화제 아시아 영화 부문은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독립영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오후 5시>,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감독 가린 누그로호의 <새 인간 이야기>, 차이 밍량의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안녕, 용문객잔> 등은 아시아 독립영화의 도도한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사스로 인해 치명타를 입은 홍콩 영화계에서도 <어둠의 신부> <푸보> <사랑은 죄가 아니야> 등의 수작 독립영화가 나왔다. 또한 <포스트맨 블루스>의 사부 감독이 일본 아이돌 스타 V6를 기용한 <하드 럭 히어로>, 지난해 <바보들의 배>를 선보였던 오사카 출신의 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신작 <후나키를 기다리며> 등 일본 독립영화도 눈에 띈다. 베를린영화제 예술공헌상을 수상한 리 양 감독의 <맹정>,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중국 독립영화 감독 쿼이지언의 <아야야>, 이란 청년들의 일탈을 그린 파르비즈 샤흐바지의 <긴 한숨>, 홍콩 조니 토의 <PTU>,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파키스탄 영화 <침묵의 물> 등은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놓쳐서는 안 될 작품으로 꼽는 영화들. 그밖에 익숙한 아시아 감독들의 신작도 다수 초청됐다. 무랄리 나이르의 <사마귀>,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파리>, 자파르 파나히의 <붉은 황금>, 로우 예의 <자줏빛 나비>, 린쳉솅의 <로빈슨 표류기> 등은 지난 칸영화제에 소개됐던 아시아 영화들이 그것. 태국의 펜엑 라타나루앙이 일본 배우 아사노 타다노부를 기용해 찍은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 나카다 히데오의 <라스트 신>, 바흐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루나 파파>)의 신작 <양복 한 벌>, 승려 감독 키엔체 노르부(<컵>)의 신작 <여행자와 마법사>도 상영된다.
뉴커런츠
아시아 신인 감독들의 영화를 소개하는 ‘뉴 커런츠’는 모두 13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무엇보다 부산영화제 PPP를 통해 선보였던 프로젝트가 모두 5편 포함돼 있다.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캐롤 라이의 <꿈꾸는 풍경>, 태국 핌파카 토위라의 <하룻밤의 남편>, 아프가니스탄 세디그 바르막의 <오사마>, 홍기선 감독의 <선택>, 중국 디아오이난의 <방직성경찰> 등이 그 작품들. 이 가운데 <오사마>는 탈레반 정권 시절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이 겪은 억압을 고발한 놀라운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장기수 김선명의 삶을 그린 <선택>은 허문영 프로그래머가 “만일 인권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지 않았더라면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밀고 싶을 만한 감동적인 영화”라고 호평한 작품이다. 배우 출신 감독들의 영화도 두 편 포함돼 있다. 차이 밍량의 페르소나인 이강생의 연출 데뷔작 <불견>, 그리고 유릭와이의 <명일천애>에서 조용원과 함께 출연한 디아오이난의 <방직성경찰>이 그 영화다.
한국영화 파노라마
한국영화 파노라마에는 모두 12편의 작품이 초청됐다. 먼저 충무로 바깥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눈에 띈다. 전수일 감독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김진아 감독의 <그 집 앞>, 그리고 이윤택 감독의 <오구>가 그 작품들. 올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장화, 홍련> <똥개> <살인의 추억> <바람난 가족> 등도 초대됐으며, 6인 감독의 인권영화 프로젝트인 <여섯 개의 시선>과 이수연 감독의 <4인용 식탁> 등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품들도 상영된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작품으로는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민병천 감독의 <내추럴 시티>, 그리고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이 부산행 티켓을 선사받았다.
한국영화 회고전
올해부터 독립된 섹션으로 마련된 ‘한국영화 회고전’에는 국내 액션영화의 개척자 정창화 감독의 작품들이 소개된다. 정창화 감독은 1953년 <최후의 유혹>으로 데뷔한 뒤 불모 상태였던 한국 액션영화를 가장 대중적인 장르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번 회고전에는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1968) <황혼의 검객(1967) <위험한 청춘>(1966)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1) <노다지>(1961) 등 총9편이 상영된다. 특히 정창화 감독이 홍콩에서 활동할 때 만들었던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은 필견의 영화다. 당시 홍콩영화로는 최초로 미국에 수출되어 1973년 진미 흥행 10위권에 들었으며, 홍콩 권격영화가 전세계에 진출하는 데 교두보가 된 작품이다.
월드시네마
이번 월드 시네마에는 전세계 44개국 99편의 상영작이 초청됐다. 남미와 아프리카를 제외한 미주 유럽 각국의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된다. 월드 시네마 역시 미국과 영국 등의 독립영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거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받은 마이클 윈터버텀의 <인 디스 월드>, 에딘버러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데이비드 매킨지의 <영 아담>,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을 각각 수상한 <미국의 광채>와 <역장> 등이 그 작품들. 또한 칸 심사위원 대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누리 빌게 세일란의 <머나먼>,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파트리스 셰로의 <그의 형제>, 로테르담 영화제 타이거상 수상작인 산티아고 로사의 <이방인>,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크리스토퍼 보에의 <리컨스트럭션> 등 수작들도 소개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 피터 그리너웨이의 <털시 루퍼의 가방>, 미카엘 하네케의 <늑대의 시간>, 론 셰르픽(<초급 이태리어 강습>)의 <윌버>, 로저 미첼(<노팅 힐>)의 <마더>, 자크 드와이옹(<뽀네뜨>)의 <라자>,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아버지와 아들>, 제임스 아이보리의 <프렌치 아메리칸> 등 익숙한 감독들의 신작도 포진해 있다. 전양준 프로그래머는 다구르 카리의 <내 이름은 노이>(아이슬랜드), 코르넬 문드럭초의 <유쾌한 날들>(헝가리), 피터 칼린 네처의 <마리아>(루마니아), 크리스토퍼 보에의 <리컨스트럭션>(덴마크,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 야니스 에코노미디스의 <절망으로 불타는 우리집>(그리스) 등 출중한 신인들의 작품을 주목하라고 강조했다.
와이드 앵글
단편과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는 ‘와이드 앵글’에는 26개국 73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단편으로는 지난해 <물의 여인>을 선보인 일본 감독 스기모리 히데노리의 <03+>, 칸영화제 단편부문 황금종려상을 받은 호주 영화 <크래커 백>,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대상 수상작 <달려라 토끼야>, 베를린영화제 단편부문 금곰상 수상작 <터널> 등이 초청됐다. 다큐멘터리로는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정책을 비판한 리 허시의 <아만들라!>, 선댄스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받은 앤드류 재러키의 <프리드먼가 사람들 포착하기>, 오스트리아 울리히 사이들(<개 같은 날>)의 다큐멘터리 <예수님, 당신은 아십니다>, 스웨덴 얀 트로엘의 <오드너에 대하여>, 독일 안드레아스 드레센(<그릴 포인트>)의 <헨릭에게 한표를!>, 이란의 초저예산 다큐멘터리 <그들만의 영화천국> 등이 볼 만하다. 애니메이션 라인업은 예년보다 다소 약한 편.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일본 키타로 코사카 감독의 <나수: 안달루시아의 여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인 우크라이나 단편 <9번 전차>, 세계 최초의 컬러 그림자 애니메이션으로 알려진 중국 마오유에 감독의 <소강로상> 등이 초청됐다. 특별상영되는 국내 독립영화도 주목할 만하다. 오점균 감독의 <생산적 활동>, 이하 감독의 <1호선>, <마리 이야기>의 이성강 감독이 연출한 단편 <오늘이> 등이 소개된다. 김곡, 김선 감독의 실험영화 <자본당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로 기묘한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오픈 시네마
올해 오픈 시네마는 아시아 대중영화의 시장 경쟁력을 점치는 자리가 될 듯하다. 서구의 대중적인 작품을 상영해왔던 예년과 달리, 총 9편의 상영작 가운데 아시아 영화가 무려 5편이나 초청됐기 때문이다. 인도 아몰 팔레카의 <아나핫>, 태국 프라차야 핀카엡의 <옹박>, 홍콩 조니 토의 <턴 레프트, 턴 라이트> 등이 상영되며, 일본영화로는 기타노 다케시의 <자도이치>와 이즈츠 카즈유키(<전국노래자랑>)의 신작 <겟 업>이 초청됐다. 조엘 코엔의 <인톨러블 크루얼티>, 독일 볼프강 베커의 <굿바이, 레닌>, 뉴질랜드 니키 카로의 <웨일 라이더>, 어린이를 위한 덴마크 애니메이션 <곰이 되고 싶어요> 등을 만날 수 있다.
크리틱스 초이스
지난해 ‘월드 시네마’에 ‘비평가 주간’으로 포함되어 있던 섹션을 독립시켰다. ‘새로운 시네아스트의 발견’이라는 모토에 걸맞는 8편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심층적인 Q&A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유릭와이의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작 <명일천애>를 비롯해 벨기에 감독 토마 드 티에르의 <내 머리 속의 깃털>, 러시아 감독 라리사 이고레브나 사딜로바의 <릴리아에게 사랑을>, 일본 여성감독 니시카와 미와의 <산딸기>, 스페인 마크 레샤의 <카트린 부인은 어디에?> 등이 그 작품들. 한국영화로는 박경희 감독, 추상미 주연의 <미소>가 여기에 포함됐다.
특별기획 프로그램
올해 부산영화제가 준비한 특별기획 프로그램은 모두 다섯 가지다. 먼저 한국과 캐나다 수교 40주년을 맞아 준비한 ‘캐나다 영화 특별전’. 드니 아르캉의 칸영화제 각본상 및 여우주연상 수상작 <야만적 침략>, 가이 매딘의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장 프랑수아 풀리오의 <대단한 유혹> 등 최근작이 상영된다. 또한 프랑수아 지라르(<레드 바이올린>)의 <글렌 굴드에 대한 32개의 단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 아톰 에고이안의 <조정자 The Adjuster> <패밀리 뷰잉> 등 캐나다 현대영화의 수작들이 선보인다. ‘경계에 선 영화: 중국 독립영화 특별전’에는 1990년대 중국영화를 이끌어온 지하전영의 대표작 11편이 초청된다. 중국 독립영화의 시작을 알린 장위엔의 <마마>를 비롯해, 장밍의 <무산의 비구름>, 왕샤오슈아이의 <극도한랭>, 로우예의 <주말 연인>, 지아 장커의 <소무>, 왕차오의 <안양의 고아> 등이 상영된다.
‘무지개를 기다리며: 아프가니스탄과 영화’에는 아프가니스탄 영화인이 만든 작품과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모았다. 앞서 소개한 <오후 5시> <오사마> <인 디스 월드>를 비롯, 마지드 마지디(<천국의 아이들>의 <맨발로 헤라트까지>, <칸다하르>의 주인공 넬로파 파지라와 폴 제이가 공동 연출한 <칸다하르로의 귀환> 등 총 12편을 묶었다. ‘파로허저드 특별전: 뉴 이란 시네마의 누이’는 이란의 지식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이자 영화감독 포루흐 파로허저드를 소개하는 자리다. 파로허저드가 직접 연출했으며 이란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다큐멘터리로 평가받는 <검은 집>, 그리고 파로허저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혼의 거울>이 선보인다. ‘특별상영’으로는 뉴커런츠 심사위원장인 루마니아의 거장 뤼시엥 핀틸리에의 <니키와 플로> <떡갈나무> <잊지 못할 여름>과 스웨덴 거장 얀 트로엘의 <누가 그의 죽음을 보았는가> <함순>을 상영한다.
이번 부산영화제는 남포동의 대영시네마 3개관과 부산극장 3개관, 그리고 해운대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상영장과 메가박스 10개관 등 총 17개 관에서 나뉘어 펼쳐진다. 개폐막식 예매는 먼저 9월 18일과 19일 이틀간 진행되며, 일반 상영작 예매는 9월 24일부터 영화제 폐막일까지 계속된다. 자세한 사항은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www.piff.org)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