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6시에 버스7대가 출발하여 충주휴계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양산통도사 주차장 도착
주지스님께서 손을 흔들어 주십니다.
일주문 一柱門
고려 충렬왕 31년 (1305)에 창건한 것으로 ‘靈鷲山 通度寺’ 라는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이며,
기둥 좌우의 ‘國之大刹 佛之宗家’ 는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통도사 천왕문( 通度寺 天王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
천왕문은 절 안으로 들어올 때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통과하는 곳으로, 통도사 전체의 대문이자, 통도사 경내 세개의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下爐殿)의 출입문에 해당한다. 이곳에는 천상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산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모시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에 귀의(歸依)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그들을 인도하는 수호신이다. 불교 세계에서 설정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동쪽은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은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은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은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다스린다. 사찰에 천왕문을 세우는 까닭은 사찰을 지킨다는 뜻도 있지만,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수오신들이 정 안의 모든 악귀를 물리치는 맑고 깨끗한 곳(淸淨道場)이라는 신성한 관념을 갖게 하려는 뜻도 잇다. 수미산은 부처가 거처하는 곳이니, 수미산을 이 땅에 재현한 곳이 절이라면 천왕문을 통과한 중생은 이미 부처의 세계에 들어선 셈이다. 이 건물은 1337년(고려 충숙왕 6)에 취암(翠岩)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성 수법으로 미루어볼 때,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이후에 중건(重建)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은 장식을 거의 하지 않은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하고 소박한 구조이다. 다른 사찰의 천왕문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중앙에는 통로를 두고 좌우로는 나무로 만든 네 명의 험상궂은 천왕상을 배치하였다. 중앙 통로를 통과하는 동안 좌우에서 무서운 수호신이 눈을 부릅뜨고 위협적인 자세로 지켜보고 있으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자연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동방 지국천왕
북방 다문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극락전(極樂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을 봉안하는 극락전은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고도 하며, 또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평안한 삶을 누린다 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여래가 다스리는 곳이 서방극락정토이기 때문에 극락전은 언제나 중심 불전의 서쪽에 위치하여, 참배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향하도록 세워저 있다. 극락정토는 고통이 전혀 없고 즐거움만 있는 이상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세계를 염원하는 사람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외우며 극락에서 누리는 새로은 삶[極樂往生]을 기원한다.
우리나라에서 아미타 신앙은 그 어떤 신앙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여, 6. 7세기 무렵부터 이미 대중 속에 자리 잡았다. 삼국 사이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생겨난 수많은 희생자가 극락으로 갈 것을 바라는 기도가 자연적으로 아미타 신앙으로 귀의(歸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극락전은 우리나라의 사찰에서 대웅전 다음으로 많이 세워진 건물이다. 그만큼 아직도 아미타여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과 함께 그 좌우에 관음(觀音)과 대세지(大勢至)보살을 봉안한다. 이곳 통도사 극락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이 극락전은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창건되었다과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초에 중건(重建)되었다. 이 건물은 통도사에 있는 세 개의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下爐殿]에서 중간 위계(位階)에 해당하는 것으로, 외관의 평면 구조 역시 그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에 건물 자체도 화려하고 대웅전에 버금갈 정도로 내부 장식도 많은데, 이 극락전 역시 그렇다. 작은 건물임에도 팔작지붕에 받침기둥[活柱]을 갖추고 있다.
극락보전의 벽화
극락보전벽의 반야용선 벽화(반야용선안의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
영산전과 극락전옆의 호혈석
통도사 호혈석 - 스님을 사모한 처녀
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통도사에서 가장 높은 산내암자 백운암에 홍안의 젊은 스님이 홀로 경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장차 훌륭한 강백이 되기를 서원한 이 스님은 아침 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기원하면서
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직 산기슭 군데군데에 잔설이 남아 있던 어느 봄날. 스님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경을 읽고 있었다.
문든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스님, 계십니까?』
『뉘신지요?』문을 연 스님은 이번엔 귀가 아니라 눈을 의심했다.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바구니를 든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늦은 시각, 이렇게 깊은 산중에 웬일이십니까?』
『소녀, 친구들과 나물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면서 길을 찾아보았으나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막막하던 차 불빛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하룻밤 묵어가도록 허락하여 주시면 그 은혜 잊지않겠습니다.』
『사연인즉 딱하나 소승 아직 젊은 나이에 혼자 수행 중이고, 방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으니 매우 난처하군요.』
『하오나 스님, 이 밤에 소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소녀의 간곡한 청을 들은 스님은 어두운 산길에 처녀를 혼자 돌려 보낼 수 없다고 생각됐다.
난처하긴 했지만 단칸방의 아랫목을 그 처녀에게 내준 스님은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스님의 경 읽는 음성은 낭랑했다. 고요한 산중에 울려퍼지는 그 음성은
마치 신비경으로 인도하는 듯 처녀를 사로잡았다.
처녀는 그밤부터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됐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처녀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왔으나 마음은 늘 백운암 스님에게 가 있었다.
스님을 사모하는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가 마침내 처녀는 병을 얻게 됐다.
마을에서 지체 있는 가문의 무남독녀인 처녀는 좋다는 약을 썼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처녀의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좋은 혼처가 나와도
고개를 흔드는 딸의 심정을 알지 못해 안타깝기만 했다.
『얘야, 네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어찌된 연유인지 속 시원히 말해봐라.』
처녀는 지날날 만났던 젊은 학승 이야기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숨김없이 고백했다.
사연을 들은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백운암으로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스님이 아니면 제 딸이 죽습니다. 한 생명 건지신다 생각하시고 제 딸과 혼인하여 주십시오.』
아무리 애걸하여도 젊은 스님의 굳은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안가서 처녀는 병이 깊어져 죽게 됐다.
『어머니, 소녀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불효를 용서하옵소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님 얼굴 한 번만 보고 죽는다면 소녀 원이 없겠사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스님은 마음속으로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처녀 집을 방문치 않았다.
처녀는 그만 한 맺힌 가슴을 안고 눈을 감았고, 그 뒤 영축산 호랑이가 됐다고 한다.
그 후 여러 해가 또 지나 그 젊은 스님은 초지일관하여 드디어 산중 강사의 영광을 누리게 됐다.
연회가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면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휙」하고 큰 호랑이가 감로당 지붕을 이리저리 뛰는 것이 아닌가.
「어흥, 어흥」 호랑이는 문을 할퀴면서 점점 사납게 울부짖었다.
대중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변일세. 필경 대중 속에 누군가가 저 호랑이와 무슨 사연이 있을 걸세.』
『그렇다면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져보세. 그럼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이 아닌가.』
연회석에 참석한 스님들은 저고리를 벗어 하나씩 밖으로 던졌다.
호랑이는 하나씩 받아서는 그냥 옆으로 던졌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마지막으로 새로 취임하는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받더니 마구 갈기갈기 찢으면서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 것이었다.
대중들은 강백이 바로 호랑이가 노리는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이때였다. 강백 스님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는 아무래도 소승의 속세 인연인가 봅니다.』
말을 마친 스님은 합장 예경하고 바깥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다.
아무도 스님을 말리려 들지 못했다. 호랑이는 그 강백을 나꿔채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튿날 날이 밝자 산중의 모든 대중은 강백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깊은 골짜기마다 다 뒤졌으나 보이지 않던 강백 스님은 젊은 날 공부하던
백운암 옆 등성이에 상처 하나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강백 스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심볼」이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통도사에서는 호랑이의 혈(血)을 눌러야겠다고 하여 큼직한 반석 2개를 도량 안에 놓게 되었다.
이를 「호혈석(虎血石」「호석(虎石)」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산신각에서 20m 남쪽
응진전 바로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남아있다.
※산중의 왕 호랑이는 산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마치 외호신처럼 사찰의 산신각에 등장한다.
그러나 산신신앙은 불전에는 근거가 없는 신앙으로 불교가 산악숭배의 토속신앙을 습합한 형태다.
하근기의 대중교화를 위한 한 방편으로 조선조부터 사찰에 산신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웅전이나 극락전과 달라 「전(殿)」이라 부르지 안고 「각(閣)」이라 칭한다.
출처 : 백설암
범종각
양산통도사 동종(梁山通道寺銅鐘) 보물 제11-6호
조선중기에 승려 사인비구(思印比丘)가 만든 종이다. 이 종은 맨 위의 용뉴(龍紐),
종 몸통의 상대와 하대, 유곽(乳廓)등을 모두 갖춘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이다.
상대는 위 아래 두 줄로 범자(梵字)가 배치되었고 유곽 안에는 아홉개의 유두가 있는데
중앙의 하나가 특별히 돌출되었다. 종 몸통 가득히 명문이 새겨진 까닭에 유각 사이의
보살상은 작게 표현되었다.
종으로는 유일하게 팔괘(八卦)가 돌려 새겨져 있다는 점도특징이다.
종의 명문에는 1689년에 사인비구가 만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사인비구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약 50여 년 동안 경기 경상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승려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종 만드는 장인(匠人)으로도 알려져있다.
영산전(靈山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
영산(靈山)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가르침[佛法]을 제자들에게 전하던 곳이다. 바로 이 영산을 이 땅에 재현한 것이 영산전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참배하는 것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파한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한다. 이 영산전은 신앙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진 통도사의 세 영역 가운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하위 영역[下爐殿]의 중심 불전(佛殿)으로 동서로 양옆에 약사전과 극락전을 거느리고 있다. 이런 구성은 조선 후기의 불화(佛畵)에서 흔히 삼세불(三世佛)로 표현되었다.
삼세불은 중앙에 자리 잡은 현세(現世)의 부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왼쪽에 자리 잡은 과거의 부처 약사불(藥師佛), 오른쪽에 자리 잡은 미래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말한다.
세 건물로 이루어진 구조는 바로 이러한 삼세불의 배치와 일치한다.
영산전의 건축 연도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송곡선사(松谷禪師)사 중건(重建)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사찰의 중심 불전으로는 드물게 소박한 형식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아마 통도사 전체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과 격을 맞추기 위해 그런 양식으로 꾸민것으로 짐작된다. 외형상으로 보면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범한 건물이지만, 정면의 기둥 간격이 넓어 외관이 위풍당당하다. 이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다포계의 화려한 장식을 사용함으로써 건물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내부 벽에는 다보탑(多寶塔)을 비롯하여 법화경의 여러 내용을 담은 품격 높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장면으로 묘사한 팔상도(八相圖)는 1775년(영조 51)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불화의 화풍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통도사 3층석탑(通度寺 三層石塔) 보물 제1471호
극락전(極樂殿)앞에 위치한 이 3층석탑은 잘 다듬은 4매의 큰 돌[地臺石) 위에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 석탑 양식은 이중 받침돌[二重基壇]로 기단부를 구성하였다.
상층 받침돌의 가장자리에는 각각 모서리기둥[隅柱]을 새기고 그 사이에 받침기둥 을
두어 목조 건물의 양식을 모방 하였다.
하층 받침돌의 각 면에는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眼象)을 조각 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석탑의 장식 기능을 강조하던 통일신라 말기 즉 9세기 이후의 특징으로 이 석탑의 건립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3층의 몸체(塔身)는 모서리기둥만 새겨 두었을 뿐 별다른 조각이 없다. 4단의 받침돌 위에
올린 지붕돌 역시 당대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꼭대기 부분 에는 받침을 설치하고 있다.
그 위에 여러 가지 장식을 올렸는데 현재 장식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전체적인 조성방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엽이나 고려시대 초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1987년에 해체하여 복원 하였다. 그 당시 상층 받침대 부분 안에서 조선시대
백자(白磁)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탑이 조선시대에 개축되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또 하층 받침돌 아래의 다진흙 속에서는 금동(金銅)의 소형불상 2구와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 되었다.이들 유물은 현재 이곳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탑 기단 안에서 발견된 불상과 유물은 탑을 건립하기 전에 땅의 악한 기운을 누르며 땅을 다질때 묻은것이거나 혹은 탑의 건립과정에서 행하였던 여러 단계의 의식과 관련이 있는것 같다.
만세루(萬歲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만세루는 본래 법회(法會)나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할때 사용하던 누각(樓閣)이다.
이 건물의 창건연대는 알수없지만 1644년(인조 22)에 영숙화상(靈淑和尙)이 중건(重建)
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의 외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이 높고 그 간격이 넓어
실물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본래 누각은 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올라간 2층의 다락집으로
기둥만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다. 그런데 이 건물은 낮은 받침(基壇)위에 단층
건물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사면 기둥 사이에 모두 창호(窓戶)를 설치함으로써 오히려
불당과 같은 느낌을주고 있다. 이들 창호는 제작 수법이나 재질로 보아 근래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바닥을 낮게 만든 이유는 건물을 편리하게 이용하고자 하는데 있었을
것이다. 보통 산지에 위치한 절의 누각은 산지 경사로 인해 2층 누각이라 하더라도 절
안의 마당에서는 곧 바로 누각의 2층으로 오르게 설치 되어 있다.
그러나 통도사는 평지에 세워진 절이기 때문에 이곳 2층의 누각이었다면 의식을 거행할때
오르내리기에 크게 불편 하였을 것이다. 건물의 규모로 보아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전국 승단 행정(僧團行政)을 총괄하던 으뜸 사찰로의 위엄과 권위를 잘 나타내는 건물이라
하겠다. 건물은 장식을 별로 하지 않은 익공계(翼工系) 팔작(八作)집으로 누각의 일반적
인 형태를 따랐다. 정면중앙에 있는 양기둥 위의 건물 밖으로는 용의 머리를 새기고
안으로는 물고기 꼬리 모양의 용꼬리를 장식하여 출입구로서의 중심성을 강조한 점이
특이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만세루" 라는 건물의 현판은 6세의 신동(神童)이
썼다고 한다.
약사전(藥師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이 건물은 동방의 정유리 세계(淨溜璃世界)에 있으면서 모든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불성을 닦도록 도와주는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세계를 다스리므로 약사전은 언제나 중심불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약사여래는 과거 세상에서 약왕(藥王) 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임무를 수행하면
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해 12가지의 큰 소원(大願)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므로 과거를 상징하는 부처이자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 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약사 신앙은 삼국 시대부터 유행하였는데 당시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가속출하자 약사여래는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하였다.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병에 걸렸을 때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약사경을 염불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도 국난이 닥쳤을 때마다 약사 도량(藥師道場)을 열어 부처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고 했을 만큼 약사 신앙이 널리 유행 하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창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후 중건된
것이다. 건축구조로 보면 통도사의 세 개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下爐殿]의 중심 불전인
영산전과 유사하나 영산전과는 위계적 차이가 있다. 우선 건물규모가 작을뿐만 아니라
전면의 기둥 간격도 영산전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장식 역시 간소하다. 이러한 차이는
중심불인 석가모니불과 약사불의 위계적 차이를 표현하는 건축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번잡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장식 솜씨 등이 오히려 건물의 완성도를 높여 주고있다.
화엄전
영각
불이문(不二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이곳 불이문은 대웅전(大雄殿)과 금강계단(金剛戒壇)으로 향하는 마지막 문(門)인 동시에 통도사의 세 개 영역 가운데 중간 영역[中爐殿]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문이다. 불이(不二)란 “진리” 그 자체를 다르게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는 이 문을 통해야만 만날 수 있으며, 이 속에서 참된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실현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문을 통해 참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 모든 번뇌를 벗게 되기 때문에 이 문을 다른 말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통도사 불이문은 1305년(고려 충렬왕 31)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의 건물이 언제 중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세부 기법으로 볼 때 조선 중기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지만, 중앙 기둥의 간격이 넓어 훨씬 웅장한 느낌을 준다. 정면에는 벽이 없이 각 칸마다 판문(板門)을 설치한 점과, 다포계(多包系)의 팔작(八作)지붕을 연출한 점이 천왕문과 다르다.
이것은 아마도 불이문을 경계 삼아 나누어진 중간 영역[中爐殿]과 하위 영역[下爐殿]의 위계를 상장적으로 나타내려고 한 듯하다. 특히 중앙에 대들보를 쓰지 않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로 받쳐서 지붕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구성 방식이 독특하다. 그리고 기둥도 통도사 건물 중에는 가장 뚜렷하게 배흘림 양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건축 연대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황화각
통도사 석등(通度寺 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
석등은 절 안의 어둠을 밝힐 뿐만 아니라, 빛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비춰줌으로써 온갖 중생을 깨우져 선(善)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등불 하나하나는 부처님이 계신 수미산(須彌山)과 같고 등(燈)을 밝히는 기름[燈油)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하여, 불가(佛家)의 공양구(供養具)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므로 석등은 언제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배치된다.
이 석등의 제작 연도는 불확실하나 조형 양식 등으로 미루어볼 때 고려시대 초엽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석등은 둥근 형태의 연꽃 받침대[연화대 蓮花臺] 두 개, 그 사이를 연결한 팔각기둥[간주석 竿柱石], 그리고 윗부분에는 불을 놓는 화사석(火舍石)과 지붕돌[옥개석 屋蓋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4개의 커다란 불창[火窓]이 있는 화사석은 파손된 것을 뒤에 보충해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석등의 조화가 잘 맞지 않는다. 연꽃 받침은 아래로 향한 아래 받침[下臺石]과 위로 향한 위 받침[上臺石]이 있는데, 아래로 향한 연꽃받침은 물 속의 진흙과 같은 탁한 세상을 상징하고 위로 향한 연꽃 받침은 광명(光明). 청정(淸淨), 부처. 보살 등의 세계를 상징한다. 두 세계를 연결하는 8각의 돌기둥은 이상(理想)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불교의 여덟 가지의 올바른 길(八正道)을 상징한다. 이 석등은 언뜻 보아 4각형의 석등처럼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흔치않은 부등변(不等邊) 8각 석등이란 점에서 석등의 변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음전(觀音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건물이다.
관세음보살은 원만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관음보살을 모신 곳을 가리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관음보살은 세상을 구하고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아무런 인연이 없는 중생이라도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항상 마음속에 새겨서 공경하고 섬기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민간 사회에서 널리 신봉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관음신앙이 유행하엿으며, 지금도 보살을 모신 불전 가운데 관음전은 가장 흔하게 눈에뜨인다.
대체로 관세음보살은 연꽃이나 감로병(甘露甁)과 같은 물건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모양은 본래 깨끗하지만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는 중생의 마음을 이 감로수로 씻어준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러 형태의 관음보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경주 석굴암에서 불 수 있는 열한 개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楊柳觀音), 스물일곱 개의 얼굴과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등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관음전은 통도사의 세 개 영역 가운데 중위 영역[中爐殿]에 있는 세 불전 중에서 가장 위계가 낮은 건물로, 일직선상의 맨 앞에 위치하고 있다.
통도사 관음전은 1725년(영조 원년)에 용암(龍岩)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뒤 여러차례 중수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형태로, 다포계(多包系) 팔작(八作)지붕이다. 다포계이기는 하나 보살의 불전이라는 위계(位階)에 맞추어 화려한 장식은 하지 않았다.
불전 내부에는 중앙에 등불을 들고 중생들을 부처의 세계로 안내하는 관세음보살을 비롯하여, 남쪽으로 구도행각을 하는 선재동자가 반복하여 그려져 있다.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용화전은 미륵불(彌勒佛)을 봉안한 건물로 미륵불이 출현할 곳이 용화세계(龍華世界)의 용화수(龍華樹) 아래라는 데서 이명칭이 유래하였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涅槃)한 후 56억 7천만년 뒤에 이 땅에 출현하여 석가모니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부처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 나라에서는 미륵불이 희망의 부처로 삼국시대부터 폭넓게 신앙되었다.
이 용화전은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725년 (영조원년)에 청성대사(淸性大師)에 의해 중건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으로, 정면의 중앙 기둥 간격이 넓어 직사각형의 평면 구조를 띠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당은 측면의 앞쪽 가장자리에 출입문을 두지만, 이 용화전은 특이하게 건물 측면 중앙 칸에 문이 있다. 외부 장식은 정교하거나 화려한 편은 아니지만, 중앙 기둥머리에 용머리를 연출하는 방식으로 장식적인 요소를 갖추었다. 내부에는 용머리와 연꽃, 봉황의 머리 등을 조각하여 이상 세계의 하늘을 연출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미래에 미륵불이 다스리는 용과 봉황이 날아다니고 연꽃이 만발한 풍요롭고 안락한 용화 세계를 상징한 듯하다.
미륵불
통도사 대광명전(通度寺 大光明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
대광명전은 통도사의 세 개 영역 가운데 중위 영역[中爐殿]의 중심 불전으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봉안하는 곳이다. 비로자나불은 “널리 밝은 빛을 두루 비춘다.”[光明遍照]는 뜻으로, 곧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의 부처이자 모든 부처 중에서 근본이 되는 부처이므로 이 부처를 법신불(法身佛)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곳을 대광명전 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하며,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따서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한다.
법당에서 이 부처는 연꽃무늬 받침대[蓮花臺) 위에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쥔 형상으로 앉아 있다. 이 손모양[智拳印]은 곧 부처와 중생이 하나임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비로자나불에서만 볼 수 있다. 그리고 연꽃받침은 우주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연화장세계를 다스리는 비로자나불은 곧 우주 전체를 총괄한다.
이 영역의 건물은 통도사의 하위영역[下爐殿)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즉 관음전과 용화전, 대광명전이 남북 방향으로 일렬로 서서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배열 순서에 따라 건물 규모도 다른데, 위로 갈수록 위계가 높은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영조(英祖) 원년(1725)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다포계(多包系) 팔작(八作)지붕의 건물로 비교적 안정적인 비례감을 갖추고 있으며, 세부 수법은 하위영역의 건물들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정면 중앙의 양 기둥 머리에 새긴 섬세하고 정교한 용머리를 비롯해 예술적으로 표현한 장식들은 하위 영역의 건물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장중하다. 내부 공간 역시 연꽃과 용, 봉황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중심 불전으로서의 격식과 권위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도 보물1042호 -사진 펌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노사나불(盧舍那佛) ↑
석가불(釋迦佛) ↑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노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釋迦佛) 등 삼신불을 그린 삼신불도(三身佛圖)이다.
가로 3.15m, 세로 4.6m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이 삼신불도는 3폭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고 그 왼쪽에 노사나불을, 그 오른쪽에 석가를 배치하였다.
주존인 비로자나불은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을 입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의 손모양인 지권인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처럼 통견을 입은 노사나불은 양손을 위로 한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주존의 오른쪽에 위치한 석가여래는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쳤고,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노사나불과 석가여래의 아래에는 각각 두 명의 천왕이 있어 전체적으로 사천왕이 삼신불을 호위하는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통도사(通度寺) 대광명전(大光明殿) 삼신불도(三身佛圖)는 1759년(年) 영조(英祖)35년에 양공(良工) 임한(任閑)과 편수(片手) 하윤(夏閏), 옥상(玉尙), 수성(守性), 보관(普寬), 성익(成益), 상심(尙心), 약붕(若朋), 평인(平仁), 태일(太一) 등(等)에 의해 조성(造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석가,아미타,약사여래를 삼신불로 표현하였는데 비해 이 삼신불도에서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여래로 삼신불을 표현한 드문 예로서 미술사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통도사대웅전 및 금강계단 (通度寺大雄殿및金剛戒壇) 국보 제290호
현재 통도사에 남아있는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영역은 신라 선덕여왕
(善德女王) 15년(646)자장율사(慈裝律師)에 의하여 지어진 대웅전과 금강계단이다.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통도사 창건의 근본 정신은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이 있다.
현존하는 금강계단은 창건이후 수차에걸쳐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유사] 의 기록에 계단은 2층으로 위층 가운데에는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다 라는 기록을 통해 그 형태가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佛坐像)을 비롯하여 천인상(天人像) 신장상
(神將像)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웅전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것을 1645년(인조 23년) 우운대사(友雲大師)가
중건한 건물이다.
건립연대가 확실한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건축으로 지붕의 청동으로 만든 찰간(刹竿) 을
비롯하여 백자연봉과 무쇠와 청동으로 만든 기와 등은 일반건축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대웅전의 가장 큰 건축적 특징은 지붕모양이 T자 형이라는 특이한 구조와 함께 정면과
측면의 구분 없이 동(東). 서(西). 남(南) 모든 방향이 정면성을 보이는 독특한 방향성에 있다.
특히 내부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는데, 이는 대웅전뒤에 있는 금강계단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 연화문
청동으로 만든 찰간(刹竿), 백자연봉
지붕의 '수막새기와' 위에 '백자연봉'(연꽃 봉우리)라고 하는 장식이 있어서 특이합니다.
'백자연봉'은 단순히 장식요소로만 설치한 것은 아니구요, '숫기와'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위해
'수막새기와' 위에서 못으로 고정을 했는데, 그 못구멍과 못을 '백자연봉'으로 덮은 것입니다.
'방수'와 '미관'(장식)과 지붕의 '안전'을 확보한 고급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쪽 대웅전 현판
대웅전 주련
月磨銀漢轉成圓 (월마은한전성원) 달이 은하수를 맴돌아 둥글고 밝으니
素面舒光照大千 (소면서광조대천) 흰 얼굴 잔잔한 빛 대천세계(大天世界)를 비추네
連譬山山空捉影 (연비산산공착영) 팔을 벌려 산에 비친 달을 붙잡으려 하나
孤輪本不落靑天 (고륜본불락청천) 달은 본래 청천(靑天)에서 떨어지지 않고
默契菩提大道心 (묵계보리대도심) 묵묵히 보리(菩提) 대도심(大道心)에 계합(契合)하네.
정면 금강계단 현판
금강계단 주련
初設有空人盡집(초설유공인진집) 처음에 설한 유(有)와 공(空)에 모든 사람 집착하더니
後非空有衆皆捐(후비공유중개연) 뒤에 공(空)도 유(有)도 아니라 하니 사람들 모두 버리네.
龍宮滿藏醫方義(용궁만장의방의) 용궁에 가득한 경율론(經律論) 모두가 의사의 처방이요.
鶴樹終談理未玄(학수종담이미현) 학수(鶴樹)에서 마지막 설법도 현묘(玄妙)한 이치는 못 되네.
서쪽 대방광전 현판
대방광전 주련
楊柳稍頭甘露灑 (양류초두감로쇄) 버들로 머리 감고 감로(甘露)를 뿌리고
蓮華香裏碧波寒 (연화향리벽파한) 연꽃 향기 속에 푸른 파도가 서늘하네
七寶池中漂玉子 (칠보지중표옥자) 칠보 연못에 옥동자를 띄우고
九龍口裡浴金仙 (구룡구리욕금선) 아홉 용이 입으로 금선(金仙)을 목욕시키는 데
大聖元來無執着 (대성원래무집착) 대성(大聖)은 원래 집착이 없다네
북쪽 적멸보궁 현판
적멸보궁(주련)
示跡雙林問幾秋(시적쌍림문기추) 묻노니 쌍림에서 열반에 드신 지 그 몇 해인가
文殊留寶待時求(문수유보대시구) 문수보살 보배를 모시고 때와 사람을 기다렸네.
全身舍利今猶在(전신사리금유재) 부처님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
普使群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휴) 많은 군생들 예배하여 쉬지 않네.
적멸보궁 편액은 구하스님(1872~1965)글씨이다
명부전(冥府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명부(冥府)란 저승, 곧 지옥(地獄)을 말한다. 따라서 명부전은 저승을 이 땅에 재현한
불전(佛殿)인 샘이다. 불교에서 명부는 지장보살(地裝菩薩)이 다스리므로 명부전을
지장전(地裝殿)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명부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10대왕(冥府十王)이
지장보살을 보좌하여 저승 세계를 다스리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이곳 명부전 역시 중앙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좌우 각각 다섯명의 시왕 그림을
안치 하였다.
명부전의 신앙 중심인 지장보살은 석가가 열반(涅槃)에 든 다음 미래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고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여섯 세계(六道)를
왕래하며 모든 중생(衆生)을 교화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보살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도량(道良)으로 널리 이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장신앙이 삼국시대 이래로 널리 유행하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음력7월15일 백중일(百中日)에 이곳을 찾아 죽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기원 하고 있다.
특히 지장보살은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49재(薺) 때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이건물은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창건 되어 여러차례 중수를거쳤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화재로 불탄것을 1888년(고종 25)에 중건(重建) 하였는데
현재의 건물은 그때의 것이다.
명부전은 통도사의 세 개 영역 가운데 상위 영역(上爐殿)내에서 가장 위계가 낮은 건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이 명부전은 상위 불전인 응진전 보다 크고
화려한 다포계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이다. 아마 조선 후기의 중건 과정에서 원래의 형태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세존비각 世尊碑閣
금강계단 축대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고, 적멸보궁 내력을 소개한 글귀가 있다.
37조도품
봉발탑(奉鉢塔) 보물 제471호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발탑은 석가모니의 발우(鉢盂)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조물이다.
발우란 스님들이 공양할 때 사용하는 식사용기이자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전법(傳法)의 상징물이다.
이처럼 미륵불(彌勒佛)을 모신 용화전 앞에 봉발탑을 모신 것은 석가모니께서 입멸한 후 56억7천만년 후에 이 땅에 내려와 부처가 되라는 석가모니의 뜻을 받들어 미래에 출현하실 미륵불의 출세(出世)를 기다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형태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하대(下臺) 위에 간주(竿柱)와 상대(上臺)를 설치하고 그 위에 육중한 뚜껑을 지닌
발우를 안치하였는데 이러한 조형물은 국내에서 유일하다.
설법전
금강경독송과 나를 깨우는 108배
응진전(應眞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
응진전은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이 건물에 부처님의 16제자[나한 羅漢]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한은 범어로 ‘아르하트(Arahat)’ 라고 한다. 그것은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큼 수행이 있다는 뜻의 ‘응공’(應供), 진리에 따라 남을 깨우친다는 뜻의 ‘응진’(應眞), 더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의 ‘무학’(無學)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나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정진(精進)과 수행을 거듭하여 아집과 번뇌를 끊어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한 성자(聖子)를 말한다.
나한을 모신 불전(佛殿)으로는 응진전과 오백 나한전(五百羅漢殿)이 있다.
응진전에는 일반적으로 중심불과 그 협시불(脥侍佛)을 중심으로 16나한만을 모신다. 이곳 응진전도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 우 협시불인 미륵(彌勒) 및 제화갈라(提和竭羅) 보살상과 함께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16나한은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나한 중에서도 부처의 열반(涅槃) 후 중생에게 그 복덕(福德)을 성취하에 하고 올바른 법[정법 正法]으로 인도하겠다는 바람[원願]을 가진 성자들이다. 이들은 일찍이 많은 영험담을 통해 만간에서 신봉되어 나한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이 건물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의 제자인 16나한이 주인이다. 그러므로 응진전은 통도사의 세 개 영역 가운데 상위 영역[上爐殿]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의 옆에 위치하여 부터님을 보좌하고 있다.
이 건물은 1677년(숙종 3)에 지섬(智暹)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응진전은 상위 영역[上爐殿]에서는 대웅전 다음가는 위계의 불전이지만, 부처를 모시는 다른 불전보다 그 위계가 낮다. 따라서 이 영역 내의 다른 불전에 비해서 건물의 규모도 작고 장식도 화려하지 않다.
장경각
해장보각내의 자장율사 진영
해장보각내 장보고
산영각과 산신각
구룡지
구룡지에 관한 이야기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史蹟略錄]에 전한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문수보살은 승려로 현신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 과, 불두골과 손가락
뼈,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말했다.
< 이것들은 나의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 될 것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영취산의 옛 이름) 기슭에 독룡이 거쳐하는 신지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보안하면 삼재(세 가지 재앙 - 물, 불, 바람)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래도록 머물러 천룡이 되어 그곳을 옹호하게 되느니라.>
7년만에 귀국한 자장은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파하여 보다 많은 중생에게
극락왕생의 길을 전하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절을 세울만한 명당을 직접 찾아 다녔으나 여의치 않아,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날려 보내니 얼마 후에 나무오리는 입에 칡꽃 한 송이를
물고 돌아왔다.
이때가 엄동설한이었는데 칡꽃이 필 정도라면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고나무오리가 날아갔던 방향으로 찾아가서 영취산 자락에 도달했다.
거기에는 큰 연못이 하나 있고 주위에 있는 칡덩굴에는 꽃이 2송이 피어있었고
한 곳에는 나무오리가 꽃을 따 간 자리가 분명히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영취산은 진산鎭山으로 서북쪽은 막히고 동남으로 터졌는데
주위에는 송림이 울창하여 좋은 절터로 보였다.
그런데 못 속에는 용이 아홉 마리나 살고 있어 용을 그대로 두고 절을 지을
수는 없었다. 진鎭 진압할진 나아가다
자장율사는 용들이 순순히 물러가도록 정성을 다해 경을 외고 빌었으나
용들은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자장율사는 흰 종이에다가 불 화[火] 널자를 써서 무어라 진언을
외며 못 속에 던지고 지팡이로 못물을 휘저었다.
그러자 잔잔하던 못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못속에 그대로 있을 수 없어 8마리의 용들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중 3마리는 바위에 떨어져 죽고 5마리는 영취산 골짜기로 달아났다.
당시 부딪힌 바위에 용의 피가 낭자하게 묻게 되어서
후세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혈암龍血岩(지금도 통도사 들어가는 입구무풍교
다리 근처에 있다)이라 하고,
5마리 용이 달아난 골짜기를 오룡곡五龍谷이라고 부른다.
9마리 용 중에서 한마리는 달아나지도 않고 자장율사에게로 와서는
살려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자세히 보니 그 용은 눈이 멀었다.
자장율사는 이를 불쌍히 여겨,
< 눈까지 먼 너를 쫓아낼 수가 없구나. 너는 이 못에 살면서 절을 수호하도록
하라.>고 하니
눈먼 용은 감사하다는 표시로 머리를 두어 번 끄덕인 후 다시 연못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연못에 가로놓인 다리를 용의 항복을 받았다 하여 항룡교降龍橋라 하고
연못을 아홉마리의 용이 있었다고 하여 구룡지九龍池라고 부른다.
이 못은 아주 작은 못이기는 하나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데,
이는 눈먼 용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목조수통
사천왕문을 막나오려는데 삼보일배를 하고 계셨서 사진에 담아봤습니다.
준원이도 왔네요~~ 방가방가^^
5층석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도사 5층석탑
이 탑은 통도사 경내 어디에서나 예배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어 자연지형을 잘 이용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 곳에는 수백년 전부터 노출된 기단부와 부서진 석탑부재들이 흩어저 있었으나 복원되지 못하다가
월하 종정스님의 교시에 따라 1991년에 지금과 같이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원형복원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결실된 4, 5층 옥개석 및 탑신석을 새로 만들었고
특히 1층 탑신석은 발굴된 부재를 옛 그대로 써서 감실을 지닌 석탑으로 복원하였다.
1층탑신 내부에는 석함을 마련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법식에 따라 금동소탑 99기와 다라니를 봉안하였다.
또한 본래의 사리궁 안에는 경주 황룡사 옥탑 심초석 사리공에서 출현한 불사리 2과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이운하여 봉안하였다.
이 사리는 자장율사께서 당나라로부터 모셔온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로 금강계단 불사리와 동시에 모셔온 것이다.
2층기단 위에 5층탑신을 이룬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면석은 탱주의 표현없이 우주만을 모각하여 갑석과 동조하였다.
1층탑신괴임은 원래의 부재를 사용하였고 1층탑신 남면에 인왕상 2구를, 2층탑신 남면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2개의 부재를 사용하였으며 옥개받침은 모두 4단이다.
이 곳의 석탑은 그 유래가 자세하지는 않으나 노출된 기단부의 사리공과 옥개석등으로 보아
나말여초의 귀중한 석탑으로 추정된다
부도전
행불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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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룡지 설화가 재미있습니다.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꼼꼼히도 잘 찍으셨습니다감했습니다
많은공부 하고 갑니다. _()_
해탈심님!!! 행불할 수 있는 연습하갰습니다.
저희집 자판기 설치가 늦어져서 늦게 글 올림도 할 수있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동,감동~~~
부처님 계신곳 바라볼 수 있음에 행복입니다...()()()..._보현행합장_
해탈심보살님 구석구석 잘도 살피셨습니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 촬영도 일품이구요, 해박하신 공부에 감탄 할 따름입니다. 해탈심보살님이 항상 함께 하셔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복과 사업 번창을 기원드립니다. 늘 행복하세요
기행문!
한편의 논문을 보는 듯 자료 정리와 요소요소 세세한 곳까지 언급해 주셨네요.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며 이 글 보는 동안 고마움 가득하였답니다.
제 블로그로 가져가 보관하겠습니다.
사진보고 많은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