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며칠 앞두고 종암동 내가 살던 작은집에서 손윗동서가 이사를 했다. 그 집은 내가 생애 처음으로 마련했던 집이다. 작은집은 전세 놓고 수유역 근처로 옮겨 앉았다. 부족한 돈은 전세자금을 대출받아 이십여 년 만에 이사를 하는 것이다.
그 무렵 쌍문동에서 단칸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당시 가족은 두 딸을 포함하여 네 식구로 아이들이 어려서 비교적 단출했다. 전세계약이 만료되어서 다른 셋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종교단체에서 같이 활동하시던 아주머니께서 종암동에 작은집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사라고 권유하셨다. 그 집은 무허가에 대지는 시유지며 여섯 평인데 화장실, 부엌을 포함하여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뜻밖의 제안에 전세로 다시 가느니 협소하지만, 내 집을 장만하기로 하기로 하였다. 공휴일에 아이들과 같이 종암동 작은집을 보러 갔다. 좁은 골목은 차량도 드나들지 못한다. 골목 안에 있는 조그만 가게를 살림집으로 고친 집이었다. 부족한 돈은 지인들에게 빌렸지만, 그래도 부족하여 회사 사장님에게 말씀 드렸더니 사모님이 고맙게 마련해 주셨다. 집안 살림살이를 들이고보니 전에 살던 전셋집보다도 훨씬 비좁았다. 네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그래도 내 집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궁여지책으로 가게 문으로 이용하던 함석 문을 철거하니 20cm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회사동료의 도움을 받으며 길 쪽으로 벽돌을 쌓고 알루미늄사시로 문을 내었다. 남들이 보면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두 딸의 재롱을 보는 즐거움에 작은 줄도 모르고 잘 적응하며 지냈다.
어느 날 의정부에서 사시는 부모님께서 ‘월세보증금까지 다 쓰시고 길거리로 내앉게 되어, 작은집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가 왔다. 합치기에는 절대적으로 형편이 안 되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과 막내아우를 노숙자로 내 몰 수는 없었다. 집사람도 사정을 이해하여 모시기로 하였다. 이삿짐을 많이 정리하고 남아있는 짐들은 처마 밑까지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결혼 후. 일 년은 부모님과 동생들과 상계동에서 전세로 살았는데 뜻한 바가 있어서, 아내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분가를 결심하였다. 분가하면서 우리는 그 일부를 갖고 나와서 지인한테서 부족한 돈을 빌려 산동네에 방 한 칸 전세로 새살림을 시작하였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방이 두 칸 있는 전세를 얻어서 사시는데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만에 전세는 월세로 바뀐 상황으로 되고 말았다. 부모님과 딸들은 방에서 간신히 생활하고 우리 부부는 주방 쪽에서 겨우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다. 막내 동생은 할 수 없이 근처 여인숙에서 잠을 자야 했다. 이런 삶을 더는 지속할 수 없어서 무리해서라도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친지한테 부탁해 불광동 산동네에 대지 삼십여 평 가까이 되는 방 셋이 있는 집을 계약했다. 조금 넓은 집을 장만해 부모님을 편히 모신다고 생각하니 산동네라도 흐뭇했다. 그 당시는 부동산경기가 아주 좋은 시절이었다. 부동산사무실에 시세를 물어보니 그 사이 많이 올라 구입한 가격보다 배는 올라서 더 받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무렵 바로 윗동서가 전세방을 구한다는 소식을 아내한테서 들었다. 남한테 매매하느니 동서한테 넘기자고 제안해 시세에서 일부를 깎아주고 불광동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종암동 작은집은 주인이 바뀌었다. 우리가 그랬듯이 조카들이 크기 전에 당연히 집을 정리하고 더 넓은 곳으로 이사 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조카들이 초등학생이 되어도, 중학교에 들어가도 그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처가 형제들을 비롯하여 친지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조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며 힘들어했다. 우리 부부는, 남의 일 같지 않아 만날 때마다 걱정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던 중에 동서의 건강마저 나빠져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고 형편은 점점 악화 되어서 안타까움이 더해갔다.
처가 형제들은 우애가 퍽 좋다. 모든 일에 자기 일처럼 나서서 걱정해 주고 힘을 모은다. 그래서 김장철이 되면 집집이 돌아가며, 왁자지껄 웃음까지 함께 버무려 넣는다. 유독 윗동서네 만큼은 딸들하고 한다고 사양을 한다. 하지만 모두 그 사정을 알고 있으니 그쯤에서 물러난다.
이번 추석명절 전에 동서 집에 들렀더니 조카들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한 조카들이기에 찡한 가슴을 억누르며 애써 웃으면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동서내외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동서가족의 소망은 재개발되어서 임대주택이라도 분양받는 것이다. 주변은 민간업체가 건설하는 아파트는 빠르게 완공되어간다. 여기는 위치상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평지다 보니 외부로부터 보이지 않는 곳이다. 산동네라면 시각적으로 보기가 좋지 않아서 여론에 밀려 우선적으로 개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여건에서도 오래전부터 재개발된다고 소문만 무성할 뿐,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이곳만은 요지부동이다. 정부의 관련부서는 보이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챙겨서 힘든 서민들을 위한 올바른 주거정책이 반영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동서가족이 집들이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누구보다도 학수고대하고 있다.
아련한 추억이 묻어있는 작은집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족이 큰 불편 없이 지내는 지금의 우이동 집이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집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감사드린다.