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경상남도 밀양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이른바 8박[1] 중 1번째로, 박씨 인구의 78%를 차지한다. 김해 김씨에 이어 본관별 인구로는 2위다. 이씨 최대 본관인 전주 이씨보다도 많으므로 본관 순위로는 김해 김씨-밀양 박씨-전주 이씨가 된다.
역사
밀양 박씨를 포함한 대부분의 박씨는 신라 건국자인 박혁거세의 후손들이다. 초창기 신라(서라벌) 6촌 백성들의 지도자로 선출된 박혁거세는 신라 시대 내내 신라인들의 시조로 숭상되어 왔다. 훗날 금척 전설이 생기고 김·석씨 왕들이 혁거세를 시조로 여겨 신궁에서 제사 지낸 것은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세종 때 경주 숭덕전을 세워 이를 이어왔고, 임진왜란 이후엔 박씨 선비들이, 현재엔 오릉보존회 등의 단체들이 해마다 봄, 가을에 모여 혁거세에 대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박씨는 신라 초기에 7명, 후기에 3명, 총 10명의 국왕을 배출하였다. 경주 김씨가 내물 마립간 때부터 왕위를 독점하면서, 오랜 기간 왕을 배출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왕비는 꾸준히 내왔고, 고위급 귀족으로써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박혁거세의 후손은 크게 절대다수인 일성왕계와 소수인 파사왕계로 나뉘는데, 밀양 박씨는 그중 일성왕계로 분류되며 경명왕의 제1왕자인 30세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忱)을 도시조로 한다.
신라 말엽부터 경주 땅은 박씨의 영향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신라 말기의 영토가 경주 일대로 축소되어 김씨들의 기반이 거의 날아갔는지 이 시점부터 박씨 왕들이 새로 나오기 시작했고, 김현승의 김씨 복위반란으로 경주 안에서 시가전이 일어났지만 박씨인 경명왕이 이를 진압해서 지배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씨 왕들의 무덤이 몰려 있는 경주 남산 서쪽면 배동 일대에 경애왕릉, 배동 삼릉, 오릉, 박씨의 성지인 나정과 경애왕이 피살당한 제사용 연회공간인 포석정 등 박씨와 역사적 연관성이 높은 유적들이 대거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쪽 구역이 박씨와 특별히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당시에 왕위를 상실한 경주 김씨에서 박씨가 왕위에 오른 것에 불복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까지 벌어졌던 것을 보면, 이 당시라고 해서 권좌가 확고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개국 시점에, 밀성대군이 아버지 경명왕으로부터 분봉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밀양과 경주시 일부 등 영남에 기반을 둔 신라계 유력 호족 중 하나였고, 밀성대군의 아들 박욱이 기인제도로 삼한벽상공도대장군으로 고려 조정에 출사해 개경에 진출했다고 한다.
족보에 의하면, 박욱의 7세손 박언부가 고려의 황금기였던 문종 치세에 태사중서령을 역임하고 문하시중을 지냈고, 이후 좌복야 박언인, 밀직부사 박양언, 판도판서 박천익, 삼사좌윤 박을재, 도평의사사사 박언상 등이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대몽항쟁 이후, 고려 정부가 원나라의 식민통치를 받아들였을 때 전라도 진도군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경상도 밀성군(현재의 밀양) 군민들이 고을 부사를 죽이고 인근의 청도군까지 세력을 넓힌 후 삼별초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건이 벌어진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때 밀양 박씨가 그 배후세력의 핵심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당장 드러난 주동자 5명(박평, 박공, 계년, 방보, 박경순) 중 3명이 박씨다. 삼별초는 진압되고 이후 밀성은 반역의 땅으로 낙인되어 귀화부곡(歸化部曲), 즉 천민들이 사는 땅으로 바뀐다.[7] 이 흔적은 현재도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바로 밀양 바로 서쪽의 창녕군 부곡면, 즉 부곡하와이가 그것이다. 이후 복권되지만, 군이 현이 되고 다시 군이 되는 등 원간섭기에 꽤나 수난을 겪는다. 그런 와중에도 오히려 밀양 박씨는 권문세족들이 강성하던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인재들을 배출했고, 절묘하게도 반원자주를 국가정책으로 밀었던 공민왕 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이 시기의 주요 인물로는 충렬왕 때 급제한 후 내부시승에 임명된 충헌공 박척, 판전교사사로 봉해지고 원나라로부터 문하찬성사로 증직받은 박원, 전법판서 박천명, 사헌부 규정 박현, 대제학 박중미, 박광후, 박윤겸, 판도총랑 박인기, 공민왕 때 장원급제한 예문관제학 겸 성균대사성 박의중, 고려군 1만 명을 이끌고 왜구의 전초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박위,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박득중, 고려 때 호조전서였으나 조선 개국 후 두문동 전설에서 죽었다는 박침, 박침의 아들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참찬의정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세종에게 딸을 후궁으로 시집보낸 박강생 등이 있다.
고려 말 정국군파 파시조 박위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는 군사 1만 명과 전함 100척을 동원했는데, 기록상 고려 중앙군이 긴 전란으로 궤멸되고 다른 신흥무인들이 정벌을 주저할 때, 박위와 박천 등 개인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 먼저 출항하고 여러 다른 신흥무인들의 합세를 나중에 받은 것으로 보아 당시 밀양 박씨가 고려 내 크고 작은 신흥무인들 사이에서 구심점이 되어 세력을 이룰 정도의 경제, 군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주목할 만한 점은 정벌 이후 류큐의 오키나와 왕국이 고려에 신하가 되려고 특산물 등 조공을 보냈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조공을 바쳤으며 이 시기부터 조선과 오키나와는 교류하기 시작했고, 낙후되어 있던 오키나와의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 규슈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의 정복으로 일본 영토가 되기 전까지 200여 년간 조선과 교류한다.
한편 고려 말 당시에 규슈 지방 토착 봉건 영주들이 정벌 얼마 후 사신을 보내 고려에 저자세를 취하며 접근해 왔으며 1390년엔 규슈절도사가 조공을 바쳤던 기록이 있고, 1391년엔 규슈에서 고려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성과들을 거두었다. 이들은 일본 남조 잔여세력으로 규슈는 고려 말 왜구의 발흥과 직접 연관있는 아지트였다. 이들은 꽤나 무장한 정규군이면서도 교토 인근까지도 약탈하는 등 자국내에서도 상당히 악명 높은 해적이었는데, 일단 머리를 숙여온 것이다. 이 시기 대마도 정벌은 확실히 밀양 박씨의 공이 크다.
고려 말 규정공파 박현의 후손들이 조선조에 유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고 현재 각파별 인구면에서도 가장 많다.
밀양 박씨는 조선 개국 이후 518년을 통틀어 문과 급제자가 261명, 무과 급제자 1125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문형) 2명, 청백리 2명, 공신 6명, 생원진사 756명을 배출하는 등 대단한 가문적 행보를 선보였다. 260명을 넘는 문과 급제자 숫자에 비해 정승은 광해군 때 영의정인 숙민공 박승종 한 명뿐이다.
밀양 박씨 집성촌은 경주 이씨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 포진되어 있으며, 특히 부산광역시나 전라남도 여수시, 목포시나 전라북도 군산시 부근으로 갈수록 전체 인구에서 밀양 박씨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다른 본관에 비해 집성촌이 남한 지역에 편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이북 지역에도 집성촌이 많은 전주 이씨나 경주 김씨와 대비된다.
현대의 인물 중에서는 두산그룹 일가와 포스코의 창업자인 박태준, 범금호가 등이 밀양 박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